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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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알라디너들이 몹시도 애정하는 三의 고백 관련 소식이다. 어제였다. 이런저런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고백을 실패하고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 만남. 만약 여기서도 실패한다면 귀가 시 펑펑 울면서 현관문을 열기로 약속을 굳게 약속하고 그는 고백을 하러 출정했다. 바깥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것은 복선인가? 폭풍우는 펑펑 눈물의 은유인가? 슬픈 마음의 객관적 상관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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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가씨와 썸타기 전에는 두세 주 가야 한 번쯤 올라오던 三은(그때 참 편했는데) 요즘 주말마다 개근 중이시다(이거 밥 해먹이는 것도 일이다). 보통 토요일에 약속이 잡히므로 금요일 늦은 밤에 도어락 해제하는 소리와 함께 三은 등장한다. 내일 만나는갑네? 어, 보기로 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정신교육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한 주 동안 三이 회사에서 크게 오염되기 때문이다. 회사는 유독물질이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가 아니라 회사 남자들이 유해하다. 三네 회사에는 “처음 만나는 날부터 점심 먹고 까페 갔다가 저녁 먹으면서 술 마시고 바로 자빠뜨려라”든가, “스킨십 천천히 빼다가 차이는 놈 많다. 손잡기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까 스킵하고 이번 주에 고백하면 고백하고 까페 나가면서 바로 허리 감아라” 같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조언이랍시고 해주는 유부남자들밖에 없다. 그러면 syo는 이제 저 똥멍충이가 내일 아무 생각 없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쩔어 있는 그의 뇌를 꺼내 박박 빨아서 다시 집어넣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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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三은 나는 왜 이런 인간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고백을 하긴 했으나 그것조차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마지막 순간에까지 가서야 던지듯 급박하게 하고 만 것.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나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하며 고뇌에 찬 모습을 연출하는 三에게, syo는 삼만 가지 정도의 문제점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중 이만 구천구백구십구 가지는 각각 삼만 번쯤 지적한 역사가 있는 것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녀석은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지만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이런 표정을 지어야지’ 하는 표정으로 syo의 말을 듣는 척만 했고(그런 태도조차 삼만 가지 문제점 중 하나로 이미 지적당했다), syo는 아, 이번에도 또 똑같겠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삼만 한 가지 문제점을 삼만 한 번째 이야기할 기회가 오겠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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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알라딘 활동을 하라고 부추겼다. 그게 너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해 줄 거라고. 그 말을 들은 三은 알라딘에 로그인했다가, 아이디와 똑같이 설정해놨던 자기 닉네임이 자기도 모르게 三으로 바뀌어 있음을 이제야 발견했다. syo가 그래 놓은 것이 벌써 3년 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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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구요? 응시했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울지 말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더라구요…….
--- 읽은 ---
302. 그래스호퍼
이사카 고타로 지음 / 오유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 2019
어릴 적에는 이사카 고타로를 좋아했던 것도 같다. 오쿠다 히데오의 인기에 올라타 이제서야 슬슬 명랑한 갱 같은 것들이 번역되어 들어오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분명히 좋았다는 기억은 있는데, 왜 좋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걸 모르겠단 말이지.
syo의 취향에서 보면 이사카 고타로는 그냥 고만고만하다. 절대 지루하지는 않지만 되게 박진감 넘치지도 않는다. 독특한 캐릭터가 없지는 않지만 그리 오래 남지도 않는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눈치인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기도 하다. 이건 매력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 아닌지? 그런데도 가끔씩 눈이 마주치면 오늘은 이거나 볼까- 하고 스윽 뽑아드는, 우리는 그런 사이다.
이 작품도 그렇다. 이야기와 메시지가 딱히 착 들러붙지는 않는다. 역자 후기를 보면, 이사카 고타로 역시 메시지를 확립한 후 이 작품을 썼던 건 아니고, 그냥 독창적 살인기술을 지닌 여러 킬러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글을 써볼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던 모양이다.
이사카 고타로니까 당연히 이사카 고타로 만큼은 했다. 하지만 그냥, 그랬다고.
