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오래전에 쓴 시가 생각나서 옮겨놓는다. 2005년 말에 쓴 한 페이퍼에 끼워넣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시만을 따로 독립시켜 놓기로 한다. 시는 1995년 6월 4일에 쓴 걸로 적혀 있으니 딱 이맘때이다. 메모를 보니 '말랑말랑한 빵'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쓰게 됐다고 한다.   

 

말랑말랑한 빵에게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먹어보면 안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살짝, 그렇다, 살짝 구워진다는 !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비밀은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는다, 살살 녹아난다. 비밀은 사랑스럽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여기저기서 주무르고 달군다. 더러는 태우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살짝, 그렇다, 살짝 미쳐간다는 !
그것이 또한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침내 말랑말랑한 빵이 구워졌다.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09. 06. 07.      

 

P.S. 시에서 내가 맘에 들어하는 대목은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같은 구절이다. 내게 말랑말랑한 빵맛 같은 걸 전해준다. 시작 메모로 더 적어놓은 걸 옮겨보면 이렇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에 'tangible'이 있다. '만져서 알 수 있는'이란 뜻을 한 단어로 나타낸다. 탱탱한지, 딴딴한지는 만져봐야 알 것 아닌가. 그런데 '먹어봐서(야) 알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는 없는 모양이다. 고작 'edible' 정도이다. '먹을 수 있는'이란 뜻. 이게 과연 먹을 수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정도가 중요해서였겠지. 하지만 대학에 오랫동안 적을 두고 있는 나에겐 앎이란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같은 걸 두세 음절로 나타낼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우리말에 있었으면 싶다(영어로는 'edangible'쯤 될까?). 우리의 어휘가 너무 부족하다. 그러니 믿음도 부족할 밖에. 말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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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0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조를 붙여서 부르면 좋겠어요~

로쟈 2009-06-07 20:07   좋아요 0 | URL
곡조를 붙이려면 '-이다'는 다 개사해야겠는데요.^^

라로 2009-06-0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우리의 어휘가 너무 부족한건 사실이지만 그 많은 영어의 어휘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말들도 있잖아요~.^^(그냥 인사 댓글 남기고 싶어서,,,님의 책 구매했는데 참 좋아요~.^^)

로쟈 2009-06-07 20:09   좋아요 0 | URL
'먹어서 알 수 있는'은 영어 단어에도 없지요... 즐거운 독서가 되시길.^^

푸른바다 2009-06-0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는 표현에 눈길이 가는 군요^^ 논리적으로는 '빵이 말랑말랑해지기 위해서는 살짝 구워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 것이다'가 더 적절한 표현이겠지요^^ 이 시에서는 '말랑말랑하다'는 속성(느낌?)이 굽는다는 행위 자체를 제약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위는 물에 가라앉는다'와 유사한 패턴으로 도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치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시적인 느낌이 매력적이네요^^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비약이 일어나기 때문이겠죠^^

이 시의 주제는 헤겔의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는 말과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랑말랑하다', '먹어보면 안다'는 등 몸의 느낌과 결부됨으로써 헤겔류의 추상성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제점을 어느정도 극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이 '존재의 빵집'이라면 '먹을만하지 않은 빵'도 '먹을 만한 빵'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결국 몸의 느낌에 맞는 말랑말랑한 빵만이 먹을 만하기에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지속할만 한 존재'가 무엇인 지에 대한 판별은, '비밀'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듯이 이성적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결국 먹는다는 행위, 즉 체험과 실천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네요^^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연상되는 군요. 베르그송의 '지속'과 함께^^ 결국 한마디로 줄이자면 '중용'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랑말랑한 빵이라는 친근한 느낌을 통해 표현하신 것이 정감이 갑니다^^

로쟈 2009-06-07 20:10   좋아요 0 | URL
대단한 '해몽'이신데요.^^ 약간 에로틱한 면도 고려해주시면 '에로스 형이상학'이 될 거 같습니다.^^

게슴츠레 2009-06-0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랑말랑한 우유식빵을 사서 손으로 뜯어가며 먹고 싶어지는군요ㅎㅎ덕분에 하루를 '말랑말랑'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6-07 20:11   좋아요 0 | URL
'딱딱한 빵'과는 아무래도 어감이 다르죠.^^

비연 2009-06-0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빵 먹고 있는데, 급말랑말랑빵 먹고 싶어지네요...ㅋㅋㅋ

로쟈 2009-06-07 20:12   좋아요 0 | URL
^^

L.SHIN 2009-06-0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라는 부분이 마음에 드는군요.

오늘은 어쩐지, 로쟈님이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로쟈 2009-06-07 20:13   좋아요 0 | URL
저도 나름대로 말랑말랑합니다.^^;

다락방 2009-06-0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전 이부분이 특히 좋은데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도 종종 그랬어요. 한 문장을 다 끝낸뒤에 '정말 그렇다'라고 또 한문장을 덧붙이는거죠. 제겐 그런 문장들이 그렇게 매혹적일수가 없더라구요. 로쟈님의 '정말 다른 빵이다' 이 표현이 근사해요, 제게는!

로쟈 2009-06-08 23:58   좋아요 0 | URL
새로운 지적이세요.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09-06-0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랑말랑한 빵은 갓 구운 식빵이에요..^^;;
오늘 점심 때 동네 제과점에서 갓 구운 식빵을 사서 집에서 직접 만든 잼(물론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요^^)에 발라 먹었습니다. 무려 세 개나!!!

