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한나 아렌트 지음,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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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를 잘 모른다. 50년대, 60년대 활동했고 1975년에 작고한 사상가가 오늘날 주목받는 이유가 뭘까? 인문학 계열의 책을 읽다보면 한 번 쯤은 마주치게 되는 한나 아렌트. 이 책은 그녀의 네 번의 인터뷰를 담았다. 숄렘의 비판, 토니 쥬트의 비판, 한국 정치철학자 정화열 교수의 비판 등, 아렌트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의 독서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나는 아렌트 편이다.

 

오늘날의 아렌트를 만든 건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도 읽는다.

 

칸트를 읽었거든요. 왜 칸트를 읽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는데, 내 입장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왠지 이런 것 같아요. 내겐 그건 철학을 공부하거나 물에 몸을 던지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였다고요. 그렇다고 내가 목숨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앞서 말했듯 나한테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그녀는 10대 때, 칸트, 야스퍼스, 키르케고르를 읽었고, 그리스 시를 읽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히틀러가 권력을 쥔 1933년에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았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친구들의 전향이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연인 사이였던 하이데거의 전향은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리라.

 

나치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10년이 지난 1943년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아렌트는 말한다. “이건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에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간된 이후 아렌트는 특히나 숄렘을 비롯한 유대인으로부터 유대인을 비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나 아렌트는 오해라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내 친구들만 사랑했고, 내가 잘 알고 또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입니다. 게다가 이 유대인들의 사랑, 나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나한테는 상당히 의심쩍은 것으로 보이고는 합니다.”

 

아렌트가 오늘날에도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아렌트의 63년 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한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나는 악의 평범성을 완전히 오해했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악의 평범성은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파생된다. 아이히만은 공무원이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부당함을 알았지만 명령에 순응했다. 그는 행동을 멈추고 사유 하지 않았다. 그는 익명성뒤에 숨어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마음만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익명성 뒤에 숨어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일베현상을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부당한 명령인줄 알면서도 명령에 순응하는 공무원들을 떠올릴 수 있다. 틈만 나면 간첩 조작질, 댓글 알바짓, 민간인 사찰 짓거리를 일삼는 국정원 공무원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히면 어떨까.

 

또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정화열 교수는 3 세계는 실제reality가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다라는 아렌트의 주장 때문에 그녀를 비판한다. 아마도 그는 제 3 세계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전혀 다른 의미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남미는 실제로서 존재해요. 이 지역들을 유럽 그리고 미국과 비교해보면 그곳은 저개발 지역이라 말할 수 있고, 당신은 그 점 때문에 그게 이 나라들 사이의 중요한 공통분모라고 주장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공유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간과하고, 그들이 공유하는 게 다른 세계와 대비할 때에만 존재하는 차이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놓치죠. 저개발이라는 아이디어를 중요한 요소로 보는 그런 관점은 유럽인과 미국인이 가진 편견이에요.......언제 한번 중국인을 붙잡고서 당신은 아프리카에 사는 반투족과 정확히 동일한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보세요. 장담컨대 당신은 평생 본 중에 가장 경악하는 반응을 보게 될 거에요.”

 

아렌트가 3세계를 실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라 주장한 이유는 그것이 마치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미국인, 유럽인의 편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3 세계슬럼과도 비슷한 단어라고 할까. 아무도 자신이 사는 곳을 슬럼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가진자들이 보기에 슬럼일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아남았을까? 부정적인 사람들? 당연히 거의 죽었다. 시크릿 추종자들 마냥 긍정적인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거의 죽었다. 그들은 자신이 긍정하는 세계가 자신의 눈앞에 당장 펼쳐지지 않자 인내할 수 없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긍정하는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무턱대고 현실을 긍정하는 삶의 자세, 부정적인 삶의 자세만큼이나 위험하다. 현재가 완전하다고? 지금이 당연하다고? 사유해야만 한다.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세계와 적대적이어야 한다. 적대적이라고 해서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다. 아이를 야단치는 게 아이가 커서 거지, 비렁뱅이, 한량, 범죄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가?

