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월 8일(월)
마신 양: 많이
밤 10시 정도까지 버티며 밀린 일을 하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화가 한통 걸려 와서 그게 안되게 되버렸다.
"내일부터 모레까지 본4가 의사고시 보잖아. 학장님 모시고 이따가 격려모임 갈 건데 갈 수 있지?"
밀린 일은 고사하고 닥친 일도 다 못한 와중에 4시 반이 되었고, 송파구의 모텔급 호텔-시험장이 그 근처다-에 둥지를 튼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악수와 더불어 쵸코렛을 전달했다. 그리고 나서 술을 마셨다.
대략 한병 정도 마셨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이? 어찌되었건 너무 정신이 멀쩡해 술일기에 기록하지 말자,는 깜찍한 생각을 하며 집에 갔더니 할머니가 대번에 이러신다.
"내가 지갑에 돈이 하나도 없어야. 어쩐 일일까?"
할머니의 핸드백에는 돈주머니가 있고, 거기엔 늘 만원짜리 몇개가 담겨져 있었다. 집에만 계시니 돈 쓸 곳도 없는데 그 돈이 어디로 갔담? 내가 2만원을 드린 것도 얼마 안되었는데.
"100원짜리도 하나 없어"라고 말하셨을 때, 난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챘다. 당신을 돌봐주는 아주머니를 못믿어서 아주머니가 당신 방을 치우겠다는 것도 한사코 거절하고, 아주머니 방에 놔둔 내 물건들을 내게 하나씩 갖다주면서 "아주머니가 집어갈지 모르니 잘둬라"라고 당부하는 할머니이니, 필경 그 돈을 어디다 깊이 숨겨두셨을 거다. 물론 할머니의 요새같은 방에서 돈이 숨겨진 장소를 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할머니가 그 타령을 하루종일 하셨다는 것. 어머니한테도 그날 몇번이나 같은 얘기를 하소연하셨단다.
"내가 아무리 돈 쓸 데가 없어도 그렇지, 택시 타고 우리집이라도 갈 수 있는데 어째서 날 이렇게 대하냐?"
할머니가 큰 소리를 내며 통곡을 해도 엄마가 못본체 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냥 그 돈은 잊어버리시구요, 제가 2만원 드릴께요."
그러고 나서 내 방에 돌아오니 할머니가 따라오신다.
"나 이런 돈 필요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돈 달라고 이러냐?"
할머니는 돈 2만원을 내게 던지고 돌아선다. 따라가서 위로해야 하지만, 솔직히 귀찮았다.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그리고 글 쓸 때마다 잘해야지 하는 결심을 적어 놓지만, 매일같이 부딪히는 할머니의 타령을 받아주기가 점점 버거워진다.
우리집 근처인데 술 한잔 하자는 친구의 제안을 잽싸게 수락한 건, 아마도 거기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리라. 난 대번에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고,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눈을 제대로 못뜨는 내게 오셔서 다시 통곡을 하신다.
"어제 니가 2만원 준 거 있잖냐. 니 엄마가 너 갖다준다면서 가져가 버렸다. 난 엄마가 자기 돈을 주려나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네? 나같은 것이 돈 쓸 일이 뭐가 있냐는 뜻이겠지. 그래도 그러면 쓰냐. 돈 얼마는 있어야지."
짜증이 몰려오면서 잠이 확 깬다.
"할머니, 그 2만원, 할머니가 다시 나 갖다줬잖아. 필요없다고 하면서."
할머니는 가슴을 세게 치며 통곡하기 시작한다.
"니가 나를 노망한 사람으로 취급하냐. 억울해서 못살겠다. 내가 너희 집에서 밥 얻어먹고 있는다고 그렇게 속여먹는 거 아니다."
할머니는 마루에 나가서, 아주머니를 붙잡고 통곡을 한다.
"내가 죽어야지.... 살아서 밥 얻어먹고 있으니까 이런 수모를 겪네."
할머니 지갑에 몰래 2만원을 넣고 나가면서 마음이 영 착잡했다. 마음은 효손인데 몸은 거의 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