“사람도 일정한 공간에서 복닥거리다 보면 이상해지지. 인간도 워낙 밀집해 사는 생물이니까. 출퇴근 시간이나 연휴에 길 막히는 걸 보면 기가 막힐 정도 아니오?”
스즈키는 바로 고개를 끄뎍였다. 옛날에 교수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은 포유류가 아니라 곤충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맞소.”
확실히 누군가의 동의를 얻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때 펭귄도 곤충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김이 샐 것 같다.
“초록색 메뚜기라 할지라도 무리 속에서 치이다 보면 검어지게 마련이지. 메뚜기는 날개가 자라 멀리 달아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잖소. 그저 난폭해질 뿐.”
"그럼 인간도 그 군집상에 속하는 겁니까?“
”도시에서는 특히 더.“
아사가오의 눈매가 매서웠지만 스즈키를 위협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가 어렵지“
_ 이사카 고타로, 『그래스호퍼』
303. 라이브 경제학
강성진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0
좋았다. 정치경제적 관점이 syo하고는 완전히 반대라고 해도 무리없을 정도지만, 그래도 설득력이 있었다. 배운 것도 되게 많았고, 생각의 변화도 좀 있었다. 숫자 같은 걸 정확히 제시하신 데서는. 그런데 논증이 늘 그렇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현금 대신 지역화폐나 쿠폰을 지급해 사용 가능 지역을 한정하더라도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받은 지원금 · 쿠폰으로 물건을 구입하고 해당 금액만큼의 현금으로 다른 지역의 물건을 구입하거나 저축한다면, 결국 쿠폰 발행 지역에서의 총수요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경제학에서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라고 한다. 특히 중산층 소비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경제전망이 부정적일수록 원래 쓸 돈을 아끼고 대신 정부 지원금을 사용하려는 소비 경향이 성향이 높기 때문이다.
_ 강성진, 『라이브 경제학』
논쟁적인 지점에서는 사고실험이나 논리 전개가 아니라 숫자의 제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지역화폐 지급에 관한 다음 이야기는 실증적 관측 결과라기보다 그냥 사고의 흐름이다. 맞는 말 같아 보이지만 ”총수요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려면 그 지역민 100%가 추가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비상식적이다. 실제로 받아보니까 나는 두 번 먹을 거 세 번 먹게 되던데? 실제 추가소비가 생기는지 아닌지에 대한 숫자 제공 없이 그냥 그럴 것이다- 하신다고 와그렇구나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은 비유 같은 것에도 섬세하지 않으시거나 섬세하려 하지 않으시거나 한듯. 이런 대목에서,
노동소득 증가가 실질적인 총수요 증가로 나타나 경제성장까지 연결되는지 실증적인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임금상승이 노동자들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오히려 생산성이 하락하는지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간단히 예를 들어, 모든 학생에게 100점을 주면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열심히 하면 100점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할 수도 있다.
_ 같은 책
모두에게 100점이요? 글쎄요. 소득증가가 소득통일도 아니고, 증가가 있다 한들 각 학생들의 점수(소득)이 일제히 10점 정도씩 오를 뿐, 그래봤자 원래 20이었던 사람은 겨우 30되겠죠? 그리고 100점은 만점이지만 소득에 만점이 있나요? 누구 연봉이 100점짜리 연봉인데요. 이런 날비유는 좀 지양하셨으면.
304.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
박동섭 지음 / 유유 / 2021
우치다 확실히 멋지긴 하다. 웬만한 일본 다작가들은 다 까는 syo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점. 이 양반은 말하는 게 달라. 쌈마이라면 고급진 쌈마이고, 고급이라면 쌈마이풍 고급이고, 하여튼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았지. 아, 선생님, 사랑해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개론서가 나오다니. 개론 맛집 우치다 선생님의 개론서라니.
배움이란 애당초 배우려고 한 것 이외의 것을 배우고, 배우려고 한 것 이상의 것을 배우는 역동적인 과정이며 아직 알지 못하는 미지에 계속 열리는 과정이라는 것을 우치다 선생께 배운 건 정말로 큰 수확이었다. ”배운다는 것은 배우기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는 새로운 어휘꾸러미도 얻었다. 그 새로은 어휘꾸러미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배움의 과정에서 반드시 따라붙는 ‘단절’과 ‘비약’은 단지 지식을 늘여 나가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이다. ‘지식을 늘이는 것’은 동일 평면상에서 수평 이동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반면 ‘지식에 관한 지식을 갇는 것’은 계단을 오르는 수직 이동이다.
