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고구려, 백제의 왕 순서 따위를 외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태정태세~”에 비하면 생뚱맞게 느껴지는 이름들이라 거리감이 더 컸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외우기를 잘했다 싶다. 광개토대왕이니 장수왕이니, 좀 들어봤다 싶은 왕들도 사실 몇몇 업적이나 알았지, 고구려 전체 역사에서 어떤 맥락 아래 놓이는지는 몰랐다. 왕들을 주~욱 꿰고 나면, 한 왕조의 탄생과 성장, 절정과 쇠락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을 수 있다. 전기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듯 말이다.

 

시험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요즘 시험은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의 관계와 그 흐름을 묻는 것이 많다. 앞뒤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니, 왕들의 순서를 알아두면 아주 유리하다.........만, 외우기가 싶지는 않다. 다행히 인터넷에서 좋은 자료를 얻어 한결 수월하게 외울 수 있었다. 자료의 주인장에게 감사드린다.

 

http://blog.naver.com/tiranomaster/10139981772

(아쉽게도 2016년 11월 현재, 이 사이트는 비공개로 돌려져 있다.)

 

 

Ⅰ. 삼국의 성장

 

<최태성의 개정 고급 한국사> 강의와 교재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각 요런 성장 곡선을 가지고 있다. 삼국의 성장은 대체로 고대국가의 기틀 마련, 개혁 정치, 그리고 전성기의 순으로 이어진다. 고대국가 완성에 꼭 필요한 네 가지 요소는 율령반포와 정복활동(영토 확장), 왕위세습, 불교의 공인이다. 불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데올로기로 왕권강화에 기여했다.

 

 

1. 고구려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사 전근대편>

 

1세기 태조왕과 2세기 고국천왕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3세기 동천왕 때 중국 위나라의 침략을 받았으나, 4세기 초 미천왕이 낙랑군을 몰아내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위기는 4세기 중반, 안팎에서 몰아닥쳤다. 중국 전연의 침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기도 했고,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당하며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치욕을 겪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뒤를 이은 소수림왕의 개혁정치는 고구려에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고국양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광개토대왕이 등장한 것이다. 청년군주는 정복전쟁에서 연승을 거듭했다. 거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장수왕은 5세기를 고구려의 시대로 우뚝 세워놓았다. 장수왕은 전쟁보다 외교에 능했으며, 백제의 한성을 공략할 때도 치밀한 전술 아래 움직였다. 삼국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장이 되었던 한강유역이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문자왕 때는 고구려의 영토가 최대였다고 전해진다.

  

 6세기와 7세기는 고구려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한강 회복을 꿈꾸던 백제의 성왕과 뒤늦게 성장했으나 어느덧 훌쩍 커버린 신라의 협공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국제정세 또한 불리하게 돌아갔다. 위진남북조의 오랜 혼란기를 끝내고 중국 대륙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언제나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해온 고구려였지만, 통일된 중국은 고구려에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수문제와 수양제의 거듭된 침략을 물리치며 민족사에 살수대첩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고구려의 힘은 쇠퇴해 갔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자, 영류왕은 친당정책을 폈지만 당태종의 야심은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몰고 왔다. 천리장성을 축조하며 대비책을 강구했지만 내분 속에 영류왕이 살해되고 연개소문이 실권을 장악했다. 당태종은 이것을 꼬투리 삼아 침략해 들어왔고, 고구려는 위기를 겪으며 끝내 당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러나 고구려의 국운은 이미 멸망을 향해 있었으니....

 

 

2. 백제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국사 전근대편>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다. 3세기 고이왕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개혁정치를 추진했고, 4세기 근초고왕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일찍이 중국과의 교류로 선진문물을 재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마한을 병합하고, 요서를 공략했으며,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동진과 동쪽으로는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침류왕 때 불교를 받아들였다.

 

 

  

 

4세기 말부터 삼국의 주도권은 고구려로 넘어가고 있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압박으로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을 모색했다. 비유왕 때 신라의 눌지마립간과 나제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장수왕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을 빼앗겼다. 문주왕은 웅진으로 쫓겨 가야 했다. 웅진성 천도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동성왕 때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왕권을 다져나갔다. 6세기 초 즉위한 무령왕은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그의 무덤으로 더 유명하지만, 백제 중흥의 발판을 놓은 강력한 왕이었다. 무령왕의 치세로 부강해진 백제를 이어받은 성왕은 사비 천도를 단행했다. 한강유역을 되찾는다는 백제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아들뻘인 신라의 진흥왕과 손잡고 성왕은 마침내 한강유역을 회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한강상류는 신라가, 한강하류는 백제가 가진다는 약속을 깨고, 진흥왕이 한강하류를 공격했다. 배신에 울분을 삼키던 성왕은 진흥왕과 관산성에서 운명의 일전을 벌였다. 6세기는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백제가 아니라 신라의 손을 들어주었다.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백제 중흥의 꿈도 막을 내렸다.

 

7세기 백제는 신라를 거세게 몰아붙였지만, 오히려 백제 멸망을 재촉한 결과를 가져왔다. 무왕 때부터 백제는 신라를 수 십 차례 공격했다. 의자왕은 신라 선덕여왕을 궁지에 몰며 대야성 등 4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고구려, 왜 등과 동맹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마침내 김춘추가 당태종을 찾아가기에 이르렀으니.... 백제도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3. 신라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국사 전근대편>

 

신라는 늦된 나라였다. 4세기 말 내물마립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김씨 세습이 이루어졌다. 이전까지 신라는 박,석,김 세 성씨가 돌아가며 나라를 통치했다. 통치자의 명칭도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순으로 변화를 거쳤다.

 

4세기말 내물마립간 대에 신라는 왜에 의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내물마립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은 오만의 군사를 보내 왜를 물리쳐주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내정간섭을 받아야했다. 5세기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해 오자 눌지마립간은 백제의 비유왕과 동맹을 맺었고, 이후 소지마립간 때는 백제의 동성왕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맹을 강화했다. 소지마립간은 역사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지만 신라의 개혁군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중앙의 행정체계를 정비했고 경주에 동시라는 시장을 열었다.

 

6세기의 시작과 함께 신라는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렸다. 지증왕은 신라라는 국호와 왕호를 처음 사용했다. 우산국 복속은 독도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유명하다. 법흥왕은 신라의 진정한 개혁군주였다. 신라의 상징인 골품제가 율령과 함께 정비되었다. 이차돈을 순교시킴으로써 신라도 드디어 불교를 공인하였다. 병부를 만들고 금관가야를 정복했다. 진흥왕의 치세를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6세기를 신라의 시대로 만든 진흥왕은 신라인에게는 위대한 왕이지만, 배신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약 120년 이어져온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뒤통수를 쳤을 뿐만 아니라 노비출신으로 하여금 성왕의 목을 치게 함으로써 백제의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오명을 감수하고 얻은 대가는 컸다.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진흥왕이 함경도에서 경상도까지 땅땅 땅땅땅 세워 놓은 순수비는 그의 위세를 짐작하게 해준다.

