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사회 -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최태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어쩌다 저자의 트윗을 팔로우하게 되었다. 출판하자마자 입대한다는 애절한(?) 사연에, 하루에도 몇 번을 ‘사라~ 사라~’ 외치는 통에, 모른 채 할 수 없어 『잉여사회』를 주문했다. 물론 저자는 나를 전혀 모르고, 나도 대강 읽는 트윗 글을 제외하면 그를 모른다. 그런데 트윗은 참 묘하다. 막상 팔로우 당하는 사람은 상대의 존재도 모르는데, 팔로우 하는 입장에서는 막 아는 사람 같고 이럴 때 책이라도 한 권 사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특히 공적인 트윗과 사적인 트윗을 마구 섞는 사람의 경우, 그 사생활에 자꾸 노출되다 보면 친근감이 느껴진다. 이렇게 일방적인, 감정의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 트윗에 익숙해지기가 아직도 쉽지는 않다. 여하튼 『잉여사회』표지 날개에 붙은 사진은 절로 ‘어머;;’ 가 튀어나오게 했다. 생각보다 통통하고 예상외로 단정하고.. 뭐 그런 모습이 트윗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게다가 1984년생이라니, 입대한단 말이 새삼 짠하게 느껴졌다. ...부디 건강하게 복무하시길 바란다.

 

 

 

  한윤형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올라가는 부모 세대, 내려가는 청춘 세대’ 라는 표현을 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고생했지만 부모 세대는 “세상 많이 좋아졌다” 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인 반면, 청춘 세대는 자신이 결코 부모님이 받았던 봉급만큼의 돈을 벌수도 없고, 부모님 밑에서 누렸던 생활의 질을 스스로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대이다. 부모 세대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실존했다면’, 자식 세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그 루저 의식을 내면화한 세대다.

  이 루저들이 최태섭이 말하는 ‘잉여’ 이다. 그러나 최태섭의 잉여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싸우지도 못했기에 루저도 아니다”. 루저라고 불릴 자격마저 박탈당한 이들 잉여, 그들은 누구이며 도대체 어떻게 출현했을까?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잉여에 대한 어떤 정의보다 마음에 날아 와 꽂히는 것은 바로 수 십, 수 백 통을 되풀이 써야했을 ‘자기 소개서’ 다. 무수히 거절당한 자기 소개서 속에 긴장해서 웃고 있는 그 얼굴들이 바로 우리 시대 잉여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잉여들을 가장 먼저 예언한 책은 『88만원 세대』이다. 한윤형은 이 책을 ‘묵시록’ 이라 표현했고, 최태섭은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 준 미래는 지금의 20대들이 나이가 들어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다” 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래는 없다는 묵시록의 예언대로, 잉여사회는 도래했다. 짧은 인생을 아무리 들추어 곱씹고 곱씹어 작성해 본 들 대다수의 자기 소개서는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밖에 없는 암울한 사회가 온 것이다.

 

 

 

 

  『잉여사회』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는 조금 다른 형식의 글이다. 한윤형의 책이 수필에 가깝다면, 최태섭의 책은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대중화된 사회과학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다지 딱딱하지 않고 잘 읽히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은 이 책에서 라캉과 지젝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최태섭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로운 빈곤> 이라는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하지만, 곳곳에서 라캉과 지젝의 용어가 보인다. 사실 ‘잉여’라는 말 자체도 그 영향권에 있다고 우긴다면 우길 수 있다.

 

  「잉여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남는 것이다. 하나의 전체 혹은 체계가 만들어질 때, 그리고 그것이 작동할 때 잉여가 발생한다. 잉여는 전체가 설명하거나 포괄하지 못하는 비-전체이고, 체계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에서 불쑥 등장하는 우발성이다. p79」

  「잉여는 그것이 전체나 체계를 크고 작은 곤경에 빠뜨릴 때부터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잉여가 체계와 전체에게 제공하는 곤란함이란 그것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자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다. p80」

  「잉여는 팔수도 없고, 노동을 시킬 수도 없으며, 소비자로도 부적절한 어떤 존재들을 지칭한다. 그들에게는 숨을 쉬고 먹는 입은 있으되 말하는 입은 없다. 이들은 결핍 그 자체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구멍이다. p85」

 

  체계 혹은 세계는 비-전체( not-all) 라는 라캉의 정의는 그의 유명한 명제 ‘대타자는 없다’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비-전체는 다른 말로 W(hole)이라고도 하는데 이 구멍, 바로 이 잉여 때문에 체계는 전체가 될 수 없다. 잉여의 존재는 곧 체계의 불가능성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hole 없이 Whole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 구멍 없이는 체계가 작동할 수 없다. 불가능성의 조건이 곧 가능성의 조건인 것이다. 여기에 카프카의 ‘오드라덱’까지 등장하면 도저히 라캉과 지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잉여는 과잉이며 결핍이다. 남아도는 것이 잉여다. 사회에 남아도는 인간이 잉여인간이다. 그런데 잉여인간은 그 자체로 결핍된 인간이다. 사회 안에 그의 자리는 결핍되어 있다. 그럼에도 잉여는 사회라는 체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잉여를 만들어 낸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이다. 1997년 우리 앞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부터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만들어 낸 체계이다. 구조조정은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이지만, 구조조정 없는 신자유주의란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잉여를 만들어내는 구조인 것이다.

  쓰 레기통에 넘쳐나는 자기소개서는 잉여가 되지 않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노력이 잉여를 진정한 잉여로 만든다. 결핍이 잉여의 ‘필요조건’ 이라면, 유행가 가사처럼 흔하지만 그 만큼 슬프기도 한 ‘단군 이래 최대의 스펙’ 은 잉여의 ‘충분조건’ 이 된다.

 

 

 

 1부가 잉여를 사회학적으로 규명한 작업이었다면, 2부는 우리 시대 잉여의 생생한 모습을 소묘한 보고서다.

