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몽골제국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다

 

 

 

 

1. 유목 국가에서 정복 국가로

 

유목민족이 중국 대륙에서 처음 나라를 세운 것은, 한나라가 멸망한 후 위진 남북조 시대였다. 이후 수 문제가 대륙을 통일하고 중국은 다시 농경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당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유목민족인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이어서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다. 다시 중국 대륙에 유목국가가 세워진 것이다. 요나라는 한반도의 고려를 세 번이나 침략한 국가인데, 서희 장군과 강감찬 장군이 이를 물리쳤다. 중국의 농경민족은 당나라가 망하자 송나라를 세웠지만, 금나라가 송을 침략하여 송은 강남으로 쫓겨나 남송으로 축소되었고, 화북지방은 금나라가 차지했다.

 

2. 양쯔 강 이남에서 다시 일어난 송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매우 발달된 경제를 이룩했다. 서민들의 경제력도 커졌고 서민 문화도 발전하였다. 그런데 군사력은 매우 약했다. 송나라는 이웃의 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에게 막대한 재물을 선물하는 대가로 평화를 유지했다. 전쟁 보다는 비용이 적었지만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갈수록 국가의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귀족사회였던 송나라에서는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지배계층은 세금을 내지 않고 일반 백성들이 모든 세금을 부담했다. 지배층은 더욱 부유해지고 일반 백성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세금을 감당하지 못했고 국가의 재정 또한 악화되었다.

 

왕안석은 대대적인 개혁을 통하여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 중·소상인을 보호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당하게 된 고위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은 실패했다. 그 결과 송나라는 더욱 약해져서 결국 금나라에 의해 강남으로 쫓겨 가게 되었다.

  

 

 

KBS 사극 <정도전>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사를 볼 수 있다. 고려 역시 송나라와 마찬가지의 귀족사회였고, 대부분의 토지는 일부 지배층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도전은 백성들의 집에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국가를 만들고자 했으나 고려라는 나라에서는 이것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력을 장악한 지배세력이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세워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고자 하였다. 이 정책을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의 수자를 계산하여 그 수대로 공평히 전답을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비록 정도전은 계민수전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지만, 완화된 개혁을 실시하여 착취구조를 철폐하고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도와주었다. 그 결과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된 백성들은 쌀밥을 ‘이밥’이라고 불렀는데, 정도전이 왕으로 내세운 ‘이성계가 준 밥’ 이란 뜻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화북지방을 금나라에 빼앗긴 송나라는 해상무역을 발전시켰다. 고려는 송나라와 교류하였는데, 송나라가 개발한 항로를 통해 이슬람 상인이 고려에까지 들어왔다. 수도 개경에서 가까운 벽란도는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쳤다. Korea라는 명칭은 이 당시 이슬람 상인이 ‘고려’를 부르던 말에서 유래했다.

 

 

3. 몽골의 정복, 이에 맞선 항쟁

 

칭기즈 칸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하고, 유라시아 제국을 하나로 묶은 인물이다. 중국 대륙은 물론 서쪽으로 이슬람 제국과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등의 유럽지역을 단숨에 휩쓸었다. 프랑스 등의 서유럽은 아무 대책 없이 곧 닥쳐올 재앙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서유럽의 코앞에서 기적처럼 몽골 군대가 사라졌다. 칭기즈 칸이 사망한 것이다. 몽골제국의 관습에 따라 새로운 칸을 추대하기 위하여 모든 군대가 정복활동을 중지하고 몽골의 수도로 되돌아 왔다. 그 덕분에 서유럽은 간신히 몽골제국의 포화를 면할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은 칭기즈칸의 사후에도 정복활동을 벌였고, 유럽과 아시아의 양 끄트머리 일부만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라시아 대륙을 몽골제국의 이름 아래 통합하였다. 세계 최초의 유라시아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아틀라스 세계사 : 서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라시아 제국이 몽골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는 원의 세력권 아래 놓이긴 했으나 끝까지 저항하여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4. 유라시아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다

 

몽골제국은 그 넓은 땅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EBS 다큐 프라임의 <강대국의 비밀> 몽골제국 편에서는 그 답을 ‘관용’이라고 한다. 몽골제국은 침략 전쟁에서 보여준 무자비함과는 딴판으로, 통치에서는 그 어느 국가도 보여주지 못했던 관용의 정치를 펼쳤다고 한다. 일단 항복한 모든 민족은 몽골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으며, 민족과 지역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고루 등용하였고, 피지배지역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중국에서는 통치 기술과 제도를, 세금걷기나 살림살이는 이슬람에서, 정치와 군사의 주요직은 몽골이 맡았다. 각 민족은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의 평화 아래 유라시아는 동서 간에 문물을 활발히 교류하였다. 몽골제국 즉 원나라의 수도 대도는 각양각지에서 몰려 온 다양한 인종들로 넘쳐났고, 이슬람 사원, 절, 교회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이었다. 일종의 ‘종교 배틀’도 열렸는데, 각 종교를 대표하는 수도자들이 한 자리에 앉아 서로 논리를 가지고 공격하며 적절한 답을 하지 못한 경우 벌주를 마시는 대회였다. 유럽의 배타적인 종교 국가와는 달리 몽골제국에서는 서로 논쟁하며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이런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관용이야말로 몽골제국을 세계제국으로 만들어준 기본 정신이었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드넓은 땅을 하나로 묶는 교통 통신망이 필수적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속담에처럼, 거미줄 같은 도로망을 형성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초원지대를 질풍같이 말달리며 살아왔던 몽골민족은 도로대신 역참제를 만들었다. 역참에 말과 식량 숙박시설을 갖추어 두고 관리나 사절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이나 사막에도 예외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역참을 두어 칸의 명령이 대도에서 유럽까지 열흘이면 전달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교통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유럽인들은 죽기 전에 몽골의 수도 대도에 가보기를 꿈꾸게 되었고, 그 중에는 동방견문록을 남겨 유명해진 마르코 폴로가 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 항해한 것도 대도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13세기에는 유럽이 아시안 드림을 꾸었을 만큼 아시아는 문화와 문물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을 기점으로 유럽은 아시아에 앞서 나가게 되었으니, 역설적이게도 몽골제국은 잠자던 유럽을 흔들어 깨웠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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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2014-06-1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몽골의 칭기즈 칸이 나와 거대한 대륙을 통치하는 것을 보니 정말 위대한 사람 같다.
관용이라는 방법은 정말 좋은 것 같다.
칭기즈 칸이 그 많은 대륙들을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