  

 

진흥왕 이후의 신라에 대해서는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았다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팩션 드라마라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화백회의에 의해 쫓겨난 진지왕, 그 뒤를 이은 진평왕, 진평왕의 맏딸인 선덕여왕, 선덕여왕의 사촌쯤 되는 진덕여왕 등의 통치 순서와 선덕여왕 때의 백제와의 충돌 등은 사실이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듯이,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 직면해 당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았다. 삼한일통의 꿈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Ⅱ. 7세기 불붙은 동아시아

 

7세기 고구려는 영류왕과 보장왕,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 신라는 진평왕과 선덕여왕-진덕여왕-무열왕-문무왕이 집권했다. 한편으로는 천리장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당과 화친하려 했던 영류왕은 연개소문에 의해 살해되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은 왕위에 오른 후 당태종의 침략을 받았다. 645년 안시성 싸움으로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고구려는 당의 골칫거리가 된다. 백제는 무왕 때부터 신라를 거세게 몰아붙였고 의자왕 때에는 4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4세기 말 내물마립간 때의 절체절명의 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선덕여왕은 당과 화친을 맺으며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했지만, 국운을 건 한판의 승부가 다가오고 있었다. 최초의 진골왕에 오르게 될 김춘추는 고구려와 일본에게 동맹을 제의했지만 실패하고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는데....

 

648년 신라 진덕여왕 2년, 드디어 당태종과 김춘추가 나․ 당 연합을 결성했다. 당태종으로서는 어떻게 해봐도 정복할 수 없었던 고구려를 정벌할 훌륭한 계책이었고, 신라로서는 백제의 등쌀에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삼한을 통일할 신의 한수였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신라인에게 한반도 전체에 대한 민족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까? 이때 체결된 나당연합은 당태종의 사망으로 660년에 가서야 비로소 실행되었다.

 

 나․ 당 연합군의 1차 표적은 백제였다. 백제는 기벌포 전투와 황산벌 전투에서 거듭 패함으로써 660년 마침내 7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마감했다. 진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김춘추,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정복한 다음해에 삼국통일의 과업을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백제는 망했지만 이후 3년 동안이나 부흥운동이 지속되었다. 주류성과 임존성을 중심으로 항전하였는데 지도층의 내분으로 실패했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참전이다. 일본은 수백 척의 전선을 만들어 백제를 도우러 달려왔다. 663년 백강에서 일본군이 당군에게 패하고, 백제 부흥운동도 끝이 났다. 일본왕은 왜 모든 국력을 쏟아 부어 백제를 구원해야 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의 조선술은 신라에게 배운 것이라는 점, 그래서 일본의 전선들이 맥을 추지 못했던 것일까?^^;;

 

 

다음 순서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668년, 역사에 이렇다 할 전투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망했다. 연개소문 사후 극심한 권력 쟁탈전의 와중에 침략을 당한 고구려는 차라리 스스로 무너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구려도 마지막 부흥운동의 불꽃을 피웠다. 특이한 점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신라가 도와주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고구려가 망하자 당은 숨겨놓은 야욕을 드러냈다.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고구려 땅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까지, 한반도 전체를 꼴깍 삼키려고 덤벼들었다. 670년 나․ 당 연합은 나․ 당 전쟁으로 돌변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도우면서까지 당의 침략을 물리쳐야 했다. 675년 매소성 전투와 676년 기벌포 전투에 승리하면서, 신라는 가까스로 당의 야욕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른바 삼국이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통일된 신라의 국경은 대동강에서 원산만 까지였다. 이민족을 끌어들인 결과 우리민족은 넓디넓은 요동벌판을 잃어버렸다. 후대의 입장에서 당시의 신라를 비난할 수 없다고는 해도 아쉽지 않을 수는 없다.

 

 

 

 

다행히 신라가 잃어버린 땅에는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발해가 들어서고, 우리역사는 남북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통일신라가 중국의 당과 함께 200여년의 역사를 이어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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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부의 최대 고비가 일제 강점기 국외 저항 부분이 될 것 같다. 도무지 정리가 안 된다. 몇 일째 한숨을 쉬다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대충 큰 그림만 그려 보았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는 주로 만주와 연해주다.

현재 중국은 만주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만주는 동북 3성(둥베이 3성)으로 불리고 있는데, 행정구역상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의 3개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지도상으로는 만주와 동북3성이 딱 일치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두산 백과 사전>

 

간도는 우리나라 국경과 인접해 있는 만주의 남동쪽 지역으로 현재 이 명칭도 사라졌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69>

 

좀 더 분명하게 그려놓은 사진도 인터넷에는 많다.  물론 자료마다 조금씩 지형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충 엇비슷하다.

 

 

   

간도에는 이미 19세기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가 살았다. 자연재해와 삼정의 문란으로 조선 땅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이 지역의 농경지는 대부분 이들 조선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간도 관리사가 파견되고, 통감부가 파출소를 설치할 정도였으니 실효적 지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간도가 법적으로 청으로 넘어간 것은 1909년 청과 일본 사이의 간도협약에 의해서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은 입 한번 뻥긋 하지 못하고, 일본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대가로 간도를 넘겨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도를 둘러싼 청과 조선간의 영토 분쟁은 숙종 당시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의 해석을 두고 후대에 와 이견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서위압록 동위토문”이 청과 조선의 국경에 대한 정의인데, 도무지 이 토문이 어디냐를 두고 대한제국 시기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의 손에 의해 뺏겼다. 여하튼 이런 역사를 가진 간도이니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독립 운동가들에게 1순위의 국외 독립 운동 기지였음에는 틀림없다.

 

연해주는 1860년 러시아가 2차 아편전쟁의 강화조약(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청으로부터 넘겨 받았다. 러시아는 여기에 블라디보스톡(동방을 정벌하라! 혹은 동방의 등불...뭐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한다)을 건설하였다. 조선인이 처음 연해주로 건너간 기록은 1863(4)년 무렵으로 나와있다. 대여섯 가구가 살길을 찾아 이름도 낯선 러시아 땅으로 넘어갔는데,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하기 위해 조선인의 이민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 결과 1880년대까지 연해주에는 조선인이 러시아인보다 많았다. 물론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이 훨씬 많이 진출했다. 이 조선인들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대거 중앙아시아로 옮겨가야 했다. 여하튼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연해주 역시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또 하나의 훌륭한 선택지였다.

 

 

간도와 연해주 !

이리하여 복잡다단한 항일 독립 운동의 계보는 여기, 간도와 연해주에서 시작된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15>

 

한일 병합 후 1910년대는 나라밖에 독립 운동의 기지를 만들어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나라 안의 움직임도 비밀 결사의 형태였다. 이런 작업이 3.1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1911년 이회영 육형제 등이 서간도의 삼원보로 집단 이주하였다. 경학사와 부민단이라는 자치조직을 만들고,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 학교를 세웠다. 여기서 활약한 독립군 군대는 서로군정서이다.

 

북간도에는 중광단과 대한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한일합병 이전에 이미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같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군대조직으로는 중광단의 지원을 받는 북로군정서와 대한 국민회의 지원을 받는 대한 독립군이 있었다.