_ 박동섭,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
305. 완전사회
문윤성 지음 / 아작 / 2018
사실 세계 정부가 수립된 이후 가장 거창하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처리 곤란한 행정 부문이 성행정입니다. 성본능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가졌을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고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강렬한 작용을 가진 본능이며, 모든 생활은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성문화가 바로 인류 문화라고도 하잖습니까. 이다지 소중한 ‘성’이긴 하나 한편 ‘성’처럼 안이하게 대해지는 것도 드물 겁니다.
_ 문윤성, 『완전사회』
여성들이 남성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고, 남은 남성들은 우주선에 실어 화성으로 귀양 보냈다. 과학이 있어서 인간을 낳는데 더이상 남성은 필요가 없고, 여성들은 이제 여성이라고 불리기도 거부하며 스스로를 진성眞性이라고 칭한다. 뭐 그런 세상이다. 솔직히 그다지 재미없다. 그 시대에 이런 발상을 하다니! 는 있지만, 뭐 그 발상 자체가 굉장히 위대한 것도 아니다.
자동섹스 기계 같은 게 있어서 그것으로 성욕을 처리하는 합법적 방식을 ‘홀랜’이라고 하고, 육체와 육체를 이용해 섹스하는 구시대적 방식을 ‘께브’라고 부르는데, 께브는 금지되어 있다. 묘사에 따르면 ”께브는 남의 이목을 피해야 하고 오르가즘이 홀랜보다 못하다는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홀랜에 없는 ‘애정’이 있었다.“라고 한다. 아, 역시 이 방면에 있어서도 인간은 여지없이 기계한테 지고 마는구나. 뭐 그런 세상이다. 솔직히 이런 발상은 좀 재밌었다. 섹스 이야기는 재미 없기가 어렵다.
작품 자체로서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 60년대 작품이라 당연히 고리타분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 혐오로 읽힐 수도 있을 만한 진술도 꽤 있다. 사실 그런 건 문제가 안 되는데, 설명하다 보니 서사가 약하고, 약한 서사에 걸맞게 캐릭터도 약하다. 심지어 마무리는 심각하다. 주인공이 쓴 아주 짧은 소설을 읽고 여성 남성 지구 우주 모든 생명체들이 감복하여 자 우리 이제부터 다투지 말고 행복하게 어우렁더우렁 살아보자며 갑자기 화해하며 해피 엔딩. 이건 그냥 급하게 마무리할 사정이 생겼다고 밖에는 생각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인대상 SF 소설이라는 의의, 그게 다예요.
306. 만화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 3
이희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
귀곡자 밑에서 함께 학문을 배웠던 손빈과 방연. 방연도 뛰어난 인재였지만 하늘이 방연을 내고 또 손빈을 내는 바람에 늘 비교당하며 열등감을 품어왔다. 이런 경우 뛰어난 인물들이 늘 그렇듯, 손빈은 방연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세월이 흘러 방연이 먼저 하산하여 자리를 구했고, 한참 지난 후 손빈이 하산하여 방연을 찾아간 것이다. 열등감 덩어리 방연은 이때다 싶어 손빈을 받아주는 척 모함하여 다리를 잘라버리고, 그걸로도 안심이 안 되는지 돼지우리 같은 데 가둬놓고 계속 감시하는 중. 손빈은 방연의 시선을 돌리고 탈출의 기회를 잡기 위해 미친 척을 하는데, 그 미친 행동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돼지의 똥을 핥아먹는 것. 사기에는 훗날을 위해 굴욕을 견디는 인물들이 참 많이도 등장하는데, 정말이지 놀라울 지경이다. 뜻을 위해 처자식 베는 것도 척척 해내는 영웅들답게, 굴욕을 감내할 때도 쎄게 한다. 돼지 똥 정도는 핥아 줘야 원수놈들이 안심을 한다는 정도의 인식이 만연한 듯.
