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키 호택 - 한국판 돈키호테 임택, 당나귀하고 산티아고
임택 지음 / 책이라는신화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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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는 임택이 주연이고
호택이 조연인줄 알았는데
점점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호택이 주연자리를 뙇!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호택이가 진심 부러웠다.
질투도 살짝~ㅎㅎ 그런가하면 어쩌면 호택이의 전생일지도 모르는 부분에서는
또르륵 눈물이...ㅜㅜㅜ 그리고 감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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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때론 필연으로 귀결된다면,

우연이 필연이고 필연이 우연 아닌가.

지나고보니

인생은 다 우연이고 또 필연인것 같다.


 두 번째 책이 나왔다.

 

1. 책 제목의 우연과 필연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서쪽나무,2026)

 

출판사 대표는 책 제목이 대 여섯 개 적힌 종이를 내보이며

하나를 고르라고 하였다.

내심 본인은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심중에 두고 물은 것이었다.

 

~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가 제일 좋네요.”

그렇죠? 좀 심심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고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랬다.

처음에는 슴슴하고 심심한 평양냉면 같은

맛이었지만 자꾸 입으로 발음할수록

이번책의 제목으로 필연이다 싶었다.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삶의 의무를 다했으니 즐겁게 다녀오세요.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

가는 김에 나도 데려가줘요.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

, 나도 언젠가는 가고 싶어요.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

묻지 말고 갔다 오세요.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

가거든 푸른 하늘, 넓은 들에 안부 전해줘요.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

지금 산티아고에 가도 될까요

이상하게도 보면 볼수록 제목이 자꾸 마음에 들었다.

마치 필연처럼.


 

2. 책 표지 색 우연과 필연

 

출판사 대표는 탁상달력의 세모 지지대의 하늘색 색감을 보이며

뜬금없이 책표지로 이 색깔이 너무 당긴다며 최대한 비슷한 색을

살려보겠다고 하였다. 색에 문외한인지라 선뜻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표지 그림을 잘 살려주는 색이면 뭐든 좋다고 하였다.


마감일정이 다 되었을 때 대표는 달력 지지대색과

똑같은 색을 찾았다며 최종 표지파일을 보내왔는데

갑자기 그 환한 하늘색이 이거다! 하는 느낌으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 색은 표지 그림과 조화로웠다.

 

최종적으로 책을 받아본 순간에는 이 익숙함은 뭐지?’ 싶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가져간 일기장이 다 되어서

순례길 도시인 폰페라다 소품 점에서 산 두 번째

일기장의 색과 거의 일치했다.

대표는 나의 일기장을 본적이 없다.

나도 노트북에 산티아고 기록을 옮겨 담은 후

책꽂이 한켠에 꽂아두고 잊었다.


그런데 책표지를 자꾸 보다보니 폰페라다 일기장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곳 소품 점에는 노트가 별 존재감 없이 그저 구색으로 갖추어져

회색과 하늘색 달랑 두 권 있었는데 회색은 침침하고 하늘색은 너무 튀었다.

그러나 산티아고이니 한번 튀어보자며 하늘색을 선택했었다.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뀌고 그곳에 두서없이 갈겨쓴 기록들은

진짜 멋진 하늘색 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인생은 알 수 없어도 두 번째 책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한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 사 합 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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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빠르다. 벌써 1월의 마지막 날이라니. 

바쁜 일도 없이 바쁘게 시간이 흘러갔다. 

몇번의 산행과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2박3일 부산 여행, 

그리고 교정... 완벽한 쌀을 

주어야하는데 돌이 잔뜩 든 쌀을 주어 

책 만드신 분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다음에는 티끌하나 없는 쌀을 준비하리라 맹세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차스 그라시아스!!


 

2025. 331

파리 샤를 드골공항에서 생장피드포르까지 머나먼 길

 

드디어 2025331일 아침 630, 파리 드골 공항에 내렸다. 장장 13시간이 걸린 여정이었다. 공항은 좀 낡은 듯했다. 뭔가 분위기가 삼엄한 느낌이 들었다. 검색대에 짐을 올려놓았다. 공항 직원은 나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비아리츠(Biarritz,BIQ) 공항 간다니 비아리츠 행 항공권티켓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부킹닷컴(Booking.com)으로 끊었는데 어떻게 항공권티켓을 줄 수 있는가. 예약사이트인 부킹닷컴은 예약을 하면 (PIN) 코드라는 번호를 부여해 주었다. 즉 그 번호만 보여주면 쉽게 예약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핀 코드 말고 항공권티켓을 직접 다운로드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나는 비행기티켓을 끊었다는 증빙이 되는 핀 코드번호가 있는 복사본을 보여주었다. 아직 휴대폰 유심을 갈지 않아서 폰이 먹통이었기에 복사본 종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런데 공항직원은 카피본은 안되고 원본 항공권티켓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니 조금 뜸을 들이더니 이번에는 봐주는데 다음부터는 이러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영어로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좀 전 과는 달리 그는 한국어로

안녕히 가세요!”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 말이 어찌나 친근하게 들리던지 나도 긴장을 풀고 당당한 여행객으로 웃으며 한국어로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검색대를 벗어났다. 검색대를 벗어나서는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대로 갔다. 그래도 미심쩍어 알고 보니 중국 갔다 오는 수다쟁이 스페인 아줌마들에게 비아리츠 행 티켓 발권장소를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들도 프랑스는 잘 모르겠다며 보안요원을 불러주었다.

