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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벌써 마지막 주목신간을 써달라는 문자가 왔다.

벌써이기도 하고, 아직이기도 하다.

책읽는 것을 겁내 본적은 없는데,

신간평가단 책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인문분야로 뭉뜽그려진 책의 영역이 굉장히 넓어서

평가단 개개인의 취향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회를 더할수록 책이 두꺼워지기까지 한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5월의 책은 900쪽인 것도 있다.

 

좋은 신간을 찾아내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다.

책이름과 저자, 기껏해야 약간의 책소개만으로 선택한 책은

기대를 배반하기가 일쑤이다. 

그래도 마지막 주목신간은 별 고민없이 골랐다.

분량도 적당하고,

모두 어떤 형태로든 신뢰를 갖고 있는 책이다. 

 

 

동녘 출판사의 처음읽는 철학 시리즈 네번째 책이다. 지은이(개인이 아니라 단체다)가 다르긴 하지만, 프랑스, 독일, 영미 현대 철학에 이은 우리나라의 현대철학이다.  철학 아카데미의 앞선 세권의 책이 모두 괜찮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이번 책도 그만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서양철학을 즐겨 읽다보니 정작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현대철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떤 내용일지 매우 궁금하다.

 

"최제우의 ‘동학’에서 함석헌의 ‘씨ㅇ·ㄹ 철학’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한국 현대 철학자들의 철학과 사상! "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후마니타스의 두번째 살레츨 책이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읽지는 않았지만, 레나타 살레츨이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 학파라는 것은 알고 있다. 간혹 지젝이 책에서 언급하기도 했고, 지젝의 전처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 '불안'은 매우 핵심적인 감정이어서, 제목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를 일으킨다. 굵은 글씨로 된 책 소개를 가져오자면 이렇다.

 

"불안한 일상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탐구
현대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의 불안에 기생하는가? "

 

 

 

5.18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김상봉의 책이다. 소설로만 반복했던 5.18을 철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니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왜 5.18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 없었겠냐만, 한번도 찾아 읽어보려 하지 않았다. 5.18은 그저 가슴과 눈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던가 보다. 제목이 핏빛 바탕색 보다 더 강렬하게 눈을 찌른다. 철학의 '헌정' 

 

 

 

 

 

 

 

여자라면 이 제목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트윗에서 몇번 언급되는 것을 보았는데, 제목만큼 흥미로운 내용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골라본다. 글 많이 쓰는 인기 작가의 <산문집> 이라니, 그것도 2014년 원작이라니, 페미니즘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읽힐 것 같다. 남자들이 뭘 자꾸 가르치려 드는 것은 사실 말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관습 자체를 통해서이다. 아버지 말씀하실 때 대꾸하면 큰일나는 교육을 받은 중장년 이상의 세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6개월 동안 신간평가단을 이끌어 온 알라딘 담당자님과 인문분야를 책임지신 파트장님께 미리 감사를 전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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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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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아마 다 읽지 못하고 리뷰를 썼다면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신간평가단의 리뷰는 내가 자원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곧 염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사 너스바움이 쓴 『혐오와 수치심』의 부제는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이다. 혐오뿐만 아니라 수치심까지도 부정적인 감정으로 분류하고 있다. 부끄러워해야 할 때 마땅히 부끄러워하는 것이 인간다움이다. 그런데 왜 혐오와 수치심을 인간성의 적이라고 할까?

 

제목이 주는 인문학적 인상과는 달리 이 책은 철저히 법률학적이다. 수치심이 때때로 인간성을 지켜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법적용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혐오는 말할 것도 없다. 본문만 600쪽이 넘는 책이, 그것도 법률 용어와 법적 엄격함이 가득한 이 책이, 술술 읽혔다는 것이 읽고 나서도 뜻밖이다. 지난달 신간평가단의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보다도 심지어는 이번 달의 『음식의 언어』 보다도 더 잘 읽혔다. 단지 개인적 취향 때문일까?

