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이지만, MBC의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하면서 검찰이 제작진의 이메일까지 '증거자료'로 공개함으로써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헌법상에 보장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행위'일 터인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이 사건을 지휘한 서울지검장이 검찰총장으로 임명됐다. 이 사건 수사로 청와대의 호평을 얻었다는 후문도 있다). '비열한 법치주의'에 더하여 '편의적 법치주의' 또한 현 정부와 검찰의 신조인 모양이다. 이와 관련한 사설기사와 함께 '바람구두'님의 기고를 옮겨놓는다(어디 '장기 캠핑' 가신 걸로 알았는데, 멀리는 못 가신 모양이다). 문제가 된 김은희 작가가 MBC 작가 홈피에 올린 글에 대해서는 미디어오늘의 기사를 참조하시길(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694).   

경향신문(09. 06. 21) [사설]간첩 수사 연상시키는 작가 e메일 공개  

검찰이 엊그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위험성을 보도한 MBC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제작진 중 한 명인 김은희 작가의 개인 e메일 3통을 공개했다. 지난해 작가가 가까운 지인에게 보낸 e메일에는 “이명박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를 때라서…” 운운하는 부분이 나온다. 검찰은 “e메일이 제작진의 (악의적인)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주요 자료라 판단돼 고민 끝에 공개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뒤집어 말하면 작가가 대통령에게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프로그램 제작에 이 마음이 반영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갖고 시작돼 무리를 거듭해 온 이 수사가 이 대목에서 정점에 이른 듯하다. 왜 그런가. 첫째, 개인 e메일 공개는 헌법이 보장한 양심의 자유, 사생활 및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와 정면 충돌한다. 둘째, e메일 압수수색 권한을 인정하더라도 작가 개인의 정치 성향과 제작의도를 직접 연결하는 것은 비약이다. 이에 대해서는 방송작가협회가 성명에서 “개인적 생각이나 정치적 지향이 구체적인 방송 왜곡으로 연결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적절하게 지적했다. 이들은 “이것(정부에 대한 반감)은 법리적 근거라기보다 작가의 정치적 불온성을 강조하려는 이미지 전략”이라며 검찰이 개인의 머릿속까지 검열하는 수사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사적 감정을 담은 e메일을 대발견이라도 되는 양 언론에 공표하는 모습에서 구시대적 사상 검증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 세월 공안기관들은 정권 안보를 위해 수많은 간첩사건들을 조작했다. 지난해 전두환 정권 당시 대표적 공안 조작사건인 ‘오송회’ 간첩단 사건 관련자 9명이 모두 26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들의 주요 혐의는 김지하 시인의 <오적> 등 이른바 불온서적을 읽고 정치 현실을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안 듣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는 속담도 있다. 그런데 이젠 개인 e메일까지 범죄의 단서가 되는 시대로 후퇴하고 있다. 정치사건 수사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검찰과 이를 일말의 문제 제기도 없이 확대 보도하는 수구신문들의 작태가 전율스럽다.    

경향신문(09. 06. 22) [판]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초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라고 했을 때, 범접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조직으로 보이던 검찰도 대통령 앞에서는 움찔한다며 통쾌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대통령은 기업의 오너이고, 검찰은 휘하의 비서실이나 기획실쯤 되는 기관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권위주의 정권시절 검찰은 권력의 시녀로, 민주화 이후엔 가장 중요한 개혁 수단이자 파트너였다. 국민들은 검찰이 휘두르는 칼자루를 보며 정부가 추진할 개혁과 정책의 내용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이 ‘개혁의 수단’이 아닌 ‘개혁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희귀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인권변호사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검찰이 권력의 시녀나 정권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도구가 아니라, 국민의 인권과 민주주의 법질서 수호를 위해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조직이라는 상식을 일깨우려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법부 개혁을 주장했던 판사 출신의 여성 변호사 강금실씨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해 검찰개혁을 시도했다. 임기 초반이었지만 검사들은 검찰의 독립과 존중을 내세우며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과거 정권 같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대통령은 국민을 상대로 검찰 개혁에 대한 의지를 직접 전했다.  

검찰은 권력을 잡았어도 예외는 없다는 본보기라도 보이듯 살아 있는 권력인 대통령의 측근까지 구속했다. 변화는 성공적인 듯 보였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지켜보면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독립과 존중을 주장했던 검찰의 최근 행보를 지켜보면 당시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건 서열존중의 관행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지도층을 이루는 불멸의 신성가족들은 임기제 대통령보다 강력한 힘과 뒤를 봐주는 결속·연대를 과시했다. 그들은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권력의 일원이었다.

임기를 마친 노 전 대통령이 미련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국민들은 행복한 전임 대통령을 가질 뻔했다. 검찰은 드러난 혐의에 따라 수사했다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 보이는 검찰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그들의 진실성을 신뢰하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도리어 검찰과 전임 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오랜 악연을 생각해보면 정치적 의도가 개입한 수사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의심까지 사고 있다. 설령 검찰의 해명을 받아들이더라도 재판에 들어가기도 전에 연일 수사 과정이 흘러나오고, 언론이 피의사실을 확정된 진실인 양 왜곡해 여론심판과 인격살인으로 이끌었던 현실이 뒤바뀌는 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안양교도소에 전임 대통령을 가둘 독방을 비밀리에 추진했다는 보도는 이를 부인하는 법무부의 주장보다 신빙성 있게 들린다.

만약 검찰이 스스로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다면 먼저 검찰이 국민의 인권과 민주주의 법질서 수호를 위한 조직이라는 상식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해 제작진이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2008년 4월)에서 미국산 쇠고기의 위험성에 관한 사실을 ‘고의’로 왜곡했다며, 그 증거로 작가의 사적인 e메일을 들춰내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만약 이것이 증거라면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국민의 인권과 민주주의 법질서를 부정하는 현실 속에 “원칙과 정도, 절제와 품격을 갖춘 바른 수사, 정치적 편파 논란이 없는 공정한 수사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받겠다는 검찰의 꿈은 너무 야무지다. 스스로의 존재 의의조차 자각할 수 없는 조직이란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있는 이때, 국민들의 머릿속엔 이 말이 떠오른다.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09.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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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6-23 08:54   좋아요 0 | URL
왜 영화보면 적들에게 쫓겨 아지트를 옮겨야 할 때 모두 소각하고 가잖아요...그런 생각이듭니다. 만약 '제 2한국전쟁' 유사한 것들이 발생해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다면 알라딘에 있는 모든 글부터 추적당하면 빼도박도 못하겠구나...인터넷이 새로운 쌍방향매체로 해방의가능성도 있지만 다른면에서 보자면 훨씬 더 '총체적 관리사회'가 될 수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의 예가 될 듯 합니다.아도르노가 여전히 유의미한..
편지는 불에 증거인멸이라도 하지 이메일은 지워도 남으니...이메일을 쓰지 않던지 아니면 정권을 쫓아내던지.

