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치를 알려면 붕당의 흐름을 빼놓고 갈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붕당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좁게는 선조부터 정조까지 200여년을, 넓게는 여말선초부터 개화기까지, 조선 500년을 통틀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합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EBSi 한번듣고 다섯번 이해하는 한국사>
조선 건국을 반대하던 온건파 개혁세력은 낙향하여 향촌에 뿌리내립니다. 조선은 부•목•군•현까지 수령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지만, 향촌에는 실질적으로 두 세력이 존재합니다. 수령을 필두로 한 중앙정치세력과 향촌자치를 지향하는 사림세력입니다. 사림은 유향소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향약을 보급하여 농민들을 장악하는 한편, 사학기관인 서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합니다. 중종 때 주세붕이 풍기에 세운 백운동서원이 최초의 서원이지만, 이전에도 사림세력은 꾸준히 인재를 배출합니다. 세종 때 길재의 제자 김숙자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뒤이어 성종 때부터는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세력들이 주로 3사에 진출하여 훈구세력을 비판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종은 세조의 계유정난을 통해 공신이 된 훈구세력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충돌은 16세기 전반기의 4대 사화로 절정에 치닫습니다. 첫 충돌은 무오사화(연산군,1498)입니다.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그 발단이 됩니다. 중국의 의제를 애도한다는 이 글은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를 비난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어 지극히 위험했습니다. 누설되지 않아야 할 사초가 연산군의 귀에 까지 들어가, 성종이후 기세 좋게 성장하던 사림세력은 철퇴를 맞습니다.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보고 ‘무어야?’ 했다고 무오사화.. 요렇게 외운다고도 합니다. ;;)
<한국사 능력검증시험 : 조의제문>
6년 뒤에 일어난 갑자사화(1504)는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한 것이라, 사림세력 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도 함께 화를 당했습니다. (엄마의 원수를 갑자! ... 갑자사화;;)
중종반정 후 중종은 조광조를 전격 발탁하여 개혁을 추진합니다. 조광조는 위훈삭제, 방납폐단 지적, 소격서 폐지 등의 급진적 개혁과 함께 향약과 소학을 보급하여 사림세력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한편, 현량과를 설치하여 사림 출신 인재를 대거 요직에 천거합니다. 왕 보다 더한 권력이 조광조에 집중되는가 하는 순간, 중종은 돌연 조광조를 역모로 몰아 단숨에 처형해버립니다. 조광조는 한번만 중종이 친히 국문을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끝내 중종은 조광조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조광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이 기묘한 중종의 변심이 바로 기묘사화(1519)입니다. (나뭇잎에 새겨진 ‘주초위왕’이란 글자가 너무너무 기묘해서.. 기묘사화 ;;)
인종은 즉위하자마자 8개월 만에 승하했습니다. 인종의 죽음과 이복동생 명종의 즉위를 둘러싸고 양측의 외척 간에 일어난 왕위계승 다툼이 을사사화(1545)입니다. 이 역시 훈구의 사림 공격은 아니지만 을사사화를 통해 많은 사림들이 다쳤습니다. (양쪽이 으샤으샤 왕 만들기에 나서서... 을사사화;;.. 이렇게라도 외워야 한다는 사실 ㅠㅠ)
이렇게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는 사림세력들이 계속 화를 입지만, 사림의 지반이 워낙 넓고 단단하여 부단히 인재를 양성, 중앙정계에 올려 보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선조 시대부터 사림세력이 훈구척신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합니다. 드디어 사림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사림은 분열을 시작합니다. 붕당 정치의 시작입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p232>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200여년의 세월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처음 올린 도표에는 조금 더 상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16세기말 선조 때 집권에 성공한 사림은 곧바로 분화됩니다. 이때부터 17세기말 예송논쟁까지의 1oo년 정도는 붕당정치의 시대입니다.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p126>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전랑’직을 둘러싼 대립입니다. 전랑은 이조와 병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가리키는 말로, 당하관 이하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문반관료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정랑은 품계 상으로는 높지 않은 관직이나, 홍문관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주로 임명되며, 재상으로 오르는 요직이었습니다. 3사 관원을 선출하는 통청권과 자신의 후임을 천거하는 자대권도 있어 붕당들은 이조 정랑을 둘러싼 치열한 대립을 거듭했습니다.
