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10
맥세계사편찬위원회 지음, 이정은 옮김, 송준서 감수, 강치원 추천 / 느낌이있는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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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다지기>

 

러시아 혁명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르의 전제정치와 러·일 전쟁의 패배, 전 세계적 경제위기까지 겹친 러시아에서 일자리를 잃고 생계가 막막해진 노동자 15만 명과 그 가족들이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아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행진했다.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한 평화 시위대를 맞이한 것은 총칼로 무장한 차르의 군대였다. 차르를 ‘자애로운 아버지’로 생각했던 러시아 민중은 배신감에 분노했다. 대규모 파업이 줄을 이었다. 6월에는 흑해함대 포툠킨호에서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이 오데사의 노동자 파업에 동참했다. 각지의 농민반란도 이어졌다. 10월에 시작된 철도 노동자 파업이 총파업으로 번지면서 최초의 민주적 노동자 대표 의회인 ‘소비에트’가 결성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입법적 성격의 두마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파업이 중단되자 차르 정부는 탄압에 나섰고, 2년간의 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모든 대도시에서 조직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러시아는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참전국들 중 전선은 가장 길었고 산업은 허약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귀족과 농민 사이의 갈등도 깊어갔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이라는 타락한 성직자에게 권력을 내어주고 미신에 빠졌다. 로마노프왕조의 몰락이 눈앞에 다가왔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 1917년 러시아 구력 2월 (신력 3월) 27일, 페트로그라드의 농민 반란은 엄청난 기세로 번져 갔다. 진압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농민 편에 가담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반란이 성공하면서 대도시와 농촌 곳곳, 소수민족 지역까지 봉기가 일어났다. 3월 2일에 니콜라이 2세가 퇴위 조서에 서명하면서 마침내 혁명은 승리를 거두었다.

 

새로운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볼셰비키(구소련 공산당)는 초대받지 못했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 ·병사 대표는 급히 소비에트 1차 회의를 소집하여 군사력을 장악하였다. 자유주의적 자본가와 귀족들의 대표로 구성된 새로운 정권과 군사력을 장악한 노동자 ·병사의 대표인 소비에트 정권이 동시에 탄생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정권의 대립은 예고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기존의 경제 · 사회 질서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고 제국주의 전쟁도 지속했다. 임시정부가 노동자와 병사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1917년 4월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이 돌아와 볼셰비키 대표회의에서 ‘4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러시아의 정치상황을 분석하고 적절한 혁명 전술을 정리한 10개 조항 이었다. 레닌은 민중들에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모으자고 외쳤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는 무력 충돌하였다. 러시아 구력 10월(신력 11월) 24일, 발틱함대 순양함 아브로라호가 겨울궁전을 향해 10월 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0월 25일 소비에트 대표들은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소비에트가 정권을 차지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1918년 3월까지 러시아 전역에 걸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새로운 정부는 모스크바를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도로 삼았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1918년부터 1920년 11월까지 내전이 지속되었다. 새 정권에 대항하는 귀족과 지주, 자본가들이 반혁명군을 만들어 내전을 일으켰다. 사회주의 혁명이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한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자본주의 열강들도 군대를 파견하였다. 온 나라가 전쟁터로 변했고 소비에트 정부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정부는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수립하여 방어에 나섰다. 식량을 징발하고 산업을 국유화 시키는 등 경제를 특별 관리하고 모든 인력을 전쟁에 투입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온 나라를 큰 군대처럼 만든 결과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하지만 농업과 산업 생산이 무너지고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런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본 레닌은 1921년 신경제 정책 (NEP)을 수립하였다. 신경제정책은 한마디로 혼합경제이다. 공산주의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하여 시장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인정하였다. 신경제 정책이 효과를 보아 소련의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레닌은 신경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려 하였으나 1923년 건강악화로 일선에서 물러났고, 권력을 획득한 스탈린은 신경제 정책을 약화시켰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소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국가가 아니라 국가들의 연방이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지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평등한 입장에서 연방을 형성한다는 문건에 서명하였다. 최고 소비에트 회의와 인민위원회를 각각 국가 최고의 권력 기관과 집행 기관으로 삼고 모든 가맹국은 자유로이 연방에서 탈퇴할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의 연방 조약도 만들었다.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하고자 하는 국가들을 위한 가입 방식도 규정했다. 4개 국가로 출발한 소련은 점차 가입 국가가 늘어나 1956년에 15개 국가가 가입했다. 위의 사진은 소련 해체 후 국가들인데, 소련을 구성했던 15개 국가들과 동일하다. 처음 가입한 자카프카지예가 1936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되어 3국가 모두 소련 연방에 가입했다.  

 

