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10주년 한정 특별판, 양장)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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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언어, 가슴 아픈 진실, 역사적 진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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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과 8강의 일부는 보통은 강의의 첫 머리에 놓는 개요에 해당하는 것 같은데,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 일까, 전반부에 먼저 매혹적인 모티프들로 강의를 무르익힌 다음, 중반에 와서 이론적인 개요를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내용은 요약1에서 대강 다루었으므로 8강의 '주님'에 대해서만 간략히 정리하고 다음 강으로 넘어간다. 






고대근동 세계에서 '주님' 즉 주인을 가리키는 단어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바알이고 다른 하나는 아돈이다.  바알은 영어의 owner, 즉 소유주를 의미하고, 아돈은 권위를 가진 참된 주님을 뜻한다.  풍우신인 바알신도 있는데, 이 소유주라는 의미로부터 비롯되었다. 


구약에는 바알과 아돈이 구분되기도 하고, 때로는 혼용되어 정확히 구분되지 않기도 하지만, '야훼'에 대해서만은 철저히 아돈을 사용한다.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관습이어서, '야훼'라고 표기하고, 읽을 때는 '아도나이'라고 한다.  '나이'는 '나의' 라는 뜻이다. 야훼는 아도나이, 즉 나의 주님인데, 나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권위를 인정한 주인이다.  참된 권위란 인격, 행위, 가치관 등에 의해 상대를 감화시킬 때만 획득되는 것이다. 






9강은 밤과 죽음에 대한 설명이다.  구약에서는 해와 달처럼 낮과 밤도 단순한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숭배해서도 안되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밤은 죽음처럼 공포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고대근동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문화권이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이런 생각은 금지에도 불구하고 구약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신약은 로마 통치기 즉 고대근동 세계가 쇠퇴하고,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퍼져나간 헬레니즘 문화가 지중해 전역에 뿌리내린 이후에 희랍어로 씌어진 것이다.  구약이 고대근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처럼 신약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 타나토스는 희랍 신화에서 신들도 두려워하는 존재다. 그런데 예수는 타나토스를 이기고, 밤도 죽음도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은 기존의 불의와 공포에 대항하여 승리하는 세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없는, 대립 자체가 없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다.  노예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노예도 주인도 없는 세상,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노동자도 자본가도 없는 세상,  전에 없던 독특한 사유와 철저히 전복적인 사상이 기독교를 혁명적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10강과 11강은 '산' 모티프를 다룬다.  고대근동은 세계를 세 영역으로 나눈다. 하늘과 지상과 지하이다.  이 세 영역을 연결하는 '세상의 축'이 있고, 그것이 '거룩한 산', 혹은 '창조의 산' 이다. 






신전을 산꼭대기에 짓는 것은 거룩한 산을 오르내리며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지구라트는 산봉우리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계단을 통해서 신들이 승천하거나 하강한다.  


거룩한 산의 신전에서는 신들이 모여 잔치를 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재판을 한다.  신들과 인간들에 대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구약과 신약에서도 산꼭대기는 잔치를 하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신성한 장소이다.  그런데 잔치에 초대받은 존재가 신들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마치 신들처럼 시나이산에 올라 먹고 마신다. 





시온산에서 먹고 마시는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될 것이며,  여기서 주님은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것이라고 예언된다. 





성경은 혁명적 모티프로 가득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나는 비종교인이므로 성경을 통독한 적이 없어서 피상적인 인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예수의 산상설교는 '행복 선언' 이다.  고대근동의 '산' 모티프가 구약으로, 그리고 신약으로 전승되면서, 예수의 가장 핵심적인 선언이 이루어지는 곳이 산임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오르다'와 '내리다'라는 단순한 행위가 맥락에 따라 상징적 의미를 갖듯, 산에 오르다는 무엇인가 중대한 결정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12강은 단순한 우리말, '헛것'으로 깊은 성찰의 시간을 준다.  유일 신앙에서 신은 당연히 한분뿐이다. 다른 신들 즉 다른 종교인들이 모시는 신들은 보통 '우상'으로 불린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반대말은 '헤벨'이다. 헤벨은 '한숨'을 뜻하는데, 훅 내쉬면 없어져 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물론 강사는 현대에서 헛것은 다른 종교를 지칭해서는 안되고 우리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런데도 무엇인 것처럼 사람을 미혹하는 것에 대한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인류는 늘 헛것을 좇아왔다. 그리고 헛것이 되었다. 열왕기의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헛것이 되었다."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뿐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아테나이의 법정에서 일흔의 소크라테스도 이렇게 질타했다. 헛것을 좇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고 말이다. 우리는 그것이 헛것인 줄 알면서도 좇지만 대개는 헛것인 줄 모르면서 삶을 바치기가 일쑤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것이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헛것인 줄을 캐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캐묻지 않는 삶은 삶이 아니다. 평생을 전심전력을 다해 좇은 것이 헛것일뿐이라면 '헛것을 따라다니다가 헛것이 되었다.'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헛것이 어찌 삶이겠는가. 





