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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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는 포착할 수 없다."

 

 

 줄리언 반스의 출세작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주인공 브레이브웨이트는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는 그 죽음이 바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플로베르를 통해 아내 죽음의 진실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걸 찾지 못하고 결국엔 저렇게 고백하고야 마는데,  특별히 이 문장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 줄리언 반스의 모든 작품은 바로 이 문장과 겨루려 드는 것과도 같은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흔히들 역사와 진실 그리고 사랑을 보편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가 그렇게 역사 혹은 과거를 작품의 중심 테마로 가져오는 이유는 바로 데뷔작이면서 반스 자신의 60년대 학창시절을 많이 반영하기도 했던 작품인 '메트로랜드'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68혁명으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발하여 모든 속물적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이상을 꿈꾸었던 삶이 어쩌다가 이렇게 도리어 속물적인 욕망에 지배당하는 삶으로 변해버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고자 함인 것이다. 즉 반스는 과거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면 현재적 삶마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깃들어있는 명확한 진실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때로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처럼 문학을 통해서 때로는 '10과 2분의1장으로 쓴 세계사'처럼 역사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확고한 기록이라면 진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기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브레이브웨이트처럼 여지없이 무너지고 결국 그가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에이드리언 핀의 다음의 말과 같은 깨달음 뿐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결국 문학과 역사 그 어느 것이든 과거를 진실 그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이제 먼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적 삶 그 자체로 눈을 돌린다. 보다 지금에 가까우면 그만큼 과거를 파악할 수단도 더 많아지고 정확해질테니 가능하지 않을까 여겼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작품이 바로 91년작 '내 말 좀 들어봐(Talking It Over)'였다.

 

 '내 이름은 스튜어트이고 난 모든 걸 기억한다.'

 

 

 이 같은 주인공 스튜어트의 말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특히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너무 비슷한 설정이라서 흥미를 끈다. 이렇게 늘 자신만만했던 스튜어트는 자신의 아내 질리언이 친구 올리버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버림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 그는 평생 아내와 친구를 저주한다. 이 같은 관계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앤서니 웹스터와 그의 연인이었지만 그와 헤어지고 친구인 에이드리언 핀과 사귀게 되는 베로니카가 이루는 관계와 완전히 똑같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내 말 좀 들어봐'를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주제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말 좀 들어봐'는 아무런 지문 없이 세 사람이 서로 돌아가며 하는 독백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소설 보다는 희곡에 가까운 구성인데 반스가 이렇게 다소 독특한 구성을 취한 것은 오로지 그들의 말에만 독자를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보다 현재적 삶에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과연 과거의 진실에 이를 수 있는가를 독자 스스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우리는 그래도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을 겪어도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보고 느끼고 그래서 가지게 되는 진실 역시 완전 달라져 버림을 보기 때문이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라는 말도 있지만 과거의 진실 역시도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 'Talking It Over'는 의논 또는 상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다수를 상징하고 있다. 해서 반스는 생각한다. 혹 과거의 진실을 찾기 힘든 이유가 여러 많은 사람들이 각자 보고 싶은 대로 진실을 보기 때문이라면 그럼 한 사람만이라면 어떨까? 오로지 그가 가진 기억뿐이라면 과거의 진실에 대해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이 작품으로 형상화 된 것이