  최태섭에 의하면, 결핍과 과잉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한 잉여들의 존재론적 위상은 좀비와 유령이다. IT 시대에 좀비와 유령이 대거 출몰하는 공간은 당연히 인터넷 세상이다. 디시인사이드부터 일베까지 잉여들의 활약상은 종횡무진이다. 잉여들은 딱히 어떤 편도 아니다. 자신들을 거절한 세상을 향해 날리는 잉여들의 아햏햏한 병맛은 예기치 않게 날카로운 세태 풍자가 되기도 하고, 약자를 향한 집단 폭행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를 향해 튈지 알 수 없는 무정형한 이질성의 이면에는 잉여들이 느끼는 공동의 감각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그것이 거칠고 패륜적인 욕설과 기행이든, 혹은 장난스레 외치는 잉여 선언이든, 혹은 잉여적인 것에 대한 기이한 열광이든 이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잉여성은 우리들의 발밑에서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불안한 흔들림과의 연관 속에 존재한다. 그 흔들림은 우리를 병맛 넘치고 잉여로운 ‘ㅋㅋㅋ'의 연대로 이끌기도 하지만, 끝 모를 적대의 최전선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p172」

 

  불안은 잉여시대의 전유물은 아니다. 잘은 모르지만 키르케고르가 이미 불안을 인간의 본질적 정서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불안은 ‘자유에의 현기증’이며, ‘구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젝 역시 키르케고르의 불안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어쨌거나 키르케고르의 불안에는 긍정성이 있다. 그 불안의 심연을 들여다 볼 용기가 필요하지만, 거기에 자유가 있다. 그런데 잉여들의 불안은 어떨까? 언뜻 보면 잉여들의 불안에는 탈출구가 없어 보인다. 여기에 자유니 구원이니 하는 단어들은 망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키르케고르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 했다. “자신의 자유의 심연 때문에 어지러울 때 정신은 어떤 유한한 긍정성 속에서 지지기반을 찾으며 자유를 포기한다.<시차적 관점 p182>”

 

  잉여들 역시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 인터넷 세상이라는 안전한 지지기반을 찾아 불안을 외면한다. 그리고 적의 형상을 만들어 내 불안과 불만을 해소한다.

 

  「불안과 불만을 계속 유지한 채로 이어지는 교착상태와 신경쇠약은 그 해법으로 파시즘과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다. 누군가 이 긴장을 해소해준다면, 눈에 보이는 확고한 적의 피로 우리들의 손을 씻게 해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예외 상태’를 선언할 주권자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한 적도 없는 독재에 대한 향수는 ‘무언가가 앞으로 맹렬하게 나가고 있다’라는 감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나가기는커녕 멈춰 있고, 오히려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제자리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다. p249 」

 

  유럽의 신나치주의, 일본의 재특회, 우리의 일베는 이렇게 탄생한 잉여이다. 이들이 내뱉는 과격한 언사, 폭력적인 행동, 위험한 사고는 그러나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다. 지젝은 미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히틀러가 나쁜 것은 그가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히틀러는 상황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용기가 없었다. 독일 자본주의가 처한 곤경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외부의 적을 만들어냈다. 독일인들은 퇴폐적인 부르주아 질서로부터 깨어나길 원했지만,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  홀로코스트라는 꿈을 만들어 냈다.

 

 

 

  잉여사회를 돌파할 해답은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저자 최태섭 역시 두루뭉술한 희망을 던져 놓을 뿐이다. 살아남아, 그 속에서 성장하고, 연대하자?

그렇다고 누구처럼 ‘짱돌을 던지고 바리케이드를 치라’고 뻔뻔하게 요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기 소개서의 스펙을 채우기도 바쁜 잉여들에게는 그저 웃기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는 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계산은 이미 나왔다. 죽어라 쏟아 부어도 1% 혹은 10% 정도만이 잉여를 벗어날 수 있다. 체계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최태섭이 결어로 삼은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 에 일말의 현실성이 있다면, 그것은 넘치는 잉여력이 체계를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발밑을 흔드는 불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에 온몸을 맡기는 용기가 필요할 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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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우 2013-09-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님글을 읽고 저자 최태섭을 팔로잉하려고 했는데 이미 입대했다면 뭥미?? ㅋㅋ

말리 2013-09-1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어제까지 트윗에 출몰했는데, 아직 들어갔다는 멘션들이 없는 걸 보면... 붜 이 달에 가긴 간답디다. MRI에 내시경까지 샅샅이 훑어도 아픈데도 없다네 ㅋㅋㅋ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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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검색창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늘 ‘대출 중’ 이었다. 반납예정일을 기다리며 한 달 반가량을 노렸지만 어느 틈엔가 이 책은 또 대출되어 버렸다. 지쳐서, 사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그러자 또 요놈의 책이 도서관 서가에 떡하니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청춘이 예전에 달아나 버려서 그랬는지,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참 건성으로 보았다. 검색을 하기 위해 되풀이 책 제목을 두드리면서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중얼거리는, 청춘의 이 막막한 ‘우울함’에 한 번도 마음이 가닿지 않았다. 딱 386세대인 나는 이 우울한 88만원 세대와 한 번도 공감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내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그렇게 읽으려 했던 것은 우선 저자 한윤형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랄 수 있다. 이모팬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나는 그의 트윗을 팔로우하고, 그가 참여하는 윤여준의 팟캐스트를 듣고, 미디어스에 올라오는 그의 기사를 웬만하면 챙겨보는 팔로워, 말하자면 일종의 추종자이다. 저자 한윤형에 대해서는 안티조선운동사의 전설적인 소년논객 운운하는 소문들이 따라다녔고, 사실 나는 그의 어떤 아이디를 기억하기도 하지만, 최근에 일어났던 진중권의 블락사태 때문에 그를 주목하게 되었고, 트윗에 올라오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그래봤자 사실은 책 한권 선뜻 사기보다는 빌려보려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덤덤한 추종자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책의 1부는 이런 추종자들의 호기심에 딱 들어맞는 글이다. 똘똘한 소년이 어떻게 자라 이 암울한 시대의 우울한 청춘이 되었는지, 그 과정의 어떤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평범하달 수는 없지만, 이 개별적 청년의 삶은 그가 겪어 온 팍팍한 시대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몇 주 전에 가입한 주부독서회의 도서목록은 참 다채롭다. 7월 뿐 아니라 10월까지의 일정이 나와 있는데, 이중섭부터 네루다, 화폐전쟁까지 종횡무진이다. 그 중에<88만원 세대>도 있다. 나는 갓 들어 간 신참인 주제에 겁 없이 이의를 제기했다. <88만원 세대>가 절판 되었으니 책을 구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저자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효용이 다 했다고 선언한 책을 굳이 지금 읽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했다가, 책을 살 수 있다는 회장님의 한 마디에 GG했다. 사실 읽어서 나쁠 책도 아닐뿐더러 훌륭한 책이다. 괜히 아는 척 한 것인데, 거기엔 꼬인 마음이 있었다.