13강, 14강은 풍우신 이야기다. 인간이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한 이래 비와 바람은 늘 간절한 기원의 대상이었다. 단군 신화에도 환인의 아들 환웅이 풍백,우사, 운사를 포함한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단수로 내려온다. 





 

고대근동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풍우신은 바알신이다. 헛것을 좇지 말라는 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도 바알신을 숭배했다. 대표적인 예가 열왕기의 아합왕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 옐리아는 야훼신과 바알신의 내기를 제안했고, 그 결과 풍우신보다 더 강력하게 비바람을 다스리는 야훼신을 입증함으로써 애훼의 권능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어떤 민족에게나 경외의 대상으로 추앙받는 풍우신의 속성은 그대로 야훼에게도 부여되어 '구름을 타고 오시는' 등의 표현으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마지막 15강의 제목은 "죽은이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있다" 이다.  11월 1일은 기독교의 모든 성인 대축일 All Saints` Day 이다. 이름 없이 죽은 성인들을 비롯한 모든 성인을 기리는 날이다. 뭉뚱그려 말하면 죽은 조상들을 한꺼번에 기리는 날쯤 되는 것 같다. 우리로 치자면 기제 말고 시제다. 


10월 31일이 할로윈인 것은 Hallow 즉 성인,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eve 즉 그 전날이라는 의미가 결합하여 축일 전날을 기념하는 날로 관습화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은 먼지가 되어 우주로 되돌아 가는 것이거나, 저승으로 내려가 조상들과 나란히 눕는 것 혹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잠을 자는 것이거나 먼저 죽은 이들의 영혼과 만나서 캐묻는 삶을 이어가는 것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했다. 무엇이 되었건 혼란한 아테나이의 삶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죽음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마지막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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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까지 넓은 영역을 차지했던 고대근동 세계의 신화는 깊은 성찰과 아름다운 은유로 다양한 민족들의 종교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신화의 탄생지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강력한 제국들이었지만, 주변 약소 민족들도 이를 수용/변용하여 나름의 독특한 신학 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 대표적인 민족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후발 약소국가인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성경 속에 내재된 고대근동 신화의 주요 모티프들은 성경이 하나의 종교적 텍스트를 넘어 인문학적 텍스트로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데 기여했다. 






고대근동학을 전공하는 평신도 신학자 주원준 교수의 <성경과 고대의 신화>는 총 15강이며, 조금 특이하게 강의 개요와 배경은 중간쯤에 가서 7강과 8강에서 요약하는데, 앞서 1강에서 6강까지는 고대근동 신화의 대표적인 모티프인 물, 가시, 달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9강에서 14강까지는 밤, 산, 그리고 풍우신에 대해 고대근동의 신화와 성경의 연관성과 차이점을 설명하며, 15강은 '모든 성인 대축일'로 작고, 약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공경을 표하며 강의를 마무리 한다. 










1,2강 '물'의 모티프는 창조 신화의 핵심이다.  고대근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지 않는다. 처음에 혼돈 즉 물이 있었고, 창조주가 이를 갈라 놓으며 인간이 살 수 있는 세계가 탄생했다.  





구약의 창세기도 동일한 창조관을 갖고 있다.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을 만들고, 궁창을 곧 하늘이라 불렀다. 





창조로 상징되는 '물'을 가르고, 통제하는 사건은 창세기 이후에도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창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모세의 이집트 탈출과 여호수아의 요르단강을 건너는 사건이 대표적인 재창조의 순간이다. 








구약의 '물' 모티프는 신약으로도 전승된다.  신약은 고대근동 세계가 쇠퇴하고 로마의 지배기에 씌어진 성경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모티프는 남아서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예수의 정체성 즉 창조주임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바람과 호수가 잔잔해 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예수가 인간으로서 하느님께 기도를 하여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니라,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물을 꾸짖고 통제하는 행위를 예수가 직접 실행했다는 사실이다. 고대근동에서부터 구약과 신약으로 전승된 '물' 모티프를 알고 있으면,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성경 속의 사람들이 놀라는 그 순간에 우리도 따라서 놀랄 수 있다. 


