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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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뉴욕 타임스> 도쿄지국장인 마틴 파클러는 끝없는 불황, 비좁은 취업문, 부조리한 사회제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이 왜 저항하지 않는가 물었다. (나 역시 한국 젊은이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저자인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대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사토리 세대라 불리는 일본 20대의 75프로가 지금 나는 행복하다고 응답했다. 도대체 왜 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까.

 

사토리 세대는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옷을 사고 맥도날드에서 런치세트와 커피를 사 먹고 집에서는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로 친구와 채팅을 즐기거나 화상채팅을 한다. 가구는 니토리나 이케아에서 사고 밤에는 친구 집에서 모여 식사와 반주를 즐긴다.

 

사토리 세대는 80년대가 부럽지 않다. 80년대에는 tv 및 전자제품의 가격도 비쌌고 플레이스테이션도 없었고 닌텐도도 없었으며 인터넷도 없었고, 핸드폰도 없었다.

 

행복한 젊은이의 정체는 컨서머토리라는 용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컨서머토리란 자기 충족적이라는 의미로,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사토리 세대의 컨서머토리한 삶의 방식은 과연 바람직한걸까. 지금의 상황을 긍정하는 사토리 세대의 이면에는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다는 체념의 정서가 깔려있다.

 

전후의 단카이 세대는 국가를 복원하려는 목적의식이 있었고, 이후 전공투 세대는 체제의 모순에 저항하기 바빴다. 거품 경제가 붕괴되고 장기 불황에 접어든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은 목적의식이 없다.

 

일본을 민주국가라고 볼 수 있을까. 한국과 마찬가지로 무늬만 민주국가일 뿐이지 체제의 모순과 공직자의 비리는 심각하다. 예전에 장강명의 <표백>을 읽고 어찌나 분노했던지. ‘완벽한 사회라고? 이 나라가 완벽하기에 자신들은 할 일이 없단다. 미친 거 아닌가. 몇 일 전 세월호 관련 시위에 경찰은 차벽을 세워놓고 무력으로 시위 참가자들을 연행했다. 온갖 불의가 백주대낮에 행해지고 있는 이 썩어빠진 나라가 완벽하다니!

 

내가 보기에 일본 20대가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경제력이다. 일본에선 정규직이나 프리터의 임금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대다수 젊은이들이 부모세대와 같이 산다.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우석훈의 <불황10>에 따르면 일본 젊은이들의 저축율은 2013년 기준 35%. 일본 젊은이들이 컨서머토리한 삶을 산다지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체념하기엔 너무 이르다.

한 번 뛰어보고 포도를 먹지 못한 여우는 저 포도는 실거야하고 자족하고 돌아갔다.

체념을 행복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사토리 세대란 말은 우리 나라의 열정 페이만큼이나 기성의 권력자들이 유포한 말이 아닐까. ‘사토리란 일시적인 깨달음을 뜻한다. 그들은 깨달은 자들이 아니다. 우물 안에서 자족하는 개구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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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1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1 20:56   좋아요 1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반핵시위, 반전시위가 일어나는걸 보면 희망이 있는것도 같아요^^

2016-03-05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6-02-2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정치, 경제가 문제여서 그렇지, 일본의 시민사회는 건강한 것으로 압니다. *^

시이소오 2016-02-21 21:31   좋아요 0 | URL
어느 나라나 부패한 정치인들이 가장 큰 골칫거리 같습니다 ^^

장맥 2016-02-22 16:46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정치,경제가 문제인데 시민사회가 건강하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정치인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라고, 함량미달인 정치인, 나쁜 짓 하는 정치인은 국민을 우습게 보고 다음에도 선택받은 거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누가 뽑아줬습니까? 국민이 뽑은 거예요.

아타락시아 2016-02-2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보다 우리가 더 걱정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1 22:28   좋아요 0 | URL
ㅋ 정답이네요^^

비로그인 2016-02-21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정답이네요 ^^

깊이에의강요 2016-02-22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항하지 않는게 아니라
저항하고 있는 그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작은 불씨라도 댕길라치면 비벼 꺼 버립니다.
소녀상 앞에서 노숙하는 대학생들이 눈에 밟힙니다.

시이소오 2016-02-22 14:49   좋아요 0 | URL
하긴 젊은이들 보단 기성세대가 더 문제죠~~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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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국은 심리정치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 ‘투명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에 대해 말하자면 <위험사회>의 울리히 벡,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지그문트 바우만, <호모 사케르>의 아감벤, <구별짓기>의 부르디에의 이론이 한병철의 이론 보다는 더 적절할 것이다.