로쟈 2009-06-23 22:33   좋아요 0 | URL
후자가 더 좋은 선택 같은데요...

마냐 2009-06-24 02:22   좋아요 0 | URL
저도 전자는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슴다. 현실적으론 합리적 아이디어라 생각함에도 불구

무해한모리군 2009-06-23 09:14   좋아요 0 | URL
권력자들 대화내용 녹음은 사생활 침해라더니.. 검찰은 이메일 공표..
유전무죄 무전유죄

로쟈 2009-06-23 22:34   좋아요 0 | URL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합니다. 스스로는 얼마나 무능하고 졸렬한지 알고 있을까요?..

꼬마요정 2009-06-23 09:16   좋아요 0 | URL
이렇게까지해서 자기들이 얻는 건 뭘까요? 음.. 저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가 안 가요.. 왜 이렇게 악수를 두는지.. 물론 그래서 국민들이 아우성 치고 경각심을 가질 수 있긴 한데요, 어째서 국민들을 달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걸까요?? 채찍과 당근은 함께 가는 건데, 이 정부는 그저 휘두르기만 하네요. 정말 이해가 안 가요..

로쟈 2009-06-23 22:35   좋아요 0 | URL
지능이 낮은 건지, 극악무도한 건지 저도 헷갈립니다...

Mephistopheles 2009-06-23 09:39   좋아요 0 | URL
이젠...윈드토커란 영화마냥...
이메일도 나바호 인디언 언어를 체계로 암호화시켜야 겠군요..ㅋㅋ

로쟈 2009-06-23 22:35   좋아요 0 | URL
g메일로 옮긴다는 얘기도 많이 나오더라구요...

2009-06-24 0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9-06-23 09:44   좋아요 0 | URL
발암물질 함유 생수를 판 기업명 밝히는건 명예훼손 때문에 비공개라던데;;;
이젠 웃기지도 않아용...

로쟈 2009-06-23 22:36   좋아요 0 | URL
웃기는 법도 많지요...
 
종교를 둘러싼 과학전쟁

다윈 탄생 200주년, 진화론(<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는 기획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얼마전에 마무리된 한국일보의 '다윈은 미래다'이다. 지난주 출간된 화제작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 2009)과도 관련하여 참고가 될 듯싶어서 3부 '해외 석한 인터뷰' 가운데 '진화론 논쟁의 核 리처드 도키스'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이 걸출한 다윈주의자는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등의 저작으로 이미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담은 역시나 한국에선 가장 열정적인 다윈주의 전도사 최재천 교수가 맡았다.    



한국일보(09. 05. 20) "우주의 시작·생명의 의미 답할 수 있는 건 종교아닌 과학"

도킨스를 만난 곳은 옥스퍼드 외곽에 있는 그의 자택이었다. 널찍한 거실 벽을 책으로 가득 채웠는데, 수십 가지 언어로 번역된 그의 저서만으로도 서가가 촘촘했다. 물철쭉 빛이 도는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도킨스는 예상보다 작은 체구에 차분한 목소리였다. 생명의 근원과 종교의 본질을 얘기하는 도킨스의 가랑이 사이를, 하얀색 말티즈종 강아지 두 마리가 헤집고 돌아다녔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1976년 <이기적 유전자>를 낼 때 겨우 35세였습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 그리고 당신의 삶을 바꿨습니다.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교수= 그때는 반(反)집단선택론의 흐름이 있었습니다. 콘래드 로렌스, 로버트 아드리 등의 책들이 아주 인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면서 인류를 위한 행동을 한다는 거죠

▲최= 몇 해 전 한국의 어떤 미술공모전에서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의 조각작품이 우승을 차지했어요. 호기심에 가봤는데 제목과 작품을 연결시키기 힘든 기묘한 것이었습니다.(웃음) 당신 저서 제목을 딴 '눈먼 시계공'이라는 SF소설도 한국의 한 신문에 연재 중입니다. 당신은 대중을 사로잡는 표현력을 지닌 것 같습니다. 혹시 작가가 되려고 했던 적은 없었나요. 



▲도킨스= 그런 야망을 가진 적은 없어요. 옥스퍼드대 학부생은 쓰기 훈련을 받습니다. 일주일에 에세이 하나씩 써야 하는데, 난 그걸 즐겼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은 편이고요. 그런 경험이 날 도운 것 같네요.  

가벼운 질문을 이어 던졌는데 돌아온 도킨스의 대답은 짧고 신중했다. 책 속에서 거침없이 기존의 통념을 무너뜨리는 그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었다. 최 교수가 "사람들은 당신을 '다윈의 불독'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날더러 '도킨스의 푸들'이라고 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도킨스는 웃음을 보였다. 한참 웃고 난 뒤 그는 "다윈의 불독은 내가 아니라 허버트 헉슬리의 별명"이라고 말했다.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만들어진 신>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자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최= 흥미롭게도 에드워드 윌슨, 다니엘 데넷, 당신이 2006년 모두 종교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윌슨이 제게 말하기를, 당신은 윌슨의 책을 읽고 "당신은 (기독교를 대하는 태도가) 외교관 같다"고 말했더니, 윌슨이 당신에게 "넌 기독교에 맞서는 전사 같다"고 답했다고 하더군요. <만들어진 신>을 보면 당신은 거의 기독교에 전쟁을 선포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도킨스= 나는 과학자로서 우주와 생명과 진리를 이해하려면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세계관이 있을 수 있더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 잘못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나는 맹렬한 적대감을 느낍니다. 표면상 설득력이 있고 매혹적이지만 수백만 인구를 오도하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이슬람교, 힌두교 다 마찬가집니다. 아무 증거도 없이 그저 수천 년 전에 씌여져 있다는 이유로 곧이곧대로 믿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쉽게 꾐에 넘어간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패착입니다. 나는 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가 종교를 갖게 된 것도 일종의 진화적 적응의 산물 아닙니까?

