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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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은 2010년 『피로사회』 이후 2012년에 『투명사회』, 2014년에 『심리정치』를 독일어로 출판했다. 대단히 압축적인 이 세 권의 책은 신자유주의 사회를 분석한 일종의 시리즈물이다. 종합하자면 ‘피로사회’와 ‘투명사회’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인 ‘심리정치’가 만들어 낸 자기착취와 자기감시의 사회다.

 

『피로사회』는 자기계발이란 환상 아래 자기착취에 빠져드는 성과사회의 모습을 간명히 드러냈다. 『투명사회』는 SNS 상의 자기현시와 인정욕구가 결국 디지털 판옵티콘에 봉사하는 자기감시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심리정치』는 이것들의 배후에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통치술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거대한 ‘빅 데이터’의 숲을 만들뿐이다. 체스터턴은 추리소설 <부러진 검>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명한 사람은 나뭇잎을 숲속에 숨긴다.” 나뭇잎은 드러남으로써 숨겨진다.

 

데이비드 브룩스라는 분이 <뉴욕 타임즈> 칼럼에서 데이터 혁명의 도래를 선포했다. 현대의 선지자가 예언한 이 새로운 신앙의 이름은 “다타이즘 Dataismus,데이터주의”이다. 그에 의하면 데이터는 “감정적,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걸러내는 투명하고 신뢰할 만한 렌즈이며, 우리에게 이를테면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은 놀랄 만한 능력을 준다. p80”

 

데이터에 관한 신앙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볼테르의 시대에 ‘통계학’은 계몽주의를 의미했다. “통계학은 신화적 이야기에 맞서서 숫자로 증명된, 숫자에서 나오는 객관적 지식을 내세운다. p81” 이성은 신화를 폐기하고 통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은 곧이어 이성의 또 다른 얼굴이 야만임을 드러냈다.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반기를 든 다타이즘은, 한병철은 이것을 제2차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어떨까?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계몽주의 시대의 신화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제2차 계몽주의의 구호는 투명성이다. 데이터는 물화된 투명성이다.

 

「이론조차 이데올로기의 혐의에 빠진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불필요하다. 2차 계몽주의는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지식의 시대다. 크리스 앤더슨은 예언자적 수사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언어학에서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은 과거지사가 되었다. 분류법도, 존재론도, 심리학도 모두 잊어라. 왜 인간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는지 대체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우리는 유례없이 정확하게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내고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P82」

 

그러나 2차 계몽주의에도 변증법은 어김없이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디지털 전체주의로 귀결될 운명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를 기각하고 투명한 데이터를 신봉하고자 하는 다타이즘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데이터 야만주의로 돌변할 것이다.

 

눈을 감으면 어딘가 재생된 데이터가 만든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다. 수 십 억 명의 사람들이 쏘아올린 글과 이미지와 수치들이 우주의 빈 공간에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세계의 복사판을 만들만큼 방대한 이 데이터들은 빅브라더가 강제적으로 수집한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랑스럽게 현시한 것들이다. 컴퓨터, 스마트폰 그리고 시계처럼 신체에 직접 장착한 기기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데이터로 만들어 전송한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모든 클릭, 우리가 입력하는 모든 검색어는 저장된다. 웹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보는 관찰되고 기록된다. 우리의 삶은 디지털망에 완벽하게 모사된다. 우리의 디지털 습관은 우리의 인격, 우리의 영혼을 매우 정확하게 재현한다. 디지털 습관을 통한 재현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보다 더 정확하고 완벽할지도 모른다. P87」

 

웹은 디지털 파놉티콘이다. 웹 위의 주체는 자기 감시자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벤담의 파놉티콘 보다 효율적이다. 오웰의 빅브라더는 수감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소망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빅 데이터는 우리의 욕망과 심리, 심지어는 무의식까지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헌납한 빅데이터는 빅딜과 마이크로 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오는 스팸 광고는 이미 우리의 외형적 데이터가 탈탈 털리고 팔려서 마케팅 도구가 되었음을 입증한다. 트위터나 카톡이 추천하는 네가 좋아할만한 친구, 알라딘이 제공하는 네가 혹할 것 같은 책, 끈질기게 쌓이는 스팸 메일은 나의 취향과 습관과 욕망에 딱 맞춘 상품들이다. 나의 욕망은 미사일의 표적처럼 마이크로 타게팅 되어 있다.

 

「오늘날 빅데이터는 빅브라더의 모습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빅데이터는 빅딜이기도 하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 큰 장사다. 개인 관련 데이터는 남김없이 상품화되어 금전적 거래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인간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패키지로 다루어지고 거래된다. 인간 자신이 상품으로 전락한다. 빅브라더와 빅딜은 동맹을 맺는다. 감시국가와 시장은 하나가 된다. P92~3」

 

오늘날 빅데이터에 대한 열광은 통계학에 대한 18세기의 열광과 비슷하다. 하지만 통계학적 이성은 낭만주의 운동과 같은 저항에 부딪혔다. “평균적인 것, 범상한 것에 대한 혐오는 낭만주의의 근본 정서에 속한다. P105” 니체는 통계학적 이성을 혐오했다. “통계학은 역사에 법칙이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 통계학은 군중이 얼마나 구역질 날 정도로 천박하게 획일적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P105”

 

획일화는 오늘날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이질성에 대한 배제가 발생한다. 다타이즘은 동일화를 강화한다. 빅데이터는 통계 밖의 유일무이한 것을 알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P107」

 

한병철이 말하는 사건은 푸코의 ‘사건’ 개념이다. 사건은 이전 상태에는 전혀 없었던 무언가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한번도 지젝이나 바디우를 언급한 적이 없다.(지젝은 확실하고, 바디우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투명사회』와 『심리정치』의 곳곳에서 나는 지젝과 바디우를 읽는 듯 했다. 헤겔의 부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지젝을 연상시킨다. 단절과 불연속성으로서의 사건은 내게 바디우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내가 읽은 것이 그들뿐이라서 그럴 것이다.)

 

한병철이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사건과 바보다. 우리는 바보가 됨으로써 진정한 자유의 공간을 여는 사건을 맞이할 수 있다. 바보는 그 자체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바보는 기존의 질서, 네트워크에서 자유로운 자, 아웃사이더, 일종의 면역학적 이물질이다. 정상적 작동을 가로막는 면역반응은 시스템을 방해하고 지연시킨다.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häresie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권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력을 용감하게 떨쳐 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다. P114」

 

처음에 디지털 네트워크는 무제한의 자유를 주는 매체로 인식되었다. 네그리의 다중은 네트워크를 통해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제한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은 해방이 아니라 디지털 파놉티콘을 가져왔다.

 

주체는 원래 예속된 존재다. 글자 그대로 subject이다. 자유는 막간극에 불과하다. 자유의 감정은 하나의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갈 때 잠깐 지속될 뿐이다. 주체가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은 혁명의 짧은 순간이다. 시스템 안에서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가짜 자유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 시대가 특히 자유의 위기로 다가오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자유 자체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성과주체는 자기착취의 주체다. 자유로운 데이터 교환은 디지털 빅브라더를 만든다. 감시와 억압, 타자에 대한 착취는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주체가 구속을 느끼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자유 자체의 착취야말로 최상의 수익을 낳는다. p12”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주체는 스스로 착취에 봉사한다.

 

신자유주의가 자유를 착취하는 기술, 통치술을 한병철은 ‘심리정치’ 라고 부른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감성을 이용한다. 규율사회의 합리성은 감성으로 대체된다. 감성은 자유의 감정, 개성의 자유로운 발산을 동반한다. 감성자본주의는 자유를 이용한다.

 

「신자유주의 경제는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점점 더 연속성을 해체하고 가변적 요소를 도입하면서 생산과정의 감성화를 촉진한다. 커뮤니케이션의 가속화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감성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p68 」

 

더 많이 더 빠르게 팔기 위해 자본주의는 욕망을 가속화시킨다. 오늘 기분과 내일 기분이 다르고 작년에 좋아보이던 것이 올해는 쳐져 보여야 상품의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일 년만 지나면 스마트폰이 구형이 되고, 오년만 지나면 TV가 고물이 된다.

 

「게다가 소비자본주의는 구매를 충동하는 자극을 늘리고 더 많은 욕구를 생성하기 위해 기분을 동원한다. 감성 디자인은 기분을 모델링한다. 즉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표본적 기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결국 사물이 아니라 기분을 소비한다. 사물은 무한히 소비할 수 없지만 기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기분은 사용가치의 피안에서 전개되어 간다. 이로써 새로운 소비의 장이 무한히 펼쳐진다. p68」

 

소비자의 심리는 그들 자신이 기꺼이 바친 빅데이터에 의해 마이크로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제니 홀저의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는 백화점으로 돌진하는 쇼퍼홀릭의 마지막 비명처럼 들린다. 신자유주의의 감성팔이에서 벗어나는 길은? 감성도 욕망도 지능도 없는 백치가 되는 것. 주체를 포기하는 것.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 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p118 」

 

헤겔의 세계의 밤이 떠오른다면 너무 생뚱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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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5~76년
미셸 푸코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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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1976년 2월 18일

 

7강에서 푸코는 17세기말 ~18세기 초에 프랑스 귀족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역사적 담론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대표자가 불랭빌리에인데, <다음 백과사전>에 의하면, 그는 “역사연구가 그 시대의 사회 상태를 분석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근대 역사가 중 한 사람이다.” 푸코가 여기서 주로 다루는 것은 불랭빌레에가 프랑스 귀족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탄생한 역사주의의 영향과 의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백과사전>에서 관련부분을 찾아보았다.

 

“〈프랑스 귀족계급 Essai sur la noblesse de France〉(1732 편집)에서 불랭빌리에는 프랑스 귀족의 쇠퇴를 분석하면서 루이 14세 절대주의를 공격하고 프랑스 정치제도의 합법성을 검토했다. 이러한 저술들을 통해 그는 정치와 개혁의 '과학' 및 자연법 비판에 기초한 비교역사 연구이론을 수립함으로써 몽테스키외의 후기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이 설명이 얼마나 푸코에 부합하는지 모르겠지만, 7강에서 자세히 다루는 내용이 아마도 〈프랑스 귀족계급〉을 분석한 것이지 싶다. 불랭빌리에는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던 갈리아에 쳐들어간 프랑크족 혹은 게르만족이 전사 귀족계급이 되어 이른바 봉건제를 수립하는 과정과 이후 절대왕정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런 서술은 행복하고 목가적인 로마적 갈리아라는 17세기의 오래된 역사적-전설적 서사를 뒤엎는다.