 

보안요원을 따라가니 항공권티켓 발권해주는 곳이 나왔다. 비아리츠 행 예약 카피 본을 보여주니 티켓은 금방 복사되어 나왔다. 시간을 보니 아침 720분이었다. 파리공항 아침 630분쯤 도착했는데 아침이라 사람이 없어 1시간도 안되어 티켓까지 발부받은 것이었다.

 

즉 이럴 줄 알았지만 만에 하나 비행기가 연착하거나 혹시 내가 공항에서 헤맬 것을 대비하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오전 935분표를 끊지 않고 그 다음 비행기인 오전 1240분 것을 끊은 것이었다. 그래서 대략 5시간정도의 시간이 비었다. 5시간은 기다리기에 좀 길기는 하지만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허리 펴고 잠도 좀 자고 유심 칩도 갈고 쇼핑가도 구경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리공항이 좀 까다롭게 되어있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이참에 1터미널부터 4터미널까지 구석구석 완전 정복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1터미널에 내려 비아리츠 공항 간다고 하니 바로 4터미널 연결로를 알려주어 길이 이끄는 대로 도착하고 보니 4터미널 대기실이었다. 밖으로 나가려해도 나갈 수 없는 닫힌 공간이었다. 대합실과 나가면 바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트랙뿐이었다.

 

바로 전에 경유하며 대기했던 상하이 공항 대기실은 달리기를 해도 될 만큼 넓고 길었는데 드골공항 4터미널의 대기실은 상하이 공항 대기실의 한쪽 모서리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소파들이 놓인 조금 넓은 공간과 작은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선물가게와 화장실이 각각 한 개씩 있는 게 다였다. ‘뭐야, 드골 공항 제 4터미널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거야?’

 

나의 상상과는 다른 공항 모습이었지만 뭐 어때? 비아리츠행은 비행시간이 1시간 30분이라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스텝이 꼬였지만 이왕 기다리는 거 즐겁게 기다리자 생각했다. 먼저 누울 수 있는 소파에 배낭을 베고 누우며 허리를 폈다.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게 실감이 나기도 하고 안 나기도 하였다. 공간이동을 한 것은 확실했다. 세상에, 이게 꿈이야 생시야!

 

설렘과 안도사이에서 공항천정을 바라보며 잠시 망중한을 하다가 살짝 졸았다. 그리고 깨어서 유심 갈아 끼우려고 설명서를 세 번 읽었다. 유심 갈아 끼우기를 알려주던 유튜브 영상도 상기했다. 폰 산지는 5년이 지났지만 유심부분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폰의 바늘구멍 부분을 찌르니 반동으로 유심 칩이 나왔고 스페인 유심 모비스타(Movistar)’를 끼웠다. 그리고 설명서대로 등록을 하니 짜잔 개통이 되었다. 손톱만한 알루미늄 조각하나에 사이버 세상이 열리고 닫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제 먹을 차례. 공항이라 그런지 음식이 너무 비쌌다.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이 우리 돈으로 만원 돈이었다.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나와서 이글을 쓰며 폰 충전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다시 먹으러 가야겠다. 내가 이 공항에 다시 오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 만 원짜리 치즈 케이크 조각 한번 먹어보자.’ 진열장을 둘러보는데 이번에는 오믈렛이 눈에 들어왔다. 종업원이 금방 만든 오믈렛을 진열장에 진열하는 것을 보니 상품 회전율이 높아보였다. 맛있으니 그렇겠지? 마음은 어느새 오믈렛에 기울어 오믈렛을 선택하고 카페 라떼와 바게트 본고장의 맛이 궁금하여 바게트도 추가하였다. 13.5유로. 환율로 환산하니 2만원 돈이었다. 시절인연인 은희샘과 미라샘이 40여일 모닝커피 값이라며 노자 돈을 준 것이 생각나 첫 커피를 시키고 사진을 찍어 감사의 문자를 보냈다. 모비스타 유심은 그 먼 거리를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잘도 전달하였다. 카페라떼는 설탕을 안타도 쓴맛 없이 고소했다. 오믈렛에다 바게트까지 다 먹고 나니 포만감이 느껴졌다.

 

그럭저럭 1130. 긴 시간이 지나고 이제 30분 있으면 나도 비아리츠행 비행기를 타러간다. 4시간이 넘는 시간이 그래도 별 지루함 없이 잘 갔다. 빨리 마무리하고 비야(빌라) 에스폰다(La Villa Esponda) 호텔에 들어가 발을 뻗고 싶다. 330일 오전 1130분에 집을 나와 3311130(실지론 더하기 7시간 더)인데 아직 밖에서 대기 중이다. 그러나 큰물이 지나갔기에 앞으로의 두 건은 가볍게 넘으려나 싶었는데...