▲도킨스= 아, 물론 그럴 겁니다. 심리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중요한 연구주제입니다. 당신이나 나나 다윈주의자니까 그 관점에서 얘기해 봅시다. 종교는 그 자체로서 생존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기질의 부산물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겁니다. 나방과 비슷한 겁니다. 촛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의 성향은 당연히 아무런 생존가치가 없죠. 불빛의 원천이 오직 태양이나 달, 별이었던 시절에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한 곤충 신경계의 부수적 산물일 뿐입니다. 나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종교 딱지'를 붙이는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부모들을 앉혀두고 "그런 걸 시키면 안 돼"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행동은 어린이들에게 공산주의를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최 = 사실 아내를 따라서 수년 간 교회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제 아들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죠. 제가 잘못한 걸까요?

▲도킨스= (웃으며)아내 말을 들은 건 잘했죠. 다만 아들이 안 됐네요.

▲최= 저는 사실 스티븐 J 굴드(도킨스와 대척점에 서있었던 고(故) 하버드대 고생물학자로 종교와 과학이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는 NOMA(Non-overlapping Magiseria)라는 관점을 견지했다)의 생각에 가깝습니다.

▲도킨스= 궁극적으로 NOMA가 가능할까요? 종교는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것 같은 기적을 말하는데 이는 결국 종교와 과학 사이의 선을 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은근슬쩍 기적을 믿으면서 한편으로 굴드가 말한 궁극의 질문이나 윤리는 종교의 몫이라고 하는 거죠. 하지만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윤리적 판단을 하기 위해 꼭 종교가 필요합니까?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우리는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와 같은 궁극의 질문도 종교의 전문분야는 아닙니다.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을지 모르나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건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바마는 외교적 협상을 하면서 중간지대에서 타협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과학자에겐 그런 '중간지대'가 불가능합니다. 그런 말로 스스로를 속여서 굴드의 편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시 인터뷰의 주객이 바뀐 듯한 분위기가 흐른 뒤, 진화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도킨스는 33년 전 쓴 <이기적 유전자>가 한국에서 여전히 교재로 사용되며 많은 학생들의 세계관을 흔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최= 인류는 어떻게 진화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인류는 놀라운 기술들, 예컨대 인공지능이나 로봇 기술을 갖게 됐습니다. 스티븐 J 굴드는 "인류는 진화를 멈췄다"고 얘기한 적도 있는데요.

▲도킨스= 기간을 나눠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300만년쯤 오래 지나면 인류의 뇌가 두 배쯤 커져 월등해지지 않을까 궁금해 합니다. 그러려면 뇌가 큰 사람들이 가장 자식을 많이 낳아야겠죠?(웃음) 하지만 이런 전망에는 회의적입니다. 보다 짧은 기간을 두고 이야기해보면 에이즈에 대한 면역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보츠와나처럼 전체 인구의 상당수가 에이즈에 감염된 나라에는 에이즈 바이러스에 면역이 있는 여성들이 있어요. 그것은 강력한 자연선택의 한 예일 수 있습니다. 신장 변화를 볼까요. 20세기 들어 사람들의 키는 극적으로 커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양 공급의 개선 덕으로 생각하지만, 거기에 어떤 복잡한 선택 작용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여성이 성적으로 성숙하는 연령도 계속 낮아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문화적 진화는 훨씬 빠르고 드라마틱하겠죠. 지금까지의 진화와는 아주 다른 중요한 진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 '이기적(selfish)'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이 단어는 당신을 엄청나게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오랜 세월 엄청난 두통을 줬을 것 같은데요.

▲도킨스= 첫 질문으로 돌아가보죠. <이기적 유전자>를 쓴 동기가 뭐냐는 질문 말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그건 '반 집단선택론' 움직임의 일환이었습니다. 나는 집단이 아닌 자연선택의 단위, 그리고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단을 찾았어요. 그 답은 각각 '유전자'와 '이기적'이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것을 조합해 놓고 나니,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인류의 오랜 관념을 통째로 뒤집는 것이 되고 말았죠. 



▲최= 다시 그 책을 쓴 시점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을 쓸 건가요.

이 질문에, 도킨스는 잠시 창 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확신에 찬 "Yes"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도킨스= 글쎄요. '이기적 유전자-이타적 개체' 정도는 어떨까요. 그때 '불멸의 유전자'로 하자는 제안도 있었는데, 그때 그걸 왜 안 받아들였을까요. '불멸의'라는 표현이 더 사람을 고양시키고, 시적인 표현인데….

▲최= 마지막 질문입니다. 두 세기 전의 인간인 다윈이 현대에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다윈을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요. 



▲도킨스= 다윈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죠. 이 행성(지구)에서도 우주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물리학의 법칙이 지배합니다. 하지만, 이 행성에서는 어쩌면 우주에서 유일할지도 모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죠. 생명체가 날개를 펄럭이고, 헤엄을 치고, 점프를 하고, 죽이고, 지배합니다. 그 신비로운 현상은 자연선택이라는 과정에 의해 이뤄집니다. 그 과정은 마침내 그것을 이해하는 신경계, 곧 뇌의 진화에까지 이르렀어요. 그것에 대한 앎이 다윈이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09. 06. 21.  





P.S. 2006년에 <만들어진 신>과 나란히 출간된 걸로 소개된 에드워드 윌슨의 <창조>와 다니엘 데넷의 <주문 깨기>도 마저 번역되면 좋겠다. '해외 석학 인터뷰'에 연재된 데넷과 윌슨의 인터뷰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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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6-23 00:40 
    리차드 도킨스 인터뷰 — via 로쟈
 
 
델러웨이부인 2009-06-25 13:19   좋아요 0 | URL
이기적 유전자가 그런 뜻이었군요. <이타적 인간의 출현>도 같은 맥락인가 보아요.

로쟈 2009-06-26 12:28   좋아요 0 | URL
네, '이기적'이란 건 '의인화'한 표현이죠. 인간의 이타적 행동의 진화에 대한 설명은 <이기적 유전자>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장대익 외 2인의 공저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 2009)에 대한 서평기사를 프레시안에서 옮겨놓는다. 필자는 물리학자이면서 새로운 생명사상을 펼친 과학철학자이기도 한 장회익 교수이다. 책을 접하기 전에 유용한 가이드가 될 듯하다.    

프레시안(09. 06. 20) '과학 vs 종교'…종교의 유통기한은 끝인가?

한때나마 기독교에 몸담아본 일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독교의 가르침과 과학이 말해주는 내용 사이에 일정한 모순이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믿지 못할 것으로 판정하여 아예 이를 버리고 뛰쳐나왔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 의혹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간직해나가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를 버렸든 아직 그 안에 머물고 있든 간에 이 문제는 참으로 찜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사람들이 한번 찬찬이 읽어보고 그간 자신을 괴롭혀 온 이 문제에 대해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게 해줄 좋은 책이 나왔다. 신재식, 김윤성, 장대익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엮어 만든 <종교 전쟁>(사이언스북스 펴냄)이 그것이다.

