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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개정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임희선 옮김 / 더블유출판사(에이치엔비,도서출판 홍)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제목만 보고 현대 소설인 줄 알았다. 작가들의 트윗에 고양이 자랑이 하도 많아서, ‘고양이’라는 글자만 보고 또 어느 고양이 집사가 쓴 책이라 속단했다. 그야 물론 내가 ‘나쓰메 소세키’란 이름도 몰랐고, 일본 문학이라는 것 자체에 깜깜하기 때문이다. 뭐 그 유명한 ‘하루키’도 한 권 읽어보지 않았으니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반일감정 따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어릴 때 일본 대하소설에 물려서 그런 것 같다.

 

막내 외삼촌과 오랫동안 한 집에서 살았다. ROTC 장교 복무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외삼촌이 일본 대하소설을 여러 질 가져왔다. 제목이 기억나는 건 『대망』이고, 그 외에 료칸의 하녀로 시작해서 거부가 되는 여자 이야기, 우리로 치면 거상 김만덕 정도 될까?, 뭐 그런 대중소설(?)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무렵이었으니, 책의 가치는 잘 몰랐지만, 진짜 재미있었다. 수 십 권의 책을 사탕 빨듯 빨아 읽었는데, 그러고 나서 뭔가 일본적인 것에 대한 감각 혹은 선입견이 생겼던 것 같다. 실컷 먹고 질려버린 것처럼 정형화된 인물과 한결같은 성공 스토리에 흥미가 뚝 떨어졌다. 그 이후로는 일본소설에 손을 대지 못했다. 『설국』은 읽었던 것 같은데, 역시 일본 냄새를 맡았던지,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이후로는 누가 뭐래도 일본소설은 읽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말하자면, 숙제니까 읽었다. 독서회 선정 책이니 어쩔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일본소설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선입견이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결과는 성공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내가 읽었던 일본소설과는 전혀 달랐다. 1905년에 시작해서 1906년까지 연재된 소설인데, 그러니까 러일전쟁 직후였고, 심지어 을사늑약 체결기의 소설인데도 일본소설에 대한 반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책 안에 러일전쟁이란 말이 몇 차례 나오고 조선인삼이란 말도 한 번 나오지만, 제국주의적 시각도 반제국주의적 시각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풍자소설이다.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자본주의 체제가 생활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한 시기의 (일본역사니 대충 짐작만할 뿐이다.) 지식인과 자본가에 대한 비판? 이라고 하면 될까? 여하튼 그 비판, 그 비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600쪽 가까이 되는데, 앞부분 반 정도는 정말 낄낄대며 읽었다. 뒤쪽으로 갈수록 글이 늘어져 파안대소할 기회를 상당히 상실하긴 했지만, 이만하면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유쾌․ 상쾌․ 통쾌하기로 한두 손가락 안에 든다. 100여 년 전의 작품에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적이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가 일본보다 많이 뒤져 쫒아가기 때문일 것도 같고, 소세키 할아버지의 글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도 저도 아니면 봄바람이 허파를 파고들었거나.

 

 

‘나’는 고양이다. 팔자 좋게 사람 집사를 거느린 그런 고양이는 아니고, 식모 발길에 채이고, 애들한테 노리개로 시달리고, 몰래 먹다 들켜서 캑캑 거리는 옛날고양이다. 배가 고파 그냥 들어온 집에 눌러앉아 사는 눈치꾸러기지만, 인간 못지않은 총기와 혜안을 갖고 있다. 마침 눌러앉은 집의 주인이 학교 영어 선생이고, 주인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괴짜들이어서,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쓴 글이 이렇게 훌륭한 풍자소설이 되었다. ‘나’는 이 소설의 화자, 이름도 없는 고양이(로소이)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물론 주인인 쿠샤미 선생이다. 아내가 연말 선물로 연극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갖은 핑계를 대다가 결국 나가기 직전에 오한이 들리는데, 연극시간이 지나자마자 씻은 듯이 나아버리는 그런 사내다. 그러고도 벗겨진 아내의 정수리를 보고 시집올 때 말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한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이렇게 쪼잔한 사내가 지식인을 자처하며 보이는 행태다. 주인은 어느 날 편지 한통을 받고 “상당히 의미심장하네. 아무래도 어지간히 철학적인 논리를 연구한 사람인 모양이야. 대단한 식견이군.” 하며 감탄한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이지 알아보기 힘든 문장이다. 결국 이 편지는 어느 정신병자가  보낸 것으로 밝혀진다.

