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론

 

 

1

 

애교는 사랑 애에 아리따울(사랑스러울) 를 쓴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단어가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애교를 남에게 귀엽게 보이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라 알려준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애교는 구원의 작업이다.

 

친구들 사이에선 세상 무뚝뚝하며 말로 세상을 도륙내기라도 할 듯 입에 욕을 매달고 사는 경쌍도 썅남자 syo는 뜻밖에도 단 한 사람, 여친 앞에서는 젖도 못 뗀 애기 강아지가 된다. 말인지 멍뭉인지 알 수 없는 말투, 쌍시옷 대신 쌍디귿이 출몰하는 하이-톤의 뭉개진 발음에,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는 건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고 심지어 그게 자기 이름도 아니라 무슨 주황색 아기공룡 이름이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총량의 법칙이나 보존의 법칙같은 것이 존재하는데, 그 중 애교총량의 법칙혹은 애교량 보존의 법칙의 살아 숨 쉬는 증거라도 되어볼 요량인지, 밖에서 망아지 짓을 할수록 안에 와서 강아지가 되는 모양새다.

 

알고 보면 애교의 본거지는 DNA. 좋은 짝을 만나 만개하는가 아니면 내 안에 그런 기가 막힌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삭막하고 척박한 인생을 살다가 가는가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에 애교가 없는 인간의 애교는 마치 서울말이 되지 않는 사람의 끝만 올리는 서울말처럼 발각되기 십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해 봤다, 그런데 잘 됐다, 상대가 좋아한다, 그렇다면 깨달아야 한다. 나라는 인간은 그저 애교가 자신의 형질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고른 미미한 탈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거부하지 마세요. 부인도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부립시다, 애교를. 그게 세상을 사랑스럽고 아리땁게 만드는 길입니다.

 

말끝에 스미는 쌍디귿을 참지 말아요.




2

 

물론 애교량 보존은 자연법칙이므로, 애교를 바칠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에게 조금 더 쓰레기가 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3

 

여친이라는 존재가 없었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 그때는 망나니와 강아지 사이의 어떤 개차반 정도의 성품으로 온 세상 사람을 고루 평등하게 대하던 황금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유전자에 박힌 애교의 발현 욕구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라, 단 한 사람, 애교인 듯 애교 아닌 애교 같은 뭔가를 떨 대상이 있긴 있었는데, J라 부르겠다. 그때의 그것은 조악하기 짝이 없어서, 실은 무슨 이상한 짐승 소리에 가까웠고, 그러면 곰J도 비슷한 소리를 내며 다가와 괜히 syo의 볼을 꼬집어대는 식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두 마리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린 짐승들이 자기들만의 사운드로 교신하는 일종의 폐쇄형 정보통신시스템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J : 으아아아아(밥 먹었냐?)

syo : 으아아()

J : 으아아아아?(맛없었지?)

syo : 으아(내말이)

J : (syo의 볼을 쪼물딱거린다)

syo : 으아우아오아(조리사 쌤들 요즘 좀 나태해진 거 같지 않냐?)

J : (syo의 볼을 쪼물딱거린다)

syo : 으우아오아오아(동지여, 혁명의 때가 다가온 것 같소. 모두들 식판을 들고 일어나자……)

 

대체 저게 뭐가 귀엽냐, 저게 무슨 애교냐는 의문이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저게 애교파티의 한 장면이라는 굳센 증거가 된다. 원래 애교란, 둘 사이만 귀엽다. 남이 볼 땐 난해하거나 가끔씩 역겹다.

 

 

 

4

 

확실히 그들은 서로가 귀엽긴 했다. 그리고 둘 다 귀여운 것들을 몸서리치게 좋아했다.

 

때는 2006, 어떻게저떻게 서울에 안착한 두 사람은 대학로의 한 조개구이 무한리필 집에서 조개를 열심히 뒤집고 있었다. 당시 syo는 눈물 나게 짧은 첫 연애를 조지고 다음 연애에 안착, 평생 처음으로 커플링이라는 것을 하고 다니던 중이었다. J는 뜻밖에 누굴 좋아하는 족족 까이고 선 그이고, 소개팅한 여자와는 두 번 만나는 일이 없고, 따라서 외로워 사무쳐 술이 달아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 그런 상태였다. 만나면 어디로 가서 무얼 먹을 것인가 무얼 할 것인가 같은 그림이 항상 그려져 있던 곰J는 선택장애 syo의 눈에 더할 나위 없이 남자답고 멋진 남자였는데, 대체 왜 빙충맞은 syo는 되는 연애가 곰J는 안 되는 걸까. 연애판이란, 남자가 볼 때 참 괜찮은 남자는 여친이 없고, 여자가 볼 때 참 괜찮은 여자는 남친이 없는 이상하고 야릇한 도깨비 나라였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하지 않고 자꾸자꾸 술을 들이켜는 곰J에게 syo가 말했다.

 

syo : , 정말 여자들 이해가 안 된다.

J : (한 잔 들이켜고) 그치?

syo : (잔을 채워주며) 내가 여자였으면 너랑 바로 사귄다.

J : (한 잔 들이켜고) 나도.

syo : (잔을 채워주며) ㅋㅋ 그래도 니가 니 입으로 그런 말하는 건 좀 웃기지 않냐?

J : (한 잔 들이켜고) 아니, 나도 네가 여자였으면 너랑 바로 사귄다고.

