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한국사에서 조선후기의 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리학이란 것도 말만 많이 들어봤지 이 학문의 요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해야 할 텐데요. 게다가 양명학이니 실학이니, 理니 氣니, 인성이니 물성이니 따위가 보태지면 정말 외우기 위해서 뜻도 모르는 단어들을 디립다 외우고 있다는 자괴감이 듭니다. 인터넷 뒤져서 몇 줄 읽어 본다고 알 수 있는 차원은 아니지만, 수박 겉핥기라도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대충 정리해 보았습니다. 개념 정리라기보다는 용어 정의라고 해야 맞을 텐데요. 그것도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대~충 해 보았습니다. 당연 정확하지는 않고, 다만 기억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EBSi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성리학의 교조화와 그 대안학문의 대두

 

성리학은 공자의 사상 즉 유학에 대한 일종의 해석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를 주희가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고 체계화한 것이지요.

이 성리학이 조선의 건국이념이 되면서,

성리학이 마치 유학의 전부인양 인식되게 됩니다.

그런데 양란을 거치며 성리학적 가치관이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급변하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성리학으로 설명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론이 현실과 맞지 않을 때 이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물론 현실을 이론에 꿰어 맞추려고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낡은 이론이 언제까지나 현실을 가둬두지는 못합니다.

 

성리학에 의문을 품은 양반들이 자연스럽게 들여다 보려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리학이 해석한 그 원본, 바로 공자의 유학이 아닐까요?

남인의 윤휴, 소론의 박세당 같은 사람들이

원래의 유학, 즉 주자가 해석하기 전의 원시유학으로 돌아갑니다.

이걸 가지고 송시열을 필두로 한 노론이 '사문난적' 이라는 딱지를 붙였다는 겁니다.

성리학이라는 색안경을 벗는 사람을 '사문난적'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문난적 斯文亂賊의 '斯文', 즉 그 문화는 원래 성리학이 아닙니다.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입니다. 공자는 BC 6세기 인물입니다.

斯文은 공자가 숭앙했던 주나라의 문왕과 주공이 만들어냈던 학문과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사문난적은 공자가 모범으로 삼은 주나라의 학문과 사상 혹은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왜곡하여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가 아니라

주자의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모든 학문과 사상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마치 주자가 곧 공자라는 듯이요.

하지만 공자는 주자가 아니지요.

 

 

양명학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서도 성리학에 의심을 품은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왕수인이라는 사람이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양명학입니다.

양명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성리학과 양명학은 모두 유학을 해석한 학문입니다.

유학의 유파들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둘의 공통점은 인간은 성인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황과 이이도 왕이 성인이 되는 방법을 놓고

<성학십도>와 <성학집요>를 각각 저술하지 않았습니까.

 

성리학이 강조하는 것은 독서입니다.

성인이 되려면 스스로하든 신하의 도움을 받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지요.

이에 반해 양명학은 마음의 수양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미 인간의 마음에는 성인의 싹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현되도록

수양하고 실천만하면 된다는 거지요.

즉 성리학은 先知後行을, 양명학은 知行合一을 강조합니다.

성리학은 性卽理, 양명학은 心卽理라고도 그 요체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性은 무엇인가부터 따져야겠지만 능력 밖의 일입니다.

다만 아래 소개하고 있는 칼럼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理)는 우주의 질서·법칙이자, 만물에 깃들어 있는 형성의 원리이기도 했다. 우주의 질서가 하나하나의 사물에 내재한다는 대담한 설정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와 연결되었다. 이것이 ‘성즉리’(性卽理)이니, 성리학이란 명칭은 여기서 기인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첨부해 둡니다.

우리가 배우는 한국사의 수준에서는

이해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입니다.

저 구절을 이해하면 아마도 동양철학이 될테지요.

 

여하튼 우리나라의 양명학은 정제두에 의해 정리, 활성화되었습니다.

강화도에는 유배 간 양반, 종친들이 많았다고 하지요.

정제두도 강화도에 들어가서 양명학을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강화학파라고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성리학의 대안 학문으로 대두했다는

양명학과 실학은 완전히 다르구나 하는 감이 듭니다.

 

 

실학

 

양명학이 여전히 철학의 냄새를 풍긴다면,

실학은 요즘으로 치면 경제학, 과학, 사회학, 농학 등에 더 가깝습니다.

실학을 대표하는 용어 두개만 비교해 보겠습니다.

 

실학은 크게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나뉩니다.

중농학파는 경세치용, 중상학파는 이용후생을 캐치프레이저로 내걸고 있지요.

 

중농학파는 당쟁에서 패배한 남인들이 낙향하거나 유배 가서 보고 느낀

농업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균전론, 한전론, 여전론 등 토지분배를 어떻게 해서

자영농을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농민이 국가의 근본이니까요.

 

경세치용經世致用 은 經世와 致用입니다.

經世는 세상을 경영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경영하기 위해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요.

致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제도와 방법을 갖추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쓸모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 일 테지요.

아직은 약간 형이상학적인 냄새가 나지만,

성인이 되기 위해 운운하는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대지주가 차지한 토지를 어떻게 해서 자작농들에게 분배할 수 있는가를

핵심적으로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중상학파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중상학파는 유학파지요.

청에 유학을 갔다 온 노론의 자제들이 핵심이라 북학파라고 합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권세가 있고 돈이 있어야 유학도 가고,

거기서 선진사상과 선진문물을 배워올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강남좌파쯤 된다고 할까요?

 

중상학파의 표어는 이용후생利用厚生 입니다.

利用. 이익이 되는 것을 이용하여,

厚生. 삶을 두텁게, 윤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과학기술과 경제학이지요.

선박이나 수레를 사용해야 한다.

절약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다.

화폐를 많이 사용해야 경제가 살아난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공업이든 다 중요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 등등...

 

이쯤 되면 확실히 성리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북학파가 탄생하기 전 집권 세력의 내부에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도 나오지요.

 

 

 

인물성동이 논쟁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130여 년 간 청은 강건성세의 치세를 맞습니다.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 등을 통해 오랑캐의 이 발달한 문물이 전해지고 조선은 일대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오랑캐가 어떻게 저런 문화를!!

이 때 등장하는 논쟁이 그 이름도 생소한 인물성동이 논쟁입니다.

 

人性과 物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됩니다. 이걸 호락논쟁이라고도 합니다. 호(호서), 즉 충청도 노론과 낙(낙양), 즉 서울 노론이 갈라져 논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청의 문물이 엄청나게 발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비록 오랑캐의 것이나 이 선진 문물을 배워 따를 것인가 끝까지 거부할 것인가 입니다.

 

시골 양반들은 대체로 보수적이지요.

충청도 노론도 보수적이겠지요, 아마.

“청의 문물이 발달했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물성과 인성은 다르다.

인간과 금수가 어찌 같겠는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나 금수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뭐 이런 말이 아닐까요?

이 시골 양반들이 나중에 위정척사파가 됩니다.

