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안녕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사를 간다. 곧!

 

  그 누가 안그렇겠느냐만 이사는 내게 있어 정말 가장 하기 싫은 것 중의 하나이다. 다시 살 집을 구하고 주인이 어떤지 신경쓰면서 계약을 하고 중도금과 잔금을 맞추고 이삿짐 센터 계약을 하고 짐들을 정리하고 도배를 하고... 정말 이 모든게 내게는 전쟁을 치르는 것만 같다. 스무살 때 대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는 태어난 후로 단 한 번도 이사란 걸 해본적이 없는 나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집이란 내게 그랬다. 나 이전부터 있어왔고 내가 있는 동안 늘 그렇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였다. 집과 나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집 역시 언젠가는 헤어지겠지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집은 곧 '나'였고 내가 언제든 안심하고 마음껏 머무를 수 있는 나만의 소우주였다. 그래서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그 영화에 중심에 사실은 아비의 '방'이 있었던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비의 애정을 원하는 수리(장만옥 분)와 또 다른 한 여자는 계속 그의 방으로 오고 싶어한다. 그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아비를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가위에게 있어 언제나 하나의 방이란 그 거주자 자체이기도 하기에. 그렇게 아비의 방은 아비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비의 이야기'라는 뜻의 제목인 '아비정전' 이 영화에서 아비의 방은 그  세계의 중심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심에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은 그 존재를 받아들임과 같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아비정전'은 하나의 공간이 거기에 거주하는 자아와 얼마나 결부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것은 곧 97년이면 반환될, 언젠가는 떠나야 할 유통기한이 정해진 땅, '홍콩'에 사는 이들이라면 더 절박하게 와 닿을 생각이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구보데타 다케히코의 2007년작 '모두, 안녕히' 역시 공간과 자아의 결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토루는 초등학교 졸업식날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바로 가까이서 목격하는 바람에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는 존재이다. 나가려고만 하면 끝내 졸도할 정도로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갇혀있고 다른 의미로는 자신만의 한정된 우주를 가지고 있다. 묘하게도 이 사토루는 왕가위의 '아비'를 많이 닮았다. 아비는 사실 자신을 낳아준 생모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나고 싶지만 홍콩을 상징하는 자신의 방에 내내 머무르는데 그 이유는 정작 생모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토루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도 그 졸업식 날의 비극적 사고가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왔던 것(사토루는 만일 어머니가 이혼을 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아버지 성을 그대로 따랐다면 앞자리에 앉아 그 비극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독백은 그것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우연하게 벌어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독백이다.) 만큼 자신이 전혀 모르는 단지 바깥에서 그 어떤 일이 느닷없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그 예측불가능성에 따른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아비와 사토루 모두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었던 사정으로 인해(아비는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들이다.

 

   하지만 아비와 사토루는 그 세계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같지 않다. 아비는 그 세계를 부정한다. 그는 늘 '발없는 새'가 되기를 꿈꾼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가 있는 필리핀은 구원의 땅이다. 현재의 홍콩, 그가 있는 방은 기필코 벗어나야 할 유배지이며 그 영혼의 무덤일 뿐이다. 때문에 거기서 나누는 모든 사랑 조차 오로지 순간을 버텨내기 위한 일회용 사랑일 수 밖에 없으며 이별은 숙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니체의 니힐리즘을 강론하면서 니힐리즘, 즉 허무주의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말을 했는데 하나는 부정적 허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허무주의라고 한다. 부정적 허무주의는 세상이 허무함으로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아비의 모습이다. 긍정적 허무주의는 어차피 세상의 본질인 허무를 긍정하고 오히려 그 허무로 빈 여백들이 많이 그려졌으므로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거기에서 무수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 허무주의를 말한다. 이것이 니체가 정말로 원했던 허무주의이며 이 소설의 사토루가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가 말했던 '긍정의 허무주의' 대로 그는 그렇게 한계지워진 자신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다양한 만남과 이별 그로인한 성숙등 온갖 삶의 가능성들을 창출한다. 사람들은 아파트 단지 안의 좁은 세계가 뭐가 대수롭겠느냐고 혀를 끌끌 차지만 사토루는 그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 들을 수 없는 것 등등을 찾아내며 남들이 좁다고 하는 이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새롭고 다양한 존재와 삶들로 채워져 있는 것인지 깨닫는다. 거꾸로 그 많은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는 애석하게 여긴다. 때문에 신체가 일으키는 발작 때문에 나가지 못하긴 하지만 애당초 사토루 스스로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지금 그가 있는 이 공간이 더없이 완벽하다고 느낀다. 오히려 그 공간의 매력을 알기도 전에 빠져 나가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렇게 사토루는 왕가위의 아비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그러면 사토루는 어떻게 아비와 정반대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을까? 다른 말로 사토루는 어떻게 긍정의 허무주의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사토루가 타인들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심과 배려는 사토루가 밤마다 아파트 단지를 순찰하는 것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사토루는 그렇게 순찰을 하면서 단지 내의 사람들이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관찰하며 종내는 그들의 삶에 스스로가 어떤 도움을 줄 지 생각한다. 결국 그러한 관심과 배려로 인해 사토루는 훗날 마리아를 학대하는 아버지에게서 구출해내고 늘 방화의 위험으로 몰락해 가던 자신의 아파트 단지 마저 구하게 된다. 하지만 아비는 달랐다. 그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 그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자신이 이해받기 위한 것이었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속한 지금의 홍콩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거기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 역시 부정적 관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두, 안녕히'와 '아비정전'을 비교하노라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울러 타인에 대한 반응까지 결정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어쩌면 니체도 하이데거도 긍정적 허무주의를 가질 것을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긍정적 허무주의를 갖더라도 그렇게 내 세계를 긍정하더라도 그렇게 하나의 세계에 온전히 집착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토루 처럼 내 세계가 확실하다고 해서 그 세계만 고수하고 사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그래도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삶이란 것 자체가 그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도록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비를 보라 그는 어쨌든 필리핀으로 날아간다. 나 역시 서울로 와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닌다. 결국 사토루 역시도 그 세계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나나 아비나 사토루나 다 결별을 하게 된다. 왜?