과학 vs 종교…흥미진진한 대리전
사실 '종교 전쟁'이라는 표현은 이 책의 내용을 대변하기에 그리 적절하지 않다. 필자들 자신의 말대로 이것은 '종교 간 전쟁'이 아니라 '종교를 둘러싼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과연 '전쟁'에 해당하는 것인가 하는 데에는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

그러나 책의 제호는 어떻던, 현대 과학과 현대 이성의 조명에도 불구하고 현대 종교 특히 기독교가 그 신앙의 아성을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뜨거운 쟁점이 될 수 있으며, 여기에 관련하여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세 젊은 학자가 서로 간에 매우 우호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논지를 펴나가고 있다. 한 사람은 과학의 내용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고 있으며, 또 한 사람은 신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과학과 종교를 긍정적으로 포용하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종교 자체를 과학이 없던 시대에 만들어진 시대착오적인 유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이 안에서 각자 자기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대리자를 만나게 되며, 이 입장이 이들의 입을 통해 어떻게 변호되며 어떻게 비판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자신의 입장으로 택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럴 경우 자신의 논지가 이 안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반론은 어떠한 것이 있으며 이것은 또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지를 흥미롭게 추적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더욱 확고한 바탕 위에 자신의 신조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지녔던 미비점을 확인하고 좀 더 나은 입장을 모색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세 저자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지녔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안에서 자신의 입장이 설 자리는 어디쯤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고, 이들의 논지에 비추어 과연 자신의 입장이 적절한 것인지를 자문해볼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다채로운 학문적 파노라마
논의를 펴고 있는 세 사람의 저자는 서로 간의 차이만큼이나 공통점 또한 지니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성장하던 시기에 기독교(개신교) 신앙을 경험했으며, 적어도 한 때나마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신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왔다. 그러다가 한 사람은 과학 분야를 전공하고 다시 과학사와 과학철학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초기의 신앙에서 멀어져갔고, 급기야는 무신론자로 자처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종교라는 것 자체가 조만간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는 논지를 거침없이 펴나가게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기독교의 성직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우선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여 사고의 폭을 넓힌 후 다시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개신교 목사가 된 진보적인 신학자로서 신학의 핵심적 내용뿐 아니라 대학에서 '과학과 종교'에 대한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면서 과학을 통해 오히려 신앙의 폭과 깊이를 더해 나갈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또 다른 한 사람은 일관되게 종교학을 공부해 온 전형적인 종교학자이다. 그 또한 처음에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보수적 신앙의 개신교인으로서 창조 과학을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사람으로 "점차 진보적인 자유주의 개신교로 옮겨갔다가, 다시 개신교를 비롯한 개별 종교들을 넘어 종교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종교학자로, 그리고 종국에는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색체를 띤 불가지론적 입장의 세속적 종교학자"라고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 세 사람이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공통점은 이들이 모두 과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함께 나름의 깊은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학이나 신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흔히 과학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 이해가 지극히 일천한 사람들이 적지 않음에 반해 이들은 모두 현대과학에 대한 소양에 있어서 전문 과학자를 능가하는 혜안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세 사람이 과학과 종교 사이의 관계를 논하면서 펼쳐내는 학문적 파노라마는 다채로움 그 자체라 할만하다. 이들은 한편으로 도킨스, 데닛, 윌슨 등이 선도하고 있는 진화론적 설명 체계를 다각적으로 조명하면서 과학에서 바라보는 종교의 성격을 살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과학과 기독교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 관련성의 개관과 함께 현재 과학을 대하고 있는 신학의 여러 관점들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이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진화론을 둘러싼 기독교인들의 반응에 관한 것이며, 특히 최근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기세를 떨치고 있는 이른바 '창조 과학'에 집중적인 조명을 해주고 있다. 사실 창조 과학이라는 논제는 현대 과학에서는 물론이고 현대 신학에서조차도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유난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점에 대해 이들은 나름대로의 진단과 함께 우려의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다. 



기독교인이 꼭 읽어야 할 책
이들의 논의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점은 종교적 신앙에 대한 각자 다른 입장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입장을 존중해가며 서로 다른 전문 분야에서 각자의 전문성을 최대한 동원하여 상호보완적인 논의를 매우 자연스럽게 엮어나간다는 점이다. 학문 간의 대화에서 누구나 추구하면서도 좀처럼 이루어내기 힘든 시너지 효과를 이들은 매우 잘 이루어내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과학의 본질이나 또 이를 수용하는 자세에서 거의 아무런 차이도 보여주고 있지 않으면서도 신앙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각자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를 보기에 따라서는 과학에 대한 이해가 신앙의 문제와는 무관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을 한 층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들 모두가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이나 기복주의적 신앙 형태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과학이 일정 정도 신앙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독교 특히 개신교와 특별한 관련을 가졌고 따라서 그 소재의 많은 부분이 여기에 치우쳐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나 종교에 관련된 이들의 논의가 기독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 가운데 적어도 두 사람은 이미 기독교의 입장을 넘어서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 또한 편협한 기독교 신학자가 아니라 종교 간 대화의 문을 크게 열어놓고 있어서, 이들의 이야기는 종교인 일반 그리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운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은 이미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젊은 신도들과 기독교 목회자 그리고 기독교 교사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그들이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자신들 내부에서,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주위에서, 이 책이 제기하고 있는 물음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들 자신 이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지 대답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지닌 다른 한 가지 장점은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의 편지라고 하는 부드러우면서도 자유로운 형식을 취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큰 부담감을 주지 않고 다층적인 담론을 종횡무진으로 열어간다는 점이다. 특히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이 안에서 저자들이 그 동안 겪어온 내면적 고뇌와 함께 그들이 현재 토로하고 있는 여러 어려움들까지 가감 없이 읽어낼 즐거움을 얻어낼 수 있다.

