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90년대 산업사회의 올드노멀과 그 이후 급속한 뉴노멀에서 구조적으로 바뀐 것은 무엇인가. 바뀔 것을 제대로 예측했는가. 학자나 사상가들이 말한 대안은 증상의 일부만 서술했던 것은 아닌가. 무엇을에 집착해 어떻게 다른 시선으로 볼 생각들이 모자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시간은 지났고 조금만 둘러보면 누구나 경험해냈다. 지난 과거를 본 이론이 과연 합당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론을 되돌아보고 정정할 것은 정정하고 폐기할 것은 폐기하고 보탤 것은 보태야 하는 것은 아닌가?
데카르트가 육체와 영혼, 신체와 정신을 나누어 진리나 궁극을 위해 탐구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런 데카르트의 분류에 못마땅해했다. 스피노자는 삶과 죽음, 삶의 지복에 관해서만 모든 탐색을 지속했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코나투스란 덧셈이란 곱셈이란....그래서 그는 육체와 정신을 빙빙 돌려 서로 나가떨어지게 하지 않는다. 그의 사유엔 늘 그 둘을 잇는 감각, 감정, 정서, 정동으로 살아숨쉰다. 관념과 물질로 나눠서 따로 따로 놀지 않는다. 심상을 매개로 실제 나에게로 흔들리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짚어내게 만든다.
올드노멀에 뿌리내린 학자나 사상가들. 아감벤, 바디우 액체근대 벌거벗은 생명 등등은 버려지고 황폐해지는 증상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았지만 그 사이사이를 살아숨쉬게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다. 지끔까지의 이론들은 관념이나 물질의 한 면만 종합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넘지는 못한다. 정서, 정동은 과연 어떻게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표류하는 우리들을 제대로 살펴볼 수는 있을까 극우의 선동에 30-40%가 쓸려가는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낼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친밀함을 원한다. 호혜성도 그 방편이기도 하다. 세상이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이라면, 변화가 느리고 한 세대이후 안정성 있는 삶이 보장된다면 느긋하고 한가롭고 사교가 예측가능하고 삶도 그러하다. 올드노멀을 그렇게 살아낸다. 굳이 맞벌이가 필요없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 삶들은 압축적 근대화란 명명처럼 우리는 전지구인들은 몸소 겪고 있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올드노멀의 쓰레기더미을 뒤지는 것이 지금의 세대다. 아니 뒤질 것조차 없어 히키꼬모리다. 우울이다.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 지금이 원하는 것은, 하루하루 살아내더라도 친밀함의 한끼 밥이 필요하다. 카페인 없는 커피, 연애와 결혼은 말도 못해 썸타기와 어장관리, 쿨함, 무관심, 체념하는 것 자체가 삶의 성취이자 목적이 되지 않으면 위태로운 하루를 견딜 수 없다. 우리는 딱딱 떨어지는 고체같은 주체와 개인이 아니게 된 것이다. 디딤돌이라고 여겼던 생각이 지표들은 다 녹아가며 그 토대가 흔들리고, 떠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은 통제할 수 없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 다 내탓이다. 이생망 탕진잼 이런 극단의 두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죽어간다. 나를 두드려주는 타인은 없다. 온통 내탓내탓하다가 앓는다. 앓다가 먹고 마시고 도박하고 포르닉하고 중독들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낸다. 모두 아Q이자 거의 좀비다.
바틀비는 계속하지 않겠습니다.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하면서 체제에 저항했지만 그 또한 올드노멀이다.
아이들에게 꿈이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어른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꿈이 무언지 모른다. 그것을 찾아내기가 무척 어렵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원할 수 없다. 망막함과 위태로운 간두에 서서는 그저 나를 구제해줄 느낌적느낌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다. 정동의 지능은 애착을 갖는 것을 찾기 마련이다. 유동하는 주체, 유동하는 계급, 정동적 계급은 순응과 저항의 이분법적 시선으로 묘사해낼 수 없다.
이 책은 이런 것들을 흔든다. 뿌리채. 그러니 읽어내려 노력해야 한다.
볕뉘
4.4 세계헌법 수호의 날. 작은 책방에 모여 큰 소리내서 기뻐하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맘껏 기쁨을 나누며 일상과 대안을 짚어봅니다. 백색소음의 시대에서 뭔가 다른 소음을 만들어가는 존재들. 그 사이에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보라. 여기가 이타카다. 저기가 아니라 지금여기. 뭔가를 시도하는 맛. 삶에서 제일 진한 맛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