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42

 

 

 

1

 

점심에는 국수를 삶았다. 육수 우리는 과정을 MSG로 홀라당 대체해 보려고 간을 거의 스무 번쯤 봐 가며 아등바등했지만 결과물은 여지없이 근본 없는 맛. 썰어 넣은 김치가 착실하게 익어준 덕분에 그래도 겨우 먹을 만했다. 달걀은 세 개 익힐걸. 양파는 반 개만 넣을걸. 은 허겁지겁 국수를 마시고서 확정일자를 받고 전세대출을 연장하러 나섰다. 이 집에서 두 해 더 지낼 듯하다. 며칠 전에 계약서를 갱신했다. 느지막이 일어났고, 일어나 보니 성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가채점한 것보다 영어는 하나 더 틀린 모양이고, 물리는 메가스터디에서 예측한 것보다 등급이 낮게 나오긴 했지만 마킹을 잘못하거나 그러진 않은 것 같다. 최종 11242. 써놓으니 11132보다 압도적으로 후져 보이는 것은 4때문이겠지. 4가 뭐냐 싶다가도 국어와 수학에서 틀린 개수의 합만큼 물리에서 틀렸으니 4 뜨면 근본이지 싶고 그렇다. 3이었으면 질척거렸을 수도. 그러나 4라니 물리여 사요나라. 나는 내년쯤 생명과 함께 대학을 갈 테니 우리는 이제 필수과목 따위의 고지식한 얼굴을 하고서 캠퍼스에서나 다시 만나자.

 

국어 수학은 초음파 사진에서 보던 예쁜 모습 그대로 건강하게 출생해줬다.

 

 

 

3

 

정부는 오늘부터 킬러 문제이토 히로부미입니다 하며 척살령을 내렸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애초에 알고 있던 인강 강사들은 그냥 킬러 문제볼드모트쯤으로 취급하는 식의 대응 전략을 취했다. 이름은 부를 수 없지만 있기는 분명히 있는. 결과적으로 누가 옳았는가


어쨌든 나는 수능을 다 보고 성적표까지 받아먹은 이 시점에도 아직 정부가 말하는 킬러가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킬러를 지목하고 사냥한 이유가 그냥 기분 나쁘고 싫어서인 게 아니라면, 그들의 목적이 대입 판에서 사교육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공교육의 효용을 높이는 것이었다면, 킬러의 정의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와 무관하게 그들은 100% 실패했기 때문이다. syo는 결국 내년에 또 수능을 볼 텐데, 앞으로 구할 수 있는 모든 사교육 자료를 전부 구해서 한없이 무한에 가깝게 풀고 시험장에 들어갈 생각이다. 아마 모든 수험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사교육 시장은 당연히 캐치하고 있고, 목동과 대치동의 학원가는 유례없이 이른 시기에 개강을 했다고 한다. 성적표는 오늘 나왔지만, 2025학년도 수능 레이스는 지난주나 지지난 주쯤 시작된 모양이다.

 

 

 

4

 

성적이 발표되기 얼마 전 어떤 입시전문가의 글을 우연히 읽었다. 이런저런 표본을 통해 그가 내린 입결의 앞꼭지는 순서대로 <1.2.3.4.5.6.서울대>였다. 너무 새삼스러워서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는 결과였다. 세상은 그렇게 생겼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만 저명한 어느 지방 대학교의 약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서울대를 가는 것보다 더 높은 점수가 필요하다. 메디컬 혹은 의치한약수라고 불리는 저 부동의 탑티어 학과의 TO는 현재 3,000여 석의 의대 정원을 포함 약 6,000자리 정도에 불과한데 올 수능에 505천 명이 접수하여 445천 명의 수험생이 수능에 응시했으니, 상위 1.3%만이 저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셈. 심지어 6,000자리 중 과반은 수시 모집으로 채워지니, syo처럼 오직 수능만으로 대학을 가려는 이에게 펼쳐진 길이란, , 이걸 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실이라고 부르는 게 맞잖냐 싶을 정도로 가늘고 미세할 따름이다.

 

 

 

5

 

국어 수학은 역대급으로 어려웠다는 평이다. 특히 킬러 논란이 있는 수학 22번 문제는 정답률이 1.4%라고 하는데, 응시자 대비 메디컬 TO가 거진 그 정도라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결국, 시험이 어려워도 푸는 놈들은 푼다. 100점이 다 100점이 아니다. 100점 만점짜리 시험이라 어쩔 수 없이 100점이지, 어떤 애들이 100점짜리 100점인 와중에도 또 어떤 애들은 120점짜리 100점이다. 이 시험이 그런 것 같다. 시험장에 100을 가지고 들어가기 위해 120을 만드는데, 만들어야 할 점수가 100을 넘기는 시점부터 시간과 자본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그런 시험. 시험장에서 92를 받았다는 것은 그래도 100을 넘게 만들어서 들어갔다는 뜻이다. syo는 이미, 이 찐득찐득한 진창에 깊이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6

 

