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 아멘 아멘 -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
애비 셰어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나이 때 정말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시작은 아마도 추석 때 성묘를 다녀와서 일 것이다. 무덤을 보면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다녀와서 죽음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상상했었다. 죽음이 영원한 결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서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영원히. 그런데 어떻게 영원히 나로 있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니까 지금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나라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과연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은 채 영원히 있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것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 같다. 결별로 인한 슬픔 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로 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그런 것들이나 상상해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죽음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이성으로 헤아리기 힘든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다. 존재 자체가 삶의 절대적 외부에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 사유에 있어 언제나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영원히 불가해한 것이기에 그 반응에 있어서도 천차만별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자끄 드와이용 감독의 영화, '뽀네트'가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4살짜리 여자 아이다. 감독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여자 아이의 실제 나이 또한 꼭 네 살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연구 결과 5세 이상이 되면 죽음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시각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문명에 포획된 의미의 죽음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회적 의미 이전의, 죽음에 대한 원초적 시선을 담으려 한 것이다. 바로 거기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아이는 당연히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 상실의 '영원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가 돌아올 것을 굳게 믿으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결국 엄마의 무덤으로 몰래 가서 파헤치기까지 한다. 아이에게 죽음은 인식할 수 없는 무한이 입을 벌린 것과 같았다. 그것은 아이가 절대 이해란 이름으로 포획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한 대로 '타자란 바로 무한성'을 입증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죽음이란 '뽀네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 있음을 알게하는 것이었다. 내가 절대도 넘어설 수 없는 경계 저 편에서 내 한계를 깨닫게 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죽음은 대부분 우리에게 부정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내 자아의 영역을 위축시키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 싶듯이 죽음을 밀어내고 설사 죽음과 맞딱드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강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더욱 자신의 자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영원한 상실을 열어보인 무한의 틈을 의식적으로 없는 것 처럼 메우려든다는 것이다. 마치 죽음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네델란드의 세계적 석학, C. A. 반 퍼슨은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에서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를 기준으로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나눈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현대를 죽음을 망각하는 태도로 정의했다.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1세기 전만 하더라도 다반사로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 죽음은 교묘하게 은폐되고 있다. 겉으로는 죽음과 애도를 감추려는 사회 규칙에 의해, 안으로는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인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되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웃이 함께 슬퍼하는 일도 이제 없어졌거니와 상복을 입는 일도 이제 드물게 되었다.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주의 사람은 물론이고 죽어가는 당사자 조차도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도 '소비 가능한 것(소모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C.A 반 퍼슨,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 P. 213)

 

 현대에 이르러 유독 이렇게 의도적으로 죽음을 은폐시키고 망각하려 드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무래도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나'라는 자아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확장되어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점점 강해져만 가는 자아에게 있어 유일하게 '한계'라는 상처를 입히는 절대적 타자인 죽음이기에 은폐와 망각을 통해 상상적으로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고전 추리 소설이라면 흔히 나오는  탐정의 마지막 추리 쇼와도 일맥상통한다는 게 흥미롭다. 거기서 탐정은 꼭 예전에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세부에 있어서까지 정확하게 복원한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같다. 아니,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리 소설은 에드가 알란 포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과 더불어 태어난 근대의 산물이고 그런 추리 소설에 있어 범죄란 늘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고 설파하는 근대성에게 상처를 입히는 얼룩 같은 존재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즉 추리 소설의 시간 되돌리기 추리쇼는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을 그대로 복원해 그 상처가 마치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드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은폐와 망각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범죄에 대해 근대가 보여주는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근대에 의해 태어난 자아라는 주체성이 타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척도가 된다. 즉 은폐와 망각이라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이 바로 기본적인 태도라는 사실이다.

 

 즉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대면함에 있어 중요해지는 것은 '나라는 '자아'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다. 그 절대적 타자가 열어보이는 무한 앞에서,  나의 한계를 끊임없이 일깨우고 그래서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하는 무한 앞에서 어떻게 내게 존재하는 절대적 한계를 무시하고 나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것인가가 더없이 중요한 물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집착이요 그래서 하나의 강박이다. 그것도 내 쾌락의 원인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벌이는 것이기에 프로이트의 분류에 따르면 도착증적 강박이다.