저 시를 '해몽'할 수는 없지만 뭔가 말랑말랑한 빵에 대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로쟈 2009-06-08 23:58   좋아요 0 | URL
빵집들이 '광고'로 써도 되겠습니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지라, 한데, '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란 이문재 시인의 말을 적용하면 더 없이 게으르게 지내는 것이 요즘인지라 좀 우울하다. 게다가 시국도 우울하고 날은 무덥고. 그런 형편에 또 읽을 만한 책들을 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지만, 그런 회의는 '상투적'이란 이유로 일소해버리고 다시금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본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꼽은 문학분야의 책은 전성태의 <늑대>(창비, 2009)다. 지난달에 꼽아두었기 때문에 두 달 연속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이다. 사실 나도 표제작만 읽었다뿐 아직 소설집을 읽은 건 아니므로 '계속' 읽을 만한 책으로 놔두어도 억지는 아니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전성태는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품고 있는 인상을 주는 작가다. 대체로 이야기에 치중하는 작가들이 디테일에 소홀한 듯싶으나 전성태는 거기서도 비켜나 있다. 특히 이 <늑대>에 수록된 작품들을 이끌어나가는 문장들은 정직하고, 구성은 치밀하며, 시선은 경계에 서 있고, 비판은 성찰과 함께 적확하며 자유롭고, 옹호는 인간의 불가해성과 함께 모범적이며 아름답다." 적확하며 자유롭고 모범적이며 아름다운 소설들을 읽을 일이 어디 흔하겠는가.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론 최근 20주년을 맞은 중국 '천안문 사태'를 배경으로 작품들을 떠올려보았다. 샨 사의 <천안문의 여자>(현대문학, 2006)과 양이의 <시간이 스며드는 아침>(재인, 2009).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 사에 대해서는 예전에 쓴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907667)를, 그리고 <시간이 스며드는 아침>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옮겨놓은 기사(http://blog.aladin.co.kr/mramor/2866313)를 참고할 수 있다.  

 

2. 역사 

역사저술가 이덕일씨가 꼽은 역사분야의 책은 조너선 스펜스의 <근대중국의 서양인 고문들>(이산, 2009). "<강희제> 등의 저서를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저자 조너선 스펜스가 중국에 인생을 바친 서양인 16명의 족적과 의미를 추적한 책이다." 스페스의 저작이야 워낙에 유명하기에 따로 군말은 필요하지 않겠다. 개인적으론 이 참에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푸른숲, 2003)과 <천안문>(이산, 1999)을 읽어보고 싶다.   

 

중국 문화 및 문화연구 관련서로 조금 전문적인 책으론 문화학자이자 중국영화 전문가인 다이진화의 <무중풍경>(산지니, 2007), <거울 속에 있는 듯>(그린비, 2009)과 왕샤오밍 등이 쓴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현실문화연구, 2009)도 기억해둘 만하다. 당장 손에 들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이런 책이 있다는 정보 정도는 챙겨두어도 좋겠다.   

3. 철학 

김상환 교수가 고른 철학분야의 책은 루이지 조야의 <아버지란 무엇인가>(르네상스, 2009). “아버지 혹은 부성(父性)이 오랜 진화의 산물이자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 부성이 탄생, 진화, 몰락해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했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책은 500쪽 분량으로 두툼한 편이다. '엄마(마더)' 신드롬에 가려져 있는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다. 개인적으론 예전에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한길사, 2000)의 내용을 '아버지란 무엇인가'란 페이퍼로 정리해둔 적이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527987). 덧붙여 '아버지'란 말은 항상 주자청의 수필 <아버지의 뒷모습>(태학사, 2000)도 떠올리게 한다. 중학교인가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글이다. 아, 위화의 <영혼의 식사>(휴머니스트, 2008)에도 아버지 노릇하는 작가의 모습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꼽은 정치분야의 책은 김욱의 <법을 보는 법: 법치주의의 겉과 속>(개마고원, 2009)이다. "헌법학과 법철학을 공부한 소장 법학자가 쓴 <법을 보는 법 : 법치주의의 겉과 속>은 책의 제목대로 우리가 매일 부딪치는 다양한 ‘법을 보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의미 있는 책"이라는 게 간단한 소개. 한데,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사법불신이 만연해 있는 것은 '법치주의의 겉과 속'뿐만 아니라 '법조계의 겉과 속'까지도 들여다보아야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교양인, 2004)과 <불멸의 신성가족>(창비, 2009)은 그런 의미에서 같이 챙겨둘 만한 책이다. 비록 속살까지 다 보여주진 않지만 속사정은 헤아려볼 수 있도록 해준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김원장 기자의 도시락 경제학>(해냄출판사, 2009). 물론 김원장 기자가 저자인 책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중을 위한 경제학 '입문서'격의 책인 듯하다. 평은 이렇다. "소설 읽듯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경제학 해설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읽는 사람을 고문이라도 하려는 듯 어렵게 쓸 필요는 없다.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경제학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을 써야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그 동안 나온 대부분의 경제학 해설서들이 독자의 눈높이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좌절감만 더 크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친근한 현실의 사례를 통해 독자에게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자 특유의 센스가 발휘되어 독자에게 가까이 가려는 노력은 한결 더 큰 탄력을 받는다. 요즈음 한창 뜨고 있는 유재석과 박명수의 예를 통해 대체재와 보완재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도시락 경제학'에서 더 나아간 설명을 원한다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경제학 강의를 들어볼 수도 있겠다. <폴 크루그먼 경제학의 진실>(황금사자, 2009). 더불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동향에 대해선 도미니크 레비와 제라르 뒤메닐 공저의 <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그린비, 2009)도 눈길이 갈 만한 책(뒤메닐 교수와의 대담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58529.html 참조).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박경태의 <인종주의>(책세상, 2009). "오랜 동안 소수자 문제를 연구해 온 저자가 그간 온축한 자료나 역량에 기초해 우리와 같은 단일민족 국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민족문제를 알기 쉽게 풀이한 <인종주의>는 세계화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시민의식을 깨우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입문서로 적격이라고 판단되어 적극 추천한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오랜 동안 소수자 문제를 연구해온" 저자의 다른 책으론 <소수자와 한국사회>(후마니타스, 2008)도 눈에 띈다.  