 

연해주에는 권업회와 성명회가 있었다. 이후 이상설이 주도한 대한 광복군 정부와 3.1운동 직후 손병희가 주도한 대한 국민 의회가 만들어 졌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0>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맞아 드디어 3.1 운동이 터졌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독립 운동은 일본의 통치형태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어 놓았다. 더 큰 영향은 국내와 국외의 항일 운동에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1920년대의 각종 대중운동과 노동자․ 농민의 쟁의, 그리고 국외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무엇보다 독립 운동을 위한 통일된 지도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1919년 9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3>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2>

 

이후 임시정부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지만, 끝내 김구가 지켜낸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조직을 재정비하여, 건국 작업을 착착 진행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1>

 

3.1 운동 한 달 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 운동 인사들은 무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3.1 운동을 촉발했다. 3.1 운동 직후 이들 지역에서는 20여개의 독립군 부대가 지역의 한인 단체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활동하였다. 그 중 독립 운동사에 길이 남는 전투가 바로 1920년의 청산리 대첩이다.

 

1920년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20) 일본군은 만주로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훈춘사건(20)을 조작하였다. 마적단과 짜고 만주의 일본 관공서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일본은 대규모의 군대를 만주로 진입시켰다.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한 독립군 부대들은 협력하여 대항하였고,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한 부대는 엿새 동안 청산리 부근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청산리 전투,20) 봉오동과 청산리의 빛나는 승리로 독립군은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국내의 민족 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1>

 

그러나 상황은 매우 심각해졌다. 일본군이 독립 운동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간도의 양민을 대량 학살했다.(간도 참변,20) 더 이상 간도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독립군은 러시아를 향해 떠났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밀산에서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 독립 군단을 형성했다. 서일의 지도 아래 김좌진과 홍범도의 군대도 합류 하였으나, 김좌진은 도중에 만주로 돌아오고, 홍범도는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자유시를 거쳐 연해주에 정착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홍범도는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생을 마쳤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47>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간 대한 독립 군단은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학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자유시 참변, 21) 러시아 혁명 후 어지러운 러시아 군부 내의 권력 다툼 과정 중 일어난 참변이었다. 독립군은 다시 간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5>

 

독립군은 일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한인들로부터 예전처럼 긴밀한 협력을 받을 수는 없었다. 독립군은 조직을 재정비하여 비슷한 시기에 남만주에 참의부와 정의부, 북만주에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이들 3부는 독립군이 만주의 한인 이주민과 함께 생활하고 이들의 권익을 지키면서 독립 전쟁을 모색한 사실상의 군정부였다. 민정과 군정을 함께한 자치 정부라 할 수 있다.

 

1925년은 국내외에 중요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 개헌을 했고,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은 중국인 군관 학교인 황포 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국내에서는 조선 공산당이 수립되었고, 사회주의자를 표적으로 하는 치안 유지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만주에서는 만주 군벌과 일본 사이에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다. 우리 독립군을 체포하거나 신고하면 포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자유시에서 참변을 겪고 돌아온 독립군은 중국과 일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사태에 직면했다. 1920년의 빛나는 승리 이후 1920년대는 만주의 독립군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4>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 말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났다. 비록 완전한 통합에는 실패했지만, 북만주의 혁신 의회와 남만주의 국민부로 재편되었다. 30년대 초 이들 조직은 각각의 당과 군사 조직도 갖추었다. 혁신 의회는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을,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30년대 초에 한국 독립군은 북만주에서,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에서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0년대의 국외 독립운동은 3.1운동 직후의 빛나는 승리와 이어지는 시련, 그리고 30년대를 준비하는 조직 개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8>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겪으며, 그 타개책으로 일본은 침략 전쟁을 선택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점령하였다.  미쓰야 협정으로 격화된 20년대 중국과 독립군 사이의 적대적 감정이 일제의 만주사변으로 인하여 돌변했다. 중국과 독립군이 드디어 진정한 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1932년 김구가 결성한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상하이를 점령하고 승전 기념식을 올리던 일본군 수뇌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중국 정부를 이끌던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 고 높이 평가했다. 이를 계기로 한중 연합의 분위기는 급상승 하였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각 독립군들도 중국 군대와 연합하여 치열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8>

 

북만주(혁신 의회)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와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남만주(국민부)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1930년대 중반에는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상당수의 독립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복잡한 이합집산을 거쳐 중국 관내로 이동한 독립군 세력은 민족 혁명당(35)을 수립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그러나 민족 혁명당을 구성한 여러 정파는 곧 분열되었다. 당시 상하이에서 이동 중이던 김구의 임시정부는 35년에 민족 혁명당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한국 국민당을 만들었다. 민족 혁명당에서 탈당한 정파들은 40년에 김구의 한국 국민당과 결합하여 충칭에서 한국 독립당을 구성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민족 혁명당의 중심 세력이던 김원봉은 여러 정파들이 탈당한 이후 조선 민족 전선 연맹으로 재정비하고 38년에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를 창단하였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군사조직이다. 조선 의용대는 41년 호가장 전투를 거치면서 나누어 졌다. 김원봉이 이끄는 일부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42년 임시정부의 직할부대인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다른 일부는 중국 화북지방인 옌안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는데, 이름을 조선 의용군으로 바꾸고, 조선 독립 동맹 산하로 들어갔다.

 

한편 30년대 후반까지 중국 관내로 내려가지 않고,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군대가 있었다. 주로 사회주의자인 이들은 동북 항일 연군을 조직하여 국경 부근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러시아로 넘어갔다. 동북항일연군은 연합군의 성격이었고 여기에 조국광복회가 속하였는데 그 중심인물이 김일성이다. 조국광복회의 보천보 전투는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이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8>

 

1945년 해방되기 직전 나라 안팤에는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는 다섯 개의 주요 건국 세력이 형성되었다.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화북의 조선 독립 동맹, 러시아의 동북항일연군, 미국의 이승만과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 동맹이 그것이다.

 

김두봉이 중심이 된 조선독립동맹의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화북지방에서 활약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여 항일 투쟁을 벌이다 이후 연합군의 요청으로 인도, 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고, 미군과 협력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김구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해 온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백범일지>”

 

「급박하게 이루어진 일제의 항복 선언으로 유격대 출신 인사들 가운데 일부가 소련과 함께 국내로 진격하였을 뿐, 준비해 온 해외 무장 세력의 통일도, 대대적인 국내 진격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해방, 김구의 탄식은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우려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9> 」

 

한국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성공했더라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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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연 2021-10-2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리 짱입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대원군은 종로를 비롯 주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웠다. 조선군의 사망자는 350여명, 미군의 사망자는 3명뿐인 신미양요 직후의 일이다. 조선의 주전척화파는 “병인년부터 양이들을 배척해온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로 화친은 절대 논할 수 없습니다.”며 의기양양했다. 조선군이 얼마나 죽었든 조선 땅을 뺏기지 않고 통상도 하지 않았으니 승리한 전쟁이었다. 이미 청나라는 1842년에 영국에 의해, 일본은 1854년에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했다. 그러니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연거푸 물리친(?) 조선으로서는 척화비가 너무나 당당했을까?

 

척화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끌고 와 통상을 요구했다. 1868년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한 바로 그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무서운 속도로 개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채 10년이 되지 않은 1876년에 군함을 이끌고 와 조선을 강제 개항시켰다. 조․ 일 수호 조규, 이른바 강화도 조약이었다.

 

개항과 개화가 대세가 된 이후에도 조선은 제대로 된 개화작업을 추진하지 못했다. 1880년에야 김홍집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고, 개화작업을 총괄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외세의 간섭이 없었다면 개화의 길은 순탄했을까? 그러나 동양의 개화라는 것이 이미 제국주의에 의해 이루어진 만큼, 잔잔한 물결 위로 순항하는 개화란 애초부터 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조선은 왜 그렇게 다른 길을 걸어야 했을까?

