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교수의 세번째 미술 에세이집이 출간됐다. <고뇌의 원근법>(돌베개, 2009). 부제는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그의 전작들을 접해본 독자라면, 이내 손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나도 출간 소식을 접하자 마자 주문을 넣어서 그제 받아본 책이기도 하다. 예상대로 주말 북리뷰들에서 주목할 만한 책으로 다루어졌는데, 한겨레의 기사를 옮겨놓는다. 주로 한국 근대미술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계기로 삼고 있다. 저자 자신이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내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을 한국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랐던 이유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에서 미술-그것도 근대미술-에 나타나는 미의식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다."(6쪽)

 

한겨레(09. 06. 06) 한국은 ‘예쁜’ 미술에서 독립하라 

그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그야말로 전혀 개념이 다른 미술 에세이집으로 미술과 미의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뒤흔들며 1990년대 초 베스트셀러가 됐던 재일동포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 그 10여년 뒤 <청춘의 사신>이 번역·출간됐고, 이번에 그의 세 번째 미술 에세이집 <고뇌의 원근법>이 나왔다.

앞의 두 권은 일본에서 출판되고 나중에 한국어로 출간됐으나, <고뇌의 원근법>은 역시 일본의 여러 매체에 먼저 실리긴 했지만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건 한국 쪽이 먼저다. 차이는 그것만이 아니다. 더 두텁게 쌓인 연륜이 더 날카롭게 벼린 최근작일 뿐만 아니라, 2006년 4월부터 2년간 서울에 머문 그의 난생 첫 장기 한국 체험이 새롭게 부가한 문제의식을 짙게 반영한 편집이라는 점에서도 분명 다르다.    

 

» <댄서 아니타 베르버의 초상>. 1991년 슈투트가르트와 베를린에서 열린 ‘오토 딕스 탄생 100돌 기념 회고전’의 포스터가 된 그림. “이 잔혹하기까지 한 강렬함!”이라고 서 교수는 평했다. 

바로 그 한국 체험을 토대로 그가 던진 화두는 이것이다. “왜 내가 본 모든 한국 근대미술 작품은 그렇게도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실은 이 도발적인 의문이 오토 딕스 등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을 주로 다룬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다.  

서 교수에게 ‘미의식’이란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라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무언가 예쁘거나 아름답다고 느꼈을 때는 그걸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지 되물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미의식은 실은 역사적·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도 인간의 일인 이상 그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돼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그런데 “지나치게 예쁘기만 한” 한국 근대미술은 ‘지루하다’고 그는 얘기한다.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 오토 딕스의 <늙은 연인들〉

위대한 화가들로 그가 꼽는 사람들, 곧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그리고 이번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 에밀 놀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프랜시스 베이컨, 빈센트 반 고흐 등은 결코 그들 작품이 예뻐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다. 이 거장들은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그 현실을 직시해서 그리려 했고”, 그게 바로 감동의 원천이며,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는 게 서 교수 지론이다.  

왜 한국 근현대 미술은 지루한가? 그건 실제 삶과 유리돼 있고, 뒤틀린 현실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목숨 건 대결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계열의 일부는 예외적이라 했으나, 그것마저 거의 고사 단계란다. 그렇다고 그가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예쁜 미술의 가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미술이 판치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 이런 문제의식이 겨냥한 대상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90년대의 전세계적인 기억의 싸움 속에서 패배하고 있는 사회”, “예술과 싸움이 무관한 사회”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서 교수는 군국 일본의 참혹한 범죄행위에 침묵했을 뿐 아니라 공범자로 가담한 일본 근현대 미술이 과거 기억을 말살하고 날조하는 전후 일본 국가의 무반성과 파렴치에 편승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미술 에세이들은 바로 국민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미의식’을 통제함으로써 편향된 국민적 이데올로기를 조작해온 일본 국가의 의도에 놀아나는 일본 대중의 의식에 일본미술과는 다른 길을 간 서양미술의 진실을 통해 충격을 가하려는 고독한 작업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두 형이 한국에서 장기수가 된 비통한 자신의 가족사와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근대 미학주의와 강고하게 결합한 국가의 억압체제를 깨뜨리는 ‘기억의 전쟁’은 국가로부터 독립한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으며, 독립적 인간은 단지 정치적 차원만이 아니라 미의식의 차원에까지 깊숙이 파고들어가 자기성찰을 통한 미의식의 독립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게 서 교수 생각이다. 그 출발점은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더 철저하게 바라보고, 더 격렬하게 창조하라!”

