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발견>이란 제목은 일간지에 연재한 작가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그녀의 주요한 소설들과 작가 비평들을 읽어내고서야 이 책이 무척 중요할 수 있구나 하는 무게감을 감지하게 된다. 짬짬이 읽어내고 있는 순간. 그 일상에서 포착해낸 글들이 소설의 문장으로 주인공으로 변신했다는 걸 체감한다. 그리고 글쓰기가 그녀에게 무엇인지, 무엇을 쓰려고 하는지는 점점 명확해지며 두터워진다. 


이 세상이 아직 아닌 말들. 태어나는 말들. 그녀의 생각들이 어떻게 여무는지도 꽃피듯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지금은 1968년 가을. 아니 반대편은 봄. 봄 이야기를 읽고 있다. 생각의 겹침. 머무르는 시선. 머물러야 할 장소들. 지 시대에 살아가는 것. 시간의 격차는 거의 없다시피 그렇다. 비슷하다. 그녀는 화상을 입고 죽을고비를 넘기면서 타자기로 쓴 글을 송고하면서 말한다. 구둣점 하나하나 나의 호흡이자 떨림이니 교정이나 수정을 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아이키우기. 가정부 이야기. 어릴 적 반품고아가 임신한 이야기. 유명해지지 말아야되는 코멘트. 향수와 꽃, 장미의 향기에 대한 이야기. 하나하나 일상을 비집고 나오는 이야기들을 쓸 수밖에 없던 그 과정을 살펴준다. 그래서 고맙고 소설들 만큼이나 짜릿한 전율이 전해져 온다 싶다. 어쨌든 이 무더운 여름에 기대되는 독서의 순간들로 점철되어 행복하다. 그녀의 말대로 기쁨이다. 기쁨이 흘러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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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다. 새벽이나 저녁밤 말고 대안은 없을까. 근질근질해지는 몸은 활로를 찾는다. 그나마 가까이 자리잡은 곳은 안계저수지 숲과 송도솔밭이다. 구름이 있는 날이면 땡볕과 그늘 안은 5도 정도 기온차이가 난다. 그래서 달릴만 하기도 하다. 어쩌다보니 이런 생각은 숲길을 검색하다가 경주로 건너가보기로 한다. 사진사들이 이른 새벽이면 소나무숲을 찍기 위해 대기하는 곳이다. 황성공원. 맥문동도 아름다운데 그 숲길로 건너가 달려본다. 그런데 아쉽다. 아스팔트길과 한 바퀴가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래서 거침없이 점핑이다. 경북천년의숲정원. 황성공원에서 차로 십분거리다. 


숲그늘로 우거진 이곳을 그야말로 아름다운 곳이다. 온갖목백일홍 숲도 징검다리도 운치있고 좋다. 하지만 이 곳 역시 부족해서 진평왕릉으로 옮긴다. 불과 오분거리다. 이곳에 명활산으로 이어지는 벚꽃가로수길이 있다는 걸 몰랐다. 선덕여왕길이라는 푯말도 보이고 2k거리가 온통 그늘이다. 그렇게 가니 코앞이 보문호다. 내친 김에 달려본다. 여기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숲길 팔할 달릴만 하다.














성공원 숲길보다는 송도솔밭이 황토길도 길고 순환로와 그늘도 1.5k로 길다싶다. 폭염이 무섭기만 하였는데, 그래도 이렇게 틈이 보이는 올해는 다행이다 싶다. 세시간남짓 달릴 수 있는 몸이 되어 기쁨이다. 보문호를 돌면서 마지막 1키로 직전 책카페 아아를 포장하고 벌컥 들이키고 나서야 숨통이 다시 트였지만 말이다. 오늘도 조심 챙겨본다. 


볕뉘


신경학적 가동범위, 뇌와 신경계가 여기 이상 넘어가면 위험하다고 판단해 근육을 강제로 수축시키는 위협반응을 한다한다. 따라서 가동범위를 늘리기 위해서는 뇌에게 해당자세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문구들이 계속 걸려 책들을 소개받아본다. 이 또한 신세계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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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다이소에서 산 화분 가운데 강낭콩이 초파리의 재물이 된 것을 빼고, 바질, 봉숭아, 해바라기는 자라는 속도를 줄이면서 분화를 시작하고 있다.  물방울 하나에도 그들은 경각에 달린다. 바람 한올에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1.


