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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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라는 이름은 내게 늘 이른 봄의 새벽 찬 공기를 느끼게 한다.  언젠가 배우 김혜자가 '깎쟁이 같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웃음이 터지면서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던 무렵 새벽 출근 준비 시간에 틀어 놓았던 TV 뉴스 속의 손석희는 가끔 싸가지 없어 보이도록 쌀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벽의 차가운 공기는 정신을 맑게 일깨우고 가야할 길을 서두르게 한다.  


몇 가지 이유로 나는 웬만한 책은 소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 서재를 책장삼아 심심할 때면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남긴 글들을 통해 되살린다.  밑줄을 그어야 하거나, 일하는데 필요하거나, 죽을 때 같이 태우고 싶은 몇 권의 책들 이외에는 남은 책이 없다.  


얼마 전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손석희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손석희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을 것이다. 우리 지역에도 희망 도서 신청을 하면 신간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도서관은 있다.  이 책을 구매한 이유는 한가지다.  고마움이다.  마지막에 이런저런 소문들이 떠돌긴 했지만, 그는 이제 거의 유일하게 남은 선한 의지를 가진 올곧은 지식인이다.  나는 이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오랜 노고에 대한 소리없는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책은 재미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 시간들, 그 장면들이야말로 우리가 막 시작한 21세기를 강타했던 연이은 태풍들이 아니었던가. 21세기가 끝나갈 즈음에는 이 태풍들도 역사의 한 장으로 고요히 잦아들겠지만, 함께 울고 함께 외치고 함께 분노했던 우리에게는 언제까지나 생생한 현실이 될 것이다. 동시대인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 폭풍우 속의 외로운 선장처럼 끝내 방향을 잃지 않으려던 그의 노력과 고뇌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요즘 툭하면 플라톤을 떠올린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니 플라톤주의자라고 하기는 외람되지만, 플라톤이 옳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모르기도 하지만 이것저것 구체적인 이론은 다 떠나서 플라톤이 최고의 이데아로 삼았던 善, 올바름이 우리 삶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고 고개가 끄덕여 진다. 우리 발걸음이 올바름을 향해 있지 않다면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아봤자 우리가 도달하는 곳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올바름의 이데아가 실재하든, 하늘의 본으로 떠있다고 단지 가정하든 그 별빛이 없는 한 우리는 그저 힘센 놈이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는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거기가 기원전 5세기의 희랍이든 기원후 17세기의 영국이든 그리고 AI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공존하는 21세기이든 말이다. 그 야만의 정글을 사는 것은 짐승이지 인간은 아니다. 


손석희는 그의 저널리즘을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로 요약한다. 이 이데아가 JTBC라는 종편을 한때 가장 품격있는 매체로 만들어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도 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면 안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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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20년이 잠깐 사이 흘러간다.  지구에서 물리적 시간이란 객관적이겠지만, 각자가 지각하는 시간의 빠르기는 다르기 마련이다.  2022년은 아직 어색하지만 2002년은 그립고도 생생하다.  내 인생의 어디론가 돌아갈 수 있다면 그해 노란 물결 속으로 팔랑팔랑 뛰어들고 싶다. 


그리고 그즈음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들뢰즈, 가타리,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이 유행이었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라는 알쏭달쏭한 책을 시작으로 지젝을 참 열심히도 읽었다. 아마 지젝이 쉬웠다면 그렇게 독파하진 않았을 텐데 다작으로 유명한 지젝의 비슷비슷한 책들을 한권도 빼지 않고 번역되는 족족 읽었던 것은 두 번 세 번 반복해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철학사를 읽고 있었고, 철학자의 원저에도 욕심이 생겨났다. 


<향연>은 맨 먼저 추천 받았던 철학 책이다.  무려 플라톤인데 쉽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쉽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다.  다소 기이했다.  그러다 우연히 강유원 선생의 <라디오 인문학> 이란 프로그램에서 <향연> 강의를 들었다.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그때 알게 되었다.  




재작년에 고전 읽기 모임을 하면서 <향연>을 다시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2년 간 다들 그러했듯 코로나19가 계획을 엉클어 버렸다.  연말연시 무엇을 할까 하다가 <향연>을 택했다.  플라톤 아카데미의 이태수 교수 강의를 먼저 들었고, 역자 강철웅의 작품 해석도 함께 읽었다. 이 강의도 2013년에 있었다. <라디오 인문학>도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다. 