인종주의에 관해서라면, 에티엔 발리바르의 책들이 먼저 떠오르는데, 아직 단행본은 소개된 게 없고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2007)에 '유럽적 인종주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인종주의: 여전히 보편주의인가?' 두 편이 번역돼 있다. 읽기는 만만찮겠지만 <인종주의>로 개념사를 학습한 이후라면 참조해볼 만하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고른 과학분야의 책은 차윤정, 전승훈 공저의 <신갈나무 투쟁기>(지성사, 2009)이다. 10년전 나왔던 책의 개정판인데, "우리나라 숲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신갈나무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식물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쓴 책". 일종의 스테디셀러다. 두 저자의 <숲 생태학 강의>(지성사, 2009)와 차윤정의 <숲에 빠져 미국을 누비다>(웅진지식하우스, 2009)도 올해 나온 책들. 뭔가에 빠져 지내는 이들 덕분에 '숲 생태학' 관련서들이 점점 울창해지고 있다.   

 

8.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정해광, 아프리카를 외치다>(심포지움, 2009). 물론 저자는 정해광씨다. 저자는 생소한데,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마드리드 대학에서는 정치철학 박사까지 받았지만 아프리카 미술에 빠진 지 20년째이고 아프리카 미술관도 열었다고 한다. 국내에 아주 드문 아프리카 미술 전문가인 것이다. "케냐의 키부티, 카툰과 음부티아, 탄자니아의 릴랑가, 이디오피아의 타데세와 아세파, 수단의 아마르, 세네갈의 두츠와 케베, 우간다의 아느와르, 콩고의 물람바. 이 열한 명의 유명한 아프리카 현대 미술가들 중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름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아프리카 예술은 멀다. 그런데 마침 이 열한 명의 작가와 그들의 그림을 소개하는 재미있는 책이 나와 반가웠다."는 것이 추천의 변이다. 이런 책도 있었구나 싶다.  

 

거기에 보태 이번에 <고뇌의 원근법>(돌베개, 2009)이 출간된 김에 서경식 교수의 미술 에세이 세 권도 이달에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보고 싶다. <청춘의 사신>(창비, 2002),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2002/1992)까지가 그 세 권의 책이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러셀, 북경에 가다>(천지인, 2009). 저자는 물론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다. 소개에 따르면, "1920년 북경대 철학과 초빙교수로 초청돼 수많은 중국인들과 만나며 그 결실을 책으로 낸 것이 이 책이다. 그는 여기서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치밀하게 탐색한다. 공자까지 거슬러 올라가 중국 문화의 특징을 읽어 내고 서구 문명이 당시 낙후된 중국 사회에 갖는 의미를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게 읽어낸다." 러셀의 대표작은 물론 <서양철학사>(집문당, 2006)이지만, 그리고 그의 <자서전>(사회평론, 2003)도 번역돼 있지만, 여기서는 최근에 나온 에세이집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푸른숲, 2008)와 <나는 이렇게 철학을 하였다>(서광사, 2008)를 같이 읽을 만한 책으로 골라본다.    

10. 창비담론 

내 맘대로 고르는 책으론 두달 전에 1차분 세 권이 출간된 '창비담론'을 골랐다. <87년 체제론>이 일차적인 관심도서였지만, 여유가 된다면 <이중과제론>과 <신자유주의 대안론>도 읽어두려고 한다. 한국 지식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간 '주장' 노릇을 해온 창비의 어젠다가 무엇이며 어떤 대안들을 내놓고 있는지, 그리고 그 대안의 대안은 가능한지 궁리해봄 직하다. 올 6월은 유난히 뜨거울지도 모른다는 예감도 들고. 87년 여름이나 작년 여름처럼 말이다...  

 

09. 06. 06.  

P.S. 이달의 고전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골랐다. 내달이면 1주기가 되는데, 한달 앞당겨 읽어보려는 것은(고전이니까 '다시' 읽어보려는 것은) '천국'에 대해서, '당신들의 천국'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려는 뜻에서다. 그런 건 7월보다는 6월에 더 잘 맞는 일처럼 보인다. 오늘이 현충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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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6-0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책들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리고 출간하신 책 재미있게 읽고 있답니다. 가끔 곁길로 새서 헤매고 다녀서 그렇지...

로쟈 2009-06-06 17:55   좋아요 0 | URL
제가 헤맨다는 줄 알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6-0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중국의 서양인 고문들>에 관심에 가는군요.저는 일본과 한국의 서양인고문에도 관심이 있어요.

로쟈 2009-06-07 20:06   좋아요 0 | URL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가끔 북리뷰를 참조하기 위해 금요일자 문화일보를 볼 때가 있다(다른 신문들은 보통 토요일자에 북리뷰를 싣는다). 어제도 금요일이어서 오랜만에 지하철 가판에서 사 읽었는데, 예기찮게도 북리뷰보다 흥미로운 건 윤창중 논설위원의 칼럼이었다. 노 전 대통령 추모 인파를 (원래는 노사모나 '노빠'를 지칭하는 듯 보이는) '황위병'으로 몰아붙이는 안목이 일단 눈길을 끌고 '답답한' 이명박 정부의 대응 때문에 곧 '황위병 세상'이 될 거라는 전망이 귀를 쫑긋하게 한다(아, 곧 그런 세상이 오는구나!). 그래서 최근 칼럼을 몇 편 더 검색해봤다. 현 시국에 대한 (이제는 '이명박 우울증'에 걸렸다고 하는) 이명박 지지세력의 '위기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될 듯해서 스크랩해놓는다.       