  공저자 중 한 명인 우석훈은 자신이 의도한 변화가 20대에서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절판을 선언했다. 우석훈은 <88만원 세대>를 읽은 20대가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기 바랐지만, 오히려 이 책을  핑계 삼아 행동하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학생시절, 몇몇 아이들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고, 너희들은 수업을 들을 자격도 없다며 삐져서 문을 밀치고 나가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라 소리치던 일방적 권위주의의 변형이다.  이에 대해 공저자 박권일은 절판에 대해 동의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우석훈의 주장은 책에 대한 과대평가이며, 책의 한계는 독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88만원 세대>는 2007년에 출판되었다. 우석훈의 절판 선언은 2012년에 있었으니, 우석훈은 고작 5년 만에 자신의 책에 대한 실천적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분기를 폭발한 것이다. 어디서 그런 자만심이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책 한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을 품을 수는 있지만, 책 한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았다고 성깔을 부리는 것은 광태에 가깝다. 그것도 누구보다 청년세대를 잘 이해하는 것처럼 책을 썼던 저자가 말이다. 딱 386 세대인 저자 우석훈은 386세대와 88만원세대를 갈라놓으며, 88만원세대의 편에 서서 386세대를 비판했지만, 사실 우석훈의 태도는 딱, 그가 비판한 386세대의 그것과 같아 보인다. 이 개새끼들! 너희에겐 이 책이 과분해!! (물론 오해할 사람은 없겠지만, 우석훈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아니라, 그 의미가 이렇게 읽힌다는 것이다. 세상이 하 흉흉하니 별 사족을 붙여야 한다.)

  내가 애먼 독서회의 목록을 두고 대들었던 사연은 대강 이러하다. 그래서 나는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기다렸다. 내가 아는 88만원세대의 대표 논객이 이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 책의 2부와 3부는 직접적으로 <88만원 세대>를 거론하고 있다. 나는 <88만원 세대>가 독서회에서 토의될 때, 반드시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함께 논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이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혼자라도 꼭 이 책에 대해 떠들어 볼 심산이다. <88만원세대>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세대론을 도입했다면,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88만원세대>에 의해 ‘대상화된’ 그 88만원세대의 <88만원세대>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표현은 ‘올라간 부모 세대, 내려가는 청춘 세대 p132’ 이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고생했지만 부모 세대는 “세상 많이 좋아졌다” 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세대인 반면, 청춘 세대는 자신이 결코 부모님이 받았던 봉급만큼의 돈을 벌수도 없고, 부모님 밑에서 누렸던 생활의 질을 스스로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세대이다. ‘내려가는 사회’의 ‘내려가는 청춘’ 이다. 부모 세대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다 믿었고 실존했다면’, 자식 세대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그 루저 의식을 내면화한 세대이다.

  ‘부모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으나 그 투자를 회수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20대는 부채감에 시달리며p285’  침묵한다. 그리고 보수로부터도 진보로부터도 공격당한다. ‘20대 개새끼론’과 ‘20대 책임론’이 그것이다.  20대의 부모 세대인 50대 이상은 “배가 처부른 젊은이들이 눈높이를 높여 취직을 안 해서 외국인 노동자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범죄율도 상승하고 청년 실업률이 늘어나 경제는 활력을 잃고 있다p283"며 ‘20대 책임론’을 제기한다. 이 시대 한국의 경제 문제가 20대의 처부른 배 때문이라는 비난이다. ‘20대 개새끼’의 첫 발화자는 나꼼수의 김용민이라고 한다. 그러니 ‘20대 책임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뻔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가카때문이다’와 기본적 태도에서 동일할 것이다. 이명박 이후 수구집권의 모든 책임을 20대 개새끼에 전가하는 태도다.

  「한쪽은 20대 책임론으로 경제의 문제를 전가하고, 다른 한쪽은 88만원 세대론으로 한국 정치의 문제를 전가하니 담론의 세계에서 20대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이 말들이 올바르다면 20대들은 한국 사회문제의 유일한 원인이며, 20대들만 개조하면 한국 사회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다. 20대를 비판하던 사람들에게 정말로 그렇게 믿는지 묻고 싶다. 현실로 돌아오면 20대들은 한나라당 지지자인 아버지와 민주당 지지자인 삼촌들에게 “언제 취직하냐”는 압박마저 받고 있을 게다.p283」

 

  우석훈이 ‘20대 개새끼!’(라는 뜻을 표출했다는 것이지,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해버린 지금에야 우스워져버렸지만, 사실 <88만원세대>는 20대에 한국사회의 모든 책임을 묻는 <20대 책임론>과 <20대 개새끼론>에 대한 일종의 ‘방어 담론’ 이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복잡한 사회문제를 특정 세대의 책임으로 단순하게 전가하는 구조’를 갖춘 세대론이 아니었던가. 이에 우석훈과 박권일은 이 세대 담론에 맞서 새로운 변혁의 주체를 호출하는 세대론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대론의 한계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지만, 그 책임을 《88만원 세대》에 전가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p176」

  <88만원 세대> 출간 5년, 계급이나 계층의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단순 치환해 버린 ‘세대 담론’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있어왔지만, <88만원 세대>론은 말하자면 천박한 세대론으로부터 20대를 옹호하고 주체화시키기 위한 고급 세대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론은 세대론이다. 저자들 또한 이런 문제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박권일은 저자들의 작업이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를 입힌다는 것”이었으나 “세대론에 집중하다 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 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 되었다고 아쉬워한다. (p176)」

