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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하라 ~> 시리즈의 3탄이 나올까? 하필 1997과 1994를 불러낸 이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했겠지만 나는 조금 아쉽다. 이왕이면 나의 20대가 소환되었다면 더 행복했겠지 싶은 개인적 아쉬움이다. 경상도에서 10대를 보내고, 서울에서 20대 이후를 주~욱 보낸 40대라 1997과 1994 모두 친숙했다. 그러나 내게 더 특별했던 것은 1994다. 주변 아줌마들 이야기로는 1997이 더 재미있었다지만, 1994의 하숙생 이야기는 내내 나의 하숙시절과 겹쳐졌기 때문에 나는 1994가 더 좋았다. 아마 1997이 더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빠순이 문화’에 내가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빠순이 세대가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밝게 자라지 못했다. 궁핍했고 어두웠다.

  대학 3학년 때 옮긴 하숙집이 나정이네와 비슷했다. 충청도에서 농사를 짓다 땅을 팔고 올라와 하숙을 처음 시작한 집이었다. 퉁퉁한 아줌마와 빼빼마른 아저씨, 그리고 초등, 중등의 아들과 딸이 있는 주인집이었다. 1층에는 주인식구와 나와 내 룸메이트가 살았고 2층에는 열 명 가량의 남학생들이 시끄럽게 뒹굴며 살았다. 수시로 친구들을 데려와 밥상머리에 앉혀도, 밥시간이 훨씬 지나 부엌을 덜커덕거리며 수선을 피워도 눈치 주는 일이 없었다.

  밤이 없던 하숙촌은 시도 때도 없이 시끄러웠다. 누구라도 과외비를 받으면 그때 막 유행하기 시작했던 양념치킨을 사들고 이층 거실에 모여 앉아 때로는 밤을 새며 기타를 치고 술을 마셨다. 한번은 참다못한 건너편 집 이층의 젊은 남자가 내복 차림으로 플래시를 비추며 욕설을 퍼부어댔지만 대거리를 해가며 우리는 술판을 접지 않았다. 거기는 치외법권 하숙촌이었고 우리에게 규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고성방가나 소음죄로 신고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늘 우리 가까이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셔틀버스 앞에서 가방을 뒤지거나 이단옆차기로 데모하는 학생의 얼굴을 가격하는 것이었다.

  하숙촌에 살 때는 거기가 세상의 전부였다. 학교와 하숙집을 오가며 보는 세상이 전부였고, 서울에서 4년을 살아도 그 작은 세상 밖을 나가본 적이 별로 없었다. 과외를 하러 오가던 강남의 아파트촌,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데모대에 휩쓸려 쫒아 다녔던 신세계 백화점 앞과 여의도 정도가 잠깐씩 엿보았던 세상 밖의 다른 세상 이었다.

  그때도 복학생들은 그렇게 말했다. 여기 참 많이 변했다... 군대 3년 만에 단골 막걸리집도 없어지고 서점도 없어지고, 학생들은 되바라졌다고. 치마 입고 화장을 한 여학생들이 교정을 부끄럼 없이 돌아다닌다고. 졸업하고 취직을 한 뒤 얼마 있다 다시 찾은 하숙촌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이야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 사이 하숙촌은 고시촌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주변의 산동네들은 모두 철거되고 아파트촌이 들어섰다고 했다.

  학교와 하숙집 사이 등산로 입구의 감자탕 노점상들은 그래도 여전할까. 시뻘건 기름 위로 통감자들이 둥둥 떠 있던 그 커다란 국솥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그 길에서 왈칵 쏟아냈던 서러운 눈물, 수업을 빼먹고 만화광장에서 보았던 허영만의 숱한 만화들... <오! 한강>

  <응답하라~>에 온 세대가 열광했다. 70년대도 80년대도 열렬히 응답했다. 우리는 무엇에 응답했던 것일까? 90년대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시대를 불러내었고, 그 때의 우리 젊음에 열렬히 응답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단지 추억만이 아닌 그 무엇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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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가까이 위장약을 먹고 있다.

김치도 못먹고, 밀가루 음식도 안먹고,

밥하고 김, 밥하고 계란말이, 시금치죽, 양배추죽, 미역국죽

같은 것들만 먹고 있다.

