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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현대사 - 하나의 땅, 두 민족 커리큘럼 현대사 5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쓴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인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지금도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비극의 땅, ‘팔레스타인’ 에 관해 이스라엘인이 쓴 역사를 믿어도 될까? 일란 파페는 이 땅에 살면서 초연하고 중립적인 역사를 쓰기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사실과 ‘진실’을 고수하라는 동료들의 조언은 오히려 헛될 뿐이라며, 저자는 과감히 ‘편견’을 선택한다. “이 책은 식민자가 아니라 피식민자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 점령자가 아니라 피점령자에 동조하는 사람, 사장이 아니라 노동자 편에 서는 사람이 쓴 것이다.” 불가능한 진실 대신 이른바 몫 없는 자part of no part의 관점을 채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자연스런 균형이 있다. 팔레스타인인의 편에 서겠다는 저자의 단호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유대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민족적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팔레스타인인을 미화하지도, 유대인을 단순한 악마로 그리지도 않는 미덕이 있다.

 

제목의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국가를 선포하고 즉각적으로 영국, 소련의 인정을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은 겨우 이 년 전인 2012년 11월에 UN으로 부터 non-member observer state의 자격을 승인받았다. 회원국도 아니고 참관국(?)에 불과하지만, ‘state', 국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팔레스타인’은 무엇인가? 물론 땅이름이다. 그런데 현재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들이 사는 땅을 팔레스타인으로, 그리고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민족과 팔레스타인인으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팔레스타인은 (근)현대사modern 외에는 역사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20세기 초 서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의 침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과 이스라엘이 없었다면 아마도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산다는 것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응집력 있는 지정학적 단위에 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런 식민주의의 노력의 결과로 이제 팔레스타인에는 민족과 종교가 조화를 이루는 구조가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뚜렷한 실체가 아니었던 팔레스타인에게 이런 변화는 과거와의 결정적인 단절을 이루었다 1918년에 이르면 팔레스타인은 오스만제국 시기에 비해 한층 더 행정적으로 통일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세 지역이 하나의 행정 체제로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1923년에 팔레스타인의 지위에 관한 국제사회의 최종적인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영국 정부는 최종적인 국경선을 교섭하면서 민족운동이 쟁취하기 위해 싸우게 될 뚜렷한 공간을 만들어냈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소속감을 불어넣었다. p134」

 

근현대 이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셀주크 투르크가, 더 이전 그러니까 7세기 무렵부터는 아랍인들의 왕조에 속해 있었다. 팔레스타인인의 대다수가 아랍-무슬림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투르크 족들도 제국을 이룬 후 무슬림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약 1400년 동안 이 땅은 아랍-무슬림들의 터전이었다. (조금 자세한 내용과 지도는 여기 ^^)

 

‘팔레스타인 문제’라고 할 때 연상되는 것들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인티파다, PLO, 하마스, 지하드, 정착촌, 점령지, 시온주의 등등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아는 것도 없고, 더욱이 어떤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복잡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다보면 이런 어지러운 개념들이 오롯이 제 자리를 잡으며,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 속에 그 비극적 의미를 드러낸다. 모든 역사는 이야기다. 특히 『팔레스타인 현대사』는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다. 우리에겐 더욱 그렇다.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의 압제와 학살을 겪고도, 동족간의 전쟁으로 땅도 민족도 마음도 나뉘어 원수처럼 대립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너무도 익숙하고 그래서 더욱 서러운 이야기다. 말하자면 500쪽이 넘는 이 역사책이, 그것도 팔레스타인이라는 머나먼 땅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고 그리고 뜻밖에 흡인력이 있다는 말이다.

 

 

19세기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노리며 선교사, 의사, 교육자들을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 땅에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은 선교사들과 거의 같은 무렵에 이 땅에 도착했다. 팔레스타인은 제국주의와 더불어 시온주의라는 두 마리의 늑대를 맞닥뜨린 것이다. 그리고 시온주의는 100년 가까이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시온주의는 유럽의 현상이었고 따라서 다른 서구인들과 마찬가지로 현지인을 등한시했다. 또한 시온주의는 오스만의 지배자들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그 대신 유럽 식민 강대국들의 선의에 의지했다. 다른 식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자들도 유럽에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한 안식처를 만들기 위해 영토를 개척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럽의 민족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지도자들이 민족 부흥의 전망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실현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식민주의 운동으로 바뀌었다. p67」

 

한마디로 시온주의는 식민주의이고,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 개척자들이 그랬듯 팔레스타인에서 원시적인 아랍인들을 내쫒고 문명화된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다. 유럽에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그 역할을 뒤집어 박해자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 시온주의 운동에는 그 유명한 로스차일드도 잠깐 등장한다. 막대한 자금력과 서구 열강에 대한 로비력을 발휘하는데, 이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온주의에서 손을 떼었다.

 

1차 세계 대전은 팔레스타인 비극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되었다. 전쟁의 결과 오스만 제국은 폭삭 망하고,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 놓였다. 1917년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영국은 1948년까지 주둔하는데, 이 때 시온주의에 넘어간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았다. 1917년 11월 2일, 벨푸어 경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고국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가 놓인 것이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에는 무슬림 65만 명, 기독교도 8만 명, 유대인 6만 명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유대인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거의 씨족중심의 생활을 하던 팔레스타인은 명사 가문들이 지도부를 형성했지만, 파벌간의 분열과 대립으로 무기력했다. 시온주의자들은 법률·교육·정치 구조를 확립하고 실질적인 국가기구를 운영했다. 또한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땅을 사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아랍인 부재지주들은 많은 돈을 받고 땅을 매각했으며,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 소작인들은 땅을 잃고 쫓겨났다. 농촌은 더욱 빈곤해졌다. 반란이 일어났고, 영국은 벨푸어 선언을 철회한다고 약속했지만, 영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영국은 2차 세계 대전의 끝 무렵 여러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미국의 경제적 압박 등에 시달리다, 1947년 2월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위임했다. 이 무렵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에 아랍 독립 국가 수립을 약속했고, 유대인 지도부는 미국에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내놓기를 요구했다.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7년 8월 UN은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갈랐다. UN이 내놓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1400년 가까이 이 땅에 살아온 아랍인들로서는 결단코 수용할 수 없는 폭거로, 분노가 폭발했다. 위키 백과를 빌어 분할안의 내용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다.

 

「 당시 인구비에서 아랍 인의 3분의 1, 전체 면적의 7퍼센트만을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퍼센트를 분할한다는 게 이 분할안의 골자였다. 특히 지역 생계 기반인 올리브 농장과 곡창 지대의 80퍼센트, 아랍 인 공장의 40퍼센트가 유대인에게 배정되었다. 이로써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이 유대인 차지가 된 것이다[1]. 팔레스타인 내(內) 아랍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중동의 반미주의도 이때부터 싹트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 채택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분할안은 미국과 소련 주도로 강행 통과되었으며, 영국은 기권하였다. <위키백과> 」

 

    

 

 

  

 

UN 결의안이 채택된 뒤 12일 만에 유대 땅으로 예정된 곳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원주민 상당수가 나라를 떠났고, 팔레스타인의 엘리트들은 외국으로 탈출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었다. 다음날 미국은 곧바로 이스라엘을 승인하는 내용을 발표했고, 이틀 뒤 소련은 이스라엘을 법적으로 승인했다. 영국은 이스라엘 국가 선포 한 시간 전에 마지막 고등판무관이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이제 팔레스타인 땅에는 서구 열강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과 아랍국을 배후에 둔 팔레스타인인 사이에 어떤 완충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1948년 5월에서 1949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군대들이 아랍군단을 이루었지만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시작되었다. 유대 국가로 지정된 곳 중의 팔레스타인 마을 370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유대인들은 마을을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 또는 추방했으며 팔레스타인인의 재산을 몰수했다. 영국의 위임통치 시절에도 땅을 잃고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었지만, 이제 바야흐로 대규모의 난민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난민들은 대부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로 쫓겨났고,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의 인접국가로도 갔다. 곳곳에 거대한 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난민들은 미국 복지 단체와 국제 구호 기구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난민공동체는 뜻하지 않게도 “과거의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치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으로 정치화되었다.” 사실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대대로 살아왔던 땅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된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내몬 ‘정치’ 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가끔 들어본 무슬림 형제단이 조직된 곳도 가자 지구에서다. 무슬림 형제단은 훗날 그 유명한 하마스, 지하드 같은 조직을 낳는다. 1950년대 말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팔레스타인 단독 국가 창설과 난민 귀환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싸워나갔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으로서는 두 눈뜨고 빼앗긴 땅인데, 이스라엘을 인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눈앞의 현실’ 이 그렇다 해도.