BGM : 뚜 뚜루 뚜뚜뚜루 뚜뚜♬……

 


……, 이걸 확 자빠뜨려, 오늘?

 

 

 

5

 

자빠뜨리지 않았다.

 

 

 

6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연애를 꾸준히 이어나갔다. 그러다 가끔 만나 술이나 마시고, 노래방 가서 3시간 내리 발라드나 부르고, 또 술을 마시고, 잘 안 되는 syo의 인생사와 역시 잘 안 되는 곰J의 연애사를 안주로 또 마시고, 마시고, 그러다 가끔 걔네 집에서 자고 가긴 했지만 역시 잠만 잤다. 손도 안 잡고 잘 잤다. 다음 날이면 해장국을 먹었다.

 

 

 

7

 

둘 다 아직 미혼이다.

둘 다 결혼은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8

 

서울 가면 봐야지.

 


나는 그에게 다른 것도 물어보았다남자 고등학교에서는 남학생끼리 사랑을 고백하거나 사귀는 일이 없었는지 궁금했다그는 껄껄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자기야남자들은 안 그래."

  어쩌면 그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그를 둘러싼 무리에서만 그랬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그는 10대 남학생들이란 치고 박고상대를 제압하려 들고욕하고 침을 뱉으며 허세를 부린다고 했다친구끼리도친구끼리도 그 안에서 서열 같은 게 있어가엾다그런가?

김세희항구의 사랑

 

지금 생각하면 20년 전의 일들은 무슨 전생의 일들처럼 까마득해요혼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야 그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떠오를 정도예요옛날 종로서적이 있던 곳을 지나가다가혹은 김광석의 노래를 듣다가 비로소 생각나는 기억들도 있고요그런데 그때 괴롭고 힘들고 고민스러웠던 일들은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물론 뭐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는 기억나지만고통이라는 건 실제적인 아픔이지 머릿속 기억이 아니잖아요그래서인지 되살아나는 감각들은 모두 좋았던 것들뿐이에요감각적으로 우리는 고통에 훨씬 더 쉽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지만당시에는 세상 전부인 것처럼 나를 괴롭히던 그 고통은 하루만 지나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죠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즐긴 것들은 평생을 가니까가능하면 그런 일들을 더 많이 해야죠.

김연수청춘의 문장들+

 

 

 

9

 

아참, 오늘 도서관에서 요런 아이들을 데려왔다.


 

크기도 쪼꼬민데 다들 200쪽이 채 안 되니, 보통 판형의 책이라면 100쪽 남짓할 꼬마들이다. 사실은 이제 이런 건 안 읽어도 되고 심지어 읽어도 안 되는 수준인데, 그럼에도 표지가 너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치려니 손이 덜덜 떨렸다. 마르크스 캐릭터에 페티시 있는 거 인정. 가운데 저 똥글이도 대책없이 귀엽잖아.

 

 

 

--- 읽은 ---

+ 묵묵 / 고병권 : 132 ~ 235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옌롄커 : 210 ~ 319

+ 화서의 꿈 / 오노 후유미 : 191 ~ 362

 

 

--- 읽는 ---

= 데리다 입문 / 김보현 : ~ 158

= 카르마의 바다 / 문정희 : ~ 98

=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 신동준 : ~ 90

= 옥상에서 만나요 / 정세랑 : ~ 90

= 2의 성 I / 시몬 드 보부아르 :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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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10-15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크스 얼굴에 페티시 있는 일인, 여기도 있습니다. ^^
근데 넘 멋있지 않나요? ㅎㅎ

syo 2019-10-15 19:59   좋아요 1 | URL
전 그 얼굴이 멋있다기보다는 어쩐지 귀여워 보이는 쪽입니다. 이게 제발 정신병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10-15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책없이 귀여워서 심지어 빌린 책 표지까지 가세해서 읽다가 (귀여워서 숨막혀서) 다 죽어랏! 하는 글 같습니다. 작정하고 쓰면 엄청나군요...

syo 2019-10-15 23:26   좋아요 1 | URL
그런 의도도 없었을뿐더러 효과 역시 케바케입니다. 반님의 취향이 드러났군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10-16 07:35   좋아요 0 | URL
며칠 잠을 못자더니 이게 제발 정신병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ㅎㅎ

2019-10-15 2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5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6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19-10-1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일하게 내가 애교부릴 수 있는 사람을 선택했는데 음~~음~~
이건 기쁨일까요?
아님 한숨일까욤?

syo 2019-10-15 23:27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시너지가 나는 것이 애교의 경제학인데 말이지요.

감은빛 2019-10-15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귀여워 데려왔다니!
정말 syo님 귀여우시군요!
근데 남성 친구들끼리 애교라니~
신선한 충격인데요.