 

프랑크족의 사회는 전체적으로 전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왕은 섬겼지만 평화 시에 왕은 분쟁이나 사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행정관에 불과했다. 평화 시기에 왕의 권력은 최소한이었고, 전사 귀족계급은 최대의 자유를 누렸다. 전사 귀족계급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타인에게서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자유다. 즉 이기심의 자유, 탐욕의 자유, 전투와 정복과 노략질을 할 자유였다. 갈리아에서 프랑크족이 승리함에 따라 왕이 갈리아의 소유자가 된 것이 아니라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열매를 가졌다. 왕이 가진 것은 자신만의 땅이었고, 갈리아 전체에 대해 로마식의 주권의 권리를 가지지 못했다. 전사 귀족계급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토지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사들은 왕을 자신들 위에 모실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봉건제의 아득히 먼 시작이다. 이것이 불랭빌리에가 발명한 것의 핵심이다.

 

「6~8세기부터 거의 15세기까지 사회, 유럽사회를 특징짓는 역사적-법적 체계로서의 봉건제가 그것입니다. 불랭빌리에의 분석 전에는 역사가들도, 법학자들도 이 봉건 체계를 따로 떼어내 다룬 적이 없었습니다. 부과세를 현물로 납부하는 농민 인구에 의해 떠받쳐지고 유지된 군사 계급의 이 지복감이 이른바 봉건제라는 법적-정치적 단위의 풍토인 것입니다. p190」

 

그런데 이 전사 귀족계급이 권력과 부를 잃고 군주권력에 속박되어 버렸다. 항구적이며, 세습적이고 절대적인 군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 한축을 담당했던 것이 게르만족(프랑크족)에 의해 토지와 권력을 빼앗긴 갈리아족 귀족계급이다. 게르만의 지배에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갈리아족 귀족이었다. 갈리아족의 농민들은 로마의 지배보다 게르만족의 지배를 지지했다. 땅을 예전대로 실질적으로 점유할 수 있었고, 세금을 현금이 아니라 현물로 낼 수 있게 되어 부담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땅을 몰수당한 갈리아 귀족계급은 교회로 피신했다. 교회에서 세력을 넓히고 라틴어를 공부하고 로마법을 연구한 갈리아 귀족계급은 절대주의를 추구하던 게르만족 군주들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즉 갈리아 귀족계급이 성직자 계급으로 변신, 프랑크족 군주들과 결탁하여 프랑크족 전사계급을 몰락시킨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절대 군주제의 거대한 동맹자가 되었다. 그리고 라틴어는 국가의 언어, 앎의 언어, 법적 언어가 되었다. 프랑크족 귀족계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왕, 교회, 갈리아족의 구 귀족계급이 게르만족의 땅과 권리를 빼앗게 될 라틴어로 된 법률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었다.

 

불랭빌리에는 (프랑크족) 귀족계급에게 호소한다. 반란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앎의 재개를 호소한다. 자기 자신의 기억을 다시 열고, 지식과 앎을 의식하고 회복하기를. “빼앗긴, 아니 오히려 당신들이 결코 소유하려 하지 않았던 앎들의 지위를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권력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패배한 것은 어떤 순간부터 적어도 사회 내부에서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가 아니라 앎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랭빌리에에게서 우리는 모든 사회체와 사회체의 역사에 두루 퍼지는 일반화된 전쟁을 볼 수 있다. 전쟁의 이런 일반화야말로 불랭빌리에 사상의 특징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이 사실상 역사적 담론의 진실의 모체였다는 관념에 이르게 된다. 귀족이 제3신분과 군주제에 맞서 동시에 정치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 이 전쟁 내부에서, 그리고 역사를 전쟁으로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역사적 담론 같은 것이 수립될 수 있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회 내부에 일종의 계속된 전쟁으로서 힘관계를 도입함으로써 불랭빌리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서 볼 수 있던 유형의 분석을, 하지만 이번에는 역사적 용어로 소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에게서 힘관계는 본질적으로 군주의 손아귀에 있어야만 하는 정치적 테크닉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 뒤로 힘관계는 군주와는 다른 누군가가, 즉 귀족계급 혹은 더 나중에는 부르주아지처럼 민족 같은 어떤 것이 자신의 역사 내부에서 포착하고 결정할 수 있는 역사적 대상이 됩니다. 본질적으로 정치적 대상이던 힘관계가 이제 역사적 대상이 됩니다. 아니, 오히려 역사적-정치적 대상이 됩니다. p204~5」

 

 

 

8강 1976년 2월 25일

 

불랭빌리에가 역사적-정치적 연속체를 구축했던 것은 귀족들에게 힘을 되돌려주기 위해서다. 불랭빌리에에게 역사영역에서 발언한다는 것은 힘관계들을 그 장치 자체 속에서, 그 현실적 균형 속에서 변경하는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힘들에 대한 분석틀이나 해독틀이 아니라 변경틀이다. 따라서 역사는 투쟁의 장에서 스스로 전개하고 기능하는 투쟁의 앎이 되었다. 이후 정치적 싸움과 역사적 앎은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치적 삶과 정치적 앎이 사회의 실제적 투쟁에 기입되기 시작합니다. 18세기부터 역사적 앎이 어떻게 투쟁의 요소가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정치가 지닌 특히 이런 근대적 차원의 출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역사적 앎은 투쟁들의 서술인 동시에 투쟁에서의 무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역사적-정치적 장이 조직됐습니다. 역사는 우리가 전쟁 중에 있으며, 역사를 통해 전쟁을 했다는 관념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p212~3」

 

역사적 앎과 전쟁의 실천 사이의 이 본질적인 매듭이 역사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18세기 앎들의 ‘규율화’는 앎과 진실이 전쟁이 아니라 질서와 평화에만 속한다는 관념을 이식했다. 역사주의를 수용불가능하게 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주의자가 되고자 한다면 전쟁에 의해 관통된 역사 사이의 영속적이고 우회할 수 없는 관계를 분석해야 한다.

 

불랭빌리에에 의해 개막된 역사담론은 한 세기를 지나자 각각의 ‘민족’, 각각의 신분, 각각의 계급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부각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역사가 정치투쟁의 일반 담론이 된 것이다. 루이16세는 역사부를 창립하여, 1780년경 모로를 역사부 장관에 임명했다. 모로는 왕에 대한 학술적 옹호자의 역할을 맡았다.

 

지식-진리의 축 위에 자리 잡은 학문들의 역사와 달리 앎들의 계보학은 담론-권력의 축 위에, 혹은 담론적 실천-권력적 대결이라는 축 위에 자리 잡았다. 18세기에 이 앎들의 계보학을 적용할 때, 앎들의 계보학은 우선 계몽주의의 문제틀을 분쇄해야 한다. 무지에 맞선 지식의 투쟁, 망상에 맞선 이성의 투쟁, 편견에 맞선 경험의 투쟁, 오류에 맞선 이성적 사유의 투쟁 등으로 서술됐던 것을 분쇄해야 한다.

 

18세기는 앎들이 규율화된 시대다. 앎들 안에서 선별, 규범화, 위계화, 집중화가 이루어졌다. 각각의 앎이 분과학문으로 정비되고, ‘과학’이라 불리는 전반적인 장 안에서 이 분과학문들이 서로 교통하고 분할되고 위계화 되도록 배열되었다. 일반적 영역으로서의 과학, 앎들의 규율적 경찰로서의 과학이 철학과 보편수학을 대신했다.

 

「앎들의 규율화(분과학문화), 그에 따라 과학에서 조작적인 철학적 담론과 과학들에 내적인 보편수학이라는 기획을 몰아낸 이 중대한 변화를, 18세기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성의 진보라는 형식으로 의식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성의 진보라 불렸던 것 아래에서 일어났던 일이 다형적이고 이질적인 앎들의 규율화였음을 포착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p225」

 

18~19세기에 아마추어 학자들이 사라지고 대학이 등장한 것도 이 변화의 현상이다. 대학의 선별 역할은 앎들의 선별이다. 앎들의 단계, 질, 양을 상이한 수준에서 분배하는 역할이다. 이것은 교육의 역할이기도 하다. 공인된 지위를 지닌 일종의 과학적 공동체로서 이 앎들을 동질화하고, 합의를 조직화한다. 이것은 국가 기구에 의한 직 ․ 간접적 집중화이다.

 

아무튼 왕권에 중요한 것은 역사적 앎, 역사적 앎들을 규율화하고, 국가의 앎을 수립하는 것이다. 18세기는 한편에는 역사학이라는 형식으로 규율화된 앎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투쟁하는 다양한 역사적 의식이 있었다.

 

 

 

9강 1976년 3월 3일

 

역사적 앎은 18세기 내내 정치적 장의 모든 적수들이 사용할 수 있고 과시할 수 있는 일종의 담론적 무기가 되었다. 원래 귀족적 반동과 연결된 이 담론이 어떻게 일반화 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앎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전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앎을 형성하는 법칙이자 정치적 전투에 공통적인 형식이다.

 

18세기에 충돌한 역사적 담론은 하나의 문제를 둘러싸고 있었다. 혁명과 야만. 혁명에서의 야만의 경제가 바로 그것이다. 불랭빌리에는 귀족계급을 위해 ‘금발의 기골이 장대한 야만인’ 즉 프랑크족을 역사 속에 도입했다. 야만이라는 현상이 역사 속에 침입한 것이다. 18세기의 역사적 담론은 왕국의 힘관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야만을 여과시키는 세 가지 모델을 도입했다. 이 세 개의 모델은 세 가지의 정치적 입장에 정확히 상응한다.

 

첫 번째 여과기는 역사 속에서 야만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다. 프랑크족은 불랭빌리에의 신화이자 환상이라는 것이다. 소수의 프랑크족이 이민하여 곧바로 갈리아-로마의 시민이 된 것 뿐이다. 야만적인 프랑크족 귀족계급은 없었고, 처음부터 절대군주제가 있었다. 단지 군주가 파견한 관리들이 권력을 강화하여 중앙권력이 해체되고 봉건제와 같은 것이 생겨났다. 봉건제는 침략이 아니라 내부 붕괴의 결과이다. 귀족은 야만인이 아니라 정치적 사기꾼이었다.

 

두 번째 여과기는 프랑크족의 야만적 자유를 특권적 귀족계급이 아니라 인민 전체의 것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갈리아에 도입된 것은 귀족제가 아니라 프랑크족의 야만적 민주주의이다. 약탈과 강탈에만 몰두했던 프랑크족은 왕권 통제에 관심이 없었고 그 결과 왕권이 강화되었다. 왕은 야만적 프랑크적 민주주의에 맞서 왕권을 지지해준 귀족들에게 답례로 봉토를 하사했고 이것이 봉건제를 만들어 냈다.