  당의糖衣, 그 사탕발림이 얼마나 달콤했던지, <88만원 세대>는 그 덧입힌 옷이 내용의 전부인 양 인식되고 이용되어 왔다. 물론 이 당의 코팅은 이미 천유로 세대라는 유행어를 가진 유럽이나 일본에서 습득해온 선진국형 기술이다. 이 코팅 기술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저자 우석훈마저 20대 개새끼해버리고 말았으니(뜻이 그렇다고 ;;), 이 책에 대한 오해를 단순히 독자의 몫으로만 돌리기는 힘들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착한 세대론이든 나쁜 세대론이든, 그것이 사회 구조의 복잡한 문제에 대한 원인을 하나의 뚜렷한 적의 형상을 통해 은폐해 버린다는 것에 있다. 그 결과 저자들의 의도와 얼마만큼 부합하는지 모르겠지만, 386세대 전체는 20대에 의해 진짜로 나쁜 개새끼가 되어버렸다. 386이 욕을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20대는 자신의 문제를 편리하게 386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사회에 오히려 더 무관심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우석훈이 지금에 와서야 비난한 20대의 냉소는 사실 우석훈 자신이 386세대를 20대의 주적으로 던져 주었을 때 예견되었어야 마땅했는지 모른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386 주적’ 놀이의 엉뚱한 계승자가 바로 변희재라는 한윤형의 주장이다. 물론 변희재의 386세대와 젊은 세대 편가르기는 세대론이 아니라 ‘변형된 인종주의’라는 박권일의 지적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여하튼 《88만원 세대》의 백미로 꼽히는 서문을 통해 저자들은 ‘개념 없고 노력도 안 하면서 정치적 관심도 없는 되바라진 20대’와 ‘편하게 취업해서 운동 경력으로 꼰대질 하는 386세대’라는, 적대의 전선을 불타오르게 했다. 변희재류가 여기에 꼬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8만원 세대>는 20대 청춘들에게 덧씌워진 억울한 누명을 벗겨 냈다. 그러나 그것은 ‘묵시론적인 예언’서 이기도 했다.

「‘88만원 세대론’은 20대의 대부분이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묵시론적인 예언이었다. 한국 사회의 계층 불평등이 ‘세대’로 전이될 거라는 새로운 통찰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인데도, 요즘의 젊은이들이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어른들의 ‘상식’에 맞서, 《88만원 세대》의 저자들은 이후 세대의 평생 동안의 소득은 윗세대의 그것보다 적을 거라고 주장했다. 윗세대가 젊어서 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취직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소득이 크게 증가한 반면, 오늘날의 세대는 시간이 지나도 젊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급료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p176)」

  이 묵시록은 틀렸는가? 현실의 단면을 말하자면, 이 예언은 충실히 이행되고 있다. 저자 한윤형에 의하면 ‘계층 불평등의 세대 전이’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된다. 단, 중간계급이라는 특정 계층에서. 물론 여기서 개념이 충돌한다. ‘특정 계층 내’의 ‘계층 불평등’ 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아마도 중산층이라고 불렸던 특정 계층이 몰락하면서 계층이 분화됨과 동시에 그것이 세대로 전이된다고 읽어야 될듯하다. 여기서 한윤형은 ‘미래’를 강조한다. 한윤형이 말하는 계층 불평등이란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래의 세대에게 곧  전이될 불평등을 의미한다고 보여 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88만원 세대론’은 원래부터 88만원을 벌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는데도 88만원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위한 담론이었다. 그것이야말로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다. 박권일은 여러 지면에서 자신은 ‘88만원 세대론’이 청년 빈곤층과 기성세대 빈곤층의 연대를 위해 쓰이기를 희망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88만원 세대’ 담론이 지적한 문제와 그 담론이 성공한 요인은 모두 중산층의 불안 심리 내지는 중간계급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즉 ‘계층 불평등의 세대전이’라 표현할 수 있는 ‘세대 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간계급이라는 특정 계층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 계층이 사실상 그간 한국의 내수 경제를 지탱해왔단 점을 생각하면 이들 내부의 ‘세대 문제’야 말로 디스토피아적 미래라 할 수 있다. p179~180」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문제가 터져 나오는 방식이다. 88만원 세대의 묵시론적 예언은 미국, 유럽, 일본 할 것 없이 세계 도처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바라보는 중간계층들의 문제의식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가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 자본주의의 대안이었던 ‘좌파적 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이다. 50대의 보수화뿐만 아니라 20대의 보수화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자신들의 주적인 386세대가 좌파를 자처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적개심은 자연히 20대들을 좌파의 대척점에 서도록 추동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간다. ‘중간계급의 욕망’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고, ‘중산층의 불안’은 공포에 가까워진다.

 

 

  인디고 연구소의 젊은이들이 슬로베니아로 날아가 직접 지젝을 인터뷰한 책인 <불가능성의 가능성> 에는 68혁명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프랑스의 많은 친구들과 얘기해 보면, 68년의 가장 멋진 순간을 무엇이라 말하는지 아십니까? 근교에서 당신은 차를 타고 와서, 노트르담 성당 북쪽에 차를 주차하고, 그리고는 센 강을 건너서, 시위를 하고, 차 몇 대에 불을 지르기도 하며, 여러분의 차가 아니니까 딱히 신경 쓰지도 않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저녁이 되면 다시 북쪽으로 가서 카페에 앉아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p127」

  이 무슨 된장녀스런 시위담일까 싶지만, 80년대 386들도 시위하고 밤새 막걸리 집에서, 호프집에서 술 퍼먹고 노래하고 토론했다. 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여유와 그런 처지를 말하는 것이다. 총격전이 벌어지는 곳에서 자유와 평등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게거품을 무는 것이 위선처럼 보이지만, 논쟁과 토론은 그런 곳에서 활발히 벌어진다. 논쟁과 토론이 없다면 희생과 투쟁은 있어도, 미래에 대한 꿈을 그리거나 합의해 나가기는 어렵다. 왜 사회 전체에 대한 투쟁은 노동자 계층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만한 중간계급, 상부구조와 토대가 일치하지 않는 강남좌파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는가에 대한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다. 먹고 살만해야 자유고 평등이고 자각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자유라는 최소한의 공간’ 이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88만원 세대>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 명문대생들이었다는 현상에 대한 또 다른 풀이가 될 수 있다. 명문대생들에게는 어쨌든 88만원 세대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는 있다. 잠시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지만, 운 좋으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격차는 <88만원 세대>가 보여주는 묵시록만큼이나 끔찍하다. 그러나 지잡대의 경우, 현실에 출구는 없다. 차라리 환상을 가지는 것이 그래도 견딜만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취직 걱정을 하는 지방대생들은 차라리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다. 출발선상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토익 점수 따고 자격증 따면 명문대생과 비슷한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위안하거나, 이게 실패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을 때에도 살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일단 위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포함될 수도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는 현실에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게다. 이들에게 《88만원 세대》담론은 벗어날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체념하고 따르는 것이 빠르다. p153~4」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80년대 이른바 386세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에는 대학생들이 특권층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졸업만하면 취직 걱정은 없었고, 취직만하면 먹고 살 걱정은 없던 시절이다. 2,000년대 촛불집회 역시 중간계층의 열망이었다. 참가자들 각자의 구체적 욕망이 무엇이었던 간에, 먹고 살만해진 그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갈망했다. 그것의 상징이 강남좌파다. 강남에서 학원해서 진보당에 쾌척하는 삶의 모순을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강남 학원은 계급을 더욱 공고히 하고, 진보당의 기본 이념은 계급철폐에 가까울 텐데도 말이다. 여하튼 경제적 여유가 우파든 좌파든 선택할 수 있는 사상의 여유마저 만들어 준 셈이다.