 

어떤 국가든 한병철이 비판하는 심리정치의 단계로 나아가는 게 역사의 일반적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이없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할 색누리당이라는 군사독재 잔당들이 권력을 잡는 바람에 한병철의 이론이 맞지 않는 국가가 돼버리고 말았다.

 

한국은 투명사회가 아니다. 메르스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국가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국가는 정보를 독점하려 한다.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할 정보자체도 공개하지 않는다. 국민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의 빅브라더는 눈곱만큼도 스마트하지 않을뿐더러 친절하지도 않다. 여전히 규율 권력을 작동시킨다. 정보를 공유하려는 국민들을 유언비어 유포라는 이유로 협박하고 감금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한 JTBC 손석희는 소환 당했고, 정부와 박근혜가 아몰랑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메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박원순 시장은 검찰로부터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친절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기보다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한국 사회와는 들어맞지가 않는다.

우리의 대통령께서 독재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해선 국가에 대한 논의는 배제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로 한정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후진국 국민으로서 감수해야하는 불편함)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개인은 자본의 페니스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에서 긍정성은 부정성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빅데이터를 우상화한다. 그러나, 한병철이 보기에 빅데이터는 통계에 불과할 뿐이다. 통계를 통한 지식은 유일무이한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절대적 무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경험해야한다.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 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바보가 돼야만 한다.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

 

들뢰즈는 말했다. “철학은 언제나 바보노릇이라고. 철학사는 바보짓의 역사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바보만이 동일자의 지옥속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해야 한다.

 

 

 

메모한 문장들

 

자유의 위기.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설적 상황에 빠진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강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의 반대여야 할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경영자 사이에서는 목적 없는 우정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들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인도게르만어에서 자유Freiheit와 친구Freund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개인적 자유는 스스로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노예 상태와 다름없다. 그러니까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 자본은 끊임없이 살아 있는 새끼들을 친다. 오늘날 과도한 형태에 이른 개인의 자유는 결국 자본 자체의 과잉을 의미할 따름이다.

 

자본의 독재.

 

신자유주의 질서는 타자에 의한 착취를 어떤 계급도 빠져나갈 수 없는 자기 착취로 탈바꿈시킨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무계급적 자기 착취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회 혁명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별을 전제로 한다면, 무계급적 자기 착취는 바로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주체는 고립화되고, 이로 인해 공동의 행위를 할수 있는 정치적 우리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억압적 지배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지지 않으려고, 여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액의 부채는 우리가 자유로울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죄인)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죄를 씻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지우는 제의를 벌이는 최초의 사례. 죄를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부자유의 상태가 영구화된다. “죄를 씻을 길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부채의식을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제의에 의존한다.”

 

투명성의 독재 : 한국사회와 아직은.

스마트 권력 ; 왜 한국은 아직도 규율 권력인가.

 

규율 권력은 여전히 전적으로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 그것은 허용이 아니라 금지의 형태로 구현된다. 규율 권력은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를 기술하는 데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는 긍정성의 빛을 발산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규율 권력은 비효율적이다. 사람들을 명령과 금지의 코르셋 속에 폭력적으로 욱여넣기 위해 막대한 힘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지배 관계에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권력의 기술이 훨신 더 효율적이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친철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기보다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더지와 뱀


두더지는 개방을 견디지 못한다. 이제 두더지의 자리를 뱀이 대신한다. 뱀은 규율 사회의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적 통제사회의 동물이다. 두더지와 달리 뱀은 닫힌 공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뱀은 오히려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열어간다. 두더지는 노동자다. 반면 뱀은 경영자다. 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동물이다.

 

규율 체제는 들뢰즈에 따르면 마치 처럼 조직되어 있다. 그것은 생정치의 체제다. 반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마치 영혼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이 된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없이 확산시킨다.” 이로써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위 동기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생정치

 

규율 권력은 표준화하는 권력이다. 그것은 주체를 규범, 명령, 금지의 체계에 예속시키고, 일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바로 이러한 조련의 부정적 성격이 규율 권력의 본질적 요소다.

 

푸코의 딜레마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푸코의 권력 분석에서 맹점으로 남아 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가 자아의 기술을 완전히 포섭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자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가 지배와 착취의 효율적 형식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면에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화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힐링 혹은 킬링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끝없는 최적화의 명령은 고통마저 착취한다. 미국의 유명한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인 앤서니 로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ANI 원칙을 꼭 지켜라! Constant Never Ending Improvement. 부단히, 끝없이 개선할 것! 부단히 끝없이 더 나아지고 싶다는 소망, 모든 인간이 느끼는 소망을 솔직히 인정하라. 불만족, 긴장으로 인한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가 다시 힘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당신이 삶 속에서 필요로 하는 종류의 고통이다.” 그러니까 오직 최적화라는 목적의 관점에서 이용 가능한 고통만이 용인되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 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 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친절한 빅브라더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금지하고 방지하고 억압하기 보다, 내다보고 허용하고 기획한다. 소비는 억제되지 않고 극대화된다. 결핍이 아니라 괴잉, 즉 과도한 긍정성이 생성된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하고 소비하도록 독려받는다.