1923년 레닌이 죽고 권력 투쟁 끝에 1929년 스탈린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식량 수요가 폭증하자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농업 집단화 운동을 대규모로 실시하였다. 스탈린의 산업화, 집단화는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켰으나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중공업 우선 정책으로 경공업과 농업이 침체되어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기대에 못 미쳤고 경제가 불균등 발전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다지기>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 독일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는 1936년에서 1937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방공협정에 서명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경쟁하는 와중에 추축국이 방공을 천명하고 나섰는데 어떻게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을까? 1933년 독일 총리가 된 히틀러는 독재 권력을 강화하고 전쟁준비에 나섰다. 소련은 위협을 느끼고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에 가까이가려 했다. 그런데 이들 나라들은 ‘위기를 동쪽으로’ 넘기려 했다. 독일의 힘을 빌려 소련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과정에 희생양이 된 것이 체코슬로바키아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독일이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아래 주권을 회복하여 두 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전쟁을 하면 동맹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해야 할 상황이었다. 전쟁을 원하지 않던 영국 총리는 히틀러를 만나 독일에 수데텐란트를 넘겨주기로 하고 체코슬로바키아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이탈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가 뮌헨에 모여 수데텐란트를 넘겨줄 것을 결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이 회담에서의 협정을 뮌헨협정이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일련의 외교적 과정을 거쳐 소련은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독일을 이용해서 자국을 제압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소련은 한편으로는 꾸준히 유럽 국가들과 합동 안보 계획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1939년 일본과 소련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독일과 일본 양쪽에서 군사적 위기를 맞게 되자 소련은 ‘위기를 서쪽으로 넘기려는’ 전략을 세웠다. 독일과 협상을 맺어 시간을 벌기로 한 것이다. 독일 역시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는 부담을 덜고자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39년 8월 23일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맺어졌다. 방공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기묘한 결합이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략했다. 예상 밖의 공격으로 소련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독일 군대가 번개 같은 속도로 소련 영토에 들어왔다. 소련의 피해는 심각했다. 하지만 12월부터 소련은 반격에 나섰다. 혹한의 모스크바에서 겨우내 격렬한 전투 끝에 소련이 독일을 몰아냈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일의 첫 패배로 기록되었다. 독일은 소련 침공당시 크게 세 갈래로 진격해 왔다. 남쪽의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중앙의 모스크바, 북쪽의 레닌그라드이다. 레닌그라드 전투는 장장 900일 동안 계속되었다.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어 300만 시민이 아사할 위기에 처했지만 꽁꽁 언 호수 위로 물자를 공수하며 끈질기게 버티었다. 1941년에 시작된 전투는 1944년 소련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전투이자 가장 참혹했던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이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이 우크라이나와 캅카스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었다. 1942년 6월 28일(다른 책에는 8월 21일을 시작점으로 봄) 독일의 공격으로 시작된 전투는 1943년 2월 2일에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다. 스탈린그라드에 배치 받은 소련군의 평균수명은 24시간, 독일군은 7초마다 한명씩 죽어나갔다는 통계가 나돌 정도이니 그 참혹함은 인류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였다. 1943년에 탱크전이 치열했던 쿠르스크 전투도 또 한번의 결정적 전투였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나치 독일의 쇠퇴를 예고했다면 쿠르스크는 나치를 멸망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잠시 손을 잡았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곧바로 대립했다. 1947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그리스 내전을 계기로 냉전을 공식 선언했다. 마셜플랜을 수립하여 유럽에 대한 막대한 경제 원조를 함으로써 사회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으려 하였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가 창설되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12개 국가가 미국 워싱턴에서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했다. 나토는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급기야 1955년에는 서독이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서독의 가입으로 완성된 서방 세계의 안보 시스템은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에 큰 위협이었다.1955년 동구권에서도 소련을 중심으로 8개국이 바르샤바에서 조약을 맺고 나토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으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출범시켰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는 소련이 붕괴된 1991년에 해체되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의 시대가 열렸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정책과 그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모든 분야에 변화를 추진하였다.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 세계를 이끌자’는 전략적 목표를 갖고 미국과 서방 국가를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냉전은 심화되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는 또 한 번의 전쟁 위기를 겪었다. 소련 공산당과 정부에서도 흐루쇼프에 대한 불만이 커져서 1964년 대표회의는 흐루쇼프를 해임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985년 고르바초프가 당서기장으로 당선되면서 소련은 다시 한 번 개혁의 기회를 맞았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하며 공산당 일당독재를 완화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개방은 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불신을 더 깊게 만들었고, 개혁도 찬반 논란에 휩싸였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1990년 6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다음백과 표현 or 연방 공화국?)의 인민대표회의는 러시아 법이 소비에트 법보다 우선함을 공포했다.(러시아 공화국은 소련에 직속된 형태의 공화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공화국의 독자적인 당 서기장직은 1990년에야 성립되었다.) 1991년 4월에는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러시아연방의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직을 신설했다.  6월 옐친은 국민 투표로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변화에 반발하며  8월에 공산당의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쿠데타는 실패하였고, 도리어 공산당이 해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1년 12월 21일에 소비에트 연방국이었던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11개국이 모여 독립국가 연합을 창설하였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막아보려던 고르바초프가 1991년 12월 25일 소련 대통령직(1990년 소련 대통령으로 추대)에서 물러나고 크렘린 궁의 소련 깃발도 내려졌다. 이로써 70년 동안 유지된 소련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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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를 간단하게나마 주~욱 연결하여 이해해보려고 스터디 회원 한분께 러시아 통사를 맡겼다. 두 시간을 차분히 열강하신 회원이 참고했다며 가지고 온 책을 내가 빌려왔다. ‘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시리즈 10권 『러시아사』 이다. 지은이인 맥세계사편찬위원회는 중국의 연구소인 것 같다. 독특하게도 러시아 역사를 중국의 시각으로 보게 된 것이다. 관점에 대한 미심쩍음이 없진 않으나 별 오류가 없다면 기초 사실을 익힌다는 목적에는 어긋날 것 같지 않았다. 가장 큰 염려는 러시아 용어를 중국어로 옮긴 것을 다시 한국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아주 기괴한 용어가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으나 러시아 역사를 전공한 분이 감수했다고 하니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이다. 굳이 자료를 찾지 않아도 딱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중국의 두 배 정도다. 하지만 인구는 약 1억 4천 2백만 명에 불과하다. 중국의 1/10 정도 밖에 안 된다. 이 넓은 지역의 어디에서부터 러시아의 역사는 시작될까?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동유럽의 평원에 사르마트족이 살았다. 고트족이 나타나 평화롭게 살던 사르마트족을 잡아서 노예로 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르마트족은 슬라브라고 불리게 되었다. 슬라브는 노예를 뜻하는 고대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어 slave와 같은 뿌리를 가졌다. 슬라브족은 1세기부터 동슬라브와 서슬라브로 나뉘었고, 유럽에서 게르만이 대이동을 하던 시기에 남쪽으로 내려가 남슬라브족을 형성했다.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서슬라브족은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그리고 남슬라브족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에 정착하여 살았다.

 

우리가 공부하는 러시아의 역사는 이 동슬라브에서 시작된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 동슬라브족은 점차 합쳐져 북쪽의 노브고로드와 남쪽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두 개의 부락 연맹을 형성했다. 9세기 중엽부터 이들 부락 내에는 끊임없는 내분이 일어났다. 이틈을 타서 북쪽에서 내려온 바랴크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바랴크는 바이킹족이다. 9세기에서 11세기에 바이킹 즉 {북쪽의 게르만인) 노르만들이 유럽으로 대거 남하하던 시기에 동슬라브족에게도 노르만이 찾아왔다. 바랴크의 지도자 류리크가 862년 최초로 노브고로드를 점령하고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 노브고로드의 두 번째 대공이 된 올레크가 882년 키예프를 점령하고 정치적 중심지를 키예프로 옮겼다. 이로써 키예프 루시 공국이 탄생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 최초의 국가로 연표에 등장하는 키예프 공국은 바이킹족 (바랴크) 지배자와 동슬라브족 피지배자로 구성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인 지배자와 말갈족 피지배자로 구성된 발해와 유사하다고 할까. 그런데 러시아라는 말의 어원인 ‘루시’는 슬라브족이 자기 땅에 찾아온 이방인인 바이킹을 가리켜 ‘항해술이 뛰어난 사람’ 이라는 의미로 쓴 것이다. 이후로 바이킹과 슬라브족은 서로 동화되어 새로운 슬라브족으로 탄생하였다. 민족적으로는 슬라브족, 국가 명칭으로는 루시(바이킹을 가리킴)를 사용하며 지금까지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오고 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러시아 역사에는 딱 두 왕조만이 등장한다. 류리크왕조와 로마노프왕조이다. 류리크왕조는 바이킹 지도자 류리크가 세운 것으로 7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노브고로드 공국과 키예프 공국을 통치하였고, 킵차크한국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도 계속되어 모스크바 공국을 다스렸다. 류리크왕조는 이후 로마노프왕조로 이어졌다.

882년에서 1240년까지 존속한 키예프 루시 공국은 987년 블라디미르 1세 때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였다. 비잔티움제국의 안나 공주와 결혼한 블라디미르 1세는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를 ‘루시의 세례’라고 부른다. 루시와 비잔티움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키예프 공국의 문화가 발전하였다. 비잔티움 황제가 보낸 키릴 형제가 만든 (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키릴 문자가 사용되었고 루시 최초의 법전이 탄생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1206년 테무친이 칭기즈칸에 즉위한 후 유라시아 세계는 빠르게 몽골의 지배 아래 놓였다. 칭기즈칸의 맏아들인 주치의 아들 바투가(칭기즈칸의 손자다) 유럽 원정에 나섰다. 1240년에 바투가 세운 킵차크한국은 200여 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킵차크한국은 공물과 부역을 징수하였지만 루시의 대공들을 승인하고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였다. 킵차크한국은 14세기 말에 티무르에 의해 큰 타격을 입은 후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싸우다가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대패하여 1502년 멸망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모스크바라는 명칭은 핀란드어로 ‘습기가 많은 곳’이라는 뜻이며, 1147년에 처음으로 러시아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모스크바는 원래 수즈달 공국의 남쪽 끝에 세워진 변방 기지였다. 모스크바 공국은 14세기에 이반 칼리타 대공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킵차크한국의 통치 아래 있었던 칼리타 대공은 몽골 칸에게 뇌물을 주고 1382년 블라디미르 대공 및 루시 공국들의 수장에 봉해졌다. 몽골인을 대신해 루시 전 지역에서 공물을 거두어들이는 권한도 얻었다. 이로써 루시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했다.

