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라도

 

 

1

 

재미는 없지만 군대가 인간에게 생각할 거리와 시간을 제공한다는 명제는 참이다.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의 양대 산맥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저 새낀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겠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질문에서 총천연색의 탐구주제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그 가운데는 진심 인간의 실존을 건드리는 치명적인 질문들도 많은데,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내 용무는 무엇인가이다.

 

syo의 부대에는 이런 풍습이 있었다. 예를 들어 포대장실(syo는 포병이었다)에 들어간다 치면, 노크 두 번 하고 문을 연 즉시 포대장이 있을 법한 위치를 향해 경례를 올려붙인다. 그리고 이런 정해진 멘트를 친다. “필승, 병장 XXX 포대장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용무는 OOO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메워야 할 빈 칸은 두 군데이다. 그 중 하나는 20년 넘게 부르고 불려온 내 이름이라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두 번째 빈칸은 만만치가 않다.

 

가령, 포대장이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고 치자. 그렇다면 용무는 호출입니다- 인가? 아니지. 호출은 포대장이 한 거잖아. 그럼 용무는 응답입니다- 인가? 용무가 응답인거 너무 웃기잖아. 그렇다면 용무는 포대장님이 찾으셔서입니다- 인가? 아니지, 포대장이 찾은 건 포대장의 용무지 내 용무는 아니잖아. 뭐지, 내 용무는 도대체 뭐지……. 이런 고민은 주체와 타자, 호명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찰이라 하겠다.

 

혹은 이럴 수도 있다. 병장 김땡땡이 PX에서 일병 이땡땡이 먹고 있던 냉동만두 몇 조각을 집어먹는 장면을 상병 박땡땡이 목격했다. 평소 불의를 보면 늘상 참아왔지만 어쩐지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던 박땡땡은 지금 행정보급관에게 일러바치려고 행정반 문고리를 쥐고 있다. , 뭐라고 해야 할까. 필승, 상병 박땡땡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용무는…… 고발입니까? 냉동만두 몇 조각에 고발은 너무 무거운 단어가 아닐까? 그렇다면 용무는 고자질입니까? 고자질은 어쩐지 부정적인 느낌인데 박 상병은 지금 일생에 더없이 정의로운 상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용무는…… 신고? 아니야, 아니야, 얘도 아니야. 그렇담…… 고소? 고백? 리뷰? 100자평? 으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이이이런날씨바라때려치고말지자기의일은스스로하자이일병아…… 같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래가지고 부대에는 정의가 바로 서는 날이 도통 오질 않고 후임병의 냉동만두는 애꿎은 병장의 뱃속에 축적될 뿐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고뇌와 고통, 어휘를 둘러싼 치밀한 고찰과 성찰의 긴 터널을 뚫고 마침내 행정반에 들어가서 찰진 멘트를 구사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야말로 이 출입시스템의 가장 큰 허점이라 할 수 있다.


 syo : 필승, 일병 syo 포대장실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용무는 휴가 복귀 신고입니다

 포대장 : , 너 누구야.

 syo : 일병 s! y! o! 

 포대장 : 너 왜 왔어.

 syo : 휴가 다녀왔습니다.

 포대장 : 그래? 그럼 인마 신고를 해야지.

 syo : ……(그러니까 인마. 귓구멍이 막혔냐 생각이 없냐 내가 여길 뭐하러 왔겠냐 확 그냥 국방부에 신고한다) 신고합니다. 일병 syo…….

 

 

 

2

 

갑자기 저 이야기가 생각난 이유를 안다. 군대 꿈을 꿨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syo는 사격에 굉장히 능하여 열아홉 발을 쏘아 열아홉 발을 맞추는 명사수였다. 그래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다섯 번째 과녁이 넘어가는 순간,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사실을. 난 군대에서 그렇게 총을 쏘면서 스무 발 중 네 발을 넘겨 맞춰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확실히 꿈이었다. 꿈일 수밖에 없었다. 빼박이었다.

 

그렇다면 꿈인데 뭐 어때 하며 옆에서 재수 없게 생긴 수염을 달고 총을 쏘라 마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놈의 국방무늬 가랑이에 스무 번째 총알을 박아 보았다. 빵야!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는데 syo는 총 맞은 가랑이를 내려다보며 유유히 코를 파고 있었다. , 너 미쳤어? 왜 사람을 맞춰! 지금 이게 뭐 꿈인 줄 알아? 라고 진짜 꿈속의 등장인물이 말했다. syo는 계속 코를 파면서, 근데 진짜 코는 왜 팠지? 하여간 계속 코를 파면서 응, 지금 이게 뭐 꿈인 줄 알아.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걔가, 그러면! 꿈이면! 꿈이면 사람 가랑이에 총 쏴도 돼? 그렇게 돼 있어? 라며 도무지 물러서지 않고 따져 물었다. 그건 그랬다. syo는 어…… 하며 콧구멍에서 손가락을 뺄 수밖에 없었다. 기세를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그는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건 인격의 문제야! 이 사람을 보라고! 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좀 보란 말이야. 총 맞은 남자는 가랑이를 제 가랑이를 꽉 누른 채 바닥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랑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손을 대 지혈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syo는 슬슬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 일부러 거길 노린 거지? 이 모든 상황을 다 계산하고, 그렇지? 넌 정말 쓰레기로구나! , 이쯤에서 잠이 깨면 좋겠는데. 말을 해봐. 왜 대답이 없어. 니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치디? 눈을 떠, 현실의 syo야 눈을 번쩍 뜨라고……. , 이거 꿈이라고 그냥 도망치면 끝날 것 같지? 아냐, 니 인격은 이제 결딴났어. 그걸 니가 알았어. 넌 이제 망했어. 눈 떠! 제발 눈을 떠! 넌 도망칠 수 없어. 이미 구석에 몰렸어. 넌 끝이야. 넌 끝이야. 넌 끄 넌끄넌끄…….