 

바우만을 따라서 다시 한번 반복해볼까?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

 

 

밑줄 친 문장들

 

 

p61. fiat veritas, et pereat mundus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진리가 말해지도록 하라)

 

p66. 개인적 경험없이 가능한 사유과정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아요. 모든 사유는 뒤늦은 사유예요. , 어떤 문제나 사건을 사후에 숙고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p70. “인간성은 혼자 힘으로는 절대 획득되지 않으며, 누군가 자신의 작업을 대중에게 바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성은 자신의 삶과 존재 자체를 공공 영역으로 향하는 모험에 바친 사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p76.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 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것- 이 권력을 낳는다는 거예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p81. 악은 항상 유혹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반면 선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절대 하려고 들지 않는 일이라고들 생각하죠.....나는 이건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브레히트는 선한 일을 하려는 유혹은 우리가 늘 이겨내야 하는 무엇이라는 점을 항상 보여주고 있어요.

 

p86. 내가 말하는 바는 칸트가 말했듯이, “다른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런 종류의 멍청함.....이 사람들은 당신에게 절대로 관심을 갖지 않으니까요. 그게 독일적인 거예요.

 

p95. 망설임은 있었죠. 그들은 망설임을 가진 공무원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의 망설임은 인간이라면 그저 한 사람의 공무원으로 존재하기를 멈춰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명확히 보여줄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어요. 그들이 자기 자리를 떠나 맙소사, 추악한 일들은 다른 누군가 하게끔 합시다!”하고 말했다면, 그랬다면 그들은 어느새 다시금 인간이 됐을 거예요. 공무원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말이에요. 그렇지 않았을까요?

 

p98.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또 다른 명제가 있어요. 내가 보기에 다음 명제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제공하죠.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니까.”

 

p99. 아이히만은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나한테 주어진 일을 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의 공적인 영혼은 항상 그가 한 일과 일치했지만 사적인 영혼은 항상 그걸 반대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렌트 : 맞아요. 이게 이른바 살인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내면적 이민이에요. - 이것은 내면적 이민이나 내적인 저항이라는 개념 전체가 소멸했다는 뜻이죠. 내 말은, 그런 건 없다는 거예요. 세상에는 외면적 저항만 있을 뿐이에요. 인간의 내면에는 기껏해야 심리 유보만 이써요. 맞죠? 그것들은 허깨비들이 하는 거짓말이에요. ...관료제는 대량학살을 행정적으로 자행했고, 그런 상황은 여느 관료제가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명성의 느낌을 창출해냈어요.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졌어요.

 

관료제가 본질적으로 익명성을 갖는다는 사실 말고도, 무자비한 행위는 무엇이건 책임이 증발되는 것을 허용해요. “멈춰서 생각해보라. Stop and think”라는 용어 관용구가 있어요. 어느 누구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한 생각에 잠길 수 없어요......

 

102.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 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 ”

 

p103. 흐로티위스를 인용해야겠군요. 그는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가 피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명예 및 품위와 관련된다고 말했어요. 이건 피해자가 감내한 고통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무엇인가 올바로 세우는 것하고도 전혀 관계가 없고요. 이건 정말로 명예와 품위의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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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6-04-03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 많이 기울이신 포스팅, 감사하며 읽었습니다. 참 담백한 책인 것 맞네요

시이소오 2016-04-03 17:28   좋아요 0 | URL
제가 감사하죠 ^^

아무 2016-04-0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해제를 정화열 교수가 써서 이 분도 아렌트 계열의 정치철학자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인터뷰집이라 우선순위에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글을 보고 나니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시이소오 2016-04-03 17:29   좋아요 1 | URL
아무님, 아렌트 전작하시겠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4-03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하면 시이소오 님과 사이러스 님이죠.. ㅎㅎ

시이소오 2016-04-03 17:30   좋아요 0 | URL
ㅋㅋㅋ 감사합니다 ^^

cyrus 2016-04-03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라면 곰발님과 붉은돼지님, L.SHIN님이죠.. ㅎㅎㅎ

시이소오 2016-04-03 17:30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작가의 책 - 작가 55인의 은밀한 독서 편력
패멀라 폴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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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명의 작가 중 16명의 작가의 책을 읽었다. 최근 활동하는 영미 픽션, 논픽션 작가들일텐데 반 정도는 금시초문이다. 나로선 가장 관심이 가는 작가는 존 어빙, 맬컴 글래드웰, 주노 디아스였다.

 

영미 작가들이라고 하지만 패멀라 폴은 세심하게 이민자출신의 작가들을 포용한다. 예를 들자면 아시아 쪽으로는 아프카니스탄 출신의 할레드 호세이니, 인도 출신 줌파 라히리, 중화권의 에이미 탄, 한국 출신인 이창래 등.

 

남미, 아시아, 유대계의 이민자 2세 출신 작가들이 적지않음에도 영미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문학은 영미문학이었다.