 

 정확히 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 이라는 소설이다.

   

 

 

 

 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소설은 아니다.

 물론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여기에 실려있는 내용들은 작가 애비 셰어의 실제 경험과 내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의 고백록이라고 불러야 한다. 애비 셰어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모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이 소설에서 정직하게 밝힌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증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불행이 바로 자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강박증이다. 제목의 '아멘 아멘 아멘'은 현실속에서 그녀가 불행한 사건을 만날 때마다 올리는 기도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빌며 그것을 위해 노력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가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되므로 행동을 조심하는 것. 또는 길가의 날카로운 쇠붙이나 유리 따위를 줍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행여나 행인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 강박적으로 노력한다. 오로지 세상이 불행없이 이대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데 이러한 그녀의 강박증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죽음이 가져온 영원한 상실, 그 변화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죽음에 대한 반응은 무엇보다 자아의 보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녀의 강박적인 노력들 역시도 그와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녀가 세상에 불행이 없기를 바라며 하는 모든 노력들은 사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는 그런 의미에 다름아니다. 그러한 현재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열망은 그대로 변화에 대한 거부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일어났던 진정한 변화는 모두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애비 셰어의 그러한 강박적인 노력은 사실 그녀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 아버지의 죽음을 지우고 그것이 없었을 때의 세계를 되돌리려는 노력에 다름아닌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죽음이 각인시키는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애비 셰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리스트의 의미다. 그녀는 여러가지 리스트를 만드는데 그러한 계보의 작성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증명했듯이 근대에 이르러 탄생한 것이었다. 즉 이는 자기 세계의 확고한 보존을 드러내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이 열어보인 자기를 삼키려 드는 무한 앞에서 강박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분이라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소설 속에서 애비 셰어는 정말 많은 죄책감을 보여준다. 그녀는 세상에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에 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은 자신과 타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대로 애비 셰어 역시 타자에게로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비 셰어의 죄책감이 일종의 도착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녀는 왜 세상 모든 불행한 일에 끊임없이 강박적일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이 질문은 죄책감의 진짜 목적을 묻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애비 셰어에게서 혹시 지젝이 '까다로운 주체'에서 말했던 중세의 수사가 신자들에게 금욕적일 것을 요구하여 유혹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유혹에 대한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집요하게 떠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나? 과도한 선이 오히려 과도한 악을 창조하는 모순을... 푸코는 권력 자체가 저항을 생산한다고 말하고 라캉은 금기 자체가 욕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런 말을 한다.

 

  법 자체야 말로 죄의 영역이다. 법을 위반하려는 사악한 충동들의 영역을 열어놓고 지탱하는 곳이며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도착적이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게 만든다. 그리하여 법의 지배의 궁극적 결과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그 모든 초자아의 비틀림과 역설들로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한에서만 즐길 수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자기-반성적 전회를 통해 죄책감 속에서 쾌감을 취한다는 의미이며 사악한 생각을 하는 나를 응징하는 속에서만 향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P. 244)

 

 

 

 

 애비 셰어가 느끼는 죄책감의 본질은 이 말대로다. 사실 그것은 그녀의 은밀한 쾌락 추구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그 죄책감으로 자신을 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을 공급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은 쾌락을 위한 하나의 제스쳐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강박은 도착증과 다를바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도착증이 애비 셰어만의 독특한 반응이 아니라 사실은 근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체성이 가지는 근본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도착증과 히스테리를 구분한 적이 있다. 거기서 도착증은 히스테리와 달리 전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당연하다. 도착증은 자신의 쾌락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세계마저도 그 쾌락을 위해 능동적으로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새디스트를 생각하면 된다. 그는 자신의 쾌락이 피학에서 오는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 앞에서 그 피학으로 유도하는 연기를 한다. 바로 이것이 도착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타자에게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자와 세계마저 마음대로 조작해 가는 것. 이런 의미에서 애비 셰어의 모습은 그야말로 죽음에 대한 현대의 반응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으로 죽음이 열어보인, 삶을 궁극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그 변화를 받아들임이야 말로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모습인 것이다. 소설은 다행히 사랑을 매개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녀가 진정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사랑 또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전적으로 나를 내어주는 것, 그렇게 타자에게 나를 맡김이다. 후반에 그녀는 서서히 강박적인 것이 줄어듦과 동시에 타인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을 병행시킨다. 그렇게 강박으로 집요하게 보존하려 했던 자아에 대한 포기가 바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임을 암시라도 하듯이 말이다.

