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는커녕 별다른 휴식 없이 방학을 보내려니까 기진맥진에 기력 소진이다. 남은 두 주도 별다른 비전이 없고, 아마도 가을에 '후유증'을 앓을 듯싶다. 경제적, 문화적 '빈민들'의 바캉스라면 '북캉스'이거나 영화관람일 수밖에 없는데, 아이와 같이 본 영화를 빼면 이번 여름에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도 보지 못했다(<바더 마인호프>와 <퍼블릭 에너미> 정도는 봐도 좋았을 것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루마니아 영화 <사일런트 웨딩>은 챙겨두고 싶다. 동구권 영화를 원래 좋아하는 편이고, 게다가 '스탈린' 시대가 배경이고, 쿠스투리차 풍이면 '무조건'이다. 쿠스투리차의 <약속해줘>는 또 언제 개봉했더란 말인가. '빈민'에겐 실망할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군... 

한겨레(09. 08. 17) 스탈린 죽음에 '립싱크 결혼식'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사연만을 찾아다니는 티브이 방송 프로그램 촬영팀이 루마니아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촬영팀을 맞는 것은 한때 이 마을의 술집 매춘부였던 노파. 할머니와 농밀한 성적 농담을 주고받던 촬영팀은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마을에 여자들만 산다는 걸 알게 된 이들은 그 이유를 취재하기 시작한다.   

루마니아 영화 <사일런트 웨딩>은 루마니아인들이 실제로 경험한 역사적 비극을 농담하듯 가볍게 재구성한다. 난쟁이, 매춘부, 하인 출신 공산당원 등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영화가 따분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희극적 제스처 덕분이다. 재치와 유머는 비극을 유쾌하게 승화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스탈린주의자들의 무식함과 아둔함을 채플린식 슬랩스틱 코미디로 번안해 과장되게 표현하는 식이다.

때는 1953년 루마니아. 스탈린의 폭정이 목을 죄어 오던 무렵, 같은 마을에 사는 이안쿠(알렉산드루 포토체안)와 마라(메다 안드레아 빅토르)는 사랑에 푹 빠져 있다. 피끓는 청춘을 주체할 수 없는 둘은 들판과 창고를 가리지 않는다. 곡물과 빨래 등을 활용한 아름답고 독창적인 에로티시즘이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마라의 아버지는 결혼도 하지 않고 “붙어먹는” 이들을 창피해한다. 그러다 이안쿠가 결혼을 결심하자 마을은 축제 분위기로 바뀐다. 결혼식 당일, 술과 음식을 잔뜩 준비한 마을 사람들이 집시 음악에 들떠 있는 찰나, 마을 하인 출신의 공산당원 고고니아가 소련군 장교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스탈린이 죽었으니 모든 회합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떨어진다. 결혼식도 장례식도 금지된다.    

영화의 절정은 밤중에 치르는 결혼식 장면이다. 대화와 웃음은 당연히 금지된다. 포크와 나이프는 모두 수거하고, 컵에 헝겊을 말아 건배를 한다. 강요된 침묵 속에 뱃속의 꼬르륵 소리나 방귀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리기 마련이다. 웃음이나 방귀처럼, 막는다고 막을 수 없는 것이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루마니아 판본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마술적 리얼리즘의 흔적이 보이는 이 영화는 막 잡은 생선처럼 생기 있는 언어로 폭포수 같은 문화 세례를 제공한다. 지난주 국내 개봉한 쿠스투리차의 <약속해줘>가 안겨준 실망에 비하면 이 영화는 가히 청출어람이다. 루마니아의 국민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호라치우 멀러엘레의 영화 데뷔작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원작을 읽자마자 각본을 써서 유명 감독들에게 보여줬으나 결국 임자를 찾지 못하고 자비를 털어 직접 연출하게 됐다고 한다. 멀러엘레 감독은 <4개월 3주 그리고 2일>로 200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크리스티안 문지우 감독과 함께 루마니아 누벨바그의 기수로 떠오르고 있다.(이재성기자) 

09.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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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8-1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칭 유미적 탐미주의자임을 내세운 마광수 님은
'결혼하지 않고 붙어먹은' 현대 남녀에 대한
'성애'와 '성담'을 소설화했다.
마교수가 '성적 급함과 리얼리티'를 '영구식 코미디'로
변환하였다면 그의 책들에 '19금'이 장애가 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지난 야한 공간곁으로 우회하며 즐거워 한다.