 

반면 서울 양반들은 시류에 민감합니다.

“문물이 발달했으면 그만큼 인간도 성숙하다는 것이다.

물성이든 인성이든 본성은 같다.

본성이 다만 때에 따라 人으로 혹은 物로도 발현되는 것이다.

문물이 발달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본성을 의미한다.

고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도로 대충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요?

여하튼 낙론은 북학파로 발전하고 개화파로 이어집니다.

 

인물성동이 논쟁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연재한 칼럼을 찾았습니다.

조금 어려운 감도 있고 읽어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꽤 재미있는 부분도 많습니다.

 

총 20편이나 되는데 그 중

 

10회 ‘오랑캐’도 윤리적 존재…청의 융성, 논쟁 지피다

16회 그에 이르러 이성으로서 조선 철학의 정점을 찍다

꼭 한 번 읽어 볼 만합니다.

 

4회 호락논쟁, 성리학의 난제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응답

성리학에 관한 이해에 도움이 되니, 어렵지만 참고할만합니다.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칼럼의 총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20. 서로 해치지 않고, 어긋나지 않는 길을 찾아서

19. 아내는 낙론, 남편은 호론 “부부가 대단한 기세로 싸웠다”

18. 창조적 해석은 차단되고 철학은 힘을 잃었다

17. 세상사를 말할 수 없으니, 아아 입이나 다물자

16. 그에 이르러 이성으로서 조선 철학의 정점을 찍다

15. 모두가 논쟁의 옳고 그름보다 이익을 따졌다

14. “이이의 제자들과 성혼의 제자들이 원수가 되고, 송시열의 자손과 송준길의 자손이 원수가 되었다”

13. 왕실 척신들 간의 권력투쟁과 엮인 철학논쟁

12. 세계관 가른 “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11. “임진·병자 전쟁 순국자 애도를 ‘개가 짖는가’ 여긴다”

10. ‘오랑캐’도 윤리적 존재…청의 융성, 논쟁 지피다

 9. “독서에 뜻을 두면 나이 귀천에 상관없이 입학을 허한다”

 8. 주자 무오류 이념의 바벨탑 쌓은 ‘제2의 송시열’

 7. 낙론 대학자들이 사도세자 성균관 입학식에 대거 참석한 이유

 6. 호론 중용한 영조와 한원진의 동상이몽 

 5. 노론, 경종에 세자 대리청정 요청했다 피바람 불러

 4. 호락논쟁, 성리학의 난제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응답

 3. 한산사 이어 편지 논쟁, 스승들 개입으로 학파 갈라져

 2. 이간의 한산기행, 호락논쟁의 서막을 열다

 1. 호락논쟁, 유교 시스템을 허무는 원심력의 시작

 

이 연재는 조선 후기에 학계를 달구었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대한 것이다. 호락논쟁? 한국사에 관심 많은 독자에게도 이 용어는 조금 생소할 듯하다. 호락논쟁은 18세기 초반에 시작해서 19세기까지 진행되었던 철학 논쟁이었다. 당시 주류로 부상하고 있던 노론 학자들이 주인공이었는데, 대체로 충청도와 서울을 기점으로 의견이 갈렸다. 충청도의 다른 이름이 호서(湖西), 서울의 다른 이름이 낙양(洛陽)이었으므로 두 진영은 각각 ‘호론’과 ‘낙론’으로 불리게 되었고, 따라서 이름도 호락논쟁이 되었다.

 

호락논쟁은 16세기 중반에 이황, 이이 등이 전개하였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 17세기 후반 왕실의 복제(服制) 논쟁이었던 ‘예송’(禮訟)과 함께 조선의 3대 논쟁으로 꼽히기도 한다. 큰 비중에도 불구하고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용된 개념과 논리가 난해하고, 시기도 길었으며, 철학 말고도 다른 변수들이 얽혀 복잡했기 때문이리라. 두툼한 분량의 한국사 개설서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 따분하고 현학적인 논쟁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경구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나와 같은 학교에서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 지식인 등에 관해 연구했으며, 지금은 한림과학원에서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개념들의 역사를 다양한 전공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조선후기 안동 김문 연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조선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17세기, 대동의 길>(공저) 등을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국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불교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서양사를 공부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불교의 흐름을 모르고 한국사를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563년 인도에서 태어났다. 인도는 브라만교를 믿는 엄격한 계급차별 사회였다. 석가모니는 카스트제도에 대항해 누구나 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불교는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국가종교로 발전하며 널리 전파되었다. 당시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로 바닷길을 통해 주로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파된 불교는 대승불교이다. 기원후 100년 무렵 북인도를 차지한 쿠샨왕조는 중국과 서아시아의 연결 통로를 차지하며 세력을 떨쳤다. 이 무렵 불교는 개인의 해탈이 아니라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불교 신앙을 이끄는 승려들의 교단 조직도 생기고,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강의도 열렸다. 대승불교는 비단길을 통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소수림왕과 침류왕 때 각각 불교를 수용하였다. 4세기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로, 북부의 전진이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남부의 동진이 인도 승려 마라난타를 백제에 보내 각각 불교를 전파하였다. 신라는 5세기 눌지 마립간 때 고구려의 묵호자가 불교를 가져왔으나, 6세기 법흥왕 때에 와서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될 수 있었다.

         

        석가모니의 불교는 평등사상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삼국시대 불교는 왕권 강화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군장국가 혹은 연맹왕국 단계의 국가를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영토 확장, 율령, 세습 체제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일체감을 부여하는 불교의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눌 수 있다. 교종은 경전을 중심으로 한 지식을 강조하고, 선종은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일부 지배층에 한정되었던 고대에 교종은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에 기여했다. 반면, 선종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평등사상에 기초하고 있어 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선종은 기존권력에 반기를 든 반란세력 혹은 혁명세력에게 인기가 높았다.

         

        초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교종이 중심이었고, 선종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기 전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던 중기에는 선종이 별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신라 하대에 와서 지방의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선종은 풍수지리와 함께 고려건국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구심으로 작용하였다.

         

         

        1. 원효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삼국통일 전후로 교종은 다섯 개의 분파로 나누어졌다. 통일 전 계율종과 열반종이 개창되었고, 통일 후에는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이 개창되어 5교가 성립되었다. 교종은 의례적, 형식적, 지식추구적인 경향을 띠어 귀족에게 신봉되었다. 이 중 화엄종이 귀족층에서 가장 유행하였다.

         

        원효(617~686)는 법성종을 창설하였으나, 교종을 통합하려 노력하였다. 원융회통, 화쟁 사상, 일심 사상 등이 불교 통합 작업의 결과인데, 다양한 사상이 모두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원효는 불교 대중화로도 유명하다. 왕실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대중 불교로 확장하고 정토신앙을 도입하였다. 그는 ‘나무아미타불’ 즉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염불만으로도 죽어서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원효는 무애가를 지어 널리 퍼뜨렸다. 무애사상이란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란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애의 자유는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으로 설총이라는 아들까지 두었다.

