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신 양: 소주 두병, 영안실에서
98년인가 당시 신장투석을 받고 계시던 아버님은 갑자기 어머니한테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각각 독사진을 찍으셨는데, 그로부터 3년 후, 아버님이 그때 찍으신 사진은 영정사진으로 쓰였다. 아버님이 허리에 병이 생겨 일어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혈액투석을 받느라 목에 주사바늘을 꽂고 있어야 했던 게 그 이듬해니,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영정사진을 쓸 수 있던 건 큰 다행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말씀하신다.
“얼마 안있어서 몸이 안좋아지실 걸 아신 걸까?”
그 사실에 감명받은 나머지 어머니께 “나도 영정 사진 찍어놓을까?”라고 했다가 무지하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서른넷의 나이에 불귀의 몸이 된 박재환, 그의 사진 앞에서 절을 두 번 하고 난 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국화꽃 더미 위에 놓여 있는 그의 사진은 박사학위를 상징하는 사각모와 노란색 띠를 걸친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학위 사진은 영정사진 따위로 쓰여서는 아니된다. 아버님이 사진을 찍을 땐 그런 용도로 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박사를 받은 직후, 세상을 향해 몸을 날릴 자격을 막 갖춘 그때, 그가 단 한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평소 잘 웃지도 않는 그가 애써 지은 미소 속에 어디 죽음의 흔적이 있는가. 어머니한테 혼나긴 했지만, 내가 옳다. 영정사진은 매년,까지는 아닐지라도 3년에 한번은 찍어 놔야 한다. 애꿎은 사진이 영정사진으로 둔갑하는 일이 없도록. 지금 내게 갑자기 일이 생긴다면, 나 역시 9년 전, 사각모를 쓴 박사학위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써야 하며, 그런 사진 앞에서 절을 하는 건 두배로 슬프니까.
처음엔 제 정신이 아니던 박재환의 아내, 2월이면 애 엄마가 될 만삭의 그녀는 예상보다 빨리 정신을 수습했는지 의연한 모습이었다. 내 지도교수에게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단다.
“그래도 그가 남겨준 애가 있잖아요.”
너무 세속적인지 모르겠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편견과 차별이 횡행하는 우리 사회에서 여자 혼자 애를 기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기에. 최근 4년 사이에 난 젊은이의 죽음을 세 번이나 경험했다. 하나는 결혼 일주일 전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당시 인턴이던 내 지도학생이며, 두 번째는 평소 음주운전을 습관적으로 하다가 결국 음주운전으로 사고사한 모교 비서의 남편이고, 세 번째는 바로 박재환이다. 세 건 모두 남자가 죽었다는 게 공통점인데, 슬픔의 정도를 계량화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내 나름의 순위를 매겨 본다면, 가장 슬퍼할 사람은 박재환의 아내고, 두 번째는 모교 비서고, 세 번째는 내 지도학생의 아내가 될 뻔한 여자다. 이 기준은 순전히 남은 여자가 새 인생을 살 수 있는지 여부, 2월에 태어날 아이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의 존재는 그녀가 새 삶을 살 가능성을 많이 줄여 놓을 것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이 따위 한심한 소리를 하는 이유는, 여자 혼자 애를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그 아이의 삶이 신산하지 않기를 바라마지 않지만, 글쎄다. 우리 사회가 그리 따스한 사회가 아니라서.
* 전에 말한대로 그의 사인은 장파열이고, 외부의 충격에 의한 것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다. 타살로 단정지은 검찰은 수사를 지시했는데, 범인이 잡힌다면 박재환이 살아 돌아오지는 못할지언정 그의 넋이 조금은 위로받지 않을까. 아쉬운 대목. 장파열이 된 이후 바로 병원에 갈 수 있었다면 그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벤치 밑에 숨겨진 그를 발견한 사람은, 아쉽게도 한 사람도 없었고, 결국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는 너무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