 

세 번째 여과기는 프랑크족이 가져왔다고 간주되는 자유의 요소들을 로마적 갈리아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로마인은 갈리아족이 원래 갖고 있던 자유를 제약하지 않았다. 이 자유는 도시적 현상이기도 했다. 도시에 속한 자유는 투쟁의 힘 즉 정치적 ․ 역사적 힘이 될 수 있었다. 유목농민이었던 프랑크족은 도시를 경시했고 도시는 파괴되지 않고 부와 풍요를 누렸다. 이 테제는 제3신분에게 잘 부합되었다. 도시와 그 정치적 효과가 처음으로 역사 속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 3신분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이 담론에 의해 로마적 성격이 왕의 편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색깔을 띠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갈리아-로마적 자치 도시라는 모습으로 로마적 성격을 회복시켰다. 이것은 곧 제3신분의 고귀함을 의미했고, 제3신분이 요구했던 것도 이 자치도시, 자치도시적 자유이다.

 

그러나 사실 부르주아지는 18세기에 역사에 별 이해관계가 없었다. 세 번째를 제외하면 역사적이었던 것은 귀족계급이었다. 부르주아지는 계몽된 전제 군주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혁명 전에 비역사적인 헌법 구성을 요구함으로써 역사주의에서 탈피하려 했다. 자연법이나 사회계약에 의존했다.

 

「18세기 말, 곧 프랑스 혁명 전과 초기까지 부르주아지의 루소주의는 바로 권력 이론과 권력 분석의 장에서 서로 싸우고 있던 이 다른 정치적 주체들의 역사주의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루소주의자라는 것은 미개인에게 호소한다는 것, 계약에 호소한다는 것이었으며, 야만성이나 그 역사나 이것이 문명과 맺는 관계에 의해 규정된 모든 풍경에서 탈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p255」

 

물론 부르주아지의 반역사주의는 지속될 수 없었다. 삼부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부르주아지도 귀족의 진정서에 언급된 수많은 역사적 참조점들을 논박하기 위해 역사적 앎을 부활시켰다. 그러고 나서 역사의 사건기록부로서 기능했던 어떤 일정 수의 역사적 순간과 역사적 형식이 바로 프랑스 혁명 속에서 부활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이른바 길잡이 역할을 했던 법적 루소주의에서 출발해, 두 개의 커다란 역사적 형식이 프랑스 혁명 속에서 부활했습니다. p256」

 

하나는 로마적 도시국가의 부활이다. 혁명초기 프랑스는 명령하되 통치하지 않는 로마식 황제 아래의 자유도시를 꿈꾸었다. 이 꿈은 나폴레옹 제국에서 발견된다. 두 번째는 봉건제에 대한 증오이다. 혁명기에 유행한 중세식 소설은 봉건제에 대한 증오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딕소설은 정의롭지 않은 군주, 무자비하고 유혈 낭자한 영주, 거만한 사제들 등에 대한 우화이다. 이 고딕소설은 공포, 전율, 신비의 소설인 동시에 권력의 남용과 수탈의 서사를 다루는 정치 소설이다.

 

 

 

10강 1976년 3월 10일

 

18세기에 역사적 담론은 전쟁을 분석틀로 삼았다. 19세기에 와서 전쟁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역사담론은 자기 변증법화를 겪었다. 이것은 역사적 담론의 부르주아지화와 상응한다.

 

시에예스는 그 유명한 제3신분에 관한 텍스트에서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 정치적 질서 안에서 제3신분은 현재까지 무엇이었는가? 무. 제3신분은 무엇이길 요구하는가? 그 무엇이 되는 것.”

 

시에예스의 질문과 더불어 민족에 관한 아주 다른 정의가 등장한다. 절대군주의 테제에서 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적 반동은 두 개의 ‘민족’을 이끌어냈다. 불링빌리에가 했듯이 민족들 사이에서 전쟁과 지배의 관계들을 수립했다. 시에예스는 민족의 실질적 조건으로 두 가지를 주장했다. 하나는 공통의 법률과 입법부다. 모든 정부의 형성 이전에, 주권자의 탄생 이전에 민족은 존재한다. 단 입법부에 의해 공통의 법률을 갖는다면. 두 번째는 직능과 기구이다. 농업, 수공업, 상업, 교양학과 군대, 사법, 교회, 행정. 이 직능과 기구의 수준에서 민족의 역사적 존재 조건이 정의된다. 한 민족은 상업, 농업, 수공업을 할 수 있을 때에만, 군대, 사법, 교회, 행정을 형성할 수 있는 개인들로 이뤄졌을 때에만 민족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직능과 기구는 누가 보장하는가? 시에예스에 따르면 제3신분이다. 여기서 시에예스 텍스트의 중심적 정식이 나온다. “제3신분은 하나의 완전한 민족이다.” 제3신분만이 하나의 민족, 법적으로 국가와 일치하게 될 하나의 민족이 실존하기 위한 역사적 조건이다. 이 정치적 정식은 모든 정치적 담론의 모체가 되었으며, 지금도 고갈되지 않았다.

 

이 담론의 두 가지 성격은 보편성과 현재성이다. 제3신분은 국가의 총체화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국가적 보편성이 될 수 있다. 이 담론의 요구는 불랭빌리에처럼 과거에 기대지 않는다. 요구는 잠재성 위에서, 현재 속에서 이미 현전하고 있는 미래 위에서 표명된다. 문제는 사회체 안에서 ‘하나의 민족’에 의해 이미 보증된 국가적 보편성의 어떤 기능이기 때문이며, 이 민족은 보편성의 이름으로, 유일한 민족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실제적으로 인정할 것을, 국가의 법적 형식 속에서 인정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민족은 국가의 적극적이고 구성적인 핵심이다. 민족은 국가이다.

 

「이제 우리는 전쟁, 지배를 위한 전쟁이 이른바 다른 실체인 투쟁에 의해 대체되는 역사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국가의 보편성을 향한 노력, 경쟁상태, 긴장인 것입니다. 투쟁의 관건이자 전장은 국가, 그리고 국가의 보편성입니다. 그러므로 투쟁이 지배를 목적이나 표현으로 삼지 않고 국가를 그 대상이자 공간으로 삼는 한에서, 투쟁은 본질적으로 시민적이게 될 것입니다. 투쟁은 본질적으로 경제, 제도, 생산, 행정을 통해, 그리고 이것들을 향해 전개될 것입니다. p272」

 

19세기 전반의 역사에는 이행가능성에 관한 두 가지 틀이 존재했다. 하나는 전쟁이고, 하나는 현생성이다. 첫 번째 틀은 반동적이고 귀족적이며 우파적인 반면 두 번째 틀은 자유주의적이거나 부르주아적 유형의 역사를 제시한다.

 

첫 번째 틀의 예는 19세기 초 몽로지에가 쓴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혁명이 왕권에 대립한 것이 아니라 군주들의 과업을 완성시킨 것이라는 주장이다. 왕은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 정치적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농노를 해방하고 도시에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인민을 구성했다. 하나의 새로운 민족, 새로운 계급이 탄생했다. 왕은 이 새로운 계급을 이용하여, 영주에 맞선 도시의 반란과 농민의 폭동을 부채질했다. 정치권력은 영주로부터 군주에게 이전되었고, 절대 군주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계급이 국가의 모든 기능을 맡게 되자, 국가 전체가 인민의 수중에 떨어졌다. 새로운 계급의 마지막 반란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은 왕들의 과업을 글자 그대로 완수했다.

 

왕정복고기의 이런 정치적 요구에는 물론, 귀족이 자신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국유화된 재산을 몰수하고, 예전의 지배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몽로지에의 역사적 담론에서 핵심적인 것은 현재를 충만한 순간, 실행의 순간, 총체화의 순간으로 삼고, 귀족과 군주제의 관계를 묶어낸다는 것이다.

 

두 번째 틀의 사례는 티에리의 역사다. 티에리에게 프랑스혁명은 모든 계급이 소멸하고 화해하는 충만의 순간이다. 부르주아지, 제 3신분이 보편적 역량을 갖고 인민 즉 국가가 된다. 티에리는 장-실뱅 바이를 인용하는데, 제3신분의 대표자들이 있는 방에서 그는 귀족과 성직자 대표를 반가이 맞아 “여기서 가족이 다시 모였군요.” 라고 말했다. 프랑스 혁명은 결국 1,300년 이상 지속된 투쟁의 마지막 에피소드일 뿐이다.

 

티에리는 이원적 투쟁에서 시작해 일원론적 보편주의로 끝을 맺는다. 중세 이전에 이미 농촌사회와 도시사회가 있었다. 두 사회의 투쟁은 정치적 ․ 경제적 차원의 대결이었다. 국가의 구성을 위한 두 유형의 사회 사이의 이런 대결이 바로 역사의 근본 동력이었다. 최종적으로 도시가, 부르주아(어원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계급이 승리했다.

 

제3신분은 국가의 모든 힘을 손아귀에 넣자 귀족과 성직자에게 일종의 사회계약을 제안했다. 세 신분이라는 이론과 제도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귀족은 제3신분에게 어떤 권리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바로 이 순간부터 18세기의 폭력적인 대결 과정이 시작된다. 프랑스혁명은 이 폭력적 전쟁의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시민적인 차원에서 벌어진 갈등과 투쟁의 군사적 도구일 뿐이다.

 

「세 신분체제의 소멸, 프랑스 혁명의 폭력적인 격동, 이 모든 것이 구성하는 것은 사실상 단 하나입니다. 즉, 모든 국가적 기능을 흡수함으로써 민족이, 유일한 민족이 된 제3신분이 실효적으로 자신들만으로 민족과 국가를 모조리 떠맡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만으로 민족을 구성하고 국가를 떠맡는다는 것은 그때까지 기능할 수 있었던 구시대의 이원성과 모든 지배관계를 소멸하게 만드는 보편성의 기능들을 확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 제 3신분은 인민이 되며, 그러니까 국가가 됩니다. 제3신분은 보편적인 것의 역량을 지닙니다. 그리고 현재의 순간, 티에리가 글을 쓰던 바로 그 시점은 이원성, 민족들, 계급들이 소멸하는 순간입니다. p285」

 

19세기부터 역사와 철학은 공통의 질문을 던진다. 현재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을 담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보편적인 것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것이 역사의 질문이며 철학의 질문이다. 변증법이 태어난 것이다.

 

 

 

11강 1976년 3월 17일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크게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으로 나눌 수 있다. 고전적 주권권력과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권력 테크놀로지가 18세기 이후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등장했다. 하나는 규율적 테크닉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테크놀로지다.