          

         

        2. 의상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원효가 서민적이라면 의상(625~702)은 귀족적이다. 둘이 함께 당나라로 떠나다 원효는 해골 물 한 바가지로 돌아오고 의상만 당나라에 갔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의상은 당나라에 가서 화엄의 이치를 깨닫고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하고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 화엄일승법계도>

         

        화엄 사상의 특징은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가 있다는 연기緣起설에 있다. 연기緣起는 서로가 걸림 없이 통하고 서로 거듭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말이나 모든 것이 연(인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정도로 알면 되지 않을까.. 여하튼 여기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가 나온다.

         

        의상도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실천수행을 강조했다. 원효가 아미타 사상인데 반해 의상은 관음사상을 강조했다.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하여 그 주존으로 관음불을 모셨다.

         

         

          

        <한국사 함께 공부한 지인이 그린 것> 

         

        선종은 삼국통일 즈음에 들어왔으나 신라하대에 와서야 지방의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불경의 습득보다는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부처가 곧 왕과 동일시되던 신라사회에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하대에 장군이나 성주를 자칭하며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호족들에게는 매력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승려 도선은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신라는 이미 국운이 다했다고 주장했는데, 풍수지리설은 선종과 결합하여 더욱 폭발력 있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호족의 지원으로 성장한 선종은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9산 선문을 성립하였다. 산 속에서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신라 하대에서 고려 초까지 선종과 함께 승탑이 유행하였다. 탑은 원래 부처의 무덤인데, 깨달음을 얻은 누구나 부처이기 때문에 승려들의 사리를 모신 탑이 성행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고려에 와서 완성되었다. 태조 왕권은 훈요십조를 통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대히 치를 것을 당부했다. 태조 때 실시된 왕사, 국사 제도와 승록사는 광종 때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를 시행하면서 승과를 포함시켰다.

         

        고려 초기에는 여전히 선종이 유행하였으나 왕권이 점차 안정되면서 왕권 강화에 유리한 교종이 세력을 넓혀 나갔다. 광종 때의 승려 균여는 귀법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성행시켰다. 문벌귀족들도 교종을 지원하였다.

          

         

        3. 의천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문종의 아들이다. 왕자 출신의 입지 덕분에 송, 요, 일본 등 각지에서 방대한 규모의 불교 서적을 수집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이라는 목록을 만들었다.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이 목록에 따라 교장을 인쇄하였다. 교장은 불경에 대한 해설서이다.

         

        의천 당시의 고려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첨예하였다. 의천은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귀족출신인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교관겸수는 불교의 이론적 가르침인 교敎와 실천수행 방법인 관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에 앞서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5교를 통합한 연 후에 다시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중국에서 천태교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국청사를 완공하고 해동천태종을 열었다. 선교의 화합을 도모해 국론을 통일하고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4. 지눌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지눌(1158~1210)은 무신 집권기에 활동한 승려이다. 문벌귀족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무신세력은 선종을 강력 후원하였다. 그러나 교종과 선종은 의천의 사후에 다시 분열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지눌은 타락한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눌은 수행공동체를 결성하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경상도 팔공산 자락의 거조암에서 시작했으나, 십 수 년 후에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결사운동을 지속하였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송광사를 중창하고 이름을 수선사로 바꾸었다. 우리가 지눌의 불교개혁을 수선사 결사운동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주장했다.이란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하게 하는 것이며, 혜란 지혜를 닦는 것이다. 정과 혜는 별개가 아니라 반드시 ‘함께 닦아야 한다.’ 지눌이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기 위해 정혜쌍수를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의천과 달리 지눌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정혜쌍수의 바탕이 된 돈오점수도 깨달음을 먼저 얻은 연후에 계속해서 연마할 것을 주장한다.

         

        지눌은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원래 하나인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는 논리로 삼아, 조계종을 창시하였다.

         

         

        5. 그 외  

         

        요세는 수선사 결사와 대비되는 백련사(만덕사) 결사를 주창하였다. 천태종에서 시작해서 지눌의 권유로 참선에 참여하였으나, 정혜定慧가 무지한 일반대중이 수행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천태종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요세는 법화사상을 바탕으로 참회하고 염불하면 극락왕생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세의 법화사상은 민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백련사는 강진 만덕산에 위치한 만덕사를 개칭한 것이다.  

         

        지눌의 대표 제자는 혜심이다. 그는 스승보다 더욱 참선에 치중했다. 혜심의 역사적 의의는 유불 일치설을 내세움으로써 불교국가인 고려가 유교국가인 조선으로 이행하는데 있어 사상적 거부감을 완화시킨 것이다. 혜심은 조계종의 2대 종사로 알려져 있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나라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써서 불교를 비판했고, 태조 때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엄격히 제한했다. 태종은 사원전을 몰수하고, 세종은 선교 36개 이외의 사찰을 철폐했다. 그러나 민간이나 심지어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여인들은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다. 특히 세조는 스스로 불교에 애착을 드러내어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건립하고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수양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간행하였다. 명종 때에는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불교를 중흥시키려 노력했다. 보우를 등용하여 승과를 부활하면서 집권 사대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양반지주나 부농거상들이 후원한 사찰들이 생겨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엔 고구려, 백제의 왕 순서 따위를 외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태정태세~”에 비하면 생뚱맞게 느껴지는 이름들이라 거리감이 더 컸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외우기를 잘했다 싶다. 광개토대왕이니 장수왕이니, 좀 들어봤다 싶은 왕들도 사실 몇몇 업적이나 알았지, 고구려 전체 역사에서 어떤 맥락 아래 놓이는지는 몰랐다. 왕들을 주~욱 꿰고 나면, 한 왕조의 탄생과 성장, 절정과 쇠락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을 수 있다. 전기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듯 말이다.

         

        시험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요즘 시험은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의 관계와 그 흐름을 묻는 것이 많다. 앞뒤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니, 왕들의 순서를 알아두면 아주 유리하다.........만, 외우기가 싶지는 않다. 다행히 인터넷에서 좋은 자료를 얻어 한결 수월하게 외울 수 있었다. 자료의 주인장에게 감사드린다.

         

        http://blog.naver.com/tiranomaster/10139981772

        (아쉽게도 2016년 11월 현재, 이 사이트는 비공개로 돌려져 있다.)

         

         

        Ⅰ. 삼국의 성장

         

        <최태성의 개정 고급 한국사> 강의와 교재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각 요런 성장 곡선을 가지고 있다. 삼국의 성장은 대체로 고대국가의 기틀 마련, 개혁 정치, 그리고 전성기의 순으로 이어진다. 고대국가 완성에 꼭 필요한 네 가지 요소는 율령반포와 정복활동(영토 확장), 왕위세습, 불교의 공인이다. 불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데올로기로 왕권강화에 기여했다.