문화일보(09. 06. 05) '황위병’ 앞에 고개 숙인 정권 

황위병(黃衛兵)이 벌인 ‘거리의 환각파티’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대통령 이명박의 비겁함! 비겁하다. ‘노무현 자살’ 뉴스가 TV에 뜨는 순간 순간들. 국민이 숨죽이며 목마르게 기다렸던 건 정부의 반응이었다. 도대체 대통령 이명박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최고 통치권자의 결정적인 말 한마디는 여론의 대세를 가른다. 대통령은 TV화면에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당당히, 당당히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 그게 비상상황에서 대통령이 취해야 할 기본이다. 그런데? 대통령 이명박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애도한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전투경찰대가 빙빙 둘러싼 구중궁궐 청와대 속으로 깊숙이 숨어버렸다. 왜, 당당하게 “법과 원칙에 따른 정당한 수사였다. 애도한다”고 말하지 못했는가? 대통령이 청와대 안에서 침묵모드로 들어가는 순간, 저 벌떼같은 황위병들은 대통령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한다.

방송들은 폭탄 세례를 퍼붓고. 이명박 정권이 방송을 장악하고 있다고 어거지를 부렸던 방송들은 이때다 싶어 정권과 정국을 다시 장악. 탄핵사태와 촛불시위보다 더 감정에 불을 지르면서. 이명박 정권이 노무현을 죽였다. 움직일 수 없는 정설이 되고, 노무현 반대세력은 노무현을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게 만든 역사의 죄인이 돼갔다. 역사의 죄인이. 기표소에 들어가 이명박 후보를 톡톡 소리나게 찍었던 지지층들은 황위병 광기를 또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것보다,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비겁함에 더 큰 모멸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왜 찍었나?  

 

한방 얻어맞으면 바닥에 쭉 너부러져 일어날 줄 모르는 ‘유리턱 정권’. 그러다가 슬금슬금 도망가는 ‘겁쟁이 정권’, 우물쭈물 넘어가는 ‘면피 정권’이 어떻게 민심을 감동시켜, 국민을 결집한다는 말인가?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수직하강. 대통령을 찍었던 지지세력은 울분의 나날 속에서 지지를 철회하고, 사분오열돼가고 있다. 이젠 이명박 정권을 위해 싸울 힘도, 의욕도 사라지고 있다. 이게 2009년 6월 이명박 정권과 보수·우파세력의 현주소. 지켜줄 세력이 없다. 남은 건 전투경찰뿐, 고립무원! 전투경찰에 정권의 명줄을 맡기고 있다. 검찰총장은 사표 내던지고. 이런 무책임한 정권이 장면 정권이었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청와대는 국민장도 별 불상사 없이 잘 치렀잖아? 그렇게 넘어가는 거지 뭘? 정말 왜들 정신 못차리고 그러는가?

대통령 이명박은 민심수습을 위한 당·정·청 인적쇄신 요구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는데도 “국면전환용 인사는 3김시대의 유산”이란다. 어이구! 국면전환을 해도 정권이 유지될까말까 하는 이명박 정권 최악의 위중한 상황인데도. 대통령은 눈과 귀를 닫고 있다. 대통령이 민심을 모르는 구조적인 원인이 뭘까? 대통령 본인이 무슨 일이든 모르는 게 없는 똑똑함을 자부하는데다가, 여기에 정면돌파도 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고, 매사 계산에 밝은 대통령 특유의 캐릭터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이를 청와대 참모들이 악용해 대통령의 비위에 맞는 보고만을 올리며 대통령을 기망(欺罔)하는 세력이 대통령과 통하는 문고리를 잡고 있다.  

대통령은 자신이 참모들에 의해 속임을 당하지 않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바로 똑똑함의 오류다. 청와대, 행정부, 한나라당에 이르기까지 범여권 전체의 실세 자리들을 손안에서 조물락조물락 할 수 있는, 만만한 인사들로 꽉꽉 채운 게 대통령이 민심 불감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이다. 기회주의자, 처세주의자, 영혼도 능력도 없는 출세주의자들의 집합소.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도 승승장구하다가 줄을 바꿔탄, 몸을 던져 싸워 본 일이 없는 겁쟁이 웰빙족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싸울 생각도 않고 도주할 수밖에.

정말 답답하다. 이들 ‘기망 세력’을 쳐내고 보수·우파정권을 이끌 수 있는 영혼·능력·소신·추진력을 갖춘 정면돌파형 정권으로 일신해도 모자랄 판에. 대통령이 일대 결단의 인사쇄신을 하지 않고 또 넘어간다면? 6월이 끝날 때쯤이면 대한민국은 황위병 세상으로 뒤집어질 것. 황위병 세상이!(윤창중/ 논설위원)    


문화일보(09. 05. 28) 홀로 선 MB

소름이 돋는다. 비늘처럼.

‘벼랑끝 전술의 양대 달인’-노무현과 김정일을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다. 이건 전 세계 관객을 일거에 모두 빨아들인 블록버스터! ‘이명박 극장’은 텅텅 비었다.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대통령 이명박에 맞서 벌인 긴긴 사투는 대역전극으로 막을 내렸다. 김영삼, 김대중의 깜짝쇼들은 이름도 댈 수 없게됐다. 김정일의 순발력은 정말 걸출하다. 벼랑 밑으로 아예 밀어버린 것, 그게 제2차 핵실험이고 미사일 난사(亂射). 비열하고 잔인하다? 정권이 순진한 건 미덕이 아니라 무능력이다.