이제 속쓰려 새벽에 일어나는 일도,

하루 종일 꺽꺽거리며 가슴을 치는 일도,

물을 먹고도 목이 메는 일도

없어져 간다.

 

두 달 동안 살이 많이 빠졌다.

20대 이후 없어져 버린 허리 라인도 생기고,

바지가 줄줄 흘러내릴만큼 허리 둘레도 줄었다.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졌다.

 

조금만 먹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많이 먹으나 조금 먹으나 활동하는 데 별반 차이가 없다.

한창 속이 힘들 때는 입맛도 없었다.

규칙적인 식습관을 위해 때가 되면 의무적으로 찾아 먹었을 뿐이다.

이제 상태가 좋아지니 입맛이 돌아온다.

먹고 싶은 것도 생기고,

한 번 입에 넣으면 위가 당기는지도 모르고 먹으려고 한다.

과식이 제일 나쁘다.

줄어든 위의 용량 보다 많이 먹으면, 바로 탈이 난다.

문제는 시간 차다.

위는 항상 입 보다 늦다.

입에서 당기는대로 먹고 나면, 뒤늦게 위가 신경질을 낸다.

 

나이를 먹으면서 체념하는 것들이 늘어간다.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몸에 맞춰 몸을 달래며 산다.

위가 무능해지면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고,

허리가 삐긋거리면 일 욕심을 버려야 하고,

이가 흔들거리면 딱딱한 것을 먹지 말아야 하고,

눈이 침침하면 책 보는 것을 삼가야 하고...

 

마음은 날아가는데, 몸은 기어가는 그 불일치의 고통이

이제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

아스팔트 틈새로 피어나는 들풀처럼

고통 속에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간다.

 

 

오늘은 치즈케잌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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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하다 별 거지같은 수를 다 쓴다 싶었다. 캔디 이야기의 관건은 별 볼일 없는 캔디에게 왕자님이 폭 빠지게 되는 그럴듯한 사연을 만드는데 있다. 캔디가 얼마나 밝고 예쁘고 씩씩하건 캔디 그 자체는 평범한 여자들의 범주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캔디’라는 일반명사의 정의이자, 시청자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왕자님의 트라우마가 캔디를 빛나는 태양으로 만들뿐이다. 캔디의 별것 없는 특성은 트라우마로 왜곡된 왕자님의 눈에만 태양처럼 빛난다. 그러므로 캔디 드라마의 승패는 왕자님의 트라우마와 캔디의 특성이 얼마나 딱 맞아 떨어지느냐에 있다. 이 똑떨어지는 궁합을 맞추는 것이 우리 시대 로맨스 드라마 작가의 과업이다.

 

  드라마 〈주군의 태양〉은 궁합 맞추기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도 있고, 갈 데까지 간 한계를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을 배반하고 죽어버린 옛 사랑과 그 죽은 귀신을 볼 수 있는 캔디. 왕자 주군의 트라우마와 주군 앞에 귀신을 데리고 나타난 캔디는 똑 떨어져도 너무 똑 떨어지게 맞아 떨어진다. 남은 건 귀신을 매개로 서로 알콩달콩 밀고 당기는 작업의 정석이다. 소지섭의 어색한 듯 멋진 자태와 공효진의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운 캔디는 더 보탤 말도 뺄 말도 없게 만든다. 거기다 홍자매라면 진짜 더 할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현란한 기교에 가슴은 콩콩거리고, 목울대는 따끔 거리고, 눈물은 소리 없이 잘도 흐른다. 가끔 정신이 살짝 돌아 올 때면 우리가 귀신까지 봐가며 신데렐라 스토리에 넋을 놓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되나 싶기도 하지만 70여분의 시간은 잘만 지나간다. 어린 시절 불량식품처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바로 그 맛이다. 박근혜 정권이 4대악으로 규정한 그 불량식품, 어른들도 끊어야 되지 않나 싶지만, 과연 불량식품 근절이 가능할까? 입 안에 착착 감기는 그 맛이라도 없으면 세상은 너무 고달프고 막막한데 말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전부 그 나물에 그 밥은 아니다. 요즘은 신데렐라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그 ‘캔디’는 사실 신데렐라 스토리의 계보로 보면 엄청난 도약이다. 점진적인 발전이라기보다는 한 번에 바꾸어 버린 변이, 양자역학의 전자처럼 도약하는 것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EBS 다큐프라임의 <빛의 물리학> 은 진짜 흥미롭다. 학생 때 보았더라면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좋았을 텐데, 이제는 따라가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너무 재밌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보기에 최상의 교재가 아닐까 싶다. 거기에 양자역학이 나온다 ㅋ. 다시 신델렐라로....