 

혐오와 수치심이 법적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감정이 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너스바움은 분노와 두려움 같은 감정은 법집행의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있으며, 피고인에 대한 동정심 또한 배심원의 정당한 권리라고 말한다. 이런 감정들은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이미 사고와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감정은 개인적 삶과 개인이 구성하는 사회적 삶 모두에서 쉽사리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두 감정은 지배적인 집단이 다른 집단을 예속시키고 낙인찍는 사회적 행위 양식과 연결된다. 혐오의 경우, 동물성과 유한성에 대한 행위자의 두려움과 연관된 속성은 힘이 약한 집단을 대상화해서 투영하며, 이들 집단은 지배적인 집단이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표출하는 수단이 된다. 예속된 집단과 그 구성원들의 몸은 혐오스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예속된 집단의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한다. 수치심의 경우, 무력감과 통제의 결여가 불러일으키는 보다 일반적인 불안은 완전무결함에 대한 추구로 이어진다. 지배집단은 자신들이 지닌 안정적인 통제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위협한다고 여기는 하부 집단에 낙인을 안겨 줌으로써 통제하고 있다는 겉모습을 얻게 된다. 하부 집단은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키는 사회적 불안의 초점이 되어서 낙인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단순히 ‘정상’ 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낙인을 받을 수도 있다. 지배 집단은 ‘정상’ 이라는 편안함을 안겨 주는 허구를 통해 더욱더 효과적으로 〔자신이 지닌 불안을〕 숨길 수 있다. p603」

 

혐오와 수치의 역사적 상징은 물론 유대인이다. 너스바움뿐만 아니라 많은 철학자들이 (나는 지젝을 통해 처음 접했지만), 유대인은 특히 나치 아래의 유대인은 사회경제적 위기에 대한 독일인들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이 투여된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들 자신의 욕망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형상이다. 그 결과 가치판단이 전도된다. 유대인이 이러저러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유죄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모두 이러저러한 범죄가 된다. 우리 시대에 유대인의 역할은 제3세계 이주민, 이슬람교도들이 맡고 있다. 물론 뉴스를 보면 미국은 여전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그리고 우리나라는 SNS의 여론상 호남인들이 그 저주받을 올가미에 걸려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그 책임을 전가하고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는 희생양이 만들어지기 쉽다. 저들을 싹 도려내기만 하면 윤택한 삶이 가능할 것 같은 환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일본의 재특회나 우리나라의 일베가 활개를 친다.

 

너스바움은 이런 거시적 통찰을 지극히 현실적인 법적용에서 짚어낸다. 미국의 법적 논쟁에 등장하는 것은 물론 유대인이 아니라 동성애자, 장애인, 유색인종, 매춘부 등이다. 애팔레치아 숲에 숨어사는 유랑자가 레즈비언 커플을 목격하고 총을 쏘아서 한명은 사망, 한명은 중상을 입은 일급 살인 사건에서 피고는, 주체할 수 없는 혐오와 불쾌감에 휩싸여 저지른 범죄이므로 과실치사로 죄를 경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판사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미국의 어떤 법정에서는 혐오를 근거로 죄를 경감해주는 판결이 내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동성애자, 인종적 소수자, 여성,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원초적인 혐오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이다. 사회적 혐오를 법적으로 인정한다면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재발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사실은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난민 공습이나 종교 갈등으로 인한 대량 학살은 국가적•사회적•법적으로 인정된 혐오가 불러일으키는 참극이다. 물론 미국의 백인 경찰관들이 유색인종 범죄 혐의자를 무차별 사살하는 일도 되풀이 된다.

 

수치심은 나르시시즘에 기반 한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있다. 플라톤의 《향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수치심을 자신이 전혀 전지전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 p335” 이라고 했다. 완전했던 인간이 우주를 지배하기 위해 신들을 공격하자 제우스가 인간의 몸을 변형시켜 “약해지게” 만들었다. 인간 몸의 형태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표식이다. 그 중에서 배꼽은 “오래 전에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을 표상한다.