 

「이것은 마치 주권을 그 양상, 조직화 도식으로 지닌 권력이 인구 팽창과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 중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신체를 규제하는 데에는 전혀 효험이 없게 되어버린 것과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위에서부터든 아래에서부터든, 세부의 수준에서든 집단의 수준에서든 너무도 많은 것이 주권권력의 옛 기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세부를 바로 잡기 위해 첫 번째 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감시 및 훈련과 더불어, 개별 신체에 대한 권력 메커니즘의 조정. 이것이 규율 권력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실현하기에 가장 손쉽고 가장 편리한 조정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조정은 너무도 일찍, 즉 17~18세기 초에, 국지적인 수준에서, 직관적이고 경험적이고 세분된 형태로, 학교․ 병원․ 병영․ 작업실 등과 같은 제도의 제한된 틀 속에서 실현되었습니다. 그 뒤인 18세기 말에 전반적 현상들에 관해, 인구의 현상들에 관해, 인간의 집합의 생물학적 또는 생물-사회학적 과정과 더불어 두 번째 조정이 이뤄졌습니다. 이것은 훨씬 어려운 조정입니다. 왜냐하면 조율이나 집중화 등의 복잡한 기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298~9」

 

푸코라고 하면 보통 규율 권력을 먼저 떠올리는데, 푸코는 근대의 권력 메커니즘이 이미 규율 권력을 넘어선 생명 권력이었음을 주장한다. 물론 생명 권력은 규율 권력에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규율기술을 이용한다. 생명 권력에 의한 생명 정치는 생명을 대상으로, 집단으로서의 생명인 인구를 대상으로 한다. 인구통계학과 더불어 공중위생을 담당하는 의학, 환경문제 등이 중심으로 떠올랐다. 생명정치는 구호 제도 보다 보험, 저축, 안전 등과 같은 치밀하고 합리적인 메커니즘을 갖게 되었다. 세부적 수준에서 개인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 메커니즘에 의해 균형과 규칙성이라는 포괄적 상태를 얻는 방식이 목표가 된다. 생명, 즉 인간-종의 생물학적 과정을 고려하여, 이 과정에 대해 규율이 아니라 조절을 보증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도시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생명 권력이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규율하고자 하는 신체에도, 조절하고자 하는 인구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규범이다. 규범화 사회란 규율적 제도들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다.

 

「규범화 사회란 규율의 규범과 조절의 규범이 직각으로 절합되듯이 서로 교차된 사회입니다. 19세기에 권력이 생명을 소유했다고 말한다는 것, 적어도 19세기에 권력이 생명을 떠맡았다고 말한다는 것은, 권력이 한편으로는 규율 테크놀로지와 다른 한편으로는 조절 테크놀로지의 이중적 작용에 의해 유기체적인 것에서 생물학적인 것까지, 신체에서 인구까지 모든 표면을 덮어버리기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p303」

 

생명권력과 더불어 19세기에 등장하는 것이 국가인종주의다. 인종주의는 살아야 할 자와 죽어야 할 자를 나누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단순히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열등한 종의 죽음은 생명 일반을 더 건강하게 해주며 더 순수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절멸해야 할 적은 정치적 적수가 아니라 인구에 대한 생물학적 위험이 된다. 인종주의를 국가의 메커니즘 안에 기입한 것은 이렇게 생명 권력이다. 근대적 인종주의의 특징은 심성, 이데올로기, 권력의 거짓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연결되어 있을 따름이다.

 

인종주의는 무엇보다 식민지화에 의한 인종 학살과 더불어 발전했다. 여기에 진화론이 이용되었다. 나치즘은 새로운 권력 메커니즘이 절정에 도달한 현상이다. 나치즘은 국가를 생물학적으로 정비하고 보호하고 풍요롭게 하는 생명의 장과 타인과 그 주변사람들까지도 죽이는 주권적 권리를 공존시켰다.

 

「다른 인종들에 대한 궁극의 해결, 그리고 (독일) 인종의 절대적 자살. 근대 국가의 기능 속에 기입된 기제는 바로 이것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죽이는 주권적 권리와 생명 권력의 메커니즘 사이의 작용을 그 절정으로까지 밀고 나간 것은 오직 나치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용은 실제로는 모든 국가의 기능 속에 기입되어있습니다.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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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5~76년
미셸 푸코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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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강의를 요약하기는 무척 어렵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연결된 그의 설명에서 어느 한부분만 잘라내서는 의미(그 의미의 섬세함을)를 제대로 전달하기 힘들어서다. 그렇다고 그 의미를 온전히 살리려고 하면 아예 책을 그대로 옮겨 적어야 할 판이다. 그런데도 이러고 있는 것은 한 번 읽고 덮는 것보다 무어라도 써보는 것이 기억에 절대 유리하기 때문이다.

 

 

1강 1976년 1월 7일

 

최근 10년 혹은 15년 전부터 사물들, 제도들, 실천들, 담론들에 대한 막대한 비판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 국지적 비판은 ‘앎의 회귀’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앎의 회귀란 ‘예속된 앎’의 봉기라 할 수 있다. 예속된 앎이란 기능적이고 체계적인 전체 속에 현존해 있으나 은폐되어 있는 역사적 앎의 덩어리들(박식의 앎)이자, 비개념적인 앎들, 자격을 박탈당한 채 서열상 하위에 있는 앎들을 가리킨다.

 

박식의 앎과 자격이 박탈된 앎의 짝짓기 속에는 지난 15년간의 비판에 중요한 힘을 실어주었던 요소가 있다. 이 두형식의 앎에 공통된 문제, 즉 투쟁에 관한 역사적 앎의 문제이다. 이 앎들에는 싸움의 기억이 깔려있다.

 

「이렇게 해서 계보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 다양한 형태를 취한 계보학적 연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투쟁들의 정확한 재발견인 동시에 싸움의 생생한 기억이기도 합니다. 박식한 앎과 서민적 암의 찍 짓기로서의 이런 계보학은 단 하나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며, 이 조건 없이는 시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위계질서와 이론적 전위의 특권을 지닌 총괄적인 담론의 전제가 제거된다는 조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일 괜찮다면 그런 박식한 지식과 국지적 기억들의 결합을 ‘계보학’이라고 부릅시다. 이 짝짓기는 투쟁에 관한 역사적 앎을 형성하고, 그런 앎을 현재의 전술에서 활용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니까 지난 몇 년간에 걸쳐 제가 여러분과 함께 했던 것은 이런 계보학들에 대한 잠정적인 정의일 것입니다. p25」

 

푸코 자신이 말하는 ‘계보학’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주류 담론에서 은폐되거나 배제되었던 담론을 재발견하여, 그것들이 가진 싸움의 생생한 기억 위에 ‘투쟁에 관한 역사적 앎’을 구성하여, 현재의 싸움에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보학은 앎들의 봉기다. 계보학은 과학적이라고 간주된 담론에 고유한 권력 효과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계보학은 지식의 과학적 위계질서화와 이것에 내재한 권력 효과들에 맞서 국지적인 앎들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고고학은 국지적인 담론태의 분석에 고유한 방법이며, 계보학은 이렇게 서술된 국지적 담론태에서 출발해 이로부터 풀려난 탈예속화된 앎들을 작동시키는 전술이다.

 

여기서 푸코는 권력분석의 두 가지 체계를 대립시킨다. 하나는 18세기 철학에서부터 볼 수 있는 오래된 체계로서 계약-권력(압제) 도식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투쟁)-억압의 도식이다. 전자는 사법적 도식인 반면 후자는 투쟁과 복종의 대립이다. 푸코가 최근 몇 년에 걸쳐 강의해 온 것은 투쟁-억압의 도식 안에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푸코 스스로 이 도식을 실행하자마자, 이 도식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뽐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억압’ 가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계보학들, 즉 형법의 역사라든가 정신의학적 권력의 역사라든가, 소아성욕에 관한 통제의 역사 등과 관련해, 이런 권력형성체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억압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또는 적어도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저는 억압에 관한 이런 분석을 약간이나마 반복하지 않고서는, 제가 분명히 두서없이 억압에 관해 말했던 모든 것을 취합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강의는, 어쩌면 두 번에 걸친 강의가 될 수도 있는데, ‘억압’ 개념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에 바쳐질 것입니다. 즉 권력메커니즘과 권력 효과를 규정하는 것으로 오늘날 널리 퍼진 이 억압 개념이 어째서, 왜 권력메커니즘과 권력 효과를 명확하게 정의하는데 부적합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p37」

 

 

2강 1976년 1월 14일

 

푸코는 주권이론과 규율적 권력을 대립시킨다. 주권에 관한 법적-정치적 이론은 중세에 군주제와 군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구성되었다. 주권이론은 군주제를 정당화하는 도구였으나, 16~7세기부터는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왕권을 제한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주권이론은 왕당파 카톨릭 편에서도 반왕당파 프로테스탄트 편에서도 발견된다. 드디어 18세기에서는 루소와 그 동시대인에게서도 발견된다. 절대 군주제에 대항한 의회민주주의의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 주권 이론이 중요해진 것이다. 더불어 프랑스 혁명에서도 주권 이론은 똑같은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17~8세기에 또 다른 권력의 기제가 등장했다. 이것은 주권관계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어 보였다. 바로 규율 권력이다.

