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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ㅣ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06_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1. 구체적 보편성
지젝이 해석하는 헤겔이 다 어렵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구체적 보편성’은 참 까다로운 개념이다. 일단 보편성universality, 특수성particularity, 단독성(개별성,특이성)singularity의 삼항조가 있다. 나는 가끔, 틀린 줄 알면서도 개념들을 짝 짓거나 줄 세우기 해버릴 때가 있다. 너무 복잡하니까, 이해를 위해 일단 가정을 하는 경우도 있고, 기억하기 위해 단순화해서 저장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면에서 본다면, ‘구체적 보편성’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호작용으로 탄생한 단독성? .. 정도로 가정하고 읽어 보자.
일단 지젝은 구체적 보편성이란 주관적 입장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독해의 경우, 독자-해석자의 주관적인 입장은 텍스트의 보편성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 인식하는 주체가 외부에 있을 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추상적 보편성에 불과하다. 주체가 내부의 운동에 개입할 때 비로소 구체적 보편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보편성은 그것을 더럽히는 특수한 내용에 시달린다. 반면에, 특수성 역시 내포된 보편성에 의해 잠식당하고 시달린다.
한때 유행했던 똘레랑스는 이 문제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아랍 여성들이 전통이라는 이유로 음핵 절제 수술을 받고 온몸을 뒤집어쓰고 다녀야 할 때, 그것은 아랍의 특수한 문화이므로 존중하고 관용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문제는 인권이라는 보편성이다. 아랍 여성들 역시 그들의 특수한 문화에 보편적 인권으로 저항한다. 특수성은 그 자체로 보편성에 의해 끊임없이 잠식당하는 것이다.
「‘구체적 보편성’은 특수한 것과 좀 더 넓은 전체 사이의 관계, 특수한 것이 타인들 및 그것의 맥락과 관련을 맺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것이 자신과 관련 맺는 방식, 그것의 특수한 정체성 자체가 내부로부터 분열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구체적 보편성’은 정확히 나의 특수한 정체성이 내부로부터 부식되며,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의 긴장이 나의 특수한 정체성에 내속적임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보편성은 오직 좌절된 특수성을 통해 또는 그것의 자리에서만 ‘대자적’으로 출현한다. 보편성은 특수한 정체성 안에 완전히 자신이 될 수 없는 무능력으로 자신을 새겨 넣는다. 즉 나는 특수한 정체성 속에서 나 자신을 실현할 수 없는 한에서 보편적 주체이다... 보편성은 나의 특수한 정체성 안에 그것의 단절로, ‘어긋남’으로 새겨질 뿐만 아니라 보편성 ‘그 자체’는 현실성 속에서 그저 내부로부터 모든 특수한 정체성을 봉쇄하는 이 절단일 뿐이다. 특정한 사회질서 내부에서 보편적 주장은 오직 특수한 정체성을 실현하는 것을 금지당한 집단만이 제기할 수 있다. p650」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 만이 ‘우리가 전부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 안에는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어긋남, 실패, 불완전성의 표상이기 때문에, 이 몫 없는 자들은 사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고 있다. 동일하게 최태섭의 『잉여사회』가 소묘하는 ‘잉여들’ 또한 구체적 보편성이다. 잉여가 우리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에서 현실화가 가장 철저히 좌절당한 세력이기 때문이며, 우리 사회의 상처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헤겔의 머리 아픈 개념들 중에는 ‘개념’도 있다. “본래의 ‘개념’은 ‘나’, 주체 자체이다.” 일단 개념이 나다, 개념이 주체다, 를 기억해 두고 다음의 문장을 이해해 보도록 노력해 보자.
「헤겔은 ‘주관적 논리학’의 시작 부분에서 개념의 ‘주관성’을 가장 간결한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먼저 개별성을 이렇게 규정한다. “〔개별성은〕개념이 자기의 규정성을 바탕으로 해서 펼쳐나가는 자기 자체 내로의 반성으로 나타난다. 결국 개별성은 개념이 자신을 통해서 행하는 매개이거니와 그 이유는 개념의 외타적 존재가 또다시 자신을 하나의 타자로 화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개념은 자기 자신과 동등한 상태로 회복되면서도 역시 이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 부정성이라는 규정하에서만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p655 」
웬만하면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정상이다. 나도 전혀 못 알아먹었다. 여기에 드디어 ‘개별성’이 나왔기 때문에 일단 인용해 놓은 것이다. 보편성과 특수성에 이은 나머지 하나의 삼항조인 그 개별성 말이다. 개념은 나 혹은 주체이고, (그래서?) 주관적인데, 이 개념이 결국 막 운동을 해서 출현한 것이 개별성이라는 뜻인가? ..라고 생각해 보고, 계속 읽어 보기로 한다.
