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의 기술 1 NFF (New Face of Fiction)
채드 하바크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채드 하바크의 소설 '수비의 기술'은 일단 독특했다.

 지금까지 야구를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를 많이 보아왔지만 유격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또 오랜만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근래에는 보기 힘들었던 미국 대학생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독서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에릭 시걸의 '닥터스' 이후로 온전히 대학 생활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 소설은 처음 만나는 것 같다.(그 에릭 시걸 또한 이미 타계했으니 세월이 얼마나 흐른 것인가.) 그렇게 독특했고 또 오랜만에 재회하는 세계인지라 솔직히 열광적으로 읽었다. 정말 유격수를 뜻하는 영어 'shortstop'처럼 짧은 보폭으로 진행되는 그렇게 빠르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문체라서 더욱 그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수비의 기술'은 무슨 이야기인가?

 

 야구 이야기인가? 주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아니다. 사랑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뭔가 하나가 부족한 자들의 이야기이다. 주요한 등장인물 헨리, 그를 웨스티시 대학으로 데려와 정말 하고 싶은 야구를 마음껏 하게 해주는 슈워츠, 그 웨스티시 대학의 총장 어펜라이트 그리고 그녀의 딸 펠라 그 모두가 똑같이 뭔가가 부족한 그래서 결국엔 충족되지 못한 것 때문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헨리는 그 자신이 동경하는 최고의 유격수 아파리치오(이 사람은 헨리가 거의 성경처럼 여기는 '수비의 기술'을 쓴 전설의 유격수이기도 하다. 헨리는 이 책을 읽으며 최고의 유격수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지금은 거의 근접한 상태다. 물론 아파리치오는 실제 인물은 아니며 당연히 '수비의 기술' 또한 가공의 책이다.)와 타이 기록을 이루려는 직전에 어이없는 실책을 범한다. 슈워츠는 헨리를 끌어와 야구로 성공시켜 준 장본인이지만 정작 그의 미래는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사랑 역시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어펜라이트는 진짜 소망은 멜빌 같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논문을 쓸 때는 그리도 자주 찾아오는 '백열 상태'가 정작 소설을 쓸 때는 찾아오지 않아 포기하고 만다. 그 뒤 그는 학문적으로 성공해서 지금처럼 대학 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되지 못한 작가에 대해서는 미련을 안고 있다. 그의 딸 펠라는 십대 때 이미 자신의 학교 강사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바로 실패를 하고 그에게서 달아나 웨스티시로 돌아온다. 그녀가 그 어린 나이에 결혼한 진짜 이유는 그녀가 어펜라이트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펠라의 사랑은 정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존재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결국 그녀의 전남편 데이비스와 현재의 남자 친구 슈워츠를 거치지만 '털보에서 털보로 옮겼을 뿐' 여전히 그녀가 바라는 사랑을 얻지는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소설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 모두는 각자가 바라마지 않았으나 결국엔 채워지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이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헨리의 경우가 그렇다. 헨리는 슈워츠의 미래를 위한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라 여겼던 슈워츠가 그렇다면 자신 역시도 그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실책을 범한다. 그 첫 실책은 아파리치오의 기록에 가장 접근하던 날 자신의 룸메이트이기도 한 오웬의 얼굴에 잘못하여 공을 던져 버린 일이다. 결국 오웬은 그 공을 맞고 병원에 실려 입원하게 되는데 여기서 채드는 아파리치오와 오웬을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사실 이 '접합'의 묘미가 바로 채드 하바트의 소설이 가진 가장 커다란 매력이기도 한데 아무튼 채드는 여기서 왜 아파리치오와 오웬을 헨리의 송구로 묶어두는 것일까? 그것도 좌절의 시초가 되는 송구로 말이다. 그것은 아라파치오와 오웬이 이 소설에서 사실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모두 다다르고 싶으나 오히려 그 남은 거리로 인해 더욱 불안감을 부채질할 뿐인 존재인 '이상(이를테면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같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헨리와 아파리치오의 관계는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관계와 같다. 때문에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동성애는 사실 다르게 보아야 한다.

 