<향연>을 대표하는 내용은 소위 '에로스의 사다리'이다. 소크라테스가 예전에 디오티마라는 여성에게 들은 이야기를 향연의 참석자들에게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10여 년 후에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이렇게 들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다시 들려주는 복잡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해지고 전해져서 결국 2,400여 년 후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오래 살아 남은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니, <향연>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여야 하는데, 그 배경을 알지 못하면 사실 낯선 시공간을 사는 우리가 직관적인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https://youtu.be/MGLuj4KjnF8



이태수 교수의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는 순간 막가는 인생인 된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갈망)"인데, 아름다움이란 몸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해서 영혼의 아름다움, 앎의 아름다움, 그리고 '갑자기' 직관하게 되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계서화 되어 있다.  에로스의 사다리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름다움 그 자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아름다움이란 영혼의 아름다움과 앎의 아름다움 그 언저리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삶이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마치 거울 반사처럼 타인들을 통해 내게로 되돌아 온다.  휘번뜩이는 눈빛과 마구 내뱉는 말들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드르고 있는 사람은 정작 자기 영혼의 추함을 모르고 있을 터이다. 그 무지의 추함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최고의 권력을 얻더라도 그것이 정작 어떤 아름다움으로도 향하지 않을 때, 인생도 국가도 막가게 될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라디오 인문학 : Apple Podcasts에서 만나는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 (주말 뉴스쇼 박명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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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베르길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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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사는 지중해 세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리스(희랍)와 로마는 각각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에서 비슷한 시기에 고대사를 시작하지만, 먼저 지중해 세계를 장악한 것은 희랍의 폴리스들이다. 





 






기원전 5세기 전성기를 맞았던 희랍은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멸망했지만 그 문명은 알렉산드로스의 거대한 제국을 엎고 아시아의 인도까지 전파되었다. 










기원전 3세기 말에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로마는 헬레니즘 세계를 차례로 정복하며 기원전 1세기 말이 되면 지중해 세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등등 온갖 이야기거리가 넘쳐나던 혼란과 팽창의 시기를 일단락 짓고 로마를 제국으로 변환시킨 것은 기원전 27년 무렵의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 이후 황제를 칭하는 호칭이 됨)이다.  로마는 500년의 공화정 시대를 마감하고 500년 지속될 제국의 시대를 연 것이다. 









공화정을 사랑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제국과 황제를 받아들이고 지지하도록 동원된 것이 새로운 로마에 대한 건국 신화였다. 









일종의 '로마식 용이어천가'를 위해 선택된 시인이 베르길리우스이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그의 <아이네이스>를 구상한다. 












로마가 제2의 트로이야가 되면서 700여 년 로마의 짧은(?) 역사는 500여 년이 더 늘어나고, 로마제국은 1,200여 년 전에 결정된 신들의 뜻에 따라 펼쳐지는 위대한 역사로 재탄생한다. 






<아이네이스>는  '신의 아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라는 이 한 구절을 위해 창조된 거대한 신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것들은 어쩌면 호메로스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그리스 신화이다. 로마 신화란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라틴어로 바꾸어 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역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축약하고, 주인공을 살짝 바꿔 놓았을 뿐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다.  하도 오래된 고전이라, 그것도 라틴어 고전이라 감히 비판할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베르길리우스의 발상에는 누구도 생각하기 힘든 기발함이 있다.  로마의 오랜되 조상을 물색하면서 승자가 아니라 패자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네이스>는 무너지는 트로이아 성을 탈출하는 일가족에서 시작한다. 








천병희 선생의 '옮긴이 해제'를 보면 전체적인 내용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총 12권 중 앞의 여섯 권은 <오뒷세이아>를, 뒤의 여섯 권은 <일리아스>의 '전통을 따랐다.'라고 쓰셨는데, 일반 독자라면 그냥 모방했다라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각별하겠지만, 우리 같은 서양 전통과 상관없는, 물론 근대 이후 상관없이 살게는 힘들게 되었지만,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독자들은 <아이네이스>를 읽기보다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는 것이 훨씬 낫다. 어차피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지 않고는 <아이네이스>를 읽기가 쉽지 않다. 호메로스가 훨씬 유려하고 풍성하고 사색적이다.  







