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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야스다 고이치 지음, 김현욱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온 넷우익> 을 반쯤 읽고 나서야, 나는 살짝 안도의 웃음을 웃었다.
얼마 전 나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와 일종의 거래를 했다. 후마니타스는 책 한 권을 공짜로 보내주고, 나는 글을 한 편 써서 보내주는 것이다. 번역하자면, 내가 후마니타스의 판촉행사 중 하나인 서평단 모집에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 뽑혔다는 말이다. 택배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공짜 책 한권에 좋아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스를 열고 책을 손에 들자, 책의 무게 보다 채무의 무게가 먼저 전해졌다. ‘써야한다.’ 미끼만 떼먹고 도망가기엔 얼굴의 두께가 미치지 못하고, 읽을 만한 서평을 쓰기엔 능력이 닿지 않는다. 이토록 자명한 사실을 왜 나는 모르는 척 했는지 모르겠지만, 책은 도착했고, 글은 쓰여야 했다.
책을 조금 읽어보자, 어쩌면 나는 서평을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이 그의 첫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8년)에서부터 최근의 저서인 『멈춰라, 생각하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일관하여 주장해 온 ‘적대의 전치(轉置, displacement)’에 관한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끔찍하게도 일본의 넷우익이 절멸을 외치는 ‘재일코리안’은 나치들이 가스실에 몰아넣은 ‘유대인’ 의 형상과 너무나 똑같이 그려져 있다. 나는 서둘러 희미한 기억을 쫒아 지젝의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지젝이 ‘유대인’이라고 한 것을 ‘재일코리안’이라고 바꾸어 읽고,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웃었다, 살짝. 이건 서평이 아니라 공식에 대입하는 문제 풀이야.
1. 파시즘의 귀환?
<거리로 나온 넷우익>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의 회원들을 추적한 논픽션이다.(p8)” 재특회가 말하는 재일특권은 재일코리안이 일본인의 것을 빼앗아 누리고 있다는 특권인데,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상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기고 있다는 상실감과 분노이고, 그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다.
「 “지금 많은 일본인이 빈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꽤 많아요. 매년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일코리안은 외국 국적이면서도 우선적으로 생활보호 지원금을 받고는 일본에 대해 비판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빈곤을 이유로 재일코리안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특권을 향유하면서 차별 반대 운동이나 전쟁범죄 추궁 같은 사실무근의 반일 활동을 하는 재일코리안이야말로 일본의 적이 아닙니까?”(p57~8)..... 젊은이들이 직장이 없는 것도, 생활보호 지원금이 끊긴 것도, 재일코리안과 같은 외국 국적 주민이 복지나 고용정책에 무임승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을 뿐이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외국인을 약탈자에 비유하는 단순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p60)」
일본의 재특회는 그리 놀라운 현상은 아니다. 이미 20C 초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파시즘이 그랬고, 다시 돌아온 유럽의 네오파시즘 역시 그러하다. 현실은 단순한데, 원인은 복잡하다. 혹은 원인은 멀리 있고, 해결할 방법은 없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찾는 것 보다는 보이는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훨씬 간단하다. 비록 그것으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해도, 현실이 달라 보이기는 하고, 어두운 삶이 갑자기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2. 전치된 계급투쟁
「“우리는 일종의 계급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특권에 대한 비판이고, 엘리트 비판입니다.” “원래 좌익은 사회의 엘리트잖아요. 예전의 전공투 운동도 사실은 엘리트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다들 특권계급이었잖아요. 차별이다 뭐다, 우리한테 따지는 노동조합도 다 엘리트에요. 그렇게 잘사는 사람들이 없어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엘리트들이 재일코리안을 비호해 온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일특권 문제에 경각심이 없는 거고요.” 여기서 ‘계급투쟁’이라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비주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비엘리트라고 규정함으로써 특권을 가진 자들에 대한 복수를 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p60~61)」
나도 재특회의 입에서 나온 ‘계급투쟁’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지젝에 의하면 계급투쟁이 맞기는 하다, 전치된 형식으로서의.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순수한 우파 인종주의처럼 보이는 그런 요소들조차 사실은 전치된 노동계급의 항의 형태인지 주시해야 한다. 물론 고용위기를 야기하는 외국 노동자들의 유입을 중단하라는 요구에는 인종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공산권 국가들로부터 흘러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결과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주노동력의 유입은 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억제하기 위한 자본주의 전략 중 일부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부시가 노동조합의 압력에 굴복한 민주당보다 멕시코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합법화에 더 열심이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은 오늘날 ‘계급투쟁’은 한물 간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부터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신비화시키는 것에 대칭적으로 “아이 씻은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듯이, 다문화주의적 개방성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은 은폐하고 그것을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와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에 대한 단순한 주장은 반-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가장 은혜로운 형식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01~2」
일본의 재일코리안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식민지인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책임이 없다. 이 책에 의하면 오히려 그런 역사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여하튼 이들의 위기의식은 재일코리안 뿐 아니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국인 등의 외국 이주민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의 외국 이주민들 문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 수도 2011년에 이미 130만명이 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정확한 수치는 찾기 힘든 것 같다. 불법 체류자 수가 상당할 테니)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취업하는 노동현장에서는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 지 이미 오래다.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은 곧바로 임금 하락과 일자리 경쟁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분노는 보이지 않는 자본의 손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자리를 뺏어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로 향한다. 계급투쟁이 전치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은 진정한 적인 자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바뀌어 버린다. 이것이 적대의 신비화이다.