 

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감성 자본주의

 

게임화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새로운 착취 관계 속에 얽어맨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화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 형식이 아닌 어떤 삶의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어떤 것.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빅데이터

 

오늘날 수치와 데이터는 절대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섹슈얼하고 물신적인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양화된 자아는 그야말로 리비도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전반적으로 리비도적인, 심지어 포르노적이기까지 한 특성을 나아낸다. 다타이스트들은 데이터와 성교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데이터 성애자에 대한 얘기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데이터 성애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디지털하다고 한다. 그들은 데이터를 섹시한다고 느낀다. 디기투스(손가락)는 팔루스(남근)에 가까워진다.

 

빅데이터는 벤야민이 말하는 영화 카메라에 비유할 수 있다. 데이터 마이닝은 디지털 돋보기로서 인간의 행동을 확대하여 의식이 작용하는 행동 공간 뒤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또 하나의 행동 공간을 조명해준다. 빅데이터의 미시물리학은 액톰, 즉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미시행동을 가시화할 것이다. 빅데이터는 또한 개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집단적 행동 패턴도 드러낼 것이다. 이로써 집단 무의식에의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미시물리학적 또는 미시심리학적 관계망을 시각적 무의식이라는 벤야민의 개념을 변형하여 디지털 무의식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으리라.

 

데이터 회사인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한다. 그러니 사실상 거의 모든 미국인의 개인 정보가 액시엄의 소유 아래 있는 것이다. 액시엄은 이제 미국인에 대해 FBI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액시엄은 인간을 70개의 범주로 나눈다


액시엄의 카탈로그에 인간은 70개 종류의 상품으로 제시되어 있다.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경제적 가치가 낮은 사람은 웨이스트쓰레기로 지칭된다. 시장 가치가 비교적 높은 소비자는 슈팅 스타그룹에 들어 있다. 나이는 36세에서 45세로 활동적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며, 아이는 없으나 기혼이고, 여행을 즐기며 시트콤 사인필드를 시청한다.

 

빅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를 만들어낸다. “쓰레기로 분류되는 사람은 최하층 계급에 속한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신용대출을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놉티콘과 나란힌 바놉티콘이 수립된다. 파놉티콘이 시스템에 갇힌 수감자를 감시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에서 떨어져있거나 시스템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불청객으로 낙인 찍고 배제하는 기구다. 고전적인 파놉티콘이 훈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의 안전과 효율을 보장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 과학이 아니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 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통계 수치는 그저 인간이 무리 짓는 짐승이라는 것, “점점 더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빅테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한다. 데이터 마이닝은 기본적으로 통계학과 다르지 않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 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과 제어를 통해 지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통치술이다. 따라서 자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은 탈심리학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무장해제시킨다. 주체는 탈심리화되고, 비워진다. 이로써 아직 이름이 없는 삶의 형식을 위한 자유가 생겨난다.

 

바보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순수한 내재성은 심리화되지도, 예속화되지도 않는 공허다. 내재적 삶은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다.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독특함, 특이성이 바보의 본질이다. 그래서 바보는 아직 개인도, 인격도 아닌 아기들과 근본적으로 닮았다.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비인격적 사건이 아기들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이다.

 

바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되지 않지만 더 이상 이름이 없는” “호모 탄툼, 특성 없는 인간을 닮았다. 바보가 들어갈 수 있는 내재성의 층위는 탈예속화와 탈심리화의 매트릭스다.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2015. 6. 16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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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변증법 2016-02-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다시 보니 더 의지가 솟아오르네요ㅎㅎ
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1:01   좋아요 0 | URL
얇아요, 빨리 읽히진 않지만 은근히 재밌어요^^

북다이제스터 2016-02-20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람 한병철이 썼는데 굳이 매번 한국사람이 번역하여 옮긴 이유가 궁금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1:33   좋아요 0 | URL
독일에서 독일어로 낸 책이라서요.저자는 한국보다 독일에서 더 유명하시죠 ~~

시이소오 2016-02-20 21:36   좋아요 0 | URL
한병철 책은 한국보다는 독일사회를 염두해두고 쓰인거겠죠. 선진국을 비판하기에는 이론적으로 맞아떨어지는데 한국같은 후진국하곤 좀 안들어맞아요 ^^;

북다이제스터 2016-02-20 21:37   좋아요 0 | URL
저자가 유학 간 사람이라 독일어 보다 한글에 더 능통한 사람이라서요. 번역은 반역인데 매번 국내에 굳이 직접 한글로 출판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서요.

