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번째: 8월 4일(금)
필라델피아에 갔던 분이 나를 위해 모자를 사 주셨다. “네게 모자가 많으니 하나만 달라”고 하는 대신, “네가 모자를 좋아하니 하나 사주겠다”는 태도는 얼마나 훌륭한가. 덕분에 난 빨간색의 멋진 모자가 생겼는데, 70개가 넘는 모자 중 정품으로 따지면 그게 4번째 쯤 될 거다. 황소곱창은 자리를 옮겼음에도 무지 맛있었고, 냉방 시설이 무척 열악한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모자 증정식엔 내 영원한 벗 야클님도 함께 해주셨다.
86-87번째: 8월 18일(금), 8월 19일(토)
맨날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놀 건 다 노는 나, 오래 전부터 잡힌 친구들과의 부부 동반 여행에 참여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친구의 아이들에게 난 인기 폭발이었고, 그 절정은 수영장에서였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수영 팬티 벗기기 놀이’를 좋아해, 그 놀이를 하면서 두시간 가량을 놀았다. 전에 봤을 때는 5월이었고 지금이 8월이니 불과 석달 차이밖에 안났지만, 그 석달간 애들이 무척 자란 듯 싶다. 그전에는 물속에서 그들을 따돌리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이번엔 그게 쉽지 않았고, 결국 애들한테 붙잡혀 팬티가 완전히 벗겨질 뻔한 위기에 몰린 것도 세차례나 되었다. “살려달라”는 말을 했고, 심하게 저항하느라 아이 한명의 발이 까지는 일도 있었으며, 모르는 아이의 배를 발로 차기도 했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는-.-). 혹시 그 석달간 내가 늙어버린 건 아닐까?
늙었든지 말던지 변함이 없는 건 주량. 첫날 난 홀짝홀짝 맥주를 마시기 시작, 여덟캔을 마심으로써 건재를 과시했고, 둘째날은 고추참치를 안주 삼아 소주 두병을 비웠다. 난 남이 술을 따라주지 않아도 별로 신경을 안쓰고, 다른 사람이 마시던 말던 내 술을 꿋꿋이 마신다. 우리 친구들 중 술이 센 애는 하나도 없었기에 나 혼자 열심히 마셨다. 타지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지만, 술은 날 조금 더 행복하게 해줬다.
88번째: 8월 21일(월)
지도교수 생신 겸 해서 마련된 술자리, 다른 대학에 있는 친구와 술값을 똑같이 내기로 했는데, 집도 다섯채인 그 친구가 저항해서 애를 먹었다. 훨씬 비싼 1차를 내가 냈는데, 그 친구는 겨우 4만여원이 나온 2차를 자기가 냈다고 3차로 간 불닭집 계산을 안하겠다고 우겼다. 집도 다섯채 있는 놈이 말이다. 차근차근 타이르고 협박도 하고 했더니 투덜거리며 계산을 한다. 2, 3차를 다 해봤자 내가 낸 것의 3분의 2도 안될 텐데, “똑같이 내자”는 애초의 약속은 그새 잊어버린 걸까? 그런 투철한 정신을 가졌기에 다섯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거겠지만.
그날 모임은 내 유머가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 줬다. 지도교수가 귀가한 뒤 3차를 가면서부터 내가 수다를 떨기 시작했는데,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오는 말마다 10점 만점에 7점 이상되는 유머였으니, 그간의 수양이 이제야 빛을 발하나보다. 밤 11시 반이 되었는데도 애들은 갈 생각을 안하고 내 입만 바라봤다.
89번째: 8월 23일(수)
* 이걸 보시고 “바쁘다는 거 다 거짓말이었구나”고 하실지 몰라도, 저 정말 일 열심히 합니다. 믿어 주세요.
테니스를 같이 치는 분들에게 한 턱 쐈다. 쏜 이유는, 거기 입단한 지 일년만에 코트를 평정했기 때문. 물론 실력으로 따지면 내가 많이 모자라지만, 내게는 옆의 파트너로 하여금 자기 실력 이상을 발휘하게끔 만드는 능력이 있는지라 복식을 주로 하는 아마 테니스에서 빛을 발할 수밖에. 이겨야 할 사람들을 다 이기고 나서 사는 저녁은 무척 짜릿했다. 그리고 월요일과 화요일 계속 빛을 발했던 내 유머는 그날도 멈출 줄 몰랐는데, 열명이 넘는 40대 아줌마, 아저씨들을 앉혀놓고 나 혼자 떠들었다. 처음 가입해서 말없이 밥만 먹던 장면, 그리고 웃겨 보려고 말을 했지만 개미만큼의 반향도 얻지 못했던 수많은 나날들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테니스를 평정한 게 그들이 치는 공에 익숙해진 덕분이듯, 내 유머가 그들에게 먹히는 것도 내 유머에 그들이 적응한 결과이리라. 그렇게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작용과 반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뉴톤 선생의 말씀이 딱 맞는 것 같다. 밥값이 나오긴 했지만 내가 성별, 연령, 종교에 무관하게 어떤 계층의 사람도 웃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90번째: 8월 24일(목)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 전 주에 여행을 같이 갔던 바로 그 친구, 산적한 일을 미루고 빈소로 달려갔다. 친구 아버님은 5년간 병원에 누워 계셨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는 걸 알려 주신 우리 아버님이 풀 타임으로 입원해 계신 건 겨우 3년, 친구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난 여전히, 우리 어머님이 더 힘드셨다고 생각한다. 병도 환자도). 그 동안 내가 그에게 너무 무관심한 게 아니었나 반성하게 된다.
원래 난 그날 술을 안 마시려 했다. 요즘 몸이 좋지 않다는 걸 느낀 탓인데, 아침이면 이유없이 헛구역질을 하고, 장이 약해졌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심하게 늘어난 배변 횟수 때문에). 하지만 11시 반 쯤 소주 두잔을 마시고 나니 갑자기 속이 편해져, 한병 반을 혼자 달렸다. 그 결과 다음날 고생을 했고, 다음날 하루 종일 설사에 시달렸다. 친구 아버님은 오늘 한 줌의 뼈로 화하셨고, 학교 일 때문에 난 친구와 같이 있어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