-
-
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평점 :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는 몇 년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처음,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 라는 짧은 문구를 접했을 때 깜짝 놀랐다. 진화(進化)가 진보(進步)가 아니라면, 나아간다(進)는 말은 무슨 뜻일 수 있을까?
몇 권의 책을 통해 굴드라는 이름과 그의 진화론 해석에 대해 간간이 알게 되었는데, 이차적으로 알게 된 대개의 책에 대해 그렇듯이 ‘아, 읽어봐야 하는데...하는데...,’ 하고 몇 해를 넘겼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치 직접 읽어본 것처럼 ‘진화란 그런 것이 아니야. 진보가 아니라고. 다윈 이론의 핵심은 변이와 다양성이지. 흥흥’하고 알은 체를 했다. 간접적인 앎을 이렇게 확신해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르는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번번이 그러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주장이었다. 사실 생물학계에서 굴드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소수의견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풀하우스』의 논지는 내게 충분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물론 과학이란 대중에게 설득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나는 독자들이 다윈 혁명의 깊은 의미를 잘 이해함으로써, 다양한 개체들에 의해 이루어진 전체가 자연의 참모습임을 깨닫게 되기 바란다. 즉 이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변이 그 자체>로 세계가 이루어져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p13~4” 제목 풀하우스는 말 그대로 변이에 의해 다양해진 각종 개체들로 가득 찬 세계를 가리킨다.
먼저 다윈의 발견이 ‘다윈 혁명’ 이라 칭해질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다윈에게 ‘혁명’을 붙인 것은 굴드가 아니라 프로이트다. 프로이트는 과학의 역사에서 인간에게 굴욕을 안겨 준 세 가지 혁신을 꼽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다윈, 그리고 프로이트 그 자신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그 후계자들은 “지구가 변두리 항성에 딸린 작은 행성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냄으로써 인간이 유한한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믿음을 붕괴시켰다. p33” 두 번째 타자 다윈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창조물이라는 인간의 자부심을 한방에 박살내 버렸다. 인간은 그저 진화의 끄트머리에서 발생한, 한갓 동물의 후손일 따름이었다. 이제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은 그 어떤 동물도 가지지 못한 인간의 이성이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이성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산산이 깨뜨렸다. 인간은 이성의 주인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여기에 굴드는 네 번째의 혁명을 보탠다. 고생물학자들이 발견한 이른바 ‘깊은 시간’ 이다. “고생물학자들이 인류의 존재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등장했다는 사실을 밝혀내자 프로이트적 혁명이 일어났다.p34”
이 네 번째 혁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변질된 다윈주의’ 이다. 다윈에 대한 오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가 진화의 마지막 순간에 등장한 것에 아우라를 부여하는 시나리오가 쓰인 것이다.
“이 새로운 이야기는, 진화에는 예정된 결과를 향해 진행되는 근본적인 경향 또는 추진력이 있으며, 그 힘이 생명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의 결과(인간)를 낳았다는 오류를 기반으로 한다. 이때 근본적인 경향 또는 추진력이란 물론 진보를 뜻한다. 이 이야기는, 해부학적 복잡성, 신경의 정교함, 습성의 다양성과 유연성 등 호모 사피엔스를 생명 전체의 꼭대기에 올려놓기 위해 명백하게 날조된 온갖 기준으로 생명의 역사를 관찰하고, 생물이 틀림없이 어떤 증가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생명의 역사를 진보로 정의하려는 것이다. p36”
굴드가 ‘명백하게 날조된’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 사실들’ 이다.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하등 생물에서 고등 생물로 진화하는 그림들은 생물학의 기초 중의 기초이다. 굴드는 이것들을 모두 ‘거짓말’ 이라고 단언한다. “진화의 방향을 인간을 향해 예정된 진보p37” 로 만들기 위한 날조라는 것이다.
만약 진화를 진보로 해석하는 것이 순전히 날조라면 우리는 어떻게 ‘진화≒진보’ 라는 등식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인간은 누가 보더라도 가장 진보된 생물이 아닌가?