이명박 정권은 두 사건을 정권 안보와 관련해 최대 악재, 최고 위기라고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 국민장만 불상사없이 잘 치르면 되고, 국제공조로 대북 제재만 잘 하면 되고? 또 그렇게 우물쭈물 넘어간다면 6월은 이명박 정권에 가장 잔인하게 닥쳐올 것이다. 잔인하게.

이명박 정권의 위기는 자업자득! 무슨 일이든 우유부단. 자살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정권을 맡을 자격도 없다. 검찰에 불러들이는 순간 구속이든 불구속이든, 결단을 내렸어야했다. 결단을! 우물쭈물하지 말고. 이런 역사적 비극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그게 통치권자의 리더십이다. 김정일은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흥! 남북정상회담 한번 하려고 초조하군. 대북특사 파견하겠다고? ‘종북(從北) 김일성 신도’ 황석영을 대통령 특별기에 태워 기념사진 찍었지만 돌아온 게 뭐? 개성공단 폐쇄하지 않겠다고 비위 맞췄더니 돌아온 게 뭐? 김일성 생일이 있으니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 가입을 전략적으로 하자고? 김정일이 핵을 조물락거릴 때 즉각 PSI 전면 가입하고, 개성공단 철수하고, 군사적 대응책 발표하고, 이랬다면 김정일은 절대 장난을 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PSI 가입한다고 무슨 약발? 시오노 나나미가 감동한 마키아벨리의 어록, “군주가 결단력이 없을 때 조롱받는다”. 조롱.

대통령 이명박은 사면초가. 박근혜와 이회창도 받은 게 없으니 도와줄 생각도 없을 것. 대통령 이명박은 목숨 건 자기 투쟁, 하늘을 찌르는 결단력, 김정일을 능가하는 결기를 당장 보여야 한다. 국민 앞에 당당히 나와야 한다. 180도 완전히 바뀐 ‘뉴 MB’로. 한국 사람 노릇하기 정말 힘들다. 대통령이시여!(윤창중/ 논설위원) 

문화일보(09. 05. 20) 이명박 정권의 ‘3대 미스터리’ 

이명박 우울증! 이명박 정권을 세운 지지자들은 지금. 대통령 이명박의 ‘계약 위반’을 분명히 예시하는 사건들 앞에서 분노하고 있다. 계약 위반? 확고한 보수·우파 정권 아니었던가? 확고한. 묻고, 또 묻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이명박 피로증’, 취임 1년3개월이 다돼가는 시점에서 이젠 지치다못해 ‘이명박 우울증’. 지지자들은 다음 3가지 이명박 정권 미스터리 앞에서 지지 철회로 맞서고 말아야 할 것인지, 심각한 우울증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 이명박 우울증 속에서!  



첫째, ‘황석영 미스터리’ 아닌가? 왜 대통령은 황석영을 대통령 특별기에 태워 중앙아시아를 휘젓고 다니게 했을까 하는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황의 ‘몽골 + 2코리아론’에 매료? 대통령 이명박이 그런 로맨티스트라면 치기로 넘어갈 수도. 기업인으로 잔뼈가 굵은 대통령의 마음 속에 낭만성이 동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 싸구려 구상은 몽상가라면 누구든 지도를 놓고 제 맘대로 박박 줄을 그으면 나온다. 다른 이용 가치가 대통령 이명박의 눈에 포착되었기 때문에 보수·우파세력의 벌떼같은 반발을 뻔히 내다보고 황을 특별기에 태운 것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황의 정체로부터 해답을 발견하고자 한다. 5회 밀입북(1989~1991), 7회 김일성 알현. 그는 1992년 ‘노둣돌’이라는 잡지 창간호 인터뷰에서 자신이 ‘종북(從北) 김일성 신도’임을 털어놓았다. “그(김일성)는 어쨌든 사상의 차이는 도외시하더라도 두 번이나 세계 최강의 외세와 맞서 싸웠다. 나는 그가 어떤 의미에서는 대국인 중국 혁명의 지도자 모택동보다도 훌륭한 점이 있으며, 베트남의 호지명에 절대로 뒤지는 인물이 아닌 제3세계적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린다. 더 들어보자.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중이 소박하게 떠올렸던 여러 위인들 을지문덕, 이순신, 세종대왕, 이율곡, 정약용, 전봉준, 김구 등등처럼 위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뼛속까지 김일성주의자인 황이 대한민국 대통령 특별기에 동승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김정일을 위무할 수 있는 엄청난 추파다. 추파에 숨겨진 전략적 목표? 황의 북한 인맥을 동원해 김정일로 통하는 ‘길’을 트기 위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종국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수만 있다면? 보수·우파의 반발쯤이야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눈 딱 감고 밀어붙였다. 황석영 입으로 ‘중도’ 소릴 들어도 남는 장사. 황의 눈으로 중도라면 좌파다. 기가 막힌다.

둘째, ‘개성공단 미스터리’다. 통로를 열었다 닫았다, 공단 직원을 인질로 삼고, “서울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50km 안팎에 있다는 것을 순간도 잊지 말라”고 공갈쳐도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가입을 유보하고 개성공단 유지 원칙 불변만을 외친다. 완전히 북한에 주눅이 들었다. 왜? 김정일을 정상회담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특유의 질긴 인내력과 전략을 발휘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김정일이 요구하는 개성공단 사용료·임금 인상도 들어줄 것이다. 속도 없이. ‘통일 대통령’에 대한 불타는, 그러나 감춰진 ‘야심 프레임’으로 황석영·개성공단 미스터리를 뜯어보면 의문의 열쇠가 풀린다.