 

눈을 떠보니 728분이었다. 멍청하게 천장이나 바라보며 있었는데 2분이 지났는지 알람이 울렸다. 서늘한 가을 아침이었다. 창 너머에서 넘실넘실 넘어 들어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노력해서 좋은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최소한 남의 가랑이에 총을 쏘는 인간은 되지 말자고. 꿈에서라도 말이다.

 

 


연민을 가장 중시하라슬픔을 질식시키지 말라슬픔을 소중히 간직하고 돌보아주어 슬픔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해질 수 있도록 하라깊이 애도하는 게 바로 새롭게 사는 일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나는 곧 시력을 회복하여 나의 주위가 캄캄한 데에 놀라지만그 어둠이 나의 눈에는 쾌적하고도 아늑하다아니나의 정신에어둠은 까닭 없는불가해한참으로 아련한 것처럼 되어서아마 더욱 쾌적하며 더욱 아늑한지도 모르는 일.

마르셀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읽은 -

+ 시경을 읽다 / 양자오 : 99 ~ 165

+ 이토록 쉬운 통계 & R / 임경덕 : 154 ~ 344

 

 

- 읽는 -

- 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191 ~ 300

- 경제학 연습 미시편 / 정병열 : ~ 85

- 파이썬 코딩 도장 / 남재윤 : ~ 206

- 철학의 신전 / 황광우 : 106 ~ 210

-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 101 ~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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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3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3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3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19-11-03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 얘기 중에 제일 재미난 syo님의 군대 얘기ㅎㅎㅎ
너무 한낮의 연애 얼마 전에 읽었는데!

syo 2019-11-03 08:44   좋아요 0 | URL
남의 군대 얘기는 원래 재미가 없잖아요.
그 중에 제일 재미나봤자....
못생긴 애들 중에 제일 잘생겨봤자죠 ㅎㅎㅎㅎ

단발머리 2019-11-03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취소예요. 300 뭐에요 ㅠㅠ
지금이 군대 이야기 쓸 시간이지, 진도 뺄 때에요?

syo 2019-11-03 08:45   좋아요 0 | URL
300까지 읽고 이만하면 내 할 몫을 다 했다는 생각에 주말에는 제2의 성을 봉인합니다 ㅋㅋㅋㅋㅋ
군대 이야기는 할 게 너무 많아.....
쓸 거 없을 때 곶감처럼 빼먹으려고 잔뜩 쌓아놨어....

단발머리 2019-11-03 08:52   좋아요 1 | URL
허어참... 우리 아는 사이끼리 이러지 맙시다! 군대 이야기 하나 추가!!!

비연 2019-11-03 13:57   좋아요 1 | URL
300 ㅠㅠㅠ
 

올가미

 

 

1

 

어영부영 11월이 되었다. 10월까지만 막 살고 11월부터는 열심히 살아줘야지- 하는 각오가 있었다. 각오야 언제나 있는 것이긴 한데, 그래도 11월은 중요하다. 11월도 망하잖아? 그러면 12월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각오는 하지 않게 된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2019년은 망했으니 2020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하게 되면서 12월 한 달이 붕 뜨는 것이다. 내가 syo를 안다. syo가 나를 안다.

 

11월에는 평소 꼭 지식을 쌓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자꾸자꾸 포기하며 나랑 잘 안 맞는다는 사실만 재차 삼차 확인해왔던 앙숙, <경제학> 분야와의 랑데부를 성사시켜보는 것이 일차적 목표다. 여기서의 경제학은 물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아니라 주류경제학을 말한다. 싫다고 모르면 몰라서 싫은 법이다. 공자님 가라사대 알아야 면장을 하는 법이니라. 그냥 독서로 끝낼 게 아니라, 아주 정석으로 수학공부 하듯 제대로 한 번 해보기로 하였다.

 

두 번째 목표는 저놈의 <2의 성>을 반드시 완독하고 말리라는 것 되겠다. 되게 어려운 책 아닌데 되게 안 읽어지는 신묘한 책이다. 이제는 자존심 싸움에 가까운 것 같다. 이번에 제대로 읽고, 책 박스 제일 하단 제일 깊고 어두운 곳으로 유배를 보낼 것이다. 옆 자리에 사르트르의 책을 함께 놓아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예우겠다.