제가 경상도에 살았던 시절 친구들과의 대화는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욕이 앞뒤로 붙지 않으면
아예 입이 열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10년도 더 전에 제가 일했던 운동단체에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그림으로 담은 티셔츠를 제작했는데,
여러가지 그림과 함께 귀엽게 단순화시킨 마르크스 얼굴을 넣었던 게 기억에 납니다.
이젠 아마도 레어템이 되어 있을 티셔츠일텐데,
그 낡은 목 늘어나고 구멍난 티셔츠를 아직도 가끔 집에서 입습니다.
그리고 입을 때마다 그 마르크스 그림을 보며,
이 시대에도 과연 인간에게 마르크스가 꼭 필요한 존재일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syo 2019-10-16 10:10   좋아요 0 | URL
유전자에 새겨진 애교를 회피할 수가 없었던 두 마리 짐승이 만나 생존을 위한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서로를 이용한 것이지요...... 저 역시 대구 말투를 쓸 때는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수미썅관의 경상도 어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마르크스를 이 시대 인간에게도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의 몫일 것 같아요. 저 수염달린 귀요미를 꼭 세상을 바꾸고 뒤집어 엎는 데만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전유하고 응용해서 나 하나, 내 주변의 작은 영역을 더 낫게 바꿀 수 있다고 하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요. 어쨌든 좋은 말씀, 날카로운 말씀 많이 하고 가신 양반이니까요.

stella.K 2019-10-16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처럼 애교가 철철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 스요님은 애교와 유머를 자유자제로 넘나드는 것 같은데
내가 나를 모를 때도 있는 거죠.ㅎㅎ
오늘은 친구와의 대화가 압권입니다.^^

syo 2019-10-16 22:52   좋아요 0 | URL
느껴지셨다구요?
뭐 아무것도 안했는데? ㅎㅎㅎㅎㅎ
제 애교는 오직 한 사람한테만 나오는건데......
눈치가 빠르신 편이군요, 스텔라님이.

다락방 2019-10-17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자기를 3인칭으로 말해요? 정말?! @.@

syo 2019-10-17 12:2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그간 얼마나 좁은 세상에 사셨던 거예요.....
이런 사람 잔뜩 있어요......

저는 심지어 글에서도 자기를 3인칭으로 부르잖아요!

뒷북소녀 2019-10-1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남자들은 안그랬나요?

syo 2019-10-18 23:32   좋아요 0 | URL
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살던 거기도 거진 밀림이었지만, 쟤가 말하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디폴트

 

 

1

 

이제 새로이 만나야 할 사람들, 가야 할 곳들, 통과해야 할 일들이 있을 거라면, 되도록 시작은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2

 

금요일 술자리에서, syo는 지난 시절의 열정을, 친구는 초심을 이야기했다. 나는 알라딘 마을에 사는 syo라는 녀석의 현주소를 생각한다. 아직 오늘이 아니던 때, 그 녀석이 오늘을 향해 어떤 모습으로 달려왔고 그 길에서 어떤 이쁨을 받아왔는지를 생각한다.

 

역시 금요일 스타벅스에서, syo는 친구의 특별함을, 친구는 syo의 평범함을 말했다. 나는 알라딘 마을에 사는 syo라는 녀석과, syo를 나라고 부르지 않고 syo라고 부르는 나 사이에 엎어진 어떤 간격을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간격들은 항상 점검되어야 한다. 멀수록 좋은 간격도, 가까울수록 좋은 간격도, 그리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야 적당한 대부분의 간격들은 더더욱, 꾸준한 점검이 필요하다. 그저 감각만을 믿고 안심할 수 있을까? 제 몸 하나 스스로 간지럽힐 줄 모르는 동물의 자기감각 따위를?

 

 

 

3



나는 지금 슬프고맥이 풀리고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네. [그 이유를 모르겠네하지만 슬픔이 저절로 모습을 바꾸네이것이 지속되고메마르고신랄해졌네옛날엔 이것이 '다른기쁨이나 다른 희망을 먹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네하지만 지금은 이 슬픔이 더 사실적이네.

브누아 페터스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1,069쪽짜리 데리다 평전을 1할쯤 읽었다. 구속받는 일상과 그런 일상을 견디기 어렵도록 타고난 성향 사이에서 이리저리 흩날리며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미친 듯이 공부하기를 3, 이제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그 자리는 일단 그에게 자유와 희열을 동시에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마도, 역시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명성 높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평전을 읽노라면, 그들이 고등사범학교 입학 반에서 두각을 드러냈다가 망했다가를 반복하거나, 약까지 빨아가며 아등바등 공부하는 대목은 반드시 등장한다. 그런 위상의 교육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입장이라 그저 떨떠름하게 읽게 된다. 하지만 어쨌든 모든 평전들이 주인공들의 유년 시절에 대한 짧은 서술을 마치고 나면, 거의 복붙해도 상관없을 정도로(그들이 잘했던, 혹은 약했던 과목의 이름만 바꾸면 될 것 같다) 비슷한 내용과 분량의 입시 지옥 탈출기를 과하다 싶을 만치 상세히 설명하는 것을 보니, 이 과정이 저들 나라의 독자들에게 우리는 알기 어려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긴 하나보다. 사실 엘리트 새싹들이 엘리트 학교 가기 위해 아등바등 공부하여 엘리트 거목이 되는 스토리는 조금은 짜증스럽고 크게는 질투도 난다. 저들은 저렇게 자란 다음, 저렇게 자라지 않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망막으로는 읽어도 뇌세포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들을 써낼 것이다. 그리고 저들끼리 칭찬하거나 비난하면서 멋있어 보일 것이다.

 

문제는 가끔씩 그게 진짜 멋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싶은 그것들이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는 그 이유만으로…….

 

수련과정만 놓고 보면 syo같은 범부에게는 아무래도 스피노자 쪽이 좋았다. 독고다이에 약간 사마외도邪魔外道 냄새도 나고.

