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부르크 텍스트

이덕형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2009)에 대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둔다. 두 주 전 기사인데,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내친 김에 오래전에 쓴 글도 찾아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한겨레21(09. 12. 04) 환각의 도시를 떠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혼 

‘성 베드로의 도시.’ 1703년 표트르대제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신적 삶의 위업’이라 한다. 아무것도 없는 발트해 어귀의 황량한 늪지에 건설된 이곳은 ‘정교적 러시아의 영혼과 유럽의 모더니티가 착종된 이종접합’의 인공도시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이종교배’의 문화가 그 도시의 고갱이다. 이덕형 성균관대 교수(러시아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펴냄)에서 그 ‘환영의 도시’에서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몽환의 공간 ‘판타스마고리아’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모순과 역설, 이율배반과 정신착란, 환각과 환영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누구보다도 먼저 민감하게 느꼈던 사람이었다.”

유럽 열강으로 도약하려던 표트르 대제의 욕망은, 종교개혁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곧추세우기 위해 시작된 서구의 웅장한 바로크 문화로 이어졌다. 이를 단기간에 모방·이식하려는 시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낳았다. 지은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와 유럽, 가톨릭의 바로크와 정교의 슬라브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몽환의 공간, 곧 판타스마고리아”라고 지적한다. ‘환영’(幻影)이란 뜻의 ‘판타스마’에서 유래한 ‘판타스마고리아’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명된 환등기의 투사 이미지를 일컫는다.  



“이 도시에 기하학이 등장했다!” 도시 건설 초기 러시아 정부의 회계 감사관이 도로를 측량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합리적 이성의 은유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등장한 것은 결국 서구 라틴 가톨릭 문화권의 핵심 코드인 ‘합리성’과 ‘이성’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로 대표되는 비잔티움 정교 문화권에선 합리성과 이성보다 이를 초월하는 ‘침묵’과 ‘관조’를 인식의 기초로 삼아왔다. 이런 이질적인 두 문화의 충돌이야말로 도시를 휘감은 모순과 부조리의 뿌리였다. 지은이는 이렇게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합리적 이성이 도입되자 러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이 도시가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고, 타락한 로마 가톨릭 문화에서 건너온 유클리드 기하학은 적그리스도의 학문으로 비쳤을 것이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라고 할 만큼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세계는, 신은, 인간은 ‘2X2=4’라는 합리성의 도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2X2=4’라는 상징은 합리적 이성이자 자유가 박탈된 서구 가톨릭 세계의 그리스도교였다.”

그 판타스마고리아의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 도박과 현시적 소비의 굴레를 벗어내지 못했던 그는 평생 한 번도 그 도시에서 정주처를 갖지 못했다. 지은이는 “마치 환영이나 그림자처럼 그는 ‘집’의 실체를 모르는 부초였고 그 자신이 이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 자체였다”며 “도박에 몰입하다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섬망 상태에서 소설을 쓰다가 어슴 새벽의 여명에 겨우 잠드는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더니티의 한 현상이었다”고 표현했다.

스무 번 넘게 이사하며 정주 못 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 대한 평론이자 전기이기도 한 이 책은 또한 현란한 지적 기행문이기도 하다. “산책자의 눈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구석방과 모퉁이 집들을 바라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싶었다”는 지은이는 실제 상트페테르부르크란 ‘판타스마고리아’를 일평생 배회한 거장의 흔적을 발품 팔아 더듬었다. 1837년 5월 공병학교 입학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밤을 보낸 ‘모스코프스키 대로 22번지 네아폴 호텔’에서 출발해, 최후의 걸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집필을 마친 뒤 탈진해 1881년 2월 숨을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까지 땀으로 그 도시를 주유했다. 이만한 헌사도 드물 게다.(정인환 기자) 

09. 12. 20. 