시이소오 2016-02-20 22:32   좋아요 0 | URL
정확힌 모르겠지만 한병철씨 입장에서야 독일사회에 대해 쓴 책을 다시 한국어로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건 아닐까요?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비로그인 2016-02-20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빅브라더의 감시사회, 신자유주의 정글사회, 모든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체제군요. 부유한 사람들은 피할 언덕도 있고 도망갈 여력도 있는데 반해 힘 없는 사람들은 암울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2:30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집을 읽고 희망을 느꼈어요. 슬슬 세상이 뒤바뀔 때가 된 것 같아요^^

짜라투스트라 2016-02-2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좋아요를 누르면 저도 심리정치에 이용당하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기를 바랄뿐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3:40   좋아요 0 | URL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ㅋ 그런게 아닙니다 ^^

cyrus 2016-02-2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체제도 잘 보면 심리정치의 원리가 있습니다. ^^

시이소오 2016-02-21 13:4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바보가 돼야겠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2-2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정말 뛰어났습니다. 항상 제 손가락 안에 뽑는 책..

시이소오 2016-02-21 15:14   좋아요 0 | URL
우와, 역쉬 ^^

2016-02-22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2 11:42   좋아요 0 | URL
공부라고하기엔, 그냥 독서수준이죠. 감사합니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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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다이슨의 <과학은 반역이다>를 보면 러시아 천문학자 이오시프 시클롭스키의 일화가 나온다. 다이슨은 시클롭스키가 성공한 사람임에도 굉장히 우울한 성격이었다고 회고한다. 시클롭스키는 자신의 고독감의 이유를 다이슨에게 털어놓는다.

 

2차 세계 대전 끝날 무렵, 군에 입대한 시클롭스키의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은 전부 다 죽었다고 한다. 시클롭스키만 살아남았다. 몰랐다. 2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의 피해가 그 정도일 줄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나는 전쟁동안 집에서 남편을 기다렸던 여성들에 대한 인터뷰로 짐작했었다. 세상에, 백만 명의 여성들이 전쟁에 참가했다니! 그것도 대부분 15살에서 19살의 소녀들이!! 게다가 징병이 아니라 대부분 너도나도 경쟁하듯 지원했다. 어리다고 내쫓겨도 기어코 총을 잡고자 했다.

 

처음에는 계급도 모르고, 양손으로 경례를 하던 소녀들이 저격을 하고 백병전을 하고, 탱크를 폭파시키고, 포탄을 뚫고 부상병을 구출해오기도 했다. 총을 잡지 못하면 다른 일을 했다. 간호병, 운전병, 교통 정리병, 항공기정비사, 전화교환수, 세탁병, 취사병, 제빵병, 기록병, 물품보급병, 우편병 등등.

 

러시아인들의 유난스런 조국애는 도대체 어디선 연유한 것일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가장 자주 나오는 단어는 러시아가 아닐까.

 

수백 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일명 목소리 소설’, 작가 자신이 소설 코러스라 부르는 형식을 통해 완성한 이 책에 대해 재판이 열렸다고 한다. 신화화되고 영웅시되던 전쟁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죄목이었지만 시민들의 노력으로 재판은 종식되었고 작품은 전 세계 200만부 이상이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가슴 아픈 사연들이다.

 

아이가 배가 고파서.......젖 달라고 보채는데........엄마도 먹은 게 없으니 젖이 나올 리 없었지. 아이가 울어댔어. 아이는 울지, 독일군 추격대는 코앞에 있지....수색견까지 데리고......만약 개들이 아이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어. 서른 명이나 되는 우리 목숨이 다......이해가 돼?

결국 지휘관이 결단을 내렸어....

누구도 지휘관의 결정을 아이 엄마에게 차마 전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그녀가 스스로 알아차리더군.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물속에 담그더니 그대로 한참을 있었어......아기는 더 이상 울지 않았지.....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어...우리는 차마 눈을 들 수가 없었어. 눈을 들어 아기 엄마를 마주 대할 수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지......

 

이웃집에 꽃에 물을 달라고 부탁하고 전쟁에 참여해 4년 만에 돌아온 소녀. 트렁크 가득 사탕을 넣어간 소녀. 두 시간 보초를 섰는데 백발이 된 소녀......

 

전쟁 중임에도 소녀들은 치마를 입고 싶어 하고, 머리를 염색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건만 국가는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남편을 고문한다.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올 줄 알았건만.....