「모든 개념 속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공존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즉 모든 개념은 규정상 보편적인 것으로, 일련의 특수한 것들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있는 단 하나의 추상적 특징을 가리키며, 정확히 바로 그러한 것으로서 항상 특수하다. p655」
「보편성과 특수성은 하나의 동일한 개념의 두 측면이다. 즉 그것의 ‘추상적’ 보편성 자체가 그것을 특수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은 미규정성과 규정성의 직접적 통일이다. p656」
「왜 그리고 어떻게 개념은 주관적인가? 먼저 그것은 오직 주체, 즉 추상화 능력을 갖춘 사유하는 존재의 정신 속에서만 그러한 것으로 정립된다.... 다음으로 훨씬 더 급진적인 의미에서, 즉 개별성으로의 이행은 주체적 개념으로부터 순수한 개념으로서의 주체(자아,나) 자체로의 이행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단독성 속에서의 주체는 키르케고르가 모든 보편적 매개로 환원 불가능한 단독성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p656」
여기서 단독성과 개별성이 동일하게 singularity의 번역어인지, 아니면 각각 다른 단어들의 번역인지 모르겠다. singularity는 역자에 따라, 단독성, 개별성, 특이성 따위로 옮겨지던데, 원문이 없으니 모르겠다. 이렇게 어려운 문장을 읽어야 할 때는 하나의 단어를 열쇠어로 따라가야 그나마 이해가 좀 쉬운 편인데, 한 단어를 여러 단어로 옮겨 버리면 정말 짜증이 난다. 그런 경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개별성은 individuality의 역어일 수도... 아 모르겠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절대적 모순은 오직 개념의 보편성이 그 자체로, 그 타자성, 모든 특수한 규정에 맞서 그 자체로 주장되거나 정립될 때만(또는 출현할 때만) 해결될 수 있으며, 그것들의 직접적 겹침은 매개될 수 있다.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 개념은 ‘자신의 피규정성으로부터 자신 속으로’ 돌아오며, 자신을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하지만 절대적 부정성 속에서’ 복귀시킨다. - 모든 실정적 내용을, 모든 특수한 규정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면서 말이다. 순수한 나 (데카르트적 코기토, 또는 칸트적인 초월론적 통각)는 단지 모든 한정적인 내용에 대한 그러한 절대적 부정일 뿐이다. 즉 모든 규정의 철저한 추상화의 공백, 모든 한정적인 사유가 비워진 ‘나는 생각한다’의 형식이다. 여기서 헤겔 본인이 ‘기적’이라고 언급한 일이 일어난다. 즉 모든 내용이 비워진 이 순수한 보편성은 동시에 ‘나’의 순수한 단독성이기도 한 것이다. p656~7」
결국 코기토가 순수한 보편성인 동시에 순수한 단독성이라는 말인가? 여기까지 읽으면 보편성과 특수성, 개별성 혹은 단독성의 관계가 머릿속에 똑 떨어지게 그려져야 하는 건가?