문제는 저 돼지 표정이 대체 왜 저래야 하느냐는 거다ㅋㅋㅋㅋㅋ 그리고 그걸 보는 방연은 또 왜 침을 흘리느냐는 거고 ㅋㅋㅋㅋㅋㅋㅋㅋ
307. 시처럼 쓰는 법
재클린 서스킨 지음 / 지소강 옮김 / 인디고(글담) / 2021
나는 작품을 편집할 때 진부하고 평범하다고 느껴지는 단어들에 동그라미를 치고, 지나치게 추상적인 표현도 피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사랑, 공포, 증오, 아름다움과 같은 거대한 단어들은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런 단어들이 바로 추상적이다.
만약 독자들에게 사랑과 공포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당신만의 고유한 사랑과 공포에 대해 세밀하게 써라. 어떤 종류의 사랑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가? 당신의 몸은 공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당신은 독자들에게 다른 무엇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심상을 환기하기 위해 정확하고도 낯선 뭔가를 찾아내야 한다. 이런 추상적인 개념에 언어를 덧붙이고 자기 자신만의 개념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작가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여기에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예시를 하나 소개한다.
그냥 이렇게 말하겠는가?
당신이 다가올 때 / 내 가슴에 사랑이 느껴진다. / 눈물은 멎고 / 슬픔은 떠나가고 / 나는 외로움을 벗어나 / 그저 행복하게 / 꼭 끌어안고 있다.
아니면 이렇게 보여주겠는가?
이 찌릿한 느낌. / 내 가슴 한가운데서 / 밝은 불꽃이 튀고 / 꿈에서 열이 올라온다. / 당신이 문 앞에 / 도착하자 나는 갑자기 / 잠에서 깨어나 / 당신의 어두운 눈동자를 / 음미하고 두 팔을 벌리는 / 몸짓을 받아들인다.
_ 재클린 서스킨, 『시처럼 쓰는 법』
미안한데, 당신이 ‘보여주겠’다는 게 내겐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당신만의 고유한 사랑’에 대해 ‘다른 무엇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심상을 환기하기 위해’ 당신이 찾아낸 ‘정확하고도 낯선 뭔가’가 가슴 한가운데서 튀는 밝은 불꽃, 꿈에서 올라오는 열, 갑자기 깨어나는 잠 같은 거라면, 책을 좀 더 많이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당신이 고른 말은 진부하며 아름답지 않고 동시에 선명하지조차 못하다. 가슴 한가운데서 튀는 불꽃, 그게 뭔데? 그 표현을 보았을 때 내게 떠오른 것은 쇠와 쇠를 이어붙이기 위해 한 손으로는 가면을 쓰고 한 손으로는 용접기를 조작하는 용접공의 불꽃이다. 그것이 가슴에 튄다면 뜨겁고 괴로울 것이다. 행복하기보다 피하고 싶을 것이다.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게 그런 것이었을까? 아니겠지. 사정이 이렇다면, 당신이 보여주는 표현에서 내가 본 것과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게 달랐다면, 그냥 당신이 말한 거대하고 추상적이어서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랑’ 같은 단어를 쓰는 것과 지금 이게 뭐가 다를까?
의도는 알겠지만 달성할 수 없는 일이고, 집착해서도 안되는 문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문장을 만들어 내놓는 것뿐이다. 만들어진 문장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손을 떠난 문제다. 나도 늘 나의 표현을 찾고 있다. 지금 이 마음을 더 뚜렷하고 아름답게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을 늘 탐한다. 그러나 어떻게 ‘전달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욕심을 낼 수 없다. 그럴 때 무엇이 더 훌륭한 길인지 딱 정해진 것도 아니다. 어떤 순간에는 모든 구체적이고 현란한 표현을 내치고 그저 ‘사랑’ 같은 추상적인 단어 하나를 던져 수만 가지 화려한 독해의 불꽃놀이가 펼쳐지도록 두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읽는 이가 행간을 채우도록 열어두어야 한다. 아니, 그래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손대려고 욕심내는 순간, 이미 거장이 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린 반드시 망한다.
