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안에서 나라까지 굽이치는 동아시아

 

1. 통일로 가는 유목 세계와 농경 세계

 

한나라 멸망이후 등장하는 삼국시대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 역사이다. 위·촉·오를 이끌었던 조조, 유비, 손권이 천하를 두고 다투는 이야기는 얼마나 흥미진진했던가. 삼국지를 몇 번이나 읽었는가를 놓고 서로 뽐내기도 하고, 남자는 적어도 세 번은 혹은 열 번은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여하튼 삼국의 패권은 조조가 잡았으나, 정작 삼국을 통일한 것은 위나라를 이은 진나라였다.

  

 

 

 

 

진나라는 그렇게 강력하지 못했는데, 그 틈을 타서 유목민들이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다. 원래 유목민들은 만리장성 바깥에 살았으나 한나라 말기에 장성 아래로 내려와 한족과 섞여 살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이 유목민들을 오랑캐라는 의미의 ‘호족’이라고 불렀다. 진나라가 허약해지자 중국의 북쪽지방은 다섯 호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워 서로 경쟁하는 5호16국의 시대가 되었다. 중국 땅에 유목민들이 자신들의 둥지를 튼 것이다. 진나라는 이들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가 동진을 세웠다.

 

사진에서 ‘푸른색’ 왕조들이 정통 한족이 세운 나라들이고, ‘연두색’ 왕조들은 호족들의 나라들이다. 한족의 나라들을 남조, 호족의 나라들을 북조라 부른다.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삼국시대부터 수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까지의 360여 년간의 혼란기를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수나라를 세운 문제는 호족과 한족을 융합하여 중국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었다.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경민인 한족과 유목민인 호족이 서로 섞이는 호·한 일체의 세계가 마련된 것이다. 이 수 문제는 물론 고구려를 침공했던 그 수 문제이다.

 

 

2 .말 달리는 한반도, 일어서는 일본

 

이 시기의 한반도도 삼국시대였다. 패권 다툼의 중심지는 한강이었는데,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가장 강성했다 할 수 있다. 백제는 4세기에, 고구려는 5세기, 신라는 6세기에 각각 한강을 차지했다. 

 

고구려는 한반도를 벗어나 북방의 중국 땅으로 영토를 드넓혀 감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우뚝 자리 잡았다.

 

일본은 백제의 문물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아스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고구려의 팽창>

 

 

3. 백강에서 겨루는 동아시아 삼국

 

7세기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의 통일은 군사력보다는 외교력에 의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협상이 깨지자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갔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에게도 고구려는 골칫거리였다. 수나라의 문제가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한 이후, 당나라의 태종도 안시성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요동과 만주 등지로 세력을 넓혀 오는 고구려는 무서운 위협이었다.

고구려를 쓰러뜨려야 하는 당 나라와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던 신라는 재빠르게 손을 잡았다. 양국은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고,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 들여 통일을 하는 바람에, 우리 민족의 전체 역사에서 보았을 때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동북의 막대한 영토가 중국의 손에 넘어가 버리는 뼈아픈 결과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삼국이 한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존폐를 놓고 다투는 경쟁국의 관계에 있었으므로, 신라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나, 오늘의 우리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움을 떨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는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고, 6년간에 걸친 나·당 전쟁이 시작되었다. 676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부흥군의 도움을 받아 당군을 격퇴시키고, 통일을 마무리 지었다.

 

통일 후 신라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는 불교의 나라를 꿈꾸었다. 한편 통일의 대가로 당나라에 넘긴 옛 고구려 땅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대조영이 만주에 ‘진’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발해이다. 8세기 후반에는 당과 발해, 신라가 서로 견제하며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4. 비단길에 실려 온 당나라의 봄바람

 

당나라는 측천무후에 이은 현종 때에 세계적인 문화의 꽃을 피웠다. 수도 장안은 인구 100만의 국제도시로, 많은 학자와 예술가가 배출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개척한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해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왕래하였다.