  고전적 신데렐라는 그냥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다. 왕자님은 왕자라는 이름자체가 그 실체를 보증해주는 완전한 존재고. 신데렐라는 순종의 대가로 마녀의 도움을 받아 왕자님과 행복하게 맺어진다. 캔디는 환경에 순응하지 못한 변이형이다. 예쁘지도 않고, 순종적이지도 않다. 그런 캔디가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서는 왕자님 또한 변종이 되어야 한다. 테리는 귀족 아버지의 혼외아들이자 배우 엄마의 숨겨진 자식이다. 고전적 왕자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상처받은 왕자다. 그런데 살아남은 것은 이들 변이다. 다아윈은 진화가 점진적인 발전이 아니라 변이라고 했다든가 어쨌다든가, 들은풍월이므로 정확성은 없다. 하여튼 변종 신데렐라와 왕자가 살아남아 드라마 세상을 평정했다.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리라. 왕국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아니 시장 자본주의에서 생존우위는 괴팍하고 불안한 왕자와 잘난 것은 없어도 자존심 하나는 드센 캔디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캔디 드라마는 여전히 신데렐라 드라마다. 도약이 있긴 했으나 좌표 자체를 뒤바꿔 놓는 혁명적인 변화는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이 다시 자본주의에 흡수되어 은밀하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과 같이 신데렐라에 대한 탈주 역시 다시 신데렐라의 자장 안으로 포섭되었다. 괴물이나 설국열차 같은 봉준호의 영화가 그렇듯이 말이다. 내용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으나 그것이 만들어지고 상영되는 방식은 자본주의의 첨단 기획과 마케팅에 의해 이루어진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신데렐라들은 결국 하나같이 사장님의 직함을 단 왕자님의 품으로 달려간다. 자본주의 시대에 딱 맞는 로망이다. 책을 사랑하는 왕자님, 정의로운 왕자님 따위의 왕자님은 없다. 왕자님의 핵심은 돈이다. 사랑과 행복을 보증하는 은밀한 손은 자본이다. 뭐 딱히 은밀할 것도 없지만.

  시청률이 높았고 화제가 무성했던 캔디 드라마들은 이 신데렐라의 자장 안에서 튀어 오르거나 그것을 벗어나려고 애를 써온 것은 사실이다. 일 년에도 몇 편씩이나 만들어지는 신데렐라 드라마에 질리지 않게 시청자를 사로잡으려면 딱히 다른 생각이 없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긴 하다. 생각나는 것들을 꼽아보면 <내 이름은 김삼순> <시크릿 가든> <청담동 앨리스> 정도다.

 

 

  내 기억으로 <내 이름은 김삼순>의 가장 큰 특징은 ‘이라이자’의 변화다. 사랑을 방해하는 이라이자가 나쁜 년에서 그럴 만한 사연이 있는 괜찮은 년으로 변신했다. 그것이 드라마에서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내가 봤던 드라마가 그렇게 많다고 할 수는 없으니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여하튼 삼식이를 버리고 간 이라이자 희진의 배신은 배신이 아니라 일종의 배려였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변했다. 기억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삼순은 말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돌아온 희진이 삼식이의 기억 속 희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희진이 변한 것이 아니다. 삼식이 희진 속에서 보았다고 믿었던 그 무엇은 희진이 가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렇다고 한다. 사랑을 매개하는 것은 서로가 가진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가지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눈에는 보이는 그 무엇, 그 X라고. 삼식의 기억 속에서 그 X는 자라고 커졌지만, 돌아온 희진에게서 삼식은 더 이상 그 X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그 X는 삼순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X는 상대방에게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의 눈이 보고자 하는 그 무엇이니까.