재특회가 ‘특권’이라는 단어를 매개로 재일코리안과 일본의 엘리트 및 좌파를 연결 짓는 단순함은 우습지만, 엘리트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우리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내가 떠올린 것은 물론 일베다. 솔직히 나는 일베를 잘 모른다. 게시판에 들어가 본적도 없고 그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어 본 적도 없다. 다만 그들이 재특회와 비슷할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그들은 아마도 ‘루저’일 것이다.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의 저급함을 보면 그들의 학력 인증 소동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조금 현학적인 용어를 들이댄다면, 아마도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은 재특회와 같이 엘리트를 미워하고 좌파를 증오한다. 그리고 관용(똘레랑스) 따위의 정치적 올바름(PC)을 조롱한다. 다문화주의적 관용이야말로 반-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지젝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다문화주의에 의해 은폐되어 버리는 자본의 논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특회나 인종주의자들의 ‘관용’에 대한 조롱은 엘리트 좌파가 은폐하고 있는 이런 사실을 자신들도 모른 채 폭로 하고 있는 셈이다. ‘관용 따위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물론 그런 다음 그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돌진한다. 돌격! 재일코리안. 돌격! 종북이.
3. 좌파적 꿈의 부재
「“어쩐지 학력이 높고, 어쩐지 월급이 많고, 어쩐지 보호받고 있다, 가해자들에 대한 공통적인 이미지죠.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재특회 회원 대부분이 이런 가해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처지라는 사실인지도 모릅니다.”p344 ....이들 가해자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안정된 직장을 독점하고, 누군가가 지켜 주고, 발언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대변해 주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도 듣기 좋은 인권이나 복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뿐이다. 약자의 편인 척하면서 자신들은 편한 장소를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유함까지도 독점하고 있다. 위선자이며 약탈자이다.p345...“그런 불만과 불안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게 재특회라고 생각해요.” p345」
재특회라는 단어만 없다면, 이건 우리 사회가 소위 강남좌파에게 가지는 반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좌파가 진짜 좌파인가를 떠나서, 좌파는 왜 이렇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답하자면, 좌파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훈은 분명하다.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이 좌파적 꿈의 부재라는 공백을 채우고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14」
우리나라 역시 좌파는 파산했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우리가 본 것은 비전도, 능력도, 도덕도 상실한 추악하고 무능한 좌파였다.
「“...지금 좌익의 어디에 매력이 있습니까? 반쯤 체제화된 좌익보다 아나키한 매력으로 가득 찬 우익이 젊은이들의 위험한 욕구에 훨씬 부응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장래의 전망을 발견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자극으로 가득 찬 운동이 재미있죠. 뭐, 일본인의 지적 수준이 가장 낮은 시기에 인터넷을 매개로 우익만 성장한 것은 불행입니다만.”p348... 지금의 좌익은 ‘지키기’만 할 뿐인 운동이다. 평화를 지켜라, 인권을 지켜라, 헌법을 지켜라, 우리 직장을 지켜라. 재특회 같은 신흥 보수 세력은 그것들을 모두 의심하고 ‘쳐부숴라.’라고 호소한다. 좌익이 보수가 되고 보수가 혁신이 된 ‘역전 현상’이 생긴 것이다.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이 변혁의 편에 서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p348」
「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인을 약탈자에 비유하는 단순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찾으려는 것은 일본인인 자신을 지켜 주는 강한 ‘일본’이다. 원래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흡수하는 기능을 해온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좌익이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p346~7」
재특회의 발흥은 좌파의 실패를 증언한다. 발터 벤야민의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라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좌파가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p148) 문제는 재특회가 아니라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 현 사회에 대한 불만을 누가 어떻게 조직하는가 하는 점이다.