 

세 번째로, 그리스 로마의 옛 고전들을 좀 읽어볼까 한다. 이제 뭐만 읽으면 플라톤 찾는다고 투덜대기도 지친다. 그 투덜을 모아서 책을 읽었으면 플라톤 코털을 뽑았겠다.

 

마지막으로, 월간 결산 그놈을 무덤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 돌아보면 그나마 이 보잘 것 없는 서재에서 걔만이 알라딘 월드에 한줌 보탬이 되는 애였던 것 같다.

 

 

2


 

할 말이 되게 많았고, 이번에 한 번 까보까 보부아르 한 번 까보까- 하는 불타는 마음 역시 준비되어 있었지만, 역시 격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기 마련이라, 비트주스 몇 잔 마셨더니 빨간 마음들이 빨갛게 배설되었다. 그리하여 말갛게 씻은 마음 고운 얼굴을 하고 그냥 한 대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자기의 자유에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주체는 사물(현상속에서 자기를 모색하게 된다이것은 자기도피의 한 방법으로 매우 근본적인 경향이다어린아이는 젖을 떼고 '전체'에서 떨어져 나오면곧 거울 속이나 부모의 시선 속에서 자기의 소외된 실존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원시인들은 마나(초자연적인 힘)나 토템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문명인은 개인의 마음속이나자아와 명성소유와 작품 속에 자기를 소외시킨다이것은 진실하지 못한 삶의 최초의 유혹이다페니스는 사내아이에게 '분신'의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페니스는 그에게 자기 자신인 동시에 다른 객체이다그것은 장난감이고인형이며또 자기 자신의 육체이다 부모와 유모는 그것을 마치 작은 인격처럼 다룬다이로써 우리는 페니스가 어린아이에게 '그 개인보다 보통 더 교활하고 현명하고 영리한 제 2의 자아'가 되는 까닭을 알 수 있다비뇨 기능과 그 뒤 나타나는 발기가 의지의 행위와 자연적 작용의 중간에 있다는 사실에서즉 페니스가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쾌락의 원천이자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변덕스런 존재라는 사실에서페니스는 주체에 의해 자기 자신이면서도 자신 이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페니스 속에는 종()으로서의 초월이 쉽게 손에 잡히는 형태로 구현되어 있으며그것은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페니스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는 거기에서 넘치는 생명력을 자기 개성에 통합시킬 수 있다그러므로 페니스의 길이와 오줌의 분출력발기와 사정 능력이 남자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 이해된다. (77-78)

 

아는 사람들에게는 물색없는 오지랖이 될 수 있겠으나, 우선 이야기하고 지나가고 싶은 부분은 소외라는 용어의 사용법이다. 철학에서는 소외를 일상생활의 어법에 비해 조금 더 폭넓은 방식으로 쓴다. 그 단어 안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긍정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자기 안에 자기의 부정이 있고 그 부정을 부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존재자의 성질이라고 보는 헤겔에게, 소외란 존재자가 더 풍부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까 일단 자기를 타자화하고 타자화된 자기를 지양하며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인데, 소외란 그 타자화를 의미하는 셈이다. 심지어 헤겔은 정신이라는 게 있어서 그 놈이 자신을 소외시킨 것이 자연이라고 보는 듯하다.  소외라는 단어는 쟤들이 나를 따돌려 엉엉 이라는 식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바깥으로 꺼내어 구현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 셈이다. 보부아르가 위의 문단에서 사용한 소외 역시 그런 맥락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실존철학은 주체가 늘 초월하기를 압박하는데, 주체는 타자와의 결투 속에서만 초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페니스를 소외시킨다는 것은, 그것을 초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상대자, 스파링 파트너, 페이스메이커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 같다. 내 페니스가 나를 왕따시켜 엉엉, 이게 아니라. 물론 얘가 내 말을 안 들어- 정도의 일상적인 소외도 겪긴 하겠지만.


마지막 문장은 놀랍게도(혹은 하나도 놀랍지 않게도) 사실이다. 대학병원 비뇨기과에 앉아서 둘러보고 있자면, 중장년 남성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죽을상이다. 딸뻘은 되어 보이는 간호사를 붙잡고, 선생님 선생님 약물로는 안 되나요, 꼭 전립선에 칼을 대야 하나요, 사정사정 하는 어느 환자를 보았고, 그 환자를 심각하고 애달프고 감수성 넘치는 얼굴로 바라보는 대기실 모든 남성 환자들의 일치된 표정을 보았다. 그런 마음들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들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고, 남자인 syo도 역시 그런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이 대체 어떻게 왜 생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증을 품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라는 뜻인데…….