 

조․ 일 수호 조규의 부속 조약인 조․ 일 무역 규칙의 3無 조항은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조선의 경제 기반을 몰락시켰다. 조선후기에 싹을 틔우며 성장하던 자생적 수공업은 무관세로 들어오는 싼 면제품과 공산품에 의해 무너졌다. 무제한 곡물 유출이 허용됨으로써 엄청난 양의 곡물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곡물이 부족해진 조선은 폭등하는 곡물가격에 신음했다. 기층 민중의 경제가 파탄 난 것이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터졌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던 구식군인의 폭동으로 시작했지만 곧 도시빈민이 합세하여 궁궐을 불태우고 일본인 교관을 죽이는 등 사태가 심각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요청에 의해 들어와 난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납치해갔다. 임오군란으로 청나라 군대뿐만 아니라 일본 군대까지도 조선에 주둔하게 됐다. 군란이 진짜 군란을 초래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의 수위를 높여갔고, 조선의 두 갈래 개화파는 더욱 격하게 대립했다. 민씨 정권과 결탁한 온건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동도서기식 개화를 추구했다. 반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보기로 삼은 급진개화파는 문명 개화론을 주장했다.

 

1884년 급진개화파는 말 그대로 급진적 방식을 택했다. 일본군의 도움을 믿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짧은 교전 끝에 일본군은 물러나고 청군이 사태를 장악함으로써 김옥균, 박영효 등은 3일천하를 마감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이 내세운 14개조의 개혁안은 입헌군주제와 신분제 폐지 등을 담고 있는 최초의 정치 개혁안으로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 때문에 토지개혁 같은 가장 절실한 개혁안을 담지 못했고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갑신정변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 땅에서 언제든지 부딪힐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청과 일본은 텐진조약을 맺어 동시 철군할 것과 향후 파병시 상대국에게 통보할 것을 약속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수세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텐진조약을 통해 거의 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였다. 10년 후 텐진조약은 청․일 전쟁의 빌미가 되는데, 이 10년 사이 일본은 절치부심 국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 10년 동안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국가에 변란이 터질 때마다 외세에 의존하고, 그 결과 외세의 간섭은 극심해지고, 경제는 거덜이 나고 있는데, 조선은 이 귀중한 10년을 왜 그렇게 허망하게 놓쳐버린 것일까?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운동 사이, 딱 10년 동안 물론 조선도 동도서기식 개혁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혁에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건전한 재정확보가 1차 과제가 되어야 한다. 요즘도 그렇지만 국가 재정은 탄탄한 민중경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 이래 각종 불평등 조약으로 민중 경제는 파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씨 정권은 봉건적 착취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하려 했다. 기본조세에 각종 무명잡세까지 백성의 등골을 뽑는데다가 그나마 중간에서 착복하는 수령들이 부지기수였다.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20권 '망국'  p34>

 

“결국 개화와 근대화는 재정개혁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개혁의 주체여야 할 ‘위’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손대지 못한 채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구체제에 균열을 내는 일은 결국 ‘아래’의 몫 이었다. p34”

 

동학농민운동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전봉준이 봉기를 위해 돌린 사발통문에는 이런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더라. p54” <만화 조선왕조실록 20권>

 

고부군수 조병갑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고부봉기가 가라앉을 즈음 다시 기름을 부은 것은 안핵사 이용태다. 백산에 다시 모인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 승리하고, 이어서 전주성을 접수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59>

 

비극은 외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민씨 정권에서 비롯되었다. 청군을 불러들인 것이다.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들어올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청군을 불러들이고, 일본군이 들어오자 마치 몰랐다는 듯이 허둥댔다. 일본군은 제물포로 상륙하면서 그들의 표적이 동학농민군이 아니라 경복궁임을 뚜렷이 드러냈다.

 

현명한 쪽은 전장의 농민군과 장수였다. 화약을 맺어 농민군은 철수하고,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실행하기로 합의했다. 청․ 일 양군을 철수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은 철군을 거부했다. 청․ 일 양군이 남아서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이 거부하자, 다짜고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 함대를 포격했다. 청․ 일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조선 왕실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79>

 

일본은 조선을 내정 개혁한다는 명분을 위해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1차 갑오개혁이다. 대한민국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한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 이렇게 일본의 손에 의해 시작되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것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차 갑오개혁의 핵심은 왕권을 약화시켜 입헌군주제적 성격을 갖추고, 신분제 등 전근대적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다. 김홍집과 흥선대원군의 연립 내각으로 구성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은 민심 수습용일 뿐 실권이 거의 없었다.

 

대원군은 비밀리에 청군과 동학농민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아래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위에서는 청군이 협공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전쟁 초반부터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있었다.

 

전주화약 후 농촌으로 돌아가 집강소 활동을 하던 농민군은 이른 가을겆이를 마치고 삼례에 다시 집결하였다. 조정을 유린하는 일본군에 대한 분노에 대원군의 밀서가 힘을 보탠 것일까? 일본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총 집결하여 한양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보국안민의 굳은 결의만으로는 우금치를 넘을 수 없었다. 일본군의 무라다 총 앞에 하얀 눈처럼 쓰러져 갔다. 2차 동학농민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후방의 동학농민군을 제거한 일본은 2차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대원군을 날리고, 친일 개화파 박영효를 김홍집의 파트너로 삼았다.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정리, 반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홍범14조가 그것이다. 홍범이란 홍익인간 할 때의 그 ‘홍’에 규범, 규칙 등의 ‘규’, 즉 '큰 법'이라는 뜻이다.

 

이듬해인 을미년에 청․ 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강화조약인(강화는 싸움을 끝내고 화해를 한다는 뜻)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등을 할양 받았다. 하지만 주변 열강들이 이 꼴을 곱게 두고 볼 턱이 없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삼국은 일본을 압박하여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찍소리 못하고 삼국간섭을 받아들이는 것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명성왕후였다.

 

명성왕후와 고종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기로 마음먹고, 박영효에게 역모죄를 씌웠다.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 두 번째로 망명길에 올랐다. 삼국간섭으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은 명성왕후의 행보에 독기를 뿜었다. 자칫하다가는 청이 아니라 조선마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차마 상상하지 못한 일을 벌였다.

 

다시 대원군이 이용되었다. 대원군과 훈련대는 명성황후 시해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방패막이로 현장에 불려나와 있었다. 훈련대 대원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해도 대원군은 어땠을까? 1863~1873년까지의 고종 10년간의 개혁은 대원군의 혁혁한 치적이다. 그러나 이후 대원군의 행보는 원칙도 기준도 없는 권력욕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시해를 결행한 것은 일본낭인들이었다. 여우사냥이란 이름으로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명성왕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어떠했든, 혹은 어떠해야 하든, 을미사변 그 자체는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을미사변 후 3차(갑오1,2차에 이은) 을미개혁이 단행되었다. 김홍집은 여전히 살아남아 유길준과 함께 을미개혁을 지휘했다. 을미개혁은 곧 단발령으로 대표된다. 단발령은 을미사변보다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양반을 중심으로 한 을미의병을 촉발했다.