셋째, ‘노무현 미스터리’다. 왜, 노무현 처리 문제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른 단호한 조치를 하지 못하고 앉아서 깔아뭉개고 있을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국제적 시선? 공개할 수 없는 ‘묵약(默約)’?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당선인 시절 그 어느 때, 누구에 의한 것인지 모르지만.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진정 없었다면 청와대가 상식적 차원에서 이해시켜라! 왜 좌고우면하는지.

대통령 이명박은 지지세력을 절망케하는 위험한 실험을 끝내고 정도(正道)로 돌아가야 한다. 보수·우파 대통령의 정도! 보수·우파 정권의 궤도를 끝내 이탈하고야 만다면 정권에 대한 지지를 완전 철회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원천적인 회의 속에서 ‘이명박 우울증’은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무섭게 빠른 속도로. 더 이상 기대할 게 없으니 내버려 두자는 절망의 장탄식도 가파르게 들린다. 민의의 거대한 추이다.(윤창중/ 논설위원) 

09.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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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6-06 18:20   좋아요 0 | URL
야...굉장히 솔직하군요.조중동이 아니라 문화일보도 있다고 항의하는 것 같아요.그러면 문조중동인가요?

로쟈 2009-06-06 20:16   좋아요 0 | URL
조중동이 섭하지요. '조중동문'이면 몰라도요...

열매 2009-06-07 02:00   좋아요 0 | URL
문화일보야말로 '색깔' 그대로 극우파들의 '홍위병'의 역할을 맡고 있는 신문 아니겠습니까^^?
신문지 색깔로 그나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찌라시신문 말입니다.

가을산 2009-06-07 00:41   좋아요 0 | URL
세상을 보는 시각의 차이를 보면 입이 딱 벌어질 때가 있어요.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서 혼란스런 고유명사 음역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며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클로소프스키'를 언급한 바 있는데(375쪽), 바로 그 클로소프스키의 대표작이 출간됐다. <니체와 악순환 - 영원회귀의 체험에 대하여>(그린비, 2009). 책은 1969년에 출간됐고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과 함께 1960년대 '니체의 재발견'을 가져온 저작으로 평가된다. 참고로, 1964년 루아요몽에서 니체를 주제로 한 유명한 학술토론회가 개최되며 클로소프스키 또한 발표자로 참여한다. 기억에는 들뢰즈 혹은 푸코가 이 학술토론회를 주도했고, 발표문은 <새로운 니체>로 묶여서 출간됐다.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와 악순환>은 내가 니체 자신과 함께 읽은 가장 위대한 철학책입니다." 개인적으론 오래전에 구해놓은 영역본을 어제 책꽂이에서 빼놓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을 여유는 없고, 일단은 리뷰기사만을 먼저 챙겨놓는다.      

한겨레(09. 06. 06) 니체 ‘자아 동일성’ 벗어나 ‘무한 자유’ 얻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클로소프스키(1905~2001·사진)의 저작 <니체와 악순환-영원회귀의 체험에 대하여>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인 ‘영원회귀’를 중심으로 삼아 니체의 사유를 해석한 독특한 연구서다. 클로소프스키의 니체 연구의 결산이라고도 할 책이자, 한국어로 번역된 클로소프스키 첫 저작이기도 하다.  

 

클로소프스키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부모가 모두 화가였던 클로소프스키는 그 자신도 화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화가 생활은 클로소프스키 삶의 일부일 뿐이다. 청소년기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앙드레 지드의 영향을 짙게 받은 그는 1950년대에 소설들을 발표해 큰 관심을 끌었다. 클로소프스키의 집요한 탐구 영역은 인간의 한계 체험으로서의 ‘광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28년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들을 번역한 것은 광기 탐구의 전초전이라 할 일이다. 1934년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조르주 바타유를 만나 니체의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횔덜린도 니체도 광기의 폭발로 삶을 암흑으로 밀어넣은 사람들이다. 1947년에는 ‘에로스의 광인’이라 할 사드 후작에 관한 연구서 <내 이웃 사드>를 발표했다. 그는 스스로 “나는 기인(maniaque·광인)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암시하는 대로 수수께끼 같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1969년에 출간한 <니체와 악순환>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니체>, 질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과 함께 니체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고 독창적인 해석을 제공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1960년대에 쓴 10편의 소논문을 묶은 이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독특함을 보여준다. 짧은 논문들이 모여 니체 일생의 모자이크화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클로소프스키는 니체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출간하지 않고 남겨둔 단편들을 주로 참조해 주인공의 두뇌 속으로 들어간다. 니체 삶의 역사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서 사유의 국면국면을 조명해 니체 사상의 변곡점들을 확인한다.  

이 책이 다른 니체 연구서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먼저 니체의 광기에 관한 꼼꼼한 추적에 있다. 클로소프스키는 니체의 사유가 착란(광기) 주위를 돈다는 점이 이제까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음을 이 책의 서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니체의 글에서 이 착란의 중심은 ‘벌어진 틈’으로, ‘심연’으로, ‘간극’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카오스’로 표현되는데, 이 카오스가 니체를 유혹하고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었음을 니체의 글은 보여준다. 니체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 이 카오스를 보기 시작해 발광 때까지 그 심연에 매혹당했다. 다른 니체 연구서들이 니체의 광기를 삶의 파국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로 보는 데 반해, 클로소프스키는 광기를 니체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힘으로 이해한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이 광기에 휘말리지 않고 사유의 명석함으로써 광기의 힘을 해부하고 거기에 저항했다는 사실에 있다. 니체의 발광은 그 대결이 마침내 끝났음을 의미한다. 카오스와 명석함의 이 지속적인 대결이 니체 사상을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클로소프스키는 해석한다.