이 책은 사실 초반 일부분만 재미있고 나머지 대부분은 지루하거나 어렵다. 진화생물학자인(물론 다른 세부전공으로도 불릴 수 있지만) 굴드는 일반인을 위해 이 책을 썼지만 기존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이론을 증명 없이 자기주장만으로 쓸 수는 없다. 그런데 과학적 증명이란 것이 일반인이 보기에는 너무 시시콜콜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굴드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실제로 맞는지 틀렸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그럼에도 과학적 증명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 아무리 어렵다 해도 저자든 독자든 피해갈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독자는 어물쩍 책장을 넘길 수도 있다. 그냥 저자를 믿기로 하고 결론만 읽어도 되긴 된다. 어차피 읽어도 모르고 안 읽어도 모르니까 결과는 같을 수도 있다. 나도 긴가민가하며 읽었다. 누군가 진화생물학의 권위자라고 하면서 굴드를 조목조목 반박한다면 또 그럴 수도 있겠네, 할 것이 틀림없다. 내가 이 책에 매력을 느낀 것은 그 결론 때문이지 과학적 증명이 훌륭해서는 아니다. 그러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냥 훌륭한 논증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대부분이 이런 논증들인데, 이걸 콕 집어 정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충 말해보자면 이렇다.
굴드는 먼저 어떻게 우리가 진화를 진보라고 잘못 인식하게 되었는가를 ‘중심경향성’이라는 통계 값을 들어 설명하고 진보의 증거로 제시된 교과서적 자료들이 모두 편향된 자료에 지나지 않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야구를 좋아하는 미국인답게 4할 타자의 절멸에 대해 아주 길고 길게 분석하면서 진화의 ‘오른쪽 벽’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어서 더 중요한 ‘왼쪽 벽’ 개념을 설명하는데, 단순무식하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생명체가 더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고등 생물로 진화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생명의 출현이 가장 단순한 구조인 왼쪽 벽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 단순한 구조인 왼쪽 벽은 막혔으니 극히 일부라도 더 복잡한 구조인 오른쪽으로 나아간 종들이 생기고, 그것이 전체 생물이 복잡성을 향해 진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생물은 더 복잡해 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테리아이다. 굴드는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박테리아가 지구의 주인이었고 지금도 주인이라고 힘주어 설명한다. 굴드가 말하는 ‘벽’이란 한계 값을 의미한다. (...... ㅡ.ㅡ;;)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어쨌든 결론을 말하자면 이것이다. “즉 변화의 역사를 <무엇인가>가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풀하우스)에 걸쳐 일어나는 변이의 확장이나 위축으로 보아야 한다. p203”
뭐 이런 내용들을 갖가지 자료와 분석과 증거를 들이대며 주장한다. 그러니 이런 것은 나 같은 일반 독자가 요약할 내용은 아님이 틀림없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다윈이 진화를 진보로 보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하면 바로 진보를 떠올리지만 그건 다윈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다윈이 진보를 진화의 예정된 결과로 보기를 거부한 것은 그의 다른 과격한 생각들 중에서도 가장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라마르크를 비롯한 19세기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진보를 진화의 핵심으로 보는 훨씬 더 구미에 맞는 이론을 제시했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생물학적인 변화를 진보와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진화evolution>가 다윈이 말한 <변이를 동반한 상속 decent with modification>을 지칭하는 단어로, 우리의 언어에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정식 생물학 용어가 되면서 <진화>는 영어의 일상 용법에서 진보(단어 자체의 뜻은 펼침 unfolding)를 뜻하게 되었다. 다윈은 처음에는 이 단어 사용을 거부했다. 그의 이론은 특정한 변화의 결과 전반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식의 개념을 전혀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화>라는 단어는 『종의 기원』 초판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다윈이 그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871년에 발표한 『인류의 유래』에서였다. 다윈은 <진화>라는 단어를 결코 좋아한 적이 없으나 스펜서가 쓴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랐을 뿐이다 p190”
다윈은 실제로 이런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더 고등하거나 더 하등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p190” 동료 학자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렇게 썼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진보를 향한 내재적인 경향 같은 것은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네. p191”
그렇다면 다윈이 『종의 기원』 에서 주장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연선택 이론을 제안하면서 세 가지 사실을 입증하려고 했다.