 

“배꼽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영양공급과 편안함의 원천에서 떨어져 나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삶을 시작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p335”

 

아이는 탯줄을 잘리고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완전체에서 불완전체로, 전지전능함에서 무력함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주는 원초적 수치심은 완전한 인간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애착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수치심과 나르시시즘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자기가 외롭고 분리된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하면, 그만큼 더 과장되게 자신의 이상과 하나 된 완벽한 존재가 되길 추구하는 것이다. p355”

 

수치의 대상은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상기하게 만든다. 우리의 나르시시즘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와 같은 ‘정상인’ 이 아니라 ‘비정상인’이나 ‘하위집단’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수치심에 대한 형벌은 특정 행위가 아니라 인간 자체를 겨냥하게 된다. 수치심 형벌은 “당신은 결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고 낙인찍는다. 역사적으로도 수치심 형벌은 그 사람이 지닌 정체성을 대상으로 했다. 주홍 글씨, 자자와 같은 형벌은 일생동안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일탈자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면서 스스로를 이들보다 우위에 있는 ‘정상인’으로 내세우는 것은 사회구성원을 서열화하는 작용을 한다. ‘수치심 주기’는 법의 영역이 아니라 언론이나 여론의 영역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전리디언, 개상도뿐 아니라 삼포세대, 칠포세대 같은 자학적 낙인까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서열화를 촉진한다. 따라서 너스바움은 법이 수치심에 관여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회가 ‘법이라는 공적인 체제를 통해’ 그러한 특정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분명 적절하지 못한 면이 있다. 국가가 수치심을 주는 행위에 관여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낙인찍을 것이고, 범죄자들은 그러한 낙인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가 이처럼 모욕을 주는 행위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주의 사회가 기초하고 있는 평등과 존엄이라는 관념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p422」

 

물론 세부적인 사항에서 너스바움의 원칙에 반발하고 싶은 충동도 인다. 가령 아동성범죄자 명단 공개 같은 것들은 분명 수치심을 주는 처벌이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수치심을 줄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놈들까지 보호해야 되나 싶기도 하다. 성추행으로 징계를 받은 교수가 버젓이 학교를 옮겨 선생질을 하는 이 나라에서는 인간 자체를 매장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법은 법이다. 법이 원칙을 거스르면 먼저 무너지는 것은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핵심 가치이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지는 말라고 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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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언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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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고른 책이 예상과 딱 맞아떨어지기는 어렵다.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도 그렇다. 알라딘 신간평가단 4월의 주목신간으로 추천한 책이지만 내가 생각했던 그 책은 아니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모르겠다. 아무튼 이것은 아니다;;)

 

사실 ‘언어’에 함정이 있었다. 주래프스키의 언어는 우리의 언어가 아니다. 고추장의 기원을 따라가는 여정은 재미있겠지만, turkey(칠면조)의 기원을 찾아 멜리아그리스 갈로파보 갈로파보라든가 토틀린, 후엑솔로틀, 몰레 포블라노 데 과홀로테, 갈로파보, 갈린 드 튀르키, 뿔 댕드, 기니파울, 피칸 등등의 언어 여행을 하자면 멀미가 난다. 솔직히 말하면 얼른 내리고 싶었다.

 

물론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다. 가령 1장 <메뉴 고르기 : 메뉴판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 네 가지 방법>. 당황하지 않기 보다는 속지 않는 방법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고급식당과 대중식당, 비싼 음식과 싼 음식은 메뉴판의 어휘에서부터 차이가 확연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주 값비싼 레스토랑은 값싼 레스토랑에 비해 음식의 출처를 거론하는 횟수가 15배나 많다. “더티걸 농장 로마노 빈 덴 푸라” “허브를 넣고 로스트한 엘리전 필즈 농장 양고기” 같은 식이다. 의외인 것은 싼 레스토랑일수록 요리의 가짓수가 많고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고급 레스토랑은 메뉴도 건방지다. 주방장 추천이나 주방장 선택 혹은 정식 메뉴가 대부분이다. 따지지 말고 주는 대로 먹으라는 것이다. 품질은 레스토랑 이름과 비싼 가격이 보증 한다는 걸까? 패스트푸드점이나 카페체인의 빽빽한 메뉴와 시답잖은 선택지들은 결국 싸구려 품질을 감추기 위한 포장?