 

왕후를 잃은 고종의 마음은 어땠을까? 왕후를 처참하게 살해한 일본의 감시 아래서 고종은 어떤 내일을 계획했을까?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했다. 고종의 전격적인 아관파천으로 일본은 손안에 넣은 조선을 다시 한번 놓쳤다. 또 러시아였다. 러시아로 일본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승부수는 1904년 러․ 일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약 8년간의 시간을 벌어들였다. 그 귀 중한 시간동안 고종은 무엇을 하였을까?

 

1897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에 즉위했다. 황제라니?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제국주의의 수탈 아래 곧 숨이 넘어가는 나라가 제국은 다 무엇이며 황제는 무엇인가 싶어, 늘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 허세야말로 열강의 발아래 짓밟히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서재필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갑신정변 후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은 성공하여 미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1896년 고종의 후원아래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때까지 독립협회는 일종의 관민 가버넌스라 할 수 있다. 그런 독립협회를 고종은 왜 군사를 동원하면서까지 해산했을까?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18>

 

배재학당에서 열었던 토론회가 성공하자 서재필은 토론회를 독립협회로 확대했고 드디어 종로 한복판에서 민중을 상대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이를테면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못지않은 엄청난 민중이 모였다. 만민공동회의 힘은 막강하여 광우병 시위가 이루어내지 못한 엄청난 성과를 얻었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무산시키고, 러시아 고문을 돌려보냈으며, 한러 은행의 문을 내렸다. 뜻하지 않은 승리에 만민공동회는 환호하며 자신감에 넘쳤다.

 

그러나 고종은 분노했다. 러시아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고종이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재정고문과 군사고문을 요청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사실 시큰둥했다. 괜히 일본과 영국 등의 심기를 거슬러 만주를 노리는 러시아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봐 였다. 그런 러시아이니 만민공동회가 오히려 고마웠는지도 모른다. 조선 민중의 뜻이 그렇다면 알았다고, 즉각 철수해버렸다. 고종은 서재필을 추방해 버렸다. 미국인 서재필 역시 깔끔하게 떠났다.

 

 

윤치호가 맡은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에 몰두했다. 중추원을 의회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이미 만민공동회는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국정을 질의․ 질타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대신들을 날려 보낼 정도로 막강해지고 있었다. 고종은 중추원 설립을 받아들였다. 만민공동회는 어느새 대신들에게 토론회 참석을 종용하고, 밤샘 시위를 벌여 대신들의 참석을 끌어냈다. 여기서 정부대표 박정양과 독립협회 윤치호, 그리고 민중의 대표로 백정출신 박성춘이 똑같은 단상에 올라 연설을 했다. 민의의 승리였다. 헌의6조라는 이름으로 채택된 건의안을 고종은 받아들였다. 헌의의 ‘헌’은 헌납, 헌정 할 때의 그 드린다는 뜻이다. 헌의는 의견을 드린다는 것.

 

 

고종은 곧바로 뒤통수를 쳤다. 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도모하려 한다는 익명서를 근거로 독립협회의 간부를 체포했다. 시위하는 민중들을 황국협회를 시켜 공격했다. 몇 번의 힘겨루기 끝에 결국 고종이 승리했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12월 25일 군대에 의해 해산당하고 독립협회는 문을 닫고 독립신문은 자연 폐간되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망국' p214>

 

1899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의 광무개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원수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황제 휘하에 두고 황제권의 강화를 추구했다.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겠다는 것. 개항이후 온건개화파가 추구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론과 맥을 같이한다. 고종의 西器는 기술학교, 전화, 전차, 지계(토지소유증명서) 같은 것들이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개혁을 위해 고종은 힘껏 노력했다. 그러나 외세가 아가리를 벌리고, 재정은 열악하고, 민중의 힘도 짓밟아 없앤 상황에서 언제까지 사상누각 같은 개혁이 가능했을까? 민중이 지지하는 내정 개혁 없이 근대적 개혁은 어차피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종은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날렸다. 동학농민운동과 독립협회. 이제 남은 것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 뿐.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01>

 

1904년 러․ 일 전쟁이 터졌다.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던 러시아와 일본은 여타 열강들과의 이권 등 복잡한 정세 속에 결국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같은 해 일본은 한․ 일 의정서를 맺어 조선의 광대한 영토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체결된 제1차 한․ 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는 사실상 일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재정과 외교 고문을 파견하여 고문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1905년 러․ 일 전쟁의 종전을 앞두고 일본은 사전 정지 작업을 했다. 카쓰라-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에는 필리핀을 주는 대신 대한제국은 일본이, 제2차 영․ 일 동맹으로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대한제국을 차지한다는 약속을 했다. 이어 미국의 주선으로 강화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지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완전히 손을 털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으로 근근이 버텨오던 대한제국은 이제 오롯이 일본의 손아귀 안에 놓였다. 곧바로 제2차 한․ 일 협약 즉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하는 통감정치가 시작되었고,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민영환이 자결하고,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싣고, 나철, 오기호가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고, 의병이 궐기했어도 일본의 야욕은 거리낌 없이 진행되었다.

 

1907년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했다. 만국평화회의. 만국이란 제국주의 여러 나라를, 평화란 평화롭게 식민지를 갈라먹자는 뜻이라는 것을 고종은 몰랐던 걸까? 회담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만,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폐위 당하고 한․ 일 신협약, 즉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번에는 군사권의 강탈이었다.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렸다.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고,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지만, 망국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09년 사법권을 빼앗기고(기유각서), 1910년 결국 국권을 빼앗겼다(경술국치). 조선왕조 500년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끝났다. 1908년 장인환과 전명훈의 총탄도, 1909년 안중근의 총탄도 망국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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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하면 다 안다는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강의, 전근대편을 마치고 근현대편을 시작했다. 중학교때 배운 국사가 학교교육의 전부라 그걸 다 듣고 외우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렇게 상세하게 알아야 하나 싶기도 했는데, 문제집을 풀어보니 진짜 다 알아야했다. 그러고도 교재에 없는 문제도 보인다.

 

근현대편은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 전후부터 시작하니, 공부삼아 듣고 있어도 참 깝깝하다. 그것이 지나간 과거의 치욕만이라면 차라리 웃고 말겠지만, FTA 같은 현대판 통상조약과 겹치는 부분도 많아 참 씁쓸하다. 1876년에만 아무것도 모르고 당한것이 아니라, 지금도 모르고 그러는지 알면서도 그러는지 비슷하게 당하고 있는 것 같다.

 

론스타가 외환은행 먹튀를 하고도 모자라 우리 정부를 상대로 5조원 소송을 하고 있다. 한미 FTA 체결 당시 독소조항으로 격렬한 반대를 일으킨 투자자·국가간 소송(ISD) 항목의 결과다.  조·일 수호조규의 부속 조약인 조·일 통상 장정의 무관세 항목을 연상시킨다. 조선은 이 무관세 항목이 얼마나 커다란 독소조항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4년이 지나서야 새로 협상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과거로 현재를 비추어 보는 것, 그것이 역사의 힘인 것 같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7>

 

동아시아 삼국 중 가장 먼저 강제 개방을 당한 나라는 청이다. 그 유명한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42년 영국과 난징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는데, 조선의 온건 개화파들이 지지한 양무운동이 있다. 중체서용中體西用. 본체는 중화이나 서양의 문물을 이용한다? 막 해석하면 그렇다. '교육학용어사전' 이라는 것의 풀이는 이렇다. : 중국 본래의 유학()을 중심으로 하되 부국강병()하기 위해 근대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어쨌든 이 중체서용을 본따 조선의 온건개화파들은 동도서기西 를 주장한다. 중체서용의 조선판이 동도서기다. 동양의 정신을 지키되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인다.