첫째, 모든 생물은 생존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자손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자손들은 다 다르며 변하지 않는 원형에서 찍어낸 복제품이 아니다.
셋째, 이 변이들의 적어도 일부는 미래 세대에 전달된다. (다윈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몰랐다.)
이로부터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자연선택의 원리가 유도된다.
“대부분의 자손들이 죽어야 한다면(모두가 제한된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종의 개체들은 서로 다 다르므로 평균적으로(항상 그런 것이 아니고, 통계적으로 봐서) 생존자들은 국지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우연히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다. 유전이 일어난다면 살아남은 개체들의 자손은 성공적이었던 부모를 닮을 것이다. 오랜 세월 이렇게 유리한 변이가 축적되면 진화적 변화가 일어난다. p192”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국지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우연히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 라는 구절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적자생존’의 적자, 즉 ‘적합한 자’는 타 개체와의 목숨을 건 투쟁에서 살아남은 승리자가 아니다. 다만 국지적으로 어떤 환경의 변화가 발생했을 때 그 변화에 ‘우연히’ 적합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던 한낱 변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적자란 그 전과는 달라진 환경에 딱 적합했던 운 좋은 개체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인간은 모두 다 예측할 수 없다. 갑자기 엄청난 운석이 우리나라를 강타할 수도 있고, 인간이 모르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멸종시킬 수도 있다. 인간의 유전자가 수 백 만년을 털끝만큼의 변이도 없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그대로만 전달되어 왔다면 현생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치명적인 환경 변화에도 글자 그대로 전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변이가 있었고, 대다수의 개체들과 다른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 그런 변화된 환경에서 살아남았기에 인간은 지금까지 지구의 지배자연 할 수 있는 것이다. 굴드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이 행성의 지배자였던 적도 없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에도 아닐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척하며 살고 있다. 가끔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부리 색깔이나 꽁지의 모양 따위 사소한 차이를 가진 비슷비슷한 새들이 각기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서, 쟤네들은 왜 저렇게 변종이 많아 싶지만, 그 변이야말로 지금껏 그들이 생존해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비밀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그냥 넘어가기 쉽지만 주목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단어는 ‘국지적’ 이란 말이다. “자연선택은 지역적인 적응을 강화시킬 뿐이다. 적응 양상은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한 적응도 어디까지나 지역적이고 일반적인 진보나 복잡화 경향의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p194”
예를 들어 코끼리와 매머드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매머드는 갑자기 추워진 북극권에서 살아남았던 털이 긴 코끼리의 후손이다. 어떤 코끼리들은 보통의 코끼리보다 털이 길었고 그 긴 털이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아주 적합했다. 북극에서 보통의 코끼리는 멸종했지만 매머드는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적도에서 지금도 늠름하게 군림하는 코끼리가 매머드보다 열등한 것은 아니다. 코끼리가 진보하여 매머드가 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사실 한때 운 좋게 선택되었던 그 매머드는 지금 멸종 상태다.) “털이 난 매머드가 털 없는 코끼리보다 전우주적으로 더 낫거나 전반적으로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매머드의 <향상>은 전적으로 기후가 추워진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자연선택은 눈앞에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한 적응만을 낳을 수 있다. p193”
결론은 처음에 말했듯 ‘진화란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라는 것이다. 코끼리는 털이 없는 코끼리와 털이 있는 코끼리로 다양하게 진화했을 뿐 서로 우열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둘이 피터지게 싸워서 북극을 차지한 것이 매머드였던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은 것은 느닷없이 생물학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은 아니다. 진화학자들이 진화를 뭐라고 정의하든 그것이 생물학계 내의 논쟁이라면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윈의 진화론은 초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무한 경쟁이나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는 주장의 강력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 유명한 다윈의 진화론을 읽어봐! 약한 것들은 도태되고 강한 것들만 살아남는 것이 자연의 섭리야!!’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진화론으로 슬며시 대체되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의 대표자는 허버트 스펜서이다. 진화론은 다윈의 창작품이 아니다. 다윈 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이전에 진화론이 슬슬 유행을 타기 시작했고, 이 생물학적 이론을 사회학에 접목시켜 폭발적 관심을 일으킨 사람은 스펜서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 5판에 가서야 이 유행하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적자생존이라는 말도 스펜서가 창안해 낸 것이다. 하지만 스펜서 역시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을 자신의 사회진화론을 정교히 다듬는 근거로 이용했다. 동시대에 살았던 다윈과 스펜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은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과 스펜서의 진화론은 완전히 다르다. 어쩌면 서로 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스펜서는 사회진화론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옹호하였다.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것은 자연과 사회를 통틀어 일종의 섭리라는 논거를 내세웠다. 다윈은 적자생존을 그렇게 정의하지 않았다. 강한 자가 적자가 아니라 우연히 살아남은 자가 적자이다. 여기에는 개체간의 경쟁도 침략도 살육도 없다.
