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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5~76년
미셸 푸코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5년 1월
평점 :
7강 1976년 2월 18일
7강에서 푸코는 17세기말 ~18세기 초에 프랑스 귀족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역사적 담론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대표자가 불랭빌리에인데, <다음 백과사전>에 의하면, 그는 “역사연구가 그 시대의 사회 상태를 분석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근대 역사가 중 한 사람이다.” 푸코가 여기서 주로 다루는 것은 불랭빌레에가 프랑스 귀족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탄생한 역사주의의 영향과 의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백과사전>에서 관련부분을 찾아보았다.
“〈프랑스 귀족계급 Essai sur la noblesse de France〉(1732 편집)에서 불랭빌리에는 프랑스 귀족의 쇠퇴를 분석하면서 루이 14세 절대주의를 공격하고 프랑스 정치제도의 합법성을 검토했다. 이러한 저술들을 통해 그는 정치와 개혁의 '과학' 및 자연법 비판에 기초한 비교역사 연구이론을 수립함으로써 몽테스키외의 후기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이 설명이 얼마나 푸코에 부합하는지 모르겠지만, 7강에서 자세히 다루는 내용이 아마도 〈프랑스 귀족계급〉을 분석한 것이지 싶다. 불랭빌리에는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던 갈리아에 쳐들어간 프랑크족 혹은 게르만족이 전사 귀족계급이 되어 이른바 봉건제를 수립하는 과정과 이후 절대왕정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런 서술은 행복하고 목가적인 로마적 갈리아라는 17세기의 오래된 역사적-전설적 서사를 뒤엎는다.
프랑크족의 사회는 전체적으로 전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왕은 섬겼지만 평화 시에 왕은 분쟁이나 사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행정관에 불과했다. 평화 시기에 왕의 권력은 최소한이었고, 전사 귀족계급은 최대의 자유를 누렸다. 전사 귀족계급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타인에게서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자유다. 즉 이기심의 자유, 탐욕의 자유, 전투와 정복과 노략질을 할 자유였다. 갈리아에서 프랑크족이 승리함에 따라 왕이 갈리아의 소유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열매를 가졌다. 왕이 가진 것은 자신만의 땅이었고, 갈리아 전체에 대해 로마식의 주권의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전사 귀족계급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토지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사들은 왕을 자신들 위에 모실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봉건제의 아득히 먼 시작이다. 이것이 불랭빌리에가 발명한 것의 핵심이다.
「6~8세기부터 거의 15세기까지 사회, 유럽사회를 특징짓는 역사적-법적 체계로서의 봉건제가 그것입니다. 불랭빌리에의 분석 전에는 역사가들도, 법학자들도 이 봉건 체계를 따로 떼어내 다룬 적이 없었습니다. 부과세를 현물로 납부하는 농민 인구에 의해 떠받쳐지고 유지된 군사 계급의 이 지복감이 이른바 봉건제라는 법적-정치적 단위의 풍토인 것입니다. p190」
그런데 이 전사 귀족계급이 권력과 부를 잃고 군주권력에 속박되어 버렸다. 항구적이며, 세습적이고 절대적인 군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 한축을 담당했던 것이 게르만족(프랑크족)에 의해 토지와 권력을 빼앗긴 갈리아족 귀족계급이다. 게르만의 지배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갈리아족 귀족이었다. 갈리아족의 농민들은 로마의 지배보다 게르만족의 지배를 지지했다. 땅을 예전대로 실질적으로 점유할 수 있었고, 세금을 현금이 아니라 현물로 낼 수 있게 되어 부담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땅을 몰수당한 갈리아 귀족계급은 교회로 피신했다. 교회에서 세력을 넓히고 라틴어를 공부하고 로마법을 연구한 갈리아 귀족계급은 절대주의를 추구하던 게르만족 군주들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즉 갈리아 귀족계급이 성직자 계급으로 변신, 프랑크족 군주들과 결탁하여 프랑크족 전사계급을 몰락시킨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절대 군주제의 거대한 동맹자가 되었다. 그리고 라틴어는 국가의 언어, 앎의 언어, 법적 언어가 되었다. 프랑크족 귀족계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왕, 교회, 갈리아족의 구 귀족계급이 게르만족의 땅과 권리를 빼앗게 될 라틴어로 된 법률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었다.