  즉 아파리치오가 되기 위해 헨리가 야구에 기울이는 온갖 노력과 마찬가지로 어펜라이트의 오웬에 대한 사랑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왜 채드가 헨리가 결정적으로 아파리치오의 기록에 접근하려던 그 때 어펜라이트 역시 자신이 동경하는 오웬을 보려고 같은 구장에 있도록(그것도 어펜라이트 자신의 치부라 할만한 딸 펠라가 달아나 집으로 오는 그 시간에) 공들여 설계하는지 이유가 드러난다. 채드는 드러낸다. 헨리가 자신의 이상에 근접할 때 어펜라이트 역시 자신의 이상에 똑같이 근접하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헨리의 잘못된 송구는 어펜라이트가 자신의 이상, 오웬과 직접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이를테면 헨리가 어펜라이트로 하여금 오웬에게로 데려다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헨리의 그와 같은 실책은 좌절의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지금 서 있는 웨스티시 자체가 사실은 좌절의 땅이었다. 그 대학이 숭배하는 멜빌이 작가로서 한창 좌절을 겪다가 떠난 절망의 순례 가운데 찾아 온 곳이 바로 웨스티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절망의 순례 여정을 발견한 것은 바로 어펜라이트였다. 그리고 그 발견으로 어펜라이트는 성공한 학자가 된다. 말하자면 멜빌의 좌절이 어펜라이트를 키웠듯이 이제는 헨리의 좌절이 어펜라이트를 키우는 것이다. 결국 멜빌이 어펜라이트가 다가가고자 했던 대상이었음을 볼 때 그 멜빌과 헨리가 어펜라이트에게 똑같은 경로로 기회를 준다는 것은 곧 어펜라이트가 염원하는 오웬이 헨리가 염원하는 아파리치오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아파리치오와 오웬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헨리의 야구도 어펜라이트의 동성애도 사실은  이상과 현실이 가지고 있는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을 말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동성애적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오웬과 어펜라이트가 처음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을 때 어펜라이트가 보여주는 반응일 것이다. 오웬을 만나기 전까지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온 어펜라이트는 그 자신 열망하긴 하였으나 처음으로 동성과 깊은 신체적 접촉을 나누게 되자 그 낯선 이질감에 당혹스러워한다. 바로 이 당혹감이 오웬과 어펜라이트의 관계가 정말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은 그렇게 모자람 그리고 거기로 부터 비롯되는 두려움을 그리지만 섣둘리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안고 사는 용기라고 말한다. 1부 밖에는 읽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더 길게 말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그래서 채드 하바크는 첫 머리에다 웨스티시 대학의 응원가를 삽입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 기운을 북돋아요. 나의 친구들이여

용기를 잃지 마요

용감한 우리 하푸너스가

공을 쳐내고 있으니

 

- 웨스티시 대학교 응원가 -

 

 

 

 

 다른 얘기로,

 아파리치오와 오웬이 이렇게 '이데아'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여기의 등장인물 또한 일련의 과정으로 재배치 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이를테면 헨리가 이제 막 필드로 뛰어드는 초심자라고 한다면 슈워츠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펠라는 슈워츠가 원했던 미래를 한 번 얻었으나 그것이 가짜의 것임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그 슈워츠 보다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어펜라이트는 예순이라는 나이나 그의 학문적 성과나 총장이라는 직위로 보아 직선의 가장 끝자리에 온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일직선상의 성장과정과도 같다.

 

 무리하게 이렇게 일직선상에 놓아두는 것은 이 소설에 은연중 드리워진 한 가지 맥락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 맥락이란 다름아닌 이것은 바로 작가로서의 채드 하바크 자신에 관한 얘기라는 것이다.

 

 

 채드 하바크는 이 소설 '수비의 기술'을 쓰기 위해서 자그만치 1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문제는 이 소설이 그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작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인데 그렇다면 그 10년의 세월은 그대로 그가 이 첫 소설을 세상에 출산하여 진정한 작가가 되기까지 겪은 산통의 과정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정말 채드 자신이 이러한 산통의 과정 자체를 소설에 담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 근거를 나는 일련적으로 배열 가능한 등장인물들에게서 찾는다. 즉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연속적 흐름이 그대로 채드 하바크가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의 주된 얘기가 되는 헨리의 아파리치오 되기는 사실 채드 하바크의 작가 되기의 얘기인 것이다 라고 나는 의심한다.


 근거가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란 수비였다. 그는 짧은 평생 내내 배트에 맞은 공이 튀어 나가는 모양, 각도와 회전을 연구했다. 오른쪽으로 꺾어야 할지, 왼쪽으로 꺾어야 할지, 날아오는 공이 앞에서 높게 솟아오를 것인지, 땅을 쏜살같이 강타하며 굴러갈지 미리 알아내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깔끔하게 공을 잡아냈다. 예외 없이. 그리고 언제나 완벽한 송구를 해냈다. 예외 없이. 그럼에도 감독들이 그를 2루에 세우겠다는 뜻을 거두지 않거나, 아니면 벤치에 버려둘 때가 있었다. 그 지경일 만큼 피골이 상접하고 못 봐주게 처량한 몰골이었다.(p. 19 ~ 20)


 이걸 채드가 하버드 재학 시절부터 꾸준히 글을 썼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문장을 써 내려갈 때의 채드의 심정이 어땠는지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것 같다. 즉 (물론 전적으로 내 느낌일 뿐이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는 이미 작가로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는 어쩌면 그걸 쓸 때 진짜 했을지도 모를 투정 아닌 투정을 여기다 슬며서 버무려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더하여, 소설가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작가로서 성공한 어펜라이트가 새삼 오웬이라는 남자에게 끌리게 된 계기도 여기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어펜라이트가 오웬에게 끌렸던 것은 그의 에세이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젊은 청년의 에세이에 녹아든 우아함과 광범위한 독서에 감탄했다.(p.142)