 

  <시크릿 가든> 은 서로의 영혼을 바꾼 드라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내 영혼이 하나가 되면서 둘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각자의 영혼이 바라보는 것은 마주하고 있는 각자의 몸이다.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상대의 눈에 비친 자기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길라임의 꿈이라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버지를 잃은 소녀가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잠재된 꿈이다. 왕자님의 트라우마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므로, 그가 라임을 보는 순간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다음은 그저 신데렐라 스토리의 정석을 밟기만 하면 된다. 외톨이가 되어 장례식장 바닥에 쪼그려 잠들어 버린 소녀의 이 잔혹 동화는 애처롭다. 왕자님도 없이 혼자 헤치고 나가기에 소녀의 미래는 너무 어두울 것이기 때문이다. 소녀는 꿈속에서도 두렵다. 인어공주가 되어 사라져 주어야 할까봐. 세상이 자신마저 빼앗으려 할까봐. .... 뭐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뻗친다. 이렇게 봐도 신데렐라 드라마가 맞기는 맞다. 가장 비참한 곳에서 꿀 수 있는 유일한 꿈, 그것이 신데렐라 스토리다. 그저 드라마라고 생각하며 보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신데렐라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아니고는 더 이상 꿈꿀 그 무엇이 여기, 오늘에는 없기에.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것이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겠는가?

 

  <청담동 앨리스>는 신데렐라의 자장 밖으로 가장 멀리 도약하려 했던 신데렐라 드라마다. 신데렐라는 흑조가 된다. 그물을 치고 왕자님을 유인한다. 이 시대에 순박한 신데렐라는 없다고 말한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더 이상 꿈이 아니라 계략의 산물이다. 왕자님이 지배하는 냉혹한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욕망을 버릴 수도 없다면, 신데렐라가 바뀌어야 한다. 세경과 인찬은 세상의 벽에 부딪힌다. ‘노력이 나를 바꾼다’ 는 신조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 온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빚더미와 시간제 비정규직뿐이다. 인찬이 먼저 사랑을 버리고, 세경은 버려진 사랑에 오히려 안도하며, 신데렐라가 되기로 결심한다. 윤주의 약점을 잡아 신데렐라 되기 작업을 꾸미고, 그 작업은 실패하지만, 뜻하지 않은 우연이 혹은 예정된 필연이 결국에는 세경을 왕자님의 품으로 데려다 준다. 드라마는 내내 신데렐라 스토리를 전복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안전하게 신데렐라 스토리 안에 머물며 행복하게 끝난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왕자님은 건재하고, 신데렐라를 만들어 주는 것은 여전히 계략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다.

 

 

  <주군의 태양>은 캔디가 아니라는 태양의 반복된 부정에도 불구하고, 너무 착실한 신데렐라 드라마다. 신데렐라 스토리에 로맨틱 코미디를 버무려 놓았으니 어차피 갈 곳이 없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보여준 사랑에 대한 고찰도 없고, <시크릿 가든>의 역설도 없다. <청담동 앨리스>의 전복적 시도는 애당초 싹수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달달하고 사랑스러워 흠뻑 빠졌다 깨어나면 그것으로 좋은 그런 신데렐라 스토리다. 이대로도 ‘좋지 아니한가?’ 이지만, 자기 변주만 되풀이하기에는 홍자매의 능력이 참으로 출중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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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의 제국> 이 끝났다. 박경수 작가의 전작 <추적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하자. 예전 기사에 의하면 작가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작품은 <추적자>가 아니라 <황금의 제국> 이었다. 그러나 성공한 드라마는 <황금의 제국>이 아니라 <추적자>이다. 작가로서야 아쉽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황금의 제국>은 실패한 드라마다.

  기대와 믿음을 갖고 본방을 지켜봤지만, 몰입해 보기에는 인물들이 천편일률이고, 느슨하게 보기에는 사건의 전개가 너무 빠르고 복잡했다. 한마디로 보다가 지쳐버렸다. 작가는 아는 것도 할 말도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주요 인물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모든 인물들을 다 동원해 그걸 말하게 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등장인물의 수만큼이나 각자의 스타일이 다양해야 할 텐데, 거의 모든 인물들이 다 최동성 회장처럼 아니, <추적자>의 박근형(의 역)처럼 멋지게 말한다. 걸핏하면, ‘오빠가 열 살 때 말이야....’, ‘요술램프가 있었는데...’, ‘고구마 두 개를 주웠는데...’ 따위로 시작한다. 과거를 회상하지 않고는 오늘을 말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인용하지 않고는 눈앞의 상황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최서윤, 최민재, 장태주는 물론 주변의 조역들까지 하나같이 비유법 대 마왕이 되어버렸다. 말투도 비슷하다. “ ~ 했네요.” 주어가 말하는 사람 본인인데도 죄다 “ ~ 했네요.”체다. 등장인물의 성격은 뚜렷하게 구분지어 놓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그 개성을 다 지워버렸다.