 

비아리츠 공항에서 비아리츠 역 가기

 

 

비아리츠 공항 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는 좋았다. 비행기는 작았고 그 안에 동양인처럼 생긴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옆자리 사람과 인사도 하고 여행 잘하라는 덕담도 듣고 무사히 비아리츠 공항에 내렸는데 뭔가 썰렁했다. 공항 대합실도 엄청 작았다. 안내 요원 같은 사람도 잘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갔다 나오니 따라 가려해도 이미 사람들이 흩어져 버려 따라갈 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선 비아리츠역으로 가서 바욘(Bayonne)가는 기차를 타고, 바욘역 가서 최종 목적지인 생장행기차를 갈아타면 탈것과는 당분간 작별이었다. 비아리츠 역에서 바욘역 그리고 바욘역에서 생장역 표는 한국에서 오미오(Omio)앱으로 예매를 했었다. 문제는 비아리츠 공항에서 비아리츠 역까지였는데 그것은 택시를 타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공항인데 택시하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역 앞이나 시장 등 시내 곳곳에 택시 승강장이 있고 콜을 부르면 바로 그 자리에서 탈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우리나라가 새삼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프랑스에도 그런 택시를 부르는 시스템이 있겠지만 지금은 내가 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택시가 없으니 버스를 타야 되나 보았다. 버스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떤 버스를 타야 되는지. 버스 승강장으로 나와서 하필 길 묻기를 비아리츠 방문이 처음인 프랑스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가 장황한 프랑스 말과 20년 만에 처음 써본다는 힘겨운 영어로 길게 설명하는 바람에 오히려 길이 엄청 더 어렵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순례예정자로 보이는 두 명의 미국 아줌마가 큰 배낭과 큰 캐리어와 함께 버스 승강장 벤치에 앉아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그들에게 안내했다. 할머니는 잘 안 되는 영어로 또 최선을 다해서 설명했다. 미국 아줌마들은 대충 이해가 가면서도 확신을 얻고 싶어 연속적으로 질문을 하니 할머니는 유창한 영어에 더 당황하였다. 그러다 한 아줌마가 짧고 굵게 핵심만 말하니 오케이하며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하였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돋보기를 쓰고 버스노선표를 자세히 보니 8번 버스 노선표에 비아리츠역이름에 적힌 것이 보였다. 8번 버스를 타고 가서 비아리츠역에 내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목적지도 같고 덩치도 큰 미국아줌마 둘이 여러모로 든든하여 당신들을 따라 가겠다하니 오케이! 이름을 물으니 미시간에서 온 다나와 로라. 죽마고우라고 하였다. 조금 있으니 8번 버스가 와서 타고 비아리츠역에 내렸다.

 

이제 비아리츠 역에서 바욘행 기차에 탑승하였으니 바욘역에서 내려 최종적으로 생장행 기차를 갈아타면 되었다. 비아리츠역에서 기차 역무원에게 바욘행 표를 보여주니 우리가 끊은 표보다 먼저가도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바욘역에 예상보다 1시간 30분쯤 일찍 도착하여 바욘역 주변을 구경하였다.

 

바욘강의 물결은 회오리를 많이 치며 흘렀다. 수량도 풍부했다. 미국 미시간의 로라와 다나는 먹으로 간다 해서 가라하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들은 등에 지는 배낭도 10킬로가 넘어 보였는데 커다란 캐리어가 별도로 하나씩 더 있었다. 순례시작은 언제부터 하냐고 하니 생장에서 맛있는 것 실컷 먹으며 이틀 더 머무른 다음 한다고 하였다.

 

비행기가 주로 운반을 해주긴 했겠지만 그 무거운 캐리어와 배낭을 손수 올리고 내리고 끈 시간도 많았으리라. ‘~~롱 타임, ~~롱 타임하며 연거푸 발음하며 고개를 흔드는 몸짓에서 고생이 느껴졌고 생장에서 맛있는 것 실컷 먹고 출발할 자격이 되어보였다. (출발일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순례길 중간 중간 맛있는 곳을 너무 많이 발견 했는지 그 후 그녀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씩씩한 미국 아줌마의 기상이 팍팍 느껴져서 친근했는데 생장 행 기차 이후론 못 보았다.)


바욘역 주변 상가와 강변을 서성이다 기차 출발 시간보다 좀 이르게 역에 오니 불과 1시간 전에는 역내가 텅 비었었는데 그사이 사람들로 빼곡했다. 역내 슈퍼에 가서 콜라와 환타를 샀다. 물 값이나 콜라 값이나 비슷하여 이왕이면 때론 당분도 영양이 될까싶어 음료수를 샀다. 과자라도 하나 사오는 건데 바게트를 들었다 놓았다. 차후에 후회할 줄 모르고.