 

「이 새로운 권력의 기제는 토지와 그 생산물보다는 우선 신체와 신체가 행하는 것을 건드렸습니다. 이것은 신체로부터 재화와 부보다는 시간과 노동을 추출하는 것을 가능케 한 권력메커니즘입니다. 이것은 조세 부과와 만성적 의무의 체계에 의해 불연속적으로 행사된 것이 아니라, 감시에 의해 부단히 행사되는 권력의 유형입니다. 이것은 한 군주의 육체적 실존보다는 오히려 물질적 강제의 엄정한 구획 분할을 전제로 한 권력의 유형이었으며, 예속된 세력들을 증대시켜야만 하는 동시에 이 세력들을 예속시키는 쪽의 힘과 효율도 증대시켜야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새로운 권력의 경제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p55」

 

이 새로운 유형의 권력은 부르주아 사회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다. 이 권력은 산업자본주의와 이것과 상관적인 사회 유형이 성립하기 위한 근본적 도구들 중 하나이다. 주권의 형태에는 낯선 이 규율적 권력은 주권이론이라는 거대한 사법적 구조물을 소멸 시킬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주권이론은 이데올로기로서 그리고 대규모 법전들의 조직 원리로서 계속 존속되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주권이론은 18세기에, 더 나아가 19세기에도 군주제에 맞서고 규율사회의 진전을 저해하는 모든 장애물에 맞서는 항구적인 비판 도구였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이론, 그리고 이 이론을 중심으로 한 법전 편찬은 규율메커니즘에 법체계를 덧씌우는 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 법체계는 규율메커니즘의 작동방식을 은폐하고, 규율에 포함된 지배와 지배의 기술을 지워버리고, 마지막으로는 국가의 주권을 통해 만인이 자신의 고유한 주권적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증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법 이론이든 법규이든 사법체계는 주권의 민주화를 허용했고, 집단적 주권 위에서 분절된 공법의 성립을 허용했습니다. 주권의 민주화가 규율적 강제의 메커니즘에 의해 깊숙이 채워졌음을 발견하게 됐던 바로 그때에, 그렇게 된 한에서, 그렇게 됐기 때문에 말입니다. 더 간결하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규율적 구속이 지배의 메커니즘으로서 행사되는 동시에 권력의 효과적인 행사로서는 감춰져야만 했던 때부터, 주권 이론은 사법적 기구 속에서 주어지고, 법전들에 의해 부활․ 보완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p56~7」

 

주권이론이 규율 메커니즘을 감추어주고, 나아가 우리(민중)가 주권의 주체라는 민주주의적 환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 권력은 주권의 법과 규율적 기제를 통해 동시에 작동하는데, 규범화의 과정이 점점 법률의 과정을 식민화하고 있다. 이것이 푸코가 ‘규범화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규율적 기제의 월권에 맞서 주궈에 호소해야 하는가?

 

「사실상 주권과 규율, 입법, 주권의 법과 규율의 기제는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일반적 메커니즘을 절대적으로 구성하는 두 개의 조각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규율에 대항해, 규율적이지 않은 권력을 추구하며 싸우기 위해 우리가 향해야 할 방향은 옛날의 주권의 법이 아닙니다. 반규율적이지만 동시에 주권의 원리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법의 방향으로 향해야만 합니다. p59」

 

 

3강 1976년 1월 21일

 

클라우제비츠의 정식, “전쟁이란 지속된 정치에 불과하다.”는 푸코에 의해 이렇게 뒤집힌다.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이다.

 

내전과 종교전쟁이 끝난 뒤, 기존의 법학적-철학적 담론과는 아주 상이한 새로운 담론이 등장했다. 전쟁을 사회관계의 근간으로 삼는 역사적-정치적 담론이 그것이다. 이 담론은 잉글랜드에서는 군주제에 맞선 부르주아(민중을 포함)의 담론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귀족의 담론이었다.

 

법률은 전쟁의 포화에서 생겨나지만, 사회, 법률, 국가가 이런 전쟁의 휴전 혹은 최종적 비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법률 아래에서 전쟁이 모든 권력메커니즘에 계속 작동하기 때문이다. 전쟁이야말로 제도와 질서의 원동력이다. 우리는 서로 전쟁상태에 있고, 전선이 사회 전체를 영속적으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이 전선이 우리 각자를 하나의 진영에 위치시킨다.

 

「중립적인 주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누군가의 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이항 구조가 사회를 가로 지릅니다. p71」

 

우리는 보편적, 총체적, 중립적 주체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 전투에서 주체는 불가피하게 어느 한편에 서야한다. 주체가 요구하는 것은 ‘그 자신의’ 권리 즉 편향된 권리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정치적 담론은 늘 관점을 가진 담론이다.

 

「한 진영으로의 귀속이야말로, 즉 편향된 위치야말로 진실에 대한 판독을 가능케 하며,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운 세계 속에 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즉 적이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환상과 오류를 고발할 수 있게 해줍니다. p73」

 

법학적-철학적 담론에 의해 근본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주변부로 쫓겨났던 역사적-정치적 담론은 16세기 말~ 17세기 중반에, 왕권에 대한 민중과 귀족의 도전이라는 이중적 작용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 담론은 엄청나게 증식했고 19세기말과 20세기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변증법이 이 담론을 철학적으로 재전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변증법은 투쟁, 전쟁, 대결을 최종적인 동시에 근본적이고 아무튼 비가역적인 합리성의 총체화와 갱신이라는 이중의 과정 속으로 회수한 것입니다. 마침내 변증법은 역사를 통해 보편적 주체의 구성, 화해된 진실의 구성, 모든 특수성이 마침내 그 질서정연한 자리를 갖게 될 법의 구성을 보증합니다. 헤겔의 변증법과 이것에 뒤따른 모든 변증법은 사회적 전쟁의 확인서인 동시에 선언이자 실천이기도 했던 이 역사적-정치적 담론에 대한, 철학과 법학에 의한 식민지화와 권위주의적 평정이었다고 이해해야 하며, 저는 여러분께 이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p80~1」

 

잉글랜드 청교도파와 수평파의 담론으로 그리고 프랑스 귀족파의 담론으로, 17세기에 등장한 이 담론 속에는 전쟁이 역사의 중단되지 않는 씨실을 구성한다는 관념이 등장한다. 이항대립인 이 전쟁은 근본적으로 인종전쟁이다.

 

「우리가 사회 속에서 양극성으로, 이항 균열로 간주하는 것은 서로 외적인 두 인종의 대결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인종이 상위 인종과 하위 인종으로 둘로 쪼개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의 인종으로부터 그 고유한 과거의 재등장입니다. 요컨대 인종 속에서 인종의 이면과 아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p84」

 

두 인종이란 말이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는데, 요즘 식으로 호모 사케르 혹은 part of no part 가 하위 인종과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사회는 통일된 총체가 아니라 적대에 의해 가로질려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등장해 기능하기 시작했던 순간인 17세기에는 본질적으로 편향된(탈중심화된) 진영을 위한 투쟁의 도구였던 이 인종투쟁의 담론은 재중심화되며 바로 권력의 담론으로, 중심을 지니고 중심화되고 중심화하는 어떤 권력의 담론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두 인종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는 전투의 담론이 아니라 진실하고 유일한 것으로 주어진 한 인종이, 권력을 장악하고 규범(정상)을 정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인종이 이 규범과의 관계에서 일탈한 인종, 생물학적 형질에 있어서 위험하다고 간주된 인종에 대해 행하는 전투의 담론인 것입니다. p84」

 

여기에서 퇴화에 대한 생물학적-인종주의적 담론이 사회의 규범화 원리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모든 제도가 성립된다. 이때부터 이 담론의 근본적인 정식은 폐기되고 새로운 정식이 등장한다. 즉 “우리는 사회에 맞서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는 폐기되고, “우리 자신의 뜻에 반해 우리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중인 이 다른 인종, 이 하위-인종, 이 대항-인종의 모든 생물학적인 위협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는 정식이 확립된다.

 

「바로 이 순간에, 인종주의적 테마군은 한 사회 집단이 다른 사회 집단에 맞서는 투쟁의 도구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보수주의의 전반적 전략에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이 담론의 목적과 관련해서도, 그리고 이 담론의 최초의 형태와 관련해서도 역설입니다만, 바로 이 순간에 국가인종주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p85」

 

이분된 사회에서,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진영의 투쟁 도구였던 인종투쟁이, 역으로 중심화된 진영의 권력 담론으로 바뀌었고, 급기야는 국가인종주의를 야기했다.

 

 

4강 1976년 1월 28일

 

푸코는 인종주의 담론과 인종전쟁 담론의 차이를 주장하며, 자신은 인종전쟁 담론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19세기 말까지 인종전쟁 담론은 하나의 대항역사이기 때문이다. 대항역사는 의무를 부과하는 주권자의 법률의 통일성을 해체한다. 권력이 사회체의 한쪽만 밝게 비추고 다른 쪽은 그늘 속에 내버려두는 빛임을 폭로한다. 인종들의 투쟁 서사와 더불어 생겨난 이 대항역사는 그늘의 편에서, 이 그늘에서 출발해 말할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들은 중세 말기에, 16~17세기에, 역사의식이 여전히 로마 유형이었던 사회, 즉 여전히 주권의 의례와 주권의 신화를 중심으로 했던 사회에서 벗어났다고, 또는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사회, 달리 표현할 단어도 없고 그 단어의 의미가 완전히 텅 비어 있으니까 쓰는 것인데, 이를테면 ‘근대적’ 유형의 사회 속으로 진입했던 것입니다. 주권과 그 창설의 문제가 아니라 혁명, 미래의 해방에 대한 혁명의 약속과 예언을 중심에 둔 역사의식을 가진 사회 속으로 말입니다. p105」

 

그런데 19세기 전반에 인종투쟁이라는 통념이 계급투쟁이라는 통념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한편에서는 인종투쟁의 담론을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투쟁 즉 생물학적․ 의학적 의미에서의 인종들 간의 투쟁이라는 용어로 전화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계급투쟁이라는 혁명적 유형의 대항역사가 형성되던 바로 그 순간에 또 다른 대항역사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인종주의가 될 어떤 것의 등장이었다.

 

「이것은 낯선 것이 (사회 속으로) 침입해 들어온다는 관념, 일탈자는 이 사회의 부산물이라는 테마입니다. 국가는 필연적으로 정의롭지 않다는 인종들의 대항역사에서 테마는 결국 정반대의 테마로 변형될 것이었습니다. 즉, 이제 국가는 한 인존이 다른 인종에 맞서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종의 완전성․ 우월성․ 순수성의 보호자이며,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인종의 순수성이라는 관념은 그것이 수반하는 일원적․ 국가적 ․ 생물학적 성격과 더불어, 인종투쟁의 관념을 대체할 것이었습니다. p106」

 

사회 내의 적대를 분명히 보여주면서 혁명적 투쟁의 담론으로 기능했던 인종투쟁의 관념이 이제 국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봉사하게 되었다. 국가의 주권은 이 담론을 인종 보호의 정언명령으로 삼고, 혁명적 호소에 대항하기 위한 장벽을 쌓았다. 19세기에 시작된 인종주의는 20세기에 들어와 두 개의 변형태를 보였다. 하나는 나치식 변형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 유형의 변형이다.

 

 

5강 1976년 2월 4일

 

전쟁이 어떻게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권력관계에 대한 분석틀로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푸코는 5강에서 잉글랜드 담론을 6강에서 프랑스 담론을 추적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전쟁’ 때문에 흔히 홉스를 전쟁과 정치권력의 관계를 다룬 이론가로 생각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홉스는 역사적 현실로서의 전쟁을 배제하고 싶어 했을 뿐 아니라, 주권의 발생으로부터 전쟁을 배제하고 싶어 했다. 홉스의 철학적-법학적 담론은 정치적 역사주의를 차단하려 했다.

