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이벤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내 연구실에 있는 동물이 뭐냐는.

기억나는 분도 계시겠지만-특히 다락방님-정답은 뱀이었다.

 

뱀을 연구실에 놔둔 이유는

11월 10일 쯤 뱀에서 나오는 기생충을 끄집어 내서 쥐한테 먹여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뱀이 다 땅속으로 들어가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두달이나 빠른 9월 초에 뱀을 잡았던 거였다.

뱀 전문가한테 물었다.

"그러면 두달 동안 뱀이 안죽나요?"

"걱정 마세요. 내년 1월까지도 잘 살아있을 거예요."

 

하지만 뱀을 놔두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뱀의 분비물 때문에 냄새가 많이 났고,

이상한 벌레가 꼬여 연구실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루에 십여마리씩 일하다 말고 벌레를 잡다가 안되겠다 싶어 뱀을 놔둔 곳에 가보니,

이럴 수가. 거기는 정말이지 벌레의 온상이었다.

새끼부터 어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벌레가 들끓고 있었던 것.

어쩐지 아무리 잡아도 끝이 없다 했다.

냄새도 냄새지만 기분나쁜 벌레들까지 같이 살아야 하니,

그 두달은 내게 큰 고역이었다.

그런 내게 유일한 희망은 어서 빨리 11월 12일이 되서 뱀을 잡았음 좋겠다는 거였다.

 

참, 중간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어느날 출근을 해보니 뱀이 없어진 것.

큰일났다 싶어 여기저기를 다니다보니 청소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잔뜩 가지고 가고 계신다.

쫓아가서 물어봤더니, "벌레가 많이 나와서 버렸다"고 하신다.

다행히 버린 지 얼마 안되는 거라 바로 꺼낼 수 있었다.

"그거 뱀이어요"라고 하니까 아주머니는 격하게 놀라신다.

"그래서 제가 절대 손대지 마시라는 글귀도 써놨는데요"

그 종이가 떨어졌는지 아주머니는 못보셨단다.

단지 양파 주머니 속에 들어 있기에 양파인 줄만 알았다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아주머니가 그 내용물을 보셨다면 아마 기절하셨을 듯.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난 뱀 전문가와 천안역에서 만나 실험실로 갔다.

가면서 말했다.

"뱀이 죽었을까봐 걱정이어요."

그가 놀란다. "아니, 그동안 뱀을 전혀 돌보지 않았단 말인가요?

흙도 좀 넣어주고 그래야 하는데..."

난 요즘 트렌드대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냥 놔두기만 해도 1월까지 산다고 했잖아요!"

마지막으로 뱀을 확인한 건 한달쯤 전이었다.

그때 뱀을 보고싶다는 동료의 딸 때문에 박스를 열었는데

그때만 해도 뱀은 잘 살아 있었다.

그 후론 뱀이 징그러워 확인할 엄두도 못낸 채 한달이 흘렀다.

제발, 제발 하는 마음에 실험실로 가서 확인해 봤더니

뱀은 모조리 죽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뱀이 죽었으니 그 안의 기생충도 이미 죽어 버렸을 테고,

난 뱀값 수십만원을 그냥 날려야 했다.

그러게 10월 중순 경에 뱀을 잡을 걸,이라며 뱀 전문가한테 따지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저질러져 버린 것을.

 두달, 두달만 좀 살아있어 달라는 게 그렇게 무리한 부탁이었을까 하며

나보다 인내심이 없는 뱀들을 잠시 원망해 보지만,

아무 희망도 없이 박스 안에 갇혀 있는데 무슨 낙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난 지금 뱀의 넋을 기리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뱀아, 미안하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려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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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1-1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아 이런.....
아 이런....
아 이런....
orz

마태우스 2012-11-12 21:25   좋아요 0 | URL
다락님의 고운 마음씀씀이가 느껴집니다 뱀도 좋은 곳으로 갈 거예요

레와 2012-11-1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OTL

(저는 좌절 'OTL' 대문자로 남깁니다. 다락방님 보기보다 소심하시군요!ㅋㅋㅋㅋㅋ
앗 뱀의 넋을 기리는 페이퍼에 웃음이라니, 미안합니다.
제 사과를 받아주세요..ㅡ.ㅜ)



마태우스 2012-11-12 21:25   좋아요 0 | URL
저는 받아드렸는데 뱀이 받아주실지....^^

마립간 2012-11-12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충학 교실의 가족이라 칭함을 받으려면, 기생충을 보고 '귀엽구나'라고 느끼면 자격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뱀까지 귀여워하셔야겠군요.

마태우스 2012-11-12 21:25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아직 뱀을 귀여워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

다크아이즈 2012-11-12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파 망 속엔 설마 뱀을 잡아 먹은 벌레 무더기들?
뱀 주변에 꼬인 벌레들의 살아있는 무덤 같습니다.
마태님의 비탄 어린 하이 유머에 살짝 미소짓습니다.
웃어도 되는 거 맞지요?