 

 소설 초반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에는 질서가 있다.

 나쁜 짓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진짜 나쁜 짓을 하면 죽는다.(P. 27)

 

 하지만 마지막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 나머지 이야기는 불확실성으로 시작한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시작한다. (P. 461)

 

 말하자면, 이런 변화가 바로 애비 셰어의 고백이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은 노래로 끝난다. 고정적일 수 없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기계적으로 복제되는 것 말고 세상에 같은 노래는 있을 수 없다. 노래는 혼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모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다 다르다. 왜냐하면 악보에 표시된 음은 다만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음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와 세계가 하나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우연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음이 상징하는 것, 이 노래 자체가 상징하는 주체가 근대이후로 수많은 비극을 잉태시킨  도착증적인 주체를 극복할 하나의 대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주체가 늦지 않고 '제 때에 도착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은 그 기도의 공감을 위한 진솔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여정이라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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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8-1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비 셰어는 변화를 했고 그럼으로써 타인을 받아들이게 되었나보네요.
타인에 대한 신뢰는, 즉 자신을 내맡긴다는 진정한 행위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계와 분리된 자아 형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은 항상, 실존적 한계로써 나는 혼자라는 사실과 함께 사람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한계가 있기에, 삶이 소중한게 아닐까 싶어져요. 제가 얼마 전에 유사한 문제로 고민할 때, 교수님이 켄 윌버의 책을 추천해주셔서 구입하고 아직 못 읽었어요....

만일 말이죠, 우리 사회가, 처음부터 세상은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거의 항상 발생한다는 분위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발전했다면, 아마 발전 속도는 늦지만 실존적 고독은 훨씬 적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제맘대로 생각을 해본답니다.

참 좋은 글이세요, 언제나 그렇듯이...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신데, 건강하게 잘 계시죠? ^^

추신.
저는 뽀네트를 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읽다가 미치는줄 알았습니다.

ICE-9 2012-08-24 01:00   좋아요 0 | URL
아, 닉네임이 바뀌셨군요.
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공부는 원하시는 만큼 잘 되고 계신지 정말 궁금합니다.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거의 항상 발생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발전했다면 실존적 고독은 훨씬 적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말씀에는 저 역시 크게 공감되네요. 한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질라 같은 것들이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었죠. 그런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뭔가를 해 놓으면 갑자기 고질라가 나타나 짓밟고 지나가고 악착같이 쌓아놓으면 고질라의 불길 한번에 다 타버리고... 그렇게 시지프스와 똑같이 주기적으로 허무를 안을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정말 불행해지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어쩌면 제 리뷰들은 바로 거기의 연장선상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 고질라가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고질라만큼 압도적으로 모두에게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겠죠. 죽음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체험이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로만 인식되지 않고 중세처럼 좀 더 사회적인 체험으로 자리잡으면 우리의 생각 역시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그렇다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장례문화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죽은 자를 기리기 보다는 산자들의 눈을 더 많이 고려하는 의식이니까요. 아마도 중국과 우리나라가 씨족 마을 중심으로 발전해서 자리잡게된 의식이겠죠. 좀 더 죽음을 헤아리고 그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냥 단순히 이런 생각이 드네요.^ ^; 그런데 저는 뽀내뜨 영화로만 봤는데 문고판으로 나왔던 모양이네요. 처음 알았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