서 교수는 자신에겐 ‘금단의 땅’이었던 군사독재하의 처참한 한국 현실이 일본에선 불가능했던 치열한 미의식과 미술운동, 말하자면 “식민지배와 남북분단, 그리고 군사정권이라는 역사를 겪어온 조선 민족에게 그 역사들과 길항하는 미술”을 창출했을 것으로 상상한 듯하다. 그는 그 가능성을 줄기찬 서양미술 순례를 통해 확인하고 꿈꾸어 왔다.

하지만 2년간 실제 겪어 본 조국의 미술은 그렇지 못했다. ‘성공한’ 근대 때문에 근대의 미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 바로 그 일본한테서 ‘실패’를 강요당한 한국 현대미술이 근대의 수입 통로였던 일본의 한계를 복제하고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현실이 그에겐 더욱 절망적으로 비쳤을지 모른다. 그게 애초 일본 사회를 겨냥했던 이 책을 한국에서 먼저 묶어내는 이유다.

따라서, 살롱 회화의 정통 원근법의 한계를 비극적으로 돌파하면서 근대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인간 고뇌의 원형을 보여줬다는 고흐에 관한 지은이의 글에서 제목을 따온 <고뇌의 원근법>은 국가주의에 저항한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준 고흐와 카라바조에 대한 생생하고 정밀한 현장실사를 통해 우리 미술의 어디가 어떻게 잘못돼 있는지, 돌파구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를 점검해보는 안내지도일 수 있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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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ousee 2009-06-0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했듯이 한국근대미술은 일본의 한계를 복제한 수입미술이었으며 미술잡지등의 사진이미지들을 통해서 체험된 감상적 미술이 주류미술로 인정되고 대학교편을 잡으면서 서교수가 지적한 '기억의 전쟁'이 부재한 뜬구름잡는 추세만 낳았다고 봅니다. 그럼 세계현대미술계가 자본의 흐름과 영향력때문에 주목하는 현재 중국은 어떨가요? 더 교활한 방법이 나타나죠, 이데올로기 문제를 아예 상품화 하는 경향인 거죠. 희생자들의 아픔을, 눈물을 대상화하며 공예품처럼 아주 잘 뽑아내죠...그가 실망한 한국은 그러나 나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다고 평가되기 시작했죠. 서교수가 2년 체류기간에 어떤 방식으로 미술을 접하셨을가요? 유명한 서양미술관들에 시간의 아우라를 뒤집어쓰고 있는 '명작'들이 어떻게 한국의 근대미술과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서교수도 고호에 관련된 선지식과 정보, 신화때문에 그 그림을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 어느 마을사람 눈에는 삽화수준의 별 쓸데없이 힘줘 그린 그림일 수도 있지 않을가요? 한국근대미술의 문제점은 어찌보면 '읽기'가 없는 전통에서 수입된 '읽기'로 짜맞추기를 힘겹게 하는 과정에서 비롯된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nanousee 2009-06-07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놓고보니 제가 댓글다는 일이 익숙치않아 다른 분들보다 좀 길게 쓰는 촌스러움을 저지른것 같네요..죄송-_-;;

로쟈 2009-06-07 20:15   좋아요 0 | URL
더 긴 댓글들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목은 더 자세하게 쓰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서평자로 적임이실 듯한데요.^^

펠릭스 2009-07-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이 어떤 풍경이나 사물을 본 다음의 반응은 다양하다.
스치듯 본 이미지나 문구, 그것들의 연유를 알고 다시 음미하는,,,

토끼장에서 막 생산된 새끼를 봤다. 장맛비에 둥지는 젖어 있었고,
새끼들은 밖으로 흩어저 있었다. 붉은 토끼 새끼가 징그러웠다.
이미 죽은 새끼를 면장갑을 끼고도 집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시 생각했다. 어미 토끼는 어떨까, 어미는 무감각할 수 있다.
잠시 어미 토끼 심정을 상상했다. 그 어미의 심정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 왔다. 살아 있는 나머지 새끼를 직접 들어 마른 둥지로
옮기지 않는다면, 나는 독서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는 토끼보다 책을 편하게 읽을 욕심으로 다섯마리의
토끼 새끼를 직접 옮기는 행동을 찔금 감고 했을 것이다.

어찌했든, 어미 토끼의 마음과 살아 있는 새끼에 대한 연민,
내 자신의 얄팍한 술수가 조화된 지금, 토끼 새끼도 나 자신도
편할 것이라는 안도감에 젖어 있다.

창밖에 나무들이 심하게 흔들린다.
작가의 마음과 화가의 마음은 어느 부분에서 일치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다를 뿐, 그들에게는 나에게 없는 무엇이 있다.
나는 그 무엇이 내속으로 들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