불랭빌리에는 (프랑크족) 귀족계급에게 호소한다. 반란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앎의 재개를 호소한다. 자기 자신의 기억을 다시 열고, 지식과 앎을 의식하고 회복하기를. “빼앗긴, 아니 오히려 당신들이 결코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앎들의 지위를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권력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패배한 것은 어떤 순간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니라 앎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랭빌리에에게서 우리는 모든 사회체와 사회체의 역사에 두루 퍼지는 일반화된 전쟁을 볼 수 있다. 전쟁의 이런 일반화야말로 불랭빌리에 사상의 특징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이 사실상 역사적 담론의 진실의 모체였다는 관념에 이르게 된다. 귀족이 제3신분과 군주제에 맞서 동시에 정치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 이 전쟁 내부에서, 그리고 역사를 전쟁으로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역사적 담론 같은 것이 수립될 수 있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 내부에 일종의 계속된 전쟁으로서 힘관계를 도입함으로써 불랭빌리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서 볼 수 있던 유형의 분석을, 하지만 이번에는 역사적 용어로 소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에게서 힘관계는 본질적으로 군주의 손아귀에 있어야만 하는 정치적 테크닉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 뒤로 힘관계는 군주와는 다른 누군가가, 즉 귀족계급 혹은 더 나중에는 부르주아지처럼 민족 같은 어떤 것이 자신의 역사 내부에서 포착하고 결정할 수 있는 역사적 대상이 됩니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대상이던 힘관계가 이제 역사적 대상이 됩니다. 아니, 오히려 역사적-정치적 대상이 됩니다. p204~5」
8강 1976년 2월 25일
불랭빌리에가 역사적-정치적 연속체를 구축했던 것은 귀족들에게 힘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다. 불랭빌리에에게 역사영역에서 발언한다는 것은 힘관계들을 그 장치 자체 속에서, 그 현실적 균형 속에서 변경하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힘들에 대한 분석틀이나 해독틀이 아니라 변경틀이다. 따라서 역사는 투쟁의 장에서 스스로 전개하고 기능하는 투쟁의 앎이 되었다. 이후 정치적 싸움과 역사적 앎은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치적 삶과 정치적 앎이 사회의 실제적 투쟁에 기입되기 시작합니다. 18세기부터 역사적 앎이 어떻게 투쟁의 요소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정치가 지닌 특히 이런 근대적 차원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역사적 앎은 투쟁들의 서술인 동시에 투쟁에서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역사적-정치적 장이 조직됐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전쟁 중에 있으며, 역사를 통해 전쟁을 했다는 관념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p212~3」
역사적 앎과 전쟁의 실천 사이의 이 본질적인 매듭이 역사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18세기 앎들의 ‘규율화’는 앎과 진실이 전쟁이 아니라 질서와 평화에만 속한다는 관념을 이식했다. 역사주의를 수용불가능하게 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주의자가 되고자 한다면 전쟁에 의해 관통된 역사 사이의 영속적이고 우회할 수 없는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불랭빌리에에 의해 개막된 역사담론은 한 세기를 지나자 각각의 ‘민족’, 각각의 신분, 각각의 계급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역사가 정치투쟁의 일반 담론이 된 것이다. 루이16세는 역사부를 창립하여, 1780년경 모로를 역사부 장관에 임명했다. 모로는 왕에 대한 학술적 옹호자의 역할을 맡았다.
지식-진리의 축 위에 자리 잡은 학문들의 역사와 달리 앎들의 계보학은 담론-권력의 축 위에, 혹은 담론적 실천-권력적 대결이라는 축 위에 자리 잡았다. 18세기에 이 앎들의 계보학을 적용할 때, 앎들의 계보학은 우선 계몽주의의 문제틀을 분쇄해야 한다. 무지에 맞선 지식의 투쟁, 망상에 맞선 이성의 투쟁, 편견에 맞선 경험의 투쟁, 오류에 맞선 이성적 사유의 투쟁 등으로 서술됐던 것을 분쇄해야 한다.
18세기는 앎들이 규율화된 시대다. 앎들 안에서 선별, 규범화, 위계화, 집중화가 이루어졌다. 각각의 앎이 분과학문으로 정비되고, ‘과학’이라 불리는 전반적인 장 안에서 이 분과학문들이 서로 교통하고 분할되고 위계화 되도록 배열되었다. 일반적 영역으로서의 과학, 앎들의 규율적 경찰로서의 과학이 철학과 보편수학을 대신했다.