트로이야를 탈출한 아이네아스 일행은 크레타와 시켈리아를 거쳐 카르타고에 도착한다.  카르타고에서 여왕 디도의 요청에 따라 트로이야 전쟁의 마지막 날과 고난의 여정을 들려 주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아이네아스는 신들이 정한 운명에 따라 디도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하고 디도는 분노와 절망으로 자살한다.  시켈리아에 들른 아이네아스는 아버지의 장례식 경기를 치른다. 장례식 경기는 <일리아스>의 파트로클로스 장례식 경기와 흡사하다. 

  



 







<아이네이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6권일 것이다.  물론 <오뒷세이아>의 '전통을 따라' 저승이 씌어 졌겠지만, 베르길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건국 신화를 창조한다는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하이라이트 부분이기 때문이다. 







트로이야에서 함께 탈출한 아버지 앙키세스는 카르타고에 도착하기 전에 잠시 머무른 시켈리아에서 죽었다. 아이네아스는 저승으로 아버지를 찾아가 제2의 트로이야 즉 로마의 건국과  앞으로 펼쳐질 1,200여 년의 역사에 관해 예언을 듣는다. 







로마 시민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일어난 역사이지만 <아이네이스>를 통해 마치 이 역사가 1,200여 년 전에 신이 정해 놓은 위대한 로마의 운명임을 집단적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로마는 이렇게 깜쪽같이 신화를 창조하여 제국의 정당성을 깊이 뿌리 박았다. 






 


7권부터 12권은 이탈이아의 '라티움'에 도착한 아이네아스 일행이 정착하기 위하여 원주민들과 전쟁을 하는 내용이다.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의 건국 신화에는 전쟁이 없을 수가 없다. 7권의 제목, '예언의 땅'도 그렇고, 전쟁의 과정을 읽으며 이스라엘이 자꾸 떠올라 심란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는 달리 두 민족이 화합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는 한다.  







아이네아스 일행이 처음 도착한 곳은 라티움이라는 곳이다.  왕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정착하려 했으나 원주민 구혼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전쟁을 하게 된다.  아이네아스는 로마로 동맹을 맺으러 가고, 에트루리아인들까지 규합하여 라티움으로 돌아와 전쟁을 한다.  트로이야인들이 라티움에 정착하기 위해 라티니족들과 운명을 건 전쟁을 벌인 것이다. 


호메로스의 전통을 따라 양 진영의 여러 영웅들이 등장하고, 신들이 개입하여 전쟁의 양상을 바꿔 놓기도 한다. 12권은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결투처럼 아이네아스와 투르누스가 일대일 결투를 벌이고, 아이네아스가 투르누스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는 것으로 끝난다. 


아이네아스는 아킬레우스를, 투르누스는 헥토르를 모방하였으나 시쳇말로 급수가 다르다.  아이네아스는 아킬레우스처럼 숭고하지 않고, 투르누스는 헥토르처럼 우아하지 않다.  아킬레우스의 방패가 우주를 담았다고 하는 것처럼, 아이네아스의 방패는 이탈리아의 역사를 담고 있다. 












<아이네이스>의 각 권 제목은 독자의 편익을 위하여 역자가 붙인 것이다. 

<차이나는 클라스 144회>  https://tv.kakao.com/v/40641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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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최후의 날에 관한 대화편이 <파이돈>이다. 철학자의 마지막답게 매우 철학적이다. '철학적'이라는 말에 여러 함의들이 있겠지만, 나같은 일반인에게는 보통 어렵다, 사변적이다 등을 의미한다.  




