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고 말지 저미고 지랄
누가 그렸나, 이 불꽃을. 타들어 가는 저녁의 늑골을. 허공의 틈새가 깃털처럼 위험하고 그 아래서 용암을 휘감은 어느 미친 남매가 미친 입맞춤으로 심장을 녹이고 있을 것만 같다.
--- 읽은 ---
356. 꽈배기의 멋
최민석 지음 / 북스톤 / 2017
- 일독(180123)
- 재독(210914)
최민석 선생님께 미쳐 있던 그때가 벌써 4년 전. 그때도 syo는 syo였지만 그래도 그 syo는 오늘의 syo와는 약간 다른, 더 쭈구리였던, 그러니까 syo라고 쓰긴 하지만 실은 sssh…y…o에 가까웠고, 웃을 일이 많이 없어서 웃을 일이 생기면 열심히 웃었다. 호호 웃었다고 호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시절 그때 내 배꼽을 책임져 주었던 최민석 선생님. 지금은 무엇을 하시는지. 이 책과 이 책의 이란성 쌍둥이 『꽈배기의 맛』은 웃기기로 치자면 선생님의 출세작(?) 『베를린 일기』보다는 확실히 덜하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어떻게든 매주 에세이를 써내기 위해 눈물나는 집념으로 어영부영 해나가는(?) 태도가 담겨 있어서, 오늘의 syo는 이 책에서 느끼는 바가 좀 더 있다.
문학이라는 세계는 걷다 보면 포기하고 싶을 만큼 끝없이 넓다. 하지만 글을 쓰는 해가 길어질수록 이 넓은 세계에서 나만의 자리 하나 차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하고 있다. 광대한 사막에서 정착하기 어려운 것처럼, 드넓은 문학의 세계에서 작은 자리 하나 차지해 정착하는 것은 오아시스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벅찬 일이다. 그것이 비록 꽈배기 좌판만 한 자리일지라도,
하여 내가 바라는 글은 명문도 아니고, 미문도 아니다. 심금을 울리지 않더라도, 꽈배기처럼 나만의 온전한 성격과 선명한 색깔이 담긴 글이다.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생각을 품고 꾸준히 쓰고 고치다 보면, 어느 날 내 글을 보고 스스로 ‘음. 꽈배기 같군’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꽈배기는 유기농을 넘보지도, 장인 위치를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확실히 자기 자리에 버티고 서서, 고운 갈색과 흰 설탕이 눈처럼 박힌 자태를 내보일 때까지 뜨거운 기름과 간지러운 설탕을 견뎌낼 뿐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게 ‘꽈배기의 멋’이라 생각한다.
_ 최민석, 『꽈배기의 멋』
357. 둥근 발작
조말선 지음 / 창비 / 2006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자
저것은 침대처럼 무겁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결정하자
저것은 망가진 침대
저것이 망가진 것뿐인데
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침대를 옮기고 있다
저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내 몸 위로 침대가 버려진다
내 몸에 이렇게 방이 많았나
방마다 망가진 침대가 들어앉는다
이렇게 좁은 입구를 뚫고
어떻게 네가 들어온 거니?
나는 어쩌자고 침대를 낳을 생각을 한 거니?
좁아터진 방마다 침대가 만삭이다
일요일에 해치울까?
엘리베이터는 아직 수리중이야
신호등 앞에서만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들은
줄곧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다
폭신한 구름다리를 들고 서 있는 골짜기들처럼
나는 무거워진다
_ 조말선, <망가진 침대>
매트리스가 망가졌다. 20년 1월 이 집에 처음 들어오면서 산 것이니 바꿀 때도 되었지. 애초에 무슨 마약 꿀잠 어쩌고 하는 짜친 수식어가 잔뜩 붙은 싸구려 메모리폼 매트리스였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반년쯤 쓰니 메모리폼이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했다. 가운데가 좀 꺼졌는데 얘가 아무것도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별 수 없이 한동안 가생이에서 자기도 했다. 잔재주고 미봉책이다. 그래도 그냥 자는 것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여자친구가 찾아오면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일단 지금은……) 이 매트리스를 찢어발기고 스프링 빠방한 놈을 새로 들여오고 싶은 마음, 갈망이 아니라 분노에 가까운 그런 마음을 먹게 된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몇 푼 돈이 아니라 내 무릎과 그녀의 허리다. 버리자. 버리자.
