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오래전에 쓴 시가 생각나서 옮겨놓는다. 2005년 말에 쓴 한 페이퍼에 끼워넣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시만을 따로 독립시켜 놓기로 한다. 시는 1995년 6월 4일에 쓴 걸로 적혀 있으니 딱 이맘때이다. 메모를 보니 '말랑말랑한 빵'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쓰게 됐다고 한다.   

 

말랑말랑한 빵에게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 바짝 구워지면 빵은 딱딱해진다. 그건 딱딱한 빵이다.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먹어보면 안다.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살짝, 그렇다, 살짝 구워진다는 !
그것이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비밀은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는다, 살살 녹아난다. 비밀은 사랑스럽다.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여기저기서 주무르고 달군다. 더러는 태우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살짝, 그렇다, 살짝 미쳐간다는 !
그것이 또한 말랑말랑한 빵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침내 말랑말랑한 빵이 구워졌다.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09. 06. 07.      

 

P.S. 시에서 내가 맘에 들어하는 대목은 "우리는 공공장소에서도 빵을 먹는다, 말랑말랑한. 세상은/ 오랜 관습의 사원이며 존재의 빵집이다",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같은 구절이다. 내게 말랑말랑한 빵맛 같은 걸 전해준다. 시작 메모로 더 적어놓은 걸 옮겨보면 이렇다.     


내가 좋아하는 영어 단어 중에 'tangible'이 있다. '만져서 알 수 있는'이란 뜻을 한 단어로 나타낸다. 탱탱한지, 딴딴한지는 만져봐야 알 것 아닌가. 그런데 '먹어봐서(야) 알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는 없는 모양이다. 고작 'edible' 정도이다. '먹을 수 있는'이란 뜻. 이게 과연 먹을 수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정도가 중요해서였겠지. 하지만 대학에 오랫동안 적을 두고 있는 나에겐 앎이란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정말인가는 먹어보면 안다" 같은 걸 두세 음절로 나타낼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우리말에 있었으면 싶다(영어로는 'edangible'쯤 될까?). 우리의 어휘가 너무 부족하다. 그러니 믿음도 부족할 밖에. 말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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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6-0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곡조를 붙여서 부르면 좋겠어요~

로쟈 2009-06-07 20:07   좋아요 0 | URL
곡조를 붙이려면 '-이다'는 다 개사해야겠는데요.^^

라로 2009-06-0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우리의 어휘가 너무 부족한건 사실이지만 그 많은 영어의 어휘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말들도 있잖아요~.^^(그냥 인사 댓글 남기고 싶어서,,,님의 책 구매했는데 참 좋아요~.^^)

로쟈 2009-06-07 20:09   좋아요 0 | URL
'먹어서 알 수 있는'은 영어 단어에도 없지요... 즐거운 독서가 되시길.^^

푸른바다 2009-06-0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다'는 표현에 눈길이 가는 군요^^ 논리적으로는 '빵이 말랑말랑해지기 위해서는 살짝 구워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말랑말랑한 빵은 살짝 구워진 것이다'가 더 적절한 표현이겠지요^^ 이 시에서는 '말랑말랑하다'는 속성(느낌?)이 굽는다는 행위 자체를 제약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위는 물에 가라앉는다'와 유사한 패턴으로 도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치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시적인 느낌이 매력적이네요^^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비약이 일어나기 때문이겠죠^^

이 시의 주제는 헤겔의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는 말과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랑말랑하다', '먹어보면 안다'는 등 몸의 느낌과 결부됨으로써 헤겔류의 추상성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제점을 어느정도 극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세상이 '존재의 빵집'이라면 '먹을만하지 않은 빵'도 '먹을 만한 빵'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결국 몸의 느낌에 맞는 말랑말랑한 빵만이 먹을 만하기에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지속할만 한 존재'가 무엇인 지에 대한 판별은, '비밀'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듯이 이성적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고, 결국 먹는다는 행위, 즉 체험과 실천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네요^^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연상되는 군요. 베르그송의 '지속'과 함께^^ 결국 한마디로 줄이자면 '중용'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말랑말랑한 빵이라는 친근한 느낌을 통해 표현하신 것이 정감이 갑니다^^

로쟈 2009-06-07 20:10   좋아요 0 | URL
대단한 '해몽'이신데요.^^ 약간 에로틱한 면도 고려해주시면 '에로스 형이상학'이 될 거 같습니다.^^

게슴츠레 2009-06-0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랑말랑한 우유식빵을 사서 손으로 뜯어가며 먹고 싶어지는군요ㅎㅎ덕분에 하루를 '말랑말랑'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6-07 20:11   좋아요 0 | URL
'딱딱한 빵'과는 아무래도 어감이 다르죠.^^

비연 2009-06-0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빵 먹고 있는데, 급말랑말랑빵 먹고 싶어지네요...ㅋㅋㅋ

로쟈 2009-06-07 20:12   좋아요 0 | URL
^^

L.SHIN 2009-06-0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말랑말랑한 빵의 힘든 여정, 말랑말랑한 형이상학과 말랑말랑한 세계평화가
여기저기서 반죽되고 구워진다. 밤낮이 없다."
라는 부분이 마음에 드는군요.

오늘은 어쩐지, 로쟈님이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로쟈 2009-06-07 20:13   좋아요 0 | URL
저도 나름대로 말랑말랑합니다.^^;

다락방 2009-06-0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말랑말랑한 빵과는 다른 빵이다. 정말 다른 빵이다.

전 이부분이 특히 좋은데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도 종종 그랬어요. 한 문장을 다 끝낸뒤에 '정말 그렇다'라고 또 한문장을 덧붙이는거죠. 제겐 그런 문장들이 그렇게 매혹적일수가 없더라구요. 로쟈님의 '정말 다른 빵이다' 이 표현이 근사해요, 제게는!

로쟈 2009-06-08 23:58   좋아요 0 | URL
새로운 지적이세요.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09-06-0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랑말랑한 빵은 갓 구운 식빵이에요..^^;;
오늘 점심 때 동네 제과점에서 갓 구운 식빵을 사서 집에서 직접 만든 잼(물론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요^^)에 발라 먹었습니다. 무려 세 개나!!!

저 시를 '해몽'할 수는 없지만 뭔가 말랑말랑한 빵에 대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로쟈 2009-06-08 23:58   좋아요 0 | URL
빵집들이 '광고'로 써도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