 

드디어 17시,  두 칸짜리 생장 행 기차

 

갑자기 사람들이 더 불어나서 늦게 탄 나는 자리가 없어 문 앞 사이드의자에 앉았다. 그것도 어디인가 싶었다. 맞은편에는 싱가폴에서 왔다는 테미와 크리스가 앉았다. 다른 서양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면 일단 웃고 보는데 동양 사람들은 대부분 무표정하다. 무표정이 민망하니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한다. 나는 결국 또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먼저 몇 마디 말을 걸면 전기 불에 전기가 들어온 것처럼 상대방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렇게 전기 불을 켰으나 그 후로 한 번도 그들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들도 걷기는 하루 쉬었다 한다고 하였다. 그들 역시 큰 캐리어가 두 개나 있었다. 결혼한 사이라고 하였는데 참 둘 다 순수하고 착한 인상이었다. 다나와 로라, 태미와 크리스. 생장행 기차와 함께 떠오르는 이름이다.

 

오후 6시 무렵 드디어 기차는 생장역에 도착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일단 첫 관문을 통과한 것이었다. 생장기차역에 내린 사람들은 현지인이 아닌 이상 거의가 목적지가 같았다. 다름 아닌 생장순례자 사무실이었다. 지도를 살펴볼 것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 행렬을 따라갔다. 약간 오르막 지대의 사무실은 사람들로 붐볐다. 생각보다 작은 사무실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열정적으로 환영을 하고 설명을 하였다.

 

하루 종일 같은 말의 반복이었을 텐데도 시종일관 성실히 임하는 게 보였다. 나는 영어와 프랑스어 중 선택하라 해서 영어를 선택했는데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들어도 이해는 되었다. 위험구간인 피레네 산맥에 대한 안내여서 지도를 겸하여 이야기하니 말은 잘 몰라도 의미는 파악되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3번 정도 정신 바짝 차리고 길을 잘 들어야 되었다.

 

2유로에 크레덴시알(Credencial,순례자여권)을 사고 영문으로 주소를 적었다. 생장사무실 첫 세요(Sello)를 찍었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와 구글 지도를 켜고 생장 사무실 지근거리에 있던 예약한 호텔 빌라 에스폰다를 찾았다. 호텔은 예상대로 찾기 쉬운데 있었고 상상보다 훨씬 깨끗하고 좋았다. 침대시트도 엠보싱에다 희고 깨끗했고 창밖으로 흰색의 예쁜 나무가 절정으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난방도 되었다. 진짜 뻬르펙또(완벽,Perfecto)였다.

 

짐을 부려놓고 일단 세수만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웃호텔 레스토랑 야외 의자엔 머리가 허연 나이든 서양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같은 동양의 중년 아지매, 아직 그들과 썩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속을 선뜻 뚫고 들어가기가 저어되었다. 그런데 다른 곳을 가 봐도 역시 똑같았다. 문 연 곳도 별로 안 되었다.

 

이쪽 사람들은 오후 4시까지 점심장사를 하고 쉬다가 저녁 8시에 다시 저녁장사를 한다고 하였다. 혹은 순례자가 많은 곳은 오후 5~7시 사이에만 쉬기도 하였다. 그러니 순례자들과는 시간이 안 맞았다. 그러나 기후에 맞게 이어져온 전통이니 뜨내기인 우리가 따르는 수밖에. 다시 다른 곳으로 한 바퀴 도는데 날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가로등 불빛이 느껴졌다.

 

이러다 저녁 못 먹겠다 싶어 두리번거린 곳에 마침 주방장이 밖으로 나와 잠시 바람을 쐬는 레스토랑이 보였다. 다가가 들어가도 되냐고 하니 된다고 하였다. 입구는 조용해 보였는데 세상에 들어가니 또 서양 아줌마아저씨들이 한가득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빈자리가 하나 있었고 이것도 앞으로 적응해야 될 것이라면 적응하자 싶었다. 시간 걸릴듯하고 알 수 없는 메뉴를 빼니 쉐프의 샐러드가 먹을 만했다. 설명을 보니 치즈와 햄이 어우러진 샐러드였다. 거기다 바스크 케이크를 시켰다. 레드 와인도 시켰다

 

샐러드가 나온걸 보니 바게트가 곁들여져 나와서 바스크 케이크를 괜히 시켰나 싶었으나 그냥 먹기로 했다. 샐러드는 무척 짰다. 딱딱한 치즈는 채소들의 양념보다 더 짰다. 소태 그 자체. 그래도 바게트와 함께 먹으니 먹을 만했다. 짜면 나중에 물마시면 되지 뭐 하면서 짜도 다 먹고 나니 바스크 케이크가 나왔다. 조금 큰 세모 케이크 한 조각이었다. 총 음식가격이 22,5유로였다. 비쌌다.

 

뭐 어때, 내 나이 60이 다가오는데... 일단 저녁을 먹었다는 안도감에 그리고 거리가 어두워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때는 저녁 930. 10분만 하며 대각선으로 걸 터 누었는데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니 새벽 세시였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잠은 꿀잠을 잤다. 개운했다. 짐정리를 하고 까미노 친구들 연합’(까친연) 오픈 채팅방에 덕분에 첫 출발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감사의 문자를 올렸다. 나의 행로 또한 누군가의 용기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까친연덕분에 용기를 내고 정보를 얻어 이곳 생장까지 올수 있었다. 한없이 감사했다.

 

 ( 다음은 조만간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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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이라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2026이라니. 비현실적인 과학공상영화속의 년도 속을 살고 있는 느낌이다. 여고시절, 2030년대는 내 나이 60대인데 그때의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고는 했는데.... 이제 머지 않아 내눈으로 그 모습을 확인하게 생겼다.