4. 포퓰리즘의 긍정적 기능 : 민주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
재특회의 활동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보통 포퓰리즘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위험하고 파괴적이고 무질서하다. 그런데 기존의 체계, 기존의 법질서 아래에서는 절대로 ‘잘 안 풀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정답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쳐부수’는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깨버리려는 이들의 욕구가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계몽된 자유주의-테크노크라트 엘리트에게 포퓰리즘은 고유하게 원-파시즘적인 것으로, 정치적 이성의 붕괴이자 맹목적인 유토피아적 열정의 분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폭동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15」
국가라든가, 국익이라는 말만 나와도 파시즘 운운하며 펄쩍 뛰는 사람들이 있다. 집단적인 열광은 언제나 광적인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심형래의 디워 논쟁을 거치며, 그런 의심은 더욱 공고해 졌다. 집단적인 열광, 광적인 열정의 분출은 그렇게 나쁜 것인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기억해 보자. 플로리다에서의 부정 선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는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취지로 부시를 차기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가 형식적 법치주의와 관련된다.” 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 ... 플로리다의 예는 그럼에도 민주주의 안에 계속 ‘대타자’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복종해야 하는 선거 규칙이라는 절차적 ‘대타자’ 말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이 중지시키는 것이 바로 규칙에 대한 그 무조건적 의지, 바로 ‘대타자’이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언제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이유이다. 만약 선거가 조작되었다면 ‘인민의 의지’가 강제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경고. 그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압력의 위협 말이다. 심지어 선거를 통한 권력의 정당화가 존중되더라도 선거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 할 뿐이라는 것, 선거는 그 실체적인 가치가 다른 데 있는 정치적 과정을 공고히 해 줄 뿐이라는 태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398」
그런데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근본적이고 해소 불가능한 ’ 측면이 있다. 하나는 엘 고어를 승복하게 만든 민주적 절차, 민주적인 제도이다. 그런데 이 제도를 중지시키는 또 하나의 민주주의가 있다.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평등주의의 논리.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안이 (형식적)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통과되었을 때, 그것을 중지 시킨 것은 국민들이 법 절차를 넘어 요구한 무조건적인 민주주의였다. 민이 주인이라는 원칙. 그 때 가장 널리 불리고 가장 소리 높여 외쳐진 구호는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였다. 이것은 헌법이라는 법질서에 등록된 제1원칙이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법질서 위에 있다. 어떤 법적 질서나 제도라도 국민의 뜻에 반하게 되는 경우, 그 질서와 제도는 즉각적으로 중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포퓰리즘의 긍정적 차원은 민주주의적 규칙들에 대한 잠정적인 중지에 있다. 민주주의는 - 오늘날의 일반적 의미에서- 무엇보다 형식적 법치주의와 관련된다. 민주주의의 최소 정의는 적대가 논쟁적 게임으로 흡수되는 것을 보증하는 어떤 형식적 규칙들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397」
규칙들에 얽매인 민주주의를 중지시키고, 새로운 규칙을 위한 정치적 논의를 촉발시키는 것이 포퓰리즘의 긍정적 의미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에는 반드시 인민people의 폭발적 분노, 열광적 지지, 광적인 헌신이 뒷받침 된다. 그것만이 오로지 인민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채운 십만의 촛불 행렬이 집단적인 열광, 광적인 열정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5. 포퓰리즘의 이론적 옳지 않음
그렇다면 포퓰리즘은 우리가 채택해야 할 올바른 운동의 형식인가? 지젝은 포퓰리즘이 ‘실천에서는 (가끔씩) 옳지만, 이론에서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재특회에서 만난 한 여성은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재일코리안’이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더군요. 한편에서는 조선인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라고 욕하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그런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받고 있는 일본인은 정말로 한심한 거죠. 그런데 그런 모순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저 역시 한때는 재특회의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공격하기 좋은 목표를 찾은 데 신이 났는지도 모르죠. 재일조선인은 불쌍한 약자이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에 얽매여 왔던 우리에겐 터부를 깨는 쾌감이 있었어요. 비뚤어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저 자신도 터부를 깨뜨림으로써 세상의 권위나 권력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198」