 

일본을 개방시킨 것은 미국이다. 태평양을 건너 딱 마주쳤겠지.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맺었다. 이때 당한 불평등 조약을 일본은 20년이 조금 지나 고스란히 조선에 써먹었다. 강제 개항후 1868년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다. 1868년이면 조선은 병인양요(1866) 후에 오페르트라는 독일인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했던 사건이 벌어져 대원군이 외세에 더욱 강렬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때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후 딱 8년만에 후다닥 배워온 기술로 운요호사건을 일으키고 조선을 강제 개항했다. 10년이 안돼 서양제국주의의 기술을 마스터한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너무너무 성공적으로 개혁작업을 완수했다. 적이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강화도 조약 체결 후 조선이 나아간 꼬라지를 보면 더욱 비교가 된다.

 

그리고 조선은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개항을 당한다. 일본은 서양열강들이 조선을 개방하기 이전에 조선에 대한 선점권을 갖기 위해 서둘러 운요호를 출동시켰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4>

 

 

조선의 해안가에 서양 선박들이 수시로 나타난 것은 이미 19세기 초부터다. 그러니 일본도 마음이 급했겠지. 조선인의 용기인지 대원군의 고집인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선은 1866년 프랑스 군함을(병인양요), 1871년 미국군함을(신미양요) 물리치고 떡하니 척화비를 세워놓고 있었다. 

 

1866년 평양의 대동강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선박은 제너럴셔먼호이다. 이때 평양감사가 박규수이다. 1862년 임술농민봉기가 한창일 때 안핵사로 내려가 삼정이정청 설치를 건의했던 그 박규수, 박지원의 손자이다.  북학파의 대표인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할아버지의 명성에 걸맞게 조선 개화파의 대부로 성장한다. 온건개화파도 급진개화파도 모두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서양문물을 배우고 토의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866년에 박규수는 우리 백성을 노략질하는 미국의 제너럴셔면호에 불을 질러 홀라당 태워버렸다. 군관이 협력, 화공으로 물리쳤다. 제너럴셔면호의 선원은 모두 죽었고, 이 사건을 빌미로 5년후 미국은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로 쳐들어온다. 그것이 신미양요이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35>

 

병인양요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재미있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고 있자 신경이 거슬리던 대원군이 어떻게 프랑스의 힘을 빌려보려고, 프랑스 선교사와 비밀리에 전략을 짰는데 실패하고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위정척사파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된 대원군이 180도 방향을 선회, 병인박해를 일으켜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 신자 수천명을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다. 그러자 대원군의 SOS를 모른척 하던 프랑스 함대가 순식간에 강화도로 달려와 병인양요가 일어났다고 한다. 대원군으로서는 이이제이를 노려본 것인데, 일은 안되고 욕만 먹게 생기자, 그 화풀이를 무고한 천주교도들에게 한 셈이 되어버렸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32>

 

1차 침입때 조금만 더 들어왔으면 한양이다. 여하튼 2차 침입때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물리쳐, 프랑스군은 퇴각했다. 이때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있는 문서들을 불태우고 멋지게 보이는 책들만 들고 튀었다. 그것이 최근 외규장각문서 반환 협상에 의해 5년간 대여 갱신의 형태로 국내에 들어와 있는 그 책들이다. 정식명칭은 외규장각의궤이다.

 

덕진진, 초지진, 광성진은 신미양요때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어재연이 결사항전하다 죽었던 곳이 광성보?, 광성진? 이다. 신미양요때는 조선인이 300여명 죽고, 미국인은 3명 죽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통상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그래서 대원군이 의기양양 척화비를 꽂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32>

 

이 할아버지는 생긴 것처럼 무서운 위정척사파의 거두다. 1860년대, 막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전투가 벌어질 때,  척화주전을 외치던 통상수교 반대파이다. 전쟁불사의 기개를 드러냈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왠지 서글프다. 1870년대, 개항을 반대하던 최익현 할아버지도 있다. 위정척사의 아이콘이라 할만하다. 을사늑약 후 결국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40>

 

1880년대에 위정척사를 이끌었던 이만손이라는 할아버지도 있다. 이황의 핏줄이라고. 그래서 1881년 미국과 통상수교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결사반대, 영남 만인소를 지휘했다.영 남 유생 만명이 반대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6년 조·일 수호 조규에 이어 1882년 조·미 수호통상 조약이 맺어졌다.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맺고도 어영부영하다가 4년이나 지난 1880년에야 청의 제도를 본따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통리'는 통괄적으로 관리한다. '기무'는 근본이 되는 일 혹은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일이다. '아문'은 뭐 그냥 아문인 것 같다. 여하튼 개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기관이다. 그 결과 다음 해인 1881년에는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보내고,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개화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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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정치를 알려면 붕당의 흐름을 빼놓고 갈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붕당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좁게는 선조부터 정조까지 200여년을, 넓게는 여말선초부터 개화기까지, 조선 500년을 통틀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합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EBSi  한번듣고 다섯번 이해하는 한국사>

 

 

조선 건국을 반대하던 온건파 개혁세력은 낙향하여 향촌에 뿌리내립니다. 조선은 부•목•군•현까지 수령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지만, 향촌에는 실질적으로 두 세력이 존재합니다. 수령을 필두로 한 중앙정치세력과 향촌자치를 지향하는 사림세력입니다. 사림은 유향소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향약을 보급하여 농민들을 장악하는 한편, 사학기관인 서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합니다. 중종 때 주세붕이 풍기에 세운 백운동서원이 최초의 서원이지만, 이전에도 사림세력은 꾸준히 인재를 배출합니다. 세종 때 길재의 제자 김숙자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뒤이어 성종 때부터는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세력들이 주로 3사에 진출하여 훈구세력을 비판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종은 세조의 계유정난을 통해 공신이 된 훈구세력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충돌은 16세기 전반기의 4대 사화로 절정에 치닫습니다. 첫 충돌은 무오사화(연산군,1498)입니다.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그 발단이 됩니다. 중국의 의제를 애도한다는 이 글은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를 비난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어 지극히 위험했습니다. 누설되지 않아야 할 사초가 연산군의 귀에 까지 들어가, 성종이후 기세 좋게 성장하던 사림세력은 철퇴를 맞습니다.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보고 ‘무어야?’ 했다고 무오사화.. 요렇게 외운다고도 합니다. ;;)

 

<한국사 능력검증시험 : 조의제문>

 

6년 뒤에 일어난 갑자사화(1504)는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한 것이라, 사림세력 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도 함께 화를 당했습니다. (엄마의 원수를 갑자! ... 갑자사화;;)

 

중종반정 후 중종은 조광조를 전격 발탁하여 개혁을 추진합니다. 조광조는 위훈삭제, 방납폐단 지적, 소격서 폐지 등의 급진적 개혁과 함께 향약과 소학을 보급하여 사림세력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한편, 현량과를 설치하여 사림 출신 인재를 대거 요직에 천거합니다. 왕 보다 더한 권력이 조광조에 집중되는가 하는 순간, 중종은 돌연 조광조를 역모로 몰아 단숨에 처형해버립니다. 조광조는 한번만 중종이 친히 국문을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끝내 중종은 조광조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조광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이 기묘한 중종의 변심이 바로 기묘사화(1519)입니다.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이란 글자가 너무너무 기묘해서.. 기묘사화 ;;)