작가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작가는 세익스피어와 마크 트웨인이었다. 맬컴 글래드웰은 누굴 만나고 싶어했을까? 셰익스피어 아내였다. 센스쟁이.

 

작가들이 과대평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책, 영에의 1위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였다. 조이스의 <율리시즈> 번역본이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뻐 날뛰었던가. 책을 구입한지 어언 25. 아직도 ()권을 못 읽었다. 올해는 나도 율리시즈에 도전해볼까.

 

여러 작가들이 과대평가된 작가로 의외로 헤밍웨이를 뽑았다. 존 어빙과 도나타트, 두 작가 모두 과대평가된 작가로 헤밍웨이를 지목했다. 어찌나 웃기던지. 혼자서 킥킥댔다. 재밌는 점은 이 두 작가가 내가 보기엔 디킨스의 자식들이라는 거다. 디킨스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헤밍웨이를 괄시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읽은 최고의 책에 나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뽑는다.

나한테 누군가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어떤 작가가 과대평가 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헤밍웨이요

 

헤밍웨이와 더불어 그의 절친 스콧 피츠제럴드도.

 

디킨스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헤밍웨이를 못참아 하는 이유가 뭘까?

 

가장 인상 깊었던 대답은 리처드 도킨스다. 도킨스는 즐겨 읽는 책으로 <성경>을 뽑았다. 특히나 전도서와 아가서라고. 그를 증오하는 종교인들이 들으면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겠다. ‘종교말살론자가 성경을 즐겨 읽다니. 이달부터 나는 성경을 필사할까 고민중이다.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 작가 및 책 :

 

마크 트웨인. 나보코프. 불가코프, 미들마치, 닥터 로, 로베르토 볼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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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4-0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율리시즈 읽다가.... 아, 도저히 못 견뎌서 포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나저나 헤밍과 피츠제랄도는 서로 앙숙이 아니었나요.. 아닌가.??! 아닌가 봅니다. 제가 착각을 ^^

시이소오 2016-04-02 14:59   좋아요 0 | URL
앙숙이전에 절친아니었나요?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해봐야겠네요. 집에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란 책이 있거든요

시이소오 2016-04-02 15:25   좋아요 0 | URL
맞네요. 주변에서 두 사람을 동성애로 볼 정도로 초창기엔 친했어요. 나중엔 스콧이 워낙 말썽을 부려 헤밍웨이가 질렸던것 같아요. 후반기에 헤밍웨이는 줄곧 `스콧을 죽일까봐 겁이난다`고 했다군요. ㅋㅋ

포스트잇 2016-04-0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숙관계였던것같아요. 피츠팬에게 헤밍은 자기 스타를 헐뜯고 모욕하는 인성 못된 사람이었던것으로 받아들여졌던것 같습니다.
전 이책도 다 읽지 못했네요ㅜ

시이소오 2016-04-02 14:29   좋아요 0 | URL
ㅋㅋ 이 책은 틈나는대로 읽으시면 다 읽으실거에요.
율리시즈와는 다르겠죠. ^^

cyrus 2016-04-02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율리시스》 절대로 읽지 마십시오. 특이한 줄거리 전개와 장면 묘사만 빼면 읽고 난 후에 남는 게 없습니다.

시이소오 2016-04-02 14:58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요즘 조이스의 단편들을 읽는중인데 꽤 재밌어서 도전해볼까 생각중입니다. 테리 이글턴은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율리시즈를 언급하기도 해서요. ㅋ 고민되네요. ㅎㅎ

cyrus 2016-04-02 15:01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은 읽을 만합니다. 아무래도 단편들로 이루어진 거라서 읽기가 한결 편하죠. ㅎㅎㅎ
형식의 독창성으로 보면 《율리시스》가 최고의 소설이라는 점 인정합니다. 앞으로 《율리시스》에 맞먹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나오기 힘들 거예요. ^^

시이소오 2016-04-02 15:06   좋아요 0 | URL
한편 이언 매큐언은 <더블린사람들>에 수록된 죽은 사람들의 문장을 율리시즈의 그 어떤 문장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일단은 <더블린사람들>다 읽고 고민해봐야겠어요 ^^

cyrus 2016-04-02 15:10   좋아요 0 | URL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 순으로 읽어보면 좋습니다. 왜냐하면 《율리시스》 속에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나 묘사가 다시 나옵니다.