 

1476년 이반 3세는 쇠약해 가던 킵차크한국에 대한 공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킵차크한국의 군대가 진격해 오자 선봉에 서서 군대를 이끈 이반 3세는 마침내 모스크바 공국을 몽골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켰다. 또한 분열되었던 루시를 빠르게 통일시켜 루시의 군주로 불리며 차르의 칭호를 얻었다. 체제를 정비하고 봉건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인 두마에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다.

 

러시아 최초의 공식적인 황제는 이반 4세이다. 차르 호칭을 처음 획득한 것은 이반 3세지만 차르 호칭을 공식 사용한 것은 이반 4세이다. 강력한 황권을 추구하여 러시아를 중앙집권화 하였으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몽골족 (타타르)과의 전쟁을 통해 우랄산맥을 넘어 광활한 시베리아로 진출하였다. 그의 군사, 정치 개혁은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소련의 스탈린도 그의 신봉자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반 4세는 잔혹한 이반 즉 이반 뇌제(잔혹한 이반의 일본 번역어)라고도 불렸다. 노년에는 더욱 난폭해져 임신한 며느리를 때려 유산시키고 아들을 지팡이로 때려 숨지게 만들기도 했다. 1584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사망했다.

 

<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반 4세 사후 왕위를 이은 표도르가 후손 없이 죽자 류리크왕조는 갑자기 종말을 맞았다. 차르 계승권을 둘러싼 극심한 다툼과 혼란이 이어지다 1613년 이반 4세의 친척인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에 선출되었다. 로마로프왕조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왕조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300년 간 러시아를 통치하였다.

 

로마노프왕조를 시작한 미하일은 귀족들과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토지를 봉지로 나누어 주었다. 그런 한편 농노에 대한 압박과 착취는 갈수록 심해졌다. 서유럽에서는 이미 농노제가 해체되고 있던 상황에 러시아는 농노제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농노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잇따라 농노 봉기가 일어나 러시아의 17세기는 ‘폭동의 시대’로 불린다.

 

17세기 말에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 차르가 탄생하였다. 10세의 나이에 공동 황위에 오른 표트르 1세이다. 권력 투쟁에 의해 궁중 밖에서 성장한 표트르는 다양한 계층과 어울렸고, 외국인들에게서 새로운 사상과 풍습을 받아들였다. 조선술과 해군력 증강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표트르는 익명으로 직접 시찰단에 끼여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 목공 기술을 배웠다. 영국의 해군력도 직접 배워 와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창설했다. 해군력 뿐 아니라 육군도 증강하여 스웨덴과 전쟁 끝에 발트해로 진출하였다. 서구화를 추진하여 네바강 하구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수도를 이전하였다. 유명한 수염세를 거두어들이며 까지 러시아를 서구화하려고 했던 그는 유럽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잔티움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던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그의 개혁은 러시아 역사에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하지만 상류계급과 연대한 차르 중심의 개혁은 전제 정권을 강화하여 한층 야만적인 착취방식이 생겨났고, 이는 훗날 민중 폭동의 씨앗이 되었다. 서구화 정책은 슬라브 문화와 전통을 사라지게 했고 러시아인의 뿌리를 흔들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계몽전제군주를 자처한 예카테리나 2세의 통치는 계몽보다는 전제에 방점이 있다. 계몽 또한 시민이 아니라 귀족 계급에 해당한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은 ‘귀족들의 황금기’로 불리며 실질적으로 발전했지만, 농노제는 강화되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5%만이 농민이었고 95%는 농노였다.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농민군 전쟁이었던 푸가초프의 난도 이때 발생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나폴레옹의 몰락을 이끌어 유럽을 구해낸 인물이 알렉산드르 1세다.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반하여 영국산 물건에 대한 수입 규제를 풀자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로 진격해 들어왔다. 러시아군은 ‘러시아의 넓은 영토를 이용해 나폴레옹의 힘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작전’을 세워 모스크바를 비우고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 들어간 날 저녁에 화재가 일어나 도시 전체가 6일 동안이나 불탔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텅 빈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은 식량과 무기마저 전달받지 못한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이 돌았고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러시아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공격하여 러시아는 대승을 거두었다. 믿기 힘든 나폴레옹의 패배를 지켜 본 유럽은 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결국 패하고 엘바 섬으로 귀양 갔다.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 전쟁을 ‘1812년 조국 전쟁’ 이라고 부른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자녀 없이 갑자기 죽자 다음 차르를 두고 혼란이 일어났다. 두 동생들이 서로 차르를 양보하는 사이에 얼마간의 공백이 발생했다. 이틈을 타 전제정치를 반대하고 공화정을 주장하는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기획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한 날에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참혹하게 진압되었다. 차르로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절대 전제 군주로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으며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19세기 자유주의가 퍼져나가던 유럽의 상황과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해법 에듀 스토리텔링 러시아사>    

 

1855년 니콜라이 1세가 크림전쟁 도중에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즉위하였다.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와 알렉산드르 2세는 충격을 받았다. 오스만과의 계속된 러·투 전쟁에서 손쉽게 승리해 왔던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을 지원하자 대패한 것이다. 크림 전쟁의 실패로 러시아 전제 군주제의 폐단이 드러났고,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도 크게 흔들렸다. 러시아에는 개혁이 절실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1861년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 폐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농노의 삶은 더 나빠졌다. 러시아 정부는 기존의 영지를 지주의 사유재산으로 인정했다. 농노가 땅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토지 금액의 20%를 보상금으로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 80%는 정부에서 빌려야 했다. 빌린 금액은 49년에 걸쳐 원금과 이자까지 갚아야 했다. 농노들에게는 당장 토지 금액의 20%가 없을 뿐 아니라 빌린 돈을 상환할 능력도 없었다. 농노제도가 폐지된 이후 농노들이 소유한 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농노제 폐지의 실패는 정부에 대한 반감과 투쟁을 불러 일으켜, 농노 반란이 1860년 126건에서 1176건으로 늘어났다.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암살 기도가 계속 되었다. 1881년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인민의 의지당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하지만 그가 시도한 여러 가지 개혁은 러시아 자본주의 발달의 기틀을 닦았다.

 

농노제 폐지 이후 러시아 농민들과 지주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자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이들이 나로드니키이다. 농촌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려 했던 나로드니키 운동은 실패했지만 이들에 의해 러시아 사회주의가 시작된 셈이다. 나로드니키들은 농민의 옷을 입고 농촌을 돌며 혁명을 호소하는 브나로드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하지만 농민들은 혁명을 부르짖는 이들 지식인들을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며 동참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을 경찰에 밀고하는 일도 많았다. 차르 정부의 탄압으로 브나로드 운동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실의에 빠진 나로드니키들은 허무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가 되어갔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러시아는 근대화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19세기 말부터 자본주의가 빠르게 성장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동쪽으로 진출하던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일본과 맞붙게 되었다. 러시아의 진출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영국과 미국 등이 일본을 지원하는 가운데 1904년 러·일 전쟁이 발생하였다. 일본이 중국 뤼순 항에 정박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였다. 일본에 계속 패하던 러시아는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 발틱 함대를 파견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는 바람에 아프리카를 돌아 7개월이나 걸려 쓰시마 섬에 도착한 발틱 함대는 일본군에 전멸했다.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러시아에서는 혁명(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러시아는 1905년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한반도에 대한 관리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 러시아 혁명부터는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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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우는 본격적 역사는 4대문명에서 시작한다. 4대문명은 4대강 유역의 농경민의 것이고 이후 고대제국의 흥망도 대부분 이들 지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히 역사는 농경민의 것으로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책을 조금만 읽어보면 역사의 주인은 농경민이 아니라 유목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 만년 농경의 역사에서 농경민과 유목민을 딱 부러지게 구분하기는 힘들다. 유목민이 남하해서 정착하면 수 백 년의 시간 속에 토착 농경민이 되어 버리고 농경민이 된 초기 유목민의 후손들은 또 다른 유목민의 침략을 받는다. 이런 과정들이 되풀이 되고, 농경민과 유목민은 거듭 융합되어 새로운 문명과 제국을 만든다. 사실 이렇게 보면 농경민과 유목민을 혹은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농경민은 농경민의 생활방식이, 유목민은 유목민의 생활방식이 있고 유라시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이 두 세력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발전해 온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초기 유목민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윌리엄 맥닐의 『세계의 역사』 덕분이다. 본격적인 유목민 관련 서적을 읽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인 수준에서나마 맥닐이 설명하는 유목민에 대해 조금 정리해 두려한다.

