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사 공부는 서아시아의 근현대사이다. 오스만제국의 근대 개혁과 오스만제국이 해체 되면서 서구 열강에 의해 탄생된 아랍 국가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심으로 토론했다. 다음은 오늘 발표한 팔레스타인의 근현대사 요약본이다.
1. 팔레스타인 : 영토 이름에서 국가 이름으로
1) 2012년 11월 UN, non-member observer state 승인
2) 영토 혹은 민족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침략에 의해(혹은 대항해) 만들어진 것.
3) 현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 팔레스타인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한 것은 1차 대전 후 1920년 산레모 회의 (패전국 오스만 해체) -> 영국의 공식 위임통치 : 1923~1948
2. 시온주의
1) 19세기부터 시작된 “시온의 언덕(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은유)”에 국가를 세우자는 유대인 민족운동
유대인이 유럽 기독교 사회에 동화되기를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함
2) 기독교의 유대교 박해 역사
유대인이 예수 십자형 주장(교리상의 원수)
교황의 유대인 공직 추방(1078)->고리대금업
십자군이 유대인 약탈
레콘키스타 때 추방(무슬림과 동일 취급)
교황이 게토 강제 이주 칙서(1555)
3) 시오니즘의 가속화
19C 후반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포그롬)를 계기로 팔레스타인 이민물결 폭증
4)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1차 시오니스트 회의: 대표자 헤르츨
5) 「시온주의는 유럽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을 등한시했다. 또한 시온주의는 오스만의 지배자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대신 유럽 식민 강대국들의 선의에 의지했다. 다른 식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들도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영토를 개척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팔레스타인 현대사 p67>
3. 오스만 제국 시기
1) 밀레트 : 종교 공동체
a) 오스만 내의 비무슬림 종파들이 각각 종교․전통․습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자치권 승인
b) 3대 밀레트 :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유대교회
c) 이슬람이 준 선택은 코란, 칼, 지즈야
d)유럽 열강의 개입으로 밀레트가 붕괴되면서 종교 분쟁화 및 민족운동화
2) 동방문제
유럽은 외교, 발칸반도는 민족, 오스만제국은 영토 문제로 인식
4. 영국의 삼중 외교 : 1차 세계 대전 전략과 사후 구상
1) 맥마흔(1915~6) : 아랍민족이 오스만과 전쟁을 도와주면 아랍 독립국 수립 약속
2)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
a) 영․ 프․ 러 의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 구상 -> 현대 중동의 탄생
b) 영- 팔레스타인,요르단,이라크 / 프- 터키,시리아,레바논 / 러-흑해 동남연안 등
c) 민족과 종교, 종파를 고려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분할
d) ex) 이라크 - 북부 수니파 쿠르드인, 중부 수니파 아랍인, 남부 시아파 아랍인, 동부 페르시아어 사용 시아파 무슬림
3) 밸푸어 선언 (1917) : 재정적 지원을 하면 유대인 국가 수립 약속
5. 영국의 위임 통치
1) 위임통치 : 사실상 식민정치
2) 산레모 회의(1920) :오스만과 승전국 사이의 협정
팔레스타인이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확정됨
3) 영국의 공식 위임 통치 기간 : 1923~1948
4) 맥마흔과 밸푸어가 충돌하며 영국 식민지 정책 혼란
5) 아랍인과 독일이 제휴할 것을 염려 아랍동맹 강화(1938) -> 밸푸어 선언 포기
6) 시오니스트가 미국과 동맹 (1942) : 미국 지지로 유대인 공화국 설립 선언
7) 영국이 팔레스타인 문제 UN에 넘김
6. UN 이후의 팔레스타인
1) UN의 팔레스타인 분할 안 (1947)
a) 아랍인 국가, 유대인 국가, UN 신탁 통치 하의 예루살렘
b) 「 당시 인구비에서 아랍 인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게 이 분할안의 골자였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의 80퍼센트, 아랍 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이로써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이 유대인 차지가 된 것이다[1]. 팔레스타인 내(內) 아랍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중동의 반미주의도 이때부터 싹트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 채택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분할안은 미국과 소련 주도로 강행 통과되었으며, 영국은 기권하였다. 」<위키백과>
2) 아랍인 vs 유대인 인구 변천
a) 시오니즘 이전 : 90% 수니파 무슬림 Ref: 세계사 속 팔레스타인 문제 -> 시오니즘 운동으로 지속적으로 토지 매입, 아랍인 부재지주 매매
b) 크림전쟁(1853~6) 직전 : 50만 인구 중 기독교도 6만, 유대인 2만(4%), 오스만 제국의 병사와 관리 5만 , 유럽인 1만, 나머지 대부분은 아랍어를 쓰는 무슬림(72%) ref: 팔레스타인 현대사
c) 밸푸어 선언 당시 (1917) : 무슬림 65만(82%), 기독교도 8만 명, 유대인 6만(8%) ref: 팔레스타인 현대사
d) UN분할 안 당시(1947) : 아랍인 vs 유대인 = 2 vs 1
3) 팔레스타인인 추방
UN 분할안 발표 12일 만에 유대 땅 예정지에서 팔레스타인인 추방: 난민 시작
4) 이스라엘 국가 선포 (1948. 5. 14) : 미국, 소련 승인
5) 영국 위임 통치 종료 (1948. 5. 15)
7. 중동 전쟁
1) 1차 중동 전쟁 : 1948. 5. 15 발발 - 인종 청소와 난민 대량 양산
2) 2차 중동 전쟁 : 1956
3) 3차 중동 전쟁 : 1967