 

  내용은 단순하고도 복잡하다. 성진그룹이라는 황금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한 세 명의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합집산, 거듭되는 배반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누구 하나 마음을 붙일 인물이 없다. 모두 다 악하고 모두 다 측은하다. 맨손으로 시작한 태주가 우리 편인가 하면, 이놈은 어느새 악마와 손을 잡고 있고, 서윤이 측은한가 싶으면 제국의 공주님은 태생답게 차갑고 잔인하다. 욕망이 재능을 앞지르는 민재가 우리 모습이지 싶으면, 이놈은 또 교활하고 치사하다. 자본주의에는 도덕이 없다는 이 냉혹한 진실이야말로 작가의 뚜렷한 의도겠지만, 도무지 감정이입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드라마의 힘을 빼버린 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의 여신 정이’ 같이 너무 번연한 구도만 짜증이 나는 줄 알았지, 이렇게 너무 복합적인 구도 역시 짜증이 날줄은 나도 몰랐다.

 

  사건의 전개 역시 현기증이 난다.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0년의 우리나라 경제사 자체가 어지러울 만큼 급변했다고 쳐도, 이것을 배경으로 주요인물들이 이합집산 하는 속도는 드라마계의 LTE라고 해야 할 것이다. 24회를 이어가는 동안 매회 반전이 일어나고, 매번 배반하고 손을 잡고 또 뒤통수를 치고 또 손을 잡고, 그렇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반전에 반전’을 몇 번이나 흥미롭게 보아 줄 수 있을까? 몇 번 거듭되다 보면 자동적으로 또 반전이 일어나겠지 싶고, 그 반전이 하나도 신선하지 않다.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가시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파장이 너무 긴 적외선이나 파장이 너무 짧은 자외선을 우리는 볼 수 없다. 그 가운데 가시영역만이 다채로운 색깔을 빛내며 우리 눈에 아름답게 들어온다. 우리 마음 역시 그러한 것 같다. 너무 느리게 번연하게 진행되는 ‘불의 여신 정이’ 같은 것도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지만,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는 <황금의 제국> 역시 우리 마음을 파고들지 못한다. 이 드라마의 한계는 너무 많아 모자라고, 너무 풍부해 부족하다.

 

 

 

  그러나 드라마로서의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황금의 제국>은 탁월하다.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는 없다는 것이다. 착한 자본은 없다. 빌 게이츠가 천문학적인 자선을 한다고 해도, 그의 인도주의적인 측면과는 관계없이(? 혹은 은밀한 관련성으로) 그는 무자비하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규모의 자선 사업가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하고 이질로 죽어간다면 컴퓨터를 가진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빌 게이츠의 자선은 경제적 착취를 가리고 있다. 선진국들의 원조 역시 마찬가지다. 후진국의 빈곤에 그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춘 채 인도주의적 자선을 베푼다. 이것은 빌 게이츠가 두 얼굴을 가진 악마라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황금의 제국>은 그에 대한 답이다.

 