 

  <아틀라스 세계사>

  

<용선생 세계사 3>

 

“유목문화가 농경세계의 북과 남에서 독자적인 생활양식으로 출현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기원전 3000년 이전에는 유목민으로 생활하던 사람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p78”

 

유목민들의 터전인 스텝지대는 유라시아 대륙 북위 45도에서 55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수목이 거의 자라지 않아 초기 농경 방법인 화전농법을 하기 힘들었다. 반면 광활한 초원은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했다.

 

“그래서 스텝의 수렵민은 초창기의 농경민이 발달시킨 각종 기술을 접했을 때, 가축사육을 수용하고 고되고 노동이 따르는 곡물 재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리적 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농경을 이해하면서도 경멸하는 독특한 유목민의 생활양식이 출현했다. p78"

 

유목민은 농경민에 비해 수렵 시대의 습성을 훨씬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동경로를 따라 침략자로부터(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축을 보호해야 하는 공동체에는 수렵민 특유의 전투조직과 폭력적 습성이 여전히 중요했다. 이에 비해 초기의 농경민 공동체는 평화롭고 평등주의적이었다.

 

“이후 구세계에서 인류의 역사는 농경민의 생활에서 비롯된 우세한 인구수와 유목민의 문화적 필요에 부응하는 우월한 정치·군사적 조직 간의 상호작용을 축으로 해서 전개되었다. p79”

 

고대 제국이 형성되기까지 크게 두 번, 농경민에 대한 유목민의 광범위한 침략이 있었다. BC1500년을 전후하여 전차를 탄 청동기 유목민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었고, BC1000년을 전후로 해서 철제 무기를 가진 기마 유목민들이 대거 남하하였다.

 

“기원전 1700년 직후부터 약 300년 동안 문명세계는 야만족 정복자들에게 짓밟혔다. 메소포타미아의 북부와 동부에 살고 있던 산악민, 시리아·팔레스타인·아라비아 북부 등 사막 주변의 여러 부족, 북방의 스텝지대에서 발원한 각양각색의 전사집단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기존 문명사회의 모든 중심부를 공격했다. 이후의 역사에서 야만족의 정복이 이토록 폭넓게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전문가의 기술을 지탱하는 사회구조가 견고하지 않았던 문명사회의 주변부에서는 야만족의 침입에 의해 그동안 쌓아올린 문화적 성취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문명세계의 양단에 있던 크레타와 인도에서는 아카이아인과 아리아인의 공격을 받아 거의 모든 것이 불타버리고 폐허만 남았다. 그 두 민족의 침략은 기원적 1500년과 기원전 1400년 사이에 가장 격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p109”

 

아카이아인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그리스인들이다. 트로이를 멸망시킨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가멤논 등등, 그리스의 영웅들이 아카이아인들, 말하자면 야만족이란 것이다. 인도의 아리아인은 남하하여 인더스 문명을 파괴하고 갠지스 강으로 이동하여 인도라는 고대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중국 최초의 국가로 인정되는 상나라 역시 전차를 이끌고 나타난 야만족의 나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문명을 이루었던 서아시아에서는 야만족이 쉽게 농경민을 정복할 수 없었다. 야만족의 광범위한 침략이 있었지만 문명을 지탱하던 사회구조는 붕괴되지 않았고 다만 미미한 변화만 겪었을 뿐이다. 야만족들이 농경사회를 휩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준마가 끄는 가벼운 전차’ 에 있었다.

 

“그들은 질주하는 전차에 안전하게 몸을 싣고 적의 대열을 향해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다. p110"

 

당시 전차의 이점은 보병부대와 맞선 탱크에 견줄 수 있다. 전차 몇 대만 있으면 쉽게 정복이 끝날 정도였다. 하지만 청동 전차와 무구를 만드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전차의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차의 시대는 귀족주의 시대였다.

 

철기와 기마혁명은 또 한 번의 대대적인 침략을 몰고 왔다. 철기가 의도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00년경이었지만 철제 도구와 무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된 것은 기원전 800년경부터라 할 수 있다. 이 무렵 유목민들은 말 등에 직접 올라타는 기마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철제 무기와 기마술의 결합은 전쟁을 대중화하였다.

 

“이 기술적 진보가 초래한 첫 번째 중대한 결과는 야만족이 또다시 고대 서아시아의 대제국들에 침입하여 기원전 1200년과 기원전 1000년 사이에 그들을 하나씩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철기시대 야만족이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미개하지만 평등한 공동체사회 특유의 심리적 통합력 덕분에 누구나 제몫을 다하는 병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118”

 

“서아시아에 새로 침입한 자들은 청동기시대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북부와 동부의 스텝지대와 남부 사막의 외곽과 같은 변경지대 출신이었다. 이들 이주자 집단 중에는 훗날 유명해지는 민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란의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의 필리스티아인, 히브리인, 아람인, 에게 해 지역의 프리기아인, 도리아인 등이 바로 그들이다. p118”

 

 

<용선생 세계사 3> 

 

인간은 기원전 2000년 이전에도 가끔씩 말을 탔다. 그러나 기마병이 되려면 말을 모는 동시에 활을 쏠 수 있어야 했다. 이 문제를 청동기 시대의 전차 전사들은 기수와 사수라는 2인 1조의 분업 체계로 해결했다. 기원전 800년을 전후로 인간은 혼자서 두 역할을 해내는 데 성공했다. 스스로를 말을 모는 하반신과 활을 쏘는 상반신으로 나누어 분업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의 괴물 켄타우로스와 역사시대의 기마인은 전혀 다른 생물학적 종 간의 경이로운 공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기마가 전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p121”

 

유라시아의 초원지대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바닷길이나 비단길보다 초원길이 가장 먼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였다.

 

“유라시아 대륙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은 뚜껑을 꽉 닫지 않은 병 안에서 떠다니는 무수한 미립자에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한 부분에 가해진 압력은 순식간에 전체로 파급된다. 모든 유목민 집단은 자신들이 독점하던 목초지에서 추방되면 아예 사라지거나, 무력으로 인근 집단의 목초지를 재빨리 빼앗았다. 그래서 목초지 관할권에 어떤 중대한 혼란이 생기면, 그 여파가 몇 계절 만에 초원의 한 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파급되었다. 한 집단이 인근 집단을 밀어내는 반복적인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쫓겨난 최약체 집단은 사멸하거나, 스텝지대의 북쪽과 서쪽에 위치한 살기 힘든 삼림지대로 도망치거나, 문명세계의 방위선을 뚫고 남하하여 농경민의 지배자가 되었다.p284~5”

 

유라시아 스텝지대의 동쪽은 서쪽보다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유목민들에게도 혹독한 지리적 조건에 속한다. 스텝지대에서 유목민들 간의 이동이 대부분 ‘서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지리적 사실로 인해, 스텝지대 전체가 유목민 집단으로 채워질 무렵 (기원전 400년경 이후)에는 동서의 기상변화도가 규칙적이고 매우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몽골 고원은 환경이 대단히 가혹하여 사람이나 동물이 살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헝가리 평원까지 뻗어있는 스텝지대의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고 비를 머금은 대서양 바람이 지척에서 불기 때문에 온난하고 습윤해진다. 그러다 보니 스텝지대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뒤에는 피난민 그리고/또는 정복자가 질 좋은 초지와 온난한 기후가 유혹하는 서쪽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서진이 수세기 동안 꾸준히 대세를 이루었다. p193”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서진은 주로 중국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중앙아시아 스텝지대의 여러 유목국가들은 중국과의 대결 과정에서 주변 유목민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밀려난 유목민은 연쇄적으로 다른 유목민을 서쪽으로 밀었다. 서쪽 초원 끝의 유목민은 유럽 대륙 아래쪽으로 남하하여 문명세계를 침략했다.

