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혁명과 남북전쟁
<아틀라스 세계사 p86>
15세기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를 시작으로 유럽인들은 아시아에 가기 위해 바다로, 바다로 나아갔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이르는 동남 항로(붉은색)를 개척하자 에스파냐는 서부 및 서남 항로(보라색)를 통해 중국과 남아시아에 도달하려고 했다. 물론 에스파냐인들이 도착한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서인도 제도와 카리브해 였다. 그들은 1520년대가 되어서야 그곳이 신대륙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자신들이 발견한 해로를 다른 유럽인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북서쪽 바다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 제3의 항로(녹색)였다. 그들은 아시아로 가지는 못했지만 카리브해와 북극 사이에 또 하나의 대륙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메리카 북동부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남아메리카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식민지인데 반해 북아메리카가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로 출발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북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은 기후가 나쁘고 토양이 척박해 처음엔 유럽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1604년 프랑스가, 1607년 영국이, 1624년 네덜란드가 정착지를 건설하면서 유럽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영국은 최초의 정착지에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를 기념하여 버지니아란 이름을 붙였다.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농사지을 땅과 일자리, 또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험난한 대서양을 건너왔다. 프랑스는 모험을 찾아 떠난 남성들이 중심인 반면 영국은 정착을 위한 가족단위의 이주민들이 주를 이루었다. 농장을 경영할 땅만을 원했던 영국인들은 원주민을 추방하거나 몰살시켰다. 초기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짓는 법과 겨울을 나는 법등을 배웠지만 인디언들은 친절의 대가로 목숨을 잃거나 땅을 빼앗기고 서쪽으로 쫓겨났다.
유럽 강대국들이 모두 참여했다는 7년 전쟁(1756~1763)은 오스트리아가 왕위계승전쟁(1740~1748)에서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 지방을 되찾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자라는 이유로 왕위계승을 반대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계승전쟁을 통해 슐레지엔을 차지했다. 슐레지엔은 철광과 석탄이 풍부하여 섬유업과 광업 등이 매우 발달한 요충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신, 오스트리아 영토 대부분에 대한 상속권을 인정받았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랑스는 프로이센을, 영국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슐레지엔을 놓고 다시 맞붙은 7년 전쟁에서는 동맹의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프랑스가 오랜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고 반대로 영국은 프로이센을 지원했다. 러시아가 중간에 프로이센 편을 들면서 전쟁은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에 대한 영구 소유권을 획득했다. 7년 전쟁의 승리로 프로이센은 독일 근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유럽의 신흥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아틀라스 세계사 p95>
7년 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해외 식민지를 놓고 프랑스와 치열하게 대립하던 영국이 프랑스를 꺾고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의 통치권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의 군사적·정치적 권리를 잃고, 해외 식민지 패권 다툼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제 영국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제국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이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직후부터 미국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북아메리카에 대한 영국의 기본 정책은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며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7년 전쟁 이후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의 재정은 유럽과 식민지에서의 계속된 전쟁 때문에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영국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식민지를 통해 메우려고 하였다. 설탕세, 인지세, 차세 등 각종 세금을 식민지에 부과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이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조절하기 위해 조지 1세가 발표한 서부개척 금지령도, 영토 확장을 기대하며 7년 전쟁 동안 영국을 지원한,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크롬웰이 실시한 항해법이 엄격히 적용되면서 경제적 이윤을 침해당한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더욱 증폭되었다.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유명한 논리를 펴며 영국에 저항하였다. 영국은 차세만 제외하고 다른 상품의 세금을 폐지하는 등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1773년에 ‘보스턴 차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이 팔지 못하고 있던 다량의 재고 차를 차세를 붙여 식민지에 팔려고 하자 인디언처럼 꾸민 식민지인들이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모두 바다로 던져버렸다. 중과세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불만을 타협을 통해 해결하려던 영국도 이번에는 강경 대응에 나섰다.