 

「주인은 무엇이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런 버릇은 굳이 우리 주인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닐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잠복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들고, 학자들은 아는 것도 알아듣지 못하게 말한다. 대학 강의에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는 사람은 평판이 좋고, 알아듣게 설명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인이 이 편지에 감탄한 것도 의미가 명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취지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해삼이 나오기도 하고, 고뇌의 똥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이 이 문장을 존경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교에서 도덕경을 존경하고, 유교에서 역경을 존경하고, 불교에서 임제록을 존경하는 것과 매한가지로 전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전혀 모르는 채로 있어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까 자기 멋대로 주석을 붙여서 뭔가 이해한 척한다. 모르는 것을 알았다고 착각하며 존경하는 것은 예로부터 기분이 좋은 일이다. 주인은 공손하게 두꺼운 글씨의 명필을 둘둘 말더니 이것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 품안에 손을 넣고 명상에 잠겨 있다. p409」

 

홍상수의 영화가 풍자하는 것과 비슷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속여 넘긴다. 그렇다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오늘날의 문제는 지식을 숭배하는 것보다 지식을 폄하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100년 전에는, 아무리 일본이 우리보다 빨랐다고 해도, 100년 전에는 지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풍자의 대상으로 매우 정당하고도 급진적이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의 주인은 오늘날 유능한 사람보다는 고급의 인간이다. 무능하기 때문에 고급이다. 지금 세상의 유능함은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허세로 남을 위협하고, 함정을 파서 남을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의 유능함이 이것이다. 주인은 잔꾀를 부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능하다는 점 때문에 고급하다.

 

여기에 서양문명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다. 주인의 철학자(?) 친구 도쿠센이 주로 이 비판의 담당자이다.

 

「서양인들의 방법은 다 이런 식이야. 나폴레옹이든 알렉산더이든 승리하고 만족한 사람이 하나도 없네. 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싸움을 하네. 상대방이 항복하지 않으면 법정으로 끌고 가는 거야. 법정에서 이기면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지. 마음의 안정은 죽을 때까지 애써봐야 될 일이 아닌 거야. 과인정치가 나쁘다고 의회체제로 만들지. 의회체제가 쓸모없다고 또 다른 것을 하려고 드네. 강물이 문제라며 다리를 걸고 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터널을 파지. 교통이 힘들다고 철도를 깐다네. 그렇게 한다고 영원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고 인간인데 어디까지나 적극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도 없지 않은가. 서양 문명은 적극적, 진취적일지 모르지만 말하자면 불만족스럽게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만든 문명일세. 일본의 문명은 자기 이외의 상태를 변화시켜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야. 서양과 가장 다른 점은 근본적으로 주변의 환경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는 커다란 가정 하에서 발달해 왔다는 것일세. p388」

 

우리의 관점으로 이런 말을 일본인이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일본이 서양처럼 딱 그렇게 했고,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짓밟혔다. 1867년에 태어나 1916년에 사망한 소세키로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대해서 무지했을까? 아니면 서양문명을 추종하는 일본이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 여하튼 소세키는 서양문명의 적극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동양의 소극성이 더 나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때 소극성은 현재 존재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군신관계든 부부관계든 계급관계든. 그런 면에서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존재하는 인도보다 더 동양적인 곳이 있을까?

 

서양문명 중에서도 소세키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주인과 한동네에 사는 실업가 가네다의 위력은 대단하다. 돈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주인을 가네다는 갖은 방법으로 괴롭힌다.

 

「정말이지 실업가의 세력은 대단한 것이다. 타다 남은 석탄 같은 주인을 흥분하게 만드는 것도, 괴로워한 나머지 주인의 머리가 점점 파리가 미끄러지는 대머리가 되는 것도, 그 머리가 에스킬루스와 같은 운명에 빠지는 것도 모두 실업가의 세력이다. 지구가 지축을 회전하는 것은 무슨 작용 때문인지 모르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돈이다. 이런 돈의 힘을 잘 알고, 이런 돈의 영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자는 실업가 여러분 외에는 아무도 없다. 태양이 무사히 동쪽에서 나와서 무사히 서쪽으로 지는 것도 온전히 실업가들 덕택이다. 지금까지 고지식하고 가난한 학자의 집에서 살면서 실업가의 은혜를 몰랐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p376」

 

소세키는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넘어서 사유재산까지 비판한다.