         

         

        1. 고구려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사 전근대편>

         

        1세기 태조왕과 2세기 고국천왕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3세기 동천왕 때 중국 위나라의 침략을 받았으나, 4세기 초 미천왕이 낙랑군을 몰아내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위기는 4세기 중반, 안팎에서 몰아닥쳤다. 중국 전연의 침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기도 했고,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당하며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치욕을 겪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뒤를 이은 소수림왕의 개혁정치는 고구려에게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고국양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광개토대왕이 등장한 것이다. 청년군주는 정복전쟁에서 연승을 거듭했다. 거대한 영토를 물려받은 장수왕은 5세기를 고구려의 시대로 우뚝 세워놓았다. 장수왕은 전쟁보다 외교에 능했으며, 백제의 한성을 공략할 때도 치밀한 전술 아래 움직였다. 삼국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격전장이 되었던 한강유역이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문자왕 때는 고구려의 영토가 최대였다고 전해진다.

          

         6세기와 7세기는 고구려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한강 회복을 꿈꾸던 백제의 성왕과 뒤늦게 성장했으나 어느덧 훌쩍 커버린 신라의 협공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국제정세 또한 불리하게 돌아갔다. 위진남북조의 오랜 혼란기를 끝내고 중국 대륙이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언제나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해온 고구려였지만, 통일된 중국은 고구려에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수문제와 수양제의 거듭된 침략을 물리치며 민족사에 살수대첩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고구려의 힘은 쇠퇴해 갔다.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자, 영류왕은 친당정책을 폈지만 당태종의 야심은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몰고 왔다. 천리장성을 축조하며 대비책을 강구했지만 내분 속에 영류왕이 살해되고 연개소문이 실권을 장악했다. 당태종은 이것을 꼬투리 삼아 침략해 들어왔고, 고구려는 위기를 겪으며 끝내 당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러나 고구려의 국운은 이미 멸망을 향해 있었으니....

         

         

        2. 백제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국사 전근대편>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다. 3세기 고이왕이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개혁정치를 추진했고, 4세기 근초고왕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일찍이 중국과의 교류로 선진문물을 재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초고왕은 마한을 병합하고, 요서를 공략했으며,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동진과 동쪽으로는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침류왕 때 불교를 받아들였다.

         

         

          

         

        4세기 말부터 삼국의 주도권은 고구려로 넘어가고 있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압박으로 백제는 신라와의 동맹을 모색했다. 비유왕 때 신라의 눌지마립간과 나제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장수왕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을 빼앗겼다. 문주왕은 웅진으로 쫓겨 가야 했다. 웅진성 천도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동성왕 때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왕권을 다져나갔다. 6세기 초 즉위한 무령왕은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그의 무덤으로 더 유명하지만, 백제 중흥의 발판을 놓은 강력한 왕이었다. 무령왕의 치세로 부강해진 백제를 이어받은 성왕은 사비 천도를 단행했다. 한강유역을 되찾는다는 백제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아들뻘인 신라의 진흥왕과 손잡고 성왕은 마침내 한강유역을 회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한강상류는 신라가, 한강하류는 백제가 가진다는 약속을 깨고, 진흥왕이 한강하류를 공격했다. 배신에 울분을 삼키던 성왕은 진흥왕과 관산성에서 운명의 일전을 벌였다. 6세기는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백제가 아니라 신라의 손을 들어주었다.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백제 중흥의 꿈도 막을 내렸다.

         

        7세기 백제는 신라를 거세게 몰아붙였지만, 오히려 백제 멸망을 재촉한 결과를 가져왔다. 무왕 때부터 백제는 신라를 수 십 차례 공격했다. 의자왕은 신라 선덕여왕을 궁지에 몰며 대야성 등 4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고구려, 왜 등과 동맹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마침내 김춘추가 당태종을 찾아가기에 이르렀으니.... 백제도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3. 신라의 성장 곡선

           

         <최태성의 개정 고급한국사 전근대편>

         

        신라는 늦된 나라였다. 4세기 말 내물마립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김씨 세습이 이루어졌다. 이전까지 신라는 박,석,김 세 성씨가 돌아가며 나라를 통치했다. 통치자의 명칭도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순으로 변화를 거쳤다.

         

        4세기말 내물마립간 대에 신라는 왜에 의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다. 내물마립간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은 오만의 군사를 보내 왜를 물리쳐주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내정간섭을 받아야했다. 5세기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해 오자 눌지마립간은 백제의 비유왕과 동맹을 맺었고, 이후 소지마립간 때는 백제의 동성왕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동맹을 강화했다. 소지마립간은 역사에서 별로 알아주지 않지만 신라의 개혁군주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중앙의 행정체계를 정비했고 경주에 동시라는 시장을 열었다.

         

        6세기의 시작과 함께 신라는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렸다. 지증왕은 신라라는 국호와 왕호를 처음 사용했다. 우산국 복속은 독도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유명하다. 법흥왕은 신라의 진정한 개혁군주였다. 신라의 상징인 골품제가 율령과 함께 정비되었다. 이차돈을 순교시킴으로써 신라도 드디어 불교를 공인하였다. 병부를 만들고 금관가야를 정복했다. 진흥왕의 치세를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

         

        6세기를 신라의 시대로 만든 진흥왕은 신라인에게는 위대한 왕이지만, 배신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약 120년 이어져온 나제동맹을 깨고 백제의 뒤통수를 쳤을 뿐만 아니라 노비출신으로 하여금 성왕의 목을 치게 함으로써 백제의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오명을 감수하고 얻은 대가는 컸다. 한강유역을 차지하며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진흥왕이 함경도에서 경상도까지 땅땅 땅땅땅 세워 놓은 순수비는 그의 위세를 짐작하게 해준다.

          

         

        진흥왕 이후의 신라에 대해서는 몇 해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았다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팩션 드라마라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화백회의에 의해 쫓겨난 진지왕, 그 뒤를 이은 진평왕, 진평왕의 맏딸인 선덕여왕, 선덕여왕의 사촌쯤 되는 진덕여왕 등의 통치 순서와 선덕여왕 때의 백제와의 충돌 등은 사실이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듯이, 신라는 백제의 거센 공격에 직면해 당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았다. 삼한일통의 꿈이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Ⅱ. 7세기 불붙은 동아시아

         

        7세기 고구려는 영류왕과 보장왕,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 신라는 진평왕과 선덕여왕-진덕여왕-무열왕-문무왕이 집권했다. 한편으로는 천리장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당과 화친하려 했던 영류왕은 연개소문에 의해 살해되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은 왕위에 오른 후 당태종의 침략을 받았다. 645년 안시성 싸움으로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고구려는 당의 골칫거리가 된다. 백제는 무왕 때부터 신라를 거세게 몰아붙였고 의자왕 때에는 4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는 4세기 말 내물마립간 때의 절체절명의 위기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선덕여왕은 당과 화친을 맺으며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했지만, 국운을 건 한판의 승부가 다가오고 있었다. 최초의 진골왕에 오르게 될 김춘추는 고구려와 일본에게 동맹을 제의했지만 실패하고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는데....