저자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비교적 젊은 학자들로, 자신들의 직접적 경험을 바탕으로 학문 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계 학계와의 폭넓은 소통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저자 자신들이 보여주는 자세에 있어서 완결된 하나의 결실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모색의 한 단면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남은 문제들
이러한 점까지 고려하여 이 책의 주제와 관련된 내 개인적 견해 몇 가지만을 덧붙이기로 한다. 첫째 하나는 논의의 흐름이 지나치게 '이기적 유전자' 그리고 이것의 확장형인 '밈(meme)'이라는 메타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사실 유전자든 밈이던 그 자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그 주변에 이를 가능케 하는 '보작용자'(장회익, 1990, <과학과 메타과학> 193쪽 참조)가 함께 해야만 가능한 것이데, 이 부분에 대한 고려가 불충분하면 지나치게 유전자 또는 밈 환원론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것이지만, 오랫동안 필자 자신이 천착해온 생명의 단위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필자가 그간 밝혀온 견해에 따르면 생명의 진정한 단위는 유전자도 아니고 또 여타의 낱생명도 아닌 온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인정할 경우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인간과 종교에 대한 모든 패러다임이 바뀌게 될 것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과 종교를 논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자연의 물리적 질서와 생명체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주체의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풀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신체/마음의 문제'라고 하여 전통적인 난제로 찍혀있는 것이지만, 어렵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학문적 이해가 진전됨에 따라 거듭 되묻고 잠정적이나마 그 해답을 찾아내어야 할 문제이다.

종교가 과학으로 환원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이 해답에 달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나 자신의 견해로는, 이들이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환원될 성격의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 

09.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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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기적 유전자, 이타적 개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6-21 20:59 
    다윈 탄생 200주년, 진화론(<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맞는 기획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얼마전에 마무리된 한국일보의 '다윈은 미래다'이다. 출간된 화제작 <종교전쟁>(사이언스북스, 2009)와도 관련하여 참고가 될 듯싶어서 3부 '해외 석한 인터뷰' 가운데 '진화론 논쟁의 核 리처드 도키스' 편을 스크랩해놓는다. 이 걸출한 다윈주의자는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hnine 2009-06-21 17:25   좋아요 0 | URL
과학 관련 책들은 주로 저자를 따라서 읽게 되는데 위의 저자는 제가 선호하는 과학 저술가 중의 한 사람이라서 위의 책에 관심이 가네요. 물리학자 출신이지만 글을 참 잘 쓰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쓴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그 분야에 대해 깊이, 근본부터 알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로쟈 2009-06-21 20:18   좋아요 0 | URL
네, <과학과 메타과학>은 쉬운 책은 아닌데, 이후엔 더 편하게 쓰시죠...

hnine 2009-06-21 20:41   좋아요 0 | URL
에궁, 저는 위의 책 장대익 님을 두고 한 말이었답니다.
장회익 교수님의 명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요 ^^

로쟈 2009-06-21 21:01   좋아요 0 | URL
물리학 전공이라고 하셔서요.^^; 장대익 교수는 기계공학이 전공이었다고 돼 있고요...

펠릭스 2009-06-26 20:36   좋아요 0 | URL
'지적설계론'과 '진화론'에 대한 법정논쟁을 본적이 있읍니다. '지적설계론'의 발상이 흥미롭읍니다.

로쟈 2009-06-25 06:00   좋아요 0 | URL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는 책을 '진지하게' 읽은 적이 없긴 하지만, 그게 '진지한' 주장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선입견으로 갖고 있습니다...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로 다시금 사법 권력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 국민과 법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안위와 자리 보전에만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도 아무런 브레이크가 돼주지 못한 걸 보면 자구책은 없는 게 아닌가 싶다. 법치주의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들에 눈이 간다. 원래 이 분야의 책들이 자주 출간됐던 것인지, 아니면 시국과 관련하여 부쩍 많이 출간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눈에 자주 띈다. 이번주에 눈에 띈 세 권에 관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09, 06. 20) [내 책을 말한다] 비열한 법치주의, 불온한 시민을 만든다

법대에 들어가 법조인의 꿈을 키우던 시절, 모래알을 씹는 것과 같다는 법서를 뒤적이며 생각하던 ‘좋은’ 법과 법률가의 모습을 그렸다. 공직자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마주한 시민들과 관료, 군인들의 모습이 있었다. 실제 마주한 법률가들과 우리 법의 현실은 감성적으로 이해한 우리사회의 민주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교과서 속의 법과 권리는 늘 사람에 의해 왜곡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법을 마주하였을 때를 스스로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법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 삶을 규율하고 있지만, 그 법이 자신의 근처에서 늘 서성인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은 아직 우리에겐 낯선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민들의 무관심은 ‘침묵하는 다수’로 호도되어 늘 권력자들의 구미에 맞게 이용되고 조작된다. 그 모습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여실히 목격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권력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한다.  

2007년 가을 한 주간의 뉴스를 통해 법이 담고 있는 의미와 실체를 분석하는 코너를 맡아 근 1년 가까이 라디오 방송을 했다. 그러나 KBS 인사파동 중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퇴보하는 징후가 노골화되는 가운데 방송을 중단하게 됐다. 많이 아쉬웠다. 그런데 방송원고를 모아 책으로 묶어 내자는 제의를 받았다. 방송도 얼떨결에 시작했는데 난생 처음 출판하자는 제의를 받고 보니 무척 당황스럽고 망설여졌다. 그 때 다루던 주제들이 이미 시의성을 잃고 있어 어렵겠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찬찬히 살피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유효한 주제로 남아 있다는 의견 앞에 시의성 부족의 항변은 더 이상 통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못내 씁쓸하기도 했다. ‘무엇이 시민을 불온하게 하는가’(갤리온 펴냄)는 그렇게 나왔다.  

진실은 여전히 땅 속을 맴돌고 정의는 도무지 활짝 피어나지 못한다. 과거에 비해 퇴보하고 있다는 우리 민주주의의 현실을 애써 포장하는 법률 기술자들의 행태는 변함이 없다. 집시법 개악, 집단소송제 도입, 광고주 불매운동, 김용철 변호사 양심고백사건, 삼성특검, 대법관 재판 개입사건 등을 헌법과 인권의 관점에서 다뤘다. 권력을 가진 쪽은 비열한 법치주의를 강요하며 불온한 시민을 양산한다. ‘불온’한지의 여부를 권력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수많은 ‘불온’이 모여 발전해 왔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자 교훈이다. 군주의 절대적 권력이 사라진 오늘에도 ‘불온’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활보하고 있음은 우리가 성취한 민주주의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생각게 한다.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삶의 법, 사람의 법’이었다. 시민들이 삶 속에서 항상 관심을 갖고 법과 그 법을 집행하는 권력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람의 법이 완성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회초리를 든 법이 아니라 푸근한 울타리로서의 법이 피어날 때 우리는 분명 살 만한 세상을 아이들에게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천학비재(淺學菲才)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한다. 하지만 깨어 있는 시민이 좋은 법을 만들고 좋은 나라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최강욱 법무법인 청맥변호사)   

한겨레(09. 06. 20) '석궁재판’ 법치주의 실태를 전하다

2007년 1월15일 저녁 6시30분 전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김명호는 자신이 낸 교수지위 확인소송의 항소심 재판장인 서울고등법원 박홍우 부장판사의 아파트를 찾았다. 1층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퇴근하는 박 판사와 마주친 김 교수는 화살이 장전된 석궁을 들고 “항소를 기각한 이유가 뭐냐”고 따져물었다. 잠시 뒤 화살이 발사됐고, 아파트 경비와 운전기사에 제압당한 김 교수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연행됐다.