 

「이렇게 널따란 대지에 약삭빠르게 울타리를 치고 팻말을 세워서 누구누구의 소유지랍시고 나누고 있는 행위는 마치 저 푸른 하늘에 줄을 둘러치고 이 부분은 내 하늘, 저 부분은 남의 하늘이라고 신고하는 꼴이다. 만약 토지를 이리저리 잘라서 한 평에 얼마씩 소유권을 매매한다면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를 한 척으로 된 정육면체로 나누어 잘라 팔아도 되지 않겠는가? 공기를 잘라 팔 수 없고 하늘을 가르는 것이 부당하다면 지면의 사유화도 불합리하지 않은가? p166」

 

소세키는 아무리 지식인이 우스꽝스럽다 해도 이런 실업가 따위에 비할 수 없이 훌륭하다는 자부심을 표출하기도 한다. 고대 희랍인들은 체육을 아주 중요시해서 모든 경기에 귀중한 상품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자의 지식에 대해서만큼은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들 그리스인들이 경기에 임해서 얻는 상은 그들이 보이는 기능 그 자체보다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포상이 되기도 하고 장려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지식 그 자체의 경우는 어떠한가? 만약 지식에 대한 보수로 무엇인가를 주려고 한다면 지식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 이상으로 귀중한 보물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물론 있을 리가 없다. p202」

 

소세키는 이외에도 미학자 친구 메이테이 선생, 이학사 제자 간게츠, 시인 제자 오치 도후 등을 통해 모든 사람들과 세태를 풍자한다. 어쩌면 사회란 미치광이들의 집합이고, 오히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푸코 보다 앞질러 광기에 대한 통찰을 보인 것일까? 여하튼 두꺼운 책을 온통 세상에 대한 풍자로 가득 채우다니, 소세키의 눈도 당대 일반인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 대출한 도서관책은 H&book의 2006년판 옮긴이 임희선입니다. 인용페이지는 이 책에 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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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서회가 드디어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 가입제이긴 하지만 그동안 밴드로만 소통한 것에 비하면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이라 할 수 있다.  발제와 후기도 공유하고, 온라인 회원도 받아들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독서회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다음주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다. 한달여 전에 읽었을 때, 재미있기는 한데 리뷰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책은 진짜 별로인데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가 하면, 별로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잘 쓴 책인데도 오히려 생각의 물꼬를 터주지 못할 때도 있다. 물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읽었다는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보통은 모두들 할법한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글을 쓰고 싶은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다. 쓰면서도 재미가 없는 글을 누군가가 읽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카페도 만들고, 신입회원도 들어오고, 독서회 회의실도 넓어지고, 여러가지 변화로 시작한 올해 독서회, 초기라 그런지 좀 더 마음이 쓰인다. 토론할 내용을 생각하다보니, 그때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특별한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이겠지만, 토론을 위해 몇자 적어 놓으려고 한다. 『속죄』의 발제자가 카페 게시판에 제시한 토론 주제는 이것이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브리오니가 자신이 창조한 소설을 통해 속죄한 행위는 자신을 위한 변명일까 아니면 가장 의미있는 속죄일까?"

 

나도 책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이것이 속죄야 ? 변명이야?  속죄라기에는 용서를 구할 당사자들은 죽어버렸고, 브리오니는 소설가로 명예를 얻고 존경받으며 오래오래 살고 있다. 희생자들은 고통 속에 살다 누명도 벗지 못하고 죽었다. 브리오니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겨우 출판을 결심한 그 소설은 속죄가 아니라 속죄의 이름을 빈 자기 정화에 불과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언 매큐언이 굳이 에필로그 성격의 그 마지막 장, <1999년 런던> 을 덧붙인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마지막 장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브리오니가 용서를 빌고 스스로 책임을 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마지막 장은 필요하다. 3부까지의 내용이 브리오니의 속죄라는 것을 독자가 알아야 하니까. 그것이 없었다면  『속죄』는 그냥 매끈하게 쓰인 또 하나의 소설일뿐일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에필로그는 단순히 지금까지는 브리오니가 쓴 소설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발화행위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게된다. 이게 속죄야 ?변명이야? 진짜 속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언 매큐언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브리오니의 속죄가 아닐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속죄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속죄라고 믿는 것, 그것이 과연 속죄일까, 속죄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이언 매큐언은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혹은 독자 스스로 이런 질문에 다가갈 수 있도록 유도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상대를 위해, 상대에게 해 준다고 믿고 있는 것들은 사실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것들은 아닐까..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의 화자, 열두살 진희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를 분리하고, '바라보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통찰한다. 그녀의 눈은  MRI 수준이어서 그 눈을 통과한 타자는 투명하게 속속들이 까밝혀진다. 그녀의 눈은 오해나 무지를 모른다. 어떤 타자도 어떤 행동도 불투명함 속에 가려지지 않는다. 계몽(enlightenment)의 소녀라 할만하다.  『속죄』의 브리오니도 자신의 눈을 확신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오해했다. 타자는 그녀에게 전적으로 불투명하다. 포스트모던적이라 해야 할까?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두 소녀는 사실 소녀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우리는  진희와 같은 눈으로 타자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우리가 가진 눈은 브리오니의 눈과 같다. 타자는 투명하지 않다. 어떨때는 더없이 다정하고 살가운 이웃이지만, 한순간 전혀 이해불가능한 낯선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두 얼굴의 타자는 나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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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과의 하루
디아너 브룩호번 지음, 이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비슷한 느낌. 죽은 남편을 두고 바람 핀 일을 제일 먼저 다그치고 싶었을까? 함께 살기 위해 묻은 일을.. 한 두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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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독서회 첫 소설. 재미있다. 그런데 하고싶은 말은 없다. 속죄라기 보다는 변명이 아닌가? 교훈이라면 우리가 안다고 믿고 있는 것들의 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 그러나 진실을 오해하는 것 보다 진실 자체가 없다는 것, 그 진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야말로 충격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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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럴의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대해 토론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번역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내용이 된다는 것.