 

인종은 즉위하자마자 8개월 만에 승하했습니다. 인종의 죽음과 이복동생 명종의 즉위를 둘러싸고 양측의 외척 간에 일어난 왕위계승 다툼이 을사사화(1545)입니다. 이 역시 훈구의 사림 공격은 아니지만 을사사화를 통해 많은 사림들이 다쳤습니다. (양쪽이 으샤으샤 왕 만들기에 나서서... 을사사화;;.. 이렇게라도 외워야 한다는 사실 ㅠㅠ)

 

이렇게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는 사림세력들이 계속 화를 입지만, 사림의 지반이 워낙 넓고 단단하여 부단히 인재를 양성, 중앙정계에 올려 보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선조 시대부터 사림세력이 훈구척신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합니다. 드디어 사림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림은 분열을 시작합니다. 붕당 정치의 시작입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232>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200여년의 세월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처음 올린 도표에는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16세기말 선조 때 집권에 성공한 사림은 곧바로 분화됩니다. 이때부터 17세기말 예송논쟁까지의 1oo년 정도는 붕당정치의 시대입니다.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p126>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전랑’직을 둘러싼 대립입니다. 전랑은 이조와 병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가리키는 말로, 당하관 이하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문반관료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정랑은 품계 상으로는 높지 않은 관직이나, 홍문관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주로 임명되며, 재상으로 오르는 요직이었습니다. 3사 관원을 선출하는 통청권과 자신의 후임을 천거하는 자대권도 있어 붕당들은 이조 정랑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을 거듭했습니다.

 

1572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심의겸이 반대하였습니다. 1575년에는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전랑에 천거되었으나, 이번에는 외척이라 하여 김효원이 반대하였습니다. 이 대립을 기화로 동쪽에 사는 김효원의 세력은 동인, 서쪽에 사는 심의겸의 세력은 서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동인은 주로 조식과 이황의 학풍을 이어받은 영남학파가, 서인은 주로 성혼과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은 기호학파가 속하였습니다. (외우기 쉽게 영남은 한반도의 동쪽, 기호는 한반도의 서쪽인 것을 연상하면 ;;; ) 그러나 조식과 이황은 자신들이 동인의 태두가 된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으며, 이이는 붕당이 생길 것을 경계해 오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지자 오히려 이를 무마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후세에 붕당 계보의 꼭대기에 늘 오르는 이황과 이이이지만, 실제로 이들에게 붕당의 책임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동인과 서인이 크게 맞붙은 첫 번째 사건은 ‘정여립 모반’입니다. 정여립은 서인이었으나 동인으로 옮겨간 인물입니다. 전라도에서 신망이 컸으며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술 대회를 하는 등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대동계는 전국적으로 커나갔는데, 이때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이 들어옵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의 조사 책임자가 그 유명한 송강 정철입니다. 정철은 이 사건을 확대하여 동인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힙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수 백 명을 죽음으로 몰고간 정철은 동인의 공적이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인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건저의 사건입니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는 일을 말합니다.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잡게 된 동인은 기축옥사의 책임을 물어 정철을 처벌하려 합니다. 이때 동인은 정철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파-북인과,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남인으로 나뉩니다. 북인은 서경덕과 조식의 학풍을 계승한 사림이, 남인은 이황 학파가 주류를 이룹니다. 북인은 기축옥사 당시 정철에 의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반면, 남인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습니다. 

 

사림세력의 동서분당과 동인의 남북분당까지가 모두 선조 대에 임진왜란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북인과 남인, 서인이 서로 갈라져 싸우는 와중에 일본이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1> 

 

실천을 강조한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은 북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앞장섰습니다. 의병활동의 대명사이자 의병을 처음 조직한 곽재우는 조식의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기도 했습니다. 이런 성향과 맞았는지 선조를 대신해 임란을 진두진휘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북인이 정권을 잡습니다. 북인은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과 함께 몰락합니다.

 

인조반정은 서인의 주도 아래 남인이 가세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조와 효종 시기는 서인이 정권을 주도하며 남인과 대립합니다. 서인의 영수는 송시열입니다. 송시열은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서인의 영수로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다가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나 오래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1차 예송논쟁입니다. 예송논쟁이 발생한 이유는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기 때문입니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왕재의 자질이 뛰어났으나 그 뛰어남으로 인해 인조의 시기를 받고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조선왕조의 많은 독살설 중에 가장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소현세자의 독살설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비인 며느리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그 아들들도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서둘러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합니다. 봉림대군 즉 효종은 즉위부터 그 정통성에 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갔지만 청의 뛰어난 문물을 보고 아버지와 달리 청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함께 청에 갔던 봉림대군은 청에 대한 반감을 버리지 않았던지 아니면 그를 왕위에 올려준 인조와 서인세력에 반대할 수 없었던지 하여간에, 즉위후 북벌을 내세우며 왕위 계승의 정당성 문제를 덮으려고 하였습니다.

 

예송논쟁의 핵심은 효종을 사대부와 같은 기준으로 볼 것이냐, 사대부와 다르게 특별 우대할 것이냐에 있습니다. 서인의 주장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계모 자의대비는 아들의 상복을 1년만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대부의 예법과 동일한 것으로서, 장남이 죽으면 어머니는 3년 복을, 차남이 죽으면 1년 복을 입는 것이 원칙입니다. 남인의 주장은 효종이 이미 왕이 되었으므로 사대부와 같은 기준에 따를 수 없으며, 이미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적장자에 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계속 차지했던 쪽은 서인입니다.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에 휘말린 현종은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는 적˙중자 구분 없이 복제를 규정하고 있는 <경국대전> 에 따르는 것으로 봉합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서인이 주장한 1년 복을 입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서인이 승리한  1차 기해 예송은 논쟁의 핵심 문제였던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이냐 중자 즉 차자로 볼 것이냐에 대한 결정을 비껴간 탓에 2차 예송의 불씨를 남기게 됩니다.

 

현종은 비대한 서인정권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던 차에 2차 예송논쟁이 터집니다. 효종의 비가 승하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는 다시 며느리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사대부의 원칙에 따르면 큰며느리는 1년 복을, 작은 며느리는 9개월을 입어야 합니다. 다시 서인은 작은며느리의 기준으로 9개월을, 남인은 큰며느리의 기준으로 1년을 주장하며 대립합니다. 현종의 입장에서 서인은 왕을 일개 사대부와 똑같이 취급하는 건방진 붕당인 반면, 남인은 왕을 존중하는 왕 친화적 붕당입니다. 현종은 논쟁에 직접 개입하여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에서 아버지 효종을 장자로 규정하며 왕권을 강화하지만,  논쟁 직후 갑자기 승하합니다.  새로 즉위한 숙종이 서인을 축출함에 따라 인조반정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남인이 집권하며 정권 교체가 이루어집니다.