참고로 《피네건의 경야》는 신계의 책입니다. 책값도 어마어마하고, 분량도 엄청 납니다. ㅎㅎㅎ

시이소오 2016-04-02 15:21   좋아요 0 | URL
사이러스님도 어마어마 읽으셨군요. 앞으로도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말씀하신 순서로 읽어봐야겠습니다. 율리시즈에 데인 이후로 조이스는 겁이나서 피하고 있었거든요. ^*^

singri 2016-04-0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언반스 책 읽는데 존어빙이 나와서 담에 읽어봐야겠다 그랬더니 여기서 보네요~

시이소오 2016-04-02 17:21   좋아요 0 | URL
존 어빙의 가아프가 본 세상 느무느무 사랑합니다 ㅋ^^

samadhi(眞我) 2016-04-03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어빙, 「사이더하우스」도 좋습니다.

시이소오 2016-04-03 01:29   좋아요 0 | URL
사이더하우스도 읽어봐약겠네요. 감사합니다^^
 
벤허 - 그리스도 이야기
루 월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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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도 원작이 있었다니! 대한극장 앞에 줄을 서서 영화 <벤허>를 봤던 게 거의 20여 년 전의 일이다.

 

요즘 왜 기독교 관련된 책들을 읽게 되는 걸까? (내가 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책이 나를 선택한다.) 불가지론을 시험하는 걸까? 제목이 <벤허, 그리스도 이야기>. A tale of the christ. 그런데 그리스도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로 치자면 단역급이다. 벤허가 몸통이라면 그리스도는 꼬리다. tale아니라 tail.

 

영화도 3시간을 넘더니 소설도 거의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다. 성령을 입어서일까.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은 총 8부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1부는 다이그레이션이다. 본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없다. 없어도 무방하다. 예수를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 이야기는 2부부터 시작한다.

 

메살라와 유다는 소꼽친구다. (가롯 유다가 아닌 벤허 유다) 하지만 메살라는 로마인이고 유다는 유대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다. 일제치하에 비유하자면 메살라가 일본인이라면 유다는 한국인인셈. 5년 동안 로마에서 유학 후 돌아온 메살라는 에로스는 죽고, 마르스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며 유대 민족을 무시하고 로마를 찬양한다. 유다는 메살라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로마 총독 그라투스가 이스라엘로 온다. 유다가 행진을 구경할 때 하필 그의 집 기와가 떨어진다. 떨어진 기왓장은 마치 던진 것처럼 총독을 정통으로 맞힌다. 로마군들이 유다의 집으로 밀어닥친다. 로마군 중의 한명인 친구 메살라는 유다가 범인이라 지목한다. 유다의 어머니와 동생은 잡혀간다. 유다는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형벌을 받는다. 나사렛을 지나다 한 젊은이로부터 유다는 물을 얻어 마신다. (물론 이 젊은이는 목수의 아들 예수였다.)

 

유다의 갤리선 사령관의 이름은 아리우스였다. 해전 중 유다는 사령관 아리우스의 목숨을 구한다. 아리우스는 유다를 양아들로 삼는다.

 

유다는 안디옥에서 아버지의 노예였던 시모니데스를 만나 어머니와 동생의 행방을 물어보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다. 길거리에서 네 마리 말을 몰고 가는 전차가 낙타위의 가마와 충돌하려 하자, 유다는 전차를 잡아 사고를 막는다. 네 마리 말을 모는 이는 다름 아닌 유다의 원수 메살라. 벤허는 메살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차 경주를 계획한다.

 

일데림 족장으로부터 명마를 인계받은 벤허는 전차 경주를 대비해 말들을 훈련시킨다. 족장의 집에서 벤허는 사고가 날 뻔했던 가마 주인과 그의 딸 이라스를 만난다. 가마 주인의 이름은 발타사르. 그는 세 명의 동박 박사 중 한 사람이었다. 벤허는 이라스에게 사랑을 느낀다.

 

시모니데스는 벤허에게 자신이 벤허의 노예라고 말한다. 대상인이었던 그는 전 재산과 자신의 딸 에스더를 벤허에게 바치려 한다. 에스더는 벤허를 사모한다.

 

시모니데스의 거금을 바탕으로 시모니데스, 일데림, 벤허는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조직한다. 전차경주에서 벤허는 메살라의 전차를 교묘히 부신다. 메살라는 경주에서 간신히 목숨만을 건진다.

 

로마의 총독이 그라투스에서 본디오 빌라도로 바뀐다. 총독의 지시에 따라 안토니아 성채에서 지하 감옥을 조사하던 중 비밀에 싸인 감옥에서 두 여성 나 환자가 발견된다.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인 티르자. 벤허의 어머니는 퇴색한 옛 집 앞에서 잠들어있는 벤허를 만나지만 나병이라는 이유로 아들에게 아는 체 하지 못하고 딸과 함께 나병촌으로 들어간다.