<아틀라스 세계사 p112>
상황이 심각해지자 13개주의 식민지 대표들은 1차 대륙회의를 갖고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영국과 13개주 사이의 첫 전투는 1775년 렉싱턴 전투이다. 미국독립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3>
2차 대륙회의 후, 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지의 대표자들이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미국 독립 기념일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로부터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다 ……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독립선언문>"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로크의 사상이 깊이 반영된 선언문이다. 인민의 동의에 의해 만들어진 권력이 인민의 생명과 소유권을 보호하지 못할 때 인민은 권력에 대해 저항할 권리가 있다. 한마디로 우리 재산에 손대면 죽어!, 가 아닐까? ^^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3>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로서는 복수혈전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이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하고 나섰다. 프랑스는 또 한 번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으며 미국의 승리에 일조하였다. 그러나 재정 악화에 발목 잡힌 프랑스는 곧바로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워싱턴이 이끄는 미국 독립군은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을 물리쳐 승리의 계기를 잡았다. 1783년 파리에서 강화조약을 맺고 드디어 미국의 독립을 승인받았다.
1789년 제헌헌법이 비준되고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한 세계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3개주가 자치권을 가진 연방정부 형태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91>
19세기 들어 미국은 서부로 영토를 크게 넓혀 나갔다.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를,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멕시코를 침략하여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를 강탈하였다.
<말랑하고 쫀득한 미국사 이야기>
미국의 영토가 엄청나게 늘어남에 따라 이곳에 살고 있었던 인디언들은 쫓겨나거나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동부에서 쫓겨났던 인디언들은 다시 눈물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쫓겨 갔던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미국의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북부의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남부는 여전히 전통적인 면화 농업이 주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공업의 북부’와 ‘농업의 남부’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북부는 선진 유럽에 비해 뒤늦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호무역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강력한 연방정부를 원하였다. 남부는 우수한 품질의 면화를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고, 유럽의 질 좋고 값싼 공산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자유무역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남부는 연방정부보다는 주정부의 자치권이 큰 정치체제를 원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산업화에 필수적인 요건 중 하나는 자유로운 노동자이다. 북부는 값싼 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해 노예해방을 원하였다. 그에 반해 대농장을 경영하는 남부로서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고된 노동을 시킬 수 있는 노예가 꼭 필요했다. 미국의 노예해방은 인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남북의 상반된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첨예한 사회적 문제로 부상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92>
1860년 노예해방을 지지하던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링컨은 공화당이 배출한 첫 번째 대통령인데, 당시 공화당은 주로 북부의 백인과 남부의 흑인이 참여하였고, 민주당은 남부의 백인이 주를 이루었다. 초창기 두 정당의 성격은 현재의 공화당과 민주당과는 아주 달랐던 것 같다. 링컨은 노예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덮어둘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링컨에게 중요한 것은 노예문제 보다 연방의 유지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하지만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 연합은 연방을 탈퇴하였다. 타협이 불가능한 남북의 대립은 결국 남북 전쟁으로 치달았다. 1861년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북전쟁 중에 북부는 노예해방을 선언하였다. 초반에는 남부가 우세하였지만, 노예해방 선언과 흑인들의 군 입대 허용으로 북부가 전세를 뒤집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865년 북부가 승리하고 4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북부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보다 경제적 우위에 있었다. 남북전쟁의 결과 자본주의적 경쟁을 신봉하는 도시적이며 산업화된 북부의 생활양식이 미국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양키 만세 !^^;;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남북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다. 1869년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되었다. 광대한 영토는 철도에 의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였고 엄청난 자원과 흑인들의 값싼 노동력이 철도를 따라 어디든 공급되면서 미국은 마침내 유럽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공업국이 되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트러스트, 카르텔 등을 통해 독점 자본가들이 등장하였다. 카네기, 록펠러, J.P 모건 등의 자본가들은 경제는 물론 정치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독점 자본들은 일국을 넘어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라틴아메리카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를 흐르는 리오그란데 강을 경계로 북쪽은 앵글로아메리카, 남쪽은 라틴아메리카로 나뉜다. (파나마지협을 경계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나누기도 한다.) 라틴아메리카는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제도, 남아메리카를 포함하며 중남미라고도 불린다. 지역은 대부분 에스파냐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지금도 에스파냐어가 가장 많이 쓰인다. 에스파냐어와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는 로망스어로 분류되는데, 로망스어의 뿌리는 라틴어에 있다. 라틴아메리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물론 라틴아메리카는 로마와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55>
16세기 아스텍과 잉카 제국을 멸망시킨 에스파냐는 멕시코에서 안데스 산맥에 이르는 넓은 땅을 손에 넣었다. 에스파냐인과 함께 온 전염병과 에스파냐의 총칼에 의해 원주민 인구의 90%정도가 죽음을 당했다. 대륙의 인구가 급감하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데려와 일을 시켰다. 라틴아메리카는 원주민 인디오와 유럽 백인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에 더하여 그들 사이의 혼혈 등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물론 평등한 다문화 사회가 아니라 인종에 따른 극심한 차별이 존재하는 억압적인 사회였다.