시공간을 거슬러 공감한다는 것은 독립된 하나의 텍스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고전 속에 켜켜이 싸이고 겹겹이 더해진 수천년의 시간과 드넓은 공간을 경험(겪음)함으로써 비로소 인류의 지혜와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 









3,4강은 길가메시의 '가시'로 시작된다. '가시' 모티프는 어느 것보다 철학적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철없는 영웅이 친구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 구도자가 되어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그 깨달음이 '가시'로 상징되는 진리이다. 




 

하지만 깨달음(영생)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곤하여 잠든 사이에 뱀이 가져가 버렸다.  강사는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고 했지만, <길가메시 서사시>의 판본은 시대를 이어가며 다양한 버전으로 바뀌었고, 최근 출간된 수메르어 완역본에는 길가메시가 돌아와서 도시의 성벽을 세웠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인간의 영생이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성벽에 새긴 이름, 불멸의 명성이다. 







성경의 가시는 신의 현현 혹은 상징이다.  모세에게 신은 불타는 가시덤불로 나타났고, 예수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올랐다.  로마 병사는 가시관으로 예수를 조롱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가시관은 예수가 신임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진리, 영생,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시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왜 최고의 권위 혹은 진리는 가시일까?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는다.' (파테이 마토스) 는 희랍의 오래된 격언이다. 현대의 우리도 알다시피 진리는 고통 없이 깨쳐지지도 추구되지도 않는다.  심연으로 뛰어 들어 가시를 움켜쥐어야 하는 두려움과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는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진리는 나긋하지도 달콤하지도 않고 지키기도 어렵다. 잠깐 잠든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가시는 진리가 그런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 가시를 움켜쥐거나 머리 위에 쓸 수 있는 사람만이 최고의 권위를 얻을 수 있다. 






고대근동 신화에서 5,6장이 다루는 '달'은 별이라는 군대를 거느린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달을 숭배한 흔적은 여러 곳에 있는데, 태음력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유독 초승달이 뜨는 초하루를 중요하게 여겼다.  





성경은 달신 숭배를 금지한다. 그러나 초하루를 특별히 여기는 고대근동의 관습은 성경 곳곳에 남았다. 달신을 숭배하는 것은 금지하지만, 고대근동에서 전해진 오래된 관습은 허용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초하룻날은 안식일 다음으로 특별히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날들은 축일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놓은 것을 보면 그 특별함이 두드러진다. 





창세기의 물,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시, 금지 속에 남아 있는 달신 숭배의 흔적 등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성경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서양 인문학 속의 성경적 요소와 은유를 이해하는 데에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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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들 - 손석희의 저널리즘 에세이
손석희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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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라는 이름은 내게 늘 이른 봄의 새벽 찬 공기를 느끼게 한다.  언젠가 배우 김혜자가 '깎쟁이 같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웃음이 터지면서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다니던 무렵 새벽 출근 준비 시간에 틀어 놓았던 TV 뉴스 속의 손석희는 가끔 싸가지 없어 보이도록 쌀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벽의 차가운 공기는 정신을 맑게 일깨우고 가야할 길을 서두르게 한다.  


몇 가지 이유로 나는 웬만한 책은 소장하지 않는다. 대신 이 서재를 책장삼아 심심할 때면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남긴 글들을 통해 되살린다.  밑줄을 그어야 하거나, 일하는데 필요하거나, 죽을 때 같이 태우고 싶은 몇 권의 책들 이외에는 남은 책이 없다.  