바로 이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그동안 해왔던 것의 집대성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나오는 세 가지의 죽음은 이 작품이 가진 이러한 성격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일단 주인공의 60년대 학창시절에 나오는 동급생 '롭슨'의 죽음은 '메트로랜드'에서 단절되어 죽어버린 60년대의 과거를 의미한다. 또한 베로니카의 어머니의 죽음은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의 아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두 죽음이 과거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에이드리언 핀의 죽음은 '내 말 좀 들어 봐'에서의 결국엔 질리언과 결별하게 되는 올리버 그대로이다. 에이드리언은 일기를 통해 앤서니를 분석하는데 그것은 올리버가 내내 스튜어트를 분석했던 것과 또한 이어진다. 이렇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이 작품이 천착하고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작가가 밟아왔던 단계를 하나 하나 모두 다시 담고 있다. 해서 마치 이 작품은 그 모든 여정을 거쳐 다다르게 된 어떤 결론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반스가 다다르게 된 종착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모호성의 포용이다. 즉 그렇게 앤서니 혼자만의 기억에 의지해 보아도 과거의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하니 결국 우리 인간은 이 모호성을 삶이 간직한 하나의 본질로써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반스가 앤서니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거꾸로 증명된다. 반스는 앤서니를 무엇보다도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린다. 그가 에이드리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그가 명확성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을 했을 때, 그에겐 사고를 정연히 정리하는 것이 마치 태어난 이유인 것처럼, (...) 자연스럽게 여겨졌다.(P. 152)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살아남은 우리-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P.153)

 

 또한 그는 전부인 마거릿의 아래와 같은 여자에 대한 구분에서도

 

 마거릿은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그리고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P.116)

 

 

 매사에 분명한 여자가 좋다고 말을 한다. 이외에 그가 그토록 에이드리언의 일기를 가지고자 하는 것 또한 나이가 들어감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모호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라는 것에서도 앤서니가 얼마나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묘사했던 앤서니는 결국 그 어떤 진실도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만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종잡을 수 없었던 베로니카와는 영원히 결별했으며 에이드리안 핀의 일기가 쓰다 만 문장도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소설은 아예 그 자체에 가장 중요한 내용을 텅 빈 공백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앤서니의 모든 노력이 텅 빈 수포로 돌아가 버렸음을 더욱 강조하는데 결국 이를 통해서 더 분명히 알게되는 건 그 모든 진실 추구의 노력이 좌절될 만큼 삶은 모호성으로 가득차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독자인 우리는 그가 놓쳐버린 진실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에 대한 보증은 사실상 소설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은 그저 막연한 추정 뿐인데 이것은 또한 '내 말 좀 들어 봐'에서 세 인물이 보여줬던 모습과 그대로 판박이가 아닌가! 그러므로 반스는 우리가 알았다는 것 또한 단순한 오해일 수 있으며 우리의 시도 역시 앤서니처럼 실패할 것임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소설에 자리잡은 공백은 바로 독자에게 그와 같은 체험을 가져다 주려는 의도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결국 삶이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모호성을 독자인 우리도 받아들이게끔 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작업인지도 모른다.

 

 이는 무엇보다 소설에 나오는 세 가지의 죽음이 다들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게되면 명확해진다. 소설에서의 죽음은 한결같은 작용을 한다. 즉 일단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속에 묻혀진 진실을 찾도록 끌어들이지만 결국엔 오로지 그 죽어버린 자들만이 진실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종국적이고도 명확한 진실은 오로지 죽음만이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마도 소설의 원제인 'THE SENSE OF ENDING' 역시도 바로 이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변화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P. 254)

 

 죽음만이 종국적 진실을 가진다면 살면서 보내는 우리의 여정은 그저 근사치의 진실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모호성으로 넘쳐나는 공간이 된다. 즉 이 소설에 이르러 반스는 드디어 확고한 진실을 얻으려던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모호성과 기꺼이 포용하려 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모호성을 포용하려 하는가? 그 이유는 소설에서 보여준 앤서니의 모습을 보면 추정이 가능하다. 앤서니는 그야말로 과거의 진실에 집착하는 자가 어떤 모습의 삶을 보여주는지 거기에 대한 제대로 된 초상이니까 말이다. 현재적 삶의 구원을 위하여 과거에 집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어차피 삶이란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스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 모든 문학적 여정의 결론이기도 하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p.255) 

 

 

 이 거대한 혼란 속에서 그 누가 쉬이 진실을 찾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것의 집착은 현재에 구원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집착으로 부터 오는 고통까지 덤으로 전가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반스는 모호성 자체를 기꺼이 껴안으려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현재를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첫 걸음이라는 것이 반스가 여기 종착지에서 느끼게 된 예감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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