「앎들의 규율화(분과학문화), 그에 따라 과학에서 조작적인 철학적 담론과 과학들에 내적인 보편수학이라는 기획을 몰아낸 이 중대한 변화를, 18세기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성의 진보라는 형식으로 의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성의 진보라 불렸던 것 아래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형적이고 이질적인 앎들의 규율화였음을 포착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p225」
18~19세기에 아마추어 학자들이 사라지고 대학이 등장한 것도 이 변화의 현상이다. 대학의 선별 역할은 앎들의 선별이다. 앎들의 단계, 질, 양을 상이한 수준에서 분배하는 역할이다. 이것은 교육의 역할이기도 하다. 공인된 지위를 지닌 일종의 과학적 공동체로서 이 앎들을 동질화하고, 합의를 조직화한다. 이것은 국가 기구에 의한 직 ․ 간접적 집중화이다.
아무튼 왕권에 중요한 것은 역사적 앎, 역사적 앎들을 규율화하고, 국가의 앎을 수립하는 것이다. 18세기는 한편에는 역사학이라는 형식으로 규율화된 앎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투쟁하는 다양한 역사적 의식이 있었다.
9강 1976년 3월 3일
역사적 앎은 18세기 내내 정치적 장의 모든 적수들이 사용할 수 있고 과시할 수 있는 일종의 담론적 무기가 되었다. 원래 귀족적 반동과 연결된 이 담론이 어떻게 일반화 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앎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전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앎을 형성하는 법칙이자 정치적 전투에 공통적인 형식이다.
18세기에 충돌한 역사적 담론은 하나의 문제를 둘러싸고 있었다. 혁명과 야만. 혁명에서의 야만의 경제가 바로 그것이다. 불랭빌리에는 귀족계급을 위해 ‘금발의 기골이 장대한 야만인’ 즉 프랑크족을 역사 속에 도입했다. 야만이라는 현상이 역사 속에 침입한 것이다. 18세기의 역사적 담론은 왕국의 힘관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야만을 여과시키는 세 가지 모델을 도입했다. 이 세 개의 모델은 세 가지의 정치적 입장에 정확히 상응한다.
첫 번째 여과기는 역사 속에서 야만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다. 프랑크족은 불랭빌리에의 신화이자 환상이라는 것이다. 소수의 프랑크족이 이민하여 곧바로 갈리아-로마의 시민이 된 것 뿐이다. 야만적인 프랑크족 귀족계급은 없었고, 처음부터 절대군주제가 있었다. 단지 군주가 파견한 관리들이 권력을 강화하여 중앙권력이 해체되고 봉건제와 같은 것이 생겨났다. 봉건제는 침략이 아니라 내부 붕괴의 결과이다. 귀족은 야만인이 아니라 정치적 사기꾼이었다.
두 번째 여과기는 프랑크족의 야만적 자유를 특권적 귀족계급이 아니라 인민 전체의 것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갈리아에 도입된 것은 귀족제가 아니라 프랑크족의 야만적 민주주의이다. 약탈과 강탈에만 몰두했던 프랑크족은 왕권 통제에 관심이 없었고 그 결과 왕권이 강화되었다. 왕은 야만적 프랑크적 민주주의에 맞서 왕권을 지지해준 귀족들에게 답례로 봉토를 하사했고 이것이 봉건제를 만들어 냈다.
세 번째 여과기는 프랑크족이 가져왔다고 간주되는 자유의 요소들을 로마적 갈리아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로마인은 갈리아족이 원래 갖고 있던 자유를 제약하지 않았다. 이 자유는 도시적 현상이기도 했다. 도시에 속한 자유는 투쟁의 힘 즉 정치적 ․ 역사적 힘이 될 수 있었다. 유목농민이었던 프랑크족은 도시를 경시했고 도시는 파괴되지 않고 부와 풍요를 누렸다. 이 테제는 제3신분에게 잘 부합되었다. 도시와 그 정치적 효과가 처음으로 역사 속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 3신분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이 담론에 의해 로마적 성격이 왕의 편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색깔을 띠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갈리아-로마적 자치 도시라는 모습으로 로마적 성격을 회복시켰다. 이것은 곧 제3신분의 고귀함을 의미했고, 제3신분이 요구했던 것도 이 자치도시, 자치도시적 자유이다.
그러나 사실 부르주아지는 18세기에 역사에 별 이해관계가 없었다. 세 번째를 제외하면 역사적이었던 것은 귀족계급이었다. 부르주아지는 계몽된 전제 군주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혁명 전에 비역사적인 헌법 구성을 요구함으로써 역사주의에서 탈피하려 했다. 자연법이나 사회계약에 의존했다.