 

1967년 팔레스타인은 더 큰 비극으로 빠져든다. 1967년 6월에 발생해 6일 만에 끝난 소위 ‘6일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모두가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다.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시나이 반도, 골란 고원이 모두 이스라엘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마디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와 시나이 반도까지 이스라엘이 장악한 것이다. 이 지역을 이스라엘은 점령지로 지배했다. 요르단강 서안 59만 명, 가자지구 38만 명이 이스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예루살렘은 새로운 유대인 주거지역이 되었다. 시나이 반도에서는 1977년이 되어서야 이스라엘 군대가 모두 철수하였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들의 대부분은 이 6일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근본 원인은 1947년의 분할안 이지만 말이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는 보호관리 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이 지역 팔레스타인인의 인권과 시민권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대한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가옥파괴, 추방, 가택수색, 통행금지, 검문, 재판 없는 구금을 실행하였으며, 이때부터 점령지에 대한 메시아 담론을 확산시켰다. 점령지역을 성스러운 땅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인 근거에 따라 향후 이 지역에서의 철수를 금지했다. 유대 율법으로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이스라엘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다. UN은 아랍국가들과의 평화 유지를 대가로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의 철수를 결의했지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스라엘이 새로 점령한 지역에서 도망치거나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에 의해 난민 공동체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등록된 난민만 1972년에 150만 명, 1982년에 200만 명이었다. 난민들은 이스라엘과 인접 국가들의 최하층 프롤레타리아가 되거나 UN의 기금으로 생존했다. 난민들은 팔레스타인 사회의 땅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었다. 난민들은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아침마다 학대와 괴롭힘을 당했고, 노예시장이라 불리는 곳에서 하루 일당의 노동자로 선택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사실 이스라엘 경제는 점령지에 의해 유지되었다.

 

「1987년에 이르면 이스라엘 경제는 이미 레이건이나 대처식 자유 시장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상태였다. 이런 경제는 점령 지역 출신의 값싸고 유순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이는 지방자치 복지, 경제 등의 권한을 협조적인 지방의 시장들과 의회 수장들에게 위임하는 일종의 신식민주의적 관계를 통해 촉진되었다. 이런 구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점령 지역이 제공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착취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여러 면에서 점령 지역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p360」

 

이런 상황에서 민중봉기와 테러리즘은 이상할 것이 없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봉기로 번역되는 인티파다는 ‘뒤흔들기’ 라는 뜻을 가졌다. 1947년 UN 분할 40년, 1967년 이스라엘 점령 20년 만에 대규모의 민중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가자 난민촌에서 시작된 인티파다는 농촌마을로 불붙었고, 여성과 어린아이와 청소년이 가세했다. 난민촌과 유대지역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협력했다. 그 결과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슬로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스라엘은 PLO를 협상의 상대로 인정하고, PLO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했다. ‘눈앞의 현실’은 턱없이 달랐지만 그때까지도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아랍민족의 단일 국가를 세운다는 이상을 품고 있었다. 1993년 9월 유대국가의 생존권 승인과 그 대가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가자 지구에 5년간의 잠정자치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잠정해결'을 위한 오슬로 합의(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잠정설치에 관한 원칙선언)가 선언되었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1994년 5월부터 5년간에 걸친 잠정자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협정은 수시로 위반되었다.

 

「국경 폐쇄가 되풀이되고 가자 지구를 벗어나는 이동에 자의적인 제한이 가해지면서 오슬로 과정이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 국기만 걸렸을 뿐 이스라엘 병사들이 지키는 거대한 감옥으로 바꿔 놓았다는 인식이 생겨나는 데는 1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슬람 저항 단체인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가 협정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폭탄 공격을 가하자 이스라엘은 국경 폐쇄를 재개했다. p379」

 

「1996년 경 정치 지도자들이오슬로 과정에 관해 만들어낸 이미지의 자리에 현실이 들어섰다. 그 뒤에는 이제 오슬로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찢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근시안적인 정치인들이 팔아먹은 환상을 위해 사람들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p380」

 

2000년 10월 2차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의 관점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의 관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분쟁은 1967년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평화란 이 두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시작은 시온주의와 1947년의 UN 분할안이었다. 미국과 오슬로 과정은 팔레스타인에게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제한된 주권일 뿐임을 설득했다. 그것은 UN이 인정한 권리인 1948년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당한 난민들의 귀환권을 포기하라는 주문이었다. 2000년 여름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이를 승인할 것을 요구했고, 팔레스타인은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국경폐쇄, 검문소에서의 학대, 가옥 파괴, 군사·정치 활동가 암살, 대규모 체포,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이스라엘 영토와 분리하는 장벽 건설 개시 등을 계속해 나갔다. 분리 장벽은 1990년대 중반에 이미 가자 지구에 먼저 건설되었다. 가자 지구는 전기 담장과 감시탑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포로수용소가 되었다. 최고 8m 높이의 요르단강 서안의 장벽은 지금도 건설 중이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리 장벽 앞에서 평화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국가는 여전히 두 개의 거대한 포로수용소이다.

   

 

 

 

 

2차 인티파다 중에 자살 테러가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자살 테러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종교와는 무관하다. 이슬람법은 자살을 비난하며,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속한 수니파 이슬람은 지하드보다는 관용과 평화를 장려한다. 종교는 법으로든 경전에 근거해서든 자살 행위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자살 폭탄 테러는 정치적 이슬람 그룹이 투쟁에서의 독창성과 헌신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선택한 전술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2차 인티파다 무렵 자살 폭탄 공격이 무력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투기와 탱크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살 폭탄으로 대응했다.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요르단 강 서안 도시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봉쇄가 계속되고, 전기 장벽이 가자 지구를 에워싸고, 정치적 해결책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이제 설교자나 ‘진리의 전달자’는 필요가 없고 폭발물과 수류탄의 끊임없는 공급만이 필요했다. p436」

 

희망이 전혀 없는 ‘포로수용소’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살 테러를 선택했다고 해서, 우리가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책은 2004년에 씌어졌고, 당시에도 별다른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딱 10년이 지난 지금도 하마스와 팔레스타인은 서로 로켓을 주고받고 있다. 물론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팔레스타인 쪽이다. 지난 달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초대형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3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이 될 것이란다. 미국마저도 철회를 촉구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갈수록 위태롭다.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읽으며 든 생각은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속내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이스라엘 영토로 삼는 것일 테니 어떤 중재도 내심 귀찮게 여길 것이다. 미국은 중동의 아랍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이스라엘이 필요하다. 아랍 국가들은 각기 자국의 이해타산에 따라 친미적 혹은 반미적 성격을 띤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문제는 자국의 이해를 실현할 기회가 될 때만 의미가 있다. 초기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명사 가문들로서 팔레스타인 전체 보다는 가문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하마스와 지하드 등의 무장 단체는 어쩌면 팔레스타인 민중의 적대를 먹고 산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적대 위에 정권을 유지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극우주의자도 팔레스타인의 근본주의자도 서로의 적대에 뿌리박고 있다. 적대가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질 것이다. 절박한 것은 오직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뿐이다. 그 누구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인권에 호소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실질적인 해법은 되지 않을 것이다. 국제 관계는 희랍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대의 그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눈앞의 현실 즉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운 좋게 국제 역학관계가 뒤집어 지지 않는 한, 남아 있는 방법은 오직 힘을 기르는 방법뿐일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친 인티파다는 민중봉기의 힘을 보여 주었다. 비록 또다시 꺾인다 해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저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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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레스타인’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명칭일까?

