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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의 말 - 파리에서, 밥을 짓다 글을 지었다
목수정 지음 / 책밥상 / 2020년 3월
평점 :
음식에 관한 책은 수도 없이 많지만,
쓰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역사학자가 쓴다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음식의 역사를 쓰고,
지리학자가 쓴다면 세계 각국의 음식을 쓸 것이다.
기생충학자라면 기생충이 즐겨먹는 음식을 쓰지 않을까 싶은데,
파리의 생활좌파 목수정이 쓰는 음식 책은 과연 어떨지 궁금했다.
읽어본 소감은 역시나, 였다.
내 예상과 맞아떨어졌다는 게 아니라
음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 줬다는 점에서 ‘역시나’였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대목 세 군데만 얘기하자.
첫 번째, 목수정의 부모님은 민주주의자였다.
그 집에선 요일마다 가족 한 사람이 그날 먹고 싶은 메뉴를 정했다고 한다.
월요일은 아버지, 화요일은 어린 목수정, 수요일은 목수정의 형제자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것의 장점은 아이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식단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점인데,
목수정의 어머니는 떡볶이, 짜장면, 오므라이스, 통닭 등등 아이들이 써넣은대로 음식을 차려주셨단다.
그 결과 목수정은 “매일이 원하는대로 실현되는 이벤트를 기다리는 흥분과 기대로 채워”질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목수정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평등한 권리를 행사했던 그 시절부터 잉태된 게 아닌가 싶다.
목수정의 어머니가 혼자 이 모든 메뉴를 다 장만하셨다는 점은 아쉽지만 말이다.
두 번째, 요리는 설거지보다 힘들다
이 책에 따르면 프랑스 남자들은 요리 두세가지 쯤은 기본적으로 할 줄 안단다.
그런데 목수정의 남편은 요리에 잼병이라 설거지만 한다나.
이 정도면 넘어갈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지만, 목수정에게 그건 정의가 아닌 것 같다.
갑자기 옛 생각이 났다.
남이 차린 음식을 먹고 싶다는 아내의 말에 요리학원을 등록해 주말마다 두 달을 다녔다.
하지만 요리학원에서 난 지진아였고,
집에 와서 배운대로 요리한 음식은 다 엉망이었다.
아내는 내가 요리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내가 뭐 실험 대상이야, 엉?”
난 하던대로 설거지만 하게 됐고, “남이 차린 음식을 먹고 싶다”는 아내의 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셋째, 설거지만 잘하면 되지, 라는 내 생각에 브레이크를 거는 대목 하나.
유럽에선 은퇴한 이들이 모여 사는 참여형 주거공간이 인기를 끈다는데,
이곳의 특징은 하루 한두끼, 공동의 부엌에서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
한 할머니의 말이다.
“은퇴 후 주거공간을 참여형으로 계획할 때, 여성들은 남성들과 따로 있는 게 편해. 남자들은 평생 여자들에 의해 돌봐지는데 익숙해 있잖아...그래서 여자들은 여기 와서까지 또 남자들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거지.” (154쪽)
다시 요리를 시작해 볼까 싶다.
소개한 에피소드만 봐도 이 책이 여느 음식책과 달리,
삶의 방식과 이를 지탱하는 노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독특한 책이라는 걸 알 것이다.
이렇듯 주관이 뚜렷한 책을 읽는 건 독자로서 기쁨인데
딱 한 군데 동의하지 않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자폐증이 제초제 성분과 유전자조작 식품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자폐증이 늘고 있는 건 맞지만, 글쎄다.
일부의 사례를 가지고 그리 쉽게 단정할 수 있을지.
자폐증에 관한 최고의 책 <뉴로트라이브>는 그런 물질들이 없는 태고의 인류에게도 자폐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 부동의는 책의 극히 일부에 관한 것일 뿐,
이 책에 대한 나의 지지는 확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