식민지 지배가 장기화되자 라틴아메리카 현지에 정착하거나 현지에서 태어난 에스파냐 인이 많아졌다. 이들을 크리오요라고 하는데 메스티소, 인디오, 흑인을 지배하는 특권이 있었지만 에스파냐에서 온 유럽인들과는 차별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라틴아메리카의 주인이 되려고 하였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영웅들이 대부분 크리오요 출신인 것도 이 때문이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독립에 성공한 나라는 아이티이다. 아이티는 원래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다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곳이다.
수많은 흑인 노예들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착취당하고 있을 때, 카리브 해에도 프랑스 혁명 소식이 전해졌다. 흑인 노예들은 자신들에게도 자유와 평등이 찾아오리라는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18세기 유럽의 시민혁명이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점에서 이런 꿈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모임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낸 고종의 꿈처럼 헛될 수밖에 없었다. 흑인들의 해방은 흑인들 스스로 쟁취해야만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6>
아이티의 흑인들은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카리브 해 전체에 독립의 기운이 번질 것을 두려워한 영국과 에스파냐가 서둘러 진압군을 보냈다.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에는 프랑스군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아이티 인들은 끝내 프랑스 군을 물리치고 1804년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독립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아이티는 처음부터, 즉 노예제에 맞서 1804년의 독립을 이끌어낸 혁명투쟁 자체에서부터 예외였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선언은 보편적인 일관성을 지녔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이 선언은 당시의 사회질서와 경제논리에 직접 맞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유지됐다.” 이런 이유로 “근대사 전체를 통틀어 지배적인 전지구적 사물의 질서에 대해 이보다 더 위협적인 함의를 지닌 단일 사건은 없다.”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식민지의 반란자들은 최초로 식민지배 이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극히 근대적인 원칙을 위해 봉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티의 노예반란을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코뱅 당원들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아이티의 흑인 대표는 국민의회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리고 예측할 수 있듯이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상황은 변했고, 나폴레옹은 즉시 아이티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런 이유에서 일찍이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성급한’ 독립의 대가는 참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 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 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루어졌다. 2004년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면서 라발라스의 대통령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이렇게 강탈한 배상금을 반환하라고 프랑스에게 요구했지만 그의 권리주장을 프랑스의 위원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흑인들에게 노예제에 대해 배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는 동안,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받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엄청난 금액을 환불해달라는 아이티의 요구를 묵살했다. 처음에는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 획득한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강탈당한 아이티의 요구를 말이다. p177~9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프랑스혁명은 결과적으로 부르주아들의 혁명이었다. 거의 100년 간 지속된 혁명의 과정 속에 부르주아들은 제 4계급의 권리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탄압하였다. 똑 같은 유럽의 백인들 사이에서도 사정이 이러했는데, 대서양 건너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와 평등이 허용될 리는 만무했다. 그러므로 유럽에 대항해 독립한 아이티는 실패해야만 했다. 아이티의 존재 자체가 유럽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아이티혁명은 대서양 지역 경제 질서를 떠받히고 있던 인종적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아이티는 독립한 이후로도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 혼란과 군부 독재 등을 겪으며 힘든 현대사를 헤쳐오고 있지만 흑인노예들이 아프리카 바깥에 세운 최초의 공화국이라는 위상과 의의는 세계사에 깊이 각인되어야 한다. 서구 근대주의적 역사관을 지닌 모든 책들이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보다 철저하게 근대 혁명정신을 실현시킨 아이티혁명을 역사에서 지워버린다고 해도 말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8>