순천 챌린지가든런 마라톤이 올라와 신청하구 내려간다. 운동복장에 운동가방하나 가벼운 차림이라 책은 얇은 것으로 챙긴다. 일본인 한자에 대한 책과 <리스펙토르의 시간> 두 권이다.  4시간이 걸리는 시외버스. 중간 휴게소도 들르고 옆자리 손님이 호두과자도 건넨다. 기다리다 내리고 또 가고 그렇게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반이다. 숙소에 들르기는 애매한 시간, 아랫장 야시장에 들러 요기를 할 생각이다. 육전 명태살전 부추전까지 오랫만에 폭식이다. 그렇게 배를 채우는데 묵을 숙소에서 연락도 온다.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배정받고 잠들기 전 엘렌 식수를 읽기 시작한다. 


뜸을 무척 오래 들인 일이기도 하다.  말그대로일까? 과연 믿을 만한가? 하지만 만약 이 책을 나눌 시공간이 없다면, 어쩌면 정작 리스펙토르에 대해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없었겠다는 느낌도 든다. 


말을 하면 말이 날아갈 것 같아. 한 작가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서두부터 애지중지 좌불안석이다. 이렇게 세 편 가운데 한편을 읽어내고 잠을 청한다. 새벽 대회장으로 가면서 늘 찾는 순천의 아름다움에 재삼 놀란다. 삼 사백 명 정도의 인원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인원들이 함께 즐기기 좋은 대회다. 그렇게 다시 숙소까지 돌아오는 길에 문득 어제 읽은 책들이 아니, 작가들이 감격처럼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2.


세 편 가운데 두편은 대회를 마치고 올라와 단골 식당에서 읽어낸다. 저자의 작품들 간의 관계 지도를 가늠할 수 있는 나침반같은 역할도 해 준다. 이미 읽은 <별의 시간> 그리고 이 책을 덮고나서 찰나를 다룬 <아구아 비바>를 곧 이어서 읽다. 그리고 <세상의 발견> 역시 이렇게 읽어내어야 하는 무게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아니 백 번을 읽어내도 새로울 텍스트들이다.싶다.


3.


어쩌면 정말 무서운 책들이다. 칼날같은, 칼끝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는 책들이다. 그 서슬퍼런 날에 이미 베여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를 작가들이다. 피와 살, 내장감각과 몸으로 써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각성하게 하는 책이다. 무서운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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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로지 브라이도티의 3부작을 읽고 있다. 밑줄을 그으면서 큰 흔들림없이 차곡차곡 읽는다. 2002년작 <변신>과도 잘 연결된다. 


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단호하다. 그리고 열린 그릇같은 계보학적 방법론으로도 읽히는 페미니즘은 더 매력있다. 진작 읽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다가도 이렇게 지도제작의 관점에서 이정표를 만들어놓은 결과물에 무척 흡족한 느낌이다. 바슐라르가 들뢰즈와 미셸세르의 박사논문을 지도했다는 사실과 조르주 캉길렘이 푸코와 들뢰즈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도 이제서야 확인하게 된다. 잘된 작품은 여러 번 교차횡단하면서 읽어야 한다. 뤼스 이리가레를 호명한 것도 시리즈를 읽게된 계기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잘 정리시키는 저작이다.





"우리"


하나도-동일자도-아닌-서로-다른-우리 we-are-not-the-same-but-we-differ는 모두 이 상황에 함께 있다."







"'脫이분'이라는 싹"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효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고방식을 말해보자는 것
이다.  
자연과 문화. 나눈 둘. 
남녀를 지운 젠더(문화)는 
사회 구성물이다.라는 메시지. 

방식으로만 보면 이것이 
이분의  전형텍스트다. 
효용에 눈감는 무지로 
거꾸로 백년이 무용하다. 


이런 방식은 '덫'처럼 
사유의 구석구석에 
놓여져있다. 
당신이 인식하며 가르는 사이사이, 
좋고나쁘다라고 하며 
분류하자마자 걸린다. 

벗어나고자 하는 걸 빼닮는다.


그러니 어쩌라구. 문화자연. 자연문화. 
그게 낫다. 나을까
생각을 고쳐먹으면 벗어날 수 있는건가. 
네버. 절대로. 
좋다나쁘다의 구름낀 
하늘은 게일 수 없다. 