어려운 <파이돈>을 좀 이해해 보기 위해 『철학 고전 강의』를 뒤졌다. 2016년 출판되었을 때 샀던 책인데, 강유원 선생의 고전 강의 시리즈 중 가장 어렵지만, 철학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 꽤 열심히 읽었다. 물론 관심이 이해를 길러주는 것은 아니어서 뭣도 모르고 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철학 중에서도 형이상학만을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플라톤의 <파이돈>이다. 플라톤이 손가락을 하늘로 가리키고 있는 라파엘로의 저 유명한 그림,  <아테네 학당> 덕분에, 플라의 철학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상이 아닌 저 너머의 세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어원이야 어찌 되었건 '너머의 세계' 가 metaphysics, 형이상학이다.  『철학 고전 강의』 의 표제를 수식하는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에서 추측할 수 있듯 저 너머의 세계는 무한자의 세계이다. 유한자는 무한자를 감각할 수 없지만 사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형이상학을 존재케 하는 것 같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없기에 오로지 이성으로만 사유 가능한 세계에 대한 탐색은 원대하지만 진리로 인정 받기가 쉽지는 않다.  이성이 이 세계를 탐색한다 해도 이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믿음으로만 열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들에게 형이상학이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일축되는 것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파이돈>도 그렇다. 그냥 읽으면 무슨 소리인가 싶다. 독배를 마시는 날,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사람들이 감옥 안에서 소크라테스와 나누는 대화가 죽음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차마 그를 보내기 힘든 추종자들은 슬픔에 가득 차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마침내 사유로만 추론하던 '너머의 세계'에 직접 도달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듯하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며 시작된 대화는 철학과 죽음, 영혼의 불멸성, 형상과 이데아, 기억 상기설 등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알려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들로 전개된다.  


그 과정은 소크라테스가 늘 그랬듯이 변증술을 통한 것이다.  <파이돈>에서 펼쳐지는 논박술과 산파술, 즉 변증술은 사실 내 눈에는 궤변에 가깝다. 현대의 과학적 관점으로는 말도 안 되고, 여지없이 반박될 것이 뻔한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개개의 논박들이 진실인가 아닌가라기 보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들 즉 그 방법론이 철학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가 아닐까 싶다. 또한 그것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도 중요하다.  


오늘날 지구상의 반 이상의 인구가 믿고 있는 '종교' 역시 비종교인의 입장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영혼론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종교인들이 모두 비이성적인 것도 아니고, 비과학적인 것도 아니다.  각자의 방식대로 종교는 뚜렷한 목적을 제시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세계를 읽는 방식을 제시한다.  사실 최고의 형이상학은 종교가 아닐까. 



『철학 고전 강의』는 얼핏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파이돈>의 대화에서 읽어 내야 할 의미들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길잡이가 된다.  왜!,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불멸해야 하고, 그 영혼은 형상에 대한 확실한 앎을 가져야 하고, 인간은 그 앎을 기억해내야 하는지, 그 모든 형이상학적 논변의 기저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동체가 좋음(올바름)위에 단단히 뿌리 내리기를 염원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간절한 신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1권 116e~117a>


<1권 118a>



우리의 철학자는 영원한 형상의 세계인 이데아로 가뿐하게 날아 올랐지만, 현실 세계의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가장 훌륭하며, 가장 지혜로우며, 가장 정의로운 사람, 소크라테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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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었다면  <크리톤>과 <파이돈>이 궁금하게 마련이다.  사형 확정 이후 독배를 마시기까지 소크라테스가 무엇을 했길래 플라톤은 두 편이나 되는 대화편을 쓴 것일까?



아주 짧기도 하거니와 순서상으로도 먼저 읽어야 할 <크리톤>에 대해 정리해 둔다.  고전 스타디에서도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끝나면 읽기로 계획되어 있다.


나는 '현대 지성' 출판본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희랍어 완역본인데,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향연>이 함께 수록되어 있고, 책값은 싼 편이기 때문이다.  박종현 번역을 사지 않은 것이 좀 아쉽기는 하다.  소위  '소크라테스 최후의 날들'이라는 네 편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조금 더 비싸더라도 선택했을 것이다. 박종현 선생은 플라톤 전공자이고, 대화편을 거의 대부분 번역하고 계신다. 




번역본에 대한  '리브레 위키'의 깔끔한 도표가 있다. 