 

「그러므로 반란의 논리적․ 역사적 필연성은 전쟁이 사회적 관계들의 영구적인 특질이며, 권력제도와 권력체계의 씨실이자 비밀이라고 폭로하는 모든 역사 분석의 내부에 기입되었습니다. 저는 홉스의 가장 거대한 적수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p144」

 

궁극적으로 홉스가 제거하려 했던 것은 푸코가 ‘정치적 역사주의’ 라고 부른 것이다. 이 담론은 권력관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사법 속에 있는 것도, 주권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 지배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17세기 홉스의 철학적-법학적 담론과 19세기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 정치적 역사주의를 차단하려 했다.

 

「정치적 역사주의는 두 가지 장애물과 마주쳤습니다. 17세기에 이것의 자격을 박탈코자 노력했던 것은 철학적-법학적 담론이라는 장애물입니다. 19세기에 그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입니다. 홉스의 작업은 정치적 역사주의 담론을 침묵시키기 위해 철학적-법학적 담론의 모든 가능성,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조차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역사를 연구하고 찬미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정치적 역사주의의 담론입니다. p145」

 

 

6강 1976년 2월 11일

 

프랑스에서는 절대왕권에 대항한 귀족파의 담론이 역사주의 담론으로 등장했다. 왕의 앎은 법적 앎과 관료조직의 앎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족은 이에 대항해 역사적 앎이라는 무기를 들었다.

 

「… 법원 서기들의 앎에 맞서 역사는 거꾸로 배반당하고 모욕당한 귀족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 기록물 뒤에서, 모든 통용되지 않은 것의 너머에서 해독하고 기억을 되살리고 이 앎이 은폐하는 뚜렷한 반목을 고발한다는 극히 반-법적인 형태를 취하는 역사. 왕의 앎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 귀족이 첫 번째 거대한 적수에 맞서 개시하고자 했던 역사적 앎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p168」

 

「그러니까 부의 분석이 아니라 귀족이 끝없는 전쟁 속에서 파산해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교회가 계략으로 땅과 수입을 차지해온 방식의 역사, 부르주아지가 귀족들을 빚지게 만든 방식의 역사, 왕의 재정이 귀족의 수입을 좀먹게 됐던 방식을 그린 역사 말입니다. p169」

 

기존의 역사는 권력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였다면, 귀족의 역사는 권력에 관한 권력의 담론에 맞서 역사적 앎의 기능 자체를 깨뜨리는 담론이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역사의 서술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행사, 그 의례적 강화, 공법의 이미지화된 정식화 사이의 귀속이 해체된다. 17세말 반동적 귀족의 담론과 더불어, 역사의 새로운 주체/주제가 나타난다.

 

「국가에 관한 국가의 행정적 혹은 법적 담론을 배척하려고 할 때 나타난 이 새로운 주체/주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의 한 역사가가 ‘사회’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즉 신분에 의해 결집된 개인들의 연합, 집단, 전체로 이해된 사회, 또한 자신의 고유한 습관 ․ 관행이나 자기만의 특별한 법률을 지닌 일정수의 개인으로 이뤄진 사회 말입니다. 이제부터 역사 속에서 말하고 역사 속에서 발언하고 역사 속에서 말해지게 될 이 어떤 것은 당시의 어휘로는 ‘민족’이라는 말로 지칭됐던 바로 그것입니다. p171」

 

이때의 민족에는 국경선도 국가도 없었다. 그저 하나의 집단, 하나의 사회였다. 귀족도 하나의 민족이었다. 이 통념으로부터 19세기의 민족주의의 기본 개념들이 생겨나고 인종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계급 개념도 생겨난다.

 

이 새로운 유형의 역사적 앎, 이 새로운 담론은 우파에서부터 좌파에게까지, 귀족적 반동에서부터 부르주아적 혁명 기획에까지 유포되었다. 왕권 역시 이 담론을 통제하려 했다. 왕권은 1760년부터 이 역사적 앎을 조직하고, 이른바 자신의 앎과 권력의 게임 속에 다시 놓으려 했다. 18세기의 정치적 대결의 시기에, 역사적 앎이 절대 군주제의 행정적 앎의 유형에 맞서는 무기였던 시대에, 군주제도 이 앎을 다시 식민화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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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글항아리 이슬람 총서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배성민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지젝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안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 보이는데도, 그의 책은 참 재빠르게도 번역된다. 글항아리의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은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 즉 IS에 대한 고찰로, 원어 출판이 2015년이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이게 가능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 책은 책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얄팍하다. 읽는데 한 두 시간이니, 번역에 하루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문외한의 허파 뒤집는 소리일 수 있어도, 일주일을 넘기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지젝 자신도 그렇게 오래 걸려 쓴 글은 아닐 것 같다. 늘 하던 이야기에, 샤를리 에브도와 IS를 대입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새롭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책의 원제는 『Islam and Modernity』 다. 이슬람은 흔히 생각하듯 전근대적이 아니라 지극히 근대적 체제라는 주장이다. 다만 서구 근대의 외설적 이면으로서의 초자아적 근대이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쓴 《재림》은 오늘날 우리가 처한 궁지를 완벽하게 기술한 것 같다. “가장 나은 인간은 신념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가장 나쁜 인간은 열정이 넘친다.” 예이츠는 빈혈에 걸린 사람처럼 창백한 자유주의자와 열정이 충만한 근본주의자의 대립을 탁월하게 기술했다. “가장 나은 인간”은 (상황에) 개입할 능력이 없는데, “가장 나쁜 인간”은 인종주의와 종교적, 성차별적 광신에 적극 가담한다. p17~8」

 

그러나 지젝은 예이츠가 아니라 벤야민의 통찰이 옳았다고 말한다.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보여준 열정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진짜 인종주의다운 확신이 없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얼마나 약했으면 풍자 주간지의 한심한 만화 따위에 위협을 느낀단 말인가.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의 추세를 보면,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통찰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하여간 파시즘이 부상한다는 것은 혁명이 실패했음을 입증한다.” 즉 파시즘의 부상은 좌파가 실패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파시즘의 부상은 동시에 좌파가 미쳐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과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벤야민의 통찰은 오늘날 이른바 “이슬람 파시즘”에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국가에서 세속 좌파가 사라졌다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상과 정확히 상응하지 않는가? p19~20」

 

자유주의는 근본주의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지킬 만큼 강하지 않다. 자유주의 자체의 결함이 반성적으로 드러난 것이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끊임없이 근본주의를 만들어 낸다. 즉 자유적 방임과 근본주의의 대립은 가짜이다. 두 세력은 대립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만들어낸다.

 

「호르크하이머는 이미 1930년대에 파시즘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논했는데,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파시즘에 대해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호르크하이머의 지적은 오늘날 근본주의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종교 근본주의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 p21~2」

 

IS는 근대화를 반대하는 세력이라기보다 도착적 근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전통적일지 몰라도 세계화에 반대하는 방식은 완전히 근대적이다. 그들은 이미 근대성의 언어로 말한다. IS를 보수적 근대화의 흐름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보수적 근대화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비롯되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2장은 이슬람교가 왜 그토록 여성을 억압하는지를 분석한다. 에릭 센트너는 공식적인 상징 역사와 그 역사의 외설적 타자를 구별한다. 말하자면 이슬람의 공식적 역사에는 남성이, 억압된 비사에는 여성이 주체라는 것이다.

 

「상징 역사 뒤에 있는 외설적 타자는 승인될 수 없는, “유령 같은”, 환상적 비사(비밀역사)를 뜻한다. 이 비사는 상징 역사를 실제로 지탱하지만 비사가 제대로 작동되려면 (미리) 폐쇄 되어 있어야 한다. p50」

 

여성을 극단적으로 억압하는 이슬람교는 역설적이게도 여성 없이는 지탱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기원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준 하갈이라는 여자가 있다. 무함마드의 첫 번째 아내인 하디자도 있다. 그녀는 무함마드가 정말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는지를 검증하고 무함마드가 알라의 대변자로 사역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억압은 ‘자신의 기원’을 억압해야 한다. 이슬람교에 나타난 계보에서 여자의 모습은 변한다. 이것이 이 계보에서 중요한 요소다. 여자는 진리를 검증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그런데 여자는 원래 이성과 믿음이 부족하고 남자를 속이며 부추긴다. 더구나 짜증나게 하는 얼룩처럼 신과 남자 사이에 끼어든다. 그래서 여자는 결국 통제되고 보이지 않게 배제되어야 했다. 여자가 즐기는 과도한 향락은 남자를 집어삼킬 만큼 무서웠기 때문이다. p77~8」

 

이슬람교는 여자를 불신한다. 그런데 그 방식은 여성 주체성이 품은 외상적, 전복적, 창의적, 폭발적 힘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슬람 여자들이 쓰는 베일이 대표적이다. 베일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내기를 생각해 보자. 제욱시스의 포도 그림은 새들마저 속였지만, 파라시오스의 베일은 베일 뒤에 진실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베일 뒤에 실제로 어떤 것이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 베일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이슬람 여자들의 베일은 어떤 역할을 할까?

 

「니체는 진리와 여성이 같다고 판단했는데, 우리도 니체를 따라 여자 이슬람교도가 쓰는 베일을 궁극적인 진리를 가리는 베일이라고 기술해보자. 그러면 이슬람교에서 사용되는 베일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여자는 대단하다. 여자는 진리가 “결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자는 나부끼는 베일들 뒤에도 궁극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여자를 베일로 가리면서 환상을 만들어 낸다. 베일 뒤에 여성다움의 진실이 숨어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다움의 진실이란 거짓과 속임수 같은 끔찍한 진리를 가리킨다.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것이 여성성의 진짜 모습이라는 뜻이다.) 이슬람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숨은 걸림돌이 바로 이것이다. 여성은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구현하는 존재이지만, 여성만이 진리를 보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베일로 가려져야 한다.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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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사 - 독일 정신은 존재하는가
비토리오 회슬레 지음, 이신철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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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독일의 재앙에 철학의 공동 책임은 존재하는가? 하이데거, 겔렌, 슈미트 : 결의성과 강력한 제도 그리고 정치의 본질로서 적의 제거

 

가장 재미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장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별로다. 나치즘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뽑아놓은 저 세 명의 철학자들이 그 철학의 핵심에서 어떻게 나치즘을 추동했는지 선명하지가 않다. 회슬레가 생각하는 독일정신의 정점은 칸트와 헤겔이다. 그 이후의 독일철학은 일종의 퇴보다. 니체와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있지만, 그들이 분명 철학사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만 위대할 뿐 저마다의 한계에 갇혀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런지 20세기로 넘어 올수록 서술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장황하게 설명은 많은데 핵심이 무엇인지 쉽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1장에서, 세부사항과 정확성을 버리고 일반 독자에게 큰 그림을 보여주겠다던 그의 호기로운 말에 비추어, 대중의 입장에서 조금 실망스럽다. (어쩌면 독자로서의 나의 성향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13장의 도입부는 시대의 밑그림을 잘 그리고 있다.

