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월 9일(화)
마신 양: 소주 두병 반?
전날의 폭음 탓에 아침엔 눈이 잘 안떠졌고, 하루종일 고분에서 채취한 흙만 들여다보고 있자니 피로가 극에 달했다. 오죽했으면 잠자기에 별반 좋은 환경이 아닌 모교 실험실에 엎드려 40여분을 잤을까 (그러고 나면 다리 겁나게 저리다...). 약속 장소로 나가면서 난 '집에 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난, 내가 생각해도 정말 신기할 정도로 용수철같은 인간이다. '처음처럼'을 앞에 두고 있으니, 수정처럼 맑은 그 액체를 몇잔 들이키고 나니, 안주로 시킨 암퇘지볶음을 두어점 집어먹고 나니 몸 깊은 곳에서 에너지가 분출한다. 그래서 난, "피곤해 보인다"는 친구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야생마처럼 술을 마셨다. 따르고 마시고 물한잔 먹고, 따르고 마시고 물한잔 먹고 안주 한점 먹고. 음주는 매우 단순한 동작의 반복이건만, 매번 다른 분위기의 즐거움을 내게 선사한다. 술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술을 안마심으로 인해 얻게 될 시간을 난 도대체 어떻게 사용했을까?
이날 내가 만난 친구는 잘나가던 KBS 피디를 그만두고 다시 수능공부를 해서, 4수 끝에 부산에 있는 약대에 입학한 사람이다. 수능 공부를 하면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화학과 생물을 가르쳐 달라고 괴롭힐 때, "피디로서의 재능이 아깝지 않냐. 복직이 어떠냐"고 꼬셨을 때, 시험이 끝나고 갈만한 약대가 없다고 한숨을 쉬던 때가 지금 보면 다 엊그제같기만 한데, 그가 벌써 올해 약대 3학년이 된다. 2년 이맘때면 그는 졸업반으로, 뭘 하든지 약에 관한 업무를 하고 있을 거다. 세월이란 그런 건가보다. 당장은 그때까지 이룬 게 아깝게 생각되고, 언제 다시 새출발을 하냐 이러지만, 막상 시작을 하고나면 어느 새 결승점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격언은 그러니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해부학 조교를 2년 하다가 "이걸로 평생 밥벌어먹을 생각을 하니까 심난해서" 그만둬버린 내 친구는 대전에서 이비인후과를 하면서 잘나가고 있고,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군에 갔다가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사법고시를 본 친구는 지금 강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 (다행히 성공해서 그런 거겠지만) 그들에게서 난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면 괜히 내가 뒤쳐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난 왜 내가 가는 길에 만족하는 걸까. 왜 한번도 내 길에 회의를 가져 본 적이 없을까. 교수로서 마땅히 해야 할 강의와 연구에 모두 능하지 못한데도 말이다. 그건 아마도 지금 내가 받는 대우가 내 능력에 비해 훨씬 과한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리고 내가 어떤 길을 가던지 지금만큼 되지 못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내 길에 대한 회의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리라.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갑자기 술 생각이 난다. 오늘 한번,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 보리라. 히히힝! 난 야생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