 채드는 오웬에 대한 어펜라이트의 매혹이 무엇보다 텍스트적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소설에서 내내 보여지는 오웬의 묘사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채드는 오웬을 그 누구보다 박학다식하며 책벌레로 묘사한다. 그는 야구 경기를 할 때 조차 비글호 항해기에 빠져있다. 그의 말투 역시도 구어체 보다는 문어체에 가깝다. 헨리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가 사귀고 있는 애인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보라. 그는 마치 논문을 쓰듯이 대화를 한다. 채드가 이렇게까지 묘사하고 있으니 여기엔 분명 의도가 있다. 난 그 의도가 바로 오웬이 하나의 텍스트적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독자들이 그를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종의 살아있는 텍스트, 의인화된 텍스트로 봐 주길 원해서 말이다. 왜 채드는 구태여 오웬을 일종의 의인화된 텍스트로 만드는 것일까? 그 오웬이 가장 작가적 정점에 이른 어펜라이트의 애정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드러난다. 오웬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베아트리체라는 것을. 베아트리체는 파우스트의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마지막 남은 이상적인 퍼즐 조각이었다. 어펜라이트에게 그 퍼즐 조각은 쓰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는 왜 오웬에게 휘트먼을 읽어주려 했던 것일까?

 휘트먼은 살아 생전 거의 평가를 받지 못했던 시인이다. 즉 그 휘트먼은 소설가가 되지 못했던 어펜라이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웨스티시라는 그 좌절의 땅에서 오웬은 그러니까 어펜라이트가 정말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 그 완성된 이상적인 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펜라이트는 자기도 그 이유를 모른 채 마구잡이로 빠져드는 것이다. 즉 어펜라이트가 오웬에게 끌리는 이유는 동성애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멜빌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기에 가져버린 소설가에로의 미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욕망했던 파우스트도 그 바탕엔 결국 미련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어펜라이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오웬을 통해 미처 쓰지 못했던 소설을 다시금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채드는 예리하게도 오웬과 어펜라이트가 첫 깊은 신체적 접촉을 하는 순간 19세기 빅토리아 소설처럼 그것을 묘사한다. 소설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시기를 말이다. 거기다.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만남 또한 텍스트 읽어주기로 채워나간다.


 그렇게 채드는 어펜라이트의 사랑을 작가가 완벽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빗대어 얘기하고 있으며 바로 그 욕망은 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수비의 기술'을 썼던 그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수비의 기술'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모노로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헨리가 웨스티시 대학에서 처음 보게 된 멜빌 동상의 묘사가 흥미롭기 그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멜빌은 작가인 채드 자신이 가장 도달하고 싶은 이상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동상이 서 있는 웨스티시가 사실은 멜빌이 작가로서 좌절하고 있을 때 방문한 곳이며 그래서 멜빌의 글로 넘치는 웨스티시 자체는 좌절의 글쓰기 현장이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이제 초심자 작가로서 온 헨리는 멜빌 동상에게서 이상한 친근함을 느끼는데 그런데 그 동상의 실상은 이랬다.


 동상은 교정을 등지고 서 있는 바람에 몸 뒤에 채찍질 자국처럼 나 있는 균열과 균열 안에 가득 찬 이끼를 행인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때문에 헨리는 처음부터 뒤죽박죽인 제 머릿속 고민까지 겹쳐서 이 동상이 몹시 고독한 인물로 느껴졌다.(p. 47)


 이 멜빌의 동상 자체가 채드 하바크가 글을 쓰면서 느낀 작가의 모습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늘 도달하려고 헨리처럼 어마어마하게 노력하지만 균열은 늘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지고 또 그 균열이 주는 한계 때문에 두려움에 젖어들어 결국은 고독하게 빈 페이지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작가의 운명을 그는 바로 여기에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채울 수 없는 모자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채드 자신이 작가가 되기위해 나아갈 때 마다 느꼈던 균열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말하자면 '수비의 기술'은 이렇게 작가 자신의 내면과 맨 위에서 말했던 외면의 얘기가 절묘하게 접합된 소설이다.

앞서도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접합'이라고 말했다. '접합'이란 바깥의 세상과 내면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채드 하바크는 그것을 자주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어펜라이트가 오웬을 보려 야구장으로 갔을 때 거기 헨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살펴보고 있던 스카우터와의 얘기가 그렇다. 스카우터는 헨리를 스카우트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그건 또 어펜라이트가 오웬을 유혹 그렇게 스카우트 하는 것과 접합되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접합'은 교착된 평행세계를 드러낸다. 이 소설은 두려움을 지우는 소설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가는 가운데 용기를 주는 소설이라 했다. 바로 그 용기가 접합을 통해 결부되어진 이면의 세계를 바라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 접합에 대한 수수께끼는 2부를 다 훑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 그럼, 2권에서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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