 

진시황에 의해 쫓겨난 내몽골 유목민 부족들은 외몽골 스텝지대로 달아나며 오히려 강력한 야만족 연합체를 형성했는데 이들이 한나라를 위협했던 흉노 연합체이다. 이후 흉노는 스텝지대를 횡단하여 서쪽으로 지배력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을 그들의 거주지에서 추방했는데, 이 민족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그리스의 영향권에 있던 박트리아 왕국을 무너뜨렸다. 흥미롭지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왕국은 쇠망해가던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의 중간지대에서 흥기했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다른 왕국들보다 훨씬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 기원전 102년에는 중국 군대가 서진하여 멀리 시르다리야 강까지 천자의 종주권을 확립했다. 얼마 후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쿠샨의 왕이 지배하는 제법 강력한 군주국이 이전에 박트리아 왕국이 있던 곳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산악지대를 지나 파키스탄까지 걸쳐 있던 지역-에 세워졌다. 쿠샨인은 흉노가 중국의 서역에서 쫓아낸 페르시아 부족민의 후손이었다. p254~5”

 

정리하자면 인도의 쿠샨은 페르시아계 유목민이 세운 나라인데 이들은 흉노에 의해 쫓기다가 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나라를 세웠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들을 한나라가 월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한무제는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월지와 동맹을 맺고 오도록 장건을 파견했다. 월지도 흉노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 가능한 계획이다. 장건은 도중에 흉노에게 잡혀 10여년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여 월지를 찾아냈는데, 이들은 이미 정착하여 잘 살고 있었다. 여기서 월지가 쿠샨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여하튼 이들은 한나라의 제안을 거절했다. 장건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흉노와 서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가져와 결국 흉노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비단길이라는 동서교역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용선생 세계사 3>

 

 

비단길이 열리고 동서교역로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무장 기병의 등장이 그것이다. 스텝지대의 말은 조랑말이다. 그런데 기원전 100년 이전에 파르티아인이 말에게 특별히 재배한 알팔파를 사료로 먹이면서 훨씬 크고 강하고 아름다운 품종의 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말은 기병과 말이 완전무장을 해도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중무장한 기병은 스텝지대의 경무장 기병이 쏘는 화살도 방어하기 쉬웠고 그들의 퇴각도 방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문명세계의 중무장 기마병과 스텝지대 유목민의 경무장 기마병 사이에는 일종의 대치상태가 형성되었다. 어느 쪽도 상대방의 세력권 안에서는 승리할 수 없었다. 대형 말은 황량한 스텝지대의 빈약한 잡초만 먹어서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할 수 없었고, 농경지대에서는 비무장 유목민이 중무장한 신식 기마병에게 승리할 수 없었다. p255~6”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스텝지대의 유목민에 대한 방어선이 구축되자, 문명사회의 정부와 상인은 서로 협력하여 안정적인 교역로를 만들어냈다. 잘 정비되고 치안이 유지되며 무거운 통행세가 부과되는 대상로가 중국과 로마를 연결했던 것이다. 대상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으로 가서 중국의 비단을 로마 제국의 시리아까지 운반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금속, 유리, 상당량의 화폐와 같은 다양한 상품을 싣고 왔다. p256”

 

“거의 같은 시기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면서 홍해를 근거지로 삼아 활약하던 선장들이 인도양의 규칙적인 계절풍을 이용하여 아덴 해협에서 대양을 횡단하여 남인도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벵골 만을 건너 인도의 동해안과 말레이를 연결하는 유사한 항해도 시도되었다. 크라 지협의 짧은 거리를 육로로 횡단하면 동남아시아 연안에서 활동하던 중국의 선박과 접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력기원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말레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지협 구간만 제외하면, 해상교역로가 로마와 중국을 연결하게 되었다. p256~7”

 

훈족과 관련된 또 한 번의 대이동이 있었다. 중국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휩싸이기 시작했을 때 북쪽의 유목민들이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했다. 흉노와 선비, 저, 갈, 강 부족들이 번갈아 16개의 국가를 세웠다. 이들의 남하로 비게 된 초원을 차지한 후 급격하게 성장한 것이 유연이다. 유연이 서쪽으로 뻗어나가자 다른 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그런 집단 중 하나가 유럽의 역사에 등장하는 훈족이다. 이들은 서기 372년에 남부 러시아에 나타났고, 그 지역을 한 세기 이상 지배하던 동고트족을 몰아냈다. 인접한 서고트족은 훈족이 두려워서 로마 제국 영내로 피난했다. 그 떠돌이 전사집단은 로마 정부와 불화를 빚기도 하고 동맹을 맺기도 하면서 변경에서 살아갔다. 서기 410년 로마 시를 약탈한 뒤에, 서고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스페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 땅에 서고트 왕국을 세웠는데, 이 왕국은 711년까지 존속했다. 약탈을 일삼던 게르만인의 여러 부족이 서고트족의 전철을 밟았고, 다른 부족들은 무시무시한 훈족에게 항복했다. p285”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의 대이동은 훈족 때문인데, 훈족은 북 흉노로 추정된다.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만리장성 아래로 내려간 흉노는 남 흉노, 유연에게 쫓겨난 흉노는 북 흉노이다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북 흉노가 서진하면서 게르만을 밀어낸 것인데, 이들을 유럽에서는 훈족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도 투르크와 몽골 등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윌리엄 맥닐이 『세계의 역사1』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유목민에 관한 내용은 이 정도이므로, 부득이 이 글도 여기서 마무리 한다.

 

덧붙임 :  '코미타투스'라는 게르만 전사집단의 시원이 유라시아 유목민에서 시작된다는 KBS다큐 <초원의 제국> 2부 '황금의 맹세'

 

 https://search.daum.net/search?nil_suggest=sugsch&w=tot&DA=GIQ&sq=KBS+%ED%8A%B9%EB%B3%84%EA%B8%B0%ED%9A%8D+&o=2&sugo=15&q=KBS%ED%8A%B9%EB%B3%84%EA%B8%B0%ED%9A%8D+2%EB%B6%80%EC%9E%91+%EC%B4%88%EC%9B%90%EC%9D%98+%EC%A0%9C%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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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KBS 다큐멘터리 <문명의 기억, 지도>는 매우 유익하다. 세계사 공부를 일단락하고 덧붙여 세계지리를 간단히 훑어보고 있는데, 그 첫 부분이 동서고금의 다양한 세계지도들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총 4부로 되어 있는데 나는 <1부 달의 산>이 가장 재미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혼자 보기는 아까워서 스터디 팀에 소개하고 아예 한 주를 잡아 토론을 하기로 했다. 스터디 준비를 하면서 다큐를 다시 보았고, 보는 김에 대강이라도 정리해 두기로 했다. 4부는 이것저것 끌어 모아 구성이 산만하고 별 깊이가 없어 생략하고 1,2,3부만 정리했다.