클로소프스키가 니체 사유에서 주목하는 또다른 주제이자 이 책에서 가장 힘주어 해명하려는 주제가 ‘영원회귀’다. 영원회귀는 1881년 여름 서른일곱 살의 니체가 알프스산맥 질스마리아에서 얻은 계시적 체험의 내용이다. 삶이 영원히 되돌아오고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이 돌연한 계시를 받고 니체는 깨달음이 주는 ‘환희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의 내용이 니체 자신에게 매우 모호한 의미를 지녔는데, 그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 니체의 나머지 인생이었다고 클로소프스키는 말한다.

클로소프스키가 여기서 강조하는 영원회귀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삶을 반복해 사는 것’이다. 니체는 “역사의 모든 이름들, 결국 그것은 나다”라고 썼는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무수히 다른 모습으로 내가 다시 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동일성, 그 삶의 주인인 ‘나’라는 동일자는 사라지게 된다.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삶을 반복해서 살게 된다. 삶은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고 의미도 없다. 끝없이 되돌아오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악순환만 남는다. 이런 인식은 ‘자아’라는 이름의 동일성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니체는 서양의 기독교 문화가 모두 ‘자아라는 동일성’에 기반을 둔 사유의 산물이라고 보았는데,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근거를 발견한 셈이 된다. 클로소프스키가 해석하는 니체는 ‘탈근대적 급진주의자 니체’의 모습이다.  

니체는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최후의 발광을 하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 사건은 니체 내부의 카오스가 그의 명석함을 집어삼켰다는 뜻도 되지만, 니체 자신이 자기동일성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다는 뜻도 된다. 니체는 자아라는 완강한 정체성으로부터 풀려나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됐다고 클로소프스키는 해석한다.(고명섭 기자) 

09.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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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06-06 11:25   좋아요 0 | URL
니체에게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책이 될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로쟈 2009-06-06 16:10   좋아요 0 | URL
네, 책은 평이해보이진 않지만, 니체 독자들에겐 '선물'이 될 듯합니다...

드팀전 2009-06-06 13:25   좋아요 0 | URL
한겨레에서 이 책을 보고 반가왔습니다.^^ 로쟈님이 바로 페이퍼작업 하실 것도 알았지요.ㅋㅋ

로쟈 2009-06-06 16:11   좋아요 0 | URL
저도 고명섭 기자가 리뷰를 쓸 줄 알았습니다.^^
 

서경식 교수의 세번째 미술 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고뇌의 원근법>(돌베개, 2009). 부제는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그의 전작들을 접해본 독자라면, 이내 손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나도 출간 소식을 접하자 마자 주문을 넣어서 그제 받아본 책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주말 북리뷰들에서 주목할 만한 책으로 다루어졌는데, 한겨레의 기사를 옮겨놓는다. 주로 한국 근대미술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계기로 삼고 있다. 저자 자신이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랐던 이유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에서 미술-그것도 근대미술-에 나타나는 미의식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다."(6쪽)

 

한겨레(09. 06. 06) 한국은 ‘예쁜’ 미술에서 독립하라 

그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그야말로 전혀 개념이 다른 미술 에세이집으로 미술과 미의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흔들며 1990년대 초 베스트셀러가 됐던 재일동포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 그 10여년 뒤 <청춘의 사신>이 번역·출간됐고, 이번에 그의 세 번째 미술 에세이집 <고뇌의 원근법>이 나왔다.

앞의 두 권은 일본에서 출판되고 나중에 한국어로 출간됐으나, <고뇌의 원근법>은 역시 일본의 여러 매체에 먼저 실리긴 했지만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건 한국 쪽이 먼저다. 차이는 그것만이 아니다. 더 두텁게 쌓인 연륜이 더 날카롭게 벼린 최근작일 뿐만 아니라, 2006년 4월부터 2년간 서울에 머문 그의 난생 첫 장기 한국 체험이 새롭게 부가한 문제의식을 짙게 반영한 편집이라는 점에서도 분명 다르다.    

 

» <댄서 아니타 베르버의 초상>. 1991년 슈투트가르트와 베를린에서 열린 ‘오토 딕스 탄생 100돌 기념 회고전’의 포스터가 된 그림. “이 잔혹하기까지 한 강렬함!”이라고 서 교수는 평했다. 

바로 그 한국 체험을 토대로 그가 던진 화두는 이것이다. “왜 내가 본 모든 한국 근대미술 작품은 그렇게도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실은 이 도발적인 의문이 오토 딕스 등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을 주로 다룬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다.  

서 교수에게 ‘미의식’이란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라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무언가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느꼈을 때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지 되물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미의식은 실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도 인간의 일인 이상 그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돼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그런데 “지나치게 예쁘기만 한” 한국 근대미술은 ‘지루하다’고 그는 얘기한다.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 오토 딕스의 <늙은 연인들〉

위대한 화가들로 그가 꼽는 사람들, 곧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그리고 이번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 에밀 놀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프랜시스 베이컨, 빈센트 반 고흐 등은 결코 그들 작품이 예뻐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다. 이 거장들은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그 현실을 직시해서 그리려 했고”, 그게 바로 감동의 원천이며,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는 게 서 교수 지론이다.  