 

또 다른 것은 요리에 대한 설명이 길면 길수록 음식 값이 높이 매겨진다는 것이다. 어떤 음식을 묘사하는데 평균길이 보다 글자 하나가 늘어날수록 18센트가 비싸진단다. “다섯 가지 향신료를 넣은 오리 : 이국적인 다섯 가지 향신료를 넣고, 뼈를 바르고, 톡 쏘는 식초와 함께 낸 어린 오리” 이 정도면 식당 주인은 얼마를 더 받겠다는 뜻일까?

 

세 번째 주의해야 할 사항은 형용사다. 여기서 형용사의 기능은 사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한 인상을 주입하는 것이다. 신선한, 풍부한, 짜릿한, 다채로운, 맛있는, 부드러운, 잘 익은, 바삭바삭한 따위의 표현들이다. 이런 공허한 형용사들을 많이 사용하는 레스토랑은 고급 레스토랑일까, 값싼 레스토랑일까? 답은 중간 가격대의 레스토랑이다. TGI 프라이데이, 캘리포니아 피자 치킨, 치즈케이크 팩토리.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TGI 프라이데이밖에 없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이런 종류의 패밀리 레스토랑이 그렇다는 말이겠다. 그 이유는 뭘까? 불안하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의심할까봐 불안하고, 소비자가 의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불안하고, 스스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니 불안하다. “손님은 이게 덜 익었을까봐 걱정이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여기서 제가, 다 익었다고 장담합니다.” 식당이라면 당연히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굳이 이런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자백이 아닐까?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먹어보면 그들의 불안이 이해가 간다.;;

 

「언어학자 마크 리버먼은 우리가 이런 과잉언급을 ‘지위불안’의 징후로 여긴다고 주장한다. 값비싼 레스토랑은 절대 잘 익은 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잘 익어야 하는 음식은 당연히 잘 익었으리라고, 또 모든 식재료가 당연히 신선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중간 가격대의 레스토랑은 그곳이 충분히 근사한 곳이 아니어서 손님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거듭 확신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변명이 너무 많다. p44」

 

마지막은 가격이 진짜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맛있는, 신선한과 같은 형용사만큼이나 주의해야 할 것은 ‘진짜, 진정한’ 이다. 진짜 휘핑크림, 진짜 게, 진짜 치즈를 보장하는 것은 ‘진짜’라는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가격이다. 진짜 식당은 변명이 필요 없는 곳이다.

 

메뉴판의 진실을 삶에서 발견할 때도 있다. 누군가 “걱정마라, 나만 믿어라”를 되풀이할 때 오히려 걱정이 되고 불안하다. 거기엔 무언가 걱정하고 의심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걱정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은 나도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빠만 믿어! 라는 놈치고 믿을만한 놈이 얼마나 될까? 포테이토칩이 ‘저지방’ ‘콜레스테롤 제로’를 외친다고 건강식품이 되지는 않는다.

 

ps: 가장 인상적인 것은 케첩의 기원이 중국의 ‘생선 젓갈’ 이라는 사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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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 2015-05-19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낚인 느낌이긴하지만.. 오호 그랬구만.. 하는 글이에요.ㅎㅎ

말리 2015-05-19 15:46   좋아요 0 | URL
ㅎㅎ;; 넘 자극적이었나요? 읽어주셔서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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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
4월부터 몸이 좀 안좋아서, 병원 치료겸 휴식겸 친정에 왔습니다.
이제야 컴퓨터 앞에 앉을 여유가 생겼습니다.
기한이 지나서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올려 봅니다. 
 