 

,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책은 숱한 목소리들로 엮어낸 테피스트리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이 모두 중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우리 몸을 뚫고 나가는 체험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쓴다는 건 야만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밑줄 그은 문장

 

p23.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게 여겨지는 곳. 그곳에선 역사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사람을 다스린다. 내 글의 폭을 넓혀야겠다. 전쟁에 대한 진실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을 담은 책을 써야 한다. 도스토엡스키가 던진 물음. ‘사람은 자신 안에 또 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른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까?’ 이 물음을 이제 나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p25.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회상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추레한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이야기의 사원을 쌓아갈 원료들, 그건 언제나 넘쳐난다. 도처에 이 벽돌들이 굴러다닌다. 벽돌이 사원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나는 우리의 감정들로 사원을 세운다.....우리의 염원과 환멸로. 동경들로. 존재했지만 언제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것들로.

 

p28. 광학에는 집광력이라는 개념이 있다. 피사체를 잡아내는 렌즈의 정확도를 말한다. 전쟁에 대한 여자의 기억의 감정의 긴장도나 고통의 지수로 볼 때 그 집광력이 가장 높다.

 

p32. 나는 하찮은 이야기 따위는 필요없소........우리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 쓰시오. ....’라는 추신이 덧붙여진 편지를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나에겐 바로 이 하찮은 것들이 중요하다. 이 하찮은 것이야말로 삶의 온기이자 빛이므로.

 

p42.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p60.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p198.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p201.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전쟁 없이 살고 싶어. 전쟁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하루라도 그런 날이 있었으면.....

 

p225.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이제 알겠다. 그들이 결국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p268.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 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 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p272. 크고 위대한 것이 작고 평범해지는 그 순간을.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 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만큼.

 

p296.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이 날들만 견뎌내면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p338.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내가 전쟁터에서만 예뻤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지나가버렸어. 다 타버렸지. 그러고는 순식간에 늙어버렸어....”

 

p410. 우리는 연인들을 지켜줬어. 우리가 했던 유치한 맹세를 어긴 거야....그래, 우리는 사랑을 했어.....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선에서 못 버텼을거야. 사랑이 구한 거지. 사랑이 나를 구원했어. ....

 

p463. 우리 이야기는 꼭 안 써도 돼.....우리를 잊어버리지만 마....당신과 내가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눴잖아. 같이 울었고. 그러니까 헤어질 때 뒤돌아서 우리를 봐줘. 우리들 집도. 낯선 사람처럼 한 번만 돌아 보지 말고 두 번은 돌아봐줘. 내 사람처럼. 다른 건 더 필요 없어. 뒤돌아봐주기만 하면 돼.....

 

p468. ‘뭐야? 뭐가 너희들을 이렇게 만든 거야? 대체 그게 뭐라고 죽음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건데? 왜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전 세계에서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확신하지?’ 그는 러시아어를 아주 잘했어. 그래서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하기로 마음먹었지. 어차피 죽을 목숨, 헛일하는 셈 치고 우리가 얼마나 강한지 알려주고나 죽자 싶었거든. 그는 거의 네 시간 동안 질문해댔고, 나는 최대한 아는 대로 대답해줬어.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배운 마르크스 레닌주의까지 다 이야기했지. 그랬더니, , 그가 하는 행동이라니! 자기 머리를 움켜쥐고는 방안을 뛰다시피 서성이고, 한자리에 못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 있고, 나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하지만 처음으로 매질은 안 하더군.

 

p475. ,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목이 메어와.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남편은 전쟁에 나갔다 죽고 혼자서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면서. 게다가 가진 거라곤 그 닭 한 마리가 전부인데. 그런데 그 닭을 팔겠다는 거야. 나한테 돈을 주려고 말이야. 그 당시 기부금은 전부 현금으로만 받았거든. 여자는 모든 걸 내놓을 각오가 돼 있었어. 그래서 세상이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자기 아이들이 무사히 자랄 수만 있다면. 여자의 얼굴을 기억해. 세 아이들 얼굴도......

 

p552.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 ‘,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할까! ,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p554. ‘심장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심장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하늘을 보기가 두려웠어. 하늘을 향해 고개도 들지 못했지. 갈아엎어놓은 들판을 보는 것도 무서웠어. 그 땅 위로 벌써 떼까마귀들이 유유히 돌아다녔지. 새들은 전쟁을 빨리도 잊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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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6-02-20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은 문장들만 읽어도 가슴이 아파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2-20 12:06   좋아요 0 | URL
전쟁은 정말 끔찍한것 같아요. 그보다 끔찍한건 잊는거겠죠 ~~

곰곰생각하는발 2016-02-20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 속에 빠트리는 아기 엄마 이야기를 들으니 김종화 시인의 시가 생각나네요..
그 시에도 아이 엄마는 아이를 물 속에....