 

당나라에는 여러 국가에서 온 수많은 인재가 활약하였는데, 신라의 최치원, 장보고, 혜초 등이 당에서 이름을 떨쳤다. 장보고는 당에서 귀국 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다. 유학승인 혜초는 인도를 순례하고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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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6-16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중국 역사는 따분하게만 느껴졌는데 우리 나라의 역사와 조합해서 생각하며 읽어 보니 재미있고 혜초 얘기도 나와서 재미있었다.
 

6. 영혼의 강 인도, 바다로 열린 동남아시아

 

 

 

1. 힌두 세계의 울타리를 세우다

 

기원후부터 AD 1,000년 사이의 인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와 큰 관련이 없어, 사실 책의 내용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지역에서나 그러했듯이 왕조들의 흥망이 있었고, 나름의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 살아왔다. 카스트 제도는 더욱 강화되어 신분의 벽은 더욱 단단해졌다.

 

굽타왕조 때 힌두교가 만들어졌다. 힌두는 인더스 강 끄트머리의 ‘신드’라는 지방에서 비롯된 말로 신드가 힌두로 바뀌고, 힌두가 다시 인도라는 그리스 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간단히 말해 힌두교란 인도의 종교라는 의미다. 힌두교는 전통적인 브라만교에다 불교와 민간 신앙이 합쳐진 것으로, 인도인에게는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인도인의 생활 방식이자 힌두 문화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는 ‘영’의 발명이다. 비어있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즉 ‘無’에 ‘0’이라는 기호를 부여하여 존재하게 함으로써, 수학의 역사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무한대∞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도 이 시기의 인도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라비아 숫자 역시 인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인도에 찾아 온 이슬람 세력

 

10세기 말 중앙아시아 튀르크 계통의 이슬람 세력이 인도 쪽으로 와서 나라를 세웠다. 아프카니스탄에 터를 잡은 이들은 틈틈이 인도를 침입하였고, 북인도 지역은 하나씩 이슬람 세력에 넘어갔다. 현재의 이란과 인도 사이에 있는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도 이때부터 이슬람교 지역으로 편입된 것 같다. 아프카니스탄 반군으로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뿌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초창기 이슬람 세력은 힌두교 신전을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개종을 강요하거나 힌두사원을 공격하지는 않았고, 힌두교 행사를 관대하게 눈감아 주기도 했다. 이런 관용 정책에 힘입어 인도의 하층민들은 이슬람 세력을 반겼다. ‘알라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간 평등의 정신은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의 신분 차별에 신음하던 하층민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3. 더 넓은 인도를 찾아서

 

남인도 지역은 기원전 6세기부터 상업이 활발하였다. 인도 상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금은과 중국이나 페르시아 지역의 향나무, 상아 등을 가지고 무역 활동을 했다. 특히 후추를 비롯한 향료 무역이 유명했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떠난 이유가 바로 이런 발달한 교역과 문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도양 교역권>

 

 

4. 뭍과 바다를 품은 동남아시아

 

유럽인들은 동남아시아를 인도차이나라고도 부른다. 인도와 차이나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이 두 문명권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지역>

 

그러나 동남아시아 지역은 유교문화와 힌두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고유문화를 유지하였다. 모계 중심 사회가 계속되었고, 카스트 제도 같은 신분 제도도 멀리하였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 13세기까지도 여성의 사회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지역은 인도 상인들을 통해 인도인과 매우 자주 교류하면서 결혼도 많이 하였다. 인도네시아란 말 자체도 ‘인도인 의 섬’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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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라비아 숫자와 인도 숫자를 비교할 수 있어서 좋았고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도 나와서 좋았다.
 