 

 

독일 정신사를 다루는 사람은 누구나, 어째서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이 그토록 빠르게 이웃 민족들에게 대량 학살자와 그 공범자가 되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사회주의의 공포는 바로 바이마르공화국이 성취한 그 문화에 의해 담지 되었던 까닭에 너무도 수수께끼 같다. 매우 많은 최고의 독일 학자와 예술가 그리고 철학자들이 20세기의 처음 30년간을 압도했다. 바로 그것이 이른바 ‘독일 정신’이 국가사회주의의 부상에 기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회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 비록 파시즘이 독일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국가사회주의는 파시즘의 다른 형식과는 아주 판이하다. 악에 대한 철저성과 독일적 특징, 철학적 특징도 그것에 속한다, 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왜 그토록 많은 독일인이 히틀러를 따랐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고자 할 때는 세 가지 차원의 그룹을 구별하는 것이 좋다. 첫 째, 국가사회주의적 절멸 정치를 확신을 가지고 지지한 아주 적은 수의 독일인이다. 둘 째, 대량학살을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온갖 잔인성을 가질 수도 있는 정권에 기꺼이 권력을 위임하고자 한 커다란 집단이다. 공산주의의 위험을 막아주고, 프랑스에 대해 패배의 빚을 갚아주고, 영국의 헤게모니를 분쇄해 주고, 그리하여 독일을 다시 강력하게 만들어 주길 바라는 소망을 히틀러 정권에 투영한 사람들이다. 셋 째, 히틀러를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정권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히틀러에 대한 반대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복종한 많은 사람들이다.

 

이 세 번째 집단은 루터와 칸트의 오랜 독일 전통을 따랐다. 독일 철학에서는 그럴듯한 저항이론이 존재하지 않았다. 두 번째 집단은 슈펭글러나 슈미트처럼 권력 정치에 매혹 당했다. 법치 국가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믿음과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령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계몽주의적 이상의 몰락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극단적 경험과 관계가 있다. 이성의 파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보편주의적 이상은 니체와 반민주주의적 우파에 의해 서서히 훼손되었다. 윤리학에 대한 폄하도 한 몫을 담당했다. 정치적 좌파에 속하는 논리실증주의의 학설은 윤리학은 단지 주관적일 뿐이라고 역설하며 윤리적 질서에 대한 의무를 약화시켰다. 마르크스주의적 대안도 마찬가지로 매력적이지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무엇보다 우선 대화에 대한 무능력으로 몰락했다. 첫 번째 집단에 대해 말하자면, 니체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살해를 정당화 했다. 도덕적 냉소주의에 니체의 기여는 컸다. 그는 냉소주의를 지적으로나 문체적으로 품위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또한 탈그리스도교를 가속화했다. 전체주의적 권력 국가는 이것이 만들어 낸 의미 공백을 채우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보면 국가사회주의 국가도 엄청난 문명의 붕괴도 니체 없이는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

 

나치즘과 관련된 철학들은, 도덕적 비겁함과 비열함 그리고 부분적인 지적 기만까지도 위대한 정신적 성취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콘라트 로렌츠와 마르틴 하이데거를 여기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대표작은 미완성 작인 《존재와 시간》 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첫 눈에 보아 아주 상이한 다섯 가지 경향을 하나의 통일적인 구상 속에 통합한다. 첫째, 존재의 의미에 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고자 한다. 존재론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그는 후설의 초월론적 관념론에 반대한다. 둘째, 존재에 대한 접근은 인간적 현존재의 분석에 의해 가능해야 한다. 인간적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다. 셋째, 현존재의 시간성 이론을 고대 이래로 가사성에 대한 가장 집중적인 대결을 위해 이용한다. 넷째, 시간성으로부터 역사성에로 이어지는 다리를 형성한다. 《존재와 시간》이 마치 하나의 폭탄처럼 여겨진 것은 단지 사유 방향의 이런 독창성 때문만이 아니라 시대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음은 아주 현재적인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철학은 문학과 달리 죽음을 무시했다. 시간성과 역사성의 결합은 세계사적 변혁의 증인이라는 시대의 감정에 적합했다. 전적으로 독일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새롭게 조어된 독특한 언어와 결의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인에 대한 이 책의 반항은 전선 세대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책의 음흉한 점은 양심이나 죄 같은 개념을 고쳐 정의함으로써 전통적인 도덕적 의미를 전복시키고, 무엇을 위한 것이든 결의성이 유일한 관건이라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데 있다. 《존재와 시간》이 단지 존재론의 역사를 파괴하려 했다고 해도 이것은 못지않게 윤리학을 파괴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세계-내-존재 등등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흔하지만 몇 줄 요약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여기서는 결의성이라는 개념이 눈에 뜨인다. 하이데거는 자기 저서의 윤리학적 핵심을 결의성 개념과 더불어 전개한다. 신학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양심 개념을 어떻게 완전히 형식화하고 주관화하는 가는 매우 흥미롭다. 양심은 외치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침묵함의 양태로 말한다. 하이데거는 죄와 책임 개념을 재해석하는데, 재해석의 본질은 던져진 존재로서 우리가 자기 자신의 근거는 아니며, 실존적 기투에서 스스로를 불가피하게 몇 가지 가능성에 내맡기는 것에 있다. 하이데거의 결의성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정치적으로 완전히 다르지만 그 공허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결의성은 오로지 결의로서만 그 자신을 확신한다.” 물론 이것이 필연적으로 국가사회주의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거기로 이어지는 길을 조금도 차단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하이데거의 결의성은 비합리적 확신의 극단화를 초래한다.

 

하이데거 후기의 작업은 “기술적 세계에 대한 동시적인 긍정과 부정”으로서 “사물에 대한 내맡김”이라는 정적주의적 윤리학으로 특징지어 진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중립적인 것이라는 테제를 비판한다. 기술은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에는 세계관계의 방식이 현현한다. 하이데거는, 모든 것이 그것에게는 부품이고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인, 근대 기술을 “몰아-세움” 이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기술의 위험은 인간적 본질의 변화에 있다. 그에게 대량 학살의 국가사회주의적 기술이 기계화한 농업과 동일한 본질로 여겨진다. 전회 후에도 하이데거는 도덕적으로 중요한 구별을 확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범주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확실히 하이데거는 근세적 주관성과 고삐 풀린 기술에 대한 불편함을 최초로 개념화한 사람들 중 하나다. 비록 처방을 위한 어떤 윤리학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하이데거와 국가사회주의에 관한 훨씬 흥미로운 해석은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3장의 <급진적 지식인들, 혹은 왜 하이데거는 1933년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딘 걸까> 이다. 지젝은 헤겔과 라캉 이전에 하이데거주의자로 출발했다. 지젝의 핵심은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과는 관계없이 정치적 오류를 저지른 것이거나 처음부터 잘못된 철학을 가졌기 때문에 히틀러를 지지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나치즘 연루는 그의 철학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고수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철학에서 스스로 한 발짝 물러섬에 의해 접어든 샛길이라는 것이다. 인정하든 아니든 이 책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직접적인 분석이다.

 

 

독일의 재앙에 공동 책임이 있다고 보는 두 번째의 철학자는 아르놀트 겔렌(1904~1976)이다. 나에게는 무명이므로 그냥 넘어간다. 세 번째는 카를 슈미트(1888~1985)이다. 슈미트는 넘어갈 수 없는데, 세 사람의 국가사회주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도덕적으로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비열함과 위대한 정신적 성취가 함께할 수 있다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 꼭 들어맞게도, 슈미트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상가요, 바이마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법철학자였다. 슈미트를 유명하게 만든 책은 《정치신학》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다. 슈미트는 법학적 개념은 신학적 개념의 변형이라는 설득력 있는 법률사적 테제를 주장한다. 그는 특히 주권개념에 매혹 당했다. 예외 상태에 대해 결단하는 자는 주권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예외적 상황에서 정치적 제도 및 결단의 이론에 대한 관심과 연결된다. 근거지어지지 않고 근거 지을 수도 없는 결단이 법의 최종적 근거다. 결단에는 거의 신학적인 존엄이 주어진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정치적인 것을 공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와 외부를 향한 경계설정에 의해 정의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보편 국가의 이념이 자기 모순적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슈미트는 권력 투쟁을 실질 문제의 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목적으로 간주하는 정치가를 정당화 한다. 국가의 절대적 주권과 예외 상태, 독재와 전쟁에 대한 그의 매혹은 단지 독일이 전체주의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아가는 것에 날개를 달아 준 것만이 아니다. 2001년 9.11 이후 슈미트의 이론은 미국에서도 “영감을 불어 넣으며” 작용해 왔다.

 

 

 

14 서유럽의 규범성에 대한 연방공화국의 적응 : 가다머와 두 개의 프랑크푸르트학파 그리고 한스 요나스

 

국가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독일 문화의 특수한 지위도 파괴되었다. 첫째, 비판적 유대계 지식인들을 살해하고 추방함으로써 독일은 지적인 사혈을 체험했다. 대부분 앵글로색슨 나라로 도피한 유대계 지식인들은 그 나라들의 특히 미국의 학문적 발전을 엄청나게 촉진했고, 독일은 오늘날까지도 빌빌대고 있다. 둘째, 독일어 자체가 위축되었다. 종종 학문적 공용어로 독일어를 사용하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중부 유럽 그리고 베네룩스 3국이 영어를 사용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셋째, 강력한 여파로 인해 특수하게 ‘독일적인’ 철학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독일적 정신’ 이라는 것이 금기시 되지 않았을까 싶다.

 

1950년대는 하이데거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순수하게 철학적인 면에서 하이데거주의가 낳은 부담 중 하나는 철학의 핵심 분과인 인식론과 윤리학을 오랫동안 경시했다는 점이다. 신칸트주의 및 후설의 현상학 전통은 광범위하게 파괴되었고, 가장 재능 있는 하이데거의 제자들도 망명한 상태였고, 논리실증주의는 외국에서 계속 전개되었다. 독일인들이 몰두한 것은 체계적 야심을 억제한 철학사학이었다.

