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의 자녀가 공부에 의욕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알라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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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나면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쓸 줄 알았다. 아니지, 그러고 싶을 줄 알았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연간 700권을 읽고 쓰던 시절을 회고하자면 그 시절 syo라는 녀석은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아주 환장하는 수준이었으므로, 연세 지긋하신 지금에 와서야 환장까지는 아니어도 즐거운 마음 정도는 가질 것이라 예측했었는데, 와, 정말이지 읽고 쓰기가 너무너무너무 싫다. 살다살다 내가? 이런다고?
얼마나 싫은가 하면,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그러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그렇게 하기 싫어져서, 그 일을 하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듯한 기분으로 하루 10시간 공부를 무난하게 소화하는 지경이다. 심지어 수능 직전에도 하루 7~8시간이 고작이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공부 시간 늘리는 게 쉽고 기쁜 일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진작 알라딘 시작했을 텐데……. 아, 그렇구나. 내가 또 이딴 식으로 깨달음 당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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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잘 본다는 게 무엇인가. 그건 굉장히 애매한 질문이다. 국어 수학 백분위를 99로 찍었으면 잘 본 사람일까. 그러나 그 사람이 물리 하나 조지는 바람에 원하던 학교 원하던 과에 지원하지 못할 수준이면 못 본 사람일까? 그렇다면 또 다른 사람이 있어서 모든 과목에서 아까 그 사람보다 조금씩 못 봤다면 이 사람은 더 못 본 사람일까? 그런데 이 사람은 아까 그 사람보다 목표치가 낮아서 원하던 곳에 수월하게 합격한다면 잘 본 사람이 되는 걸까? 그러면 잘 본 사람보다 못 본 사람이 못 본 사람보다 잘 본 사람이 되는 걸까? 이쯤 되면 잘 보고 못 보고를 떠나 대체 뭘 보고 있는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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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리게 되어서 아무래도 한 번 더 볼 모양인데, 너무 담담한 마음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당황하고 있다. 나이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문턱이 낮은 지방대를 골라서 한해라도 빨리 그냥 들어가라고 하는 사람이 있고, 같은 결론이지만 그 척박하고 힘든 수험기간을 1년이나 더 통과하며 고생하지 말라는 이유를 드는 사람도 있다. 한 해 더 해볼 가능성도 있겠다는 말을 슬쩍 건네면, 다들 아직 성적표가 나온 것도 아니니까 일단 좀 더 기다려보자면서, 다 잘 될 테니 마음을 편하게 먹고 기다리라며 주제를 전환한다.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런 끔찍한 생각을 미리 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급하게.
걱정하는 마음이 선명해서 늘 고맙다. 나는 어딜 가나 이상하게 더 애틋하고 신경 쓰이는 못난이 자식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 모양이라, 사람들이랑 대화하다 보면 가끔 이렇게까지 나한테 다정하다고?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왜 모두가 나의 지난 1년이 외롭고 괴로웠을 것이며 한해 더 이어질 1년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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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1년이 너무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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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하긴 하여도 쏟아부은 시간만큼 풀 수 있는 문제가 늘어났다. 풀 수 있는 문제가 늘어나는 즉시 성적에 반영되진 않았지만 역시 천천히라도 성적은 올랐다. 수능이란 내가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시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성장하는 재미가 정량적으로 측정이 되었다. 나에게도 자존감이라는 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었고,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정성적인 평가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오롯한 순간들이었다.
알라딘이 비슷했다. 비루한 인간 개체였던 내가 알라딘의 syo가 되기 위해, syo를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 시간들은-물론 그 자체로 즐거움이 있었으나-본질적으로 인정투쟁이었다. 인간이 자아의 뼈대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인정. 그것을 얻기 위해 syo는 읽고 썼으며 그 과정에서 차츰 자가 발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그 어떤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운동선수라도 심각한 부상 후에는 굴욕에 가까운 수준의 재활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필드에 올라설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한번 잊어버린 사람은 다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타인의 사랑에 의존하여 섭식하고 보행하는 기간을 거쳐야 한다. 알라딘 서재란 그런 공간이었다. 죽밖에 먹을 수 없는 이를 위한 죽. 씹어 넘길 수 없는 이를 위한 달고 따뜻한 꿀물.
그 덕에 이가 나고 이제는 고기를 낚아 생선도 굽고 죽창을 들고 뛰어나가 돼지도 잡아다가 구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나면, 여기는 이제 가끔 맛이 생각나 찾아 먹는, 혹은 소화력 떨어질 때 또 와서 기대는 죽집 같은 곳이 되는 듯. 딱 그런 느낌으로 이제 읽고 쓰는 일이 절박하지도 않고 환장할 만큼 즐겁지도 않은 것이다. 이것이 시각시각 식어가는 겨울바람을 몸으로 감고 옥상을 빙글빙글 돌며 곰곰 생각하다 내린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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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성년이 되는 모양이고, 이미 한참 전에 그 길을 지났을 분들이 오늘 여기 모여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또 언젠가 지금은 모를 다른 필요에 쫓기고 온기를 좇아 다시 이곳에 스며들겠지만, 하여간 오늘의 나는 읽고 쓰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나를 빚어나가는 일보다 하루 10시간 공부하고 300시간을 모아 약간의 점수로 바꾸는 일이 더 즐거운 모양이다.
아무리 좁은 면이라도 희망의 여백은 두렵다. 타협이라는 속삭임이, 꿈을 먹는 것 같은 무중력이, 내가 나를 기만하는 교활한 술수가, 기적을 바라는 가엾은 소망이……. 희망은 이같이 흉하게 약화되어 가는 나를, 비천하게 겁을 먹는 나를 문득문득 깨닫게 한다.
_ 박경리, 『토지』 自序
--- 읽는 ---
화해의 몸짓 / 장성욱
헤겔에 이르는 길 / 미타 세키스케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 이동진
토지 1 / 박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