 

한갓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나라가 덜썩이며 정권이 뒤바뀌는 모습이 우리의 눈에는 매우 기이해 보입니다. 그러나 양란 이후의 혼란에 더하여 경신 대기근이라는 참혹한 재난을 겪은 조선의 사림들은 이를 하늘의 견책 즉 견고로 받아들입니다. 예송논쟁은 예에 어긋난 인간의 행위가 하늘의 노여움을 불러 일으킨다는 성리학적 사고를 가진 지배층들에게는 사회 안정과 국가 존립에 직결된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이 만들어 놓은 남인정권으로 시작합니다. 14세에 등극한 소년 왕, 숙종은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틀렸다’고 꾸짖을 만큼 당당하고 강력한 왕의 모습을 보입니다.  단종 이래 200년만에 탄생한 적장자의 적장자로 정통성이 강력한 왕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말, 선조 때 드디어 훈구척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림은 17세기 말, 숙종 초까지, 100년에 걸쳐 이른바 ‘붕당정치’를 실현합니다. 상대당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견제 속에 정국이 뒤바뀌어 왔지만, 상대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공존의 정치를 이루었습니다.

 

숙종은 치열한 붕당 대립이 벌어지는 한가운데에 직접 뛰어들어 한쪽 당의 편을 들어 정권을 뒤바꾸는 환국정치를 실행합니다. 한 당에게 장기집권을 허용하지 않고, 번갈아 정권을 뒤집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합니다.

 

1680년 이제 기틀을 잡고 있던 남인정권은 사소한 꼬투리에 의해 순식간에 서인정권으로 교체됩니다. 경신환국입니다. 경신환국에 의해 남인 정권은 거의 궤멸에 이릅니다. 이를 경신 대출척이라고도 합니다. 남인잔당의 처벌을 놓고 뿌리까지 철저히 뽑아야 한다는 강경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가 맞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됩니다. 노론은 이이의 학풍을, 소론은 성혼의 학풍을 이은 세력이 주를 이룹니다. 후일 숙종의 후계를 놓고 세자(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의 대립이 격화됩니다. 노론은 송시열이 소론은 윤증이 영수가 됩니다.

 

1689년 숙종의 두 번째 환국, 기사환국이 발생합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중의 하나인 장옥정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습니다. 숙종은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에 봉하려 했으나 서인은 극렬 반대합니다. 이를 계기로 숙종은 송시열을 사사하고 서인(특히 노론)을 축출합니다. 정권은 다시 남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고 중인 출신의 장옥정을 왕비에 봉합니다. 그러나 경신환국으로 이미 쇠락해 있던 남인은 정권을 잡고도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1694년 숙종의 세 번째 환국인 갑술환국은 장옥정의 몰락과 함께 시작됩니다. 숙종은 장옥정을 폐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킵니다. 장옥정을 지지했던 남인은 경신환국으로 쇠락해 있던 상황에서 갑술환국을 겪으며 붕당의 역사에서 거의 사라집니다. 정권은 다시 서인으로 넘어갑니다.

 

경신, 기사, 갑술. 15년 만에 세 번의 환국이 일어났습니다. 최종 승리는 서인이 차지합니다. 경•기•갑 !  (역시 경기가 갑입니다?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기호학파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기호지방은 경기와 충청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경기갑 ;;; 저는 이렇게 외웠습니당. )

 

 

서인에게 정권을 돌려 준 숙종은 세자를 폐하고 싶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습니다. 경신대출척을 기점으로 이미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있던 서인은 갑술환국 이후 세자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합니다.  소론은 세자를 보호하고 지지하지만, 노론은 세자를 폐하고 무수리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후계로 세우려 합니다. 노론은 숙종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자는 가까스로 왕위에 오릅니다. 경종입니다.

 

경종은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어서 즉위하자마자 노론으로부터 연잉군을 세제에 봉하고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도록 압박을 받습니다. 경종은 유약한 겉보기와 달리 노론의 압박을 슬기롭게 헤쳐 나갑니다. 목호룡의 고변 사건 등으로 세제 연잉군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형인 경종은 노론은 탄압해도 동생인 연잉군만은 끝까지 보호합니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대립 속에 경종은 4년만에 승하하고, 세제인 연잉군이 왕위를 몰려 받습니다. 영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약점과 세자가 아닌 세제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 그리고 경종 독살설의 배후라는 소문으로 인해 줄곧 정통성 문제에 시달립니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지만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에게도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또한 붕당의 싸움으로 인해 세제 시절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붕당을 없애고 탕평의 정치를 이루고자 합니다.

 

“탕평(蕩平)’이란 ≪상서 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제5조인 <황극설 皇極說>의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에서 나온 말로서, 본래는 인군(人君)의 정치가 편사(偏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皇極)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물론 조선후기 탕평정치는 영조 이전 숙종 때 시도되었습니다. 숙종은 두 차레에 걸쳐 탕평 교지를 내립니다. 숙종의 탕평은 큰 효과보다는 왕의 개입에 따라 붕당들이 국혼을 정쟁의 중심으로 삼도록 만들었습니다.

 

영조는 탕평정책을 펴지만 노론의 지지로 집권한 태생적 한계 때문에 노론탕평이란 평을 듣기도 합니다. 영조의 탕평을 완론탕평, 정조의 탕평을 준론탕평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완론緩論은 글자 그대로 부드럽게 논하는 것을, 준론峻論은 준엄하게 논하는 것을 뜻합니다.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시키는 것”(위키백과)을 완론탕평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위키백과)을 준론탕평이라고 합니다.

 

완론탕평은 각 당의 당파색이 옅은 인물을 고루 등용합니다. 기계적인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현대정치에서도 경상도 장관 몇명에 전라도 장관 몇명 씩의 구색을 맞추는 정권이 있습니다. 영조 전반기는 이렇게 탕평을 추진하지만, 영조 후반기에 가서는 노론이 일방적으로 정권을 쥐게됩니다.

 

준론탕평은 각 당파의 주장을 준엄하게, 강력하게 주장하도록 합니다. 단 시시비비에 맞아야 합니다. 당파에 관계없이 올바른 주장을 하는 인물이 등용됩니다. 준론탕평은 시시비비를 올바로 가릴 수 있는 현명한 왕만이 실행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자신감이 충만했고, 실제로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노론의 강력한 견제 속에서도 정조는 남인 출신의 채제공, 정약용 등을 등용합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이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큰별샘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영조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사도세자의 죽음입니다. 정조가 집권하며 사도세자의 문제가 재론되자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나뉩니다.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강경세력이 주축을 이루며 정조의 준론탕평에 반대합니다. 시파는 노론 온건세력에 소론과 남인이 참여하였으며, 정조의 준론탕평을 통한 왕권강화를 지지합니다.

 

영조와 정조가 통치한 18C의 약 80년은 ‘탕평정치'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붕당 간의 세력을 조정하던 왕권은 사라지고, 정권은 몇몇 세도 가문의 손아귀로 떨어집니다.

 

19C 전반 순조, 헌종, 철종, 3대 60여년은 ’세도정치‘의 시대입니다. 밖에서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가 침략의 손길을 턱밑까지 뻗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은 몇몇 가문의 손아귀에서 곪아터졌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250여년의 기나긴 사림 세력들의 붕당 정치도 막을 내립니다. 

 

왕조가 바뀌든 지배세력이 바뀌든 계속되어야만 하는 민생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세도정치 시기는 민란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

 

 

 

 [H]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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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자 2022-08-2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수고많이 하셔서 만들었습니다. 복사해서 틈틈이 익히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ㅎㄹ옇러ㅗㅎ 2022-12-1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리 제일 깔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