 

유별난 것은 새로운 철학적 돌파가 해석학과 미학이라는 오랜 독일적 분과에서, 그것도 하이데거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1900~2002) 이다. 예술 작품의 존재론에 대한 분석의 섬세함 및 정신과학의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재구성은 그의 대표작인 《진리와 방법. 철학적 해석학의 개요》에 고전적 지위를 보장한다. 그럼에도 올바른 이해를 어떻게 잘못된 이해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설정을 폐기함으로써 정신과학에 혼란을 가중 시켰다. 정신과학의 학문성은 단연코 이 문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십년간의 정신과학에 대한 해체주의적 파괴 전체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해할 때 다르게 이해한다.”는 가다머에 의해 부추겨졌다.

 

첫 번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막스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테오도르 아도르노(1903~1969)의 《계몽의 변증법》이다. 이 책은 축소된 이성 개념의 개선 행렬을 묘사하는데, 이성은 본질적으로 자기 보존에 봉사하지만 외적 자연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또한 내적 자연도 훼손한다. 그러나 현대의 결정적인 측면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있음에도 그 진단에서 세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첫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인류의 타락을 서구 문화의 시작에서부터 본다. 이미 신화가 계몽의 산물인 것인데, 이는 계몽이 신화로 전화되는 것을 조장한다. “계몽은 철저해진 신화적 두려움이다.” 그 결과 산업시대의 특수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둘째, 귀족주의적 문화 이해에 근거하여 문화 산업을 대중 기만으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뛰어난 분석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맥락을 교란한다. 문화 산업의 천박성은 나치의 근본적인 악과는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들의 비판에는 어떠한 명확한 규범적 기초도 결여되어 있다. 뛰어난 도덕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윤리학적-논리적 근거가 지어지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첫 번째 비판 이론은 이렇게 규범적 기초의 부재로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

 

이 규범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위르겐 하버마스(1929~)의 주된 관심사였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프랑크푸르트 동료이자 함께 담론 윤리학을 다듬은 카를-오토 아펠(1922~)과의 공동 작업이다. 두 번째 프랑크푸르트학파도 한 쌍의 친구가 대표하는 셈이다. 현대철학의 대립하는 두 주요 흐름, 즉 과학주의적 논리실증주의와 실존철학이 실제로는 상호 보완적이라는 아펠의 인식은 결정적이다. 이러한 흐름은 둘 다 이성 개념을 기술적-자연과학적 이성으로 축소하고 가치에 오직 주관적 지위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담론윤리학은 합의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환원된다. 한편으로 이웃 간의 혹은 가정 내의 갈등을 당사자에게 맡기는 것은 확실히 옳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갈등을 오로지 함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견해는 망상적이다. 아무런 실질적 원리 없이 어떻게 합의를 달성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담론윤리학자들은 그런 원리도 대화에 의해 확증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런 원리로는 어떤 구체적인 윤리학적 인식도 획득할 수 없다. 담론윤리학은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추정된 다수의 의사로부터 얻어내고, 합의가 최종적인 진리 기준인 까닭에 이러한 것을 더 이상 기회주의로 느끼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장려된다. 의식사적으로 담론윤리학은 객관적 가치 질서의 사상을 자유 열정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며, 동시에 윤리적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시대에 적합할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말하기 위해 합리적 윤리학의 가능성을 믿으려 하지만, 그 윤리학이 엄격한 구속력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버마스만큼 그토록 몇십 년 동안 사회적 논의를 전 세계적으로 각인해낸 연방공화국의 공적 지식인은 없다. 그는 저널리즘적인 표현 형식을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들의 성과에 대한 핵심을 찌르는 요약, 현대의 문제에 대한 재빠른 적응, 공론장의 통합할 수 없는 입장 사이의 타협 및 동시에 동맹자와 적대자 간의 날카로운 경계 긋기가 속한다. 하버마스는 한편으로는 시대감각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으며, 한편으로는 독일정신의 민주화를 연구하고 그것을 결정적으로 촉진했다. 하버마스와 과거의 위대한 독일 철학자들을 비교하면, 그의 학문은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적 개념에 대해, 가령 선험적인 것과 후험적인 것의 날카로운 분리에 대한 부정이나 형이상학에 대해 총체적인 거부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 그에 반해 형이상학은 오늘날 분석철학에서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다.

 

하버마스의 가장 주요한 저작은 ≪의사소통 행위 이론≫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유일한 타당성 원천은 생활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행위다. 근대 체계는 생활 세계의 식민화를 추진할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 행위에 함축된 타당성 요구에 대해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의무를 지우고 또 종교적으로 근거지어진 그 오구의 근원적 통일을 분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전자를 부정적으로, 후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독일 철학사』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철학자는 나는 처음 들어보는 한스 요나스다. 그가 쓴 《책임의 원리 : 기술 문명을 위한 윤리학의 시도》는 근대 환경철학의 가장 중요한 책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독일을 떠나 영어로 글을 써다가 노년에 모국어로 돌아와 쓴 이 책은 독일에 빠르게 수용되어, 독일을 오늘날 가장 환경 의식적인 산업국가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저자 회슬레는 요나스를 굉장히, 내가 보기에는 현대 독일 철학자 중 거의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긍정 평가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요나스와 관련해 하이데거의 한 제자가 실제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독일 관념론의 자연철학과 칸트의 윤리학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은 고전 독일 철학의 중심적인 이념들을 약 200년의 철학적 발전 이후에도 시대에 적합하게 계속해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요나스가 미국인으로서 뉴로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독일어로 된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유가 더 이상 독일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역사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멘델스존 이래로 독일 문화의 부상에 그토록 본질적인 기여를 수행한 유럽의 유대인을 광범위하게 말살한 데 따른 형벌을 목격할 수 있다. p410~1

 

결국은 독일 관념론의 부활 가능성이다. 회슬레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객관적 관념론’의 부흥이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회슬레의 철학적 태도를 조금 살펴보면,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철학자들에 대한 회슬레의 평가 기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같다.

 

일반적으로 비토리오 회슬레는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현대의 철학적 상황에서 ‘객관적 관념론’의 부흥을 시도하고, 그로부터 현대의 시급한 과제에 부응하는 실천철학의 가능성을 근거 짓고자 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객관적 관념론이란 논리적-이념적인 것의 절대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으며, 오로지 그것만을 현실적-절대적인 원리로서 고찰해야 한다는 철학적 견해, 다시 말하면 논리적-이념적인 것이 주관적 관념론에서처럼 한갓 주관적인 사유 원리일 수만은 없고, 이를테면 플라톤적이고 헤겔적인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그 자체의 존재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며, 나아가 그와 같이 객관적 성격을 지니는 이념적인 것을 동시에 자연과 주관 정신 및 객관 정신 같은 실재적인 존재를 근거 짓는 원리로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견해다. p422

 

 

15 왜 계속해서 독일 철학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가?

 

이 물음은 독일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철학이 처한 세계적 환경과 관계가 있다. 학문의 영역에서 분업은 전문화를 강요하고, 전문화는 철학의 이념과 관련해서는 치명적이다. 종교적 동기의 고갈은 철학에서 본질적인 힘의 원천을 빼앗았다. 정치적 이념에 대한 거부 반응은 공적인 지식인에 대한 욕구를 다소 제거했다. 오늘날의 대중철학자들은 텔레비전과 신문의 문예란에, 이를테면 좀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대중철학의 교양은 학문적 철학이 좀 더 기술적으로 변한 데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분석철학에 의해 촉진된 이런 과정은 부분적으로는 필요한 것이었다. 논리학의 변형에 힘입어 획득한 논증 분석의 정밀함을 경시할 수 없다. 그러나 정밀화가 결코 언제나 유용한 것은 아니며 종종 유해하기도 하다. 그것과 결부된 비용은 좀 더 중요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연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불행한 이원론은 독일 철학에 손해를 끼쳤다. 독일 철학은 좀 더 앵글로색슨적인 분석철학과 좀 더 프랑스적인 대륙철학 사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 철학의 몰락을 그것에로 환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몰락은 오히려 세계사적 상황과 독일 정신의 종언 그리고 독일 대학들의 특수한 문제와 연관이 있다.

 

첫째는 언어다. 지구화는 국제적인 공용어를 필요로 하며, 현재 그것은 영어다. 미래에는 중국적 사유의 영향이 점점 더 커질 수 있고, 따라서 독일어의 입지가 더 나아질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둘째는 독일 정신이다.

 

무엇이 독일 철학을 다른 유럽의 전통과 구별시켜주는지 묻는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미 중세에 개인의 영혼을 신과 밀접하게 결합하는 이성주의적 종교철학이 나타났다. 권위로부터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는 신의 본질에 관한 숙고는 독일 정신의 가장 웅대한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의지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의 이성으로부터, 따라서 선험적으로 세계의 일정한 특징을 이해하고자 시도해야만 했다. 경험주의에 대한 독일의 거부는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신학적 동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선험주의는 고대의 행복주의와 영국의 도덕 감정의 철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칸트의 윤리학을 산출했다. 그리고 새로운 윤리학은 독일인에게 독일의 공무원 국가를 가능케 한 유일무이한 윤리적 진지함뿐만 아니라 비상함 비굴함을 새겨 넣었다. 18세기 유럽에서 세계의 역사성을 발견했을 때, 갱신된 루터교는 소박한 계시 신앙으로부터 인간 문화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신학에로의 목숨을 건 도약을 이루어냈다. 독일 관념론 체계에서 마무리된 그 결과는 철학적으로는 웅대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매우 높은 수준의 역사학적 반성은 19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를 광범위하게 부식시켰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위기에서 너무도 혐오스러운 세계관으로 응축된 보편적 상대주의로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독일 상대주의의 도전은 후설부터 아펠에 이르기까지 다른 문화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근거 짓기 노력을 구상케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 다른 문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개관하는 한 독일 정신의 이러한 본질적 특징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아마도 독일적인 근본성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그 잔여물에서는 심지어 철학적 체계학에 대한 독일적 감각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을 그토록 뚜렷하게 가령 미국과 구별해주었던 철학적 형식의 종교성은 사라져버렸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저주받은 12년에 대한 슬픔과 부끄러움이 과거의 정신적 보물을 자기 것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위축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p415~6

 

셋째, 독일 학문 제도의 상태는 좋지 않다. 제도적으로 보면 독일 철학의 위대한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여기서 다룬 저작들은 여전히 철학적 사상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다.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든 철학은 만약 라이프니츠와 칸트 그리고 헤겔의 결정적 이념이 오늘날의 문제의식의 높이로 올라서지 못한다면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작은 입문은 고전의 독해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했다. 저자로서는 (…) 문화의 방주가 저 사상들을 새로운 시작을 하는 구원의 물가로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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