이것이 끝이면 문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 것이다. 스펜서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윈의 진화론을 오용했다고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식민지배의 수모를 겪은 민족으로 스펜서는 나쁜 놈으로 몰아붙이고, 다윈은 다양성으로 가득한 풀하우스를 지지했다고 하면 깔끔한 결론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굴드가 털어놓은 다윈의 이면은 스펜서만큼 어둡다.
19세기 후반은 이른바 제국주의 시대이다. 그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었던 것이 영국이고 다윈은 그 영국의 대지주 집안 출신이다. “게다가 다윈은, 진보를 존재의 근본 교의로 삼고 산업화와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 제공하던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엄청난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국가에서 최고위급 귀족이 어떻게 영국 사회의 번영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론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자연선택은 국지적인 적응을 가져다주지 일반적인 진보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지적 요구와 사회적 요구의 상반된 요구들을 어떻게 타협시켰을까? p195”
결론만 말하면 다윈은 그의 위대한 이론에 오점을 덧붙였다. ‘생태학적 이야기’ 몇 가지를 덧붙임으로써 적자생존과 생존경쟁을 구분했다. 자세한 내용은 어려우므로 생략하고, 대충 이런 땜빵으로 다윈은 지적 요구도 사회적 요구도 충족시키려 했지만 그 결과는 명백한 모순이었다. 이 모순 때문에 다윈 연구가들은 엄청난 노력을 낭비하고 폭발적인 논문을 발표해가며 서로 싸웠다. 다윈에 대한 오해는 다윈 자신이 초래한 면이 없지 않은 것이다. 다윈의 모순된 모습에 대해 굴드는 그 자체가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자기 이론의 논리와 사회의 요구 사이에서 결단을 못 내리고 씨름했던 다윈의 개인적인 고충은, 진보라는 것이 우리 문화에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진보라는 족쇄를 풀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낸 다윈마저도 우리 문화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진보라는 가치관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는데 오늘날 우리라고 별 다를 수 있을까? p201”
과학자가 아닌 맘 편한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다. 다윈이 진짜 무엇을 말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기에 다윈의 것 중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지지하면 된다. 다윈은 완벽하지도 않았고 일관되지도 않았다. 과학자의 양심과 사회적 욕망 사이의 갈등에서 그가 타협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과학자의 양심만 선택하면 된다. 그의 과학이 오늘날의 과학에 위배되지 않고 그의 과학이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면 말이다. 그의 올바른 진화론을 가지고 오늘날 강요되고 있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게임을 비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굳이 다윈을 일관된 영웅으로 신격화할 이유는 없다. 그는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시대에 영화를 누린 영국인인 동시에 그의 과학적 발견으로 시대의 논리에 구멍을 뚫은 혁명가이기도 하다. 왜 그럴 수 없다는 말인가? 그가 한 것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가 옹호하는 것은 인간 다윈이 아니라 다윈의 이론 그 자체다. 다시 한 번 말해보자면,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