 

메시아의 소문을 듣고 벤허는 발타사르와 함께 세례 요한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벤허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을 만난다. 나사렛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던 중 두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준다. 벤허는 병으로부터 치유된 엄마와 동생과 재회하고 예수의 기적 앞에서 그가 구세주임을 믿는다. 한편 그가 사랑하던 이라스는 예수가 왕이 아니라 거지라며 예수를 비웃을 뿐 아니라 그를 믿는 벤허와 유대인들을 비웃는다.

 

벤허는 예수를 구할 수 있었지만 예수는 벤허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끝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이 두꺼운 책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는 예수라기보다는 역자다. 만약 게으르고 나태한 역자가 번역했더라면 끝까지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랬소, 저랬소가 남발했을테니. 심지어 한국 작가 중 손 모 작가처럼 대화문마저 번역체 문장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있다.

토 나올 것 같아 못 읽는다.


내가 읽은 외국 소설 번역 중 가장 매끄럽다.

어디선가 산들산들한 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 산뜻한 번역이다.

역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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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dgling 2016-04-0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비딕>읽으면서 김석희 역자 책들은 다 보고 싶더군요~! 김진준씨 이후로 마음에 드는 역자 공감합니다!

시이소오 2016-04-01 12:54   좋아요 0 | URL
김석희 역은 마음놓고 읽겠어요 ^^

서니데이 2016-04-0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석희 역이네요.^^
시이소오님 ,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시이소오 2016-04-01 18:1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불금되소서^^
 
데칼로그 - 김용규의 십계명 강의
김용규 지음 / 포이에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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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는 <백만장자의 질문>이란 책으로 재벌에 부역하고 혹세무민하였으므로 별점을 깍는다. 

 

20대 때 니체를 읽고 나 역시 니체를 따라 안티 크리스트를 선언했다.

그런 내가 십계명에 관한 책을 읽을 줄이야!

 

강석경의 <저 절로 가는 사람>을 읽고선 당장 삭발하고 출가하고 싶었다.

반면 이 책을 읽고선 당장 교회로 달려가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싶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다. 찬송하고 싶었다.

, 주여~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어릴 때부터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건 평일에 학교 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교회가면 좋았다. 먹을 것도 주고, 예쁜 교회 여동생도 있고, 교회 누나도 있고, 계란 먹는 부활절도 좋았고, 크리스마스 때면 부모님 허락 하에 밤을 샐 수 있는 새벽송도 좋았고, 성가대 활동도 좋아했다. (, 가스펠 송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럼에도 나는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에 의구심을 갖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성경 탓이었다. 머리가 커지면서 도무지 성경을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신이라는 자가 허구헌날 전쟁 일으켜 사람 죽이기 바쁘다. 잔인하긴 이루 말할 수 없다. 툭하면 시기하고 질투한다. 찬양하라고? 인간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며 나를 찬양해! 찬송해!’라고 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피조물의 찬양 따위가 무엇 때문에 필요할까? 오로지 허영심 때문이다. 욥을 보아라. 열심히 믿으면 뭐하나? 신은 사탄의 한 마디에 혹해서 죽어라고 괴롭힌다. 사랑은 개뿔. 살인하고, 잔인하고, 질투하고, 귀가 얇고, 의심하고, 시험하고.

 

이 신과 가장 흡사한 인간 성격 유형을 뭐라 하는가?

팜므파탈이다. 신은 남자인가? 그렇다면 옴므파탈’.

한국말로 하자면 양아치, 조폭, 깡패, 불한당이다.

 

초기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정말 믿고 싶다.......죽도록 믿고 싶은데.....

 

빌려온 책들엔 낙서를 할 수 없어 조그마한 포스트 잇을 붙여놓는다. , 겨우 일계명 읽는데 거의 매 페이지마다 포스트 잇을 붙였다. 포기했다. 매 페이지마다 붙이면 도대체 왜 붙인단 말인가. 필사 포기다.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

 

단 한 번도 십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학자들이 십계명을 연구했다니! 김용규는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연작 드라마 <데칼로그>에서 책의 영감을 얻었다. 그는 드라마 <데칼로그>를 매개로 십계명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십계명을 한 번 불러볼까.