         

        648년 신라 진덕여왕 2년, 드디어 당태종과 김춘추가 나․ 당 연합을 결성했다. 당태종으로서는 어떻게 해봐도 정복할 수 없었던 고구려를 정벌할 훌륭한 계책이었고, 신라로서는 백제의 등쌀에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자, 삼한을 통일할 신의 한수였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신라인에게 한반도 전체에 대한 민족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을까? 이때 체결된 나당연합은 당태종의 사망으로 660년에 가서야 비로소 실행되었다.

         

         나․ 당 연합군의 1차 표적은 백제였다. 백제는 기벌포 전투와 황산벌 전투에서 거듭 패함으로써 660년 마침내 700년에 가까운 역사를 마감했다. 진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김춘추,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정복한 다음해에 삼국통일의 과업을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백제는 망했지만 이후 3년 동안이나 부흥운동이 지속되었다. 주류성과 임존성을 중심으로 항전하였는데 지도층의 내분으로 실패했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참전이다. 일본은 수백 척의 전선을 만들어 백제를 도우러 달려왔다. 663년 백강에서 일본군이 당군에게 패하고, 백제 부흥운동도 끝이 났다. 일본왕은 왜 모든 국력을 쏟아 부어 백제를 구원해야 했을까....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의 조선술은 신라에게 배운 것이라는 점, 그래서 일본의 전선들이 맥을 추지 못했던 것일까?^^;;

         

         

        다음 순서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668년, 역사에 이렇다 할 전투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허무하게 망했다. 연개소문 사후 극심한 권력 쟁탈전의 와중에 침략을 당한 고구려는 차라리 스스로 무너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고구려도 마지막 부흥운동의 불꽃을 피웠다. 특이한 점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신라가 도와주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고구려가 망하자 당은 숨겨놓은 야욕을 드러냈다.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고구려 땅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까지, 한반도 전체를 꼴깍 삼키려고 덤벼들었다. 670년 나․ 당 연합은 나․ 당 전쟁으로 돌변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도우면서까지 당의 침략을 물리쳐야 했다. 675년 매소성 전투와 676년 기벌포 전투에 승리하면서, 신라는 가까스로 당의 야욕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른바 삼국이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통일된 신라의 국경은 대동강에서 원산만 까지였다. 이민족을 끌어들인 결과 우리민족은 넓디넓은 요동벌판을 잃어버렸다. 후대의 입장에서 당시의 신라를 비난할 수 없다고는 해도 아쉽지 않을 수는 없다.

         

         

         

         

        다행히 신라가 잃어버린 땅에는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발해가 들어서고, 우리역사는 남북국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통일신라가 중국의 당과 함께 200여년의 역사를 이어가게 되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사 공부의 최대 고비가 일제 강점기 국외 저항 부분이 될 것 같다. 도무지 정리가 안 된다. 몇 일째 한숨을 쉬다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대충 큰 그림만 그려 보았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는 주로 만주와 연해주다.

        현재 중국은 만주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만주는 동북 3성(둥베이 3성)으로 불리고 있는데, 행정구역상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의 3개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지도상으로는 만주와 동북3성이 딱 일치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두산 백과 사전>

         

        간도는 우리나라 국경과 인접해 있는 만주의 남동쪽 지역으로 현재 이 명칭도 사라졌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69>

         

        좀 더 분명하게 그려놓은 사진도 인터넷에는 많다.  물론 자료마다 조금씩 지형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충 엇비슷하다.

         

         

           

        간도에는 이미 19세기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가 살았다. 자연재해와 삼정의 문란으로 조선 땅에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고, 이 지역의 농경지는 대부분 이들 조선인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간도 관리사가 파견되고, 통감부가 파출소를 설치할 정도였으니 실효적 지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간도가 법적으로 청으로 넘어간 것은 1909년 청과 일본 사이의 간도협약에 의해서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은 입 한번 뻥긋 하지 못하고, 일본이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대가로 간도를 넘겨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도를 둘러싼 청과 조선간의 영토 분쟁은 숙종 당시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의 해석을 두고 후대에 와 이견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서위압록 동위토문”이 청과 조선의 국경에 대한 정의인데, 도무지 이 토문이 어디냐를 두고 대한제국 시기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의 손에 의해 뺏겼다. 여하튼 이런 역사를 가진 간도이니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독립 운동가들에게 1순위의 국외 독립 운동 기지였음에는 틀림없다.

         

        연해주는 1860년 러시아가 2차 아편전쟁의 강화조약(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청으로부터 넘겨 받았다. 러시아는 여기에 블라디보스톡(동방을 정벌하라! 혹은 동방의 등불...뭐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한다)을 건설하였다. 조선인이 처음 연해주로 건너간 기록은 1863(4)년 무렵으로 나와있다. 대여섯 가구가 살길을 찾아 이름도 낯선 러시아 땅으로 넘어갔는데, 러시아는 연해주를 개척하기 위해 조선인의 이민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 결과 1880년대까지 연해주에는 조선인이 러시아인보다 많았다. 물론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이 훨씬 많이 진출했다. 이 조선인들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대거 중앙아시아로 옮겨가야 했다. 여하튼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연해주 역시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또 하나의 훌륭한 선택지였다.

         

         

        간도와 연해주 !

        이리하여 복잡다단한 항일 독립 운동의 계보는 여기, 간도와 연해주에서 시작된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15>

         

        한일 병합 후 1910년대는 나라밖에 독립 운동의 기지를 만들어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나라 안의 움직임도 비밀 결사의 형태였다. 이런 작업이 3.1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1911년 이회영 육형제 등이 서간도의 삼원보로 집단 이주하였다. 경학사와 부민단이라는 자치조직을 만들고,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 학교를 세웠다. 여기서 활약한 독립군 군대는 서로군정서이다.

         

        북간도에는 중광단과 대한 국민회가 조직되었다. 한일합병 이전에 이미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같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군대조직으로는 중광단의 지원을 받는 북로군정서와 대한 국민회의 지원을 받는 대한 독립군이 있었다.

         

        연해주에는 권업회와 성명회가 있었다. 이후 이상설이 주도한 대한 광복군 정부와 3.1운동 직후 손병희가 주도한 대한 국민 의회가 만들어 졌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0>

         

        1919년 고종의 인산일을 맞아 드디어 3.1 운동이 터졌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독립 운동은 일본의 통치형태를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어 놓았다. 더 큰 영향은 국내와 국외의 항일 운동에 불을 붙였다는 것이다. 1920년대의 각종 대중운동과 노동자․ 농민의 쟁의, 그리고 국외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무엇보다 독립 운동을 위한 통일된 지도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1919년 9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3>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32>

         

        이후 임시정부의 행로는 순탄하지 않았지만, 끝내 김구가 지켜낸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조직을 재정비하여, 건국 작업을 착착 진행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1>

         

        3.1 운동 한 달 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 운동 인사들은 무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여 3.1 운동을 촉발했다. 3.1 운동 직후 이들 지역에서는 20여개의 독립군 부대가 지역의 한인 단체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활동하였다. 그 중 독립 운동사에 길이 남는 전투가 바로 1920년의 청산리 대첩이다.