「이 나는 이러한 의미에서 순수한 보편성과 순수한 단독성의 일치이며, 철저한 추상화와 절대적 단독성의 일치이다. 그리고 헤겔이 ‘나’ 속에는 개념이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는 말로 겨냥하고 있던 것 또한 이것이다. p657」
앞부분에서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가,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보편성과 단독성의 관계가 논증된다. 그러면 이 두 부분은 어떻게 연결될까? 그래야만 이 삼항조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모순이 나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성에 의해 보편성과 나 사이의 모순이 해결된다. 즉 어떻게 순수한 나는 보편성과 단독성이 직접적으로 일치하며, 모든 한정적 내용을 배제하는 철저한 자기관계 맺기적 부정성의 심연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의지와 결단이라는 실천적 영역으로 들어간다. 즉 순수 개념으로서의 주체는 자유롭게 자신을 규정하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어떤 한정적인 특수한 내용을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한정된 내용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주체의 ‘내가 그렇게 원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다’에만, 하나의 세계를 안정화시키는 순수한 주체적 결단 또는 선택에만 근거하고 있다. p659」
여기서 지젝이 보편성universality, 특수성particularity, 단독성(개별성)singularity의 삼항조를 연결해서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전에 읽은 책들에서 이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서, 이 세 단어를 따라서 한 번 읽어 봤을 뿐이다. 그런데 단독성과 개별성이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하는지, 같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여전히 이 삼항조는 안개 속이지만 조금은 윤곽이 보이는 듯도 하고.... 뭐 그렇다. 어쨌거나 너무 길다. 망함;;
2. 헤겔, 스피노자 ..... 그리고 히치콕
헤겔과 스피노자 사이의 가장 순수한 대립은 ‘실체’ 에 있다. 스피노자의 절대자는 주체화하는 누빔점 없이 속성들과 양식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실체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클리나멘이다. 클리나멘은 들뢰즈의 개념인 줄 알았으나, 지식검색에 의하면 에피쿠로스가 이미 고대에 정립해 놓은 개념이란다. 사전적 의미는 ‘원자이탈’이며, 보통은 ‘관성적인 운동과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힘’으로 정의된다. 지젝은 ‘한정적인 존재자들을 낳는 실체의 휨’ 이라고 설명한다. 직선 운동을 하는 원자가 장애물에 부딪쳐 휘게 되는 현상으로, 이 우연적 휨은 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생성과 탈주를 가능하게 해주는 생산적인 힘이다. 그런데 지젝은 클리나멘을 보편화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클리나멘의 핵심적 측면이 소멸되어, 정반대의 것이 되고 만다고 한다.
「만약 존재하는 모든 것이 중단 또는 떨어져 나감이라면 놀라움, 즉 예상치 못한 우연성의 침입의 핵심적 측면은 사라질 것이며, 우리는 우연성이 완전히 예견 가능하고 필연적인 지루하고, 맥 빠진 세계 속에 놓일 것이다. p662」
이것이 누빔점이 없는 스피노자의 ‘실체’가 가진 문제점이다. 누빔점은 클리나멘의 연속적 흐름을 중단하고, 소급적으로 장 전체를 재구조화한다. 헤겔적 변증법적 과정이 바로 이런 누빔점, 즉 주인 기표의 도입이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문장 속에 언표의 흐름은 무한대로 이어질 수 없다.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언표들의 의미가 소급적으로 고정되고 하나의 문장이 완성된다. 그러나 마침표가 의미와 해석을 완전히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마침표는 항상 우연적으로 찍혀지면서 잉여를 낳는다. ‘법은 법이다’는 동어반복이 법의 의미를 완전히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이면의 어떤 과잉을 내포하는 것과 같다.
「헤겔을 스피노자로부터 분리시키는 간극을 정식화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클리나멘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이다. 스피노자적 실체는 다수의 클리나멘을 낳는 생산적 역능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서 자신의 산물들에 완전히 내재적이며, 오직 그러한 산물들, 클리나멘들 속에서만 현실적인 잠재적 독립체로 파악될 수 있다. 하지만 헤겔에게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다수의 클리나멘들은 실체 자체 속의 보다 철저한 클리나멘 -전도 또는 부정성- 을 전제한다. (실체가 또한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675~6 」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한 철저한 독해를 통해 실체는 다름 아니라 그것의 클리나멘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여기서 실체는 일자로 남아 있으며, 원인은 결과들에 내재적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 즉 실체는 없으며, 오직 절대적 간극, 비동일성으로서의 실재만 있을 뿐이며, 특수한 현상들은 이 일자들, 이 간극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다. p677」