 

 

 

1부 달의 산

  

 

<1부 달의 산>은 1402년 조선에서 그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미스터리를 밝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작은 단서를 실마리로 찾아가는 그 과정은 마치 추리극과 같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한국사 강의에서 처음 본 지도다. 중국과 우리나라만 커다랗게 그려놓은 것이 너무 우스워 사실 자세히 보지도 않고 무시했던 지도다. 물론 한국사 시험을 대비해 ‘현존하는 동양의 최고 오래된 세계지도’ 라는 것은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세계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도라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이 온전한 형태로 그려진 세계 최초의 지도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 옆에 딱 붙어 잘 구분되지 않는 인도에 비해 아라비아반도와 아프리카는 매우 분명하게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발견하기 약 100년 전 무렵에 바다로 둘러싸인 아프리카 남단의 모습이 정확히 그려진 것이다. 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파로스 등대도 표기되어 있다. 중국 너머로 나아가 본 적이 없는 조선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 그 비밀의 열쇠가 바로 “달의 산” 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지도 오른편 부분에 긴 강줄기가 내려와 두 갈래로 갈라지고 그 아래로 몇 개의 산들이 그려져 있다. 캡춰 화면이 희미해 잘 보이지 않는데, 다음 확대된 화면을 보면 산의 모습이 분명하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물론 “달의 산”이란 표기는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다. 자막이다. 그렇다면 이 산이 달의 산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명국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현재 일본에 있다. 일본 학자들이 십여 년에 걸쳐 복원 작업과 연구를 하고 있는데 현재 5000개 정도의 지명을 찾았다고 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필사본이라 알려진 “대명국지도” 역시 조선에서 만든 것인데 현재 일본에 있다. 대명국지도에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복원하지 못한 뚜렷한 지명이 하나 보이는데 “저블로함마”라는 언뜻 뜻을 알기 힘든 단어이다.

  

  <대명국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저블로함마는 아라비아어 “자바랄까마르”의 음차라고 한다. 자바랄까마르가 아라비아어로 바로 달의 산이다. 조선의 지도에 어떻게 해서 아라비아어가 등장하는 것일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순전히 조선에서 그린 지도가 아니다. 중국 너머의 세상을 모르는 조선이 아프리카를 상상해서 그려 넣을 수는 없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 원나라의 “혼일강리도”에 우리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합쳐서 만든 편찬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도의 지명들도 모두 원나라 시절에 쓰던 이름이다. 그런데 중국의 혼일강리도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나라 지도에 아라비아어를 음차한 지명이 있는 것은 충분히 그럴 듯하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는 이슬람인들 즉 색목인을 매우 우대했다. 색목인은 몽골이 유라시아를 정복하는데 적극 협력하여 길잡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원나라의 관리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해안선이 매우 정확하게 그려진 것을 보아도 이 지도에 이슬람의 영향이 컸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아랍은 7C부터 바닷길을 개척했고 8C에는 바다를 이용하여 동남아시아는 물론 중국과 우리나라까지 도착했다. 원나라 역시 바닷길을 중시했다.  유목민족이라 해상무역을 등한시 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원나라는 대운하를 정비하여 해상무역을 활발히 전개했다. 항저우, 취안저우, 광저우 등의 항구도시가 이때 번영하였다. 원은 대운하로 내륙의 물건을 실어 색목인의 도움을 받아 아랍인의 바닷길을 이용해 동서무역을 전개했을 것이다. 이런 활동들이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정교한 해안선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달의 산으로 돌아가자.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있는(추정되는) “저블로함마”는 이 지도가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보다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알 이드리시 지도는 1154년에 만들어진 이슬람의 대표적인 지도이다. 세계지도 한 장과 지역도 70장으로 구성된 지도책인데, 심지어는 신라도 섬으로 그려져 있다. 남북을 뒤바꿔 그리는 이슬람 지도의 특성상 위쪽에 보이는 대륙이 아프리카이다. 아프리카에서 단연 눈에 뜨이는 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보았던 두 줄기의 강과 그 끝에 있는 산이다. 언뜻 보면 낙하산처럼 보이는 저것이 물론 달의 산일 것이다. 확인해 보자. 

  

<알 이드리시 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산의 위쪽에는 아라비아어로 “자바랄까마르” 즉 “달의 산”이라는 표기가 선명히 남아있다. 하지만 비밀의 끝이 알 이드리시 지도는 아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의 아랍어 번역본의 아프리카 부분 >

 

이슬람세계는 또 하나의 유명한 세계지도를 가지고 있다. 820년에 아랍어로 번역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다. 알 이드리시 지도의 “자바랄까마르”는 프톨레마이오스지도의 번역본에서 나온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이슬람은 중세 유럽이 무시했던 그리스 학문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꾸준히 발전·전파시켰다. 9C에 아랍인은 유클리드 기하학도 번역해 놓았다.

  

 

AD150 년 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장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린 세계 지도이다. 그의 「지리학」에는 한 장의 세계지도와 26장의 지역도가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는 2부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한마디로 인류가 그린 최초의 가장 멋진 세계지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의 주제인 달의 산에 집중해 보자.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의 아프리카 부분 >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의 아프리카 지역도에 지금까지 계속 보아서 익숙해진 그림이 있다. 달의 산이다. 그리스어로 어떻게 읽는지는 모르겠는데 대강 “lune monf." 를 보면 lunar mount가 연상된다. 달의 산이다.

 

먼 길을 왔다. 1402년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그려진 달의 산은 약 1250년 전인 AD 15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린 바로 그 산이었다. 이 달의 산을 중세 암흑기에 보존하여 전파한 것은 이슬람이었고 조선은 원을 통해 획득한 정보들로 가만히 앉아서도 아프리카의 모습을 실제처럼 그려넣을 수 있었다.

 

달의 산은 현재 우간다에 있는 르웬조리산이라 추정된다. 르웬조리산은 지역민들에게 나일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나일강은 달의 산에서 발원한 두 물줄기가 합쳐져 지중해로 흘러가는 길고 긴 강으로 고대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집트 문명의 근원을 달의 산이라 해도 될 것 같다.

 

 

 

2부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AD 90년 경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며 AD 168년쯤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이라고 할 때의 그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인데, 지리학에도 뛰어났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를 다큐에서는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왜 그를 그리스인이라고 할까?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는 기원전 수 천 년부터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지만 BC 6C에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에 병합된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여러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BC 4C에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정복되었고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는 그리스계(마케도니아계) 왕조가 세워졌다. 기원 시작 무렵에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면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로마제국에 속했다. 7C부터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여러 이슬람 왕조들을 거쳐 지금까지도 이슬람세계에 속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지리학」을 쓴 AD 150년 경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니 프톨레마이오스는 로마 시민이다. 그런데 보통은 그리스인이라고 한다. 당시 로마의 통치 방식과 로마 속주에 대한 명칭을 잘 몰라서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당시 이집트는 로마 통치 아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상세한 삶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사회 일원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리스인인데, 그가 속한 곳은 이집트였고, 시대는 로마제국 시기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하면 떠올리는 그 폴리스 국가들과는 상관없다는 것이 사실 중요하다. 헷갈릴 수 있으니까.

 

  

 

각설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는 그리스의 자연과학과 로마의 동방 바닷길 개척이 결합되어 탄생한 고대의 걸작이다.