 

이스라엘이 쏜 백리탄에 뼈가 하얗게 탄 아이들의 사진이 SNS에서 공분을 일으킬 때, 독서회 회원들이 9월에 읽을 책으로 선택한 책이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다. 만화책인데도 결코 읽기가 쉽지 않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그림체가 무섭고(어릴 때 일본 순정만화에 길들여진 터라, 강풀 등의 웹툰체에도 아직 거리감이 남았다), 여백을 가득 메운 깨알 같은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에 대해 내가 가진 지식이 너무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조 사코는 일제강점기나 미군정기의 4.3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박해와 고문, 강제 소개령 등을 세밀하게 그려내며,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워낙 기초지식이 없는 터라, 이 모든 것들이 왜 시작되었는지, 한줌도 안 되는 이스라엘을 빙 둘러싸고 있는 아랍 국가들은 왜 그렇게 무력한지, 비인도적이고 반인륜적인 이스라엘을 왜 국제사회는 묵인 혹은 비호하는지 궁금증만 커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은 무엇을 가리키는 이름인지, 무심코 불러왔지만 정작 그 이름이 땅이름인지 국가이름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고른 책이 일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현대사』이다. 발제 때까지 팔레스타인의 비극의 원인을 모두 밝혀내리라, 야심차게 도서관 희망도서 목록에 올려놓았는데, 막상 책을 받고 보니 500쪽을 살짝 넘는 무서운 분량이다. 우리나라 현대사도 이렇게 자세히 읽어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양심의 스멀거림과 두께의 압박으로 한풀 꺾인 채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다. 그런데 이 책도 워낙 현대사이기 때문에, 읽다보니 또 궁금한 것들이 생겼다. 먼저 ‘팔레스타인’은 도대체 뭐냐? 정확한 위치는 어디냐? 원래는 누구의 지배아래 있었느냐? 등등의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검색질과 세계사책에서 몇 가지 사전 지식을 찾아보았다. 이 분량이 만만치 않고, 지도들이 많아, 일단 1차 자료정리를 해두려고 한다.

 

 

 

‘팔레스타인’은 현재 국가명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인정받은 것은 2년이 채 되지 않은, 2012년 11월 29일(현지날짜)의 사건이다. UN이 미국과 영국 등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non-member observer state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과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출처는 파악하지 모했는데, 지도의 회색국가들이 인정을 거부하는 나라들이라고 한다. 잘 보면 우리나라도 회색이다. UN 결의안 통과 때는 기권했다고 한다.

 

 

   

 

그럼 이전의 ‘팔레스타인’은 무엇이냐? 주변의 몇 개 지역이 통합된 명칭인 것 같은데, 여하튼 우리가 지금 팔레스타인 ‘땅’이라고 부르는 지역은 1차 세계 대전 무렵까지만 해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1453년 동로마제국을 끝장내고 이스탄불을 차지한 거대한 제국이었다. 색칠되어있는 지역은 모두 오스만 투르크의 영향아래 있는 땅이었다. 유럽의 발칸반도와 서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북부까지 지중해 연안의 세 대륙을 차지한 거대 패권 국가였다.

  

 

 

 

 

그런데 19세기 초부터 슬슬 유럽 제국주의의 손아래 들어가기 시작해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잡았다가 패망했다. 영토의 반 이상을 상실하고, 지금 남은 것이 터키 공화국이다.

  

 

 

 

 

투르크와 터키? 맞다. 터키는 영어식 명칭이고, 터키어로는 '튀르키예'(Türkiye)다. 투르크(Türk)는 강하다는 뜻인데, 우리역사에서는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돌궐이 투르크고, 투르크가 터키의 전신이다. 오스만 투르크는 투르크족의 오스만 가문이 세운 제국이고, 그 이전에 셀주크 가문의 셀주크 투르크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다. 그 악명 높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회복하겠다고 쳐들어간 나라가 바로 셀주크 투르크다. 10세기 무렵에 벌써 팔레스타인 땅은 투르크족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잠깐 칭키스칸에 의해 평정됐다가, 오스만 투르크가 다시 장악했다. 그런데 왜 이 땅의 사람들은 대부분 무슬림인가? 7세기에 모하메드가 이슬람제국을 세우고 아라비아반도를 넘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이 지역을 차지했다. 이후로 지배한 투르크족들도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 땅은 천오백년 가까이 무슬림의 영토였다. 아래 지도는 셀주크 투르크 전성기의 이슬람세계 영역이다. 그런데 여기를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이라고 우기며, 신화인지 역사인지 모를 책 하나를 달랑 내밀며 나라를 세운 것이다.

 

 

 

 

크림전쟁 직전, 크림전쟁은 1853~1856에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벌인 전쟁이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5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기독교도 6만 명, 유대인 2만 명, 오스만 제국의 병사와 관리가 5만 명, 유럽인이 1만 명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아랍어를 쓰는 무슬림이었다. 총 50만 명 중 유대인 2만 명으로 4%만이 토착 유대인이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인의 대다수는 아랍인으로 그때도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였다. 그러나 이 때만해도 여러 종교의 여러 민족들이 별 갈등 없이 그럭저럭 살고 있었고, 지역 자치가 인정되고 있었다. 

 

19세기 초부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는 서서히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흔히 그랬듯이 서구 식민주의자들은 근대화의 명목으로 선교사, 의사, 교육자들을 선봉대로 파견하여 식민화 작업을 다져 나갔다. 팔레스타인 땅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진짜 비극은 다른 곳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을 대상으로 막대한 로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세계금융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그림자 정부로 끊임없이 음모론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대인 금융가 로스차일드 가문도 여기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나선다. 여하튼 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 현대사』리뷰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들어간 팔레스타인 땅에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정착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만 적어둔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땅은 급격히 유대인의 땅으로 변해갔다.

 

 

 

 

2011년 현재 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 영토는 노란색으로 표기된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구 및 동예루살렘 3곳뿐이다.

  

 

 

 

 

그런데 뉴스에 자주 나오는 서안지구 즉 웨스트뱅크는 도대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bank는 강둑이란 뚯이니, 요르단강의 서쪽 땅을 가리키기 위해 붙여졌다. ‘요르단강 건널 때’의 그 요르단강이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팔레스타인 영토인데 최근 이스라엘이 엄청난 발표를 해서 전 세계의, 심지어는 미국의 비난을 사고 있다. 한겨레 신문 9월 1일자 기사를 긁어왔다.