 

 

 

 내가 읽은 책은 펭귄클래식 코리아 판으로, 옮긴이는 이소연이다.

 문제가 된 것은 <9장 여왕이 된 앨리스>의

 

 “Take a bone from a dog: what remains?” 부분이다.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번역은 이렇다.

 

"개에서 뼈를 빼봐. 뭐가 남지?"

앨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뼈를 빼면 당연히 뼈는 안 남을 거고요 .... 개도 안 남겠죠. 나를 물려고 달려들 테니까요....

그러면 나도 안 남을 거예요."

"그래서 아무도 안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냐?"

붉은 여왕이 말했다.

"제 생각엔 그게 답인 것 같아요."

"변함없이 또 틀렸구나. 개 정신은 남지."

붉은 여왕이 말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

"아니 왜 몰라? 자 봐봐. 개가 정신줄을 놓겠지, 그렇지 않겠어?"

"그럴 것도 같네요."

앨리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러니까 개가 가버려도, 개 정신은 남는 거야!"

여왕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앨리스가 최대한 엄숙한 목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개랑 개 정신이 각각 다른 길을 가겠죠."

하지만 앨리스는 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우린 모두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뼈’를 빼면 ‘정신’ 이 남는다는 말에, 번뜻 헤겔의 ‘정신은 뼈다’ 를가 떠올랐고, 횡설수설이긴 하지만 이런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독서 토론회에서 한 회원이 ‘정신’ 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그녀가 읽은 책은 북폴리오가 출판한 마틴 가드너의 주석이 달린 『Alice』로 옮긴이는 최인자이다. 이 책은 같은 내용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

 

 

"다른 뺄셈을 해보자. 개한테서 뼈다귀를 빼앗으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앨리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당연히 뼈다귀는 남아있지 않을 거예요. 제가 뼈다귀를 가지면요. 그리고 개도 남아 있지 않을 거예요. 저를 물려고 달려올 테니까요. 그러면 당연히 저도 남아 있을 수가 없고요. "

"그러면 너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구나!"

붉은 여왕이 말했다.

"저는 그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틀렸어, 또."

붉은 여왕이 말했다.

"개의 성질은 남아 있어."

"하지만 제가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자, 내 말을 잘 들어보라고!"

붉은 여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

"개는 화를 낼 거야, 그렇겠지?"

"그렇겠죠."

앨리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럼 만일 개가 가버린다 해도 개의 성질은 남아 있을 거라고!"

붉은 여왕은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했다.

앨리스는 되도록 엄숙하게 말했다.

"아마 각각 다른 길로 가겠죠."

 

 

첫 번째 차이는 ‘bone’ 에 있다.

펭귄 판은 "개에서 뼈를 빼봐. 뭐가 남지?" 이고,

북폴리오 판은 “개한테서 뼈다귀를 빼앗으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이다.

첫 번째는 개의 뼈 즉 골격을 연상시키고, 두 번째는 개가 입에 문 뼈다귀를 떠올리게 한다.

 

이 차이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차이를 낳는다.

개에서 뼈를 빼면 혹은 뺏으면,

펭귄 판은 “개가 정신줄을 놓겠지” 로,

북폴리오 판은 “개는 화를 낼 거야” 라 번역한다.

 

살아있는 개에게서 뼈를 빼내려고 달려들면 정신줄을 놓는 것이 당연하고,

개가 좋아하는 뼈다귀를 빼앗으려 하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각각은 자연스럽지만, 이 두 번역이 하나의 원작에서 나왔다는 것은 놀랍다.