사건 직후 대법원은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재판장 집에 찾아와 흉기를 사용해 테러를 감행했다”고 발표했다.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는 대법원장의 발언과 “법치주의가 흔들리면 국가 질서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전국법원장회의의 담화가 잇따랐다. 그런데 여론은 법원 기대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사건을 보도한 인터넷 기사에는 “법치주의? 똥 싸고 자빠졌다” “나도 석궁을 쏘고 싶었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부러진 화살>은 “원칙대로 고집스럽게 살면서 주변에 적당히 사는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성질 깐깐한 한 수학자’가 벌인” 대한민국 법원과의 전투 기록이다. 책을 쓴 전문 인터뷰어 서형씨는 3대 권력기관(청와대·국회·대법원)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다 ‘1인시위계의 전설’이 된 김 교수를 뒤늦게 만났다. 석궁사건에 대한 7차 공판이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글쓴이가 지켜본 공판은 한 편의 부조리극이다. 피고인 신분의 김 교수가 판사와 검사를 향해 “법을 지켜라” 하고 호통치는가 하면, 재판장은 피해자 박 판사에 대한 변호인의 신문을 수시로 가로막는다. 피고인에겐 공공연한 경멸감을 표출하면서 박 판사에게는 깍듯하게 대하는 검사나, 부장판사를 지낸 사람이 맞을까 싶을 만큼 진술에 일관성이 없는 박 판사, 재판중임에도 문을 박차고 나가거나 소리를 질러대는 방청객들 역시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원고 쪽이 밝힌 사건 전모 역시 석연찮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박 판사의 복부에 난 상처는 1.5m 거리에서 쏜 화살을 정통으로 맞았다고 보기엔 턱없이 경미하고, 재판부에 제출된 증거품 가운데는 박 판사가 맞았다는 ‘부러진 화살’이 사라지고 없다. 박 판사의 겉옷과 내복에 남아 있는 핏자국이 와이셔츠에는 없는 점, 확보된 혈흔이 박 판사의 것이 맞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은 부실 수사도 의혹만 키울 뿐이었다. 그런데 증거의 부실함을 지적하며 박 판사에 대한 추가 신문과 혈흔 감정이 필요하다는 김 교수의 요청을 재판장은 모두 기각한다. 김 교수는 결국 항소심에서도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거쳐 교도소에 3년째 수감중이다.

글쓴이는 석궁 재판을 사실상의 징벌 재판으로 규정한다. 재판의 부당성을 고발하며 판사의 실명이 적힌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판사를 석궁으로 위협하고 재판정에서도 법조항을 들이대며 재판부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겁 없고 불손한 피고인에 대한 ‘법조 카르텔’의 집단보복이란 얘기다.   

사건 당사자인 김 교수와 주변 인물은 물론, 현직 부장판사와 법원 직원, 나아가 유사한 사법 피해자들과 사건을 취재한 언론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항소심 재판장과 김 교수의 법정공방을 속기록 형태로 정리한 5장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문제점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현장 르포로도 손색이 없다.(이세영 기자)   

세계일보(09. 06. 20) 재판제도는 신이 만든 제도가 아니다

인간사회를 가장 명확하게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재판제도’다. 국가가 형성된 이후 인류의 역사는 ‘재판의 역사’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개체성이 강하고 지혜가 발달한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다툼과 분쟁과 반역이 있게 마련이고, 그에 따른 공정한 판단과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공정한 재판이 존재할까. 죄 있는 사람은 벌을 받고, 죄가 없는 사람은 무죄판결을 받는 것이 재판의 원리거늘 과연 그럴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왜 통용되며, 살인이나 반역죄로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이 무죄로 방면되는 일은 왜 반복해서 일어날까. 정권이 바뀌면 왜 전 정권 고위인사들은 줄줄이 쇠고랑을 찰까.

영국 변호사인 브라이언 해리스가 지은 ‘인저스티스―세기의 정치범 재판’(이보경 옮김, 열대림)은 부정 혹은 불의가 발생한, 즉 무고한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거나 유죄판결에 ‘합리적 의혹’이 존재하는 악명 높은 재판들을 탐구하여 그 재판이 ‘공정했는가’의 문제는 물론 피고는 ‘유죄인가, 무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불의’의 본보기로서 반역죄, 간첩활동, 폭동 같은 명백한 범죄뿐만 아니라 의무태만, 비겁함, 정치적 목적의 강탈, 불경죄, 노동쟁의 같은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은 무엇보다도 ‘판결에 대한 균형 잡힌 검증’을 시도한다.

저자는 사법 살인의 대표적 희생자로 영국 해군 지휘관 존 빙 제독을 예로 들었다. 1756년 지중해 미노르카 섬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빙 제독은 영국 함대의 형편없는 전투력으로는 도저히 프랑스 함대를 이길 수가 없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다. 그럼에도 프랑스 함대와의 전투에서 무승부를 기록한다. 하지만, 왜곡된 보고서에 기초한 해군본부는 빙 제독이 일을 다 그르쳤다며 체포했고, 그 후 근거가 부족한 명령불복종죄, 근무태만죄, 영국 정부에 의해 선동된 전국적인 편견과 여론을 등에 업은 군사재판이 열렸다. 그를 구하기 위해 적이었던 프랑스 장군까지 서신을 보냈지만 정부 측에 의해 탈취되었고, 정부는 미노르카 섬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 빙 제독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당시 ‘뉴게이트 캘린더’지는 “존 빙 제독은 온 유럽을 경악시키며 처형되었다. 그의 과오와 무분별함이 무엇이었든 영국 정부는 그를 가혹하게 매도했고 비열하게 포기했으며 정치적 음모에 잔혹하게 희생시켰다”고 보도했다.