  

 

 

 

「이스라엘이 31일 서안지구 베들레헴 남쪽 땅 400㏊(4㎢)를 강제 수용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이 보도했다. 정착촌 건설 감시 단체인 ‘피스나우’는 이스라엘이 강제 수용할 땅의 규모가 지난 30년 내 최대라고 평가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수용되는 땅에는 5개의 팔레스타인 마을이 있다”며 “이번 조처는 새로운 정착촌 건설에 길을 터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도대체 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끝없이 당해야 하는 걸까? 아마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단 한명의 무슬림마저 절멸시킬 때까지 이 비인간적인 일을 계속 할지도 모른다. 이 엄청난 일이 단지 종교적 신념에 의한 것만도 아닐 것이고, 유대 민족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닐 것이다. 일란 파페의 500쪽이 넘는 『팔레스타인 현대사』가 이 비극의 자세한 전모를 밝혀줄 것이다. 여기까지의 개략적인 상식이 본격적인 책읽기에 속도를 붙여주기를 기대한다. 인샬라. 아니... 인간의 의지가 신을 움직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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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 21세기, 희망의 미래 만들기, 개정판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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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서와 두 달간에 걸친 세계사 공부를 마쳤다. 윤서가 아직 초등학생이고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 않아 일단 2권 근대사를 유럽 중심으로 훑었다. 이 책의 취지와는 맞지 않지만 전 세계를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한 분량이라 처음 세계사를 접하는 윤서에게는 부담이 될 것 같았다. 두 달 내내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을까,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개학하고 1권부터 다시 하고 싶다고 했다. 훨씬 많은 나라와 사건들이 나온다고 겁을 주었는데도 한다니 기특하다.

 

  사실 두 달간의 공부는 윤서의 공부라기 보다는 내 공부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배운 것 말고는 나도 세계사를 체계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강유원의 <역사고전강의>와 <인문고전강의>를 함께 읽으니 훨씬 재미있고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읽다보니 지도가 꼭 필요해서 <세계사 아틀라스>도 참고 하고 있다.

 

  윤서에게 세계사를 좀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고 알라딘을 클릭하다 선택한 책이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다. 우선 저자가 '전국역사교사모임'이라 신뢰가 갔다. 기존 교과서와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꼈을 선생님들이 쓴 책 보다 더 나은 책이 있을까 싶었다. 학자들처럼 깊지는 않아도 아이들이나 일반인들이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흐름을 포착하는데 학교의 선생님들 보다 더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실제로 이 책은 그런 믿음에 충실하게 혹은 넘치게, 흥미롭고도 체계적인 역사서이다.

 

  이 책의 관점은  진보적이다. 역사적 사건을 선택하는 것에서도,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해내는 것에서도 그런 관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윤서에게 열심히 설명하다가 문득 내가 지금 너무 과격한 것은 아닌가 놀랄 때가 있다. 근대가 부르주아의 시대라고 설명할 때, 세계대전의 원인을 설명할 때,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짚을 때,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때, 어린 시절 우리의 교육을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역사를 사건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살아있는 세계사'로서, 커다란 흐름으로서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학생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세계사에 대한 기억이 너무 희미해졌거나,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사건이 토막토막으로만 기억되는 어른들에게, 이 책은 빛바래고 조각난 기억들에 살아있는 숨결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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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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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근대 국민국가 체제와 세기말 2

 

 

* 읽는 고전

①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②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헤르더의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제 31강

 

1. 프랑스 혁명사 

 

 

 

2. 혁명에서의 계급 관계

 

 

 

 

3. 이중의 혁명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 두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가 19C의 주인공으로 등장

 

4. 민중공화정 : 1792년 8월 10일(튈르리 궁전 습격) ~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

   ① 자코뱅파 중 산악파와 상퀼로트의 결합으로 가장 민중적인 인민중심의 통치가 이루어진 시기 : 신분에 의한 투표가 사라진 인민주권의 시대

   ② 혁명전쟁(1792~1802) 과 국민군 탄생 : 민중공화정을 두려워한 주변 왕정국가들의 연대가 강화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외부의 반혁명 세력과 전쟁에 돌입

   ③ 프랑스의 ‘국민’ 의식 형성

   ④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 국내에서는 제3계급 중심의 온건파와 적대관계를, 국외에서는 혁명전쟁에 돌입하면서 혁명의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내부 결집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공포정치로 귀결된다.

 

5. 나폴레옹

   혁명전쟁 중에 등장한 나폴레옹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획득하고 연이어 공화정을 파괴하고 제정을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법전 등을 통해 인민주권 등을 확고히 법률화했다. 직업 관료제, 상비군, 경찰제도 등이 정착되었고, 그 결과로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성립했다. 이 체제는 급진파의 인민주권론, 초보적인 의미의 사회주의, 국가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나폴레옹은 혁명의 과업을 승계하였다.

 

 

제 32강

 

   프랑스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과 그 정신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독일에서는 나폴레옹 법전을 둘러싼 지식인 사회의 논쟁이 뜨거웠다.

 

 

제 33강

 

1. ‘역사철학’이라는 학문의 본격적인 탄생

   ① 볼테르 (1694~1778)

   역사철학이라는 용어 창안

   계몽주의적 역사관 : 인간 활동의 총체로서의 역사, 인과관계의 총체로서의 역사

   ② 데이비드 흄 (1771~1776)

   주관주의적 역사관 : 역사에는 법칙 따위는 없으며 역사란 각자의 주관적 관점에서 배열한 인간의 경험에 불과하다

   ③ 헤르더 (1744~1803)

   역사는 인류 도야Bildung의 학교,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내재화된 섭리 즉 합당한 이치를 갖춘 법을 파악하고 그것에 따라 개인과 집단이 교양의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 목적론적 역사관의 위험성

 

2. 인문주의 : 역사를 인간의 주인으로 보는 것, 인공물Kunstwerk

   ① 고대 아테나이

   ② 르네상스 인문주의

   ③ 독일 인문주의 18~19C :

   시작과 끝은 괴테 (1749~1832), 낭만주의 시대와 겹침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출간부터 헤겔의『법철학』출간까지의 약 40년

   이 시대 독일 민족주의는 자민족 중심주의가 아니라 보편사적 맥락을 가짐

 

 

제 34강, 35강, 36강, 37강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1848

 

1. 발문과 총 4장의 본문으로 구성된 약 46쪽(펭귄 클래식 판)의 팜플랫으로, 공산주의 coming-out 선언서라 할 수 있다.

 

2. 선언문이 발표된 1848년은 프랑스 2월 혁명을 기점으로 유럽 전역이 혁명의 열기에 들끓던 시기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혁명의 영향을 받아 선언문을 발표했지만, 혁명은 곧 시들어버린다. 곧 대호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848년부터 1875년까지 유래 없는 대호황 기였다. 이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철도가 확장되고, 산업구조가 섬유, 중공업, 화학, 전기공업 순으로 고도화 되었으며, 대중 교육 제도가 정착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성립했고 역사는 본격적으로 세계사의 단계에 돌입했다. 조선 역시 이 시기에 세계사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3. 각 장의 내용

   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과 그 주인공인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설명

   가장 중요한 장으로서 강유원이 인용하는 모든 문장이 1장에 속한다.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 부르주아계급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등장,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처참한 상황,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최종적인 승리라는 완결된 드라마적 구조를 갖고 있다.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를 짧은 문장 속에 압축적이면서도 수사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명문이다.

   1장의 첫 문장은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로, 투쟁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계급임을 천명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있어 역사의 행위자는 계급으로서 그들의 역사관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입장에서 본 향후 세계 전망

   3장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문헌 : 당시의 세계정세 분석과 사회주의 운동의 방식

   4장 현존하는 여러 반정부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 : 부록(?)