얼마 전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손석희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손석희가 아니었다면 당연히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을 것이다. 우리 지역에도 희망 도서 신청을 하면 신간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도서관은 있다.  이 책을 구매한 이유는 한가지다.  고마움이다.  마지막에 이런저런 소문들이 떠돌긴 했지만, 그는 이제 거의 유일하게 남은 선한 의지를 가진 올곧은 지식인이다.  나는 이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오랜 노고에 대한 소리없는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책은 재미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그 시간들, 그 장면들이야말로 우리가 막 시작한 21세기를 강타했던 연이은 태풍들이 아니었던가. 21세기가 끝나갈 즈음에는 이 태풍들도 역사의 한 장으로 고요히 잦아들겠지만, 함께 울고 함께 외치고 함께 분노했던 우리에게는 언제까지나 생생한 현실이 될 것이다. 동시대인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 폭풍우 속의 외로운 선장처럼 끝내 방향을 잃지 않으려던 그의 노력과 고뇌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요즘 툭하면 플라톤을 떠올린다. 철학 전공자가 아니니 플라톤주의자라고 하기는 외람되지만, 플라톤이 옳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모르기도 하지만 이것저것 구체적인 이론은 다 떠나서 플라톤이 최고의 이데아로 삼았던 善, 올바름이 우리 삶의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고 고개가 끄덕여 진다. 우리 발걸음이 올바름을 향해 있지 않다면 그렇게 정신없이 내달아봤자 우리가 도달하는 곳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올바름의 이데아가 실재하든, 하늘의 본으로 떠있다고 단지 가정하든 그 별빛이 없는 한 우리는 그저 힘센 놈이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하는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거기가 기원전 5세기의 희랍이든 기원후 17세기의 영국이든 그리고 AI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공존하는 21세기이든 말이다. 그 야만의 정글을 사는 것은 짐승이지 인간은 아니다. 


손석희는 그의 저널리즘을 '민주주의와 인본주의'로 요약한다. 이 이데아가 JTBC라는 종편을 한때 가장 품격있는 매체로 만들어 주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도 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면 안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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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20년이 잠깐 사이 흘러간다.  지구에서 물리적 시간이란 객관적이겠지만, 각자가 지각하는 시간의 빠르기는 다르기 마련이다.  2022년은 아직 어색하지만 2002년은 그립고도 생생하다.  내 인생의 어디론가 돌아갈 수 있다면 그해 노란 물결 속으로 팔랑팔랑 뛰어들고 싶다. 


그리고 그즈음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들뢰즈, 가타리,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이 유행이었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라는 알쏭달쏭한 책을 시작으로 지젝을 참 열심히도 읽었다. 아마 지젝이 쉬웠다면 그렇게 독파하진 않았을 텐데 다작으로 유명한 지젝의 비슷비슷한 책들을 한권도 빼지 않고 번역되는 족족 읽었던 것은 두 번 세 번 반복해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철학사를 읽고 있었고, 철학자의 원저에도 욕심이 생겨났다. 


<향연>은 맨 먼저 추천 받았던 철학 책이다.  무려 플라톤인데 쉽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쉽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다.  다소 기이했다.  그러다 우연히 강유원 선생의 <라디오 인문학> 이란 프로그램에서 <향연> 강의를 들었다.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그때 알게 되었다.  




재작년에 고전 읽기 모임을 하면서 <향연>을 다시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2년 간 다들 그러했듯 코로나19가 계획을 엉클어 버렸다.  연말연시 무엇을 할까 하다가 <향연>을 택했다.  플라톤 아카데미의 이태수 교수 강의를 먼저 들었고, 역자 강철웅의 작품 해석도 함께 읽었다. 이 강의도 2013년에 있었다. <라디오 인문학>도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다. 


<향연>을 대표하는 내용은 소위 '에로스의 사다리'이다. 소크라테스가 예전에 디오티마라는 여성에게 들은 이야기를 향연의 참석자들에게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10여 년 후에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이렇게 들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다시 들려주는 복잡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해지고 전해져서 결국 2,400여 년 후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오래 살아 남은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니, <향연>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여야 하는데, 그 배경을 알지 못하면 사실 낯선 시공간을 사는 우리가 직관적인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https://youtu.be/MGLuj4KjnF8



이태수 교수의 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는 순간 막가는 인생인 된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갈망)"인데, 아름다움이란 몸의 아름다움에서 시작해서 영혼의 아름다움, 앎의 아름다움, 그리고 '갑자기' 직관하게 되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계서화 되어 있다.  에로스의 사다리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름다움 그 자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아름다움이란 영혼의 아름다움과 앎의 아름다움 그 언저리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삶이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마치 거울 반사처럼 타인들을 통해 내게로 되돌아 온다.  휘번뜩이는 눈빛과 마구 내뱉는 말들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드르고 있는 사람은 정작 자기 영혼의 추함을 모르고 있을 터이다. 그 무지의 추함은 물론이거니와. 국가 최고의 권력을 얻더라도 그것이 정작 어떤 아름다움으로도 향하지 않을 때, 인생도 국가도 막가게 될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라디오 인문학 : Apple Podcasts에서 만나는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 (주말 뉴스쇼 박명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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