  <황금의 제국> 마지막 회는 누구나 예상했을 것처럼 태주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성진 그룹은 서윤이 끝끝내 지켜냈으나, 모두가 떠난 빈자리에 홀로 남은 이 제국의 공주는 사무친 울음을 터뜨렸다. 민재는 욕망을 털어내지 못한 채 검찰에 연행되었다. 파국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모두를 덮쳤다. 황금의 제국이 선택하는 인간은 인간성을 제거한, 철저한 자본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미 2세대를 넘어 3세대 경영이 시작된 우리나라의 자본가들은 더 이상 무식하고 탐욕스럽지 않다. 고급문화와 폭넓은 지식의 수혜를 받아 점점 품격 있는 귀족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제국의 공주 최서윤의 형상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서윤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싶었던 인문학자다. 최동성 회장으로부터 그의 상징인 만년필을 물려 받긴 했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착한 자본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최동성 회장은  말한다. “서윤아, 좋은 사람이 되지 마라.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라.” 사랑하는 딸이 황금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착한 심성을 버려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애비는 비통하게 당부한다.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의붓어머니 한정희, 사촌 오빠 최민재 그리고 남편 장태주와 길고도 힘겨운 싸움을 치러나가며 서윤은 동생을 버리고, 오빠를 버리고, 언니를 버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처럼 자신을 가르치며 보좌하던 박전무를 버린다. 홀로 댕그라니 남겨진 서윤은 하나씩 버려야 했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바로 자신이었음을, 그래서 버림받은 것은 바로 자신임을 깨달은 듯 서럽게 오열한다.

  그러나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되려는 자, 누구라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자본이 가르쳐 준 냉혹한 진실이다. 서윤은 성재처럼 따뜻하게 살고 싶다는 여리고 여린 꿈을 버렸다. 민재는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동생을 잃었다. 태주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철거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렇게 이들은 제국이 필요로 하는 무자비한 자본가가 되었다. 제국이 이들을 바꿔놓았다. 욕망을 미끼삼아서.

  제국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제국 그 자체이다. 절대반지처럼 그것을 가지려는 자는 누구나 그것의 지배 아래 놓인다. 자본가가 냉혹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차갑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도 황금의 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눈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 제국의 제단 앞에 광기에 휩싸인 태주는 끝끝내 아버지를 제물로 봉헌한다. 아버지 같이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던 마지막 다짐을 배반하고, 보상도 없이 강제 철거를 지시한다. 진압 과정에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태주는 수술비마저 거부하고, 그 철거민은 아버지처럼 병원 침대 위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태주의 질주를 멈추기 위해 설희는 검찰에 태주를 고발한다. 자신이 대신 옥살이를 한 살인 사건의 진범이 태주임을 밝힌다. 폭발할 듯한 태주 앞에 민재가 미끼를 던진다. 설희에게 횡령죄와 무고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태주는 절대반지를 버리고 아버지와 설희에게 되돌아온다.  그러자 황금의 제국은 눈앞에서 사라진다. 성진그룹과 웃음이 넘치는 식탁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주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손에 피를 묻힌 태주는, 무엇보다 황금의 제국을 엿보아 버린 태주는 쉽사리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태주는 믿었다. 황금의 제국은 지옥이지만 그 지옥에서 살아남으면 거기가 곧 천국이 될 것이라고. 사랑하는 설희와 천국에서 살 것이라고. 그러나 태주는 마지막에 홀로 광활한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황금의 제국>이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은 자본 형성의 추악한 과정이다. 장태주는 최동성을 반복한다. 이미 성진그룹이라는 제국을 일군 최동성은 신화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그룹을 키워온 과정은 장태주가 보여주는 편법, 탈세, 사기, 탈취와 동일한 것이다. 장태주는 자신도 최동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최동성의 시대는 지났다. 6.25 전쟁과 전후 재건의 혼란기, 황금의 30년을 구가하던 경제성장의 시기를 틈타 자본을 축적하고 기업을 세우고 족벌을 형성할 수 있었던 기회의 시대는 끝났다. 이미 자본은 탄탄하게 뿌리를 내렸고 맨 손으로 제국에 덤벼드는 돈키호테의 파국은 시작부터 예정된 것이다. 그나마 한 번 주어진 기회가 IMF 경제 위기였다. 10억 달러로 제국의 심장부에 들어 갈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

  그 제국 한 가운데에서 태주는 황족들의 실체에 경악한다. 맏아들은 무능하고, 큰 딸은 어리석고, 사위는 탐욕적이고, 며느리는 이기적이다. 태주는 자만한다. 이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아 제국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훨씬 뛰어나니까. 그러나 태주는 몰랐다. 이들 각각은 무능하고 어리석지만, 제국 자체는 이미 탄탄하게 짜여있다는 것을. 그물망처럼 뒤덮인 정보력, 인맥, 조직력, 거기에다 성공한 자에 대한 세간의 존경까지, 실제로 제국을 지탱하는 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런 구조라는 것을.