 

4. 『공산당 선언』의 주요 문장 : 출처는 모두 1장

   「지금까지의 봉건적 또는 동업 조합적 공업 경영 방식은 새로운 시장과 함께 늘어난 수요를 맞추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때 증기와 기계장치가 공업 생산에 혁명을 일으켰다. 공장제 수공업 대신 현대의 대공업이 등장했고, 공업 중간 신분 대신 공업 백만장자들과 공업 군대 전체의 우두머리들 그리고 현대의 부르주아가 등장했다.」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대공업은 세계시장을 갖추게 되었다.」

   「철도가 확장된 만큼 꼭 그만큼 부르주아계급은 발전했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의 부르주아계급이 어떻게 해서 기나긴 발전 과정의 산물이며, 생산방식과 교통방식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혁의 산물인지를 알게 된다. 」

   「부르주아계급이 발전해 온 이러한 단계 각각에는 그것에 상응하는 정치적 진보가 병행하였다. (...) 납세 의무를 지닌 군주국의 제3신분이었고, 그 다음 공장제 수공업 시대에는 신분제 군주국이나 절대적 군주국에서 귀족에 대한 균형 세력이었으며, 일반적으로 대군주국의 주요 기반이었는데, 대공업과 세계시장이 세워진 이후에는 마침내 현대의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를 쟁취하였다.」

   「현대의 국가권력은 부르주아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부르주아계급은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

   「이해타산이라고 하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속에」

   「부르주아계급은 지금까지 존경받았고 사람들이 경건하게 바라보던 모든 활동에서 신선한 후광을 벗겨 버렸다. 부르주아계급은 의사, 법률가, 시인, 학자를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임금 노동자로 바꾸어 놓았다. (...) 부르주아계급은 가족관계에서 심금을 울리는 감상적 장막을 찢어 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화폐관계로 환원시켰다.」

   「부르주아 시대는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적 상황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과 격동을 통해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된다. 견고하고 녹슨 모든 관계들은 오래되고 존귀한 생각들 및 의견과 함께 해체되고 새롭게 형성된 것들도 모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 버린다. 신분과 관련된 것들과 정체되어 있는 것들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 신성한 것은 모두 모욕당하며 마침내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의 지위와 서로의 관계를 냉철히 응시해야만 한다.」

   「부르주아계급은 자신들의 세계시장을 착취함으로써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가 범세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하였다.」

   「이른바 문명을 자기 나라에 도입하라고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될 것을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였다.」

   「자신을 조각내어 팔아야만 하는 이 노동자는 다른 모든 판매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며 그에 따라 다른 상품과 똑같이 모든 경쟁의 부침과 시장의 변동에 내맡겨져 있다.」

   「오늘날 부르주아계급에 대항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 가운데 프롤레타리아계급만이 현실적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그 밖의 계급들은 대공업과 함께 쇠퇴하고 몰락하지만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대공업이 만들어 낸 가장 고유한 산물이다.」

 

5. 19C의 주인공, 부르주아

   ① 귀족 작위를 거절할 만큼(독일의 철강왕 크루프) 대단한 계급적 자부심

   ② ‘근면과 검소’를 제1의 미덕으로 삼으며 종교에 무관심하고 과학과 문화를 신봉. 다윈주의에 열광함으로써 그들에 의해 다윈주의가 사회적 진화론으로 왜곡 변형됨. ‘능력 있는 개인’

   ③ 정치적 토대로서의 ‘자유주의’ :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하는 것. 프랑스 혁명의 제4계급이 원했던 ‘자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내용의 자유

   ④ ‘소유권’의 원칙 : 로크의 기본 사상으로 가장 신성시되는 최고의 가치

   ⑤ 「부르주아는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기 이전의 세상을 구체제라고 부르면서 귀족과의 관계를f 단절했습니다. 또한 화폐를 매개로 인간관계를 재조직하면서 근면과 성실을 중심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경쟁을 통해서 승패가 결정된다는 시장 사회의 모형이 만들어지면서, 성공한 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비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결과론적 설명이 자리 잡았습니다. 물론 부르주아는 자유, 평등, 우애 같은 보편적인 이상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이 관철되는 한에서만 용인되며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의 세계관에 찬동하는 한에서만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체제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를 부정하는 순간, 체제 밖으로 떨려 나갑니다. p406 」

 

6. 부르주아가 변형시킨 정치제제로서의 민주주의

   19C 부르주아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보통 선거가 없는 정치시스템으로서의 자유주의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파리코뮌 진압 이후 민주주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되자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는 민주주의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그 첫 째는 미국의 ‘상원 의원’ 같은 신분제다. 상원은 현대적 의미의 귀족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포퓰리즘’ 이다. 부르주아계급의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는 다양한 선전선동 방법을 개발한다.

 

7. 1870년대 이후 변화한 시장 환경 : 독점, 제국주의, 보호무역주의

   1870년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독점 상태로 변하면서 동시에 국가 단위의 경쟁체제인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1876년부터 1914년 사이 단 6개국이 지구 영토의 4분의 1을 나눠가졌다. 이 경쟁이 치열해지자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보호무역주의가 등장해 자국의 거대기업을 보호하였다. 장하준 교수가 현대에 이들 선진국들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가 사실상 ‘사다리 걷어차기’에 지나지 않다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8. 세기말 ‘유한계급’이 된 부르주아

   세기말의 부르주아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말하는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삼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소비에 치중하는 기생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 즉 유한계급으로 변질되었다. 『유한계급론』의 베블린은 미국의 기부 문화를 이런 현상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부르주아가 증세를 반대하고 기부를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할 수 있도록 사회적 제도를 변화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 제도의 대표적인 예가 대학이다. 시카고 대학은 록펠러가 세웠고, MIT는 산학협동을 목표로 세워졌다. 세기말의 부르주아는 막연한 불안감, 목표를 잃은 상실감, 기생하는 삶에 대한 죄책감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세기말 문화를 만들어 냈다.

 

9. 마르크스가 말한 단일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이 형성되지 못한 이유

   ① 19C가 대호황의 시기였다.

   ② 노동자들 내의 구분과 차별이 있었다.

   대기업 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 여성 노동자, 외국인 이주 노동자 등

   ③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차이가 노동자 의식 보다 우선했다.

   “만국의 프롤레아리아여, 단결하라!” 는 마르크스의 이상일 뿐이었다.

 

10. 19C 말 노동자계급 대중 정당 등장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미합중국에서도 사회주의 정당들이 등장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요소로는 노동자계급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내재화, 조직화된 집단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도시 공간이 계급적으로 구분됨에 따라 용이하게 된 노동자 의식의 공유이다. 거기다가 부르주아계급이 유한 계급화 함에 따라 근검절약이라는 프롤레타리아계급과의 공통점이 사라졌고, 부르주아계급의 특권화가 심화되자 국가권력과 특권을 남용하면서 프롤레타리아계급과의 대립이 심해졌다. 여기에 제2 인터내셔널과 러시아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1. 수정주의 논쟁 :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로자 룩셈부르크와 베른슈타인 사이에서 가장 격렬하게 이루어진 수정주의 논쟁은 ‘자본주의가 즉각적으로 붕괴하지 않는다면 독일 사회민주당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이다. 베른슈타인은 사회혁명을 목표로하지만 실천적으로는 체제 내로 들어가자는 수정주의 노선을 주장했고,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질서를 뒤엎는 계급투쟁이 아니라면 결국은 자본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사회민주주의 자체가 죽는다고 주장했다. 결과는 수정주의가 대세가 되었고 아마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독일사민당의 효시가 아닐까.