지나온 세월이 꿈만 같다. 올해는 우리나이로 59세. 29세때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떠날때의 떨리던 마음이 어제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이 벌써 30년전이라니. 그사이 두아들은 28세 25세가 되었다. 남편은 명예퇴직후 몇년을 더 연장받아서 아직은 아침마다 출근을 하니 확실한 퇴직의 상실감은 유예중인것 같다.


나는 육아와 약간의 알바와 주부연한 삶을 살면서 30년을 보냈다. 어찌보면 별 풍파가 없었지만 사회속에서 치열한 삶은 살지 못했다. 이제 자식들도 다 성인이 되었으니 나도 이제 뭐라도 좀 하면서 살아야 되는게 아닌가. 그러나 서리 내리는 나이에 무언가 새로운 시작이라니 언감생심이고 그저 지난 30년이 그랬듯 개인적인 추구와 자연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동반한 채 조용히 살아가겠지.


2025년 봄은 산티아고가 있어서 특별한 한해였다. 지난 12월은 꿈에 그리던 차마고도를  

걸어볼수 있어 감사했다. 몇년전만해도 나에게 있어 차마고도는 거의 꿈이었는데 이제는 추억의 한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나이가 드니 성격도 변하는것 같다. 변하는 내 성향을 순간순간 들여다 본다. 


새해이니 늘 그랬듯 여전히 소박한 꿈들을 꾸어본다. 산티아고를 다녀온후 듀오링고앱으로 작심 6개월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를 하다 지금은 겨우 출석만 이어가는 중인데 다시 시작해야겠다. 돈만내고 별로 보지 않던 넷플릭스를 오랜만에 클릭해보니 언어지원이 많이 풍성해져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외국어 공부를 할수있는데... 그게 참 어렵고도 어렵다.~~ ㅎㅎ


거북이 처럼 엉금엉금이라도 멈추지 말고 공부해야겠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모국이 하나 더 생기는것과 마찬가지 인것같다. 차마고도 가서 독학 중국어를 마음대로 해보는데 통하니 짜릿했다.  


산티아고 순례기도 정리중이다.  800km를 걷기만 했을 뿐인데 그 걸음걸음마다 감사함 마음이 이니 묘하다.


블랙야크 100대 명산은 52% 도전했다. 작년에 60프로 달성하자 맹서했건만 못했다. 올해는 70%까지는 확실히 올리자고 다짐해본다.



냉동인간의 산티아고 순례기 3


오랜만의 유럽, 긴 비행의 시작(출발, 경유 그리고 도착)

 

부산 김해공항 출발

 

2025330. 나답지 않게 1년을 준비하여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여정의 그 첫발을 떼었다. 부산 김해공항에서 출국은 오후 540분이었지만 1시간20분 정도 걸리는 공항에 가기위해 오전 1130, 시간을 넉넉히 잡고 집을 나섰다. 혹시나 무슨 변수라도 생길까봐 일찍 출발했는데 교통 흐름이 좋아 일러도 너무 일찍 도착하여 공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김해 공항은 한산하였다. 국적기가 아닌 중국 항공사를 선택했기에 중국 비행기 안 풍경은 어떨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다 나랑 같은 상해항공에다 상하이를 경유해서 스페인 마드리드를 가는 스페인 교포여성(이하 마드리드 언니)을 만나 잠시 얘기를 하다 긴장감이 해소 되었다. 좌석이야 다르다 해도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과 같은 항공기를 타고 상하이 푸동공항까지 같이 가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위안도 잠시 첫 발권 수속 시작부터 가슴이 철렁하였다. 입출국 공항을 편도로 달리 끊은 것이 문제였다. 부산 김해공항에서 출국하여 상해 푸동공항을 경유하여 파리샤를드골 공항에 무사히 내리는 것이 나의 1차 목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김해공항의 상해항공사 직원은 내 비행기티켓을 발권하기에 앞서 샤를드골공항에서 스페인 땅까지는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다. , 파리에서 스페인국경을 넘는 교통수단의 티켓이 있어야 발권이 된다고 하였다. 지갑을 뒤져 샤를드골공항에서 비아리츠(BIQ)공항행 비행기티켓과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행 기차표 복사본을 찾아 직원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프랑스로 이동하는 거잖아요. 프랑스에서 스페인 국경을 어떻게 넘으실 건가요?
걸어서 갑니다. 45일을 걸어서 순례하고 마드리드를 통해 귀국할 예정입니다.”

걸어서 간다고요?”

. 프랑스 국경지역에서 하루정도 걸어가면 스페인 땅이에요.”

 

직원은 재차 프랑스에서 스페인 땅 넘어가는 열차든 버스든 증빙이 되는 티켓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직원이 너무 단호해 보여 떠나기 전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하늘이 노랬다.

프랑스에 불법 체류할 생각 하나도 없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역인 생장피드포르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코스중의 하나라 프랑스를 잠시 거쳐 갈 뿐이에요. 그곳으로 향하기 위한 비아리츠 공항 행 비행기 표도 있고 기차표도 있는데 안 되나요?”