5. 십자가를 들고 가는 유럽

 

 

 

1. 천년의 제국, 비잔티움

 

비잔티움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다른 이름이다. 로마제국은 395년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었다. 게르만족이 훈족을 피해 몰려오면서 위기를 맞은 로마제국이 제국 내의 사정까지 겹치면서 분열된 것이다. 한 세기에 걸친 게르만족의 이동이 가라앉았을 즈음인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했고 동로마 제국만 살아남았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은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로, 당시에는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그리고 게르만족의 이동>

 

근대의 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서유럽을 문화의 중심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유럽은 중세까지만 해도 거의 야만의 상태에 있었다. 고대 희랍·로마 문명 역시 서유럽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이어받아 발전시키며, 이슬람 제국으로 전파했다.

크리스트교도 동로마제국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이후 서유럽의 게르만 국가들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두 가지 교회로 분열되었다. 서유럽의 로마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교회는 각각 ‘보편적인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 와 ‘바른 전통을 이은 교회(그리스 정교회)’를 자처하며 갈라졌다. 비잔티움 문화는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2. 또 하나의 크리스트교 세계, 서유럽

 

서유럽으로 몰려온 게르만족들 중 프랑크족은 로마 카톨릭을 받아들였다. 원래 카톨릭 교를 믿던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프랑크족은 순식간에 서유럽의 강자로 등장했다. 8세기 이후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현재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 이를 만큼 광대했다.

 

서유럽의 교회는 게르만족들 사이에 빠르게 침투했고, 서유럽의 많은 교회가 로마 주교를 모든 교회의 지도자, ‘교황’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바티칸을 다스리는 ‘교황’제도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9~10세기, 바이킹의 침입과 기사 세력의 강화>   

 

 9~10세기, 서유럽은 또 다시 이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 유목민인 마자르족과 이슬람 세력,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이 세 갈래에서 각각 침입해 온 것이다. 이 중 바이킹족이 가장 큰 파괴력을 발휘하며 100여 년 간 서유럽의 지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또한 왕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나라는 영주(기사)들이 다스리는 수많은 영지로 나뉘어졌다. 왕은 이름만 가지고, 실질적 통치권은 지방의 영주들이 행사하는 ‘봉건제’가 시행된 것이다. 봉건제라는 지방분권사회에서 농민들은 영주(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대신, 부역과 세금을 내고 재판을 받는 등 영주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영주들은 아래에 하급 기사를 두고 전쟁을 하고 자신들의 농민 즉 농노를 보호하였다. 

 

 

 

3. 서유럽의 영혼을 지배한 카톨릭 교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두 가지는 봉건제도와 카톨릭 교이다. 카톨릭 교는 농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황권과 경쟁하며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11세기 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성문 앞에서 맨발로 엎드려 용서를 빈 ‘카노사의 굴욕’은 황권을 압도한 교황의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후 200년 간 ‘교황은 해 황제는 달’ 의 이미지를 고착화시켰다.

‘기사도 정신’, ‘백마 탄 기사’ 등의 말은 중세 봉건제도의 ‘기사’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초기의 기사들은 거의 약탈자에 가까웠다. 사람들을 공격하고, 포로의 몸값을 요구하고, 농촌을 약탈하는 등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나쁜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현재의 ‘기사’ 이미지를 탄생시킨 것은 교회이다. 교회는 기사들에게 여성을 존중하고 과부나 고아 같은 약자를 보호하며 교회에 헌신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교도를 상대로 성전에 나설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7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이슬람 세계를 차지한 셀주크 튀르크는 비잔티움으로 진격하여,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사로잡고 아나톨리아 지역을 차지하였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는 서유럽의 카톨릭 국가들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1096년 이슬람 세계와 카톨릭 세계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약 200년간 서유럽 국가들이 7차례에 걸쳐 일으킨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종교 전쟁이지만, 그 이면에는 부유한 동방 세계에 대한 서유럽 사람들의 부러움과 시기심이 작용했다.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의 패배로 끝났지만 이 전쟁을 통해 서유럽이라는 일체감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발전된 이슬람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서유럽은 중세의 암흑기로부터 벗어날 자극을 받게 되었다. 또한 전쟁을 주도한 교황과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의 힘이 크게 약해졌다. 그 결과 서유럽은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를 통합해 나갈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4. 도시와 함께 발전한 중앙집권 국가

 