 

이런 대화가 있었다. 새내기 때였다. 룸메이트가 자기 과 동기 하나를 집으로 불러서 같이 보쌈을 먹자고 제안하기에 그러자고 했더니 착한 고릴라처럼 생긴 녀석이 보쌈 봉지를 들고 방문했다. 안녕, 니가 syo구나. 나는 덕이라고 해. 대단한 놈이었다. 나와 미스터(룸메)는 중-고등-'재수'-대학 동창인데, 그 말인즉슨 나와 미스터는 덕보다 한 살이 많다는 뜻이다. 내 동기들은 나한테는 반말을 했지만 나를 찾으려고 우리 하숙방 문을 두드리다 미스터와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syo 룸메 형이시죠? syo 있나요? 라고 했다. 근데 덕놈은 족보의 두 페이지를 밥풀로 붙여서 한 페이지로 만드는 데 망설임이 없는 그야말로 대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두 번째 보쌈파티에서,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무슨 복음 말씀 전하듯 덕이 말했다. 정확히 이랬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 못생기고 가난해도 남자가 떡을 졸라 잘 치잖아? 그럼 여자가 도망을 못 간다카데. 거기 앉아 중짜 보쌈을 씹어 삼키고 있는 인간들이란, 연애라 해도 될 만한 경험은 전무한 2(syo, )에다가 뭐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사그라진 쓰라린 사랑의 아픔 1회가 연애사의 풀 스토리인 1, 이렇게 세 명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마치 뭐라도 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하면서 상추쌈을 싸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자 3명이 살며 잡아 본 여인의 손을 다 더해봤자 3개가 안 되는 준연애고자 집단에서, 그러니까 저 주제에 관해 당사자 일방인 여자의 견해를 들은 적도 들을 일도 없는 것들이, 남자의 진짜 가치는 성적 역량에 있다는, 정확히 말해 성적 역량이 나머지 모든 역량의 공백을 압도하는 진짜배기 가치라는 밑도 끝도 없고 근거도 없으며 심지어 재미조차 없는 주장을 너무도 당연한 진리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도대체 그들이 살아온 20년의 인생은 그들에게 뭘 품게 하였던 것인가.

 

위의 문단은 이런 관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실존철학의 대답이었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흥미롭고 설득력도 있다. 돌아보는 지침으로 삼을 만한 지점이다.

 

 

 

3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할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그날도 필용이 자기 이야기에 도취해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양희가 선배나 선배 사랑하는데했다양희는 그 말을 감정의 고저 없이천원이천원을 쥐어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던 톤으로 했다필용은 당황해서 어어하고는 웃어버렸다.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떻게요?"

  양희가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거지."

 "그런 걸 뭣하러 생각해요."

 

 ()

 

  필용은 그 짧은 순간에 양희와 하게 될지도 모를 섹스에 대해서까지 상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온몬이 축축 처지는 기분이었다그래도 이상하게 웃음은 났다.

 "아니…… 네가 날 사랑한댔잖아킬킬킬킬…… 그 고백을 들은 거잖아지금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앞으로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모르죠그건알 수도 없고알 필요도 없고."

 "알 필요가 없다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필용은 황당했다얘가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며?"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

 "사랑하는 건 맞잖아그렇잖아."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

 

 "오늘은 어때?"

  필용은 한 시간쯤 지나 그렇게 묻고 말았다묻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는 선배가 극을 올려요."

 "아니그것 말고."

 "별일 없는데."

 "아니그러니까 네가 어제 말한 그것 말이야오늘도 지속되고 있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나서 필용은 자신이 긴장하는 걸 느꼈다왜 긴장하나필용은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렇죠오늘도."

  양희는 어제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듣자 필용은 실제로 탁자가 흔들릴 만큼 몸을 떨었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불가해한 기쁨이었다.


저주가 강렬한 감정에서 발원하는 마법적 힘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이 가장 강력한 저주의 주문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결코 그 말을 듣기 전과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그 사랑을 깔보고 어딜 감히 니가 언감생심 나를 사랑하느냐며 화를 낼 수 있다.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너를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거나 나는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해야 할 도 있다. 혹은 어떤 대답을 해야 어색하지 않게 이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친구로라도 지내고 싶은데, 이렇게 버리긴 아까운 사람인데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기다렸다는 듯 나도 널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을 돌려주며 환희를 느낄 수도 있다. 어두운 방에 마법진을 그려놓고 그 위에서 짚으로 만든 인형에 못질을 해대도 그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절대로 무시되지 않는 말이다.

 

많이 사랑하거나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 그러나 사랑은 생김생김이 다 달라서,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지 어떻게 되는지를 뭣하러 생각하냐는 식으로 생긴 사랑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웬만해선 약자가 되지 않는다. 공은 넘어갔다. 어제의 사랑과 오늘의 사랑이 그물이 되었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희한한 그물이다. 그 그물에 필용은 포획되었다. 이제 기어코, 필용은 양희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심한 사랑 고백의 저 막강하고도 발랄한 공격력을 좀 보라지.

 

잘 봐뒀다 써먹을 일이 있을까?