 

 

   그건 모든 현재엔 다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아비정전'에서 그 이유를 기차로 표현했다. 끝없는 밤을 달리는 것만 같은 기차도 언젠가는 내려야 할 종착역에 다다른다. 결국 아비 역시 그 기차 안에서 숨을 거둔다. 왕가위에게 있어 그 기차는 바로 시간이었다. 흐를 수 밖에 없는 삶의 비유로서의 시간 말이다. 결국 도래할 시간들은  찾아오고 머무르고 싶은 현재는 끝이 난다. 때문에 항구적으로 그 순간에 머물고 있고자 하나 우리는 문득 버스가 멈췄을 때 관성의 작용을 받는 것 처럼  튕겨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자기가 있는 그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든 세계는 언젠가 허물어진다. 마치 밀물때 당신의 발 아래에 있는 모래들이 쓸려나가듯이... 아무리 영원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 세계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초침이 당신의 목덜미를 꿰어 원하지 않아도 어디론가로 자꾸만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그 세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던 작별의 순간을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고 때문에 정작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대비할 수 밖에 없다. 해서 구보데타 다케히코는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진행시킨다. 그것이 바로 사토루의 삶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해버렸던 초등학교 졸업식날 같이 졸업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아파트 단지를 떠나는, 바로 그 아이들의 이름들을 챕터의 제목으로 삼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케히코는 언젠가는 도래하고야 말 작별의 순간에 앞서 사토루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긍정의 허무주의가 궁극엔 그토록 긍정했던 그 자신의 세계마저도 변화 가운데 열어놓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결국 사토루가 그 세계를 긍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였기에 가야할 그 시기가 왔을 때 훌쩍 떠나는 것 역시도 가능했던 것이다. 즉 다케히코는 소설 전체를 통해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긍정적 허무주의가 말하듯 결국 긍정과 변화는 하나라고 말이다.

 

 

  재미있고 정말 빠르게 읽히며 감정의 디테일들이 잘 살아나 있어 절로 사토루를 응원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그렇게 자기와 세계의 긍정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어쩌면 저자 자신 대학 입시 강사를 하다가 '삼십대 중반이면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하는 생각에 소설가로 돌아서버린 그 삶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어쩐지 아비와 같다고 생각되면 한 번 벗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읽어보면 사토루가 만든 긍정과 변화의 케익의 달콤함에 어느새 도취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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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8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좋은 글이네요.
긍정적 허무주의란 단어에서 실존주의를 보게 되는군요. 제가 생각하는 삶이기도 하구요.

오늘부터 상담받기를 시작했는데, 저의 내재된 '화(분노)'에 대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답니다. 감정이란 종종, 자아로 들어가는 실마리를 제공하니까요. 저는 분노지만, 누군가는 우울, 다른 누군가는 불안과 두려움 등으로 표현되는거죠. 그리고 그 안의 자아가 얼마나 많은 것에 결부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공간과 자아의 결부'라는 문구가 크게 다가옵니다.

이사 잘 하셔요, 좋은 집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ICE-9 2012-03-01 21: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29일 이사를 했고 오늘까지 정리하느라고 헉헉대고 있네요.
아직 여기저기 쌓인 짐들이 많아 여유가 없어요. 빨리 차분히 댓글 달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