부르주아가 역사에 등장한 것은 언제쯤일까? 부르주아는 11세기 이후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부르그’ 안에 사는 상공업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작은 도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피렌체와 같이 대도시로 성장한 곳도 있었다. 부유해진 부르주아들은 투쟁이나 돈을 통해 도시의 자치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봉건제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부르주아는 왕권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부르주아는 직접 왕에게 세금을 내고, 왕은 그 돈으로 용병과 관리를 고용하여 영주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부르주아 또한 상업 활동의 독점권을 얻고, 정부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영주 세력에 대항하여 왕과 부르주아가 손을 잡은 것이다.

 

  <중앙집권 국가의 등장 : 프랑스, 영국,에스파냐>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영주가 몰락하고, 부르주아와 힘을 합친 왕의 권력이 강화되어 가는 와중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100년 전쟁이 일어났다. 이야기책에 나오는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100년 전쟁이다. 잔 다르크 때문이든 어쨌든 이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 이후 프랑스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100년 전쟁 패배 후 곧 바로 두 귀족 가문 사이에 30년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 역시 프랑스와 같은 중앙 집권 국가로 재편되었다. 1453년 프랑스, 1485년 영국을 뒤이어 1492년 에스파냐 왕국도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십자군 전쟁을 겪으며 서유럽은 이렇게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492년에 콜롬부스는 함대를 이끌고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다. 이로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서유럽이 드디어 세계 역사의 패권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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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명작 돈키호테에 나온 영주 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있었지만
고달픈 농민들의 삶도 나와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고,
종교와 잔 다르크도 나와서 재미있었다.
 

4. 사막과 초원을 품은 이슬람 세계

 

1. 동·서 교역로의 강대국, 페르시아

 

   희랍 세계와 전쟁을 하며, <300>이라는 영화에 등장했던 그 페르시아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망했다. 그러나 이란 민족은 파르티아 왕국과 사산 왕조를 잇달아 세우며 과거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지중해 세계는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는 로마제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충돌의 실제 목적은 영토 다툼보다는 동·서 교역로의 확보에 있었다. 교역의 요충지를 차지하면 평화 시에는 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전쟁이 일어나면 무역을 봉쇄하여 로마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서 교역의 결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에는 세계 여러 곳의 문화가 전해졌다. 그리스의 철학과 자연과학이 페르시아에서 발전하였고, 인도 문학이 페르시아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2. 아랍에서 이슬람교가 일어나다

 

   같은 아시아에 속하지만 아랍세계는 우리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다. 이슬람교를 믿는 친척도 (거의) 없고, 아랍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TV의 여행 프로그램도 아랍세계를 자주 보여주지 않는다. 중동 건설 붐에 대한 70년대의 신화도 지금 세대에게는 가뭇한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아랍세계는 테러, 근본주의, 걸프전 같은 무서운 이미지들로 둘러싸여 있다. 아랍세계는 진짜 이런 음습한  세계일까?

 

   고대 제국들이 기원전 1,000년경부터 세워지기 시작한데 반해, 아라비아 인들은 1,500년 정도가 지난 기원후 6세기가 될 때까지, 국가 없이 부족단위로 살았다. 사막이 대부분인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목생활을 하거나 오아시스 주변에 소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6세기에 들어 아라비아 인들의 삶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페르시아와 로마가 다시 전쟁을 하면서 동서교역로가 막히자, 상인들은 무역을 위한 새로운 길이 필요해 졌다. 아라비아 반도는 지중해와 홍해 그리고 인도양을 잇는 뱃길과 육로의 중심해 위치해 있어, 무역의 요충지로 떠오를 수 있었다. 아라비아 인들도 유목과 농경에서 벗어나 무역에 뛰어들었고, 부를 축적한 이들 상인들은 세계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잇는 아라비아 반도 : 아틀라스 세계사 >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메카의 상인이었다.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중 신의 계시를 받아 “신 앞에서 모든 신자는 평등하다.” 고 주장하며 유일신 알라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무함마드는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였고, 630년 무렵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여 아라비아인이 중심이 된 국가를 세웠다. 이슬람 공동체는 종교 공동체인 동시에 정치 공동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함마드가 죽자 이슬람 공동체는 칼리프라는 선출된 지도자가 통치하다가 곧이어 왕조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때부터 갈라진다. 무함마드의 딸인 파티마의 핏줄을 인정하는 시아파와 왕조시대를 연 우마이아 가문을 인정하는 수니파로 나뉘었다. 가끔씩 해외 뉴스에 나오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극한 대립은 이슬람교의 초창기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3. 세 대륙을 품은 이슬람