시이소오 2016-02-20 12:25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네요^^

비로그인 2016-02-2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 그으면서 소설을 읽는 재미가 느껴집니다. *^

시이소오 2016-02-20 22:53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사연을 빼고 올린다는게 비윤리적이라 느껴지네요 ^^;; 애초에 발췌하는게 아닌데 싶기도 ^^;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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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이탈로 칼비노, 움베르토 에코에 이어 2008년 하버드 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강좌에는 오르한 파묵이 초청받았다. 이 책은 6차례의 파묵의 강연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1.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소설을 읽는 것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 우리는 소설의 인위적인 면을 인식하지 못하거나(naive), 정반대로 인식하기도 한다(sentimentalisch)

 

파묵은 실러의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에서>에서 이러한 개념을 빌려온다. 소박한 시인은 말이, 단어가, 시가 전체 풍경을 규명하리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반면 성찰적인 시인은 단어들이 실재를 규명할지, 실재에 도달할지, 말들이 그가 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 등등의 문제로 불안해한다. 소박한 시인은 우뇌적 시인으로 성찰적인 시인은 좌뇌적 시인이라 불러도 될까. 파묵에 의하면 괴테는 소박한 작가이고 실러는 성찰적 작가다.

 

파묵은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작업 가운데 중요한 9가지 사항을 언급하는데 그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소설의 중심부가 아닐까.

 

포스터는 <소설의 이해>에서 소설의 가치를 결정하는 마지막 기준은 우리가 그것에 느끼는 애착이라고 말한다. 파묵에게 있어 소설의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소박하게 세계에 투사할 수 있는 중심부를 찾아 나서게 하는 힘에 있다. 이러한 파묵의 의견에 가장 적합한 소설의 형태는 교양소설이다.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등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소설의 중심부가 주는 기본적인 지식, 그러니까 세계가 어떤 곳이고 삶이 어떤 것이라는 지식을, 단지 중심부뿐만 아니라, 소설의 모든 곳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좋은 소설이란 모든 문장이 우리에게 진정 위대한 지식을,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감각의 본질이란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여행이, 그러니까 도시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방에서 자연에서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불확실한, 감춰진 의미를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소설에서 배웠습니다.

 

2. 파묵씨 당신은 이러한 것들을 경험했나요?

파묵은 두 가지 부류의 독자를 경계하라고 말한다. 우선 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이다. 옆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이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서전 혹은 경험담이라고만 생각한다. 두 번째로 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들이 있다. 이들은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는다. 분명 진실은 이 두 부류 사이에 있을 것이다.

 

3.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소설예술의 본질적인 목표가 삶을 정확하게 그려 내는 것이라고 믿는 파묵은 캐릭터는 없다고 주장한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의 캐릭터가 아니라 그가 세계의 여러 형태에 보이는 반응입니다. 세계의 모든 색깔, 모든 사건, 모든 과일과 꽃, 그러니까 감각이 가져다준 모든 것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파묵에 의하면 플롯이란 그것을 서사 구조, 사건의 연속, 이야기라고 부르던 우리가 설명하고 서술하고자 하는 지점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선일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나뉘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원자들이 있듯,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이 있고, 이 수많은 순간을 연결한 일직선을 시간이라고 한다. 플롯 역시 크고 작은 나뉠 수 없는 단위를 합친 선이다.

 

소설의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객관적이지도 않고 일직선도 아니다.

 

소설을 쓸 때 주인공의 캐릭터를 창조하고 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실 삶의 세부사항들을 사건의 구조에 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소설 쓰기는, 풍경 속에서(세계에서) 소설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 감정, 생각 등을 포착해 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앞서 언급한 소설을 구성하는 그 수천 개의 작은 점들을 일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를 그리며 연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4. 단어, 그림, 사물

 

파묵에 따르면 단어적인 작가들이 있고 시각적인 작가들이 있다. 톨스토이의 세계가 감각적으로 배치된 사물들로 들끓고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은 텅 비어있다. 호메로스가 시각적이라면 피르다우시의 <샤나메>는 단어적이다. 파묵에 따르면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 그림을 그렸던 파묵으로서는 당연한 귀결인 듯 싶다. 파묵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플로베르가 자신이 글을 쓸 때 모색했다고 말했던 가장 적절한 단어(le mot juste)’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단어입니다. 소설가는 상상했던 것을 가장 잘 표현할 단어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법도 배웁니다. 소설가는 눈앞에 떠올린 이미지가 오로지 단어로 옮겨졌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단어로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하는 법을 배울수록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단어적 사고의 중심부들이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T.S 앨리엇은 평론을 통해 처음으로 객관적 상관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객관적 상관물이란 예술가가 어떤 예술 또는 문학 작품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제시하는, 그 감정과 객관적으로 연관되는 일련의 사물, 어떤 정황, 사건의 연쇄를 뜻한다. 왜 소설 속에서 사물들은 중요한가.