  지금 정치 참여를 놓고 서로 삿대질 해대는 386세대와 88만원세대의 격차도 비슷한 양상이다. 먹고 살만한 386세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먹고 살기가 막막한 88만원세대 앞에 개죽이 스티커를 내밀며 속으로 바가지바가지 욕을 해댔던 2004년 총선 때의 소위 ‘투표독려 캠페인’이 생각난다. 민망하다. 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 일이 자랑스러웠는데, 기실 이면에 놓인 이런 사회적 문제에는 전혀 무지했다. 우리는 참 해맑은 386이었다.

 

 

 

  20대가 정말로 보수화되었는지, 정치에 무관심한지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는 통계도 있고 그 반대되는 논거도 있다. 이번 대선만 보더라도 20대는 열심히 투표했다. 그런데도 졌다. 중요한 건 사실 이런 논쟁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다. 정당이 그려내는 꿈이든 운동가들이 보여주는 청사진이든, 진짜 능동적인 미래의 비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열심히 적들을 만들어 반대만 해왔다. 이회창만, 이명박만, 박근혜만 아니라면 이 가혹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연히 사라질 것처럼 행동해 왔다. 노무현도 김대중도 못한 것을 문재인은 할 수 있을 것이라 또 한 번 속아 주었다. 다음 번엔 안철수에게 속아 줄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우리는 속아주면서 한없이 ‘내려가는 사회’에 살아야 하는 걸까? 아마도 평등자유라는 좌파적 꿈, common이라는 공동의 삶에 대한 대안이 만들어 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약 없이 냉소하며 속아주어야 할 것이다. 가짜 적들의 형상에 분노를 폭발하면서, 파시즘의 광기에 시달리면서. 그러니 당장 꿈을 그려낼 능력이 모자란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엉뚱한 적을 만들어 내기 보다는. ‘재특회’는 생각 보다 가까이 우리 안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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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야스다 고이치 지음, 김현욱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야스다 고이치의 <거리로 나온 넷우익> 을 반쯤 읽고 나서야, 나는 살짝 안도의 웃음을 웃었다.

  얼마 전 나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와 일종의 거래를 했다. 후마니타스는 책 한 권을 공짜로 보내주고, 나는 글을 한 편 써서 보내주는 것이다. 번역하자면, 내가 후마니타스의 판촉행사 중 하나인 서평단 모집에 신청을 했는데, 운 좋게(?) 뽑혔다는 말이다. 택배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공짜 책 한권에 좋아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스를 열고 책을 손에 들자, 책의 무게 보다 채무의 무게가 먼저 전해졌다. ‘써야한다.’ 미끼만 떼먹고 도망가기엔 얼굴의 두께가 미치지 못하고, 읽을 만한 서평을 쓰기엔 능력이 닿지 않는다. 이토록 자명한 사실을 왜 나는 모르는 척 했는지 모르겠지만, 책은 도착했고, 글은 쓰여야 했다.

  책을 조금 읽어보자, 어쩌면 나는 서평을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슬라보예 지젝이 그의 첫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8년)에서부터 최근의 저서인 『멈춰라, 생각하라』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일관하여 주장해 온 ‘적대의 전치(轉置, displacement)’에 관한 완벽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끔찍하게도 일본의 넷우익이 절멸을 외치는 ‘재일코리안’은 나치들이 가스실에 몰아넣은 ‘유대인’ 의 형상과 너무나 똑같이 그려져 있다. 나는 서둘러 희미한 기억을 쫒아 지젝의 책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지젝이 ‘유대인’이라고 한 것을 ‘재일코리안’이라고 바꾸어 읽고,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웃었다, 살짝. 이건 서평이 아니라 공식에 대입하는 문제 풀이야.

 

 

 

 

1. 파시즘의 귀환? 

 

 

  <거리로 나온 넷우익>은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의 회원들을 추적한 논픽션이다.(p8)” 재특회가 말하는 재일특권은 재일코리안이 일본인의 것을 빼앗아 누리고 있다는 특권인데,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실상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기고 있다는 상실감과 분노이고, 그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다.

  「 “지금 많은 일본인이 빈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노숙자가 되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꽤 많아요. 매년 3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일코리안은 외국 국적이면서도 우선적으로 생활보호 지원금을 받고는 일본에 대해 비판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빈곤을 이유로 재일코리안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요. 특권을 향유하면서 차별 반대 운동이나 전쟁범죄 추궁 같은 사실무근의 반일 활동을 하는 재일코리안이야말로 일본의 적이 아닙니까?”(p57~8)..... 젊은이들이 직장이 없는 것도, 생활보호 지원금이 끊긴 것도, 재일코리안과 같은 외국 국적 주민이 복지나 고용정책에 무임승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을 뿐이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외국인을 약탈자에 비유하는 단순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p60)」

  일본의 재특회는 그리 놀라운 현상은 아니다. 이미 20C 초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파시즘이 그랬고, 다시 돌아온 유럽의 네오파시즘 역시 그러하다. 현실은 단순한데, 원인은 복잡하다. 혹은 원인은 멀리 있고, 해결할 방법은 없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찾는 것 보다는 보이는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 훨씬 간단하다. 비록 그것으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해도, 현실이 달라 보이기는 하고, 어두운 삶이 갑자기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2. 전치된 계급투쟁

 

 