몸을 끄-으 ㄹ 며, 
몸과 마음을 물들이는 문제다. 
뫔. 시공간축  
앞뒤로 끌며 나아가는 일이다. 
부챗살처럼 펴지는 관계들. 
그걸  몸의눈이 생겨 바로 보며 서는 일이다.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쇠감옥  창살은 
너무도 견고하고 뜨거워 
비집고 나갈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어쩌자고. 
가고싶어도 나가고 싶어도 
방조차 바꿀 수가 없다. 이래서일까. 
이 쇠사슬. 발목을 옥죄는 쇠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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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의 요청으로 기술회의가 열린 건 일주일 전쯤이다. 결과보고를 여러모로 듣고 판단한다. 외부 기술고문도 함께 한 자리, 그래도 이전보다 진도는 나갔구나 한다. 예정된 일정이 흔들리지 않고 가면, 원하는 결과를 다음달 초순이면 얻을 수 있겠구나 한다. 


그런데 그날 참관한 갑의 제이는 우리 지읒부장의 말투를 문제삼는다. 그 말투. 이것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거 아십니까? 기술자문이 아니라 말의 언저리에 붙어있는 이 말구문을 거론한다. 실망했습니다. 그래도 저하고 첫자리인데 이런 모습은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인사-총무출신 대표이기도 한데 이런 면을 보는구나. 물론 지금까지 와이대표의 입김이 작용한 연유이기도 하다. 


점심을 드는 사이, 다음 주에 따로 말씀을 드려야 하나 아니면 바로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다. 고민의 결과는 바로 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담배한대 피고 오세요. 카톡 남기고 이러한 면이 불쾌하게 들린 것 같다. 정황상 잘 아는 우리 분위기에서 문제가 될 일은 없지만, 갑의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기술조언을 될 수록 건조하게 전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태도가 하대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고 전한다.


식사 전 갑의 제이 대표가 건너와서 또 공부하십니까라고 인사한다.  물량이 나가야 하는데 물량이 나가질 않으니 이러고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라는 말을 마치기 전 책을 올려둔 채로 독서대를 아래로 내려놓는다. 막 리스펙토르의 <닭>이라는 단편을 내려놓은 참이었다.


손님이 와 암탉을 잡으려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단편이다. 아빠에게 드디어 잡히고 목숨의 경각에 달릴 찰나, 그 암탉은 따듯한 알을 낳고 품는 것이다. 아이와 엄마의 시선 결재로 살아남게 된 얘기다. 


생명은 자신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을 느낄까? 알까? 알면 어떻게 스스로를 구제하는가?


부장으로 퇴직 선고를 받던 날이 기억난다. 부산에 내려가  임원저녁식사 전 당구장에 들러 사구를 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순간 짤렸다는 얘길 들은 거다. 동기는 흰 당구공을 쳐야하는데 빨간공을 치고 있는 나에게 코멘트 한다. 어, 빨간공이야! 그날 세 잎 네 잎 클로버 행운과 행복이란 꽃말을 나눈 임원가 저녁.  그 날 연구소에서 같이 일했던 팀원들에게서  소식이 끊긴 지 십년이 지났음에도 연락이 동시에 온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일까. 그토록 크게 생각했던 일터. 그 순간은 지나가고 여전히 다른 시공간을 채우고 있지만 돌아볼 수록 신기하다.


이 단편을 읽으며 묘한 느낌이 인다.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 결론은 피가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다. 


왜 모르겠는가 자신을 죽이자고 덤벼드는데.

사냥꾼의 쾌감이 버젓이 남아 잊힘의 재료로 쓰지만, 그 찰나의 양심은 평생 짙게 배여있기도 하니 생사가 관여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다.


여전히 모른다. 작가의 의중은 우리가 가려는 상식의 길밖에 있는 것 같다. 뭔가 알아차리는 능력을 가진 것들이 생명이겠다 싶다. 미리미리 느끼고 있는 것이 우리다. 눈치를 너머서는 내장감각들이 그저이겠는가. 육감을 맹신해도 되지 않겠지만, 조금 더 날카롭고 예리해진다면 살아있는 것들이 그 감각을 갖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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