왜 한국 근현대 미술은 지루한가? 그건 실제 삶과 유리돼 있고, 뒤틀린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목숨 건 대결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계열의 일부는 예외적이라 했으나, 그것마저 거의 고사 단계란다. 그렇다고 그가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예쁜 미술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미술이 판치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 이런 문제의식이 겨냥한 대상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90년대의 전세계적인 기억의 싸움 속에서 패배하고 있는 사회”, “예술과 싸움이 무관한 사회”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서 교수는 군국 일본의 참혹한 범죄행위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공범자로 가담한 일본 근현대 미술이 과거 기억을 말살하고 날조하는 전후 일본 국가의 무반성과 파렴치에 편승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미술 에세이들은 바로 국민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미의식’을 통제함으로써 편향된 국민적 이데올로기를 조작해온 일본 국가의 의도에 놀아나는 일본 대중의 의식에 일본미술과는 다른 길을 간 서양미술의 진실을 통해 충격을 가하려는 고독한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두 형이 한국에서 장기수가 된 비통한 자신의 가족사와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근대 미학주의와 강고하게 결합한 국가의 억압체제를 깨뜨리는 ‘기억의 전쟁’은 국가로부터 독립한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으며, 독립적 인간은 단지 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미의식의 차원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어가 자기성찰을 통한 미의식의 독립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게 서 교수 생각이다. 그 출발점은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더 철저하게 바라보고, 더 격렬하게 창조하라!”

서 교수는 자신에겐 ‘금단의 땅’이었던 군사독재하의 처참한 한국 현실이 일본에선 불가능했던 치열한 미의식과 미술운동, 말하자면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군사정권이라는 역사를 겪어온 조선 민족에게 그 역사들과 길항하는 미술”을 창출했을 것으로 상상한 듯하다. 그는 그 가능성을 줄기찬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확인하고 꿈꾸어 왔다.

하지만 2년간 실제 겪어 본 조국의 미술은 그렇지 못했다. ‘성공한’ 근대 때문에 근대의 미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 바로 그 일본한테서 ‘실패’를 강요당한 한국 현대미술이 근대의 수입 통로였던 일본의 한계를 복제하고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현실이 그에겐 더욱 절망적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그게 애초 일본 사회를 겨냥했던 이 책을 한국에서 먼저 묶어내는 이유다.

따라서, 살롱 회화의 정통 원근법의 한계를 비극적으로 돌파하면서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인간 고뇌의 원형을 보여줬다는 고흐에 관한 지은이의 글에서 제목을 따온 <고뇌의 원근법>은 국가주의에 저항한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준 고흐와 카라바조에 대한 생생하고 정밀한 현장실사를 통해 우리 미술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돼 있는지, 돌파구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를 점검해보는 안내지도일 수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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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ousee 2009-06-0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했듯이 한국근대미술은 일본의 한계를 복제한 수입미술이었으며 미술잡지등의 사진이미지들을 통해서 체험된 감상적 미술이 주류미술로 인정되고 대학교편을 잡으면서 서교수가 지적한 '기억의 전쟁'이 부재한 뜬구름잡는 추세만 낳았다고 봅니다. 그럼 세계현대미술계가 자본의 흐름과 영향력때문에 주목하는 현재 중국은 어떨가요? 더 교활한 방법이 나타나죠, 이데올로기 문제를 아예 상품화 하는 경향인 거죠. 희생자들의 아픔을, 눈물을 대상화하며 공예품처럼 아주 잘 뽑아내죠...그가 실망한 한국은 그러나 나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다고 평가되기 시작했죠. 서교수가 2년 체류기간에 어떤 방식으로 미술을 접하셨을가요? 유명한 서양미술관들에 시간의 아우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명작'들이 어떻게 한국의 근대미술과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서교수도 고호에 관련된 선지식과 정보, 신화때문에 그 그림을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 어느 마을사람 눈에는 삽화수준의 별 쓸데없이 힘줘 그린 그림일 수도 있지 않을가요? 한국근대미술의 문제점은 어찌보면 '읽기'가 없는 전통에서 수입된 '읽기'로 짜맞추기를 힘겹게 하는 과정에서 비롯된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nanousee 2009-06-07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놓고보니 제가 댓글다는 일이 익숙치않아 다른 분들보다 좀 길게 쓰는 촌스러움을 저지른것 같네요..죄송-_-;;

로쟈 2009-06-07 20:15   좋아요 0 | URL
더 긴 댓글들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목은 더 자세하게 쓰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서평자로 적임이실 듯한데요.^^

펠릭스 2009-07-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이 어떤 풍경이나 사물을 본 다음의 반응은 다양하다.
스치듯 본 이미지나 문구, 그것들의 연유를 알고 다시 음미하는,,,

토끼장에서 막 생산된 새끼를 봤다. 장맛비에 둥지는 젖어 있었고,
새끼들은 밖으로 흩어저 있었다. 붉은 토끼 새끼가 징그러웠다.
이미 죽은 새끼를 면장갑을 끼고도 집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시 생각했다. 어미 토끼는 어떨까, 어미는 무감각할 수 있다.
잠시 어미 토끼 심정을 상상했다. 그 어미의 심정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 왔다. 살아 있는 나머지 새끼를 직접 들어 마른 둥지로
옮기지 않는다면, 나는 독서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토끼보다 책을 편하게 읽을 욕심으로 다섯마리의
토끼 새끼를 직접 옮기는 행동을 찔금 감고 했을 것이다.

어찌했든, 어미 토끼의 마음과 살아 있는 새끼에 대한 연민,
내 자신의 얄팍한 술수가 조화된 지금, 토끼 새끼도 나 자신도
편할 것이라는 안도감에 젖어 있다.

창밖에 나무들이 심하게 흔들린다.
작가의 마음과 화가의 마음은 어느 부분에서 일치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다를 뿐, 그들에게는 나에게 없는 무엇이 있다.
나는 그 무엇이 내속으로 들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