국어 수학이 어렵고 과학이 쉬운 시험에서 국어 수학을 잘 보고 과학을 못 보는 사람이라서 내가 좋다고 말해주는 여자친구가 좋다. 30대 중반까지 백수로 지내다가 덜컥 공무원이 되더니, 그것도 채 1년을 못 채우고 뛰쳐나와서는, 탱자탱자 놀기나 할 것이지 나이 마흔 다 돼서 수능 보고 대학생 되겠다고 설치는 이 별종을, 별종이라좋은 게 아니라 별종이라좋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어서 사랑할 만하고도 남음이 있다. syo는 앞으로도 계속 별종일 셈이어서 그렇다


나는 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만큼이나 하기 싫은 일을 그만두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그러니까 지 멋대로 지 ㅈ대로 사는 개차반이기 때문에-, 내가 평범함과 무난함에 맞추는 게 아니라 평범함과 무난함이 우연히 내게 맞췄을 때에나 순간적으로 평범하고 무난해질 수 있었고, 대체로 그 만남은 스쳐감으로 끝났으므로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나는 별종의 위치에 돌아와 있곤 했다. 자발적으로 궤도를 이탈한 어느 시점부터 나는 딱히 별나게 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별난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 별나게 굴어도 쟨 원래 저렇잖아- 하며 오히려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별난 사람의 별나지 않은 친구들이 주변에 잔뜩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별나도 사랑해주는 사람들 가운데 별나서 사랑해주는 별난 사람이 나타나고 만 것이다.

 

별난 사람이 별난 사람의 손을 잡고 걸으면 별 거 아닌 골목길이 특별난 길이 되어 끝없이 이어진다. 끝없이 끝없이 걸어도 걸어낼 것만 같다. 끝없다는 게, 당연하고 별 거 아닌 일 같다.

 




  그 나무

 

  한 해의 꽃잎을 며칠 만에 활짝 피웠다 지운

  벚꽃 가로 따라가다가

  미처 제 꽃 한 송이도 펼쳐 들지 못하고 멈칫거리는

  늦된 그 나무 발견했지요.

  들킨 게 부끄러운지그 나무

  시멘트 개울 한구석으로 비틀린 부리 감춰놓고

  앞줄 아름드리 그늘 속에 반쯤 숨어 있었지요.

  봄은 그 나무에게만 더디고 더뎌서

  꽃철 이미 지난 줄도 모르는지,

  그래도 여느 꽃나무와 다름없이

  가지 가득 매달고 있는 멍울 어딘가 안쓰러웠지요.

  늦된 나무가 비로소 밝혀 드는 꽃불 성화,

  환하게 타오를 것이므로 나도 이미 길이 끝난 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한참이나 거기 멈춰 서 있었지요.

  산에서 내려 두 달거리나 제자릴 찾지 못해

  헤매고 다녔던 저 난만한 봄길 어디,

  늦깎이 깨달음 함께 얻으려고 한나절

  나도 병든 그 나무 곁에서 서성거렸지요.

  이 봄 가기 전 저 나무도 푸릇한 잎새 매달까요?

  무거운 청록으로 여름도 지치고 말면

  불타는 소신공양 틈새 가난한 소지(燒紙),

  저 나무도 가지가지마다 지펴 올릴 수 있을까요?

김명인, <그 나무전문 

 

 

--- 읽는 ---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 이수영

에이스 / 앤절라 첸

가면들의 병기창 / 문광훈

 

 

 

--- 읽은 ---


2. 다정소감

김혼비 지음 / 안온북스 / 2021

 

나는 조금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다정함이란 들여다보는 눈에서 싹터 마주보는 눈으로 번져가는 꽃불 같은 것이라, 모든 다정은 시간을 들여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일로부터 시작하게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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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12-08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나 며칠 전에 저 시 기출문제 풀었다... 생명체라면 역시 생명과학이죠!!!! 25학번 syo님과 나새끼를 응원합니다. ㅋㅋㅋㅋㅋㅋ이오 그거 목성의 위성 아닌가? 아득하지만 활활 불타고 있다니까! ㅋㅋㅋ

syo 2023-12-10 13:28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ㅎ 25라니! 우와 학번이 스무개나 튀었어요! ㅋㅋㅋㅋㅋ 서글프고 신명난다....

반유행열반인 2023-12-10 14:54   좋아요 1 | URL
저는 스물 두 개…25학번 안 되면 26학년도 수능 감독관 위촉 예정…서럽고 이명난다…

새파랑 2023-12-08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1242면 엄청 잘본거 아닌가요? 내년에는 11111 이시길 응원합니다~!!

그런데 저 순서는 국영수사과 인가요? ㅡㅡ

syo 2023-12-10 13:2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ㅎㅎㅎㅎ 11111쩌네요 되면 성적표 인증해서 겁나 잘난척해야지

반유행열반인 2023-12-09 07: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국수영과과(물리지학) 순서예요 ㅋㅋㅋㅋ

2023-12-09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0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2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23-12-23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토비님!!! 이제 알라딘 떠났나 해서 서운했는데 아니군요!!!! 저도 넘 뜸하게 와서리~~~.^^;;;
어쨌든 토비님의 학업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다정한 분이 옆에 계시다니 넘 좋네요!!!!^^

고양이라디오 2024-10-04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올해 수능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컨디션 관리 잘하시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시길 기원합니다. 수능날 좋은 컨디션과 행운이 함께 하시길.

2024-11-15 0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1-17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