4) 4차 중동 전쟁 : 1973
5) 아랍국가의 패배 이유 : 자국의 이익에 따라 분열.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비밀 협정
6) 전쟁은 1948년 5월에서 1949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군대들이 아랍군단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시작되었다. 유대 국가로 지정된 곳 중의 팔레스타인 마을 370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마을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 또는 추방했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대규모의 난민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난민들은 대부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쫓겨났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의 인접국가로도 갔다. 곳곳에 거대한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난민들은 미국 복지 단체와 국제 구호 기구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7) 1967년 팔레스타인은 더 큰 비극으로 빠져든다. 1967년 6월에 발생해 6일 만에 끝난 소위 ‘6일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모두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도망치거나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 난민 공동체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등록된 난민만 1972년에 150만 명, 1982년에 200만 명이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들의 많은 부분이 이 6일 전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는 보호관리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시민권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가옥파괴, 추방, 가택수색, 통행금지, 검문, 재판 없는 구금을 실행하였으며, 이때부터 점령지에 대한 메시아 담론을 확산시켰다. 점령지역을 성스러운 땅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인 근거에 따라 향후 이 지역에서의 철수를 금지했다. 유대 율법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이스라엘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UN은 아랍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대가로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8. 팔레스타인인 민족 운동
1) 목표는 팔레스타인 단독 국가 창설 -> 상호 불인정
2)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 : 무슬림 형제단 -> 하마스
3) 1차 인티파다 (1987)
4) 오슬로 협정 (1993) : 상호 인정
유대국가의 생존권 승인과 그 대가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5년간의 잠정자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잠정해결'을 위한 오슬로 합의(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잠정설치에 관한 원칙선언)가 선언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1994년 5월부터 5년간에 걸친 잠정자치가 시작되다. 그러나 협정은 수시로 위반되었다.
5) 2차 인티파다 (2000)
a)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분쟁은 1967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평화란 이 두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은 시온주의와 1947년의 UN 분할안이었다. 미국과 오슬로 과정은 팔레스타인에게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제한된 주권일 뿐임을 설득했다. 그것은 UN이 인정한 권리인 1948년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한 난민들의 귀환권을 포기하라는 주문이었다. 2000년 여름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이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고, 팔레스타인은 거부했다. 2차 인티파다 중에 자살 테러가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b)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요르단 강 서안 도시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봉쇄가 계속되고, 전기 장벽이 가자 지구를 에워싸고, 정치적 해결책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이제 설교자나 ‘진리의 전달자’는 필요가 없고 폭발물과 수류탄의 끊임없는 공급만이 필요했다. 」<팔레스타인 현대사 p436>
6) 파타 vs 하마스
9. 이스라엘의 야욕
1) 이스라엘 분리 장벽 설치 : 2002년 이후 ~
2) 정착촌 확장 -> 팔레스타인 땅을 모두 이스라엘화
3) 2014년 백린탄 포격
「이스라엘이 31일 서안지구 베들레헴 남쪽 땅 400㏊(4㎢)를 강제 수용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보도했다. 정착촌 건설 감시 단체인 ‘피스나우’는 이스라엘이 강제 수용할 땅의 규모가 지난 30년 내 최대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수용되는 땅에는 5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이 있다”며 “이번 조처는 새로운 정착촌 건설에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전했다.」<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