 

 

 

4


 

나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포르노를 본 적이 없었다노랑머리같은 성인영화는 봤지만거기엔 남녀 성기의 결합 장면이 적나라하게 비춰지지 않았다처음으로 남자의 성기를 자세히 봤을 때 갸우뚱했다이상한 점이 있었다망설이다가 얼마 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그와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나는 한쪽 팔을 뻗어 그의 고환을 가볍게 쥐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이게 원래 하나인 건가?"

  "뭐가?"

  "아니이게 원래 두 개가 달린 거 아냐?"

  "하나 맞는데?"

  그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나는 당혹스러웠다.

  "이상하네불알 두 쪽이라는 표현이 있잖아……."

  그는 몇 초간 어리둥절해 하다가 잠시 뒤 무슨 뜻인지 깨닫고 이마가 붉게 변할 정도로 웃어 댔다나는 의혹을 해소하고 싶었다.

  "책에서 그런 말을 읽었던 것 같은데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나온 말이었나."

  "잘 만져 봐그 안에 두 개가 들어 있잖아."

  그러자 정말 흐늘흐늘한 알맹이 두 개가 만져졌다혹시나 그가 불구가 아닐까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질문을 하는 게 아닐까 내심 염려했던 나는 안도함과 동시에 내가 안다고 여겼으나 사실은 모르고 있을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불알 두 쪽이라는 표현이 날 속였네…….“

김세희항구의 사랑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두운 작품 가운데 홀로 이질적일 정도로.

 

이야기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야기만으로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여기 있다. 여기에.

 

쓰는 이의 선택과 읽는 이의 취향 사이에서 문체라는 요소는 이리저리 치이며 푸대접을 받기 일쑤다. 이건 또 쌍방이 서로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부분이라, 서로 맞지 않으면 답이 없다. 그 얇은 수요-공급 곡선이 품고 있는 매서운 현실을 고려해보자면, 결말은 선명해진다.

 

독자의 입장에서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깔끔하고 건조한 문체는 모든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만능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집 대문을 만능 키로 여는 사람은 없다. 이야기는 공공재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결국은 익명으로 기억될 것이다.

 

돌려 말하려니 어지럽다. 요지는 이렇다. 이 책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왔다면 우리는, , 이 문장들 김세희랑 정말 똑같네- 할 수 있을까? 이야기로서도, , 이런 이야기는 김세희가 잘 하는 건데- 할 수 있을까

 

 

 

--- 읽은 ---

+ 부의 지도를 바꾼 회계의 세계사 / 다나카 야스히로 : 203 ~ 397

+ 옥스포드 중국사 수업 / 폴 로프 : 140 ~ 447

+ 모든 사람은 혼자다 / 시몬 드 보부아르 : ~ 174

+ 항구의 사랑 / 김세희 : ~ 171

+ 딩씨 마을의 꿈 / 옌롄커 : 497 ~ 629

+ 내가 화가다 / 정일영 : 153 ~ 335

+ 나는 열정보다 센스로 일한다 / 최용진 : 177 ~ 320

 

 

--- 읽는 ---

= 묵묵 / 고병권 : ~ 132

= 미친 사랑의 서 / 섀넌 매케나 슈미트, 조니 렌던 : ~ 185

= 데리다, 해체의 철학자 / 브누아 페터스 : ~ 114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옌롄커 : ~ 210

= 화서의 꿈 / 오노 후유미 : ~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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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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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15: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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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江東

 

 

1

 

일단 강동구입니다.

 

안녕하세요, 강동구민 여러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2

 

스웨덴 한림원은 도박 사이트 놀리는 게 설립취지인 것 같다.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전혀 뜻밖. 페터 한트케라니, 만세.

 

사이러스님과 카페에서 모 도박 사이트가 발표한 배당률 리스트를 보며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앤 카슨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은 그 리스트에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 굉장히 많았다. 특히 마지막 줄에 있는 야 후아던가 야후 아던가 하는 분은 누구신지 정말…… 검색해도 야후 아르헨티나막 튀어나오고…….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받은 해는, 발표 다음 날 아침, 도서관이 문을 열자마자 쳐들어가서 국내 번역된 이시구로의 모든 책을 싸그리 낚아채 왔더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일은 강동구에 가야해서 도서관 털이는 애초에 물 건너 간 셈이다.

 

페터 한트케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런 걸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하나, 하여간 막 천지분간 없이 휘젓고 다니면서 아무래도 쓸데없어 보이는 것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거나, 맥락도 없이 대뜸 진지한 자기고백을 하며 한 페이지를 뚝딱 해먹는 등장인물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런 경우 대체로 안 읽어지게 마련이다. 알프레드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라든지, 가즈오 이시구로의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랄지 그런, 독해는 되는데 해독이 안 되는 희한한 작품들과 맥이 닿아있는데, 놀랍게도 한트케의 작품들만큼은 그 와중에도 끝까지 읽어진다! 그건 어쩌면 소설가와 독자의 주파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올가 토카르추크라는 분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3

 

다시 각 잡고 책 이야기를 좀 써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맘이 찌뿌둥하다. 어떻게든 해내던 월말 결산, 주말 결산 같은 것들도 한 번 손을 놓았더니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역시 인생은 기세.

 

알라딘이 자꾸 작년 재작년 이맘때 syo가 찌끄려 놓은 글들을 갖다 대는데, 당시에는 정말 후지다 생각했던 것들이 오늘 다시 보니 와 저게 어디야 싶다. 역시 인생은 쇠락.