  「“우리는 일종의 계급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특권에 대한 비판이고, 엘리트 비판입니다.” “원래 좌익은 사회의 엘리트잖아요. 예전의 전공투 운동도 사실은 엘리트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다들 특권계급이었잖아요. 차별이다 뭐다, 우리한테 따지는 노동조합도 다 엘리트에요. 그렇게 잘사는 사람들이 없어요.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엘리트들이 재일코리안을 비호해 온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일특권 문제에 경각심이 없는 거고요.” 여기서 ‘계급투쟁’이라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비주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을 비엘리트라고 규정함으로써 특권을 가진 자들에 대한 복수를 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p60~61)」

  나도 재특회의 입에서 나온 ‘계급투쟁’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지젝에 의하면 계급투쟁이 맞기는 하다, 전치된 형식으로서의.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순수한 우파 인종주의처럼 보이는 그런 요소들조차 사실은 전치된 노동계급의 항의 형태인지 주시해야 한다. 물론 고용위기를 야기하는 외국 노동자들의 유입을 중단하라는 요구에는 인종주의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공산권 국가들로부터 흘러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결과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주노동력의 유입은 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억제하기 위한 자본주의 전략 중 일부이다. 이것이 미국에서 부시가 노동조합의 압력에 굴복한 민주당보다 멕시코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합법화에 더 열심이었던 이유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은 오늘날 ‘계급투쟁’은 한물 간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로부터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신비화시키는 것에 대칭적으로 “아이 씻은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듯이, 다문화주의적 개방성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은 은폐하고 그것을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와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에 대한 단순한 주장은 반-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가장 은혜로운 형식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01~2」

  일본의 재일코리안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식민지인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지만, 지금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런 역사에 대한 인식이나 책임이 없다. 이 책에 의하면 오히려 그런 역사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여하튼 이들의 위기의식은 재일코리안 뿐 아니라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국인 등의 외국 이주민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의 외국 이주민들 문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노동자 수도 2011년에 이미 130만명이 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정확한 수치는 찾기 힘든 것 같다. 불법 체류자 수가 상당할 테니)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취업하는 노동현장에서는 우려와 분노의 목소리가 나온 지 이미 오래다.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들은 곧바로 임금 하락과 일자리 경쟁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분노는 보이지 않는 자본의 손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자리를 뺏어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로 향한다. 계급투쟁이 전치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은 진정한 적인 자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바뀌어 버린다. 이것이 적대의 신비화이다.

  재특회가 ‘특권’이라는 단어를 매개로 재일코리안과 일본의 엘리트 및 좌파를 연결 짓는 단순함은 우습지만, 엘리트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우리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여기서 내가 떠올린 것은 물론 일베다. 솔직히 나는 일베를 잘 모른다. 게시판에 들어가 본적도 없고 그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들어 본 적도 없다. 다만 그들이 재특회와 비슷할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그들은 아마도 ‘루저’일 것이다. 사용하는 단어나 표현의 저급함을 보면 그들의 학력 인증 소동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조금 현학적인 용어를 들이댄다면, 아마도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 part of no part’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은 재특회와 같이 엘리트를 미워하고 좌파를 증오한다. 그리고 관용(똘레랑스) 따위의 정치적 올바름(PC)을 조롱한다. 다문화주의적 관용이야말로 반-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지젝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을지라도, 다문화주의에 의해 은폐되어 버리는 자본의 논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특회나 인종주의자들의 ‘관용’에 대한 조롱은 엘리트 좌파가 은폐하고 있는 이런 사실을 자신들도 모른 채 폭로 하고 있는 셈이다. ‘관용 따위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 물론 그런 다음 그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돌진한다. 돌격! 재일코리안. 돌격! 종북이.

 

 

3. 좌파적 꿈의 부재

 

 

  「“어쩐지 학력이 높고, 어쩐지 월급이 많고, 어쩐지 보호받고 있다, 가해자들에 대한 공통적인 이미지죠.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재특회 회원 대부분이 이런 가해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처지라는 사실인지도 모릅니다.”p344 ....이들 가해자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안정된 직장을 독점하고, 누군가가 지켜 주고, 발언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대변해 주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도 듣기 좋은 인권이나 복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뿐이다. 약자의 편인 척하면서 자신들은 편한 장소를 독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유함까지도 독점하고 있다. 위선자이며 약탈자이다.p345...“그런 불만과 불안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 게 재특회라고 생각해요.” p345」

  재특회라는 단어만 없다면, 이건 우리 사회가 소위 강남좌파에게 가지는 반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좌파가 진짜 좌파인가를 떠나서, 좌파는 왜 이렇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까? 답하자면, 좌파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훈은 분명하다.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이 좌파적 꿈의 부재라는 공백을 채우고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14」

  우리나라 역시 좌파는 파산했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우리가 본 것은 비전도, 능력도, 도덕도 상실한 추악하고 무능한 좌파였다.

  「“...지금 좌익의 어디에 매력이 있습니까? 반쯤 체제화된 좌익보다 아나키한 매력으로 가득 찬 우익이 젊은이들의 위험한 욕구에 훨씬 부응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장래의 전망을 발견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자극으로 가득 찬 운동이 재미있죠. 뭐, 일본인의 지적 수준이 가장 낮은 시기에 인터넷을 매개로 우익만 성장한 것은 불행입니다만.”p348... 지금의 좌익은 ‘지키기’만 할 뿐인 운동이다. 평화를 지켜라, 인권을 지켜라, 헌법을 지켜라, 우리 직장을 지켜라. 재특회 같은 신흥 보수 세력은 그것들을 모두 의심하고 ‘쳐부숴라.’라고 호소한다. 좌익이 보수가 되고 보수가 혁신이 된 ‘역전 현상’이 생긴 것이다.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이 변혁의 편에 서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p348」

  「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외국인을 약탈자에 비유하는 단순한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찾으려는 것은 일본인인 자신을 지켜 주는 강한 ‘일본’이다. 원래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흡수하는 기능을 해온 것은 좌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좌익이 전혀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p346~7」

  재특회의 발흥은 좌파의 실패를 증언한다. 발터 벤야민의 “매 경우 파시즘의 발흥은 실패한 혁명을 증언한다.”라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좌파가 동원할 수 없었던 혁명적 잠재력, 불만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p148) 문제는 재특회가 아니라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 현 사회에 대한 불만을 누가 어떻게 조직하는가 하는 점이다.