 

피타고라스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미 지구가 구형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식 때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확인했다. 그리스의 천문학과 수학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곡선으로 표현했다. 경도와 위도처럼 위치를 나타내는 수치도 가로와 세로 선에 기입해 넣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는 서로 아프리카부터 동으로 중국까지 그려져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인도양이 말레이반도에 의해 닫혀있다는 것이다. 믈라카 해협을 넘어 또 다른 바다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왜 이렇게 그렸던 것일까? 그 답은 당시 로마가 개척한 동방 바닷길에 있다.

 

로마는 동양과의 교역에 주로 육로를 이용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 로마는 가는 곳마다 길을 닦았고 그 길은 유럽 서쪽 끝에서 인도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왕조의 후예인 페르시아 유목민들이 기세를 불리면서 육로가 불안해졌다. 로마는 동양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로마가 선택한 길은 지중해에서 홍해를 거쳐 인도의 남서 해안을 돌아가는 바닷길 이었다. 그 흔적으로 인도 남단 지역에는 로마 시대에 전해진 가톨릭이 계승되어 오고 있다.

 

인도양으로 나아간 로마는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당시 항해술과 바닷길의 상태는 로마가 믈라카 해협을 넘어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로마는 말레이 반도와 아시아 대륙을 잇는 크라 지협에서 배를 내려 코끼리를 타고 육로로 나아갔다. 베트남을 통과해 로마가 도착한 곳은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한나라 때였고 역사서 「후한서」에는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AD 166년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신이 처음으로 베트남을 거쳐 중국에 왔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로마는 직접 바닷길을 개척하여 중국과 무역을 함으로써 동양의 끝에는 중국이라는 “비단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과 바다는 말레이반도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는 경험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는 이러한 로마의 경험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의 제작이 AD 150년 경으로 추정되는데 반해 「후한서」는 최초의 로마 사신이 AD 166년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로마의 중국 방문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연대기적으로 조금 안 맞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다큐는 그냥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뭐 워낙 추정치이니까 하고 나도 은근슬쩍 의문을 누른다.

 

AD 150년 경이라는 고대에 프톨레마이오스가 과학과 항해 자료를 바탕으로 놀라운 지도를 만들었지만, 이 지도는 곧 유럽인의 머리에서 지워졌다. 중세 유럽의 세계지도는 모두 성경을 바탕으로 하느님이 창조했을 법한 세계를 상상으로 그렸다. TO 지도라고 하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지도와 비교해 보면 그 퇴보가 놀랍다.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는 르네상스와 함께 말 그대로 부활했다. 비잔티움제국이 멸망하자 다른 많은 자료들과 함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도 이탈리아로 탈출했다. 이렇게 유럽에 다시 등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인쇄된 것이 프톨레마이오스 지도라고 할 정도다. 콜럼부스는 이 지도를 가지고 항해를 떠났으며 지구가 구형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3부  프레스터 존

  

 

 

세계사 공부를 하면서 유럽의 신항로 개척의 동기 중 하나로 프레스터 존 전설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신항로 개척의 가장 큰 이유는 동방의 향신료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시덥 잖은 전설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냥 사람들 사이에서 떠돈 소문 정도로. 그런데 3부 <프레스터 존>은 그 전설의 실체를 파헤치며 그것이 당시 유럽을 얼마나 떠들썩하게 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유럽에는 두 번의 시대에 프레스터 존을 찾아 나선 역사가 있다. 둘 다 이슬람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가 1144년 이슬람의 침입 때이다. 아브라함의 탄생지인 샤르우르파가 함락되자 유럽은 충격에 빠졌다. 그 직후인 1145년에 동방에 기독교 왕국을 세운 프레스터 존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프레스터 존이 예루살렘을 도우기 위해 왔다가 티그리스 강에 막혀 돌아갔다는 주교의 보고가 교황청에 올라왔다. 프레스터 존이 쓴 편지라는 것도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교황청은 프레스터 존을 찾아 나서기로 했는데 그때가 마침 몽골이 유라시아를 휩쓸기 시작할 때였다. 유럽은 몽골이 프레스터 존의 왕국이 아닐까 하고 사신을 파견했지만 몽골의 칸으로부터 모욕적인 취급을 받았을 뿐이다.  원나라에서 활동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프레스터 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럽에 또 다시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부활한 것은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을 멸망시키면서 부터다. 오스만제국을 물리치기 위해 유럽은 또다시 프레스터 존을 찾아 나섰다. 이 다큐에 의하면 그것이 포르투갈이 신항로 개척을 하게 된 동기이다. 하지만 보통은 다르게 설명한다. 물론 오스만제국 때문이긴 하다. 오스만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하자 동방 무역이 어렵게 되었고,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동방의 향신료를 얻기 위해 유럽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했다. 이것이 신항로개척의 이유라는 것이 교과서적인 설명이다.

 

  

 

포르투갈이 프레스터 존을 찾아 나서기 위해 만든 프라마우로 지도이다. 1459년에 만든 이 지도에는 프레스터 존 왕국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에티오피아이다.

  

 

<프라마우로 지도의 에티오피아 부분>

 

에티오피아에는 프레스터 존이 세운 금은이 가득한 왕국이 있었을까? 포르투갈의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 가마도 프레스터 존을 찾아서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에티오피아로 항해했다고 한다. 그의 일지 곳곳에는 프레스터 존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일지>

 

당연히 에티오피아에는 프레스터 존의 왕국은 없었다. 유럽은 끝내 프레스터 존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프레스터 존의 전설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프레스터 존은 네스토리우스파라고 알려졌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주교로 431년 3차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했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던 일파는 로마제국을 떠나 동방으로 건너갔다. 네스토리우스파는 한때 동방에서 번성하기도 했는데 그곳이 당나라이다. 네스토리우스파는 635년에 당나라에 유입되었고 경교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질 만큼 성행했다. 781년에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중국에 전래된 경교의 역사와 활동이 적혀있다. 그러나 경교는 당말기에 탄압을 받아 쇠퇴하였다.

 

당나라의 장안에서 한때 꽃피운 네스토리우스파가 아마도, 동방에 기독교 왕국을 세웠다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7C 장안 곳곳에 세워졌던 경교의 교회가 수 백 년이 지나 유럽에서 신화로 부활했던 것이다. 이슬람세력으로부터 유럽을 구원해 줄 부유하고 강력한 기독교 국가에 대한 믿음으로서. 

 

* 모든 캡춰 화면은 다큐에서 따온 것이다. 단 도표는 직접 그린 것이다. 

 

*지도에 관련된 좋은 글이 있어 링크해 둔다.

http://ppss.kr/archives/17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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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세계사 공부는 서아시아의 근현대사이다. 오스만제국의 근대 개혁과 오스만제국이 해체 되면서 서구 열강에 의해 탄생된 아랍 국가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했다. 다음은 오늘 발표한 팔레스타인의 근현대사 요약본이다.

 

 

1. 팔레스타인 : 영토 이름에서 국가 이름으로 

 

1) 2012년 11월 UN, non-member observer state 승인

2) 영토 혹은 민족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침략에 의해(혹은 대항해) 만들어진 것.