「그들이 가진 분노의 메커니즘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치관이 혼돈스러운 시대에 아이덴티티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겁니다. 사회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질 수 없는 불안 속에서 간신히 국민적 아이덴티티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죠. p346」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주장에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유도 알지 못한다. 혼돈 속에서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해 준 것은 또렷하게 제시된 적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구성적인 ‘신비화’가 있다. 그것의 기본 제스처는 상황의 복잡성과 대면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 그것을 유사-구체적인 ‘적’의 형상과의 분명한 투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정의상 부정적인 현상, 거절에 기반한 현상, 무력함의 승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03~4」
「포퓰리즘은 궁극적으로 항상 평범한 인민의 좌절과 격분에 의해, “나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 멈춰야 해!”에 의해 지속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이해에 대한 거절, 복잡성에 대한 격분, 모든 혼란의 책임을 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의해 포퓰리즘은 지속된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줄 어떤 행위자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 이 앎에 대한 거절에, 포퓰리즘의 고유하게 물신주의적인 차원이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23~4」
6. 앎에 대한 거절
우리는 사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주는 어떤 행위자’의 가장 성공적이며, 가장 위험한 사례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나꼼수가 우리에게 심어준 환영이 그것이다. 가카만 물러나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환영은 달콤한 허상이었으나 우리는 열광했다. 나꼼수의 성공비결은 포퓰리즘의 물신주의적 특성을 완벽하게 활용한 것에 있다. 상황의 복잡성을 가지 쳐내고, 가카라는 분명한 적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닥치고’ 가카에게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우울한 현실의 내재적, 구조적 문제는 은폐되고, 모든 원인은 가카라는 특수한 개인의 탐욕과 무지에 돌려졌다. 그러나 비록 나꼼수와 문재인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해결방법이 요원한 원인을 파헤치기 보다는, 모든 책임을 적에게 떠맡기는 편리함을 선택했다. 우리 행동의 바탕은 바로 이 ‘앎에 대한 거절’ 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포퓰리스트들에게 사실 혹은 진실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재일코리안에게 아무런 특권이 없다는 사실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NLL포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 같은 것은 그들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물신주의란 사고의 역작용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재일코리안이 일본인의 권리를 탈취하기 때문에 일본인의 적인 것이 아니라, 재일코리안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모두 일본인의 권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인식이 그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재특회와 함께 토론해 보고 싶었다는 재일코리안이 막상 그들의 시위를 눈앞에 대하자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는 고백은 당연하다. 만약 재특회 회원이 이 재일코리안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는 이 재일코리안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총코는 죽어버렷!”이라고 외치며 거리를 누빌 것이다. 어떻게? 일상의 선량한 이웃 유대인을 둔 반유대주의자의 이야기가 이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이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의 선량함과 사악한 유대인이라는 간극에 당황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추론에 이렇게 대답한다.
「 그의 대답은 이러한 간극, 이러한 어긋남 자체를 반유태주의를 위한 논증으로 돌리는 것이리라. “당신은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느냐? 그들의 진짜 정체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일상적인 겉모습의 가면 뒤에 그것을 숨기고 있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본성을 숨기는 이중성이야말로 유태인의 근본적인 습성이다.” 바로 이렇게 처음 보기에 그것과 모순되는 듯한 사실도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위한 논증으로서 기능할 때에야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정말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p95<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7. 반동적 행위와 능동적 행위
그렇다면 적대는 이데올로기가 만든 허상이라는 것인가? 적과의 투쟁, 계급투쟁과 같은 대의에의 헌신은 언제나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뜻인가?