P.S. 아래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숨은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이다(클릭하면 사진을 더 크게 보실 수 있다). 현재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이다. 5년 전 가을에 가본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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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2-2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자흐스탄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읽은게 자랑이에요. ^^ 이 책 보관함에 담아 두었어요. 표지도, 저자도, 컨텐츠도 맘에 쏙 드네요.

로쟈 2009-12-20 21:28   좋아요 0 | URL
테헤란에서 롤리타 읽기만큼 특이한 경우시네요.^^

목동 2009-12-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의적인 아쉬움이라 할까요 '판타스마고리아'적 도시공간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도 5천년의 역사라고 자랑하는데,,있을 법합니다. 미래의 과학 또는 행정 계획도시 조성에 열띤 공방(?)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앞으로 위대한 과학소설가 나타나 이 계획도시을 '판타스마고리 세종시'로 만들면 좋겠는데요.(꿈?)

로쟈 2009-12-20 21:30   좋아요 0 | URL
판타스마고리아적 공간은 역사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공간입니다. 요즘의 광화문 광장처럼 갑자기 돌변한 공간이라면 현실인지 환상인지 감이 잘 안 오게 되지요...

비연 2009-12-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언제 한번 꼭 저 곳에 가봐야 할텐데..

로쟈 2009-12-20 22:31   좋아요 0 | URL
비성수기에 패키지로 끊으시면 저렴하게 다녀오실 수 있을 거예요.^^

sophie 2009-12-21 06:42   좋아요 0 | URL
혹시 비성수기란 겨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콜록!

로쟈 2009-12-21 08:36   좋아요 0 | URL
겨울엔 페테르부르크에 직항이 안 다닌 텐데요. 방학을 뺀 하절기가 비수기로 압니다...

sophie 2009-12-23 08:00   좋아요 0 | URL
아 그럼 6월이 되겠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2009-12-21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헛헛헛헛 2009-12-2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을 뺀 하절기라... ^^
좋은 정보네요. ㅎ

저도 도스토예프스키 책 한권 껴들고
저 앞을 왔다갔다 해봐야겠어요. '-'

로쟈 2009-12-21 19:59   좋아요 0 | URL
몇년전엔 50만원대 상품도 있었습니다.^^

필로우북 2009-12-21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맨 아래 사진을 올려 주신 걸 보고 참 인상적이다 생각했는데, 로쟈 님께도 각별한 사진인가 봅니다.지하로 난 저 문으로 꼭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진입니다.

로쟈 2009-12-21 19:59   좋아요 0 | URL
그게 구글에 뜨는 사진이 저거밖에 없어서요.^^;
 
제3의 여성을 위하여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종로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 중의 하나는 질 리포베츠키의 ㅣ<행복의 역설>(알마, 2009)이다. 저자는 <패션의 제국>(문예출판사, 1999), <사치의 문화>(문예출판사, 2004), <제3의 여성>(아고라, 2007) 등이 소개된 바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저작들로 보자면 사회학자에 더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좀 비싼 책이지만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에 대한 강의준비에 도움이 될까 하여 출혈을 감수했다. 책의 키워드가 '과소비사회'이기에 '소비사회'와 짝을 이룰 수 있겠다는 나름의 계산(계산이 맞아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보니 그래도 이 책에 주목한 리뷰기사가 없지 않아 챙겨놓는다. 아래 스틸사진(영화 <쇼퍼홀릭>)은 한국경제에서 가져왔다(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121768261).  