         

        1920년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20) 일본군은 만주로 군대를 파견하기 위해 훈춘사건(20)을 조작하였다. 마적단과 짜고 만주의 일본 관공서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일본은 대규모의 군대를 만주로 진입시켰다.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한 독립군 부대들은 협력하여 대항하였고,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이 연합한 부대는 엿새 동안 청산리 부근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청산리 전투,20) 봉오동과 청산리의 빛나는 승리로 독립군은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국내의 민족 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1>

         

        그러나 상황은 매우 심각해졌다. 일본군이 독립 운동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간도의 양민을 대량 학살했다.(간도 참변,20) 더 이상 간도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독립군은 러시아를 향해 떠났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밀산에서 독립군 부대들은 대한 독립 군단을 형성했다. 서일의 지도 아래 김좌진과 홍범도의 군대도 합류 하였으나, 김좌진은 도중에 만주로 돌아오고, 홍범도는 러시아로 들어갔다가 자유시를 거쳐 연해주에 정착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홍범도는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생을 마쳤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47>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들어간 대한 독립 군단은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학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자유시 참변, 21) 러시아 혁명 후 어지러운 러시아 군부 내의 권력 다툼 과정 중 일어난 참변이었다. 독립군은 다시 간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55>

         

        독립군은 일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한인들로부터 예전처럼 긴밀한 협력을 받을 수는 없었다. 독립군은 조직을 재정비하여 비슷한 시기에 남만주에 참의부와 정의부, 북만주에 신민부를 결성하였다. 이들 3부는 독립군이 만주의 한인 이주민과 함께 생활하고 이들의 권익을 지키면서 독립 전쟁을 모색한 사실상의 군정부였다. 민정과 군정을 함께한 자치 정부라 할 수 있다.

         

        1925년은 국내외에 중요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 개헌을 했고,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은 중국인 군관 학교인 황포 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국내에서는 조선 공산당이 수립되었고, 사회주의자를 표적으로 하는 치안 유지법이 제정되었다. 한편 만주에서는 만주 군벌과 일본 사이에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다. 우리 독립군을 체포하거나 신고하면 포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자유시에서 참변을 겪고 돌아온 독립군은 중국과 일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사태에 직면했다. 1920년의 빛나는 승리 이후 1920년대는 만주의 독립군에게는 시련의 시기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4>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 말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났다. 비록 완전한 통합에는 실패했지만, 북만주의 혁신 의회와 남만주의 국민부로 재편되었다. 30년대 초 이들 조직은 각각의 당과 군사 조직도 갖추었다. 혁신 의회는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을,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30년대 초에 한국 독립군은 북만주에서, 조선 혁명군은 남만주에서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0년대의 국외 독립운동은 3.1운동 직후의 빛나는 승리와 이어지는 시련, 그리고 30년대를 준비하는 조직 개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8>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겪으며, 그 타개책으로 일본은 침략 전쟁을 선택했다.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점령하였다.  미쓰야 협정으로 격화된 20년대 중국과 독립군 사이의 적대적 감정이 일제의 만주사변으로 인하여 돌변했다. 중국과 독립군이 드디어 진정한 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1932년 김구가 결성한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 상하이를 점령하고 승전 기념식을 올리던 일본군 수뇌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중국 정부를 이끌던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 고 높이 평가했다. 이를 계기로 한중 연합의 분위기는 급상승 하였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각 독립군들도 중국 군대와 연합하여 치열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78>

         

        북만주(혁신 의회)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와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남만주(국민부)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1930년대 중반에는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상당수의 독립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복잡한 이합집산을 거쳐 중국 관내로 이동한 독립군 세력은 민족 혁명당(35)을 수립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그러나 민족 혁명당을 구성한 여러 정파는 곧 분열되었다. 당시 상하이에서 이동 중이던 김구의 임시정부는 35년에 민족 혁명당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한국 국민당을 만들었다. 민족 혁명당에서 탈당한 정파들은 40년에 김구의 한국 국민당과 결합하여 충칭에서 한국 독립당을 구성하였다.

         

          

           <최태성의 근현대사 1400제>

         

        민족 혁명당의 중심 세력이던 김원봉은 여러 정파들이 탈당한 이후 조선 민족 전선 연맹으로 재정비하고 38년에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를 창단하였다.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군사조직이다. 조선 의용대는 41년 호가장 전투를 거치면서 나누어 졌다. 김원봉이 이끄는 일부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42년 임시정부의 직할부대인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다. 다른 일부는 중국 화북지방인 옌안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는데, 이름을 조선 의용군으로 바꾸고, 조선 독립 동맹 산하로 들어갔다.

         

        한편 30년대 후반까지 중국 관내로 내려가지 않고,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군대가 있었다. 주로 사회주의자인 이들은 동북 항일 연군을 조직하여 국경 부근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러시아로 넘어갔다. 동북항일연군은 연합군의 성격이었고 여기에 조국광복회가 속하였는데 그 중심인물이 김일성이다. 조국광복회의 보천보 전투는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이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8>

         

        1945년 해방되기 직전 나라 안팤에는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는 다섯 개의 주요 건국 세력이 형성되었다.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화북의 조선 독립 동맹, 러시아의 동북항일연군, 미국의 이승만과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 동맹이 그것이다.

         

        김두봉이 중심이 된 조선독립동맹의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화북지방에서 활약하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과 협력하여 항일 투쟁을 벌이다 이후 연합군의 요청으로 인도, 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고, 미군과 협력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김구는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 왜적이 항복 ....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해 온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백범일지>”

         

        「급박하게 이루어진 일제의 항복 선언으로 유격대 출신 인사들 가운데 일부가 소련과 함께 국내로 진격하였을 뿐, 준비해 온 해외 무장 세력의 통일도, 대대적인 국내 진격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해방, 김구의 탄식은 그것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우려였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209> 」

         

        한국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성공했더라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원군은 종로를 비롯 주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웠다. 조선군의 사망자는 350여명, 미군의 사망자는 3명뿐인 신미양요 직후의 일이다. 조선의 주전척화파는 “병인년부터 양이들을 배척해온 것은 온 세상에 자랑할 만한 일로 화친은 절대 논할 수 없습니다.”며 의기양양했다. 조선군이 얼마나 죽었든 조선 땅을 뺏기지 않고 통상도 하지 않았으니 승리한 전쟁이었다. 이미 청나라는 1842년에 영국에 의해, 일본은 1854년에 미국에 의해 강제 개항을 당했다. 그러니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연거푸 물리친(?) 조선으로서는 척화비가 너무나 당당했을까?

         

        척화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끌고 와 통상을 요구했다. 1868년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한 바로 그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무서운 속도로 개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채 10년이 되지 않은 1876년에 군함을 이끌고 와 조선을 강제 개항시켰다. 조․ 일 수호 조규, 이른바 강화도 조약이었다.