 

프랑스에서 프랑스로 이동하는 것 말고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이동하는 티켓이 필요해요.”

, 그것은 걸어서간다고요. 걸어서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고요. 산티아고 순례라고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걸어서 분명히 갑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가겠다며 열심히 준비한 지난 1년이 출발도 못해보고 막히는가... 발에 물집 같은 거 없이, 여타 아픈 것 없이 완주하겠다며 집 앞의 486m 산을 가뿐하게 오르고 강변을 10킬로미터 이상씩 달렸다. 20층 계단 오르기 5~10회 혹은, 걷기 2만보 이상, 헬스장 트레드밀 7킬로 이상 등을 번갈아가며 하루에 한두 가지씩은 꼭했다. 그렇게 요란을 떨며 1년을 준비했는데 그냥 돌아가야 된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김빠진 맥주 곱하기 100, 1000배 김빠질 일이었다.

 

잠시 후 완고하게 안 된다던 직원은 너무도 쉽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면 증명서를 한 장 써줄게요.”

 

...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직원은 긴 내용이 적힌 서류 상단에 영어로 이 사람은 걸어서 프랑스 국경을 넘는다.’는 말을 붉은 볼펜으로 적어주었다. 나는 그 종이를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비행기도 못 뜨고 나의 순례가 막을 내리는 줄 알았는데 천만 다행이었다.

 

짐 검사를 하고 출국대기를 하면서 여분의 배터리도 있고 해서 배터리 걱정 없이 폰을 사용하였다. 그러다 잔 여량이 50프로 이하라 충전을 하려는데 갑자기 충전이 되지 않았다.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폰에 충전기를 꽂으면 충전이 되고 있다는 표시가 떠야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폰이 고장인지 배터리가 불량인지 충전기 선이 문제인지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해왔다. 만약 폰이 고장이라면 폰 없이 순례를 해야 하는 건가 생각을 하니 또 아득하고 막막했다. 폰 공 기계를 가지고 올까 생각하다 마지막에 까먹은 것이 생각났다. 다음부터 개인 여행 시에는 여권 복사본과 함께 휴대폰 공 기계는 필수임을 뼈에 새겼다. 공항 안 어디서 배터리 혹은 충전기를 산다는 말인가.

 

상하이 푸동 공항에서 경유

 

수심을 가득 안은 채 어쨌거나 김해공항에서 나의 비행기는 17:40분 출발하였고 19:30분 경유지인 상하이 푸동공항 무사히 안착하였다. 이제 환승이 문제인데 하필 비행기 앞자리에 앉아 일찍 나오고 보니 뒤를 졸졸 따라만 가는 일이 불가했다. 그래서 트랜스펄(Transfer) 글자를 찾다가 사람들이 줄서서 대기하고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런데 뭔가 그쪽은 아닌듯한 느낌이 들어 안내직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때 나보다 나이가 연상인 듯한 여성분(이하 독일 언니)이 한국말로 환승 어떻게 하는지 나보다 더 불안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 목소리가 너무 반가웠다.

 

우리 같이 찾아봐요.”

 

긴장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긴장되는 순간에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나는 독일 언니와 함께 공항 직원에게 환승 경로를 확인받으며 계속 앞으로 전진 하여 기내 수화물 심사대까지 도착하였다. 수화물 검사 장소에 도착하니 과거 패키지여행 때 환승 또한 기내 수화물 검사부터 다시하며 시작했던 게 생각이 났다.

 

다시 한 번 더 배낭과 보조가방을 검색대에 통과시켜야 되는데 내짐을 심사하려던 찰나 공항 검색대 컴퓨터가 작동이 잘 안되었다. 직원은 당황해하며 이리 두드리고 저리 두드렸고 다른 직원은 검색대위의 내 짐바구니를 다시 뒤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계속 컴퓨터의 상태를 점검하였다. 나는 어머나! 내 지갑, 내 여권이 계속 검색 바구니에 그대로 노출된 것이 심히 불안하였다.

 

배낭이야 옷과 생필품뿐이니 없어진다 해도 그만이지만 여권과 지갑은 앞으로 펼쳐질 내 45일의 생명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남의 나라 물품 심사대에서 뭔 일이야 없겠지만 내 마음만이 공연히 불안하고 안달이 났다. 그래서 내 물건이 있는 지점에 눈을 떼지 않고 있는데 잠시 후 직원이 옆 검색대로 옮겨가라고 하였다.

 

바디랭귀지를 썩어가며 마이 백?’을 말하니 직원은 손짓으로 가방도 그 쪽 검색대로 옮긴다는 시늉을 하였다. 옆 검색대로 옮겨가자 뒤쪽 검색대의 잠긴 문도 열려 내 짐이며 내 짐 뒤에서 검색을 대기하던 승객들도 옆 검색대로 옮겨와 다시 줄을 썼다. 이번의 컴퓨터는 정상 작동 되었고 내짐이 나왔다. 먼저 나와 있던 마드리드 언니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고 독일 언니는 검색대 통과한 언니의 노트북을 한 번 더 검사한다며 되돌리는 바람에 다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금방 되돌려 받았다.