「18세기 말, 곧 프랑스 혁명 전과 초기까지 부르주아지의 루소주의는 바로 권력 이론과 권력 분석의 장에서 서로 싸우고 있던 이 다른 정치적 주체들의 역사주의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루소주의자라는 것은 미개인에게 호소한다는 것, 계약에 호소한다는 것이었으며, 야만성이나 그 역사나 이것이 문명과 맺는 관계에 의해 규정된 모든 풍경에서 탈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p255」
물론 부르주아지의 반역사주의는 지속될 수 없었다. 삼부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부르주아지도 귀족의 진정서에 언급된 수많은 역사적 참조점들을 논박하기 위해 역사적 앎을 부활시켰다. 그러고 나서 역사의 사건기록부로서 기능했던 어떤 일정 수의 역사적 순간과 역사적 형식이 바로 프랑스 혁명 속에서 부활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이른바 길잡이 역할을 했던 법적 루소주의에서 출발해, 두 개의 커다란 역사적 형식이 프랑스 혁명 속에서 부활했습니다. p256」
하나는 로마적 도시국가의 부활이다. 혁명초기 프랑스는 명령하되 통치하지 않는 로마식 황제 아래의 자유도시를 꿈꾸었다. 이 꿈은 나폴레옹 제국에서 발견된다. 두 번째는 봉건제에 대한 증오이다. 혁명기에 유행한 중세식 소설은 봉건제에 대한 증오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딕소설은 정의롭지 않은 군주, 무자비하고 유혈 낭자한 영주, 거만한 사제들 등에 대한 우화이다. 이 고딕소설은 공포, 전율, 신비의 소설인 동시에 권력의 남용과 수탈의 서사를 다루는 정치 소설이다.
10강 1976년 3월 10일
18세기에 역사적 담론은 전쟁을 분석틀로 삼았다. 19세기에 와서 전쟁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역사담론은 자기 변증법화를 겪었다. 이것은 역사적 담론의 부르주아지화와 상응한다.
시에예스는 그 유명한 제3신분에 관한 텍스트에서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 정치적 질서 안에서 제3신분은 현재까지 무엇이었는가? 무. 제3신분은 무엇이길 요구하는가? 그 무엇이 되는 것.”
시에예스의 질문과 더불어 민족에 관한 아주 다른 정의가 등장한다. 절대군주의 테제에서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적 반동은 두 개의 ‘민족’을 이끌어냈다. 불링빌리에가 했듯이 민족들 사이에서 전쟁과 지배의 관계들을 수립했다. 시에예스는 민족의 실질적 조건으로 두 가지를 주장했다. 하나는 공통의 법률과 입법부다. 모든 정부의 형성 이전에, 주권자의 탄생 이전에 민족은 존재한다. 단 입법부에 의해 공통의 법률을 갖는다면. 두 번째는 직능과 기구이다. 농업, 수공업, 상업, 교양학과 군대, 사법, 교회, 행정. 이 직능과 기구의 수준에서 민족의 역사적 존재 조건이 정의된다. 한 민족은 상업, 농업, 수공업을 할 수 있을 때에만, 군대, 사법, 교회, 행정을 형성할 수 있는 개인들로 이뤄졌을 때에만 민족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직능과 기구는 누가 보장하는가? 시에예스에 따르면 제3신분이다. 여기서 시에예스 텍스트의 중심적 정식이 나온다. “제3신분은 하나의 완전한 민족이다.” 제3신분만이 하나의 민족, 법적으로 국가와 일치하게 될 하나의 민족이 실존하기 위한 역사적 조건이다. 이 정치적 정식은 모든 정치적 담론의 모체가 되었으며, 지금도 고갈되지 않았다.
이 담론의 두 가지 성격은 보편성과 현재성이다. 제3신분은 국가의 총체화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국가적 보편성이 될 수 있다. 이 담론의 요구는 불랭빌리에처럼 과거에 기대지 않는다. 요구는 잠재성 위에서, 현재 속에서 이미 현전하고 있는 미래 위에서 표명된다. 문제는 사회체 안에서 ‘하나의 민족’에 의해 이미 보증된 국가적 보편성의 어떤 기능이기 때문이며, 이 민족은 보편성의 이름으로, 유일한 민족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실제적으로 인정할 것을, 국가의 법적 형식 속에서 인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민족은 국가의 적극적이고 구성적인 핵심이다. 민족은 국가이다.