         

        개항과 개화가 대세가 된 이후에도 조선은 제대로 된 개화작업을 추진하지 못했다. 1880년에야 김홍집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고, 개화작업을 총괄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외세의 간섭이 없었다면 개화의 길은 순탄했을까? 그러나 동양의 개화라는 것이 이미 제국주의에 의해 이루어진 만큼, 잔잔한 물결 위로 순항하는 개화란 애초부터 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조선은 왜 그렇게 다른 길을 걸어야 했을까?

         

        조․ 일 수호 조규의 부속 조약인 조․ 일 무역 규칙의 3無 조항은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조선의 경제 기반을 몰락시켰다. 조선후기에 싹을 틔우며 성장하던 자생적 수공업은 무관세로 들어오는 싼 면제품과 공산품에 의해 무너졌다. 무제한 곡물 유출이 허용됨으로써 엄청난 양의 곡물이 일본으로 빠져나갔고, 곡물이 부족해진 조선은 폭등하는 곡물가격에 신음했다. 기층 민중의 경제가 파탄 난 것이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터졌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던 구식군인의 폭동으로 시작했지만 곧 도시빈민이 합세하여 궁궐을 불태우고 일본인 교관을 죽이는 등 사태가 심각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의 요청에 의해 들어와 난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납치해갔다. 임오군란으로 청나라 군대뿐만 아니라 일본 군대까지도 조선에 주둔하게 됐다. 군란이 진짜 군란을 초래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의 수위를 높여갔고, 조선의 두 갈래 개화파는 더욱 격하게 대립했다. 민씨 정권과 결탁한 온건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동도서기식 개화를 추구했다. 반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보기로 삼은 급진개화파는 문명 개화론을 주장했다.

         

        1884년 급진개화파는 말 그대로 급진적 방식을 택했다. 일본군의 도움을 믿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짧은 교전 끝에 일본군은 물러나고 청군이 사태를 장악함으로써 김옥균, 박영효 등은 3일천하를 마감하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이 내세운 14개조의 개혁안은 입헌군주제와 신분제 폐지 등을 담고 있는 최초의 정치 개혁안으로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 때문에 토지개혁 같은 가장 절실한 개혁안을 담지 못했고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갑신정변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 땅에서 언제든지 부딪힐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청과 일본은 텐진조약을 맺어 동시 철군할 것과 향후 파병시 상대국에게 통보할 것을 약속하였다. 갑신정변으로 수세에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텐진조약을 통해 거의 청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선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였다. 10년 후 텐진조약은 청․일 전쟁의 빌미가 되는데, 이 10년 사이 일본은 절치부심 국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 10년 동안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국가에 변란이 터질 때마다 외세에 의존하고, 그 결과 외세의 간섭은 극심해지고, 경제는 거덜이 나고 있는데, 조선은 이 귀중한 10년을 왜 그렇게 허망하게 놓쳐버린 것일까?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운동 사이, 딱 10년 동안 물론 조선도 동도서기식 개혁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혁에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건전한 재정확보가 1차 과제가 되어야 한다. 요즘도 그렇지만 국가 재정은 탄탄한 민중경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 이래 각종 불평등 조약으로 민중 경제는 파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씨 정권은 봉건적 착취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하려 했다. 기본조세에 각종 무명잡세까지 백성의 등골을 뽑는데다가 그나마 중간에서 착복하는 수령들이 부지기수였다.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20권 '망국'  p34>

         

        “결국 개화와 근대화는 재정개혁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개혁의 주체여야 할 ‘위’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손대지 못한 채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구체제에 균열을 내는 일은 결국 ‘아래’의 몫 이었다. p34”

         

        동학농민운동의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전봉준이 봉기를 위해 돌린 사발통문에는 이런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더라. p54” <만화 조선왕조실록 20권>

         

        고부군수 조병갑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고부봉기가 가라앉을 즈음 다시 기름을 부은 것은 안핵사 이용태다. 백산에 다시 모인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 승리하고, 이어서 전주성을 접수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59>

         

        비극은 외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민씨 정권에서 비롯되었다. 청군을 불러들인 것이다.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들어올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청군을 불러들이고, 일본군이 들어오자 마치 몰랐다는 듯이 허둥댔다. 일본군은 제물포로 상륙하면서 그들의 표적이 동학농민군이 아니라 경복궁임을 뚜렷이 드러냈다.

         

        현명한 쪽은 전장의 농민군과 장수였다. 화약을 맺어 농민군은 철수하고,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실행하기로 합의했다. 청․ 일 양군을 철수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은 철군을 거부했다. 청․ 일 양군이 남아서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이 거부하자, 다짜고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 함대를 포격했다. 청․ 일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조선 왕실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79>

         

        일본은 조선을 내정 개혁한다는 명분을 위해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1차 갑오개혁이다. 대한민국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한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 이렇게 일본의 손에 의해 시작되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것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차 갑오개혁의 핵심은 왕권을 약화시켜 입헌군주제적 성격을 갖추고, 신분제 등 전근대적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다. 김홍집과 흥선대원군의 연립 내각으로 구성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은 민심 수습용일 뿐 실권이 거의 없었다.

         

        대원군은 비밀리에 청군과 동학농민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아래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위에서는 청군이 협공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전쟁 초반부터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있었다.

         

        전주화약 후 농촌으로 돌아가 집강소 활동을 하던 농민군은 이른 가을겆이를 마치고 삼례에 다시 집결하였다. 조정을 유린하는 일본군에 대한 분노에 대원군의 밀서가 힘을 보탠 것일까? 일본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총 집결하여 한양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보국안민의 굳은 결의만으로는 우금치를 넘을 수 없었다. 일본군의 무라다 총 앞에 하얀 눈처럼 쓰러져 갔다. 2차 동학농민운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후방의 동학농민군을 제거한 일본은 2차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대원군을 날리고, 친일 개화파 박영효를 김홍집의 파트너로 삼았다.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정리, 반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홍범14조가 그것이다. 홍범이란 홍익인간 할 때의 그 ‘홍’에 규범, 규칙 등의 ‘규’, 즉 '큰 법'이라는 뜻이다.

         

        이듬해인 을미년에 청․ 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강화조약인(강화는 싸움을 끝내고 화해를 한다는 뜻)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등을 할양 받았다. 하지만 주변 열강들이 이 꼴을 곱게 두고 볼 턱이 없었다.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삼국은 일본을 압박하여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찍소리 못하고 삼국간섭을 받아들이는 것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다. 명성왕후였다.

         

        명성왕후와 고종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기로 마음먹고, 박영효에게 역모죄를 씌웠다. 박영효는 갑신정변 이후 두 번째로 망명길에 올랐다. 삼국간섭으로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은 명성왕후의 행보에 독기를 뿜었다. 자칫하다가는 청이 아니라 조선마저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차마 상상하지 못한 일을 벌였다.