책은 이 밖에도 링컨 암살자들부터 영국 왕 찰스 1세, 방송인 윌리엄 조이스, 영국 영사였던 로저 케이스먼트, 노동조합운동의 등불로 여겨지는 톨퍼들 순교자들, 아나키스트였던 사코와 반제티, 대법관 토머스 모어,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의 나치주의자들, 그리고 원폭 기밀 간첩 로젠버그 부부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재판’으로 인식되는 13가지의 악명 높은 재판 사례를 통해 권력자 또는 국가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대상을 어떻게 희생시켰는지,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불의’는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파헤쳤다.

“수많은 악명 높은 사건들을 살펴보고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는 저자는 “불확실함과 도덕적 모호함이 넘치는 정치범 재판은 인간의 행동방식을 관찰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시험대”라고 말한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정치성 재판에 관여하고 있는 검사와 판사, 그리고 이를 보도하는 언론에 반면교사가 되기에 충분하다.(조정진기자)  

09.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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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9-06-20 12:04 
    대학교수가 판사를 석궁으로 쐈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전후사정이 책으로 엮어졌군요. via 로쟈의 저공비행
  2. 이제 검찰의 이빨을 뽑아야 할 때
    from 급진적 생물학자 Radical Biologist 2009-06-20 23:58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때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검찰개혁을 위한 여론이 형성되고 있지만, 여전히 검찰은 오만하기 짝이 없다. 박연차 게이트, 용산참사, 촛불시위, 피디수첩 등등의 개개사안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제 근본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할때다. 이제 국민들은 더 이상 검찰의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 문민정부 시절부터 검찰개혁에 관한 논의가 있어왔지만, 그 성과는 보잘것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
  3. 사코와 반제티 사건과 한국사회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2 09:13 
    이번주에 눈에 띄는 신간은 저널리스트들이 쓴 역사서이다. '알 카에다에서 9·11까지'를 다룬 로렌스 라이트의 <문명전쟁>(다른, 2009)과 '세계를 뒤흔든 20세기 미국의 마녀재판'이란 부제를 단 브루스 왓슨의 <사코와 반제티>(삼천리, 2009). 미국사/문명사의 한 단면을 자세하게 파헤치고 있는 책들인데, 개인적으론 내용보다도 이런 책들을 쓸 수 있는 필자와 시장 조건이 좀 부럽다. 이번주 한겨레2
 
 
승주나무 2009-06-20 16:43   좋아요 0 | URL
제목 없음

안녕하세요. 승주나무입니다.
알라딘 서재지기와 네티즌들이 함께 시국선언 의견광고를 하려고 합니다.
알라디너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참여의사를 댓글로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즐찾 서재들을 다니면서 통문(댓글)을 돌리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남기는 스팸성 댓글이지만 어여삐 봐주세요~~~

http://blog.aladdin.co.kr/booknamu/2916466


2009-06-21 1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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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바벨의 비극적 삶을 모티브로 한 픽션 <사라진 원고>(난장이, 2009)도 그렇지만, 이번주에 나온 책에는 역사의 희생자들을 다룬 책이 도드라진다. 중국 작가 리궈원의 <중국문인의 비정상적인 죽음>(에버리치홀딩스, 2009)도 그렇고, 문인/지식인의 죽음을 다룬 건 아니지만 여순사건을 다룬 김득중 박사의 <빨갱이의 탄생>(도서출판선인, 2009)도 그렇다. 관련기사를 모아놓는다.  

한국일보(09. 06. 20) 사마천은 궁형, 이백은 투신… 그들은 왜?

고래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농공상'의 맨 앞자리에 그 이름이 놓였다. 때로 사당에 위패로 모셔져 사람들의 절을 받을 수도 있었다. 잘하면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를 받은 공자처럼 명예로나마 왕 대접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치병에 걸린 문인은 약도 없다'는 말이 있다던가. 지식인들은 명예라는 상징권력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호시탐탐 정치권력을 탐했다. 지식인들에게 정치권력이란, 먹고 싶지만 입천장이 델까 두렵고, 안 먹자니 좀이 쑤셔 못견디게 만드는 달콤한 독약이었던 셈.  

중국의 원로작가 리궈원(79)은 이 달콤한 독약을 마실까 말까 고민하며 속세와 탈속의 중간지대에서 끊임없이 방황했던 지식인들의 행태를 주목한다. 그 회색지대에서 최고권력자로부터 혹은 동료 문인들로부터 목이 베이고, 팔 다리가 잘리고, 허리가 끊기고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지식인들의 비참한 말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지은이는 한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궁형을 당한 사마천, 당 현종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다 말년에는 줄을 잘못 서 감옥에 갇히고 결국 투신으로 생을 마감한 이백, 갑골문을 정리한 위업에도 불구하고 동료 문인과의 갈등으로 호수에 몸을 던진 청 말의 고증학자 왕궈웨이까지, 중국 지식인 36명의 죽음을 재조명한다.

문인들의 비극적 말로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최고 권력자들에 의한 보복이다. 지은이는 중국사에 300명이 넘는 황제가 군림했지만 그 중에 지식인을 높이 평가하고 진정으로 대접한 현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비교적 교양있는 축은 지식인들을 질투했고, 교양이 없는 자들은 지식인을 증오했으며, 반편이 같은 이들은 지식인들을 괴롭혔다는 것. 조조가 금주령을 발표하자 "요 임금은 술을 즐겼기 때문에 성현의 반열에 올랐다"며 공공연히 조조를 비꼬다 사형당한 공융, '명사(明史)'를 편찬해 이민족 정권의 약점을 건드린 죄목으로 청의 강희제에게 처형당한 장정롱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료들의 질투로 목숨을 잃은 문인도 부지기수다. 사부(詞賦)에 능한 문장가이자 뛰어난 역사학자, 서예가, 작곡가로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꼽히는 후한의 채옹이 그런 인물이다. 그의 죽음이 중국인들의 '참치통조림 법칙'과 연결돼 있다는 저자의 설명은 흥미롭다. 오랫동안 자급자족의 농경사회에 살아 경쟁에 대한 관념이 결여돼있는 중국인들은 "네가 나보다 나으면 얼마나 나으며, 내가 너보다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냐"는 생각에 사로잡혀 평균적인 것을 생산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 채옹은 너무나 특출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지식인들에 정치보복을 일삼은 황제들이나 그들의 재주를 질투한 동료들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지식인들의 죽음은 권력에 대한 그들의 이율배반적 태도에 기인했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문장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벼슬을 탐하다가 교수형을 당한 서진시대 육기의 죽음에 대해 그는 "글쓰기가 자신의 최대의 무기라면, 관직이 바로 자기자신에게는 최대의 약점"이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어떤 종류의 유혹이든, 그것이 금빛이든, 은빛이든, 핑크빛이든, 심지어는 오색찬란하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가능한 한 그것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중국작가협회 명예위원인 리궈원은 1957년 공산당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을 내놓았다가 우파 작가로 낙인찍혀 문화혁명기에 철도 건설현장에 하방돼 20여년간 붓을 꺾어야 했던 인물. 그같은 경험이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에 대한 그의 성찰에 무게를 더해준다.(이왕구기자)  