 

 

 

--- 읽은 ---

+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 박병철 : 152 ~ 270

+ 환율 지식 7일 만에 끝내기 / 박유연 : ~ 266

+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 김기찬 외 : 139 ~ 264

 

 

--- 읽는 ---

- 2의 성 / 시몬 드 보부아르 : 90 ~ 191

-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 ~ 101

- 철학의 신전 / 황광우 : ~ 106

- 시경을 읽다 / 양자오 : ~ 99

- 이토록 쉬운 통계 & R / 임경덕 :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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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01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 관련글 재밌어요. 히히.

syo 2019-11-01 15: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멍청함이란 재미있는 우화의 필수요소지요. 히히히.

다락방 2019-11-01 15:19   좋아요 0 | URL
11월까지 제2의성 완독하는 사람.. 없을 것 같죠?

syo 2019-11-01 15:32   좋아요 0 | URL
있을 것 같은데요?? s....

다락방 2019-11-01 15:33   좋아요 0 | URL
에이...무슨 말이에요.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분은 아니야.... 그 분 하위권 타입이야..... =3=3=3=3=3

syo 2019-11-01 15:37   좋아요 0 | URL
아이쿠...
s다락방님은 역시 안 되나보다....

다락방 2019-11-01 15:38   좋아요 1 | URL
s다락방은 또 뭐람? 시스터다락방 뭐 이런건가?
제 생각엔 1등은 해본 사람만 하는 것 같아요.
(냅다 튄다)

cyrus 2019-11-01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 참 빨리 가죠? 두 달 지나면 ‘원더키디’의 해네요... ㅎㅎㅎㅎ

syo 2019-11-01 20:1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미쳤어요..... 내 나이 미쳤어....

2019-11-01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9-11-0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성부분 글이 웃기네요ㅋㅋㅋㅋㅋ

syo 2019-11-01 22:51   좋아요 0 | URL
웃긴 놈들이었으니까요 ㅎㅎㅎ

Angela 2019-11-0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공감합니다. 오늘은 사랑, 내일은 아무도 모르죠^^

syo 2019-11-02 20:58   좋아요 0 | URL
원론적으로 공감은 하지만 최소한 내일의, 아니 일주일의 사랑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하면 좋겠습니다. 저건 너무 힘들죠.....
 

 

입을 다물면 작아지는 사람

 

 

흐린 밤에 우주를 올려다보는 일처럼, 세계엔 어떤 명징한 일들이 잔뜩 있지만 단지 눈이 흐려 찾을 수 없거나 언어가 궁핍하여 드러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 공대생이 있었다. 그는 눈에 맞는 안경을 만들겠다며 도서관을 들쑤셨고, 생각과 말 사이에 드리운 검은 장막을 저미어보겠다며 키보드의 날을 날카롭게 고쳐 세웠다.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다. 사물은 사물로서 존재하고 사람은 사물을 발굴하는 자로서 존재하는 거라 여겼으니, 공대생은 유물론적 관념론자 비슷한 존재였다. 존재 자체가 모순이었다.

 

진실은 언제나 한끝, 일말이었고, 세계의 동력은 모순이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지구의 중력 때문이고 달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 역시 지구의 중력 때문이다. 진실의 배후에 모순이 있었고 모순의 배후에 진실이 있었다. 밤새 걸었다고 생각한 술주정뱅이가 아침에 출발지점 근처에서 깨어나 사방에 랜덤으로 찍혀 있는 자신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아연하는 것처럼, 탐구의 길이라 생각하며 소비했던 짧은 맹목의 시간들은 지나고 나서 보니 참 같잖은 것이었다. 의미가 없어서 부러 의미를 부여해야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뭐 하나는 건졌잖소 스스로를 속여야만 좌절을 회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아침에 다시 보건대, 사람의 일이라 생각했던 것들은 대체로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사물은 단 하나도 사물로서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사태로서, 견해로서 존재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자신의 무모순성을 주장하는데 모든 모순이 바로 거기서 등장했다. 모순은 존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에 존재했다. 존재와 존재의 사이가 모순으로 그득했다. 그 모순의 밀도가 너무도 농밀하여 도리어 존재가 텅 비어보이기까지 했다. 이런 세계에서 도수 높은 안경과 날카로운 키보드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눈을 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안경이 아니라 공양미 삼백 석과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얼마만큼을 포기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에 대해 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채기 하나 없는 무색무취의 정신이 두들기는 키보드가 아니라 베이고 찔린 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신음이나 비명의 기록이었다. 방에 들어앉아 책 읽는 이의 환율은 얼마나 평가절상 되어있는지. 목소리를 낮추자 그것만으로 즉시 나는 작아졌다. 지나치게 질소포장 된 과자봉지처럼 나의 존재는 예상보다 작았고, 나는 존재가 아니라 목소리였다. 허공에 흩어지고 들리기 무섭게 잊히는 그 약한 목소리보다 약한 존재라니.

 

이 아침 역시 또 한 겹의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꿈의 꿈 밖에서 무언가 불러 깨우기까지 이 꿈 속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찾고 해석할지 전전긍긍한다.