 

1

 

1: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3)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 20:3 ~6)

 

3: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출애굽기 20: 7)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으니라 (출애굽기 20: 8~11)

 

2

 

5: 네 부모를 공경하라.....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갈리라 (출애굽기 20: 12)

6: 살인하지 말라 (출애굽기 20: 13)

7: 간음하지 말라(출애굽기 20: 14)

8: 도둑질하지 말라 (출애굽기 20: 15)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애굽기 20:16)

10: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애굽기 20:17)

 

1판이 신과 인간의 관계라면 2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이 열 계의 계명이 추후 율법학자들에 의해 613개까지 확대되었다. ‘안식일에 아이를 안아도 되지만 돌을 든 아이를 안으면 안 된다는 둥 십계명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는커녕 족쇄이자 사슬이었다. 김용규는 크뤼제만의 사회학적 해석을 토대로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예흐예 아세르 예흐예신은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로 해석된다. 저자는 이러한 있음. 존재에 주목한다. 야훼는 그는 있다라는 뜻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끔 한다. 1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의 뜻은 신 안에서만 인간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2계의 뜻은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섬기지 말라는 뜻이다. , 쾌락, 권력, 이성 등은 우상의 예다. 저자는 종교해악론자들과 종교말살론자들을 비판한다.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 <종교의 종말>의 샘 해리스, <주문을 깨다>의 대니얼 데닛,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데이비드 밀스 등등.

 

저자 입장에서 이들은 여전히 이성을 우상처럼 섬기는 자들이다. 저자는 종교에 의한 만행이 사실임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20세기에 벌어진 제노사이드가 모두 종교 때문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다른 이유로 나는 종교말살론에 반대한다. 종교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은 사유재산 폐지만큼이나 순진한 발상이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당연하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한정된다는 뜻이다. 신은 무한자요. 무규정자다. 이름이 있다면 그는 신이 아니다.

 

3계는 아무런 목적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합당하게 신의 이름을 사용하라는 뜻이다.

 

4계명 역시 인간에게 자유라기보단 족쇄로 작용했다.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등 온갖 율법을 고안해냈다. 안식이란 무엇인가? ‘무엇 이 아니라 있음에 거주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무엇 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엄마의 있음에만 관심을 갖는다. 부모 역시 아이가 똑똑해서, 잘 생겨서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자식의 있음에 감사하고 있음을 사랑할 뿐이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타인은 우리를 있음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무엇 으로만 바라본다.

 

죄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수페르비아. , 인간 스스로를 신처럼 높이려는 마음이 죄다. 그것은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 신에게서 돌아섬은 존재 상실이다. 리쾨르에 의하면 그것은 혼의 상실이다. 그것은 또한 도저히 안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죽은 혼콘큐피스켄치아곧 한없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무엇 을 향한 한없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며, 존재 자체의 자유이며 신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자만을 극복하고 복종하라는 가르침이다. 자만 때문에 타락했으므로 인간에겐 겸손만이 유일한 길이다. 니체는 기독교 정신을 낙타에 비유했다. 그는 기독교를 삶을 부정하는 긍정이라 비판했다. 저자는 복종이 자유인의 미덕이며 복종하는 자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나처럼 불가지론자(현재)의 입장에선 니체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크뤼제만에 따르면 살인하지 말라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 ‘rsh’는 의도되지 않은 살인마저 포함한다. 그러나, 저자는 존재론적인 살인을 하지말라로 해석한다. 존재론적 살인이란 영혼의 살인이다. ’소외당하는 것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프롬에 따르면 사랑이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서로 사랑하라라는 뜻으로 확대된다.

 

저자는 간음하지 말라의 계명을 네 이웃을 사랑하라의 뜻이라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두 종류로 나눈다. 피조물에 대한 하향적 사랑인 쿠피디타스cupiditas와 신을 향한 상승적 사랑인 카리타스caritas. 쿠피디타스가 무엇-에 대한 사랑이라면 카리타스는 있음에 대한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수관으로 흘러가는 물을 정원으로 끌어가시오라고 했다는데 과연 그렇게만 하면 쿠피디타스를 카리타스로 바꿀 수가 있을까.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인간을 소유 가능한 존재물로 취급하여 무엇-을 이용하려는 탐욕을 버리라는 뜻이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 9계명은 네 이웃의 명예, 권리, 소유, 그리고 행복에 해를 끼치는 말을 하지 말라, 사랑 안에서 서로 도우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말하라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말하라의 뜻은 인식의 진리가 아닌 존재의 진리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마지막 10계를 영화 <데칼로그>처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라‘, 둘로 나눈다. 10계는 한 마디로 자족하라의 가르침이다. ’너는 네게 있는 것에 자족하고, 네게 없는 것을 탐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가졌으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가지지 않았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구원을 실존의 3단계설로 설명하였다.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종교적 단계의 예가 욥이다. 무한한 자기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다. 그에 따르면 구원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이지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고난이 없는 인간은 종교적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프로이트와 프롬은 돈을 지옥의 똥으로 보았다. 프롬은 탐욕이 지닌 네크로필리아적 성격에 대해 말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증오하고 죽은 것을 사랑하는 일종의 병적 상태, 그것이 네크로필리아다. 반면에 생명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정열적 사랑이 바이오필리아다.