 

프랑스 소설을 한번 보도록 합시다. 발자크 작품에서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 보인 물건은, 플로베르 작품에 와서는 개인의 취향과 캐릭터를 제시하며, 졸라에 이르러서는 저자의 객관성을 보여 주기 위한 도구로 쓰입니다. 같은 물건들이 프루스트의 작품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힘으로, 사르트르의 작품에서는 존재의 불안을 나타내는 징후로, 로브그리예 작품에서는 인간과 단절된 비밀스러운 독립체로 변합니다. 조르주 페렉의 작품에서 물건들은 리스트에서 상표와 함께 열거될 경우 시적인 면이 보일 수 있는 비밀스러운 것들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은 소설 속 수없이 많은 짧은 순간들의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일 뿐만 아니라, 이 순간들의 상징이자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5. 박물관과 소설

 

알려져있다시피 파묵은 <순수박물관>이란 소설을 썼다. 그는 박물관과 소설이라는 주제로 세 가지를 언급하는데 세 가지 주제는 서로 맞물려 있고, 그 공통점은 자긍심이다.

 

1. 자존감.

 

박물관이 사물을 보존하는 것처럼, 소설은 인간의 평범한 생각과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건너뛰곤 하는 이성의 불연속성을 구어로 표현함으로써 언어의 묘미와 색과 냄새를 보존한다. 소설은 단어, 표현, 관용구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상대화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기록한다. 유르스나르의 주장에 따르면, 평범한 일상 대화는 소설 이전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박물관적인 소설이 있다면 그것은 생각을 일깨우기 보다는 잊혀지는 것에 저항하는 중점을 둔다. 박물관적인 소설은 역사가 단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는 간직될 거라는 느낌과 자긍심을 지닌다.

 

2. 차별화되는 느낌

 

우리가 소설을 읽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싶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한다면 얼마나 차별스러운가. 박물관의 관람객 역시 비슷한 심리를 공유한다.

 

3. 정치

 

파묵에 따르면 박물관과 소설은 누군가를 대변했다가 자칫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아마도 서구 국가의 작가나 독자들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밤의 아이들>을 쓰고 암살 명령이 떨어진 살만 루시디를 떠올리면 금세 이해가 될 것이다.

 

6. 중심부

 

중심부의 의미가 모호하다면 보르헤스가 말한 <모비딕>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처음에 독자는 소설의 주제가 고래잡이들의 고단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나중에는 고래를 추적해 파멸시키려는 에이햅 선장의 광기가 주제라고 생각한다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방대해지면서 어떤 우주의 차원에 이르게 된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악령>을 집필한 1년 후 어떤 영감에 의해 처음부터 다시 쓰기로 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도스또예프스키는 240페이지 중에 고작 40페이지만을 다시 썼을 뿐이었다. 바뀐 것은 중심부만이었다. 한편으론 중심부가 너무 명확히 드러나면 작품이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나에게 소설의 중심부는 어떤 종국에 우리에게 삶에 대해 가르쳐 주고, 느끼게 해주고, 암시해 주고, 보여 주고, 경험하게 한 심오한 어떤 것입니다. 소설가가 삶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들을 소설 밖에서 단어들로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면, 굳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도 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순문학 소설에서 중심부가 무엇인지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마치 삶이 그러하듯이 순문학 소설 역시 쉽게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다른 것으로 쉽게 환원될 수 없음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현대의 세속 독자들은 이런 노력이 부질없음을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읽고 있는 소설의 중심부를 찾으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묻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찾는 중심부는 바로 인생의 중심부이자 세상의 중심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읽기란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믿는 노력입니다. 위대한 순문학 소설들, 예를 들면 <안나 카레니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의 산>, <파도>같은 책들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작품입니다. 세상에 중심부와 의미가 있다는 희망과 생생한 환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상은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유지되며 우리에게 행복감을 안겨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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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2-19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중에 높임말 문체로 이루어진 내용은 책에 나오는 문장인거죠? 북플은 글의 문단 간격이 통일되어 있어서 불편해요. 그래서 컴퓨터로 접속해서 문단 구분을 확인하면서 다시 읽었습니다.


시이소오 2016-02-19 19:05   좋아요 0 | URL
이 부분을 좀 해결해야겠네요. 밑줄을 근다거나. 높임말은 전부 파묵의 문장이 맞습니다 ^^

cyrus 2016-02-19 19:31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에서 작성한 글을 북플에서 확인하면 아무리 열심히 밑줄 긋어도 줄이 나타나지 않으니 힘이 빠집니다. ^^;;

시이소오 2016-02-19 19:33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되도록이면 박스에 넣어야 겠어요 ~~
 
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마션은 이상하게도 리뷰가 넘쳐난다.

