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넓어지는 이슬람 세계
1. 이슬람 세계를 누빈 나라들
무함마드가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한 이래, 이슬람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제국에 걸친 거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9세기 ~11세기 초의 이슬람 세계>
13세기 몽골제국이 세계 최초의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면서 이슬람 세계도 몽골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몽골이 물러간 후 이슬람 세계에는 다시 다양한 세력이 활약하며 이슬람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13세기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14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이 이슬람 세계의 대표자로 떠올랐다. 16세기에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은 사파비 왕조가 옛 페르시아의 땅을 차지하였다.
2. 세 대륙에 걸친 나라,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크리스트교 세계의 천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를 손에 넣었다. 동로마제국은 이로써 멸망하고, 오스만제국은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과거 이슬람 세계 전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지중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절정에 달하였는데, 오스트리아 빈 근처에서 이란 국경 너머까지,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일부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체에 오스만의 깃발이 꽂혔다.
오스만 제국은 세 대륙, 20개 민족, 6000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며, 이슬람의 정신으로 페르시아의 전통과 튀르크의 기질, 아라비아의 솜씨를 버무려 거대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오스만의 문화는 17세기 유럽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에게 유럽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카페와 튤립도 실은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이슬람 사제가 처음 마셨다고 알려진 커피는 ‘카파(혹은 카와)’, 카페 하우스는 ‘카웨’로 불리며, 오스만 제국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다. 튤립은 터키가 원산지인 야생화였는데, 오늘날에는 네덜란드의 상징으로 변해버렸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바자회(영어로 bazaar) 역시 오스만 제국의 ‘바자르’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스탄불에는 ‘그랜드 바자르’라는, 말 그대로 그랜드한-거대한 시장이 있는데, 1461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자르란 원래 ‘덮여 있는 시장’ 이란 뜻으로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는 세계 각국의 선박과 상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자선 모금을 위한 일회적 시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유럽 문화의 뿌리를 이슬람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와 아시아가 세계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인도의 새로운 전통, 무굴제국
16세기에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인도에 무굴제국을 세웠다. 무굴은 몽골이란 뜻인데, 몽골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티무르는 또한 이슬람교도이다. 그러므로 무굴제국은 인도-이슬람-몽골이 혼융된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어낸 악바르는 힌두교도와 비이슬람인을 억압하지 않고, 종교에 관계없이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를 펼쳤다. 또한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공평하고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실시하려 노력하였다.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성공한 제국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통치 원칙을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경제적인 평등이다. 민족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평등한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공평한 세금을 부과했다. 특히 농민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분배하고, 일부 지배층에게 토지가 집중되는 것을 막았다. 다른 하나는 사상의 자유이다. 관용을 베풀어 각 민족의 독자적인 종교 활동을 보장해주었다.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고, 자신이 믿는 가치가 억압받지 않는 한, 제국은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
무굴제국을 통해 이슬람 문화와 힌두문화가 점차 융합되어 갔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타지마할은 두 문화의 만남이 꽃피워낸 걸작이다. 이외에도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통합한 시크교, 힌두어와 인도어가 융합된 우르두 어, 아라베스크 무늬에 연꽃무늬를 결합시킨 건축 양식 등 이슬람 풍과 힌두 양식이 결합된 다양한 문화가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