 

 

4. 포퓰리즘의 긍정적 기능 : 민주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요구

 

 

  재특회의 활동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보통 포퓰리즘은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위험하고 파괴적이고 무질서하다. 그런데 기존의 체계, 기존의 법질서 아래에서는 절대로 ‘잘 안 풀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정답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쳐부수’는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깨버리려는 이들의 욕구가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계몽된 자유주의-테크노크라트 엘리트에게 포퓰리즘은 고유하게 원-파시즘적인 것으로, 정치적 이성의 붕괴이자 맹목적인 유토피아적 열정의 분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폭동으로 보인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15」

  국가라든가, 국익이라는 말만 나와도 파시즘 운운하며 펄쩍 뛰는 사람들이 있다. 집단적인 열광은 언제나 광적인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특히 황우석 사태와 심형래의 디워 논쟁을 거치며, 그런 의심은 더욱 공고해 졌다. 집단적인 열광, 광적인 열정의 분출은 그렇게 나쁜 것인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기억해 보자. 플로리다에서의 부정 선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는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취지로 부시를 차기 대통령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가 형식적 법치주의와 관련된다.” 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 ... 플로리다의 예는 그럼에도 민주주의 안에 계속 ‘대타자’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든 복종해야 하는 선거 규칙이라는 절차적 ‘대타자’ 말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이 중지시키는 것이 바로 규칙에 대한 그 무조건적 의지, 바로 ‘대타자’이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언제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파괴적이고 위협적인 이유이다. 만약 선거가 조작되었다면 ‘인민의 의지’가 강제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경고. 그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압력의 위협 말이다. 심지어 선거를 통한 권력의 정당화가 존중되더라도 선거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만 할 뿐이라는 것, 선거는 그 실체적인 가치가 다른 데 있는 정치적 과정을 공고히 해 줄 뿐이라는 태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398」

  그런데 민주주의에는 두 가지 ‘근본적이고 해소 불가능한 ’ 측면이 있다. 하나는 엘 고어를 승복하게 만든 민주적 절차, 민주적인 제도이다. 그런데 이 제도를 중지시키는 또 하나의 민주주의가 있다.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평등주의의 논리.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안이 (형식적)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통과되었을 때, 그것을 중지 시킨 것은 국민들이 법 절차를 넘어 요구한 무조건적인 민주주의였다. 민이 주인이라는 원칙. 그 때 가장 널리 불리고 가장 소리 높여 외쳐진 구호는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였다. 이것은 헌법이라는 법질서에 등록된 제1원칙이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법질서 위에 있다. 어떤 법적 질서나 제도라도 국민의 뜻에 반하게 되는 경우, 그 질서와 제도는 즉각적으로 중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포퓰리즘의 긍정적 차원은 민주주의적 규칙들에 대한 잠정적인 중지에 있다. 민주주의는 - 오늘날의 일반적 의미에서- 무엇보다 형식적 법치주의와 관련된다. 민주주의의 최소 정의는 적대가 논쟁적 게임으로 흡수되는 것을 보증하는 어떤 형식적 규칙들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397」

  규칙들에 얽매인 민주주의를 중지시키고, 새로운 규칙을 위한 정치적 논의를 촉발시키는 것이 포퓰리즘의 긍정적 의미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에는 반드시 인민people의 폭발적 분노, 열광적 지지, 광적인 헌신이 뒷받침 된다. 그것만이 오로지 인민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채운 십만의 촛불 행렬이 집단적인 열광, 광적인 열정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5. 포퓰리즘의 이론적 옳지 않음

 

 

  그렇다면 포퓰리즘은 우리가 채택해야 할 올바른 운동의 형식인가? 지젝은 포퓰리즘이 ‘실천에서는 (가끔씩) 옳지만, 이론에서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거리로 나온 넷우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재특회에서 만난 한 여성은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재일코리안’이라고 진지하게 믿고 있더군요. 한편에서는 조선인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라고 욕하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그런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받고 있는 일본인은 정말로 한심한 거죠. 그런데 그런 모순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저 역시 한때는 재특회의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인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공격하기 좋은 목표를 찾은 데 신이 났는지도 모르죠. 재일조선인은 불쌍한 약자이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에 얽매여 왔던 우리에겐 터부를 깨는 쾌감이 있었어요. 비뚤어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저 자신도 터부를 깨뜨림으로써 세상의 권위나 권력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198」

  「그들이 가진 분노의 메커니즘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치관이 혼돈스러운 시대에 아이덴티티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겁니다. 사회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질 수 없는 불안 속에서 간신히 국민적 아이덴티티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죠. p346」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주장에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유도 알지 못한다. 혼돈 속에서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해 준 것은 또렷하게 제시된 적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구성적인 ‘신비화’가 있다. 그것의 기본 제스처는 상황의 복잡성과 대면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 그것을 유사-구체적인 ‘적’의 형상과의 분명한 투쟁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정의상 부정적인 현상, 거절에 기반한 현상, 무력함의 승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03~4」

  「포퓰리즘은 궁극적으로 항상 평범한 인민의 좌절과 격분에 의해, “나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 멈춰야 해!”에 의해 지속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이해에 대한 거절, 복잡성에 대한 격분, 모든 혼란의 책임을 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의해 포퓰리즘은 지속된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줄 어떤 행위자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 이 앎에 대한 거절에, 포퓰리즘의 고유하게 물신주의적인 차원이 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23~4」

 

 

6. 앎에 대한 거절

 

  우리는 사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주는 어떤 행위자’의 가장 성공적이며, 가장 위험한 사례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나꼼수가 우리에게 심어준 환영이 그것이다. 가카만 물러나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모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는 환영은 달콤한 허상이었으나 우리는 열광했다. 나꼼수의 성공비결은 포퓰리즘의 물신주의적 특성을 완벽하게 활용한 것에 있다. 상황의 복잡성을 가지 쳐내고, 가카라는 분명한 적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닥치고’ 가카에게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우울한 현실의 내재적, 구조적 문제는 은폐되고, 모든 원인은 가카라는 특수한 개인의 탐욕과 무지에 돌려졌다. 그러나 비록 나꼼수와 문재인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해결방법이 요원한 원인을 파헤치기 보다는, 모든 책임을 적에게 떠맡기는 편리함을 선택했다. 우리 행동의 바탕은 바로 이 ‘앎에 대한 거절’ 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포퓰리스트들에게 사실 혹은 진실을 제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재일코리안에게 아무런 특권이 없다는 사실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NLL포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 같은 것은 그들의 행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물신주의란 사고의 역작용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재일코리안이 일본인의 권리를 탈취하기 때문에 일본인의 적인 것이 아니라, 재일코리안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모두 일본인의 권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인식이 그들의 사고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재특회와 함께 토론해 보고 싶었다는 재일코리안이 막상 그들의 시위를 눈앞에 대하자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는 고백은 당연하다. 만약 재특회 회원이 이 재일코리안과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는 이 재일코리안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총코는 죽어버렷!”이라고 외치며 거리를 누빌 것이다. 어떻게? 일상의 선량한 이웃 유대인을 둔 반유대주의자의 이야기가 이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이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의 선량함과 사악한 유대인이라는 간극에 당황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추론에 이렇게 대답한다.