  바다로 뛰어들기 전 태주는 서윤에게 말한다. 당신에게 진 것이 아니라고. 최동성 회장에게 진 것이라고. 태주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았다. 제국이라는 구조에 자신이 철저하게 패배했다는 것을. 내가 당신들이 만든 제국 안에서 어떻게 이길 수가 있겠냐고 태주는 말한다.

 

  이미 떠돌이 무사가 왕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20년의 격변을 거치며 자본은 더욱 견고해졌고, 제국은 고귀한 혈통을 가진 자에게만 세습된다. 최동성과 장태주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 해도 장태주의 패배는 그가 가난한 집 안에 태어났을 때 이미 정해져 버린 것이다. 최동성 역시 빈손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성공 신화가 지금 이 시대의 청춘에게 전혀 어떤 위안도 희망도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방송이, 책들이, 멘토가 희망을 떠든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또 하나의 고문, ‘희망 고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고문의 끝에는 바다로 뛰어든 태주가 있다.

 

  태주와 서윤은 각자의 방식으로 파멸했다. 착하게 성공하는 동화를 꿈꾸었던 그들에게, 그들의 성공신화를 기대했던 우리에게, 작가가 들이민 진실은 냉혹하다. 우리가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을. 제국의 공주마저 자신을 다 내주어야 비로소 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 SBS <황금의 제국> 공식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1990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나라 경제사의 개요이다. 드라마의 빠른 전개를 따라가는데 도움을 준다.

 

1990년 신도시 개발

1997년 IMF

1998년 빅딜과 구조조정

2000년 벤처 열풍

2002년 부동산 광풍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2010년 부동산 거품이 꺼져가는 시기

 

** 공식홈페이지에서 하나 더, 드라마 <황금의 제국> 이란?

 

전 국민이 황금의 투전판에 뛰어들었던 욕망의 시대.

그 욕망의 싸움터에 뛰어든 청년 장태주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씨줄로,

국내 굴지의 재벌, 성진그룹의 가족사와 후계다툼을 날줄로,

우리 모두의 부끄러웠던 지난 20년의 욕망을 배경색으로 그려낸

우리 시대의 세밀화이며,

장쾌하고 비극적인 현대판 서사 영웅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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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으러 들어와 습관적으로 TV를 켜니, YTN 속보라는데, '통진당 내란음모죄' 로 법석이다. 시끄럽다... 놀랍기 보다 시끄럽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총기를 준비하라는 녹취록을 확보했단다. 전쟁이 일어나면 경기남부의 통신, 유류 시설을 파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도 한다. 어저껜가  "김정은, 동북아서 위험한 일은 없을 것' 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정작 위험은 위험을 조장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트윗도 대충 놀림거리 하나 만났다는 분위기다. <정원이와 정은이> 라는 '본격냉전콩트' 제목도 나왔다. 정원이가 누군가? 국정원장 이름은 아닌데 갸우뚱거리며 검색을 하는 순간 알았다. 아, 국 정원이! 성을 빼고 부르니 생판 처음 듣는것 같구나 호호.. 국정원 정치개입이 내란음모에 가까운지, 통진당 똘아이들의 쑥덕공론(이런게 있기는 할까;;)이 내란음모에 더 가까운지, 그거라도 이 참에 한번 밝혀보면 좋겠다.

 

 