  

한겨레(09. 06. 20) '빨갱이’는 국민-비국민 가르는 이분법에서 태어났다

여순사건을 상징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학교 운동장처럼 보이는 넓은 공터에 주민 수천 명이 양쪽으로 패를 나눠 앉아 있다. 두 무리를 나눈 폭 3미터 남짓한 중간지대에는 무장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데, 담장 뒤편 시가지에서 치솟는 검은 연기가 주민들이 맞닥뜨릴 운명의 가혹함을 예고하는 듯하다.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피난민 수용소’로 소개됐지만, 실은 여수 진압 직후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이다. 오른쪽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부역 혐의자들로, 사진 촬영 직후 89명이 학교 뒤편으로 끌려가 즉결처분됐다. 운동장을 가로지른 중간지대는 양민과 혐의자의 편의적 구분선이 아닌, 삶과 죽음의 절대적 경계선이었다.

“진압군이 시가지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한 게 주민을 한곳에 모아놓고 ‘빨갱이’를 골라내는 일이었습니다. 경찰 생존자와 우익 인사들이 대열을 훑고 다니다 ‘저놈’ 하고 지목하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주민들은 이것을 ‘손가락 총질’이라고 불렀어요. 그들을 기다리는 건 무자비한 몽둥이질과 총살, 참수형이었습니다.”

<‘빨갱이’의 탄생>을 펴낸 김득중(44)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여순사건의 핵심적 의미를 ‘대한민국 국민 만들기’에서 찾는다. 출범 두 달을 갓 넘긴 이승만 정부에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의 자격 조건”을 심사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국민’으로 승인하는 것은 항상 ‘국민이 아닌 자’를 구분하고 배제하는 과정을 동반하는데, 이승만 정부한테 ‘비국민’은 ‘빨갱이’였다.

“빨갱이란 말은 일제 때부터 있었고, 해방공간에서도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빈번하게 사용됐어요. 그런데 여순사건을 거치며 그 의미가 변합니다. 단순히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라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못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악마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죠. 부역자 색출 작업이 벌어진 학교 운동장은 양민과 빨갱이, 인간과 비인간, 국민과 비국민을 준별하는 공간이었던 겁니다.”

물론 우익의 ‘빨갱이 사냥’은 봉기 기간 좌익이 벌인 학살행위가 빌미가 됐다. 실제 반군이 장악했던 여러 지역에서 반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 대량으로 살해됐다. 하지만 글쓴이는 좌·우익의 살상행위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학살의 규모나 대상, 지속 기간에서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조사를 보면, 전체 희생자 1만여명 가운데 95%가 국군과 경찰에 의해 죽었습니다. 지방 좌익과 반군이 죽인 사람은 500명 정도예요. 그리고 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좌익의 학살은 표적이 분명했습니다. 친일 경찰과 한민당 세력, 좌익 탄압에 앞장섰던 청년단원들이었지요. 그런데 우익은 달랐어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과 반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 활동을 한 남로당원뿐 아니라 그들에게 밥 해준 사람, 분위기에 휩쓸려 부화뇌동한 학생, 반군이 남기고 간 소지품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변변한 자기변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살해당했습니다. 복수심 때문이라고 보기엔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실제 희생자 중에는 평소 경찰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검사, 좌익에 온정적이었던 여중 교장 등 우익 명망가도 있었다. 이들은 반군에 협조한 증거가 없었는데도 심증만으로 잡혀가 처형됐다. 전 시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초토화 진압작전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빨갱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뒤에 빨갱이가 된 경우였다.

이런 ‘빨갱이 만들기’에는 언론과 문인들의 구실이 컸다는 게 글쓴이의 분석이다. 실제 신문들은 정보 획득의 통로가 제한된 상황에서 정부와 진압군의 발표 내용, 시중에 떠도는 소문들을 여과 없이 보도했고, 시찰단 자격으로 현지를 방문한 시인과 소설가들 역시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적 잔인성을 부각시키는 글을 경쟁적으로 발표했다. 이를 통해 ‘빨갱이’란 기표에 담긴 ‘살인마’ ‘비인간’의 이미지는 국민의 의식회로 안에 견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되려면 반공의식을 내면화해야 했고, 이렇게 내면화한 반공논리는 대한민국 60년사를 통해 지배권력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빨갱이라는 유령을 어김없이 불러냈다.

“인터넷에서 ‘좌빨’(좌익빨갱이)이란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누리꾼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대북 강경책에 반대하고 집회·시위와 사상의 자유, 노동자의 파업권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빨갱이 딱지를 붙이려 드는 이들의 사고 구조에는 여전히 양민과 빨갱이,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은 아직도 진행형인 셈입니다.”(이세영기자)  



» 1948년 10월26일 여수 서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좌익 협조자 색출 장면. <호남신문> 이경모 기자가 찍었다. 같은 장면을 당시 <동아일보>는 피난민 수용소로 소개했다. 

여순사건은 ‘반공국가’ 건국공신
1948년 10월19일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전남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출병을 거부하며 일으킨 무장반란. 지방 좌익세력과 주민들이 봉기에 호응해 가세하면서 여수와 순천, 광양, 구례, 보성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파급됐다. 당시 정부는 북한과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계획적 반란으로 규정했으나 최근 연구 결과 남로당 중앙조직이나 북한과는 무관하게, 숙군(肅軍) 움직임에 위기를 느낀 14연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확인되고 있다. 군인봉기가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친일파 재등용과 토지개혁 지연, 단독정부 수립에 따른 사회·정치적 불만의 누적 등이 꼽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기도 하다.  

09.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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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9-06-20 09:51   좋아요 0 | URL
서글픈 역사입니다.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네요.. 책 두 권 모두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로쟈 2009-06-21 10:26   좋아요 0 | URL
아직도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죠.--;

노이에자이트 2009-06-20 15:07   좋아요 0 | URL
남부군을 쓴 이태가 유작으로 남긴 실록이 <여순병란>이었습니다.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여순 병란이지요.

로쟈 2009-06-21 10:27   좋아요 0 | URL
역사로서 제대로 조명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