3. 헤겔적 주체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헤겔의 ‘절대자’ 이다. 이것은 ‘실체는 주체’ 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양자는 즉각적으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체는 항상 이차적이다. 주체는 결코 모든 현실을 정초하는 직접적인 원리가 아니다. ‘절대적 자기정립’은 피히테의 개념이다. 헤겔의 ‘실체=주체’라는 생각은 여기에 맞선 무한판단의 작용이다. 무한판단은 ‘정신은 뼈다’, ‘생식기는 배뇨기다’와 같은 것이다. 실체의 불완전성, 내적 불가능성을 구현한 것이 주체이다. 주체가 정초적 원리가 아니라 이차적인 부정성이라고 단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주체는 모든 현실을 낳는 실체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정확히 절단, 실패, 유한성, 환상, ‘추상화’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는 단순히 실체는 ‘실제로’ 주체적인 자기매개의 힘 등이라는 것이 아니라 실체는 그것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겔이, 절대적 나의 자기정립이라는 피히테의 개념에서 정점에 달하는 ‘주체주의적’ 전통에 맞서 명확하게 본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주체가 먼저 오는 것이 아니며, 주체는 모든 것을 정초하는 일자의 새로운 이름이 아니라 일자의 내적 불가능성 또는 자기봉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p681~2」
「요약하자면 주체로서의 실체라는 헤겔적 모티브는 실재로서의 절대자는 단지 유한한 존재자들과 다르거나 구별되어 있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 절대자는 다름 아니라 이 차이이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에서 실재는 비동일성 자체이다. X가 ‘완전한 자신’이 될 수 없는 불가능성이다. 실재는 X가 자신과 동일하게 되는 것의 실현을 막는 외적 침입자나 장애물이 아니라 그러한 동일성의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불가능성이다... -불가능성이 먼저 오고, 외적 장애물은 궁극적으로 단지 이러한 불가능성을 실현시킬 뿐이다. 그 자체로서 실재는 불투명하고, 접근 불가능하고, 가닿을 수 없으며 그리고 부인할 수 없으며 우회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 안에서 결여와 잉여가 일치한다. p682~3」
주체는 무엇일까? 여기에 답하는 것은 물론 어렵다. 존재란 무엇일까라는 물음만큼이나 방대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주체란 그럼 사람이 아닌 것일까? 주체가 자기 부정성이며, 공백이며, 혹은 코기토에 불과하다면 사람과 주체의 관계란 무엇일까? 단순히 말해 나는 주체가 아닌 걸까? 내 기억으로는 지젝이 주체와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하여간 여기에 얼마간의 답이 있다.
「주체는 여기서 통상 '사람person'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립된다. 즉 ‘사람’은 ‘자아’의 실체적 풍부함을 대변하는 반면 주체는 부정적인 자기 관계 맺기의 특이점으로 수축된 이 실체이다. 여기서 주체-객체, 사람-물物이라는 두 쌍이 그레마스적인 기호론적 사각형을 형성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즉 만약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두 개의 대립물을 갖게 될 것이다. 즉 물론 자신과 반대되는 것(맞짝)은 ‘객체’ 이지만 그것의 ‘모순’은 ‘사람’이다. (순수한 주체성의 공백과 대립적인 것으로서의 내적 삶의 ‘병리적’ 풍부함). 이와 대칭적으로 ‘사람’에 대칭적인 맞짝은 ‘물物’이며, 그것의 ‘모순’은 주체이다. ‘물物’은 구체적인 생활세계에 끼워 넣어져 있는 어떤 것으로, 거기서 생활세계의 의미의 전체적 풍부함이 반향 되는 반면 ‘객체’는 ‘추상화’, 즉 생활 세계에 끼워 넣어져 있던 것에서 억지로 끄집어내진 어떤 것이다. 주체는 ‘물物’(보다 정확하게는 몸)의 상관물이 아니다. 사람은 몸속에 거주하는 반면 주체는 (부분) 대상의, 신체 없는 기관의 상관물이다. 따라서 사람-물은 주체-객체라는 쌍이 추론되는 출발점이 되는 생활세계의 총체성이라는 통념에 맞서 주체-객체(라캉적으로 표현하자면 $-a, 즉 빗금쳐진 주체와 한 쌍을 이룬 소문자 대상a)를 본원적인 것으로 주장해야 한다. - 사람-물이라는 쌍은 그것의 이차적 ‘순치’ 이다. 주체-객체로부터 사람-물로의 이행에서는 뫼비우스 띠의 안으로 접힌 관계가 사라진다. 사람들과 물들은 동일한 현실의 일부인 반면 객체는 주체 자체의 불가능한 상관물이다. p677~8」
문장 자체로는 이해가 가는데, 그럼 나는 언제 주체가 될 수 있나? 생활세계로부터 벗어나, 몸의 병리적 정념으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공백’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part of no part' 가 되면 주체가 되는 걸까? 혹은 'part of no part' 가 주체의 필요조건인 걸까? 이렇게 철학을 갑자기 삶 속으로 끄집어 들이면 안되는걸까? 철학과 삶을 접목시켜 읽는다는 것은 항상 어렵고 또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고 내가 왜 철학책을 읽는단 말인가..