 

입을 다물면 더 커지는 사람, 움직임으로 세계를 노 젓고 지나가는 그런 사람은 어떻게 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전 세입자들이 붙여놓은 무수한 별 무더기였다이사 오자마자 그 별을 떼어내려 무척 노력했지만 대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것은 손에 닿지 않았고희망처럼 쓸데없이 접착력만 좋았다천장에 늘 별이 있어 보고 싶지 않아도 봐야 했다보지 않을 수 없다면 봐버리자 생각하며 나는 꼼짝 않고 누워 야광별을 응시했다그러면 이상하게 거기 있는 별들의 수만큼 많은 이들이 곳을 지나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꼭 나만 한 크기의 몸을 뉘었을 허약한 자취생과 가진 것 없이 서둘러 몸을 섞었을 젊은 부부월급과 적금어디론가 송금할 돈의 액수를 헤아리며 이마에 손을 얹고 피곤한 표정을 지었을 젊은이들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가진 많은 이들이.

김애란잊기 좋은 이름


물결이 잠시 잠잠해지더니 파도가 다시 그들을 뒤덮었다케빈은 그녀를 세게 끌어당겼고 패티는 그 가느다란 팔로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

  물이 다시 차오르고두 사람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둘이 다시 물속에 가라앉았을 때 그의 다리에 뭔가가 걸렸다오래된 파이프였고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번 파도가 다시 몰려올 때 두 사람은 모두 머리를 한껏 높이 쳐들고 한번 더 크게 숨을 쉬었다키터리지 선생님이 위에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도와줄 사람이 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패티가 떠내려가지 않게만 하면 되었다소용돌이치며 두 사람을 집어삼키는 바닷물 속에 다시 잠겼을 때 그는 패티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녀의 팔을 꼭 붙잡았다널 놓지 않을게파도가 칠 때마다 햇살이 반짝이는 짠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케빈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그 옛날 여왕처럼 줄넘기를 하던 소녀지금은 바다에 빠진 젖은 머리의 여인이 두 사람의 구조만을 바라며 바다의 힘만큼이나 격렬하게 그를 붙잡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미친이 우스운알 수 없는 세상이여보라그녀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그녀가 얼마나 붙잡고 싶어하는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밀물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으스스 몸이 시릴 때아니 내 삶이 내 삶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때그것이 또한 오로지 남의 탓이 아닐 때 등을 돌리고 서면 거기 안서호의 황혼녘에 오리들이 몇 유쾌한 직선을 그으며 나아가고 있었나니나 425호 남의 연구실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대고 그것들의 한없이 자유로운 유영을 지켜보곤 하였으나 내가 저 오리가 되기엔 너무 늙었거나 조금 일렀으며생은 어디에 기댈 데도 없이 저처럼 뭉툭한 머리를 내밀고 또 물밑에선 죽어라고 갈퀴질을 해대며 쌩까라고 저 홀로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는데그때쯤이면 해가 풍덩 가라앉은 저녁 안서호의 따스한 물결이 내 가슴 통증께로 조금씩 밀려오곤 해 나는 서둘러 텅 빈 가방을 챙겨 의대에서 오는 여섯시 막차 퇴근버스를 타러 언덕길을 총총히 내려가곤 했다.

이시영, <저녁의 몽상전문

 

 

 

--- 읽은 ---

+ 돈이란 무엇인가 / 에릭 로너건 : 74 ~ 214

+ 개념과 논쟁으로 배우는 통계학 / 심규박 외 : 311 ~ 501

+ 지그문트 프로이트 콤플렉스 / 파멜라 투르슈웰 : 119 ~ 287

 

 

--- 읽는 ---

- 왜 칸트인가 / 김상환 : 153 ~ 227

- 2의 성 1 / 시몬 드 보부아르 : 34 ~ 90

-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 김기찬 외 : ~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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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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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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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29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물의 저 부분은 저도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

syo 2019-10-29 11:25   좋아요 0 | URL
<밀물>하면 역시 저 부분이죠.

저 부분은 표현이나 의미도 좋지만, 형식상으로도 영화나 음악, 그림 같은 다른 매체로 깔끔하게 컨버젼하기 어려운, 소설의 특색을 잘 드러내잖아요.

너무 좋아요.
 

 

 

 

1

 

우리는 저마다 누군가의 편이다. 아닌 척 할 수는 있어도 아닐 수는 없다. 모두를 위로할 순 있어도 결국 곁에 가서 함께 서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나를 둘로 쪼개 두 어깨를 다 결을 순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선명하고 벌써 명백하다. 그냥 그 위에 이런저런 덧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보존의 기술이고 동시에 사회보존의 기술이다. 꼭 필요한 아름다운 셈법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법은 아니다.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다른 장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발을 떼면, 반드시 그 발은 어느 한 군데로 디뎌지게 되어 있다. 그때는 망설여서는 안 된다. 망설일 이유가 없고 망설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명백하고 벌써 선명하다. 충분하다.

 

 

 

2

 

가장자리부터 말라가는 것이 아니다. 말라가는 곳부터 가장자리다.

 

 

 

3

 

그 곁에 서고 싶다.