 

과거 패기지로 푸동공항을 몇 번 이용했지만 그때는 그렇게 게이트가 많고 넓은 줄 몰랐는데 이번에 제대로 구경했다. 나는 134번 게이트 마드리드 언니는 120번대 그리고 독일 언니는 22번 게이트였다. 독일 언니와는 숫자의 차이가 상이하여 우선 독일 언니네 게이트를 먼저 찾았다. 길이 아주 길었다. 독일 언니는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딸네 집에 간다고. 나이는 60대 중반인데 보다 젊었을 때는 여동생이랑 렌터카를 빌려서 유럽여행을 많이 하였다고.

 

세상에는 용자가 그 얼마드뇨? 그 용기 제가 삽니데이.”

 

진심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딸이 독일에 살고 있는 큰 딸을 만나러 또 가는지. 뿐인가. 상하이에는 둘째 딸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딸들의 전성시대, 코리아우먼의 전성시대를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22번 게이트 찾아 항공편명과 비행시간을 확인한 후 여기서 기다리시면 된다하고 우리는 돌아 나왔다. 게이트 위치가 워낙 달라 마실을 오갈 처지는 아니었다.

 

독일 언니는 게이트를 찾아 안착한 것만도 감사해 5시간대기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노트북으로 영화 두 편 보면 탑승할 시간이 되는 것이라고. 여러 번 상하이를 경유하고 내렸음에도 오늘 만큼 당황스러운 적은 없었다고 하였다.

 

독일에서 상하이를 경유해 한국으로만 왔지 상하이 경유로 독일 가는 것은 처음이라 그랬나 봐요.”

저는 나 홀로 경유가 처음이라 무척 당황했는데 언니가 말 걸어 주어 바로 안심이 되었어요.”

 

작별인사를 하고 마드리 언니와 나는 우리들의 게이트를 찾으러 갔다. 둘이 찾으니 역시 든든했고 나의 134번 게이트와 언니의 120번 대의 게이트는 지근거리에 있었다. 마드리드 언니는 나의 게이트에 앉자고 하였다. 의자에 앉자마자 다시 폰 충전을 시도 했는데 이런 아무 일 없었던 듯 충전이 잘 되었다. 얼마나 기쁘던지. 마음의 근심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가뿐한 마음으로 마드리드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아들둘이 군대도 갔다 왔고 큰아들은 올해 졸업, 둘째는 휴학, 남편은 명예퇴직 후 재계약을 하였는데 그것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제 나는 자유다! 호호호~’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언니는 어릴 적 아버지 사업을 따라 스페인으로 이민을 와 스페인에서 자랐으며 (아 그럼에도 한국말을 너무도 잘하였다.)우연히 무슨 박람회에서 통역을 하다가 계속 비슷한 역할을 엮어나가다 뜻하지 않게 통역가이드로 쭉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장시간의 패키지 가이드는 힘들어 못하고 스페인 공인가이드로 한 달에 2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스페인 그라나다지역에서만 전문가이드로 일한다고 하였다.

 

언니는 또한 1살 연하의 스페인 공무원인 남자와 결혼했고 딸은 파리유학중이라고 하였다. 스페인은 전 국민이 연금이 나오는 등 복지제도가 잘 되어있다고. 외국남자와 사는 장점과 단점을 물으니 가정적인 것은 좋은데 너무 뭐든 같이 하려는 게 다소 힘든 감이 있다며 살포시 웃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처음 본 사이임에도 두 여자는 폭풍수다를 떨며 서로의 인생을 들여다보았고 사진을 찍고 전화번호를 교환하였다. 언니는 푸동공항에서 마드리드공항으로 나는 푸동공항에서 파리 샤를 드골공항으로 최종 목적지가 갈라졌다.

 

순례기간 동안 어려운 일 있으면 전화해요.”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샤를 드골공항 도착

 

상하이에서 파리 샤를 드골 공항 까지는 장장 12시간 30분 아니 13시간 걸렸다. 유럽은 2018년 스페인 일주 후 처음이니 장시간 비행에 아주 주리를 틀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자는데 내가 제일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좌우 옆 뒤 다를 미동도 없이 꿀잠을 자는데 나는 좌로 취침 우로취침 앞으로 취침 뒤로 재껴 취침...아오! 그 말할 수 없는 불편함, 허리가 뻐근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모진 시간들이 지나고 착륙이 다가왔다. 무사착륙에 진심으로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들었고 승무원들에게 무언으로 마음을 전했다. 나 하나로 축약하자면 나 하나 김해에서 파리공항으로 데려다 주기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지 진정 새삼 고마웠다.

 

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승객의 비행으로 확대하자면 그 적은 인원으로 각기 요소요소에서 혹시라도 업무에 잘못이라도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저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에 무한 감사했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이 비행 뿐 만 아니라 늘 누군가들의 조용한 움직임으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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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축복기도

 

그런데 내 나이 60세 전에 용기가 생겼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집 뒤 작은 산의 등산로에서 맨발 걷기 하는 분을 만났다. 나도 맨발 걷기를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진짜 맨발걷기 효험을 보았는지 물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알았다.