 

일단 서울이나 다녀와서 생각할까. 역시 인생은 내일…….

 

 

 

--- 읽은 ---

+ 읽거나 말거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279 ~ 456

+ 30분 회계학 / 가네코 도모아키 : 217 ~ 352

+ 자본론 공부 / 김수행 : 137 ~ 283

+ 프란츠 파농 새로운 인간 / 프라모드 K. 네이어 : 193 ~ 301

 

 

--- 읽는 ---

= 딩씨 마을의 꿈 / 옌롄커 : 367 ~ 497

= 내가 화가다 / 정일영 : ~ 153

= 기초 확률과 통계 / 박대수 : ~ 102

= 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 폴 로프 : ~ 140

= 나는 열정보다 센스로 일한다 / 최용진 : ~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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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0-10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벨문학상이 뭐지요? 먹는 겁니까? 저희 집에 노벨상 킬러가 하나 있는데 귀신같이 책꽂이에서 빼서 던지고 찢기 직전까지 간 걸 빼앗아보면 어김없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찍혀 있습니다. 도리스 레싱 르 클레지오 오르한 파묵 뭐 이런 거...사 놓고도 안 읽는 엄마를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또르르...
그런 저와 달리 발표를 듣고 도서관으로 달려간다니 별세계 입니다. 내일은 일단은 서울로 잘 달려오시오소서.

syo 2019-10-11 08:49   좋아요 1 | URL
노벨상 킬러 귀엽다.
노벨상 예측 시스템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년에는 한번 시험해보세요 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19-10-11 10:30   좋아요 0 | URL
예측기로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게 쿤데라 영감님 느림이랑 커튼이 단골 능욕? 메뉴거든요. (겉지를) 벗기고, 들여다보다, 내동댕이치고...(나쁜 남자네.) 그렇게 해서 영감님이 노벨상 탈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던지게 하고 싶지만. 그전에 돌아가실 듯...이번엔 또르르 안 해야지.

북다이제스터 2019-10-10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동구로 낙점 되신 건가요?ㅎㅎ
예전 강동구 길동에 살았던 주민으로서 환영합니다. 정말 좋은 동네입니다. ^^

syo 2019-10-11 08:49   좋아요 0 | URL
저도 강동구에 잠시잠깐 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익숙하고 좋은 동네 맞아요 ㅎㅎㅎㅎ

scott 2019-10-10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인생은 내일!내일 서울 날씨는 화창,한트게 작품은 전부 팔아버렸는데 올해 노벨상 수상을 ㅎㅎ

syo 2019-10-11 08:50   좋아요 0 | URL
노벨상 그게 뭔데? 컨셉으로 밀고나가실 수 있잖아요 ㅎㅎㅎㅎ
한트케? 그거 노벨상 타야 읽나? 그냥 다 읽는 거 아닌가? 이런 컨셉 ㅎㅎㅎ

잠자냥 2019-10-1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림원은 도박사들 엿 먹일 수상자들만 콕 찝어내는 것 같다고요. 암튼 올해 민음사가 쏠쏠히 챙겨가겠군요.

syo 2019-10-11 08:51   좋아요 0 | URL
그럴까요? 가즈오 이시구로만큼 나가진 않을 것 같기도 하고 ㅎㅎㅎ
이제는 노벨문학상이 불의의 일격을 가하는 걸 지켜보는 재미로 매년 이맘때를 기다리게 되는 것 같아요.

북프리쿠키 2019-10-10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가 누님은 뉴페이스라 신선한데요 ^^
한트케 형님 책은 저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끝까지 읽어진다!는 이유는 얇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ㅎ

syo 2019-10-11 08:5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세상 작가 참 많다.......
두 명이라서 두 명분 읽으려면 혼줄 빠지겠네 싶었는데, 그래도 한트케는 좀 읽었으니, 결국 한 명분이네요.

2019-10-11 0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1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11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 투 강동...

syo 2019-10-11 08:54   좋아요 0 | URL
헬로우 강동...

단발머리 2019-10-1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 투 서울...

syo 2019-10-12 09:12   좋아요 0 | URL
하이 서울....

토큰 2019-10-1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 투 서울..🙌🏻

syo 2019-10-12 09:13   좋아요 0 | URL
하이하이 서울...😼

수연 2019-10-1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 무조건 웰컴_ 강동구 어디 있는지 서울 지도 검색중

syo 2019-10-14 10:16   좋아요 0 | URL
버스와 전철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는 모두 한가족

2019-10-12 1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4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4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4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19-10-14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로! 전 강서!!

syo 2019-10-14 10:19   좋아요 1 | URL
헬로!
그러나, 와우! 멀어!!

cyrus 2019-10-1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도 민음사와 문학동네가 승자네요... ㅎㅎㅎ

syo 2019-10-14 10:21   좋아요 0 | URL
그분들이 언제 패배한 적 있나요.
이 나라 출판시장이 어디, 그분들이 패배할 수나 있는 구조인가요ㅎㅎㅎㅎ

.....아니, 판사님, 그게 아니오라......

다락방 2019-10-1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에 웰컴 난리났네요. ㅎㅎ

syo 2019-10-14 20:26   좋아요 0 | URL
웰컴폭풍이야 ㅎㅎㅎ 역시 인심좋은 고장 서울.....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강동구가 짱이지!!