 

 

 

 

 

Ⅳ 제 1, 2차 세계대전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 읽는 고전

에드워드 카 『20년의 위기』

 

제 38강

 

1. 1차 세계 대전의 영향

   1914년 8월에 시작하여 1918년 11월에 끝난 제1차 세계 대전, Great War 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한 부르주아의 시대를 무너뜨리고, 국가가 행위 주체가 되는 국가권력의 시대를 열었다.

   「국가중심주의, 즉 국가주의의 깃발 아래 국민은 애국주의로 뭉쳤고, 부르주아 시대의 자유시장 경제가 아닌 전시 명령 경제가 지배적인 경제체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국가는 인간 사회를 계획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험하였고, 그 힘을 획득하였습니다. 이 국가주의와 국민 동원은 모든 개인, 모든 계급을 하나로 몰아넣은 괴물이었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극성을 부린 파시즘은 이미 이때에 그 전조를 보였습니다.... 국가라는 괴물의 위력 아래서 인간 진보와 이성에 대한 신념은 파괴되었고, 인간의 삶의 조건 자체가 극적으로 변화하였습니다. p431 」

 

2. 제국주의 시대의 경제적 상황 : 제2차 산업혁명

   기술의 혁신으로 산업구조가 중공업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이에 따라 유럽 열강들은 고무, 철강, 석유 등의 새로운 원자재를 위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 2차 산업 혁명은 과잉생산과 이윤율 하락으로 이어진 불황을 가져왔고 식민지 독점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팽창주의적 무역경쟁이 바로 1차 세계 대전의 ‘조건’ 이다.

 

3. 제국주의 국가들의 엄청난 군비경쟁

   사태 해결방법이 무력밖에 없는 상황에서 군수산업과 정부가 긴밀히 연관되면서 군·산·정軍産政 복합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독일의 철강회사 크루프는 1,2차 세계대전 모두에 깊숙이 관여한 군수산업체이기도 하다. 전쟁이 비즈니스에 포함되면서 군수산업의 이익을 위한 전쟁도 벌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 군비경쟁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5년 전부터 엄청나게 치열해졌다.

 

4. 1차 세계 대전의 원인

   ① 깊은 원인 : 삼국협상(러시아, 영국, 프랑스) 대 삼국동맹(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양극체제로 전쟁의 긴장감 고조

   ② 중간 원인 : 독일의 세력 강화와 미숙한 외교 정책

   ③ 촉발 원인 :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사건

 

5. 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사회주의 운동 궤멸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국제주의와 평화주의를 버리고 애국주의를 선택하며 서로 적이 되어 싸웠다. 제1차 대전을 겪으면서 대중도 국가교육 과정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대중은 국민이 되었으며, 국민의 탄생은 계급의 멸망을 불러왔다.

 

제 39강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의 전간기 20년을 분석한 에드워드 카의 『20년의 위기』가 분명한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다시 2차 대전이라는 전쟁 속에 휘말렸다.

1. 정치권력은 권력과 도덕이 결합된 것으로 이것은 군사력, 경제력, 생각에 대한 통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 군사력은 국가 활동에 필요한 수단인 동시에 그 자체가 목적이다. 군사력 강화나 다른 나라의 군사력 억제를 위한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 경제력 : 정치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다. 군사력이란 개념 안에도 이미 정치적 가치와 경제력이 포함되어 있다.

 

   「적국의 경제 체계를 마비시키는 것이 적국의 육해군을 격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전쟁 목표가 되었다. 국가가 정치적 목적으로 경제활동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계획경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산물이었다. 전쟁 잠재력이라는 용어는 경제력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p453」

 

4. 생각의 통제 : 대중의 동의 그리고 대중의 선택의 위험성

   「히틀러의 말을 빌리면 ‘과학적 설명’은 인텔리를 위한 것이고, 프로퍼간다는라는 현대적 무기는 대중을 위한 것이다.p454」

   대중의 동의 없이는 권력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독재는 대중의 뜻을 완벽히 실현하겠다는 공언을 통해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얻어내기도 한다. 즉 영도자 자체가 인민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독재는 가장 성공한 민주정일 수 있다. 민주정의 절정은 대중 독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나이의 민주정에 환멸을 느낀 플라톤은 민주정을 전제정으로 가는 전 단계의 저급한 정치제제로 경멸했다.

 

 

제 40강

 

   1939년 9월 1일에 발발하여 1945년에 끝난 제 2차 세계 대전의 결과 세계는 미합중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시대가 되었다.

 

1. 원인

   ① 깊은 원인 : 독일 문제

   독일은 인구, 자원, 유럽 대륙에서의 지리적 조건 등에 있어 언제든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독일에 대한 유럽의 견제 세력이 균형을 잃고 있었다.

   ② 중간 원인 : 배상 문제

   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독일에 부과한 전쟁 배상금이 독일 국민의 반감을 사고 있었다. 당시 경제 상황의 악화는 배상금이 아니라 물가폭등과 대공황의 영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국민들은 모든 문제를 배상금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③ 촉발 원인 : ‘단치히’ 문제

   현재 폴란드 지역인 자유 중립 도시 단치히를 독일인이 많이 산다는 이유를 들어 돌려받겠다며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2. 종전 후 세계사의 재편 : 미국의 패권과 ‘마셜 플랜’

   1945년 종전 이후의 세계사를 현대사로 부른다. 이 현대사는 미합중국의 세계패권이 관철되고,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이다. 미합중국은 막대한 돈을 투자해 마셜플랜이라는 유럽 부흥 계획을 실행했고, 세계패권 국가가 되었다. GATT, IMF 등 전후 경제체제가 성립되었다. 유럽은 이 시기 유럽형 복지를 시작했고, 노동운동은 혁명을 포기하고 자본가 계급의 동반자가 되는 corporatism을 채택했다.

 

3. 전후 자본주의 황금시대

   전쟁을 통해 과잉생산물이 모두 소비 되고 난 뒤, 자본주의는 황금기를 맞았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포즈주의와 완전 고용, 사회보장 확대 등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케인즈주의가 주류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이 황금기의 풍요는 미합중국의 세계재편으로 주변부로 전락한 각 나라들이 수탈당한 결과이기도 했다. 신식민주의 체제가 가동된 것이다.

 

4. 신자유주의 등장의 배경

   1960년대 후반부터 이윤율이 감소했다. 1971년 닉슨은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1973~74년 석유파동은 포드주의와 케인즈주의에 결정타를 가했다. 아시아에서는 중심부로부터 제조업부분을 넘겨받은 네 마리의 용이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 경제학계에서는 시카고 학파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이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자본의 이윤율 하락, 중심부의 경제체제 변화,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변화 속에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이윤을 축적하는 체제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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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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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근대 국민국가 체제와 세기말

 

 

* 읽는 고전

①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

②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③ 헤르더의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

④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제 21강

 

1. 우리 시대의 기원인 근대의 4가지 특징

① 과학혁명 17C

② 계몽주의

③ 산업혁명 18C

④ 자본주의

 

   이 네 가지 요소는 ‘근대를 꿰뚫는 특징적 개념’인 ‘진보’로 총칭된다. 그러나 30년 전쟁 발발기인 161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기인 1945년까지 약 300년의 근대사는 전쟁의 시기이기도 하다. 진보의 귀착점이 전쟁과 잔인한 살육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성찰을 요구한다.