3) 현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팔레스타인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 것은 1차 대전 후 1920년 산레모 회의 (패전국 오스만 해체) -> 영국의 공식 위임통치 : 1923~1948

 

2. 시온주의

 

1) 19세기부터 시작된 “시온의 언덕(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은유)”에 국가를 세우자는 유대인 민족운동

유대인이 유럽 기독교 사회에 동화되기를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함

2) 기독교의 유대교 박해 역사

유대인이 예수 십자형 주장(교리상의 원수)

교황의 유대인 공직 추방(1078)->고리대금업

십자군이 유대인 약탈

레콘키스타 때 추방(무슬림과 동일 취급)

교황이 게토 강제 이주 칙서(1555)

3) 시오니즘의 가속화

19C 후반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포그롬)를 계기로 팔레스타인 이민물결 폭증

4)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1차 시오니스트 회의: 대표자 헤르츨

5) 「시온주의는 유럽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을 등한시했다. 또한 시온주의는 오스만의 지배자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대신 유럽 식민 강대국들의 선의에 의지했다. 다른 식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들도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영토를 개척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팔레스타인 현대사 p67>

 

3. 오스만 제국 시기

 

1) 밀레트 : 종교 공동체

   a) 오스만 내의 비무슬림 종파들이 각각 종교․전통․습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자치권 승인

   b) 3대 밀레트 :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유대교회

   c) 이슬람이 준 선택은 코란, 칼, 지즈야

   d)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밀레트가 붕괴되면서 종교 분쟁화 및 민족운동화

2) 동방문제

유럽은 외교, 발칸반도는 민족, 오스만제국은 영토 문제로 인식

 

4. 영국의 삼중 외교 : 1차 세계 대전 전략과 사후 구상

 

1) 맥마흔(1915~6) : 아랍민족이 오스만과 전쟁을 도와주면 아랍 독립국 수립 약속

2)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

   a) 영․ 프․ 러 의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 구상 -> 현대 중동의 탄생

   b) 영- 팔레스타인,요르단,이라크 / 프- 터키,시리아,레바논 / 러-흑해 동남연안 등

   c) 민족과 종교, 종파를 고려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분할

   d) ex) 이라크 - 북부 수니파 쿠르드인, 중부 수니파 아랍인, 남부 시아파 아랍인, 동부 페르시아어 사용 시아파 무슬림

3) 밸푸어 선언 (1917) : 재정적 지원을 하면 유대인 국가 수립 약속

 

5. 영국의 위임 통치

 

1) 위임통치 : 사실상 식민정치

2) 산레모 회의(1920) :오스만과 승전국 사이의 협정

팔레스타인이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확정됨

3) 영국의 공식 위임 통치 기간 : 1923~1948

4) 맥마흔과 밸푸어가 충돌하며 영국 식민지 정책 혼란

5) 아랍인과 독일이 제휴할 것을 염려 아랍동맹 강화(1938) -> 밸푸어 선언 포기

6) 시오니스트가 미국과 동맹 (1942) : 미국 지지로 유대인 공화국 설립 선언

7) 영국이 팔레스타인 문제 UN에 넘김

 

6. UN 이후의 팔레스타인

 

1) UN의 팔레스타인 분할 안 (1947)

   a) 아랍인 국가, 유대인 국가, UN 신탁 통치 하의 예루살렘

   b) 「 당시 인구비에서 아랍 인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게 이 분할안의 골자였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의 80퍼센트, 아랍 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이로써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이 유대인 차지가 된 것이다[1]. 팔레스타인 내(內) 아랍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중동의 반미주의도 이때부터 싹트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 채택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분할안은 미국과 소련 주도로 강행 통과되었으며, 영국은 기권하였다. 」<위키백과>

 

2) 아랍인 vs 유대인 인구 변천

   a) 시오니즘 이전 : 90% 수니파 무슬림 Ref: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 -> 시오니즘 운동으로 지속적으로 토지 매입, 아랍인 부재지주 매매

   b) 크림전쟁(1853~6) 직전 : 50만 인구 중 기독교도 6만, 유대인 2만(4%), 오스만 제국의 병사와 관리 5만 , 유럽인 1만, 나머지 대부분은 아랍어를 쓰는 무슬림(72%) ref: 팔레스타인 현대사

   c) 밸푸어 선언 당시 (1917) : 무슬림 65만(82%), 기독교도 8만 명, 유대인 6만(8%) ref: 팔레스타인 현대사

   d) UN분할 안 당시(1947) : 아랍인 vs 유대인 = 2 vs 1

3) 팔레스타인인 추방

UN 분할안 발표 12일 만에 유대 땅 예정지에서 팔레스타인인 추방: 난민 시작

4) 이스라엘 국가 선포 (1948. 5. 14) : 미국, 소련 승인

5) 영국 위임 통치 종료 (1948. 5. 15)

 

7. 중동 전쟁

 

1) 1차 중동 전쟁 : 1948. 5. 15 발발 - 인종 청소와 난민 대량 양산

2) 2차 중동 전쟁 : 1956

3) 3차 중동 전쟁 : 1967

4) 4차 중동 전쟁 : 1973

5) 아랍국가의 패배 이유 : 자국의 이익에 따라 분열.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비밀 협정

6) 전쟁은 1948년 5월에서 1949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군대들이 아랍군단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시작되었다. 유대 국가로 지정된 곳 중의 팔레스타인 마을 370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마을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 또는 추방했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대규모의 난민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난민들은 대부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쫓겨났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의 인접국가로도 갔다. 곳곳에 거대한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난민들은 미국 복지 단체와 국제 구호 기구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7) 1967년 팔레스타인은 더 큰 비극으로 빠져든다. 1967년 6월에 발생해 6일 만에 끝난 소위 ‘6일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모두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도망치거나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 난민 공동체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등록된 난민만 1972년에 150만 명, 1982년에 200만 명이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들의 많은 부분이 이 6일 전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는 보호관리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시민권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가옥파괴, 추방, 가택수색, 통행금지, 검문, 재판 없는 구금을 실행하였으며, 이때부터 점령지에 대한 메시아 담론을 확산시켰다. 점령지역을 성스러운 땅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인 근거에 따라 향후 이 지역에서의 철수를 금지했다. 유대 율법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이스라엘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UN은 아랍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대가로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8. 팔레스타인인 민족 운동

 

1) 목표는 팔레스타인 단독 국가 창설 -> 상호 불인정

2)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 : 무슬림 형제단 -> 하마스

3) 1차 인티파다 (1987)

4) 오슬로 협정 (1993) : 상호 인정

유대국가의 생존권 승인과 그 대가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5년간의 잠정자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잠정해결'을 위한 오슬로 합의(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잠정설치에 관한 원칙선언)가 선언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1994년 5월부터 5년간에 걸친 잠정자치가 시작되다. 그러나 협정은 수시로 위반되었다.

5) 2차 인티파다 (2000)

   a)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분쟁은 1967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평화란 이 두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은 시온주의와 1947년의 UN 분할안이었다. 미국과 오슬로 과정은 팔레스타인에게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제한된 주권일 뿐임을 설득했다. 그것은 UN이 인정한 권리인 1948년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한 난민들의 귀환권을 포기하라는 주문이었다. 2000년 여름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이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고, 팔레스타인은 거부했다. 2차 인티파다 중에 자살 테러가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b)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요르단 강 서안 도시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봉쇄가 계속되고, 전기 장벽이 가자 지구를 에워싸고, 정치적 해결책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이제 설교자나 ‘진리의 전달자’는 필요가 없고 폭발물과 수류탄의 끊임없는 공급만이 필요했다. 」<팔레스타인 현대사 p436>

6) 파타 vs 하마스

 

9. 이스라엘의 야욕

 

1) 이스라엘 분리 장벽 설치 : 2002년 이후 ~

2) 정착촌 확장 -> 팔레스타인 땅을 모두 이스라엘화

3) 2014년 백린탄 포격

「이스라엘이 31일 서안지구 베들레헴 남쪽 땅 400㏊(4㎢)를 강제 수용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보도했다. 정착촌 건설 감시 단체인 ‘피스나우’는 이스라엘이 강제 수용할 땅의 규모가 지난 30년 내 최대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수용되는 땅에는 5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이 있다”며 “이번 조처는 새로운 정착촌 건설에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전했다.」<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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