오후 2시 현재, 다음 실시간 이슈에 '내란음모죄' 같은 것은 없다. 이석기, 김재연이 3위와 5위를 찍고 있고, 1위는 단연 '태풍북상' 이다.  태풍 '콩레이'는 일본 쪽으로 갈 것 같다는 전망이 나왔는데도, 인기가 내란음모 뺨을 친다. 아마 작년 태풍 '볼라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년은 유난히 태풍이 잦았다. 그리고 우리집은 유난히 태풍에 취약했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아파트에, 한 번도 손본적이 없고, 세입자들만 들락거린 험한 집, 거기다 앞은 훤하게 트였고, 결정적으로19층 고층이었다. 평소에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19층엔 회오리바람이 '피용~ 피쉬쉬식' 비명을 지르고,  창문이 덜컹거렸다. 태풍 소식에 박스테잎을 사다 붙였지만 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테잎자국 지운다고 힘만 썼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테잎 붙이고, 신문지 붙이라고 광고를 하더니만, 태풍이 지나고 나니, 그거 다 말짱 소용없는 짓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벌써 수십년 전에 해본 짓인데, 효과는 없고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유리창이 문제가 아니라 창틀이 문제라는 보도도 나왔다. 오래된 창틀은 그 자체가 휘거나 덜컹거려서 창도 깨지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볼라벤이 지나자 창틀이 휘어진 집들이 TV 화면에 위험스레 보도됐다. 그런 기사들을 보면 정말이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낡고 건들거리는 우리집 창틀이 그 거센 비바람을 이겨냈다는 것에 감사했다. 감사를 잘 못하는 성격인데, 정말 감사했다. 나는 그나마 볼라벤이 서해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네로 도망갔다. 평소에도 신경이 예민한 편이라 덜컹거리는 소리를 싫어하는데,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남편이 데려다 줬다. 볼라벤이 수도권에 근접하던 그 날 밤, 남편은 한 숨도 못잤다고 한다. 덜컹거리거나 퍽하는 소리가 아니라 뜯겨나가는 괴상한 소리에, 이제 깨졌나 싶어 나가서 확인하고, 또 나가서 확인하며 밤을 샜다고 한다. 겁 없는 남편인데, 도저히 잠잘 수 없었다고, 무서웠다고 했다.

 

 

다행히 올해는 이사를 왔다. 3년된 새집이고, 7층이라 그리 높지도 않다. 그런데 오고나니, 여기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바닷가라 바람이 세고, 높은 산이 없어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닥친다. 4월에 이사를 왔는데, 정말이지 봄바람이 작은 태풍처럼 불었다. 바람때문인지 남쪽인데도 수도권보다 더 추웠다. 지역 주민들 왈,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바람 때문에 좀 고생한다고 한다. 

 

여름이 되고, 혹여 태풍이 올라올까 조금 신경을 썼다. 그전까지는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건, 농작물을 쓸어버리건, TV 속의 일로만 알았는데, 19층 낡은 아파트에서 태풍을 겪고나니 남의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올해는 아직까지 태풍이 없다. 북상하는 콩레이는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 한다.

 

 

한반도 태풍의 진로는 '북태평양 고기압' 이 결정한다. 태풍은 '북태평양 고기압' 의 가장자리를 따라 북상하는데, 올해는 이 고기압이 워낙 동서로 길게 뻗쳐서 중국-한반도-일본을 뒤덮는 바람에 태풍의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제 북태평양 고기압이 서서히 위축하고 있어 한반도 쪽으로 태풍의 길이 만들어 지고는 있다. 9월까지 강력한 태풍이 올라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기압이 빨리 수축해서 일본쪽으로 오그라들면 우리나라는 태풍을 피해갈 수도 있다.

 

사실 콩레이 기사를 보다가, 북태평양고기압의 분포에 따라 월별로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관한 그림이 있길래 복사해 두려고 한 것인데, 또 말이 길었다. 왜 자판 앞에 앉으면 자꾸 말이 길어지는 지 모르겠다.

 

 

 

이 기사를 통해 오늘 새롭게 안 사실은, 태풍은 지구의 항상성 유지를 위한 자구 노력이라는 것이다. 열나면 우리는 해열제를 먹는데, 지구는 높은 곳의 열을 낮은 곳으로 옮겨 '열적 균형'을 맞춘다. 적도 부근은 당연히 열을 많이 받는다. 이 뜨거운(?) 공기가 바다에서 수분을 공급받아서 덜 뜨거운 고위도 지방으로 이사하는 것이 소위 태풍이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바람과 비가 동반된다.  왜 태풍은 항상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지 이제 알겠다. 저위도에서 고위도로 열을 보내, 지구의 열적균형을 회복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올해는 태풍없이 잘 지나가면 좋겠다. 이 태풍 대신 내란음모죄라는 태풍이 불까? 싶기도 하지만, 열대저기압이라고 전부 다 태풍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찻잔 속의 태풍이란 말도 있지만, 그것이 어찌 태풍인가?   

우리가 이미 볼라벤을 겪어 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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