 

 

 

계속 살아가기로 했으니까요세상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살기를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저는 다른 사랑을 발명했어요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사람이 적어요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적어요혐오를 사랑할 수는 없어요혐오하는 사람들한테 우린소음이나 먼지나 비닐 같은 것밖에 안 되겠죠.

윤이형님프들


새 길을 여는 시도는 항상 어떤 다른 길은 닫거나 잊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그리고 어떤 해결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항상 현실을 단순하게 만들 위험 또한 안고 있다그래서 분석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사유의 폭을 넓힘으로써 현실의 좁은 돌파점을 찾는 일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돌파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세상은 꽉 짜여 있는지를 세밀히 살펴야 한다그리고 그것을 서로 겹처진 시간의 리듬 속에서 다시 쌓아보고거기서 균열의 틈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백승욱생각하는 마르크스 

 

이런 잡문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순간의 열기로 휘갈겨 쓴 글들이 잠깐 동안은 그럴 듯하게 보일지 모른다하지만 내일이 되면아니 오늘밤에 벌써 상하고밍밍하고낡아 보인다그리고 항상 버려지고 마는 불에 익힌 붉은 대하 껍질과는 달리그 껍데기가 길을 가는 당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니체는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피로 쓰고 피로 말한 것을 책장을 넘기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책장이나 들춰보고 화면이나 스크롤하는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에게 하는 말이다진리에 베인 적도 없으면서 진리란 날카로운 것이라고 폼 잡으며 말하는 사름들문구용 칼에 베여본 아이도 그것을 기억할 때는 얼굴을 찡그리는데우리 중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아무런 통증도 없이 말해왔다.

고병권묵묵

 

 

--- 읽은 ---

+ 작심 3일 파이썬 / 황덕창 : ~ 259

+ 서서비행 / 금정연 : 258 ~ 394

+ 타자와 욕망 / 문성원 : 77 ~ 168

+ 작은마음동호회 / 윤이형 : 233 ~ 354

 

 

--- 읽는 ---

- 생각하는 마르크스 / 백승욱 : ~ 107

- 왜 칸트인가 / 김상황 : ~ 153

-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 노명식 : ~ 56

- 돈이란 무엇인가 / 에릭 로너건 : ~ 74

- 개념과 논쟁으로 배우는 통계학 / 심규박 외 : 169 ~ 311

- 지그문트 프로이트 콤플렉스 / 파멜라 투르슈웰 : ~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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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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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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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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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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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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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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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9 10: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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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늘 작은 마음이 있어

 

 

1

 

왜 책을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그런 질문도 어지간할 때 받는 건가 보다. 요즘도 책 많이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요즘도 책 많이 읽지? 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해주면, 몇 권쯤 읽느냐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그냥 굉장히 배부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우린 한 권도 안 읽지만 너라도 읽어서 우리 그룹의 평균 독서량은 언제나 든든하구나야- 하는 표정 같다. 좋은 책 좀 추천해달라고 이젠 아무도 물어오지 않는다. 장르나 주제를 정하지 않은 채 포괄적으로 던지는 책 요청은 상당히 귀찮고, 번거롭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공짜로 해주기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아예 저런 질문을 원천봉쇄하는 쪽이 현명하다. , 최근에 벤야민하고 아도르노 1928년부터 40년까지 주고받은 서간들을 모아 놓은 책이 한 권 나왔어. 나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꽤 흥미로울 것 같지 않아? 꽤 흥미로울 것 같지 않은 표정들이었다. 이야기는 재빨리 주택청약 가점과 관련된 주제로 전환되었다. syo는 유유히 커피를 마시며 속웃음을 지었다. 그게 지난 8월이었다. 석 달 가까이 되어 다시 만난 친구들은 더는 책 추천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차피 뭘 불러줘도 너희는 읽지 않을 것이고, 뭘 불러줘도 그 이상을 나는 읽을 것이다.

 

꽤 오랫동안, 이렇게 얄팍한 방식으로 자존심을 세워가며 친구들을 만나 왔다. 나도 뭐 하나 남다른 구석이 있어. 자본이 그것에다 가격은 매겨주지 않지만, 헛살지 않았음을 증명할 뭔가를 나도 하나쯤 쥐고 있어.

 

생각해보면 참 좋은 애들이다. 어차피 진짜로 책에 관심이 있어서 저렇게 물어오는 게 아니라 그저 가진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나 기죽지 말라고, 어깨 펴라고, 당당하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잘난 척 한 번 시원하게 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안다. 내 친구들은 이렇게 어른이다. 나만 얼른 어른이 되면 된다.