 

냉담 30년 글라라, 가톨릭 신자만 보면 반가워서 세례명을 묻고는 했다. 그렇게 알게 된 아네스 언니는 성당에 나오라 하면서 글라라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다. 나는 부담스러워서 마음은 감사히 받고 대신 그 시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가톨릭은 좋아해도 매주 성당에 다니는 일은 생각 만해도 갑갑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한번 씩 가면 그날의 미사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고 말씀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런데 한곳을 정해두고 가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글라라 기도는 끝이 없어요. 하다보면 기도할일이 점점 많아져요. 그리고 기도할일이 왜 없어요? 기도 할 일이 있을 텐데요?”

 

아네스 언니는 아무 생각 없이 던졌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 기도 할 일이 있을 텐데요.’ 라는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한 달여 후, 엄마는 일생일대의 삶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했다. 나는 다시 언니를 만나 기도에 대한 의미를 오해했다며 정말 기도하는 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언니는 자기네 성당에 한번 가자고 하였다. 나는 언니의 마음이 고맙다며 올해 안에 한번은 꼭 가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하니 이왕 갈 거 미리 가서 가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또 엄마가 돌아가신 이 시점에서 가고 싶었다.

 

오랜만에 성당엘 가니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청소년기에는 찬송가와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아 교회를 다니곤 했었는데 성당의 성가대도 너무 훌륭했다. 신부님 또한 성악가 못지않게 성가를 잘 부르셨다. 미사 후 언니는 신부님에게 축복기도를 받자하며 나를 데리고 갔다. 이미 몇 명의 신자들이 기도를 받고 있었다. 언니는 신부님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신부님, 글라라 30년 냉담인데 기도좀해주세요.”

 

신부님은 내 정수리에 손을 얹고 뭔가 침묵의 기도를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부님은 내 머리에 올려놓은 손을 쉬이 내려놓지 않았다. 나도 순간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자신의 손을 들어 정수리에 올려보시라. 금방 손의 열기와 정수리의 열기가 만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부님은 내 머리에서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손을 얹고 계시는 것일까. 그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는데 물리적 시간은 한 1분정도 되지 않았을까. 한참 후 손을 떼신 신부님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 30년 냉담하더니 냉동인간 다 되어뿟네!”

 

뭣이라고요? 냉동인간요? 라고 되묻지는 않았지만 냉동인간이라는 그 어휘는 무언지 모르게 무척 강렬했다. ! 하고 웃음이 터지려다 말며 한편으로는 신부님의 부정화법이 다소 실망스러웠다.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은 달콤한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말로 해도 성당 나올까 말까인데 냉소적인 뉘앙스로 일침을 놓는 문장이라니. 그러나 그 강렬한 문장은 이따금씩 자꾸 생각이 났다.

 

말인즉슨 맞는 말이잖아? 그리고 곱씹을수록 냉동인간이라는 말은 내 가톨릭에 대한 고집불통에 닿아있는 말이기도 했다. 나를 세례의 길로 이끌어주신 수녀님은 한 번씩 만날 때마다 말하였다.

 

글라라 아직도 성당 안 나가나? 이제 갈 때도 되지 않았나.”

 

나는 매번 똑같은 말을 하였다.


지금은 아니고 이다음에 언젠가는 갈수도 있겠죠. 수녀님 성당 못나가서 죄송해요. 대신 늘 보다 선한 마음으로 살도록 노력할게요.”

 

그러다 블랙야크 100대명산도전의 일환으로 경남 화왕산에 갔을 때였다. 하산 길에 광주에서 오신 두 수녀님을 만났다. 둘째언니와 내가 쉬고 있는 벤치 앞을 두 수녀님이 지나치려했다. 나는 성당은 다니지 않으면서도 길에서든 어디에서든 수녀님들을 보면 반가웠다.

 

수녀님 의자에 잠시 쉬었다 가세요.~”

그럴까요?”

 

그 수녀님들은 너무도 쉽게 나의 제안을 받았고 옆의 다른 의자에 않았다.

 

나는 수녀님들을 뵈니 갑자기 신부님과의 일화가 생각난다면서 예의 그 냉동인간 얘기를 하였다. 그랬더니 그중 한분 수녀님이 말씀하였다.

 

그럼 제가 다시 기도 해드릴게요.”

 

그래서 얼떨결에 화왕산 하산 길 어느 벤치에서 이름도 모르는 전라도 광주에서 오셨다는 수녀님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았다. 글쎄 한 10분쯤 수녀님은 주님 글라라를 위하여....하시고...하시고... 하시옵소서 아멘하면서 기도를 해주셨다.

 

광주 수녀님의 기도도 냉동인간 때처럼 내 마음에 믿음의 느낌으로 확 와 닿지는 않았다. 않았지만, 처음 본 수녀님이 산행지에서 나의 일화를 듣고 선뜻 기도를 해 주시겠다는 마음 자체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런데 그 두 번의 기도는 나의 산티아고 행을 앞당겼다. 심리적으로 왠지 지금 산티아고를 가도 될 것 같았다. 가도 아무 일 없이 모든 일이 잘 돌아갈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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