 

현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사회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부채인간으로 만들었다. 부채가 이익을 창출하는 금융자본주의에선 아무도 빚 없이 살 수 없다. 오늘날의 문학, 철학, 종교는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탐욕에서 벗어날 것인가. 죄 때문에 탐욕의 노예가 되었기에, 죄 사함만이 탐욕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합하여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 이른바 레카피툴라티오(총괄적 갱신), 흔히 말하는 거듭남에 의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프로이트로 말하자면 타나토스와 에로스.

 

기독교 사상에서 구원을 이루는 두 개의 주된 메커니즘이 있다. 칭의와 성화다. 칭의는 죄인을 의인 되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이라고도 부른다. 성화는 악인이 선인이 된다는 뜻이다.

 

세례를 받고도 악한 행동을 계속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구원 받을 수 없다. 세례가 아니라 성화가 구원의 징표다. 세례만 받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바울로부터 나왔다. 바울의 간사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악의 구덩이 속으로 빠졌던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는 결국 성화되어라의 뜻이다. 성화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저자는 십계명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다른 신이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각종 우상이다. 십계명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한다면 너는 너 자신으로 존재하라가 아닐까. 물론 이건 불가지론자의 관점이다.

 

키에슬롭스키는 <데칼로그>를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말했다. 탐욕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부채인간이다. 우리는 무엇 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 처해야 한다. 있음에 처하는 것. 그것이 곧 자유다.

 

십계명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사악할까. 신도를 강간하는 목사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왜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자유가 아닌 물질에 구속된 삶을 추구할까. 끊임없이 교회는 지어지지만 기독교인들의 탐욕은 누그러들지 않는다. 성화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내가 기독교에 느끼는 감정은 샤를 페기가 칸트의 도덕률에 대해 말한 것과 흡사하다.

그것은 순결한 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는 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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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1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31 14:31   좋아요 0 | URL
동감입니다. 저는 저말을 `있음`에 처하라로 해석해요. 그러면 견딜만 해져요 ㅋ ^^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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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적 평론가와 섬세한 평론가가 있다.

현학적 비평이 작품을 난도질한다면 섬세한 비평은 작품을 감싸 안는다.

정성일 평론가를 존경한다. (이제 감독이라 불러야 할까, 혹은 영화인?)

현학적 평론가의 수장은 정성일이다. 고로, 정성일 평론은 읽지 않는다. 정성일은 마치 소개팅을 주선해 놓고 소개해주는 친구의 장점을 말해주기는커녕 자기자랑만 일삼는 주선자와 같다.

 

도대체 문학이나 영화 평론에 라캉이나 들뢰즈가 왜 필요한가? 허세에 가득 차 현학적인 용어를 남발하는 교만과 자만에 빠진 비평은 관객/독자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히브리스 비평, 수페르비아 비평. 그가 비평하는 영화는 보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섬세한 평론가의 수장은 단연 신형철이다. 신형철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책은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미치겠다. 신형철은 작품 안에 머무르면서 왜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독자에게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손수건 같은 비평. 벙어리장갑 같은 비평.

 

정성일은 끊임없이 작품 밖으로 나가 온갖 쓸모없는 잣대를 가져와 들이밀기 바쁘다. 정성일 식 비평은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다. 들뢰즈, 라깡 및 온갖 철학자의 이론에 들어맞지 않으면 작품은 잘려지고 만다. 잘려진 작품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심지어 살아남은 작품마저 온데간데없긴 마찬가지다. 철학자의 헛소리만 메마른 대지에 남아 유령처럼 맴돌 뿐이다.

(, 주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들이 뭐하고 자빠졌는지 모릅니다.~~ )

 

테리 이글턴은 신형철 같은 비평가다. 이 책에선 그 어떤 철학자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소설을 깊이 있게 읽을 뿐이다. 왜 어떤 문장이 좋은지, 왜 어떤 문장이 나쁜지를 문학 안에서 설명해준다.