마태우스 2012-11-12 21:26   좋아요 0 | URL
양파 망 속엔 그냥 뱀 시체들이 들어 있어요. 제일 가슴아픈 게 뱀이 모두 일정한 시간에 죽은 게 아니잖아요. 죽은 동료와 함께 있어야 하는 뱀의 슬픔....ㅠㅠ 웃으셔도 괜찮습니다. 근데 뱀한테 혼나실지도...^^

비연 2012-11-1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뱀의 명복을............................
(그러나 마태님의 글은.. 왠지 슬며시 웃음이..우히)

마태우스 2012-11-12 21:27   좋아요 0 | URL
명복 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뱀이 저한테 화를 많이 안낼 것 같다는....

Mephistopheles 2012-11-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뱀이..혹시....
요즘 치약 혹은 칫솔 CF를 노리시는 야클님이 말한 뱀술의 원료는 아니겠군요.

마태우스 2012-11-12 21:2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저거 한 마리만 있어도 좋은 뱀술이 만들어질텐데요

울보 2012-11-1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ㅇ이런,,저도 함께 빕니다,

마태우스 2012-11-12 21:28   좋아요 0 | URL
따뜻한 마음씨의 울보님, 감사합니다.

조선인 2012-11-1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마태우스님, 미워. 뱀은 굶어죽은 걸지도 몰라요. =3=3=3
(그런데 뱀에게 나온 기생충을 쥐에게 먹인다구요? 기생충 걸린 쥐를 뱀에게 먹이는 게 아니라 그 반대라니 신기해요. 원래 뱀의 배설물을 쥐가 먹어서 감염되는 건가요? 궁금 궁금 궁금해요.)

마태우스 2012-11-13 11:24   좋아요 0 | URL
뱀은 원래 그전에 충분히 먹고 9월부터 겨울잠을 자거든요. 근데 온도가 너무 높았나봐요 암튼 뱀한테 겁나 미안합니다. 글구... 뱀에서 나온 기생충을 쥐에게 먹이는 건 사실 생물학적 먹이사슬과는 반대죠. 원래 개구리를 뱀이 먹고 그 뱀을 사람이 먹어서 걸리는 건데, 사람으로 할 수 없으니 쥐로 하는 거랍니다.

조선인 2012-11-13 12:0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구나. 자세한 설명 고마워요.

재는재로 2012-11-12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복을 빕니다 이런게 보니 뱀도

마태우스 2012-11-13 11:25   좋아요 0 | URL
네..감사합니다. 뱀도 좋은 곳으로 가길

blanca 2012-11-1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은 슬픈 이야기네요. 그러면 뱀으로 하시려고 했던 연구는 어떻게 하세요?

마태우스 2012-11-13 11:25   좋아요 0 | URL
다시 뱀을 구해야 한답니다. 고생만 죽어라 한 뱀들에게 미안하죠

saint236 2012-11-1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 뱀을 양파 망 안에 그대로 넣어두신 것인가요? 두 달동안? 그럼 당연히 죽습니다. 커다란 플라스틱 수조나 박스, 그것이 없다면 뚜껑을 만들어 달 수 있는 박스 안에 넘허 두기라도 하면 그나마 좀 살았을텐데요. 어릴적 동네에 땅꾼이 있었습니다. 뱀 잡는 것에서부터, 잡아먹기까지 키우는 것들을 다 보면서 자랐지요. 지금 겨울로 들어가지만 땅꾼들 가운데 겨울잠 자는 그 녀석들을 습격해서 잡아오는 분들이 있으니 그 쪽으로 공략을 하심이.^^;

moonnight 2012-11-13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뱀은 깨끗한 동물이라는 느낌인데, 냄새가 많이 나는군요. -_-;;;;;
아아. 그런데 마태우스님 말씀처럼 죽은 동료와 함께 지내야 했다면... 너무 슬픈 일이네요. 뱀들에게 미안해요. ㅠ_ㅠ
명복을 빕니다. 흑. ㅠ_ㅠ

게다가 또 뱀들을 키우셔야 하다니, 더욱 슬퍼지는군요. -_ㅠ

i_m_sora_ 2022-07-1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동물윤리 땅바닥에 처박아버린 동물학대를 자랑스럽게도 쓰셨네요. 그와중에도 인내심이 나보다 없니~ 하면서 피해동물 후려치기까지! 완벽합니다 👌

i_m_sora_ 2022-07-11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뱀 전문가와 천안역에서 만나 실험실로 갔다. 가면서 말했다. ˝뱀이 죽었을까봐 걱정이어요.˝ 그가 놀란다. ˝아니, 그동안 뱀을 전혀 돌보지 않았단 말인가요? 흙도 좀 넣어주고 그래야 하는데...˝ 난 요즘 트렌드대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냥 놔두기만 해도 1월까지 산다고 했잖아요!˝

i_m_sora_ 2022-07-11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곱씹어볼수록 재치넘치는 명문이네요. 그 뱀 전문가님은 작성자님을 어떻게 봤으련지요? 잘못은 인정하지 못할 망정 요즘 트렌드요? ㅋㅋ 어떻게 이런 글을 자랑스레 올리셨는지? 애초에 제목에 뱀이 들어간다는 것을 제외하면 해당 책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요? 본인이 뱀의 뇌를 발휘해서 해당 글을 쓰셨는지요? 자아는 산만큼 비대하셔서 아무도 안 물어보고 안 궁금했는데 본인의 동물학대를 절구절구 적어내시다니. 대견하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