308. 니체, 세상을 넘어 나만의 길을 가다
최강순 지음 / 글라이더 / 2016
특별히 언급할 만한 지점을 찾지 못했다.
309. 소설의 정치사
낸시 암스트롱 지음 / 오봉희, 이명호 옮김 / 그린비 / 2020
새로운 유형의 여성이 출현했다는 것은 내게는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이 유형의 여성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녀보다 더 고귀한 상대자[귀족계급 여성]과 덜 고귀한 상대자[노동계급 여성]보다 문화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고귀함이 의미하는 관념 전체를 이 여성이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가정소설들에서, 그리고 이 소설들과 동시대에 집필된 다른 종류의 글에서 이 여성의 역사를 추적했다. 나는 어떻게 특정 텍스트가 이 새로운 여성을, 미래세대로 하여금 근대가정을 강박적으로 ― 마치 타고난 욕망에 이끌리기나 한 것처럼 ― 재생산하게 만들 과정을 작동시킬 수 있도록 독특한 채비를 한 존재로 재현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방식으로 가정여성은 기능적인 개개인의 심리적 삶의 한 기능이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가정여성은 중산계급의 응접실을 감독하러 책장에서 걸어 나오기 이전에 장장 한 새기 동안 재현물로 존재했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은 마음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다양한 개인들의 무리가 근대문화 안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_ 낸시 암스트롱, 『소설의 정치사』
이 책에는 뭔가 있다.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뭔가가. 서론까지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다고 느꼈고, 흥미로웠으며, 이제 앞으로 읽어나가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논증되는지 따라가보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몇 가지 이유로 인해서 어쩐지 동력이 떨어졌다.
챕터 단위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 간격이 너무 넓어서 밀도 있는 독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앞부분에서 제시한 전제와 가설들이 내 머릿속에서 희미해지면서, 종래에는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지, 전체적인 흐름에서 지금 이 대목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헤매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작품들을 거의 읽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설명을 위해 언급한 부분적 대목만으로도 논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루뭉수리했고, 어차피 잘 모르잖아, 그냥 내가 알려줄게, 여기, 여기, 여기 시험에 나오니까 받아들여- 하는 식의 그저 따라가는 독서가 되고 말았다.
저자의 문장 욕심도 있다. 부러 애매하게 쓴 것 같은, 그러니까 포함할 필요가 없는 의미까지 포괄하려 드는 입 큰 문장들을 만나면 그 문장에서 이리저리 앞뒤를 뒤적여가며 읽어야만 했다. 왜? 왜 이렇게 말할까? 왜?
요지는 이렇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알겠고, 그 말이 멋지고, 동의도 하는데, 정작 작가 자신이 그 말을 증명하는 과정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 작가의 견해를(내 견해도 같으므로) 다른 데 말하는 일이 생기면, 그 근거를 대보라는 요청에 우왕좌왕하며 매우 흐지부지하게 답하거나, 선명하게는 "낸시 암스트롱이 그렇게 말했거든"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초라한 상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결국 독서는 실패도 성공도 아닌 애매한 수준에서 마무리되었음을 인정해야만 하겠다. 그렇지만 서론을 읽으며 그 속에 들어있는 독창적인 관점을 발견하고 느꼈던 쾌감을 기억한다. 몇 가지 문장으로 정리되었다가 그냥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버릴 지식이 아니라, 예술과 예술이 재현하(기로 하)는 것들을 정치적 역학관계와 버무려서 보는 (내겐)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일종의 환희에 가까운 기대감도 기억한다. 밀도 있는 재독으로 다시 제대로 판단하기 전까지, 이 책에 대해서 침묵하겠다.
--- 읽는 ---
사조영웅전 6 / 김용
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괜찮은 사람 / 강화길
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 박인철
수전 손택의 말 / 수전 손택, 조너선 콧
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궤도의 과학 허세 / 궤도
다시 쓰는 착한 미술사 / 허나영
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 / 정승규
오레스테이아 3부작 / 아이스퀼로스
돈과 시간이 쌓이는 1일 1분 정리법 / 고마츠 야스시
멜랑콜리의 묘약 / 레이 브래드버리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 임건순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 하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