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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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적 평론가와 섬세한 평론가가 있다.

현학적 비평이 작품을 난도질한다면 섬세한 비평은 작품을 감싸 안는다.

정성일 평론가를 존경한다. (이제 감독이라 불러야 할까, 혹은 영화인?)

현학적 평론가의 수장은 정성일이다. 고로, 정성일 평론은 읽지 않는다. 정성일은 마치 소개팅을 주선해 놓고 소개해주는 친구의 장점을 말해주기는커녕 자기자랑만 일삼는 주선자와 같다.

 

도대체 문학이나 영화 평론에 라캉이나 들뢰즈가 왜 필요한가? 허세에 가득 차 현학적인 용어를 남발하는 교만과 자만에 빠진 비평은 관객/독자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히브리스 비평, 수페르비아 비평. 그가 비평하는 영화는 보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다.

 

섬세한 평론가의 수장은 단연 신형철이다. 신형철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책은 보고 싶다. 보고 싶어 미치겠다. 신형철은 작품 안에 머무르면서 왜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독자에게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손수건 같은 비평. 벙어리장갑 같은 비평.

 

정성일은 끊임없이 작품 밖으로 나가 온갖 쓸모없는 잣대를 가져와 들이밀기 바쁘다. 정성일 식 비평은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다. 들뢰즈, 라깡 및 온갖 철학자의 이론에 들어맞지 않으면 작품은 잘려지고 만다. 잘려진 작품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심지어 살아남은 작품마저 온데간데없긴 마찬가지다. 철학자의 헛소리만 메마른 대지에 남아 유령처럼 맴돌 뿐이다.

(, 주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들이 뭐하고 자빠졌는지 모릅니다.~~ )

 

테리 이글턴은 신형철 같은 비평가다. 이 책에선 그 어떤 철학자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소설을 깊이 있게 읽을 뿐이다. 왜 어떤 문장이 좋은지, 왜 어떤 문장이 나쁜지를 문학 안에서 설명해준다.

 

테리 이글턴은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첫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영어 원문이 실려 있어 우리는 소설 첫 문장의 운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테리 이글턴은 말한다. <요한 복음>의 도입부 문장이 왜 뛰어난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첫 문장의 아이러니가 왜 탁월한지, <모비딕> 첫 문장이 왜 유명한지. 모더니스트들과 사실주의자들 사이에 캐릭터, 서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문학을 감정이입으로 해석하기엔 어떤 오류가 있는지, 등등.

 

이 책의 원제는 ‘how to read literature’. ,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문학 읽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테리 이글턴은 소설가를 믿지 말고 소설을 믿으라고 충고한다. 심지어 소설은 소설을 쓴 소설가의 사상과 다를 수도 있다.

 

우리는 소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글턴은 서사의 흐름에서 뒤로 물러서서 되풀이되는 관념이나 관심사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인물을 고립시켜 보지 말고, 주제와 플롯, 이미지와 상징을 포함하는 패턴의 한 요소로 파악하라고. 도덕적 비젼 역시 중요하다. 신형철 역시 <몰락의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이 윤리와 무관했던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문학이라면.’


혹은 계보를 추적하며 문학을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탐 존스부터 해리 포터까지 고아 문학의 계보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문학을 좋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독창성? 이글턴에 따르면 새롭다고 해서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는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더 높다. 보편적인 호소력? 그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작품이란 무릇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미? 그것도 아니다. 테리 이글턴은 사적 선호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부분의 소설이 재미가 없다.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에 대한 공적인 기준, ‘규범적 이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심오하고 복잡함? 그것도 문학을 가치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플롯이 조화롭고 통일된 문학? 그것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희곡은 <고도를 기다리며>이고 가장 훌륭한 소설은 <율리시스>이며 가장 훌륭한 시는 <황무지>. 이 세 작품 모두 플롯이랄 게 없다. 어휘가 풍부하고 화려한 문학? 그것도 아니다. 조지 오웰의 산문은 풍부하지 않다.

 

테리 이글턴은 문학 작품의 몇 구절의 분석을 통해 좋은 문학의 정의를 내리려 시도한다. 여기서 테리 이글턴은 존 업다이크와 윌리엄 포크너를 물 멕인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업다이크의 문장은 반질반질할 정도로 기교적이고, 포크너의 문장은 그저 망할 일들이 줄줄이 이어지며조야하고 수다스럽다.

 

그에 비해 에벌린 워나 나보코프, 캐럴 실즈의 문장은 뛰어나다. 이글턴에 따르면, 에벌린 워의 문장은 선명하고 불순물이나 군더더기가 없다. 억제하지도 과시하지도 않는다. 기교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나보코프의 <롤리타>의 문장은 젠체하긴 하지만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문학적>이다. 캐럴 실즈의 <사랑 공화국>의 문장은 섬세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이 어떤 것인지 딱히 결론 내리지 않았다. 꼼꼼한 읽기를 통해 몇몇 작품 단락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을 뿐이다. 혹시 테리 이글턴은 좋은 문학이란 독자인 우리가 문학을 좀 더 섬세하게, 깊이 있게 읽을 때, 그때서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좋은 독자, 일류 독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다시 읽는 독자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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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북 2016-03-3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저랑 비슷한 시간에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리셔서 반가워요~ 이런 이유로도 친밀한 느낌이 드네요^^

시이소오 2016-03-30 14:54   좋아요 0 | URL
원더북님, 저도 화들짝 했네요. 반갑습니다^^

프레이야 2016-03-3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는 독자가 되어야겠군요. 섬세하게 작품을 품어 안는 비평가가 저는 좋더군요. ^^

시이소오 2016-03-31 00:05   좋아요 0 | URL
그쵸? 저만 그런거 아니죠 ㅋ^^

eL 2016-03-31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첫문단 보고 오? 하면서 클릭해서 끝까지 읽었네요. 두가지 서로 다른 비평에 대한 이야기가 와닿아요. 어떤의미에서는 두 비평의 차이가 대상을 분석하느냐 대상에 다가가느냐의 차이인 것 같은데.. 저도 후자가 좋으네요 ^^

시이소오 2016-03-31 23:34   좋아요 1 | URL
비평은 사랑입니다 ^^

포스트잇 2016-06-0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오래전에 이미 이 책을 정리하셨군요. 대단한 책이죠? ㅎㅎ

시이소오 2016-06-07 12:16   좋아요 0 | URL
테리이글턴 책도 이미오래전에 번역되었더라구요

이글턴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