 

 

나의 일기장이 사랑의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내가 사랑하는 것들나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세계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일기에 적고 싶다나의 열망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여름과 가을을 향해 가지만아직은 따뜻한 태양과 봄기운 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새싹과 같다비록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나 나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여물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그러나 느끼고만 있을 뿐 그 정체를 알 수는 없다단지 땅이 기름지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지금이 나에게는 파종기다이제 싹을 틔어도 좋을만큼 충분히 오래 땅속에 묻혀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소로의 일기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대체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걷는지가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다만 길의 끝에서 나부끼는 깃발종착지에 대한 거창한 소문들이 지금의 걸음걸이를 얼마나 망쳐 놓았는지 알 것 같다급작스레 찾아온 노안처럼 먼 데를 보다가 정작 가까운 곳이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먼 데 소문에 귀를 기울이느라 옆에서 소매를 붙들고 말 건네는 존재가 있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병권묵묵

 

 

 

 

2

 

사랑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사랑이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진실을 말하여 준다. 그러나 그 진실을 궁금해 하는 것이 오직 나뿐일 때, 터진 사랑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건 빠를수록 좋다. 사랑의 말은 파괴의 말이다. 어쨌든 사랑이 말을 시작하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의 관계는 한 번은 반드시 부서진다. 내 사랑이 말로 당신을 겨냥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지금의 우리와는 다르게 된다. 우주의 에너지는 반드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관계는 머지않아 반드시 이것 혹은 저것이 되고 만다. 사랑의 주인이 젊고 노련하지 못할수록 사랑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의 일을 사랑에게 내맡기는 것은 대개 실패 쪽으로 길을 잡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묶어 말이라고 하자. 말과 말을 둘러싼 정탐, 실험, 정교한 예측이 필요하다. 말과 사랑의 변증법이 이렇다. 사랑 없는 말은 빈약하거나 사기다. 말 없는 사랑은 섣부르거나 위험하다. 사랑 없는 말은 해선 안 되는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말 없는 사랑은 하면 안 될 때 멍청한 말을 하게 만든다. 어느 쪽이나 실패다. 단지 유예되는지 즉시 도착하는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사랑이 할 말이 없을 때, 말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싶을 때, 말로 하여금 사랑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문정희미친 약속〉 부분 

 

 

3



자꾸만 실수를 한다자꾸만 잊어버린다재윤이 정확히 어떤 곳에 있는지를너는 저쪽이니까너를 응원한다고 애써 선의로 건넨 것이앞질러버린다잘못 짚어서오히려 건드려버리고 만다재윤은 이제 달라졌으니까 어떤 건 겪지 않아도 될 거라고 나는 자꾸 생각해버렸지만그렇지 않았다재윤은 '달라지는 중'이었고거기에는 이쪽과 저쪽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나는 어떤 것들이 재윤에게 괜찮고 어떤 것들이 괜찮지 않은지 여전히 어이없을 정도로 잘 몰랐다.

윤이형마흔셋

 

다른 것들, 모르는 것들을 집요하게 그러나 소란스럽지 않게 두드리려는 태도, 그 열심, 단단한 의지 같은 것들이 빛난다. 소설 쓰기는 어쩌면 이름 모를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호명하는 데 의미가 있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쓰는 이들은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자기 손끝에서 만들어 자기가 가지는 혜택을 부여받은 사람들 같다. 쓰기 전의 윤이형과 쓰고 난 후의 윤이형은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나는 끝내 그것을 잘 모를 것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잘 모를 것이다.

 

 

 

--- 읽은 ---

+ 소로의 일기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258 ~ 400

+ 지적 생활의 설계 / 호리 마사타케 : ~ 255

+ 사서 / 옌롄커 : 383 ~ 538

+ 마르크스 철학 연습 / 한형식 : 82 ~ 163

+ Do it! 점프 투 파이썬 / 박응용 : 215 ~ 356

 

 

--- 읽는 ---

- 조관희 교수의 중국현대사 / 조관희 : ~ 79

- 개념과 논쟁으로 배우는 통계학 / 심규박 외 : ~ 169

- 타자와 욕망 / 문성원 : ~ 77

-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의 초대 / 박병철 : ~ 152

- 작은마음동호회 / 윤이형 : 130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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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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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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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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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5 2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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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0-25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다 비밀댓글 뿐일까요?

syo 2019-10-25 23:4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개인적으로 비댓이 스타일이신 분과, 비행기를 너무 쎄게 태우려다보니 민망해서 비댓으로 돌리신 분이 계세요. 비밀이지만 아름다운 댓글들입니다. ㅎㅎㅎ

다락방 2019-10-25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술 마셨게요 안마셨게요?

syo 2019-10-25 23:51   좋아요 0 | URL
그 둘 사이에 차이가 있었어요?? ㅎ

stella.K 2019-10-2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만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전 이제 누구한테 책 선물하는 게
좀 어색하더라구요.
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읽기를 강요하는 건 아닐까.
좋아할까, 시간 뺏는 건 아닐까, 이미 아는데 또 선물하는 건 아닐까 등등으로 해서.
하긴 남한테 하는 선물은 항상 고민스럽더군요.

syo 2019-10-27 21:48   좋아요 0 | URL
저는 책 선물 하는 일 자체가 잘 없지만,
할 때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하는 편입니다.
어차피 상대가 이 책을 읽을 거라는 기대 같은 걸 하지 않거든요.
읽은들, 제가 좋을 일도 아니고 남아도 읽는 사람한테 남는 건데요.
팔자소관이지요......

2019-10-29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01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