 

   우리나라도 그런 것처럼 이슬람 세계도 한 왕조가 계속 지배한 것은 아니다. 우마이아 왕조가 아바스 가문에 의해 망하고, 이슬람은 세 대륙을 품은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 걸친 아바스 제국 역시 곧 여러 왕조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에스파냐 지역을 차지한 후우마이야 왕조는 유럽에 이슬람 문화를 꽃피운 것으로 유명하다. 후우마이야 왕조에서는 이슬람, 비잔티움, 그리스의 문화가 한데 어울려 수준 높은 문화를 남겼다. 우리가 잘 아는 알함브라 궁전은 훨씬 후대에 지어진 것이긴 하지만, 유럽에 대한 이슬람의 지배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로 남아있다.

   북아프리카를 차지한 파티마 왕조는 나일 강 주변의 풍부한 자원과 무역으로, 이슬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는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이다. 바그다드는 동서교역의 최대 거점지로 활발한 국제 무역을 벌였다. 바그다드는 ‘세계의 시장’ 이었고, 10세기에는 인구 150만이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이 교역로를 통해 전 세계의 우수한 문화가 이슬람으로 흘러들었고, 이슬람의 문화가 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라 부르는 것도 사실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이슬람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기 때문에 아라비아 숫자라는 잘못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아라비아의 커피’ 라는 뜻을 가진 아라비카 역시 아프리카가 원산지 이지만, 커피 문화 그 자체가 이슬람을 통해 다른 세계로 전파되었기 때문에 아프리카나 남미 대륙에서 재배된 커피콩을 지금도 우리는 아라비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커피가 아라비아에 정착한 것은 14세기 이후의 일이지만, 이슬람 세계가 차지하는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라 미리 언급하였다.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7세기부터 11세기 무렵까지 이슬람세계의 주인은 아라비아인이었다. 아랍어를 공용어로 삼았지만, 민족 차별을 폐지하고 누구나 이슬람법에 따라 평등하게 통치되었다. 종교적 자유도 보장되었고, 천문학과 의학이 꽃을 피우고, 전 세계의 문물과 문화가 모여들고 퍼져나가는 세계의 중심지였다. 지금 우리가 연상하는 테러, 근본주의, 내전, 기아 같은 무섭고 어두침침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4. 이슬람 세계에 부는 바람

 

   11세기 중반, 이슬람 세계에 새 주인이 나타났다. 몽골 초원에서 질풍같이 달려온 셀주크 튀르크라는 유목민들이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칼리프는 이름뿐인 종교 지도자로 밀어내고, 대신 정복자 토글리 베그 자신이 이슬람의 실질적인 제왕이 되었다. 그는 술탄이라고 불렸는데, 우리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읽은 그 술탄이 아마 이때부터 이슬람의 황제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슬람을 차지한 셀주크  튀르크>

 

   여러 왕조로 나뉘었던 이슬람 세계는 셀주크 튀르크 아래 다시 하나로 통일 되어갔다. 그 와중에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사로잡혔고, 이 때문에 유럽과 이슬람의 20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다.

