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제국> 이 끝났다. 박경수 작가의 전작 <추적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예전 기사에 의하면 작가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작품은 <추적자>가 아니라 <황금의 제국> 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드라마는 <황금의 제국>이 아니라 <추적자>이다. 작가로서야 아쉽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황금의 제국>은 실패한 드라마다.
기대와 믿음을 갖고 본방을 지켜봤지만, 몰입해 보기에는 인물들이 천편일률이고, 느슨하게 보기에는 사건의 전개가 너무 빠르고 복잡했다. 한마디로 보다가 지쳐버렸다. 작가는 아는 것도 할 말도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주요 인물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모든 인물들을 다 동원해 그걸 말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등장인물의 수만큼이나 각자의 스타일이 다양해야 할 텐데, 거의 모든 인물들이 다 최동성 회장처럼 아니, <추적자>의 박근형(의 역)처럼 멋지게 말한다. 걸핏하면, ‘오빠가 열 살 때 말이야....’, ‘요술램프가 있었는데...’, ‘고구마 두 개를 주웠는데...’ 따위로 시작한다.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는 오늘을 말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인용하지 않고는 눈앞의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최서윤, 최민재, 장태주는 물론 주변의 조역들까지 하나같이 비유법 대 마왕이 되어버렸다. 말투도 비슷하다. “ ~ 했네요.” 주어가 말하는 사람 본인인데도 죄다 “ ~ 했네요.”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뚜렷하게 구분지어 놓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그 개성을 다 지워버렸다.
내용은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성진그룹이라는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세 명의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합집산, 거듭되는 배반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누구 하나 마음을 붙일 인물이 없다. 모두 다 악하고 모두 다 측은하다. 맨손으로 시작한 태주가 우리 편인가 하면, 이놈은 어느새 악마와 손을 잡고 있고, 서윤이 측은한가 싶으면 제국의 공주님은 태생답게 차갑고 잔인하다. 욕망이 재능을 앞지르는 민재가 우리 모습이지 싶으면, 이놈은 또 교활하고 치사하다. 자본주의에는 도덕이 없다는 이 냉혹한 진실이야말로 작가의 뚜렷한 의도겠지만, 도무지 감정이입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드라마의 힘을 빼버린 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의 여신 정이’ 같이 너무 번연한 구도만 짜증이 나는 줄 알았지, 이렇게 너무 복합적인 구도 역시 짜증이 날줄은 나도 몰랐다.
사건의 전개 역시 현기증이 난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의 우리나라 경제사 자체가 어지러울 만큼 급변했다고 쳐도, 이것을 배경으로 주요인물들이 이합집산 하는 속도는 드라마계의 LTE라고 해야 할 것이다. 24회를 이어가는 동안 매회 반전이 일어나고, 매번 배반하고 손을 잡고 또 뒤통수를 치고 또 손을 잡고, 그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반전에 반전’을 몇 번이나 흥미롭게 보아 줄 수 있을까? 몇 번 거듭되다 보면 자동적으로 또 반전이 일어나겠지 싶고, 그 반전이 하나도 신선하지 않다.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가시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파장이 너무 긴 적외선이나 파장이 너무 짧은 자외선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 가운데 가시영역만이 다채로운 색깔을 빛내며 우리 눈에 아름답게 들어온다. 우리 마음 역시 그러한 것 같다. 너무 느리게 번연하게 진행되는 ‘불의 여신 정이’ 같은 것도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지만,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는 <황금의 제국> 역시 우리 마음을 파고들지 못한다. 이 드라마의 한계는 너무 많아 모자라고, 너무 풍부해 부족하다.
그러나 드라마로서의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황금의 제국>은 탁월하다.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없다는 것이다. 착한 자본은 없다. 빌 게이츠가 천문학적인 자선을 한다고 해도, 그의 인도주의적인 측면과는 관계없이(? 혹은 은밀한 관련성으로) 그는 무자비하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빌 게이츠의 자선은 경제적 착취를 가리고 있다. 선진국들의 원조 역시 마찬가지다. 후진국의 빈곤에 그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춘 채 인도주의적 자선을 베푼다. 이것은 빌 게이츠가 두 얼굴을 가진 악마라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황금의 제국>은 그에 대한 답이다.
<황금의 제국> 마지막 회는 누구나 예상했을 것처럼 태주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성진 그룹은 서윤이 끝끝내 지켜냈으나, 모두가 떠난 빈자리에 홀로 남은 이 제국의 공주는 사무친 울음을 터뜨렸다. 민재는 욕망을 털어내지 못한 채 검찰에 연행되었다. 파국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모두를 덮쳤다. 황금의 제국이 선택하는 인간은 인간성을 제거한, 철저한 자본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2세대를 넘어 3세대 경영이 시작된 우리나라의 자본가들은 더 이상 무식하고 탐욕스럽지 않다. 고급문화와 폭넓은 지식의 수혜를 받아 점점 품격 있는 귀족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제국의 공주 최서윤의 형상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서윤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인문학자다. 최동성 회장으로부터 그의 상징인 만년필을 물려 받긴 했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착한 자본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최동성 회장은 말한다. “서윤아, 좋은 사람이 되지 마라.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라.” 사랑하는 딸이 황금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착한 심성을 버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애비는 비통하게 당부한다.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의붓어머니 한정희, 사촌 오빠 최민재 그리고 남편 장태주와 길고도 힘겨운 싸움을 치러나가며 서윤은 동생을 버리고, 오빠를 버리고, 언니를 버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처럼 자신을 가르치며 보좌하던 박전무를 버린다. 홀로 댕그라니 남겨진 서윤은 하나씩 버려야 했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바로 자신이었음을, 그래서 버림받은 것은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듯 서럽게 오열한다.
