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영문학자 노스롭 프라이는 소설의 본질은 알레고리라고 말한바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이번 소설은 그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저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그야말로 알레고리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프롤로그처럼 붙인 '밧줄 마술'의 이야기는 이 소설 전체가 가진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알레고리적으로 본다면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각 장들은 정확히 그 '밧줄 마술'에 대응한다고 하겠다.

 

 '샤머니즘'으로 유명한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이란 책에서 바로 이 '밧줄 마술'에 대해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우선 이러한 밧줄 마술의 이야기가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인도나 티벳, 말레이시아등 각 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주고는 그렇게 이 밧줄 마술은 각 문명에서 신 아래에서 시간과 타자에 엮이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해서 가지는 실존적 불안과 염원을 표상하는 하나의 원형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고 말해준다. 그 뒤 그는 모든 '밧줄 마술'에서 드러나는 네 개의 공통된 요소들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것이 그대로 이 소설 각 장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네 요소들이란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것, 밧줄을 올라가는 것, 같이 올랐으나 동료인 소년의 몸이 토막 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인데 이것이 그대로 이 소설 각 장의 내용에 있어 주가 되는 것이다. 즉 1장이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그렇게 하나로 이어졌던 세계가 그러다 서서히 분리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2장의 이야기는 밧줄을 올라가는, 그렇게 하늘과 사람을 이으려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여기서는 사람을 넘어 사물까지 자신과 이으려는 제이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3장은 토막 나는 소년의 이야기에 해당하므로 이와 똑같이 이어져 있었으나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동규가 전면으로 나오며 마지막 장은 지켜보는 자들에 해당되기에 제이가 하늘로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거나 들었던 자들인 박승태, 작가, Y등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밧줄 마술'은 그야말로 이 소설의 주된 모티브라 아니 말할 수 없는데 엘리아데에 따르면 밧줄이라는 상징은 '모든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고 어떤 조직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자신의 과거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같은 책, P. 236) 가운데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미지라 한다. 나는 이러한 밧줄에 대한 이야기가  김영하의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그대로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왜 김영하가 이 소설에서 밧줄이라는 상징을 가져왔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그건 문학이 지금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문학이야 말로 밧줄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도처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고통. 더구나 제이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그 밑바닥 십대들의 삶처럼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아서 더 한 고통을 받게 되는 자들의 존재 앞에서 문학은 과연 그 스스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러한 물음 앞에서 김영하는 문학가로서의 자신의 소임을 재확인하듯 '밧줄'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제이의 '대폭주'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제이는 김영하가 글을 쓰는 것과 똑같이 폭주로 도시에다 '거대한 붓질'을 한다. 그러한 제이의 대폭주는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하늘로 이어진 밧줄을 타고 오르는 마술사처럼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보게 만들어 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제이의 폭주는 문학이며 그의 승천은 차라리 그 폭주 문학의 완성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확실히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 역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세계와 서로가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더 이상 평면의 활자들로는 이 시대에 제대로 문학적 발언을 할 수 없다는 일종의 자조(自嘲)적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제이가 보여준 폭주의 문학은 분명 김영하가 바라는 문학의 이상적 형태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란 무엇보다 단절과 배제라고 했었다. 끊임없이 끊어내고 밀쳐내는 게 바로 근대라는 것인데 솔직히 따지고 보면 이 근대야말로 마술이나 마찬가지다. 마술이 본디 실체를 알 수 없는 눈속임이듯 근대에 의해서 자행된 그 모든 논리엔 사실 아무런 진리가 없으며 오로지 사람들을 충동질하기 위한 시각적 현혹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어주기가 본질인 문학이 그런 근대의 소생이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문명이란 게 또 알고 보면 오디이푸스적이다. 사실 진보란 바로 그러한 '살부(殺父)'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프로이트도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김영하는 오늘날의 고통을 야기한 마술에 문학이란 마술로서 응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마술엔 눈속임이 있지 않다. 보이지 않도록 감추는 것이 아닌 거꾸로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는 마술이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바로 그런 마술사가 되려하며 그리하여 그의 문학이 무엇보다 문득 '자신의 발밑에 있는 무한의 벌판을 보게'되었다는 그의 말처럼 보이지 않았던 세계와 사람을 지금 우리들과 이어주는 밧줄이 되기를 바란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바로 그의 그러한 신념의 확인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정말 밧줄 마술을 하는 마술사를 보는 것 처럼 괜시리 흥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통해 다시금 음미하게 된 문학의 의미로 나 역시도 그 밧줄로 사람과 세계와 이어지길 바라는 소망까지 더해져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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