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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ㅣ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한나 아렌트 지음,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월
평점 :
아렌트를 잘 모른다. 50년대, 60년대 활동했고 1975년에 작고한 사상가가 오늘날 주목받는 이유가 뭘까? 인문학 계열의 책을 읽다보면 한 번 쯤은 마주치게 되는 한나 아렌트. 이 책은 그녀의 네 번의 인터뷰를 담았다. 숄렘의 비판, 토니 쥬트의 비판, 한국 정치철학자 정화열 교수의 비판 등, 아렌트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의 독서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나는 아렌트 편이다.
오늘날의 아렌트를 만든 건 무엇 때문일까? 여기서도 읽는다.
“칸트를 읽었거든요. 왜 칸트를 읽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는데, 내 입장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왠지 이런 것 같아요. 내겐 그건 철학을 공부하거나 물에 몸을 던지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였다고요. 그렇다고 내가 목숨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앞서 말했듯 나한테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그녀는 10대 때, 칸트, 야스퍼스, 키르케고르를 읽었고, 그리스 시를 읽었다.
아렌트에 따르면 히틀러가 권력을 쥔 1933년에 유대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았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친구들의 전향이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연인 사이였던 하이데거의 전향은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리라.
나치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10년이 지난 1943년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아렌트는 말한다. “이건 절대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에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간된 이후 아렌트는 특히나 숄렘을 비롯한 유대인으로부터 유대인을 비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나 아렌트는 오해라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내 친구들만 사랑했고, 내가 잘 알고 또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입니다. 게다가 이 ‘유대인들의 사랑’은, 나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나한테는 상당히 의심쩍은 것으로 보이고는 합니다.”
아렌트가 오늘날에도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아렌트의 63년 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주장한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나는 ‘악의 평범성’을 완전히 오해했다.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악의 평범성’은 방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파생된다. 아이히만은 공무원이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부당함을 알았지만 명령에 순응했다. 그는 행동을 멈추고 사유 하지 않았다. 그는 ‘익명성’뒤에 숨어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마음만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익명성 뒤에 숨어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일베현상을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부당한 명령인줄 알면서도 명령에 순응하는 공무원들을 떠올릴 수 있다. 틈만 나면 간첩 조작질, 댓글 알바짓, 민간인 사찰 짓거리를 일삼는 국정원 공무원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히면 어떨까.
또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정화열 교수는 “제 3 세계는 실제reality가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다”라는 아렌트의 주장 때문에 그녀를 비판한다. 아마도 그는 제 3 세계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전혀 다른 의미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남미는 실제로서 존재해요. 이 지역들을 유럽 그리고 미국과 비교해보면 그곳은 저개발 지역이라 말할 수 있고, 당신은 그 점 때문에 그게 이 나라들 사이의 중요한 공통분모라고 주장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공유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간과하고, 그들이 공유하는 게 다른 세계와 대비할 때에만 존재하는 차이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놓치죠. ‘저개발’이라는 아이디어를 중요한 요소로 보는 그런 관점은 유럽인과 미국인이 가진 편견이에요.......언제 한번 중국인을 붙잡고서 ”당신은 아프리카에 사는 반투족과 정확히 동일한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보세요. 장담컨대 당신은 평생 본 중에 가장 경악하는 반응을 보게 될 거에요.”
아렌트가 ‘제 3세계’를 실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라 주장한 이유는 그것이 마치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미국인, 유럽인의 편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제 3 세계’는 ‘슬럼’과도 비슷한 단어라고 할까. 아무도 자신이 사는 곳을 슬럼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가진자들이 보기에 ‘슬럼’일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살아남았을까? 부정적인 사람들? 당연히 거의 죽었다. 시크릿 추종자들 마냥 긍정적인 사람들은? 예상과 달리 거의 죽었다. 그들은 자신이 긍정하는 세계가 자신의 눈앞에 당장 펼쳐지지 않자 인내할 수 없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긍정하는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무턱대고 현실을 긍정하는 삶의 자세, 부정적인 삶의 자세만큼이나 위험하다. 현재가 완전하다고? 지금이 당연하다고? 사유해야만 한다.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세계와 적대적이어야 한다. 적대적이라고 해서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다. 아이를 야단치는 게 아이가 커서 거지, 비렁뱅이, 한량, 범죄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가?
바우만을 따라서 다시 한번 반복해볼까?
“숨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
밑줄 친 문장들
p61. fiat veritas, et pereat mundus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진리가 말해지도록 하라)
p66. 개인적 경험없이 가능한 사유과정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아요. 모든 사유는 뒤늦은 사유예요. 즉, 어떤 문제나 사건을 사후에 숙고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p70. “인간성은 혼자 힘으로는 절대 획득되지 않으며, 누군가 자신의 작업을 대중에게 바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성은 자신의 삶과 존재 자체를 ‘공공 영역으로 향하는 모험’에 바친 사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p76.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 – 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것- 이 권력을 낳는다는 거예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p81. 악은 항상 유혹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반면 선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절대 하려고 들지 않는 일이라고들 생각하죠.....나는 이건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브레히트는 선한 일을 하려는 유혹은 우리가 늘 이겨내야 하는 무엇이라는 점을 항상 보여주고 있어요.
p86. 내가 말하는 바는 칸트가 말했듯이, “다른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런 종류의 멍청함.....이 사람들은 당신에게 절대로 관심을 갖지 않으니까요. 그게 독일적인 거예요.
p95. 망설임은 있었죠. 그들은 망설임을 가진 공무원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의 망설임은 인간이라면 그저 한 사람의 공무원으로 존재하기를 멈춰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명확히 보여줄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어요. 그들이 자기 자리를 떠나 “맙소사, 추악한 일들은 다른 누군가 하게끔 합시다!”하고 말했다면, 그랬다면 그들은 어느새 다시금 인간이 됐을 거예요. 공무원으로 존재하는 대신에 말이에요. 그렇지 않았을까요?
p98.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또 다른 명제가 있어요. 내가 보기에 다음 명제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제공하죠.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니까.”
p99. 아이히만은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나한테 주어진 일을 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의 공적인 영혼은 항상 그가 한 일과 일치했지만 사적인 영혼은 항상 그걸 반대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렌트 : 맞아요. 이게 이른바 살인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내면적 이민이에요. - 이것은 내면적 이민이나 내적인 저항이라는 개념 전체가 소멸했다는 뜻이죠. 내 말은, 그런 건 없다는 거예요. 세상에는 외면적 저항만 있을 뿐이에요. 인간의 내면에는 기껏해야 심리 유보만 이써요. 맞죠? 그것들은 허깨비들이 하는 거짓말이에요. ...관료제는 대량학살을 행정적으로 자행했고, 그런 상황은 여느 관료제가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명성의 느낌을 창출해냈어요.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졌어요.
관료제가 본질적으로 익명성을 갖는다는 사실 말고도, 무자비한 행위는 무엇이건 책임이 증발되는 것을 허용해요. “멈춰서 생각해보라. Stop and think”라는 용어 관용구가 있어요. 어느 누구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한 생각에 잠길 수 없어요......
102.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 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ㅇ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 ”
p103. 흐로티위스를 인용해야겠군요. 그는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가 피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명예 및 품위와 관련된다고 말했어요. 이건 피해자가 감내한 고통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무엇인가 올바로 세우는 것하고도 전혀 관계가 없고요. 이건 정말로 명예와 품위의 문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