그러나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되려는 자, 누구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자본이 가르쳐 준 냉혹한 진실이다. 서윤은 성재처럼 따뜻하게 살고 싶다는 여리고 여린 꿈을 버렸다. 민재는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동생을 잃었다. 태주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철거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이들은 제국이 필요로 하는 무자비한 자본가가 되었다. 제국이 이들을 바꿔놓았다. 욕망을 미끼삼아서.
제국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제국 그 자체이다. 절대반지처럼 그것을 가지려는 자는 누구나 그것의 지배 아래 놓인다. 자본가가 냉혹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차갑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도 황금의 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눈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 제국의 제단 앞에 광기에 휩싸인 태주는 끝끝내 아버지를 제물로 봉헌한다. 아버지 같이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던 마지막 다짐을 배반하고, 보상도 없이 강제 철거를 지시한다. 진압 과정에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태주는 수술비마저 거부하고, 그 철거민은 아버지처럼 병원 침대 위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태주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설희는 검찰에 태주를 고발한다. 자신이 대신 옥살이를 한 살인 사건의 진범이 태주임을 밝힌다. 폭발할 듯한 태주 앞에 민재가 미끼를 던진다. 설희에게 횡령죄와 무고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태주는 절대반지를 버리고 아버지와 설희에게 되돌아온다. 그러자 황금의 제국은 눈앞에서 사라진다. 성진그룹과 웃음이 넘치는 식탁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주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손에 피를 묻힌 태주는, 무엇보다 황금의 제국을 엿보아 버린 태주는 쉽사리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주는 믿었다. 황금의 제국은 지옥이지만 그 지옥에서 살아남으면 거기가 곧 천국이 될 것이라고. 사랑하는 설희와 천국에서 살 것이라고. 그러나 태주는 마지막에 홀로 광활한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황금의 제국>이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은 자본 형성의 추악한 과정이다. 장태주는 최동성을 반복한다. 이미 성진그룹이라는 제국을 일군 최동성은 신화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그룹을 키워온 과정은 장태주가 보여주는 편법, 탈세, 사기, 탈취와 동일한 것이다. 장태주는 자신도 최동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최동성의 시대는 지났다. 6.25 전쟁과 전후 재건의 혼란기, 황금의 30년을 구가하던 경제성장의 시기를 틈타 자본을 축적하고 기업을 세우고 족벌을 형성할 수 있었던 기회의 시대는 끝났다. 이미 자본은 탄탄하게 뿌리를 내렸고 맨 손으로 제국에 덤벼드는 돈키호테의 파국은 시작부터 예정된 것이다. 그나마 한 번 주어진 기회가 IMF 경제 위기였다. 10억 달러로 제국의 심장부에 들어 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
그 제국 한 가운데에서 태주는 황족들의 실체에 경악한다. 맏아들은 무능하고, 큰 딸은 어리석고, 사위는 탐욕적이고, 며느리는 이기적이다. 태주는 자만한다.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 제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훨씬 뛰어나니까. 그러나 태주는 몰랐다. 이들 각각은 무능하고 어리석지만, 제국 자체는 이미 탄탄하게 짜여있다는 것을. 그물망처럼 뒤덮인 정보력, 인맥, 조직력, 거기에다 성공한 자에 대한 세간의 존경까지, 실제로 제국을 지탱하는 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런 구조라는 것을.
바다로 뛰어들기 전 태주는 서윤에게 말한다. 당신에게 진 것이 아니라고. 최동성 회장에게 진 것이라고. 태주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았다. 제국이라는 구조에 자신이 철저하게 패배했다는 것을. 내가 당신들이 만든 제국 안에서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냐고 태주는 말한다.
이미 떠돌이 무사가 왕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20년의 격변을 거치며 자본은 더욱 견고해졌고, 제국은 고귀한 혈통을 가진 자에게만 세습된다. 최동성과 장태주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 해도 장태주의 패배는 그가 가난한 집 안에 태어났을 때 이미 정해져 버린 것이다. 최동성 역시 빈손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성공 신화가 지금 이 시대의 청춘에게 전혀 어떤 위안도 희망도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방송이, 책들이, 멘토가 희망을 떠든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또 하나의 고문, ‘희망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고문의 끝에는 바다로 뛰어든 태주가 있다.
태주와 서윤은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했다. 착하게 성공하는 동화를 꿈꾸었던 그들에게, 그들의 성공신화를 기대했던 우리에게, 작가가 들이민 진실은 냉혹하다. 우리가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을. 제국의 공주마저 자신을 다 내주어야 비로소 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 SBS <황금의 제국> 공식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나라 경제사의 개요이다. 드라마의 빠른 전개를 따라가는데 도움을 준다.
1990년 신도시 개발
1997년 IMF
1998년 빅딜과 구조조정
2000년 벤처 열풍
2002년 부동산 광풍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2010년 부동산 거품이 꺼져가는 시기
** 공식홈페이지에서 하나 더,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란?
전 국민이 황금의 투전판에 뛰어들었던 욕망의 시대.
그 욕망의 싸움터에 뛰어든 청년 장태주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씨줄로,
국내 굴지의 재벌, 성진그룹의 가족사와 후계다툼을 날줄로,
우리 모두의 부끄러웠던 지난 20년의 욕망을 배경색으로 그려낸
우리 시대의 세밀화이며,
장쾌하고 비극적인 현대판 서사 영웅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