「‘투시할 수 없는 원자적 주체성’ 속의 인격성, 나의 모든 긍정적 속성을 넘어선 ‘나’의 심연 또는 공백은 개념적 단독성〔특이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념의 ‘실제로 존재하는’ 추상화이다. 즉 그러한 추상화 속에서 개념의 부정적 힘은 현실적 실존을 획득하며, ‘대자적인 것’ 이 된다. 그리고 라캉의 $, ‘빗금 처진’ S는 정확히 그러한 개념적 단독성〔특이성〕, 어떠한 심리적 내용도 없는 특이성이다. p689」
이것은 개념의 보편성이 ‘외적 현실’로 이행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보편성은 자신의 대립물의 형태로 즉 현실의 다수성이 순수한 단독성으로 수축되는 형태로 현실적 존재를 얻는다. 일단 단독성과 보편성, 개념과 현실의 관계가 언급되었으므로, 명기해 둔다. 어쨌거나 $가 단독성이네 뭐. 제대로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4. 절대적 앎
헤겔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 중에 ‘역사의 종말’ 이나 ‘절대적 앎’ 따위가 있다. 물론 헤겔이, 자신이 사는 역사적 순간에 역사가 종말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구절들이 충분히 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절대적 앎 역시 통상 오인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즉 헤겔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한계, 즉 우연적인 역사적 맥락에 끼워 넣어져 있음에도 우리는 -또는 적어도 헤겔 본인은- 어쨌든 이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절대지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가 절대적 앎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표시 자체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절대적 앎에 이르게 되어 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절대적 앎’이란 우리 자신의 ‘단지 주관적인’ 관점의 상대성을 지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외적 참조점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703」
쉽게 말하면 이렇다. 만약 우리 앎은 주관적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 주관성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인가?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외부의 절대적 관점을 끌어들이게 된다. 헤겔은 이 문제를 거꾸로 해결한다.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 앎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외부란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 앎은 거기서 모든 앎이 종결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만약 헤겔의 절대적 앎을 ‘끝마무리하는 점을 찍는’ 행위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전통적 형이상학이 종결되는 계기인 동시에 같은 이유로 헤겔 이후의 사유의 광대한 영역이 열리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헤겔 본인의 체계를 종결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사유에서 배제된 다수의 것을 위한 공간을 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최종적 종결이라는 헤겔적 계기를 요약하는 최고의 방법은 청년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사용한 정식을 반복하는 것이다. “길이 끝나고, 여행이 시작된다.” 원은 닫히고 우리는 끝에 다다랐으며, 내재적 가능성은 소진되고, 그리고 이 똑같은 지점에서 모든 것이 열린다. 오늘날 헤겔주의자가 되는 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과거의 불필요한 짐을 떠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시작할 능력을 되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704」
절대적 앎은 ‘무한판단’으로 읽을 수 있다. ‘정신은 뼈다’ 는 골상학의 터무니없음이다. 정신을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음에 대한, 그 불가능성에 대한 표현이 무한판단이다. “절대적 앎은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헤겔이 달성했다고 주장하는 우주에 대한 총체적 지가 아니라 그러한 주장의 터무니없음 자체를 가리키는 역설적 이름이다.”
5. 이념의 변비?
헤겔의 비판자들은 헤겔이 소화시키지도 못할 것을 삼켜 변비에 걸렸다는 것이고, 지젝은 거꾸로 헤겔이 한 일은 정확히 그 반대인 배변이었다고 반론한다. 이념은 변비가 아니라 배설이다. 여하튼 더러운 똥 얘기는 잠깐 미루고 색깔 얘기에서 시작하자.