구청장님 보고 계시나요.....
 

호반정경湖畔情景 7

 

 

1

 

인간의 몸이란.

 

수술이 끝나고 입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엄마의 몸에는 새로운 알고리즘이 장착되었다.

[ 기침을 세게 한다 -> 세 번 연속 기침을 하였는가? y -> 토한다 ]

 

닷새 후, 구토를 유발할 수 있다는 독한 링거액을 뗐다. 거기서 닷새가 더 지나자 수술 부위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서는 통증이 일어나지 않는 단계까지 왔다. 그렇지만 엄마의 몸은 결코 저 알고리즘을 포기하지 않는다. 집에 와서도 기침이 이어지면 여지없이 구역질이다. 동생과 나는 의사도 뭣도 아니면서 저건 몸이 습관을 기능으로 만든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기침은 기침이고 구역질은 구역질이라고 걔네 둘은 붙어 있는 애들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세뇌시켰다.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때가 되서 그런 건지, 어쨌든 구역질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여지없이 구역질을, 그것도 반드시 구토가 뒤따르는 구역질을 하는 순간이 있다. 엄마는 지나치게 오래, 세게, 깊이, 혀를 닦는다. 병원에 가는 날이면 더욱 더 집요하게 혀를 닦는다. 엄마가 싱크대에 서서 혀를 닦는 동안, 양치질 전체가 아니라 오로지 혀를 닦는 동안, 나는 뜨거운 커피 반 잔을 천천히 마시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변기 플러시를 내리는 데 엄마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었더니 거품이 잔뜩 묻은 입을 하고 달려 들어와 즉시 토한다. 나는 엄마의 등을 쓸어주며 말한다. 엄마, 제발, 혀 좀 미친 듯이 닦지 말라고. 어렵게 먹은 아침 약 다 토하잖아. 내가 몇 번을 이야기해, 지금.

 

네 번. 나는 세고 있다. 열 번이 되면 크게 한 번 따지기 위해서, 공짜 탕수육을 그리며 중국집 쿠폰 모으는 기분으로, 나는 세고 있다.

 

우리 엄마는 예상대로, 몸보다 고집의 회복이 빠른 사람이다.

 

우리는 집에 돌아왔다. 새로운 엄마와 새로운 아들이 되어서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원래의 엄마와 원래의 아들이 몰래 같이 돌아왔다. 우리 집에는 지금, 두 명의 엄마와 두 명의 아들, 두 명의 딸이 산다. 이 좁은 지붕 아래 복작이고 살 수 있는 티켓은 엄마, 아들, 딸에게 각각 한 장씩만 주어질 테니, 그 자리를 놓고 새로운 우리와 원래의 우리가 한동안 다투겠다. 오늘도 시끄러운 우리 집이다.

 

 

 

2

 

마음에 날개가 없는 줄 알면서 우주의 끝까지 가보자고 말했다. 날개가 없으면 뚜벅뚜벅 걸어서라도 가자고 부추겼다. 마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마음만으로 해내라고 자꾸 등을 떠밀었다. 떠밀려서 당신은 왔다. 2만 광년을 왔다. 오면서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왔다. 오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다 당신의 몫이었다.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 넓고 어두운 우주에 숨어, 나는 당신을 향해 가늘고 흐릿한 한 줄기 빛을 끈질기게 쏘았다. 밝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식물처럼, 당신은 그 어두운 빛을 움켜쥐고 어두운 쪽으로, 내 쪽으로 조금씩 그러나 똑바로 왔다. 고독했지만 돌아서지 않고, 무거웠지만 멈춰 서지 않고, 당신은 왔다. 2만 광년이 금방이었다. 별의 커튼을 걷고, 밤의 물살에 발을 적시며, 저기 빛으로 도착하는 당신이 보인다. 빛보다 먼저 보인다. 이제 당신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발견될 것이다. 질량이 측정될 것이고, 그 질량에 맞는 중력을 던져 당신을 포획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궤도를 만들 수 있다. 과 망을 만들 수 있다. 밀물과 썰물이 있겠다. 파도가 칠 것이다. 등대가 설 것이다. 등대는 날개도 없는 당신이 약한 발로 걸어 온 그 길을 비출 것이다. 2만 광년이 선뜻 밝아질 것이다.

 

 

"나는 안 될까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그래도 나는 안 될까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기다릴게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이거면 됐어."

정세랑지구에서 한아뿐

 

삼촌은 시험 삼아 링링을 끌어안았다먼저 그녀의 손을 잡은 다음곧이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마치 반평생 찾아 헤매던 집 안의 새끼 양을 안듯이 꼭 끌어안았다그녀가 후회하면서 마음을 바꾸고 몸을 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녀도 그가 자신을 안아주자 그의 품 안에 가만히 안겼다밤은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밤이 다하면 곧 날이 밝을 것이고날이 밝으면 다음날이 될 것이었다드넓은 평원한밤의 고요한 밤기운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밤기운은 음지에쌓여 있는 눈을 등진 채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눈이 어는 소리는 셀 수 없이 무수한 얼음 알갱이들로 하늘을 떠다니다가 건물 다장에 부딪쳐 삼촌과 링링의 몸 위로 미세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주변에 부딪쳐 휘리릭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앉아 있다가 말없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방이 있는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방 옆에 있는 방은 창고였다열병 환자들의 양식과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곳이었다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아주 따뜻했다방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은 곧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따뜻해진 두 사람은 삶의 의미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옌롄커딩씨 마을의 꿈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사랑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냉정한 관찰자들은 이런 경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접어두자위대한 사랑이란 본래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는 법이니까그것은 마치 극한의 오지에서 불가사의하게 자라는 한 그루 나무와도 같다그 뿌리는 어디에 박혀 있는지수액은 어디서 공급받는지대체 무슨 기적이 일어났기에 푸른 잎사귀들이 돋아날 수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녹음을 드리운다그건 아마도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뭔가를 찾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읽거나 말거나