 

2.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 르네상스에서 절대주의 국가체제로

   ① 화약과 대포

   ② 왕과 관료의 중앙집권적 체제

   ③ 사업과 정치의 결합

   ④ 자연과학에 대한 열망

   ⑤ 종교에 대한 회의

   르네상스는 중세말의 현상이다. 아테나이인들의 Kunstwerk인공물 개념을 부활시킨 르네상스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예술이 아니라 화약과 대포 등 전쟁 기술의 발전에 있다.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전쟁기술의 사용에 따라 군소 영주들은 몰락하고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세금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왕들은 사업가들과 손을 잡게 되었다. 군상 복합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이후에 군산복합체로 변모한다.

   지성사적으로는 30년 전쟁이 가져온 파괴와 불안정의 결과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고, 확실성을 추구하며 자연과학을 새로운 가치 기준으로 열망하게 된다.

 

3. 근대 절대국가를 만든 두 가지 강력한 힘

   ① 30년 전쟁 : 봉건제 해체

   ② 과학 혁명 : 새로운 시대정신 확립

 

4. 30년 전쟁 : 1618 ~ 1648

   ① 카톨릭 동맹국과 프로테스탄트 연합국 사이의 국제전으로 유럽 핵심 강국들이 모두 가담했으며, 전쟁은 주로 독일 땅에서 용병들에 의해 잔인하게 치러졌다.

   ② 전쟁의 부정적 영향은 종교에 대한 극심한 회의이며, 긍정적 성과는 국민군의 탄생이다.

   ③ 국민군의 탄생

      아테나이의 시민군 모형이 무너지고 로마제국이 게르만 용병을 운용함에 따라 서유럽지역은 오랫동안 용병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30년 전쟁을 치르면서 왕들은 국적 의식의 필요성과 용병 전쟁의 문제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마키아벨리는 1513년 <군주론>에서 “용병을 쓰면 나라가 망하고 자국군을 쓰면 나라가 흥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④ 군상 복합체 : 전쟁과 시장이라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두 개의 축이 형성

국민군 유지를 위해 막대한 물자가 필요해졌고, 상인들이 무기 납품에 관여하면서 군상 복합체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나중에 독일에서 보는 것처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과 손을 잡는 군산복합체로 발전한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전쟁은 사업이 되어버렸다. 19C 전 지구적인 제국주의는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이었지만 유럽인들에게는 값싸고 손쉬운 사업이 되는 상황에 이른다.

     유럽의 귀족 계급들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입지를 찾아내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을 전문적으로 치르는 계급이 되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유명한 로맨스 소설들에도 자주 장교 군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개척하러 가는 직업 군인들이다.

 

5. 새로운 유럽 : 세계의 강자로 부상

   「르네상스 이후로 계속되어 온 기술적인 발전과 새로운 군대 기구,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인 변화들이 결합하여 유럽은 전혀 새로운 세력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앞서 맥닐이 말한 것과 같은 “사업으로서의 제국주의”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p271」

 

 

 

제 22강

 

1. 과학 혁명의 시대 : 17C

   ① 30년 전쟁으로 종교에 대한 회의가 만연하고 확실성에 대한 추구가 높아지자 종교를 대체한 새로운 권위로서 ‘과학’이 떠오른다.

   ② 과학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자 미래의 비전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③ 과학 혁명을 통한 세계관의 전환은 계몽주의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유럽은 절대왕정 체제였지만, 계몽주의는 과학에 근거해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고 결국에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념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념은 싸움의 원천일 뿐이므로 실용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국가의 미래는 항상 이러한 이념적 비전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p274」

 

2. 중국은 화약과 화포를 발명했으면서도 왜 유럽처럼 범선에 대포를 싣지 않았는가?

   과학 기술은 그 자체만으로 변혁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신념 체계와 관습의 광범위한 변화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조선시대 말 ‘동도서기 東道西器’ 즉 동양의 도를 지키되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인다는 식으로는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道와 器가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이 시대정신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중국이 왜 우수한 대포를 만들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은 중국이 왜 산업화하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기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과 문화적 자부심, 제도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p282」

 

 

제 23강

 

1. 계몽주의 시대 : 18C

   ① 18C는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의 시대이기도 하다.

   ② <<헤겔>>의 저자 바이저는 계몽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종교로부터 인간의 독립을 외친 계몽은 사실 또 다른 신앙인 이성의 광신도 라는 것 ;;

   ③ Enlightenment 빛을 비추다, Aufklarung 명확하게 하다

   ④ 프랑스 계몽주의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같은 사람들이 영국으로부터 뉴턴주의와 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2. 이성의 시대

   17C 과학혁명기와 18C 계몽주의 시대는 공히 ‘이성의 시대’ 다. 과학혁명의 이성은 자연의 제1 원리를 탐구하는 과학적 이성인 반면, 계몽주의의 이성은 ‘사회운동의 원리로서의 이성’ 이다.

 

3. 계몽주의자들의 낙관적 진보주의

   「계몽철학자들은, 이성적 사색을 통해 자연과학을 발전시키고 과학적 방법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면 편협한 신앙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식이 점차로 확대되어 행복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기본적으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진보주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p291」

 

   그러나 계몽주의로 시작한 근대는 대량학살과 잔인한 살육의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맞았다는 슬픈 사실 .

 

 

제 24강

 

   계몽주의자의 아름다운 환상으로 가득 찬,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과학과 진보에 관한 낙관적 믿음에 따라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예언한다.

 

1. 계몽주의의 시대정신을 집약한 역사철학 책이다.

 

2. 완전가능성

   루소가 처음 내놓은 개념으로, 콩도르세는 이 개념으로 진보성의 원칙을 표현했다. 콩도르세는 역사가 진보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완전해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개념은 이후 칸트와 독일 관념론 철학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인간이 완전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이 진보이며, 이는 이성을 통해 일반법칙을 알아내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적 이성의 힘을 이처럼 철저하게 믿는 것은 계몽주의자들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믿지 않습니다. p293~4」

 

   그러나 현대는 과학 자체가 세계의 불완전성, 불확정성을 입증하고 있다.

 

3. 콩도르세에 따르면 무한한 진보와 완전가능성을 가능하게 해 주는 제1전제는 ‘자연과학’ 이다.

 

4. 어떻게 완전가능성에 도달할 것인가?

 ① 국가 간의 불평등 파괴: 프랑스 헌법의 원리를 적용

   ② 국민 모두의 평등한 진보 : 공교육 및 교육의 평등을 강조

   ③ 인간의 현실적 완성 : 현실적 이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

 

5. 계몽의 야망은 왜 실패했는가?

   계몽의 환상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계몽의 현실은 대규모 전쟁과 살육으로 귀결되었다. 제국주의와 빈부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있고, 인간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왜 콩도르세의 예언은 실패했을까?

 

 

제 25강

 

1. 18C는 'modernity'의 기원이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이 일어났고, 계몽주의가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18C에 기원을 둔 modernity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혁명과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시대까지 6개의 분야에서 일어난 혁명적 변화를 먼저 살펴보자.

   ① 정치혁명 :국가state의 등장 (국민국가 nation state)

      국가가 정치적 행위의 주체이자 주요한 행위자로 등장했으며, 근대 여러 국가들은 통일 국가를 건설한 뒤 제국주의적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는 세계대전이다.

   ② 산업혁명 :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결합하여 경제 구조를 변화시켰다.

   ③ 통신혁명 : 전신, 전화, 철도 등의 발명이 산업혁명을 촉진시켰다.

   ④ 사회혁명 : 핵심지표는 도시거주 인구비율로서, 50%가 넘어가면 산업화에 이른 것이다.