「생명은 푸르며, 개념들은 회색이고, 개념들은 구체적 현실을 해부하며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본래적인 의미의 철학적 사유는 그러한 ‘추상화’ 과정이 현실 자체에 내속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될 때 시작된다. 경험적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적 규정들 사이의 긴장은 현실에 내재적이며, ‘물 자체’의 특징이다. .... 회색, 맥 빠지고 어리석은 현실인 것은 이론 없는 생명이다. - 그것을 푸른색으로, 진정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 현실을 움직이게 하는 매개들과 긴장들의 기저에 깔린 복잡한 네트워크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론뿐이다. p707~8」
풍부한 규정들이 아니라 추상화가 생명을 불어 넣는다. 중요한 것은 개념적 규정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름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름이 사물의 내적 잠재력을 강조해준다. 누구를 ‘선생님’ 이라 부를 때, 그 호칭은 내가 그에게 기대하는 바의 개요를 그려준다. 어떤 것을 ‘의자’ 라고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물의 잠재성을 조명해 주는 것은 그것에 대한 호칭이다.
다시 똥 이야기로 돌아와서,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은 헤겔적인 절대적 실체-주체를 변비에 걸린 것으로 본다. 장 안에 소화되지 않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체계는 ‘정신이 된 배腹’ 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시원한 ‘배변’ 이다.
「주체 자체는 폐기된 또는 깨끗하게 치워진 실체, 자기 관계 맺기적 부정성의 텅 빈 형식의 공백으로 환원된, ‘인격성’의 모든 풍부함이 비워진 실체이다. p715」
헤겔이 절대적 앎이라고 부르는 것의 주체는 이렇게 텅 비워진 주체인데, 무슨 변비는 변비냐는 말장난 되겠다. 또한 놓아주는 것, 풀어주는 것, 즉 배변은 헤겔적 개념의 전개가 완결되면서 일어난다.
「개념의 전개가 완결되면서 절대 이념의 원환을 닫을 때 이념은 결심 또는 결단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을”을 자연 속으로 “풀어주는 것이다. p715」
「그렇다면 바로 이런 식으로 헤겔의 ‘철학의 세 번째(?번역이 이상한 듯;; 그럼 첫째, 둘째 삼단논법이 있나?;; ) 삼단논법’, 정신-논리학-자연을 읽어야 할 것이다. 즉 사변적 운동의 출발점은 정신적 실체이다. 주체들이 그것 안으로 잠겨든다. 그런 다음 끈질긴 개념적 분투를 통해 이러한 실체의 풍부함이 기저에 깔린 논리적 또는 개념적 구조로 환원된다. 일단 이러한 과제가 완수되면 완전히 발전된 논리적 이념이 자신으로부터 자연을 풀어 놓을 수 있다. p720」
‘절대자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 한다’ 는 ‘주체 없는 과정’ 이라는 명제와 동일하다. 이 둘을 대립시킨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은 틀렸다.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이야말로 가장 급진적인 ‘주체 없는 과정’ 이다.
「 말년의 저술에서 알튀세르는 이 점을 깨닫게 되지만 여전히 그에게 모호하게 남았던 것은 헤겔적인 변증법적 과정이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이 정확히 어떻게 헤겔의 기본적인 명제 ‘절대자는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되어야 한다’는 명제와 동일한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였다. 순수한 주체가 공백으로 출현하는 것은 체계란 대상 자체가 자신을 추동하거나 이끌 어떠한 주체적 행위자도 필요 없이 자신을 전개하는 것이라는 개념과 엄밀하게 상관적이다. 헤겔적인 자기의식을 일종의 메타주체로, 개별적인 인간 정신보다 더 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정신으로 다루는 것이 오류인 것은 이 때문이다. p726」
6장 역시 복잡하지만, 결국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도 파악해야 되는 절대자라는 것이 라캉의 대타자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빗금쳐진 대타자. W(hole). 여기서 hole은 주체로서 실체의 공백, 불가능성을 구현하는 것이 아닐까. hole은 대타자의 빗금쳐짐과 주체의 빗금쳐짐이 겹치는 것으로, 대타자의 빗금쳐짐에 직면할 때 주체는 소외에서 분리로 이행한다. 등등... W(hole)은 보편성, 빗금쳐진S - $는 단독성이자 곧 구체적 보편성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