 

 

 

--- 읽은 ---

+ 도남의 날개 / 오노 후유미 : 218 ~ 414

+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 이지원 : 82 ~ 164

+ 마르크스 / 피터 싱어 : 106 ~ 213

+ 수학님은 어디에나 계셔 / 티모시 레벨 : 120 ~ 271

+ 알레프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153 ~ 234

 

 

--- 읽는 ---

= 딩씨 마을의 꿈 / 옌롄커 : 154 ~ 367

= 30분 회계학 / 가네코 도모아키 : ~ 217

=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 / E. K. 헌트 : 76 ~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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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1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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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1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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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1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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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2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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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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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2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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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2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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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0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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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昌寧 3

 

 

1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아이의 키를 넘을 만큼 웃자란 풀잎이 풀벌레 소리에 닿아 하늘거리고 있었다. 멀리 노을이 내려앉는 곳으로부터 붉고 따스한 냄새가 실려 왔다. 드디어는 밝음과 어두움이 몸을 섞는 시간, 별빛이 물 위로 총총 찍어놓은 발자국을 아이가 세는 동안 잠자리도 긴 꼬리를 흔들어 별자리를 깁는다. 행님아 피리 불 수 있나? 아이가 물었다. 옆에 붙어 앉아 있던 청년은 말없이 목장갑을 벗고 풀잎을 잡는다. 시간이 묻기 시작해 코밑이 거뭇거뭇하다. 길이를 가늠하여 똑, 끊어낸 얇은 악기는 노을이 버무려진 초록빛. 초록색 소리가 날 거야, 아이는 기다린다.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면 색깔도 냄새도 윤곽조차 기억하지 못할 그 소리를 아이는 기다렸다. 흐릿한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두고 싶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두고 싶다. 내 중심에 조그만 자리를 내어, 안쪽으로 한 뼘 더 끌어당기고 싶다. 아이는 꿈을 먹고 자란다고 했다. 얼마쯤 먹고 또 얼마쯤 뱉어가며 자랐더니 겨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더니 이제 기억을 먹고 자란다.

 

기억을 먹고 자라 한다.

 


한아는 이후 채 겪어보지 않은 광막함에 대해 계속 떠올렸고우주가 언제나 광막한 곳이어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음속에도 그것이 일부 녹아들지 않았을까 여기게 되었다누군가는 어렴풋하게누군가는 살을 찔러오는 강렬함으로 안쪽의 춥고 비어 있는 공간을 더듬는 것이다.

정세랑지구에서 한아뿐


아무리 길고 복잡한 운명이라고 할지라도모든 삶은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게 되는 순간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타데오 이시도로 크루스(1829~1874)의 전기


아는 이야기를 다 쓰면 그다음엔 어떤 글을 지어야 하나 근심한 적이 있다바보같이 몸도 글도 한결같을 거라 생각하던 때의 일이다단어 하나가 몸을 완전히 통과한 후에는 그 전과 전혀 다른 뜻이 된다는 걸 몰랐다안다고 믿었던 말쉽게 끄덕인 말남몰래 버린 말……스러진 푯말을 따라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갈 때면 이따금 몹시 늙은 얼굴을 한 서사들이 멀찍이서 손짓하며 서 있기도 했다.

김애란잊기 좋은 이름

 

 

 

2


 

마르크스는 과격한 동시에 단순한 명제가 뿜어내는 치명적인 매혹을 놓치지 않을 만큼 명민했다. 스스로도 그걸 알았다. 그는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썼다. 마침내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명제는 단순하고 과격할 수밖에 없음을 세상에 증명했거나, 혹은 그렇다고 믿게끔 세상을 속이는 데 충분할 만큼은 치명적인 글을 써낼 수 있었다.

 

 

 

3


읽거나 말거나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최성은 옮김 / 봄날의책 / 2018

 

이 책에서 쉼보르스카가 서평한 책들 중 95%는 지금도 만날 수 없고, 앞으로도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녀가 읽은 책을 우리가 읽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녀의 서평이 얼마나 빼어난 것인지를 그저 어림어림 해볼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딱 한 편, 노벨상으로 수제비를 끓인 시인은 서평으로 칼국수를 끓여도 핵존맛임을 너끈히 짐작해 볼 한 편이 있어 그대로 옮긴다. 이렇게 한 꼭지를 통으로 따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지 이 짓을 할 때면 늘 고민하지만, 그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매력을 알았으면 좋겠다.