  

 

  <유라시아를 통일한 세계 최초의 제국, 몽골제국  : 아틀라스 세계사>

 

   그러나 이슬람 제국은 다시 한 번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당했다. 칭기즈칸의 몽골 군대가 파도처럼 몰려온 것이다. 1258년 바그다드가 점령당하고 칭기즈칸의 손자가 세운 일한국이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가 되었다. 몽골제국은 거대한 유라시아 제국을 통일한 세계 최초의 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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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04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랍세계에 대한 편견을 깨고 그 시대의 아랍에 대해 알게 해 줍니다.
또한 아라바아 숫자, 커피와 같이 잘못 알았던 것을 일깨워 줍니다.

말리 2014-05-0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서가 '편견'이란 말도 알구 있구나. 그런데 사람들은 왜 편견을 갖게 될까? 윤서가 살면서 '아! 난 편견으로 그것을 대했구나' 란 생각을 했던 일에 어떤 것이 있을까? 맨 처음 이런게 편견이었구나 생각하게 만든 일이 있으면 댓글을 달거나 (글을 써도 되고 ㅎ) 다음 시간에 한번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쓴 2장 3장도 찾아서 읽고, 댓글 부탁한다~ 어린이날 잘 보내고~~
 

 

   3. 드넓은 제국,

       커다란 믿음

 

 

 

 

 

 

 

 

1.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

 

4대 문명 발상지를 중심으로 BC 1,000년경부터 AD 3세기 무렵 사이, 세계 곳곳에 거대한 제국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페르시아, 지중해 지역의 로마,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 진나라가 세워졌다.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제국들의 통치도구는 비슷한 것들이 많다. 잘 훈련된 군대, 체계화된 관료조직, 쭉 뻗은 도로망, 정비된 법률 그리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통합시켜주는 종교가 있다. 종교는 제국의 탄생과 함께 거의 동시에 각 대륙에 나타났는데, 통치술로서의 종교의 역할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제국들은 수 백 년 만에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에 만들어진 문화와 종교는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민족의 삶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각 대륙을 차지한 고대의 제국들 : 아틀라스 세계사 >

 

 

 

 <각 대륙의 종교 : 아틀라스 세계사 >

   

다리우스 1세 시절에 전성기를 맞은 페르시아는 효율적인 통치도구와 더불어 식민지민에 대한 관용 정책으로 약 200년간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페르시아는 식민지의 종교를 인정해주었지만, 자신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조로아스터(짜라투스트라)가 만든 이 종교는 세상을 선과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흐리만의 대결로 보았다. 조로아스터교는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와 도덕성을 높이 샀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중에서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구세주 등의 내용은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대승 불교에 까지 널리 영향을 미쳤다.

 

 

2. 폴리스에서 헬레니즘 세계로

 

우리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는 단군신화보다 더 친숙하다. 그만큼 고대 희랍문명은 서양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의 동양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희랍은 고대 그리스의 이름인 헬라스를 한자음을 빌려와 번역한 것이다. 헬레니즘이란 말도 헬라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희랍의 정신, 문화, 사상 등을 가리킨다. 희랍세계는 여러 개의 작은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다. 아테네는 희랍세계의 중심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배출 될 만큼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또 아테네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민주정치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민주정치와는 달리 여자와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희랍세계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을 물리치면서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희랍세계의 여러 폴리스들은 두 편으로 나눠 30년 가까이 전쟁을 했고 그 이후 점점 쇠퇴해갔다.

 

 

 

<희랍(그리스) 세계와 주변국>

 

희랍 북부에 있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는 폴리스 세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까지 정복했다. 폴리스는 망했지만 희랍의 문화는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아시아와 이집트까지 널리 퍼졌다. 이렇게 전파된 문화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하며, 이 문화를 받아들인 지역을 헬레니즘 세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후 유럽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잊어버렸는데, 오히려 아시아의 이슬람 세계가 헬레니즘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서양세계에 거꾸로 전해주었다. 헬레니즘 문화는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을 꽃피워 냈다.

 

 

3. 로마 제국과 크리스트교의 만남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뒤를 이어 헬레니즘 세계를 차지했다. 카르타고까지 물리친 로마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되었다. 로마의 정치는 귀족 공화정이었으나, 카이사르 이후 옥타비아누스를 거쳐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이 자리 잡았다. 공화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합의에 의해 통치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은 현대의 민주 공화정과는 달리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원이 통치하였다.