1572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심의겸이 반대하였습니다. 1575년에는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전랑에 천거되었으나, 이번에는 외척이라 하여 김효원이 반대하였습니다. 이 대립을 기화로 동쪽에 사는 김효원의 세력은 동인, 서쪽에 사는 심의겸의 세력은 서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동인은 주로 조식과 이황의 학풍을 이어받은 영남학파가, 서인은 주로 성혼과 이이의 학풍을 이어받은 기호학파가 속하였습니다. (외우기 쉽게 영남은 한반도의 동쪽, 기호는 한반도의 서쪽인 것을 연상하면 ;;; ) 그러나 조식과 이황은 자신들이 동인의 태두가 된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으며, 이이는 붕당이 생길 것을 경계해 오다 동인과 서인이 갈라지자 오히려 이를 무마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후세에 붕당 계보의 꼭대기에 늘 오르는 이황과 이이이지만, 실제로 이들에게 붕당의 책임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동인과 서인이 크게 맞붙은 첫 번째 사건은 ‘정여립 모반’입니다. 정여립은 서인이었으나 동인으로 옮겨간 인물입니다. 전라도에서 신망이 컸으며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술 대회를 하는 등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대동계는 전국적으로 커나갔는데, 이때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이 들어옵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의 조사 책임자가 그 유명한 송강 정철입니다. 정철은 이 사건을 확대하여 동인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힙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수 백 명을 죽음으로 몰고간 정철은 동인의 공적이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인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건저의 사건입니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는 일을 말합니다.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하다가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잡게 된 동인은 기축옥사의 책임을 물어 정철을 처벌하려 합니다. 이때 동인은 정철을 죽여야 한다는 강경파-북인과,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남인으로 나뉩니다. 북인은 서경덕과 조식의 학풍을 계승한 사림이, 남인은 이황 학파가 주류를 이룹니다. 북인은 기축옥사 당시 정철에 의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반면, 남인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습니다.
사림세력의 동서분당과 동인의 남북분당까지가 모두 선조 대에 임진왜란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북인과 남인, 서인이 서로 갈라져 싸우는 와중에 일본이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1>
실천을 강조한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은 북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앞장섰습니다. 의병활동의 대명사이자 의병을 처음 조직한 곽재우는 조식의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기도 했습니다. 이런 성향과 맞았는지 선조를 대신해 임란을 진두진휘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북인이 정권을 잡습니다. 북인은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과 함께 몰락합니다.
인조반정은 서인의 주도 아래 남인이 가세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조와 효종 시기는 서인이 정권을 주도하며 남인과 대립합니다. 서인의 영수는 송시열입니다. 송시열은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서인의 영수로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다가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얼마나 오래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1차 예송논쟁입니다. 예송논쟁이 발생한 이유는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기 때문입니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왕재의 자질이 뛰어났으나 그 뛰어남으로 인해 인조의 시기를 받고 독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조선왕조의 많은 독살설 중에 가장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소현세자의 독살설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비인 며느리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그 아들들도 제주도로 귀양보내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서둘러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합니다. 봉림대군 즉 효종은 즉위부터 그 정통성에 의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갔지만 청의 뛰어난 문물을 보고 아버지와 달리 청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함께 청에 갔던 봉림대군은 청에 대한 반감을 버리지 않았던지 아니면 그를 왕위에 올려준 인조와 서인세력에 반대할 수 없었던지 하여간에, 즉위후 북벌을 내세우며 왕위 계승의 정당성 문제를 덮으려고 하였습니다.
예송논쟁의 핵심은 효종을 사대부와 같은 기준으로 볼 것이냐, 사대부와 다르게 특별 우대할 것이냐에 있습니다. 서인의 주장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계모 자의대비는 아들의 상복을 1년만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대부의 예법과 동일한 것으로서, 장남이 죽으면 어머니는 3년 복을, 차남이 죽으면 1년 복을 입는 것이 원칙입니다. 남인의 주장은 효종이 이미 왕이 되었으므로 사대부와 같은 기준에 따를 수 없으며, 이미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적장자에 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계속 차지했던 쪽은 서인입니다.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에 휘말린 현종은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는 적˙중자 구분 없이 복제를 규정하고 있는 <경국대전> 에 따르는 것으로 봉합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서인이 주장한 1년 복을 입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서인이 승리한 1차 기해 예송은 논쟁의 핵심 문제였던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이냐 중자 즉 차자로 볼 것이냐에 대한 결정을 비껴간 탓에 2차 예송의 불씨를 남기게 됩니다.