 
 

1. 김한식의 <세계문학여행>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김한식의 《세계 문학 여행》 입니다. '소설로 읽은 세계사' 라는 부제만 보아도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가는데요.  저 역시 재작년부터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고전 소설 읽기였습니다. 고전이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닌다지만 고전은 또한 당대의 문제를 가장 깊이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고전을 온전히 읽으려면 그 시대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꾸로 한 시대를 입체적으로 감각하기 위해서도 고전이 필수가 아닐까 합니다.  역사로 문학읽기, 문학으로 역사읽기는 직접해보는 것이 좋겠지만, 타인의 방법을 살짝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 심강현의 <시작하는 철학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저자가, 말하자면 아마추어입니다.  철학 공부를 하는 의사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책은 읽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책보다 입문서야말로  해박한 지식과 깊이있는 성찰 끝에 씌여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없지만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책소개가 제 마음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개별 철학자의 사상만큼이나 "철학의 역사가 전개되어 온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당 철학자의 사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것도 중요" 합니다. 일반적인 철학사 책들은 맥락이나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유명 철학자들의 사상을 조각조각 모아놓은 것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 심강현의 철학적 깊이가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2500년 서양철학사의 큰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책소개의 말을 글자그대로 믿기는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 
 
 
 

3. 폴킹혼의  <성서와 만나다>


 성서는 늘 읽으려 했지만 아직 완독하지 못하고 있는 "책"입니다.  네, 책입니다. 비종교인이라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양철학과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습니다.  마침 우회해서 읽을만한 책이 보이길래 추천 목록에 올려봅니다.  존 폴킹혼 교수의 책입니다. 케임브리지 물리학 교수로 은퇴했는데, 중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목회 활동도 했다고 합니다.  "지적 균형감을 잃지 않으면서 성서를 풍요롭게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고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성서에 다시 한번 도전하는 기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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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7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7 1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말리 2015-05-09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아이패드로 먼댓글 추가했더니 책이 전부 사라졌 ㅠㅠ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윌스타일)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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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잘못 찾았다. 아까운 책이다. 유명한 그림들이 가득한 두꺼운 책이 내게 와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다.

 

나는 음치다. 그건 도래미파솔라시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 간다면 지독한 근시에 비유해볼까. 시각측정선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거기에 어떤 아름다운 도형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 음악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미술에도 비슷한 감각저하 현상을 보인다. 색도 선도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것들이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지에는 지극히 둔감하다. 우뇌에 문제가 있는 걸까? ‘스탕달 증후군’ 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은 아름다운 그림 같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의식 혼란, 어지러움, 심하면 환각을 경험하는 현상이다.” (한국어 위키백과)

 

그림을 보며 픽픽 쓰러질 만큼 감동을 받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다. 도대체 그림에서 무얼 보는걸까? 그에 비하면 나는 눈이 먼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나다. 그러니 이 책에는 잘못이 없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는 그림 이야기다. 보통 세 작품을 하나로 묶어 '혈연관계‘를 설명한다. 나는 아버지를 베끼고, 자식은 나를 베낀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아버지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최후의 만찬>이고 아들은 앤디 워홀의 <최후의 만찬>이다. 아들이 심하게 엇나간 것이 아닌가 싶지만, 500년 만의 아들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이 책은 500여년 서구미술사의 가족 찾기 프로젝트다. 이렇게 찾은 가족이... 헤아려 보니 마흔여섯 가족이다. 걔 중에는 대가족도 가끔 있다. 후손이 번창한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다만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을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배웠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 가족들은 그대로 미술사의 다양한 유파를 보여준다. 무조건 외우기만 했던 그 그림들에 이야기가 붙었다면 아무리 나 같은 미치(?)라도 조금 안목이 나아지지 않았을까? 아니라도 최소한 외우기는 쉬웠겠다. ;;

 

많은 그림들을 다루다 보니, 그렇게 깊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가령 《모나리자 훔치기》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나 철학적 해석은 없다. 미술관에서 해설사로부터 해박한 설명을 듣는 느낌? .... 이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해야겠다. 다시 말하건대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번 달의 책은 두 권이 모두 그렇다. 짧은 리뷰가 게으름을 부린 것처럼 찜찜하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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