  「 그의 대답은 이러한 간극, 이러한 어긋남 자체를 반유태주의를 위한 논증으로 돌리는 것이리라. “당신은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아느냐? 그들의 진짜 정체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은 일상적인 겉모습의 가면 뒤에 그것을 숨기고 있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본성을 숨기는 이중성이야말로 유태인의 근본적인 습성이다.” 바로 이렇게 처음 보기에 그것과 모순되는 듯한 사실도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위한 논증으로서 기능할 때에야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정말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p95<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7. 반동적 행위와 능동적 행위

 

  그렇다면 적대는 이데올로기가 만든 허상이라는 것인가? 적과의 투쟁, 계급투쟁과 같은 대의에의 헌신은 언제나 파시즘으로 귀결된다는 뜻인가?

  「미친 주장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히틀러의 폭력은 ‘본질적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 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감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히틀러의 매혹에 반대해야 한다. 물론 그는 사악한 인간이고 수백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정적인 용기를 가지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이 추구한 것을 실행한 인간이라는 매혹 말이다. 요점은 이것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매혹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매혹이 틀렸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실제로 사태를 변화시킬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그의 모든 행위는 아무런 실재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반동 행위이고, 그가 상연한 거대한 혁명의 스펙터클은 자본주의 질서가 지속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뿐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31~2」

  여기에 반동적 행위(리-액션, 수동적)와 진정한 행위(액션, 능동적)의 구분이 있다.

  「이것은 포퓰리즘적 폭력의 선동자가 하는 것이 아닌가? 속고 있는 군중의 분노를 (재)촉발하기 위해 그들은 자살을 범죄로 곡해한다. 즉 그들은 일종의 자살인 파국(내재적인 적대의 결과)을 외부의 범인이 일으킨 것처럼 단서를 조작한다. 이것이 진정한 급진적-해방 정치와 포퓰리즘 정치가 다른 이유이다. 이 상황에 꼭 맞는 니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해방적인 정치는 능동적, 즉 자기 비전을 강제하는 반면에 포퓰리즘 정치는 근본적으로 반동적, 외부의 침입자에 대한 반작용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455」

  재특회는 일본 내부의 정치-경제적 문제 혹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문제를 재일조선인이라는 외부의 침입자가 일으킨 범죄로 바꾸어 버린다. 이들은 스스로 권력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능동적으로 행위 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순을 구조화하고 있는 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볼 지혜도, 파괴할 용기도 없다. 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외부의 희생양, 재일코리안이다.

  「회원들 중에는 세상의 모순을 풀 열쇠를 모두 재일코리안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치도, 경제도, 재일코리안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기도 한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재특회야말로 학대받는 사람들의 편이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p356」

  적대는 존재한다. 적은 조화로운 사회를 파괴하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라, 사회 안에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사회는 처음부터 조화롭지 않았고, 언제나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본인의 일자리는 재일코리안에 의해 탈취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작동 논리에 의해 언제나 항상 부족한 상태를 유지하게 구성된 것이다. 이 적대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는, 재일코리안을 수 만 번 절멸시킨다고 해도 결코 재특회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

 

 

8. 재특회의 토양 : 주변화는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찌질한 인간들, 사회의 루저, 쓰레기들은 무시하거나 주변화하면 자연히 고사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방송이나 과도한 관심이 이들을 키운다고 비판한다. 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 역시 ‘사쿠라’라는 보수 위성 방송국이 스타로 키워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쿠라이 마코토는 단지 하나의 스타 상품이다. 상품이 성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시장의 수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적으로 들어난 사건이 후지TV 반대 시위다. 6천명 이상의 일반 시민이 참가했다는 후지TV 반대 시위는 이 방송국이 한류 드라마를 많이 방송한다는 이유로 일어났다.

  「잘 생각해보면 방송국이 외국방송을 필요 이상으로 방영했다고 해서 이 정도로 대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이상하다. p314」

  「김치찌개가 인기 랭킹 1위로 소개된 것이 어째서 편향인가? 그런 하찮은 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세상에 떠다니는 희미한 ‘반한국’, ‘반북한’의 목소리를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한 것뿐이 아닌가? p314」

  「나는 거기서 재특회의 배경을 본 것 같았다. 후지 TV 반대 시위 참가자들은 돌출된 언동을 하지 않았지만, 그 도착점은 재특회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재특회처럼 과격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낳고 있는 것은 이렇게 세련된 사람들의 어딘가 우울한 분노다. 재특회의 배후에 일반 시민이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p314」

  이 배후에 있는 일반시민들의 ‘우울한 분노’는 언제라도 요원의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다. 재특회나 사쿠라이 마코토는 단지 특수한 불씨일 뿐이다. 줄지어 서 있는 일반 시민들이 ‘앎에 대해 거부’하고, 재특회가 내던진 재일코리안이라는 적의 형상에 분노를 폭발할 때 파시즘의 광풍 속으로 빠져 드는 것은 한 순간일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 위험이 일본보다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사회에 분노하는 사람, 불평등에 분노하는 사람,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사람, 동지를 원하는 사람, 도피처를 원하는 사람, 돌아갈 장소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재특회는 유인하듯이 불러들인다. p356」

  진중권 같은 지식인이 일베 현상을 루저나 주변화 시켜야 할 쓰레기로 조롱하며 유희하고 있는 동안, ‘대량으로 줄지어 서 있는 일반시민’을 ‘유인하듯이 불러들이’며 사회를 위험하게 움직이는 자들은 바로 이들 재특회나 일베, 바로 우리의 ‘이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혹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두려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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