「이제 우리는 전쟁, 지배를 위한 전쟁이 이른바 다른 실체인 투쟁에 의해 대체되는 역사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국가의 보편성을 향한 노력, 경쟁상태, 긴장인 것입니다. 투쟁의 관건이자 전장은 국가, 그리고 국가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므로 투쟁이 지배를 목적이나 표현으로 삼지 않고 국가를 그 대상이자 공간으로 삼는 한에서, 투쟁은 본질적으로 시민적이게 될 것입니다. 투쟁은 본질적으로 경제, 제도, 생산, 행정을 통해, 그리고 이것들을 향해 전개될 것입니다. p272」
19세기 전반의 역사에는 이행가능성에 관한 두 가지 틀이 존재했다. 하나는 전쟁이고, 하나는 현생성이다. 첫 번째 틀은 반동적이고 귀족적이며 우파적인 반면 두 번째 틀은 자유주의적이거나 부르주아적 유형의 역사를 제시한다.
첫 번째 틀의 예는 19세기 초 몽로지에가 쓴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혁명이 왕권에 대립한 것이 아니라 군주들의 과업을 완성시킨 것이라는 주장이다. 왕은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 정치적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농노를 해방하고 도시에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인민을 구성했다. 하나의 새로운 민족, 새로운 계급이 탄생했다. 왕은 이 새로운 계급을 이용하여, 영주에 맞선 도시의 반란과 농민의 폭동을 부채질했다. 정치권력은 영주로부터 군주에게 이전되었고, 절대 군주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계급이 국가의 모든 기능을 맡게 되자, 국가 전체가 인민의 수중에 떨어졌다. 새로운 계급의 마지막 반란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왕들의 과업을 글자 그대로 완수했다.
왕정복고기의 이런 정치적 요구에는 물론, 귀족이 자신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국유화된 재산을 몰수하고, 예전의 지배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몽로지에의 역사적 담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현재를 충만한 순간, 실행의 순간, 총체화의 순간으로 삼고, 귀족과 군주제의 관계를 묶어낸다는 것이다.
두 번째 틀의 사례는 티에리의 역사다. 티에리에게 프랑스혁명은 모든 계급이 소멸하고 화해하는 충만의 순간이다. 부르주아지, 제 3신분이 보편적 역량을 갖고 인민 즉 국가가 된다. 티에리는 장-실뱅 바이를 인용하는데, 제3신분의 대표자들이 있는 방에서 그는 귀족과 성직자 대표를 반가이 맞아 “여기서 가족이 다시 모였군요.” 라고 말했다. 프랑스 혁명은 결국 1,300년 이상 지속된 투쟁의 마지막 에피소드일 뿐이다.
티에리는 이원적 투쟁에서 시작해 일원론적 보편주의로 끝을 맺는다. 중세 이전에 이미 농촌사회와 도시사회가 있었다. 두 사회의 투쟁은 정치적 ․ 경제적 차원의 대결이었다. 국가의 구성을 위한 두 유형의 사회 사이의 이런 대결이 바로 역사의 근본 동력이었다. 최종적으로 도시가, 부르주아(어원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계급이 승리했다.
제3신분은 국가의 모든 힘을 손아귀에 넣자 귀족과 성직자에게 일종의 사회계약을 제안했다. 세 신분이라는 이론과 제도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귀족은 제3신분에게 어떤 권리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바로 이 순간부터 18세기의 폭력적인 대결 과정이 시작된다. 프랑스혁명은 이 폭력적 전쟁의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시민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갈등과 투쟁의 군사적 도구일 뿐이다.
「세 신분체제의 소멸, 프랑스 혁명의 폭력적인 격동, 이 모든 것이 구성하는 것은 사실상 단 하나입니다. 즉, 모든 국가적 기능을 흡수함으로써 민족이, 유일한 민족이 된 제3신분이 실효적으로 자신들만으로 민족과 국가를 모조리 떠맡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으로 민족을 구성하고 국가를 떠맡는다는 것은 그때까지 기능할 수 있었던 구시대의 이원성과 모든 지배관계를 소멸하게 만드는 보편성의 기능들을 확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 제 3신분은 인민이 되며, 그러니까 국가가 됩니다. 제3신분은 보편적인 것의 역량을 지닙니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 티에리가 글을 쓰던 바로 그 시점은 이원성, 민족들, 계급들이 소멸하는 순간입니다. p285」
19세기부터 역사와 철학은 공통의 질문을 던진다. 현재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보편적인 것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것이 역사의 질문이며 철학의 질문이다. 변증법이 태어난 것이다.