   ⑤ 국제관계혁명 : 무역에 의해 전지구적 단위이 경제가 이루어졌다.

   ⑥ 문화혁명 : 엘리트 문화와 평민 문화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2. 절대왕정 체제를 규정하는 세 가지 요소

   중세 봉건제와 근대 국민국가 사이의 과도기 체제로서의 절대왕정은 관료와 상비군, 이데올로기로서의 왕권신수설, 중상주의 경제정책의 세 요소로 규정된다.

 

3. 잉글랜드의 절대 왕정

   ① 헨리 7세 ~ 찰스 1세 재위 기간 150년 (1485,장미전쟁이후~1649, 30년 전쟁 이후)

   ② 헨리 8세 : 귀족 계급에 대항하는 gentry 계급을 육성했다. gentry는 평민출신의 부농으로 이후 bourgeois가 되었다.

   ③ 엘리자베스 1세 : 잉글랜드의 황금기로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며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④ 경제 구조에서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이었다.

   ⑤ 청교도 혁명 : 올리버 크롬웰은 젠트리 출신의 정치가. 하원 의원의 60%가 젠트리 또는 상공업자.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청교도 혁명으로 절대왕정은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되었다.

 

 

제 26강

 

1. 산업자본주의의 성립 요건 두 가지는 ‘자유로운 노동자’의 공급과 ‘기술 혁신’이다. 둘 중 자유로운 노동자가 훨씬 중요한 요건인데, 과학이 더 발전했던 프랑스 보다 영국이 먼저 산업혁명을 이룬 것은 영국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먼저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2. 자유로운 노동자의 등장

   ① 잉글랜드의 농업혁명 : “농민을 땅으로부터 떼어 내 부랑자로 만든 다음, 도시로 몰아넣는 폭력적인 과정”

       농업혁명의 결과 식량생산이 증가하여 도시까지 식량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고, 원시 자본이 축적되었으며, 사회간접자본이 형성되었다.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토지의 상품화가 이루어졌고 사람들의 마음도 이윤을 추구하는 심성으로 변해갔다. 이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나면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② enclosure 운동

      토지의 사유화, 상품화가 법적으로 뒷받침 되었다. 이전까지 없었던 ‘소유권’에 대한 개념이 강화되었다. (<레미제라블>에서 빵 한 조각에 가혹한 형벌을 내렸던 이유도 소유권의 신성화에 따른 엄벌정책 때문이라고 한다.)

   ③ 토지에서 쫓겨 난 많은 농민이 부랑자가 되었다. 당시 부랑자 문제는 큰 사회적 문제로 ‘구빈법’ 논쟁이 격렬했다. 이후 ‘각자가 재주껏 알아서 먹고 살아야 한다.’ 는 자본주적 이념이 득세했다.

 

3. 기술혁신 : 대표적 사례가 산업혁명

   철강으로 증기기관을 만들면서 기계제 공업 시대가 시작되었고, 힘센 남자 대신 여자와 어린이가 공장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기계화가 진행되자 인간이 필요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잉글랜드는 이 때 쯤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의 ‘대영제국’ 시대를 맞고 있었다.

 

 

제 27, 28, 29강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1845년

 

1. 산업혁명이 한 국가와 사회,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명료하게 서술하고 있다.

 

2. 산업혁명의 도시 영국 맨체스터와 노동자들을 관찰한다.

   ① 노동자계급의 상태는 오늘날 모든 사회운동의 진정한 토대이자 출발점이다.

   ② 산업자본주의의 고전적인 나라는 영국이고, 고전적인 땅은 맨체스터이며, 고전적인 행위자는 영국의 노동자계급이다. 어떤 사회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장소와 행위자’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고전적’은 ‘전형적’의 의미이다.

 

3. 맨체스터는 근대도시의 전형적인 공간 배치를 하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거주지와 삶은 체계적으로 은폐되고 배제되어 있다.

 

4. 공간배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표상이다. 공간배치와 계급구조는 대응관계에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항상 나의 계급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나의 계급적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면서 사는 것이 근대인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계급의식을 조장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근대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계급적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외부의 형태 중 하나가 바로 ‘사는 곳’입니다.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p337」

 

5. 19C 영국의 가장 하층민은 아일랜드 이주 노동자다. 이주 노동자는 지금도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하층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6.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단결하며, 프롤레타리아트 안에서의 경쟁을 부추긴다.

 

   「경쟁은 근대 시민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의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다....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 집단과 마찬가지로 그들 내부에서 서로 항상 경쟁 상태에 있다. .... 노동자계급 사이의 경쟁은 노동자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나쁜 측면이며 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을 공격하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단결을 통해서 경쟁을 없애려고 노력하며, 부르주아지들은 단결을 증오하며 노동자들의 단결이 실패할 경우 승리감에 도취한다. p343~4」

 

7. 노동자계급에게는 사회의 살인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 살인행위는 구조적 살인이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생활필수품을 박탈당하고 더 이상 살아가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어쩔 수없이 빠져 버릴 때 이것도 사회적 살인 행위이다. (...) 이러한 사회의 살인 행위는 숨겨진 사악한 살인이며, 누구도 그 살인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살인이며 살인 형태가 작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작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희생자의 죽음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살인이다. p347」

 

8. 사회적 전쟁 상태에서 최선의 합리성은 ‘냉혹한 계산’ 이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역시 이윤과 냉혹한 계산에 따라 행동한다.

9. 엥겔스는 결국 분노에 찬 프롤레타리아트의 총 봉기가 일어나 부르주아계급이 타도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희망사항에 그쳤을 뿐이다. 그 이유는 부르주아지가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산업혁명으로 경제적 구조를, 프랑스혁명으로 정치적 구조를 바꾸는데 성공함으로써 19C를 완전히 장악하고 그 주인공이 되었다.

 

 

 

제 30강

 

   서구 사회는 자신들의 근대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개발해냈다. 그 핵심은 자본주의의 이윤추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탐욕으로 간주되던 금전 추구 행위가 어떻게 존경받는 행위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이 작업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주로 ‘인간의 파괴적인 정념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도출되었다.

 

1. 아담 스미스 <<국부론>>1776

   상업과 제조업이라는 경제적 요소가 개입되면 경제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질서와 훌륭한 정치 그리고 개인의 자유와 안전 같은 정치적인 효과도 나온다고 생각했다.

 

2. 존 로크 <<통치론>>1689

   이해관계를 잘 따지는 것을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였다. 로크는 부르주아적 합리성을 옹호하며 부르주아지 당파성을 대변하였다.

 

3. 온화한 상업론

   자본주의적 이윤 추구 행위가 인간의 나쁜 성향을 억누르고 좋은 면을 활성화시킨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있다. 또한 온화한 상업론을 주장한 사상가들은 이윤 추구 행위가 인간 본성의 파괴적이고 불길한 요소를 억누를 수 있다고 기대했다.

   ①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1748

      상업주의 정신에는 근검절약, 온화함, 평정, 지혜, 질서 및 규칙성의 특성이 있다.

   ② 데이비드 흄 <상업에 대하여> 1752

      경제적 요인이 개입하면 개인의 정념이 순화될 뿐 아니라 국가의 부도 늘릴 수 있다.

   ③ 존 케인스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936

      인간의 위험한 기질은 돈벌이와 개인적인 재산 축적의 기회에 의해 비교적 무해한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 동료 시민을 학대하기보다는 자신의 은행계좌를 멋대로 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자신의 은행계좌를 멋대로 하는 바로 그 사람이 동료 시민을 학대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인간의 사악함을 억누르기 위해서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왜 이윤추구의 화신인 자본가는 사악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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