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작년에 몇 번 마셨어요?”

내게 지난 한해 동안 술을 마신 횟수를 묻는 분이 몇 있었다. 예년과 달리 내가 술일기를 제때제때 챙겨쓰지 못한 탓인데, 컴퓨터 앞에 앉은 김에 작년 통계를 뽑아 봤더니 131번이다. 매우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소주 한병을 마셨던 술자리와 소주 한병을 넘게 마신 낮술을 제외한 거니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은 못된다. 사실 사흘에 한번을 마셔도 120번이니 더 줄여야지 않을까?


새해라고 뭐 달라질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2007년을 맞는 내 각오는 제법 단단했다. 첫 출근을 한 어제 아침만 해도 비어 있는 스케쥴란을 보면서 뿌듯해하기도 했으니까. 지인에게 말했다.

“나 오늘부터 학교에서 합숙하며 일할 거야!”

그럼으로써 돼지해에 돼지에서 벗어나자는 음험한 욕망도 있었는데, 운동을 제법 하는 내가 살이 계속 찌는 이유가 남들이 지적한대로 술 때문이니, 학교에서 살면서 영양이 부실하기로 유명한 학교식당 밥을 먹고 산다면 다이어트도 저절로 되지 않겠느냐는 것.


근데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 일이 엮여서 점심부터 삼겹살을 구웠으며-근데 거기 가보니 새해 둘째날 고기를 먹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모교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이번주 금요일 지도교수댁에서 신년회 있으니 오시랍니다”란 연락을 받았고, 금요일은 원래 술약속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학장님이 “오늘 보직 맡은 사람들끼리 저녁이나 먹지”라고 말한 것. 십년 이상 되는 선배들이 소싯적에 나이트에 간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조용히 술잔을 비웠고, 술자리가 파했을 무렵엔 제법 술이 취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에 갔고, 열심히 소주를 비웠고, 도대체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우리집이다. 귀소본능을 발휘해 준 내게 고마워하는 찰나, 둥그렇게 뭉쳐진 봉투가 눈에 들어온다. M 자가 선명하게 그려진....


 

저, 저것은.....! 갑자기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려진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사고 있는 내 모습이, 그리고 집에서 그걸 우걱우걱 먹고 있는 모습이. 전에 냄비를 태워먹은 이래 라면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보호본능이 나로 하여금 햄버거를 사게 만든 것. 자, 이제 따져보자. 삼겹살에다가 복 지리를 먹고, 안주를 먹고, 정종에다 소주를 잔뜩, 거기에 햄버거까지-이게 다이어트 원년을 선포한 첫 출근날 내가 먹은 것들이다. 술을 먹던 이가 갑자기 술을 끊는다는 건, 그럼으로써 다이어트에 성공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 사람이 보직을 맡고 있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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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적오리 2007-01-0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저랑 다이어트 내기 하실래요?

Mephistopheles 2007-01-03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이라는 글자에 화들짝 놀란 메피스토...
(학생들은 방학인데 교수님은 바쁘신가 봐요..^^)

H 2007-01-0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자 봉투의 정체가 맥도널드였다니..ㅋㅋ
저희 동네 맥도날드는 24시간 운영하더라구요.
저도 새벽 3시에 후렌치 후라이 사 먹으로 간 적이 있는데..-_-


하이드 2007-01-03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호! 황금돼지해~

짱꿀라 2007-01-0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시님은 꼭 올해에는 성공하시리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근데 술 끊으시면 술 이야기가 혹시 중단되는 것 아닌지요.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인에요. 그러면 마태우스님을 사랑하는 독자들(저를 포함해서)이 혹시 반란이라도 일으킬 염려가 있사와요.^^

해리포터7 2007-01-03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보호본능이 제대로 작용했군요.

moonnight 2007-01-0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전 이번주엔 어쩐 일인지 계속 골골하고 있어요. 저도 술을 좀 줄여야지. 하고 목표를 세웠답니다. 함께 노력해요! ^^

무스탕 2007-01-0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후배 하나도 다이어트 맘 먹고 젤로 먼저 한게 술 끊은거에요.
(문제는... 여자 후배라는거... -_-)
그랬더니 정말 날씬해 졌어요! 물론 하루아침에 이룬 업적은 아니지만 정말 이뻐졌어요.
마태님도 분명 크게 영향을 미칠거에요.
옷 얇게 입는 여름을 기대할테야요~ ^^

춤추는인생. 2007-01-0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제가 요즘 매일같이 체중을 제는대요. 그전날 라면먹는것보다도
술먹는게 훨씬 타격이 크다는걸 알았어요... ;; 술은 정말 무서운애예요.

클리오 2007-01-0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을 끊기 전에는 다이어트가 힘드리라고 봅니다. 보직을 맡고 있다면 더욱... ㅋㅋ

미래소년 2007-01-0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M자에 저도 깜딱! 놀랐습니다 ^^
그나저나 돼지해에 님은 "식복" 하나는 보장받으신 듯~
(약간 늦은 듯 하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태우스 2007-01-0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소년님/전 돼지되기 싫어요...흑. 님도 새해복많이...
클리오님/일단 보직을 그만두고...그 후 술을 끊는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요?
춤추는인생님/전 그 무서운 애랑 너무 친하다는 게 문제..... 저도 체중을 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떳떳하게
무스탕님/저도 그 후배님을 따라서 뭔가 해보고 싶은데...관성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한번 가던 길로 계속 가려는 경향...주위에서도 안도와주고... 속세를 아예 떠날까 싶어요
달밤님/너무 알찬 연말을 보낸 탓이라고 생각해요. 저랑도 놀아주시면 다 나을 거예요
해리포터님/라면을 햄버거로 대신한 보호본능이 과연 바람직할까요...ㅠㅠ
산타님/저기요...술 줄이겠다는 소리는 연초면 늘 하는 얘깁니다. 너무 괘념치 마소서.
하이드님/그러니까, 저의 해군요...ㅠㅠ
에고이스트님/후렌치 후라이의 칼로리가 더 높다는 설이 있던데....으음...24시간 하다니..
메피님/마음은 좀 여유롭지만 일은 여전히 많다는.........ㅠㅠ
해적님/전 식탐을 버리지 못할 거예요 엉엉. 내기하면 무조건 님이 이기삼.
속삭이신 ㅂ님/말씀 감사합니다. 님 말씀 잘 들으면 훌륭한 사람 될텐데...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