플라톤 - 리브레 위키 (librewiki.net)




<크리톤>의 내용은 간단하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은 아테나이의 연례 행사 때문에 연기되었다. 델로스로 태양신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러 간 사절단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행사에 부정이 탈까봐 이 기간에는 사형 집행을 하지 않는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이다.  델로스로 갔던 배가 돌아 온다는 소식을 들은 크리톤이 애가 타서 감옥으로 달려 온다.  소크라테스를 설득하여 탈옥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늘 하던 대로 탈옥이 올바른 행위인지 아닌지를 먼저 검토한 후에 그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크리톤은 친구의 논박을 이기지 못하고 탈옥시키기를 포기하게 된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설득하기 위한 전략으로,  소크라테스가 그대로 독배를 마시게 되면 살아 있는 친구들이 시민들로부터 욕을 먹게 될 것이라고 압박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돈 때문에 친구를 버렸다고 자신을 비난할 것이라는 말이다.  당시 아테나이에는 사형 집행을 모면할 수 있는 편법들이 있었고,  이것들은 거의 돈으로 해결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핵심적인 사상이 등장한다.  다수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강유원 선생의 강독에서도 아테나이 민주정의 타락상을 대중 독재로 설명했다. 민주정은 '어떤 사람, 어떤 집단의 의견이 다수의 것으로 확인되면 국가 정책으로 채택'하는 체제인데, 이때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올바르지는 않다는 것이 민주정의 아킬레스건이다.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에는 당대 소피스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다. "그 자는 군중들의 갈채와 자신의 어리석고 방종한 혀에 의존했는데 청중에게 재앙을 안겨 줄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이 있었어요." 


다수가 옳다고 믿도록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테나이 민주정을 유린하고 있었고, 그 최대의 증거가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우게 만든 '오래된 소문' 즉 비방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다수의 견해를 주장의 근거로 들고 나오는 크리톤에 대해 단호히 반박하며 중요한 것은 현명한 사람들의 올바른 의견이라고 말한다. 



다수에 대한 비판이 끝나자, 소크라테스는 오로지 정의의 관점에서 탈옥에 대해 논박해 보자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탈옥이 법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행위임을 밝힌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재판정에 나가지 않고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고, 재판정에서 배심원들에게 읍소해서 동정에 호소할 수도 있었고,  대안 형량으로 추방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받아 들였고, 재판정을 자신의 신념을 설파하는 마지막 대중 연설의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짧은 시간에 자신에 대한 오래된 비방을 해소할 수 있을 만큼 재판관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혹은 하지 않았고,  재판정은 아테나이의 법에 따라 정당하게 판결을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의 통치 제도와 법 자체를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아테나이는 다수 시민의 의견에 따라 채택된 법과 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토대를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법과 제도를 움직이는 시민들의 의식, 가치관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정의나 진리와는 무관하게 부와 명성을 좇는 선동가들에 의해 다수 의견이 결정되는 저급한 시민 의식과 그 무지에 대해 질타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 결과가 법이 선고한 사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지만,  시민의 유무죄를 결정하는 시스템인 법과 제도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존중했다. 그가 법정에 나온 이유도 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공정하게 자신을 변론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그 권리를 충분히 행사했다.  적법한 절차에 따른 판결이기 때문에 결과가 불만족스럽다 해도 승복해야 하는 것이 민주정의 규범이다. 


현대의 민주주의도 그렇다.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출되었다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가스통을 들고 청와대로 들어 가겠다는 발상은 민주주의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마도 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런 태도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출처없는 조어를 탄생시킨 배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악법은 마땅히 폐기해야 한다.  다만 악법 때문에 혹은 악하게 이용당하는 법 때문에 법치라는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크리톤>의 요지라고 볼 수 있다.  


2004년에 헌법재판소가  '악법도 법이다'는 준법을 강조하는 사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교육부에 그 내용을 삭제해 주기를 요청했다고 하니,  요즘 학생들은 이런 오해를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내가 읽은 여러 글들에서 공통된 부분은 부끄러움에 관한 것이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라는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라는 것이고, 부와 명성에는 그렇게 노고를 다하면서 영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부끄러움은 모두 자신을 향해 있는 부끄러움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실로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의 권유를 받아들여 다른 폴리스로 달아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평생을 아고라를 누비며 역설한 자신의 말을 배반하는 부끄러운 짓이고, 재판정에 자신을 기소한 비방가들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는 부끄러운 짓이다.  그 부끄러움은 타인들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된다. 


 <크리톤>의 마지막 대화는 이렇다. 


크리톤 : 소크라테스, 내가 할 말이 없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크리톤, 신이 우리를 이 길로 인도하니 이 길을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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