 

동아시아에서는 용꿈을 꾸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는다그리고 실제로 기생 출신의 한 여인이 꿈에서 복숭앗빛 호수를 향해 뛰어드는 초록빛 용을 본 후그녀의 딸은 열여섯 살의 나이에 젊고 부유한 양반 자제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젊은 청년이 그녀를 보고도 첫눈에 반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어린 춘향은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아도 "온 나라를 뒤흔들 만큼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기에게다가 그녀는 우아한 몸가짐과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었고시를 짓는 데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하지만 출신계급이 미천했기 때문에 그녀가 오를 수 있는 위치는 양반의 비공식적인 아내 자리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도령은 멀리 떨어진 한양에 가서 "검푸른 구름 위로 높이 오르기 위해", 좀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관직을 얻고 출세를 하기 위해 춘향을 떠나게 되었다가여운 춘향의 눈물도 애원도 소용없었다. "만 개의 버드나무 가지가 떠나는 바람을 잡을 수 있겠는가?" 결국 춘향은 홀로 남겨졌고언젠가는 연인이 돌아오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한 채무슨 일이 있어도 절개를 지키겠노라 굳게 결심했다그래서 탐욕스러운 늙은 관리가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하자 차라리 목에 형틀을 쓴 채 옥에 갇히는 쪽을 선택했고몽둥이로 무자비하게 매질을 당했다쇠가 박힌 대나무 몽둥이가 그녀의 작고 여린 발바닥을 부서트렸다하지만 초록빛 용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복숭앗빛 호수에 뛰어든 건 아니었다마침내 젊은 도령이 돌아왔고검푸른 구름 위 매우 높은 곳까지 오른 덕분에 추악한 관리를 벌하고춘향을 자신의 공식적인 부인으로 삼을 수 있었다.

  열녀 중의 열녀 춘향에 관한 이야기는 구전되어오다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글로 기록되었고당연히 한국 고전문학의 정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어떤 이들은 생생하고 정교한 묘사를 높이 평가하고다른 이들은 생동감 넘치는 러브신을 극찬하기도 한다또 어떤 이들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는 수준 높은 감성에 찬사를 보내고사회비판적인 요소와 여성의 힘겨운 운명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에 매료된 이들도 있다그밖에도 판타지적 요소가 없다는 점을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덕목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이러한 찬사의 밑바탕에는리얼리즘이야말로 문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동화나 민담은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혼합되어 있으므로 미성숙한 하위 문학이자 아직 나비로 성장하지 못한 애벌레와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동화나 민담을 읽는다는 것이 상당히 힘겨운 일일 것이다모든 종류의 기적이나 환상은 미학적으로 불오나전한 일종의 죄악으로 치부되고개연성에 위배되는 요소들은 전부 유치하기 짝이 없게 여겨질 테니 말이다그런 이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이 춘향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그런 사람들에겐 이따금 안면근육의 경련을 일으키게 만들 것이다매우 강렬한 해피엔딩을 맞고 있지만사실 거기에 춘향의 으깨어진 두 발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으니 말이다과연 춘향의 발꿈치뼈는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잘 붙었을까안심해도 좋다완벽하게 잘 아물었을 것이다틀림없이 춘향은 잘생긴 배우자 옆에서 절뚝거리며 걷지도 않았을 테고첫날밤에 원앙이 수놓인 이불을 덮어 자신의 뒤틀린 두 발을 애써 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동화는 결코 현실의 삶에 완전히 항복하는 법이 없으니까아니오히려 그 반대이다틈만 나면 훨씬 나은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현실을 난처하게 만든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읽거나 말거나, 86-88

 

서평을 저렇게 써낼 수 있다면, , 사는 게 얼마나 더 재미있어질까!

 

 

 

--- 읽은 ---

+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 ~ 224

+ 지금 당장 경영학 공부하라 / 김태경 : 272 ~ 383

+ 현대철학 아는 척하기 / 이병창 : 331 ~ 522

+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 장옥관 : ~ 119

 

 

--- 읽는 ---

=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제이컵 솔 : 69 ~ 168

= 수학님은 어디에나 계셔 / 티모시 레벨 : ~ 120

= 도남의 날개 / 오노 후유미 : ~ 218

= 딩씨 마을의 꿈 / 옌롄커 : ~ 154

=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 / E. K. 헌트 : ~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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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06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서평 정말 잘 읽었습니다, 쇼님. 정말요.

syo 2019-10-06 22:58   좋아요 0 | URL
서평 정말 잘 쓰죠?? 춘향전이 저렇게 되는군요....

토큰 2019-10-06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폴란드의 시인이 지구 반대편의 작은 나라의 책까지 읽고 서평을 남겼다는 것 자체로 놀랐답니다.

syo 2019-10-06 22:59   좋아요 1 | URL
저도 읭? 춘향전이 왜 거기서 나와?? 이렇게 되었습니다 ㅎㅎㅎㅎ 게다가 너무 잘 썼어...

반유행열반인 2019-10-06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풀피리, 마르크스, 춘향전,
서평 잘쓰는 만큼 재미난 인생이면 syo님 이미 사는 게 충분히 즐겁지 않나요?
저도 지구에서 한아뿐 빌려만 놓고 아직 손 못댔어요. 난 맨날 늦어.
다음 한 주도 신나게 읽고 재밌게 쓰시길 비옵니다.

syo 2019-10-06 23:01   좋아요 1 | URL
<지구에서 한아뿐> 좋아요. 달달해서. 정세랑 작가 책 처음 읽었거나 다른 작가들 단편이랑 엮은 책에서 지나치듯 봤거나 뭐 그랬을 텐데, 이 책은 너무 좋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