도대체 옮긴이들은 왜 이렇게 완전히 다른 번역을 한 것일까?

 

 

이럴 때, 원문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캐럴은 끊임없이 앨리스 작품들을 수정했다고 한다. 지금도 여러 가지 판본이 나돌고 있다. 어쩌면 두 출판사가 원문으로 삼은 영문 판본이 다를 수도 있다. 확인을 해 본 것은 아니다. 가드너의 주석에도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없다. 우리가 찾아본 것은 어느 회원이 가진 어떤 영문판이다.

 

"Try another Subtraction sum. Take a bone from a dog; what remains?"

Alice considered.

"The bone wouldn't remain, of course, if I took-and the dog wouldn't remain; it would come to bite me- and I'm sure I shouldn't remain!"

"Then you think nothing would remain?"

said the Red Queen.

"I think that's the answer."

"Wrong, as usual," said the Red Queen. "The dog's temper would remain."

"But I don't see how-"

"Why, look here!" the Red Queen cried. "The dog would lose its temper, wouldn't it?

"Perhaps it would," Alice replied cautiously.

"Then if the dog went away, its temper would remain!" the Queen exclaimed triumphantly.

Alice said, as gravely as she could,

"They might go different ways."

 

 

이 영문판은 북폴리오 판의 번역과 비슷해 보인다. 'bone'에 대해서는 두 번역 다 가능성이 있지만, 'temper'는 통상 ‘성질’로 번역된다. 게다가 ‘lose one's temper’는 ‘화를 내다’ 는 의미의 관용구다. 물론 캐럴은 여기서 'lose' 를 이중적으로 사용하며 말장난을 한다. ‘화를 내다’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성질을 잃다’로 사용하며, 개가 잃은 성질이 개가 가고 난 뒤에도 그 자리에 남는다고 붉은 여왕이 주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remain은 lose의 대구다.

 

그런데 팽귄클래식 판의 번역자는 중학생 정도 되면 알 수 있는 이 평범한 관용구, ‘lose one's temper’ 를 왜 ‘정신줄을 놓다’ 로 옮겼을까? 오역으로 보기에는 너무 쉬운 구절이라, 아무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오역이든 뭐든 이 번역문은 이상한 효과를 낳는다. 철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대번 헤겔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의 철학자다. 그의 『정신 현상학』의 악명은 오늘날까지도 철학사의 한두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만큼 유명하기도 하다. 그런데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정신은 도대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뇌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는 여전히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호르몬의 혹은 어떤 신경의 영향 아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대충 어느 영역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정신의 실체를 밝히지는 못했다. 헤겔 당시에도 정신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던 모양이다. 헤겔은 “정신은 뼈다”라는 정신 나간 듯 한 명제를 남겼다. 이 무한판단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오리무중에 있다. 다만 헤겔은 남자의 생식기와 비뇨기가 동일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고차원적인 것과 가장 저차원적인 것이 하나라는 것이다. 생식은 배뇨가 아니지만 배뇨기관 없이는 생식도 불가능하다. 정신은 뼈가 아니지만 뼈로 둘러싸인 뇌 없이는 정신도 없다. “정신은 뼈다”는 어쩌면 정신에 대한 규정이 그 자체로 불가능함을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의 개념은 그 무엇으로도 불가능하다. 막다른 골목, 불가능성 앞에 우리는 종종 동어반복 뒤로 숨는다. “정신은 정신이다.” “법은 법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다” 여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 는 이 의기양양함은 사실 무능함의 고백이다. 아버지의 정당성, 법의 정당성이 더 이상 근거를 찾을 수 없을 때 들이대는 폭력이다. 그러므로 “정신은 정신이다” 는 곧 “정신은 뼈다” 와 같지 않겠는가.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 이야기를 자신이 사랑하는 어린 앨리스 리델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썼다. 그리고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캐럴 자신의 지적 즐거움을 위해서도 썼다. 그는 한 문장 안에 두 즐거움을 중첩시키는 데에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지금도 앨리스를 읽는 두 가지 방법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어린 아이의 시각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쪽과 수학과 논리학, 철학의 관점에서 캐럴이 감추어둔 무수한 의미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쪽이 그의 독자층을 두 그룹으로 확연히 갈라놓고 있다.

 

temper 가 우리말의 ‘정신’ 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지, 혹은 펭귄 판의 원본에는 다른 단어가 쓰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옮긴이의 오역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펭귄 판과 북폴리오 판의 뚜렷한 대조는 루이스 캐럴이 의도한 두 가지 효과를 각각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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