「미친 주장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히틀러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 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감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히틀러의 매혹에 반대해야 한다. 물론 그는 사악한 인간이고 수백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정적인 용기를 가지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추구한 것을 실행한 인간이라는 매혹 말이다. 요점은 이것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매혹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매혹이 틀렸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실제로 사태를 변화시킬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행위는 아무런 실재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반동 행위이고, 그가 상연한 거대한 혁명의 스펙터클은 자본주의 질서가 지속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뿐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31~2」
여기에 반동적 행위(리-액션, 수동적)와 진정한 행위(액션, 능동적)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포퓰리즘적 폭력의 선동자가 하는 것이 아닌가? 속고 있는 군중의 분노를 (재)촉발하기 위해 그들은 자살을 범죄로 곡해한다. 즉 그들은 일종의 자살인 파국(내재적인 적대의 결과)을 외부의 범인이 일으킨 것처럼 단서를 조작한다. 이것이 진정한 급진적-해방 정치와 포퓰리즘 정치가 다른 이유이다. 이 상황에 꼭 맞는 니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해방적인 정치는 능동적, 즉 자기 비전을 강제하는 반면에 포퓰리즘 정치는 근본적으로 반동적, 외부의 침입자에 대한 반작용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55」
재특회는 일본 내부의 정치-경제적 문제 혹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문제를 재일조선인이라는 외부의 침입자가 일으킨 범죄로 바꾸어 버린다. 이들은 스스로 권력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능동적으로 행위 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순을 구조화하고 있는 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볼 지혜도, 파괴할 용기도 없다.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외부의 희생양, 재일코리안이다.
「회원들 중에는 세상의 모순을 풀 열쇠를 모두 재일코리안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치도, 경제도, 재일코리안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기도 한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재특회야말로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이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p356」
적대는 존재한다. 적은 조화로운 사회를 파괴하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라, 사회 안에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사회는 처음부터 조화롭지 않았고, 언제나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본인의 일자리는 재일코리안에 의해 탈취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작동 논리에 의해 언제나 항상 부족한 상태를 유지하게 구성된 것이다. 이 적대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는, 재일코리안을 수 만 번 절멸시킨다고 해도 결코 재특회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
8. 재특회의 토양 : 주변화는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찌질한 인간들, 사회의 루저, 쓰레기들은 무시하거나 주변화하면 자연히 고사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방송이나 과도한 관심이 이들을 키운다고 비판한다. 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 역시 ‘사쿠라’라는 보수 위성 방송국이 스타로 키워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쿠라이 마코토는 단지 하나의 스타 상품이다. 상품이 성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시장의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적으로 들어난 사건이 후지TV 반대 시위다. 6천명 이상의 일반 시민이 참가했다는 후지TV 반대 시위는 이 방송국이 한류 드라마를 많이 방송한다는 이유로 일어났다.
「잘 생각해보면 방송국이 외국방송을 필요 이상으로 방영했다고 해서 이 정도로 대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이상하다. p314」
「김치찌개가 인기 랭킹 1위로 소개된 것이 어째서 편향인가? 그런 하찮은 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세상에 떠다니는 희미한 ‘반한국’, ‘반북한’의 목소리를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뿐이 아닌가? p314」
「나는 거기서 재특회의 배경을 본 것 같았다. 후지 TV 반대 시위 참가자들은 돌출된 언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도착점은 재특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재특회처럼 과격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낳고 있는 것은 이렇게 세련된 사람들의 어딘가 우울한 분노다. 재특회의 배후에 일반 시민이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p314」
이 배후에 있는 일반시민들의 ‘우울한 분노’는 언제라도 요원의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다. 재특회나 사쿠라이 마코토는 단지 특수한 불씨일 뿐이다. 줄지어 서 있는 일반 시민들이 ‘앎에 대해 거부’하고, 재특회가 내던진 재일코리안이라는 적의 형상에 분노를 폭발할 때 파시즘의 광풍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은 한 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 위험이 일본보다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 불평등에 분노하는 사람,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사람, 동지를 원하는 사람, 도피처를 원하는 사람, 돌아갈 장소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재특회는 유인하듯이 불러들인다. p356」
진중권 같은 지식인이 일베 현상을 루저나 주변화 시켜야 할 쓰레기로 조롱하며 유희하고 있는 동안,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일반시민’을 ‘유인하듯이 불러들이’며 사회를 위험하게 움직이는 자들은 바로 이들 재특회나 일베,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혹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두려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