로쟈 2009-08-18 10:13   좋아요 0 | URL
그런 이야기가 너무 많은 탓에 경쟁력이 없었지요...

Kir 2009-08-18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더 마인호프>랑 <약속해줘>, <퍼블릭 에너미>는 봤고, <사일런트 웨딩>은 곧 볼 예정이예요.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뎁과 음악 외에는 별로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어째 바쁘신 로쟈님을 약올리는 댓글인 것 같네요;

로쟈 2009-08-21 10:05   좋아요 0 | URL
흠, 약올리시는 댓글 맞습니다.^^;

폭설 2009-10-2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더 마인호프>는 구경 조차 할수 없었고 (과연 개봉은 한 건지?)
<퍼블릭 에너미>는 소문 보다 별로였고
<사일런트 웨딩>은 자꾸 자꾸 생각이 나네요.
9월 개봉 영화중 가장 괜찮은 영화였나고나 할까요?

배경이 루마니아라는 것에 호기심이 일었고...
루마니아 사람들도 처음부터 스탈린에 맹종한 것이 아닌
어쩔수 없이 무릎을 꿇은 것이었더군요.

주인공 아부지의 넉넉한 허리둘레하며 축하객 모두가 혼연일체로 입만 벙긋하면서
피로연을 진행하다 투당탕! 실수로 소음을 내고는 공포에 떨다가도 다시 마음을 진정하고
피로연을 이어갔는데 그런 섬세한 연출은 어떻게 하며 연기는 또 어떻게 할수 있는지....

결혼식을 위하여 소 두마리(?) 돼지 네 마리(?)를 잡았댔나.
참 통도 컸습니다. 그만큼 낙천적이었다는 뜻도 될텐데....^^

전 이 영화를 보고 루마니아의 역사가 궁금해 졌습니다.^^

<언노운 우먼>도 괜찮았는데...

로쟈님은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보신 적이 있는지... 저는 줄리아 오몬드와 주인공
러시아 남자의 사랑 얘기 보다 그외의 것들, 러시아 감옥과, 민속, 고색창연한 풍경, 문화, 시베리아 원시림과
그곳을 달리는 기차등 러시아적인 모든 것들이 신기해서 이 영화를 좋게 봤는데...^^


로쟈 2009-10-23 21:51   좋아요 0 | URL
네, 러시아 영화감상이란 과목도 강의한 적이 있었는데,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매학기 보여줬었죠.^^

털세곰 2009-11-09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사일런트 웨딩을 놓쳤습니다. 영화 보러 가는 차 안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완전히 산통깨져 극장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론, 결국 ...
로쟈님, 혹 이 영화 어둠의 경로를 통해 나려받기 할 수 있는 방법 알 수 있을까요?
다음학기 영화로 보는 현대 슬라브 유럽 이란 요상한 과목을 강의해야 하는데 이 영화를 넣을 생각이거든요. 문쥬의 4, 3, 2는 어째 수업시간에 공개된 장소에서 틀기에는 좀 거시기한데 얘는 괜찮을 것 같아선요 ...

아, 그리고 위에 분이 말씀하신 언노운 우먼 역시 잼나게 본 영화입니다. 크세니야 라파포르트(К. Раппапорт)라는 유태인 혈통의 페쩨르부르그 연극여배우의 연기가 정말 좋습니다. 2002년 말르이 극장에서 바냐 아저씨에서 열연할 때부터 범상치않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탈리아에 스카웃돼 갔더군요.

로쟈 2009-11-09 19:04   좋아요 0 | URL
영화는 저도 못 봤어요. 말씀을 들으니 좀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