 

 

  <지중해를 차지한 거대한 로마제국 >

 

로마는 각종 실용문화를 발전시켰는데 특히 로마의 법은 이후 서양 근대 법체계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 는 속담에서도 로마법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속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에서 알 수 있듯, 로마는 토목과 건축 분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길은 제국의 동맥과 같다.

크리스트교는 초기의 박해 기간이 지난 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크리스트교는 거대한 로마제국을 통해 세계적 종교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크리스트교를 이용하여 드넓은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였다. 크리스트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 국가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다른 사상이나 종교를 억압했다.

 

 

 

4. 불교의 가르침을 받은 마우리아

 

브라만교는 카스트 제도를 따르는 인도의 고대 종교이다. 현대의 힌두교는 특정 종교가 아니라 브라만교를 포함하여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브라만교는 계급 제도를 정당화하며 브라만 계급만이 신을 모시는 사제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이런 인도 사회에 반대하며, 도를 닦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불교는 천민 보다 왕과 전사 그리고 돈을 많이 번 부유한 평민에 의해 더욱 환영받았다. 무력과 돈을 가진 이들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계급은 브라만 계급의 거만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들이 국가의 지배 세력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소카왕은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 대부분을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아소카왕은 잔인한 전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으나, 이후 살생을 크게 반성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아 불교의 진리에 기초한 이상 정치를 꿈꾸었다. 아소카 왕에 의해 아시아 각지는 물론 유럽까지 불교가 퍼져 나갔다. 삼국시대였던 우리나라에도 이 때 불교가 전파되었다.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탑(인도어로 스투파)도 아소카왕의 지시로 세워졌는데, 스투파는 ‘흙으로 만든 무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나누어 넣어 놓아, 이후로 석가모니의 무덤이자 넋이 기린 곳으로 숭앙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불교 신자들은 탑에 합장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5. 중국의 울타리를 쌓은 진나라

 

주나라가 힘을 잃자 중국대륙은 춘추·전국 시대를 맞았다. 200여개가 넘는 제후국들이 난립하여 서로 다투다 말기에는 7개의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런데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혼란한 시기에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 한비자, 묵자들이 그들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백성들의 고통이 끊이지 않자, 이들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국가를 안정시키고 훌륭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을 평안케 할 수 있는지를 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사상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들과 이들의 학문을 가리켜 제자백가라고 한다.

 

 춘추·전국 시대를 끝내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사람은 진나라의 시황제, 즉 진시황이다. 중국을 China라고 부르는 것도 진Chin 나라에서 비롯되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 시대의 여러 나라가 쌓아 놓은 성들을 연결하여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건설하였다. 만리장성은 북방의 유목 민족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세운 성이다.

 

 

6. 중국 문화의 기틀을 다진 한나라

 

진나라가 망하자 중국을 차지한 나라는 한나라이다. 진이 영토 면에서 중국을 통일했다면, 한나라는 문화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중국의 문자를 가리키는 한자와 한문, 그리고 중국 민족을 의미하는 한족 등의 단어가 모두 漢에서 따온 것이다.

한나라는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치하여 유교를 가르치고,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명하였다. 살아있을 때 공자는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실현해 줄 군주를 찾았지만, 제후들은 모두 공자를 내쫒았다. 공자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한나라 이후 꽃을 피워 지금까지 중국은 물론 동양의 여러 나라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나라는 서역으로 가는 길을 열었는데, 이 길을 통하여 각국의 사절과 상인, 승려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며, 동서양을 느슨하게나마 이어주었다. 특히 비단은 멀리 로마까지 운송되었기 때문에, 이 길을 비단길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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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5-27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가 잘 알고 있던 그리스.로마신화 이야기도 나와서 재미있었고
많이 들어 보았지만 뜻을 잘 알지 못했던 카스트 제도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중국에 대해서는 이해를 잘 하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