 

테리 이글턴은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첫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영어 원문이 실려 있어 우리는 소설 첫 문장의 운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테리 이글턴은 말한다. <요한 복음>의 도입부 문장이 왜 뛰어난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첫 문장의 아이러니가 왜 탁월한지, <모비딕> 첫 문장이 왜 유명한지. 모더니스트들과 사실주의자들 사이에 캐릭터, 서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문학을 감정이입으로 해석하기엔 어떤 오류가 있는지, 등등.

 

이 책의 원제는 ‘how to read literature’. ,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문학 읽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테리 이글턴은 소설가를 믿지 말고 소설을 믿으라고 충고한다. 심지어 소설은 소설을 쓴 소설가의 사상과 다를 수도 있다.

 

우리는 소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글턴은 서사의 흐름에서 뒤로 물러서서 되풀이되는 관념이나 관심사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인물을 고립시켜 보지 말고, 주제와 플롯, 이미지와 상징을 포함하는 패턴의 한 요소로 파악하라고. 도덕적 비젼 역시 중요하다. 신형철 역시 <몰락의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이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면.’


혹은 계보를 추적하며 문학을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탐 존스부터 해리 포터까지 고아 문학의 계보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문학을 좋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창성? 이글턴에 따르면 새롭다고 해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는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더 높다. 보편적인 호소력? 그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작품이란 무릇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미? 그것도 아니다. 테리 이글턴은 사적 선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부분의 소설이 재미가 없다.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에 대한 공적인 기준, ‘규범적 이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심오하고 복잡함? 그것도 문학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플롯이 조화롭고 통일된 문학? 그것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희곡은 <고도를 기다리며>이고 가장 훌륭한 소설은 <율리시스>이며 가장 훌륭한 시는 <황무지>. 이 세 작품 모두 플롯이랄 게 없다. 어휘가 풍부하고 화려한 문학? 그것도 아니다. 조지 오웰의 산문은 풍부하지 않다.

 

테리 이글턴은 문학 작품의 몇 구절의 분석을 통해 좋은 문학의 정의를 내리려 시도한다. 여기서 테리 이글턴은 존 업다이크와 윌리엄 포크너를 물 멕인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업다이크의 문장은 반질반질할 정도로 기교적이고, 포크너의 문장은 그저 망할 일들이 줄줄이 이어지며조야하고 수다스럽다.

 

그에 비해 에벌린 워나 나보코프, 캐럴 실즈의 문장은 뛰어나다. 이글턴에 따르면, 에벌린 워의 문장은 선명하고 불순물이나 군더더기가 없다. 억제하지도 과시하지도 않는다. 기교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문장은 젠체하긴 하지만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문학적>이다. 캐럴 실즈의 <사랑 공화국>의 문장은 섬세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이 어떤 것인지 딱히 결론 내리지 않았다. 꼼꼼한 읽기를 통해 몇몇 작품 단락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을 뿐이다. 혹시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이란 독자인 우리가 문학을 좀 더 섬세하게, 깊이 있게 읽을 때, 그때서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좋은 독자, 일류 독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다시 읽는 독자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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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북 2016-03-3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저랑 비슷한 시간에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셔서 반가워요~ 이런 이유로도 친밀한 느낌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3-30 14:54   좋아요 0 | URL
원더북님, 저도 화들짝 했네요. 반갑습니다^^

프레이야 2016-03-3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는 독자가 되어야겠군요. 섬세하게 작품을 품어 안는 비평가가 저는 좋더군요. ^^

시이소오 2016-03-31 00:05   좋아요 0 | URL
그쵸? 저만 그런거 아니죠 ㅋ^^

eL 2016-03-3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첫문단 보고 오? 하면서 클릭해서 끝까지 읽었네요. 두가지 서로 다른 비평에 대한 이야기가 와닿아요. 어떤의미에서는 두 비평의 차이가 대상을 분석하느냐 대상에 다가가느냐의 차이인 것 같은데.. 저도 후자가 좋으네요 ^^

시이소오 2016-03-31 23:34   좋아요 1 | URL
비평은 사랑입니다 ^^

포스트잇 2016-06-0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오래전에 이미 이 책을 정리하셨군요. 대단한 책이죠? ㅎㅎ

시이소오 2016-06-07 12:16   좋아요 0 | URL
테리이글턴 책도 이미오래전에 번역되었더라구요

이글턴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