고로 나는 짧게 써야겠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이 천재적인 작품을 화성판 삼시세끼라고 표현한 사람들의 상상력의 빈곤함이란!

웃자고 한 얘기겠지만 슬프다.

살기위해 먹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거늘.

 

‘21세기 판 로빈슨 크루소가 좀 더 적확하다.

 

이 작품을 쓴 앤디 위어는 천재가 아닐까. 화성판 생존기임에도 영화나 소설이나 마치 누군가의 회고록을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만큼 작가가 구축한 작품의 리얼리티가 견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족스러운 면이 없진 않다.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왜 저렇게 아등바등 살려 하는지 납득이 안 갔다. 지구와 연락이 된 이후에는 그나마 이해가 된다. 그래, 살아 돌아가면 그는 영웅이 될테니까.

 

영화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은 꼭 살아야만 할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마크 와트니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이유가 없었다.

 

화성, 절대적인 고립무원의 상황임에도 이 소설엔 삶에 대한, 죽음에 대한 아무런 관점이 없다.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라니! 영화 <캐스트어웨이>의 배구공 윌슨에 대응할 만한 것도 없다. 와트니 주변의 모든 것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마치 게임을 보는듯한 느낌은.

 

한없이 가볍다. 그 가벼움을 선호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내 취향은 아닌 듯.

천재의 작품이긴 하나 감동이 없다.

밑줄 그을 문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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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오징어 2016-02-19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책 무게에 비해 넘 가볍드라구요 ㅎ

시이소오 2016-02-19 11:49   좋아요 1 | URL
그렇죠? 날아가겠더라구여 ~~

transient-guest 2016-02-19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걸 미국적인 유머로 봤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지만 웃게 만드는 그런..ㅎ

시이소오 2016-02-19 12:02   좋아요 1 | URL
그럴수도 있겠네요.
미국인들이란^^

마녀고양이 2016-02-19 1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시이소오님....
제가 어제 밤에 이 책을 들고 손에서 놓지 못해서 새벽 3시까지 읽었답니다.
뒤에 삼분의 일 정도 남았는데, 오늘 이 글을 보니 엄청 반가운거예요.

저 역시 저자가 천재인가 보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다만 저는 뭐랄까, 위대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흐흐, 저도 다 읽고 짧은 리뷰를 남기려구요.

시이소오 2016-02-19 12:39   좋아요 1 | URL
리뷰 기다릴께요^^

서니데이 2016-02-19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님, 좋은하루되세요.^^

시이소오 2016-02-19 13:07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도 활기찬 하루 되시길^^

물고기자리 2016-02-19 1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란 말에 확 공감이 가네요ㅎ 영화론 괜찮지 않을까도 싶지만 소설로는 제 취향이 아니더라고요..ㅜㅜ

시이소오 2016-02-19 13:07   좋아요 2 | URL
그쵸? 영화론 나쁘지 않았는데요 ^^;;

꿈의달 2016-02-19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읽다가 너무 궁금해서 영화를 봐 버렸어요. 영화는 재미있더라구요. 끝까지 읽기는 해야 하는데 시이소오님께서 올려주신글 보고 덜컥 사버린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미루고 있네요^^;;

시이소오 2016-02-19 16:20   좋아요 1 | URL
12권 짜리를, 대단하세요^^. 이 글을 더봄출판사 김덕문 사장님이 보셔야하는데 ㅋ

alummii 2016-02-19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앞부분은 영화보기 전에 읽어야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2-19 16:50   좋아요 1 | URL
저는 영화보고 책을 읽었는데 책부터 읽었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아요~~

깊이에의강요 2016-02-1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비티는 아주 재밌게 보았는데,
마션은 책도 영화도...아직입니다.
언제들 그렇게 책을 읽으시는지...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시이소오 2016-02-19 16:52   좋아요 0 | URL
저 아무것도 안해요. 책만 봐요. 일하시면서 독서하시는 분들, 존경스러워요 ^^

깊이에의강요 2016-02-1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꿈에 그리던 삶인데요^^



시이소오 2016-02-19 17:11   좋아요 0 | URL
평생 읽기만 하면 좋을텐데. 뭔가 현실적인 고민을 해야해요. `다음달 월세는 어쩌란말이냐....`

깊이에의강요 2016-02-1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하자면....
제 꿈은 무위도식 입니다 ㅋㅋ

시이소오 2016-02-19 17:20   좋아요 0 | URL
와우, 저랑 똑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