11강 1976년 3월 17일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크게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으로 나눌 수 있다. 고전적 주권권력과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권력 테크놀로지가 18세기 이후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등장했다. 하나는 규율적 테크닉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테크놀로지다.
「이것은 마치 주권을 그 양상, 조직화 도식으로 지닌 권력이 인구 팽창과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 중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신체를 규제하는 데에는 전혀 효험이 없게 되어버린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위에서부터든 아래에서부터든, 세부의 수준에서든 집단의 수준에서든 너무도 많은 것이 주권권력의 옛 기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세부를 바로 잡기 위해 첫 번째 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감시 및 훈련과 더불어, 개별 신체에 대한 권력 메커니즘의 조정. 이것이 규율 권력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실현하기에 가장 손쉽고 가장 편리한 조정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조정은 너무도 일찍, 즉 17~18세기 초에, 국지적인 수준에서, 직관적이고 경험적이고 세분된 형태로, 학교․ 병원․ 병영․ 작업실 등과 같은 제도의 제한된 틀 속에서 실현되었습니다. 그 뒤인 18세기 말에 전반적 현상들에 관해, 인구의 현상들에 관해, 인간의 집합의 생물학적 또는 생물-사회학적 과정과 더불어 두 번째 조정이 이뤄졌습니다. 이것은 훨씬 어려운 조정입니다. 왜냐하면 조율이나 집중화 등의 복잡한 기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298~9」
푸코라고 하면 보통 규율 권력을 먼저 떠올리는데, 푸코는 근대의 권력 메커니즘이 이미 규율 권력을 넘어선 생명 권력이었음을 주장한다. 물론 생명 권력은 규율 권력에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규율기술을 이용한다. 생명 권력에 의한 생명 정치는 생명을 대상으로, 집단으로서의 생명인 인구를 대상으로 한다. 인구통계학과 더불어 공중위생을 담당하는 의학, 환경문제 등이 중심으로 떠올랐다. 생명정치는 구호 제도 보다 보험, 저축, 안전 등과 같은 치밀하고 합리적인 메커니즘을 갖게 되었다. 세부적 수준에서 개인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 메커니즘에 의해 균형과 규칙성이라는 포괄적 상태를 얻는 방식이 목표가 된다. 생명, 즉 인간-종의 생물학적 과정을 고려하여, 이 과정에 대해 규율이 아니라 조절을 보증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도시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생명 권력이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규율하고자 하는 신체에도, 조절하고자 하는 인구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규범이다. 규범화 사회란 규율적 제도들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다.
「규범화 사회란 규율의 규범과 조절의 규범이 직각으로 절합되듯이 서로 교차된 사회입니다. 19세기에 권력이 생명을 소유했다고 말한다는 것, 적어도 19세기에 권력이 생명을 떠맡았다고 말한다는 것은, 권력이 한편으로는 규율 테크놀로지와 다른 한편으로는 조절 테크놀로지의 이중적 작용에 의해 유기체적인 것에서 생물학적인 것까지, 신체에서 인구까지 모든 표면을 덮어버리기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p303」
생명권력과 더불어 19세기에 등장하는 것이 국가인종주의다. 인종주의는 살아야 할 자와 죽어야 할 자를 나누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단순히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열등한 종의 죽음은 생명 일반을 더 건강하게 해주며 더 순수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절멸해야 할 적은 정치적 적수가 아니라 인구에 대한 생물학적 위험이 된다. 인종주의를 국가의 메커니즘 안에 기입한 것은 이렇게 생명 권력이다. 근대적 인종주의의 특징은 심성, 이데올로기, 권력의 거짓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연결되어 있을 따름이다.
인종주의는 무엇보다 식민지화에 의한 인종 학살과 더불어 발전했다. 여기에 진화론이 이용되었다. 나치즘은 새로운 권력 메커니즘이 절정에 도달한 현상이다. 나치즘은 국가를 생물학적으로 정비하고 보호하고 풍요롭게 하는 생명의 장과 타인과 그 주변사람들까지도 죽이는 주권적 권리를 공존시켰다.
「다른 인종들에 대한 궁극의 해결, 그리고 (독일) 인종의 절대적 자살. 근대 국가의 기능 속에 기입된 기제는 바로 이것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죽이는 주권적 권리와 생명 권력의 메커니즘 사이의 작용을 그 절정으로까지 밀고 나간 것은 오직 나치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용은 실제로는 모든 국가의 기능 속에 기입되어있습니다. p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