현종은 비대한 서인정권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던 차에 2차 예송논쟁이 터집니다. 효종의 비가 승하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는 다시 며느리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사대부의 원칙에 따르면 큰며느리는 1년 복을, 작은 며느리는 9개월을 입어야 합니다. 다시 서인은 작은며느리의 기준으로 9개월을, 남인은 큰며느리의 기준으로 1년을 주장하며 대립합니다. 현종의 입장에서 서인은 왕을 일개 사대부와 똑같이 취급하는 건방진 붕당인 반면, 남인은 왕을 존중하는 왕 친화적 붕당입니다. 현종은 논쟁에 직접 개입하여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현종은 2차 예송논쟁에서 아버지 효종을 장자로 규정하며 왕권을 강화하지만, 논쟁 직후 갑자기 승하합니다. 새로 즉위한 숙종이 서인을 축출함에 따라 인조반정 이후 50년 만에 처음으로 남인이 집권하며 정권 교체가 이루어집니다.
한갓 상복을 입는 기간으로 나라가 덜썩이며 정권이 뒤바뀌는 모습이 우리의 눈에는 매우 기이해 보입니다. 그러나 양란 이후의 혼란에 더하여 경신 대기근이라는 참혹한 재난을 겪은 조선의 사림들은 이를 하늘의 견책 즉 견고로 받아들입니다. 예송논쟁은 예에 어긋난 인간의 행위가 하늘의 노여움을 불러 일으킨다는 성리학적 사고를 가진 지배층들에게는 사회 안정과 국가 존립에 직결된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이 만들어 놓은 남인정권으로 시작합니다. 14세에 등극한 소년 왕, 숙종은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틀렸다’고 꾸짖을 만큼 당당하고 강력한 왕의 모습을 보입니다. 단종 이래 200년만에 탄생한 적장자의 적장자로 정통성이 강력한 왕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말, 선조 때 드디어 훈구척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림은 17세기 말, 숙종 초까지, 100년에 걸쳐 이른바 ‘붕당정치’를 실현합니다. 상대당과의 끊임없는 투쟁과 견제 속에 정국이 뒤바뀌어 왔지만, 상대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공존의 정치를 이루었습니다.
숙종은 치열한 붕당 대립이 벌어지는 한가운데에 직접 뛰어들어 한쪽 당의 편을 들어 정권을 뒤바꾸는 환국정치를 실행합니다. 한 당에게 장기집권을 허용하지 않고, 번갈아 정권을 뒤집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합니다.
1680년 이제 기틀을 잡고 있던 남인정권은 사소한 꼬투리에 의해 순식간에 서인정권으로 교체됩니다. 경신환국입니다. 경신환국에 의해 남인 정권은 거의 궤멸에 이릅니다. 이를 경신 대출척이라고도 합니다. 남인잔당의 처벌을 놓고 뿌리까지 철저히 뽑아야 한다는 강경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가 맞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됩니다. 노론은 이이의 학풍을, 소론은 성혼의 학풍을 이은 세력이 주를 이룹니다. 후일 숙종의 후계를 놓고 세자(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의 대립이 격화됩니다. 노론은 송시열이 소론은 윤증이 영수가 됩니다.
1689년 숙종의 두 번째 환국, 기사환국이 발생합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 중의 하나인 장옥정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습니다. 숙종은 장옥정의 아들을 원자에 봉하려 했으나 서인은 극렬 반대합니다. 이를 계기로 숙종은 송시열을 사사하고 서인(특히 노론)을 축출합니다. 정권은 다시 남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고 중인 출신의 장옥정을 왕비에 봉합니다. 그러나 경신환국으로 이미 쇠락해 있던 남인은 정권을 잡고도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1694년 숙종의 세 번째 환국인 갑술환국은 장옥정의 몰락과 함께 시작됩니다. 숙종은 장옥정을 폐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킵니다. 장옥정을 지지했던 남인은 경신환국으로 쇠락해 있던 상황에서 갑술환국을 겪으며 붕당의 역사에서 거의 사라집니다. 정권은 다시 서인으로 넘어갑니다.