하고 마음을 먹으니, 버릴 일이 더 요원해진다. 저 덩치를 어떻게 내놓을 것이며, 새로 들여올 놈은 무슨 종류의 얼마짜리를 고를 것인가.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온몸과 마음이 침대에 점령당했다. 그리고 결국 다시 미룬다. 이사할 때 다 짐인데 일단 집 재계약 되는 거 봐서 결정할까, 한두 푼도 아닌데 가성비 좀 더 두드려 보고 결정할까, 일단 그냥 토퍼 하나 올려볼까……. syo는 잘 버리는 편이지만, 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버리기 전에 어쨌든 한 번은 그것으로 꽉 채워지기 때문이다.
358.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셀린 벨로크 지음 / 류재화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
원문과 번역 중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완전하지 않은 문장이 자꾸 등장한다. 생략할 만한 개연성이 없는 자리에 주어가 실종상태라든가, 콤마를 중심으로 나란히 걸리지 말아야 할 문장들이 걸려 있다든가 하면 몰입은 쉬이 깨진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뜻밖에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원래 그래, 너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너조차 네 것이 아니거든, 그냥 내던져, 포기해, 관조해. 이런 조언은 웬만해선 실행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어지간히 실패해 본 경험이 쌓이면 갑자기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사회는 무척이나 다종다양한 실패를 점점 더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는 일에는 그야말로 압도적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아마도 쇼펜하우어는 점점 더 힘을 얻어나가지 않을까.
현재는 유동적이다. 매 순간 우리는 다음의 목표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목표에 도달하면 다시 다른 목표가 생긴다. 삶은 결코 '현재'가 아니며 항상 다가오는 것이 있다.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열망들 속에 수많은 열정과 신념, 자존심, 땀, 노력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일이면 다른 소용없음과 더불어 산산이 흩어지는 추억의 물살들이 될 텐데? 우리는 공 뒤를 뛰어가는 사람을 닮았다. 공을 잡는 즉시 다시 되던져 또 잡으려 하는…….
_ 셀린 벨로크, 『괴로운 날엔 쇼펜하우어』
359. 예술가의 일
조성중 지음 / 작가정신 / 2021
호쿠사이는 89세에 눈을 감았다. 삼라만상을 그리려 했던 화가답게 오래 살았지만, 그는 주어진 시간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호쿠사이가 남긴 말은 이렇다. “내게 5년이란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진정한 화가가 될 텐데…….” 3만여 점 그림을 그리고, 서양에 큰 충격을 줬으며, 한 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의 마지막 말은 겸손의 언어가 아니다. 70년 내내 그림만 그렸지만, 아직도 못 그린 것이 많아 비통해하며 갔다. 호쿠사이에게 죽음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어떤 예술가는 오로지 예술만을 위해 최대한의 삶을 살다가 떠나기도 한다.
_ 조성준, 『예술가의 일』
데이비드 보위는 하이힐에 드레스를 입었고 다이앤 아버스는 흉측하다고 여겨졌던 인물들을 사진 찍었다. 말러는 교향곡의 문법을 깨부수고 모더니즘 예술의 축이 되었지만 당대에는 조롱받는 작곡가였고, 니진스키는 무용의 한계를 삭제한 대가로 외설의 오명을 쓰고 체포되었으며, 호쿠사이는 라이벌 화단의 화풍까지 습득하고 스승으로부터 파문당한다. 그들은 뭔가 다른 것을 했고, 그에 따르는 괴로움을 감내하거나 무시했다. 동시대는 무지했으나 시간은 그들의 편이어서, 오늘 이런 책이 나왔고, 그들이 주인공이 되는 동안 그들을 가두고 억압하고 조롱했던 사람들은 시대의 음화陰畫로 박제되었다.
360, 361, 362. 소오강호 4, 5, 6
김용 지음 / 전정은 옮김 / 김영사 / 2018
--- 읽는 ---
무서운 속도 / 장만호
책Chaeg 2021. 9 / (주)책(월간지)편집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 / 마야 괴펠
행복해지려는 관성 / 김지영
나를 살리는 철학 / 알베르트 키츨러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1 / 이서수 외
발견, 『한서』라는 역사책 / 강보순, 길진숙, 박장금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 기시미 이치로
뺨에 묻은 보석 / 박형서
이불 밖은 위험해 / 김이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