         

        다시 대원군이 이용되었다. 대원군과 훈련대는 명성황후 시해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방패막이로 현장에 불려나와 있었다. 훈련대 대원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해도 대원군은 어땠을까? 1863~1873년까지의 고종 10년간의 개혁은 대원군의 혁혁한 치적이다. 그러나 이후 대원군의 행보는 원칙도 기준도 없는 권력욕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시해를 결행한 것은 일본낭인들이었다. 여우사냥이란 이름으로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명성왕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어떠했든, 혹은 어떠해야 하든, 을미사변 그 자체는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을미사변 후 3차(갑오1,2차에 이은) 을미개혁이 단행되었다. 김홍집은 여전히 살아남아 유길준과 함께 을미개혁을 지휘했다. 을미개혁은 곧 단발령으로 대표된다. 단발령은 을미사변보다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양반을 중심으로 한 을미의병을 촉발했다.

         

        왕후를 잃은 고종의 마음은 어땠을까? 왕후를 처참하게 살해한 일본의 감시 아래서 고종은 어떤 내일을 계획했을까?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했다. 고종의 전격적인 아관파천으로 일본은 손안에 넣은 조선을 다시 한번 놓쳤다. 또 러시아였다. 러시아로 일본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승부수는 1904년 러․ 일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 약 8년간의 시간을 벌어들였다. 그 귀 중한 시간동안 고종은 무엇을 하였을까?

         

        1897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황제에 즉위했다. 황제라니?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제국주의의 수탈 아래 곧 숨이 넘어가는 나라가 제국은 다 무엇이며 황제는 무엇인가 싶어, 늘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 허세야말로 열강의 발아래 짓밟히지 않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서재필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다. 갑신정변 후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은 성공하여 미국인으로 살고 있었다. 1896년 고종의 후원아래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이때까지 독립협회는 일종의 관민 가버넌스라 할 수 있다. 그런 독립협회를 고종은 왜 군사를 동원하면서까지 해산했을까?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18>

         

        배재학당에서 열었던 토론회가 성공하자 서재필은 토론회를 독립협회로 확대했고 드디어 종로 한복판에서 민중을 상대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이를테면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못지않은 엄청난 민중이 모였다. 만민공동회의 힘은 막강하여 광우병 시위가 이루어내지 못한 엄청난 성과를 얻었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무산시키고, 러시아 고문을 돌려보냈으며, 한러 은행의 문을 내렸다. 뜻하지 않은 승리에 만민공동회는 환호하며 자신감에 넘쳤다.

         

        그러나 고종은 분노했다. 러시아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고종이었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에 재정고문과 군사고문을 요청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사실 시큰둥했다. 괜히 일본과 영국 등의 심기를 거슬러 만주를 노리는 러시아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봐 였다. 그런 러시아이니 만민공동회가 오히려 고마웠는지도 모른다. 조선 민중의 뜻이 그렇다면 알았다고, 즉각 철수해버렸다. 고종은 서재필을 추방해 버렸다. 미국인 서재필 역시 깔끔하게 떠났다.

         

         

        윤치호가 맡은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에 몰두했다. 중추원을 의회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이미 만민공동회는 대신들에게 편지를 보내 국정을 질의․ 질타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대신들을 날려 보낼 정도로 막강해지고 있었다. 고종은 중추원 설립을 받아들였다. 만민공동회는 어느새 대신들에게 토론회 참석을 종용하고, 밤샘 시위를 벌여 대신들의 참석을 끌어냈다. 여기서 정부대표 박정양과 독립협회 윤치호, 그리고 민중의 대표로 백정출신 박성춘이 똑같은 단상에 올라 연설을 했다. 민의의 승리였다. 헌의6조라는 이름으로 채택된 건의안을 고종은 받아들였다. 헌의의 ‘헌’은 헌납, 헌정 할 때의 그 드린다는 뜻이다. 헌의는 의견을 드린다는 것.

         

         

        고종은 곧바로 뒤통수를 쳤다. 황제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도모하려 한다는 익명서를 근거로 독립협회의 간부를 체포했다. 시위하는 민중들을 황국협회를 시켜 공격했다. 몇 번의 힘겨루기 끝에 결국 고종이 승리했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12월 25일 군대에 의해 해산당하고 독립협회는 문을 닫고 독립신문은 자연 폐간되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망국' p214>

         

        1899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의 광무개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원수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황제 휘하에 두고 황제권의 강화를 추구했다.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겠다는 것. 개항이후 온건개화파가 추구했던 동도서기東道西器론과 맥을 같이한다. 고종의 西器는 기술학교, 전화, 전차, 지계(토지소유증명서) 같은 것들이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개혁을 위해 고종은 힘껏 노력했다. 그러나 외세가 아가리를 벌리고, 재정은 열악하고, 민중의 힘도 짓밟아 없앤 상황에서 언제까지 사상누각 같은 개혁이 가능했을까? 민중이 지지하는 내정 개혁 없이 근대적 개혁은 어차피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종은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날렸다. 동학농민운동과 독립협회. 이제 남은 것은 망국으로 가는 열차 뿐.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p101>

         

        1904년 러․ 일 전쟁이 터졌다.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던 러시아와 일본은 여타 열강들과의 이권 등 복잡한 정세 속에 결국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같은 해 일본은 한․ 일 의정서를 맺어 조선의 광대한 영토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체결된 제1차 한․ 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는 사실상 일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재정과 외교 고문을 파견하여 고문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1905년 러․ 일 전쟁의 종전을 앞두고 일본은 사전 정지 작업을 했다. 카쓰라-테프트 밀약으로 미국에는 필리핀을 주는 대신 대한제국은 일본이, 제2차 영․ 일 동맹으로 영국은 인도를, 일본은 대한제국을 차지한다는 약속을 했다. 이어 미국의 주선으로 강화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지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완전히 손을 털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균형으로 근근이 버텨오던 대한제국은 이제 오롯이 일본의 손아귀 안에 놓였다. 곧바로 제2차 한․ 일 협약 즉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으로 하는 통감정치가 시작되었고, 외교권을 강탈당했다. 민영환이 자결하고,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싣고, 나철, 오기호가 오적 암살단을 조직하고, 의병이 궐기했어도 일본의 야욕은 거리낌 없이 진행되었다.

         

        1907년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했다. 만국평화회의. 만국이란 제국주의 여러 나라를, 평화란 평화롭게 식민지를 갈라먹자는 뜻이라는 것을 고종은 몰랐던 걸까? 회담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지만, 이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폐위 당하고 한․ 일 신협약, 즉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번에는 군사권의 강탈이었다. 군대 해산 명령이 내렸다.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고,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지만, 망국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09년 사법권을 빼앗기고(기유각서), 1910년 결국 국권을 빼앗겼다(경술국치). 조선왕조 500년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끝났다. 1908년 장인환과 전명훈의 총탄도, 1909년 안중근의 총탄도 망국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