경신, 기사, 갑술. 15년 만에 세 번의 환국이 일어났습니다. 최종 승리는 서인이 차지합니다. 경•기•갑 ! (역시 경기가 갑입니다?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기호학파를 뿌리로 하고 있습니다. 기호지방은 경기와 충청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경기갑 ;;; 저는 이렇게 외웠습니당. )
서인에게 정권을 돌려 준 숙종은 세자를 폐하고 싶어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습니다. 경신대출척을 기점으로 이미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있던 서인은 갑술환국 이후 세자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합니다. 소론은 세자를 보호하고 지지하지만, 노론은 세자를 폐하고 무수리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후계로 세우려 합니다. 노론은 숙종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자는 가까스로 왕위에 오릅니다. 경종입니다.
경종은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어서 즉위하자마자 노론으로부터 연잉군을 세제에 봉하고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도록 압박을 받습니다. 경종은 유약한 겉보기와 달리 노론의 압박을 슬기롭게 헤쳐 나갑니다. 목호룡의 고변 사건 등으로 세제 연잉군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형인 경종은 노론은 탄압해도 동생인 연잉군만은 끝까지 보호합니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대립 속에 경종은 4년만에 승하하고, 세제인 연잉군이 왕위를 몰려 받습니다. 영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약점과 세자가 아닌 세제로 왕위를 이었다는 것, 그리고 경종 독살설의 배후라는 소문으로 인해 줄곧 정통성 문제에 시달립니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지만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에게도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또한 붕당의 싸움으로 인해 세제 시절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붕당을 없애고 탕평의 정치를 이루고자 합니다.
“탕평(蕩平)’이란 ≪상서 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제5조인 <황극설 皇極說>의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에서 나온 말로서, 본래는 인군(人君)의 정치가 편사(偏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皇極)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물론 조선후기 탕평정치는 영조 이전 숙종 때 시도되었습니다. 숙종은 두 차레에 걸쳐 탕평 교지를 내립니다. 숙종의 탕평은 큰 효과보다는 왕의 개입에 따라 붕당들이 국혼을 정쟁의 중심으로 삼도록 만들었습니다.
영조는 탕평정책을 펴지만 노론의 지지로 집권한 태생적 한계 때문에 노론탕평이란 평을 듣기도 합니다. 영조의 탕평을 완론탕평, 정조의 탕평을 준론탕평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완론緩論은 글자 그대로 부드럽게 논하는 것을, 준론峻論은 준엄하게 논하는 것을 뜻합니다.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시키는 것”(위키백과)을 완론탕평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당파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위키백과)을 준론탕평이라고 합니다.
완론탕평은 각 당의 당파색이 옅은 인물을 고루 등용합니다. 기계적인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현대정치에서도 경상도 장관 몇명에 전라도 장관 몇명 씩의 구색을 맞추는 정권이 있습니다. 영조 전반기는 이렇게 탕평을 추진하지만, 영조 후반기에 가서는 노론이 일방적으로 정권을 쥐게됩니다.
준론탕평은 각 당파의 주장을 준엄하게, 강력하게 주장하도록 합니다. 단 시시비비에 맞아야 합니다. 당파에 관계없이 올바른 주장을 하는 인물이 등용됩니다. 준론탕평은 시시비비를 올바로 가릴 수 있는 현명한 왕만이 실행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자신감이 충만했고, 실제로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노론의 강력한 견제 속에서도 정조는 남인 출신의 채제공, 정약용 등을 등용합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이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큰별샘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영조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사도세자의 죽음입니다. 정조가 집권하며 사도세자의 문제가 재론되자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나뉩니다. 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강경세력이 주축을 이루며 정조의 준론탕평에 반대합니다. 시파는 노론 온건세력에 소론과 남인이 참여하였으며, 정조의 준론탕평을 통한 왕권강화를 지지합니다.
영조와 정조가 통치한 18C의 약 80년은 ‘탕평정치' 시대입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붕당 간의 세력을 조정하던 왕권은 사라지고, 정권은 몇몇 세도 가문의 손아귀로 떨어집니다.
19C 전반 순조, 헌종, 철종, 3대 60여년은 ’세도정치‘의 시대입니다. 밖에서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가 침략의 손길을 턱밑까지 뻗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은 몇몇 가문의 손아귀에서 곪아터졌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250여년의 기나긴 사림 세력들의 붕당 정치도 막을 내립니다.
왕조가 바뀌든 지배세력이 바뀌든 계속되어야만 하는 민생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세도정치 시기는 민란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