1807(8)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침공하자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독립의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독립의 불길은 1810년 아르헨티나, 1811년 베네수엘라에서 솟아올랐는데, 영국과 미국이 이들에 대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개입에 반대함으로써 더욱 힘을 얻었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피해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피난을 왔다. 이때 브라질에는 영국의 자본이 대거 들어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포르투갈로 다시 돌아간 왕실이 브라질을 예전처럼 지배하려하자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았던 황태자가 1822년 브라질 독립을 선언하였다. 브라질의 초대 황제가 된 페드로 1세는 처음에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점차 국민들의 반감을 사다가 물러나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의회를 탄압하고 전제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1810년부터 이달고 신부가, 이후에는 모렐로스 신부가 독립 투쟁을 이끌었다. 1821년 우여곡절 끝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하고 혁명을 거쳐 공화국이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7>
라틴 아메리카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귀족 가문의 부유한 크리오요였다. 그는 “우리는 인디오도 아니요, 유럽인도 아닌 중간 존재였다. 출생은 아메리카 인이면서, 권리는 유럽의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메리카 인으로 권리를 가져야 하고,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아메리카에서 살아야 한다.” 고 아메리카의 독립을 촉구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를 미국과 같은 하나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의 이상은 실패하였지만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을 해방시켰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87>
산 마르틴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크리오요였다. 에스파냐에서 군복무를 하며 에스파냐를 위해 싸웠지만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위해 에스파냐와 싸웠다. 산 마르틴은 남부의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해방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남부에서는 산 마르틴이, 북부에서는 볼리바르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해방시키며 진군하고 있었다. 페루를 두고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이 과야킬에서 만나 회담을 했는데, 주요한 내용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과야킬 회담 후 산 마르틴은 페루 독립을 볼리바르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이후 산 마르틴은 망명생활을 하다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과야킬 회담 후의 산 마르틴의 행보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EBS중학 필독 중학세계사>
1823년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아메리카 문제에 유럽은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고 선언하였다.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이 먹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1898년 미국은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했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가볍게 에스파냐를 물리친 미국은 카리브 해의 요충지인 쿠바를 보호국으로 삼고, 에스파냐의 소유였던 필리핀과 괌도 차지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99>
라틴아메리카는 에스파냐로부터 벗어났지만 미국과 영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 정치적 갈등도 계속되었다. 독립을 주도한 크리오요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독립 운동의 본질은 사회 변화 없이 권력의 이동만을 바라던 식민지 귀족들의 정치 운동인 셈이었다. 뒤이은 20세기 후반에도 군사독재자들이 집권하며 라틴아메리카는 오랫동안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는 플랜테이션 농업의 비중이 매우 높다.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사업은 가격 변동에 민감하고 수입국의 수요에 철저히 종속된다. 예를 들어 유나이티드 프루츠 같은 다국적 기업은 라틴아메리카의 바나나를 독점하고 있다. 바나나 가격이 유나이티드 프루츠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에서 생산국의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다국적 기업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기가 쉽다.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말은 이런 현실을 빗댄 것이다.
유나이티드 프루츠, 스탠더드 오일, J.P. 모건, 브라운 브러더스 같은 기업들은 라틴아메리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착취하면서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손으로 세운 정부도 자신들의 이해에 맞지 않으면 수시로 무너뜨리고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했다. 라틴아메리카 인들은 이런 미국의 횡포에 맞서 반미투쟁을 벌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