서울신문(09. 12. 19) 그리스 神 이미지로 현대사회 5가지 모델 제시

최근 간행된 ‘행복의 역설’(질 리포베츠키 지음, 정미애 옮김·알마 펴냄)에 따르면 인류의 소비 문명은 3단계를 거치며 변화했다. 1880년대 소수의 부르주아 계층만 소비의 주체가 된 1단계, 1950년대 이후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거의 모든 계층이 30년에 걸쳐 풍요를 누린 2단계, 그리고 1970년대 말 이후 과잉물질주의가 이끈 ‘과소비 사회’가 3단계다. 저자가 본 ‘과소비 사회 이후’는 결코 밝지 않다. “과소비사회를 대체할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지금보다 더 큰 규모로 발달할 것이라는 게 가장 그럴 듯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삶은 행복과 기쁨의 기호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처럼 보인다.”며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일부 모델에는 그에 상응하는 그리스 신들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첫째는 페니아(빈곤의 여신). 물질 과잉은 소비자를 끊임없이 결핍의 상태로 몰아가고 주기적으로 불만족스럽게 만들어 평온함과 기쁨을 앗아간다. 기쁨을 맛볼 기회가 많을수록 소비자는 더욱 만족의 상태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바로 풍요 속의 빈곤, 페니아의 강박증이다.  

둘째는 디오니소스(술의 신). 전통문화에서 인간은 디오니소스를 숭배함으로써 개인주의에서 해방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과소비사회는 공동체의 쾌락 대신 개인적인 기쁨으로 대체됐다.  

셋째는 슈퍼맨. 현대사회에서는 경쟁력과 유능함, 적극성 등이 최고의 가치로 대접받는다. 개인마다 잠재력을 최대한 격발시켜 자기 초월을 시도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늘 ‘슈퍼맨’ 현판이 붙어 있다.  

넷째는 네메시스(율법의 여신). 행복을 중시하는 문화가 사람들에게 증오심과 질투심, 경쟁심리를 부추겼다. 네메시스는 인간들이 지나치게 많은 부와 행복을 누리는 것을 벌한다.  

다섯째는 호모 펠릭스(행복한 인간). 20세기 인류는 위대한 진보를 거듭했지만 지구는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한다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현대의 ‘행복한 인간’ 숭배가 더 큰 재앙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저자는 이처럼 다섯 가지 모델을 들어 과소비사회의 종말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다. 저자는 “온전한 만족감 대신 상품의 욕구만을 따른다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은 없다.”고 단언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이런 생각도 든다. 아직도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가 11억명에 이른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올해 통계에 따르면 기아로 고통받는 인구가 10억 2000만명이다. 전쟁보다 기아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행복의 역설’은 이런 곳에서도 유효할까. 저자가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은 프랑스다.(손원천기자)  

09. 12. 19. 

 

P.S. <행복의 역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소비의 사회> 외에 물론 리포베츠키 자신의 전작들이다. <사치의 문화>와 <패션의 제국>을 자연스레 손에 꼽을 수 있겠다.   

같은 프랑스 저작으로 떠올릴 수 있는 책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영원한 황홀>(동문선, 2001)과 장 클로드 기유보의 <쾌락의 횡포>(동문선, 2001)이다. 혹시나 싶어 '찾아보기'를 찾아보니 '브뤼크너'의 <영원한 황홀>은 312, 239, 382쪽 등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기유보의 <쾌락의 횡포>는 <쾌락의 폭군>이란 제목으로 330, 332쪽에서 언급되는 걸로 돼 있다(하지만 332쪽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도 역시나 가장 많이 참조된 책은 <소비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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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12-24 00:56   좋아요 0 | URL
과소비 질주를 대체할 시스템은 코맥 매카시의 <로드>적 카오스가 아닐까 싶어요. 카오스도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다면...
 
고골의 웃음과 공포

이번주 주간한국의 '지식인의 서고'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고골의 대표작 <외투>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고교 독서평설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주간한국(09. 12. 17)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매학기 고정적으로 읽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명작’들입니다. 보통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슈킨부터 시작하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서 불가코프나 솔제니친까지 ‘투어’를 합니다. 이 거장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고골(1809-1852)입니다. 올해가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더더구나 그렇지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단편으로만 치자면 고골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외투>입니다. 페테르부르크의 한 하급관리가 어렵게 마련한 외투를 강탈당하고 죽은 후에 유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매년 다시 읽으면서 매번 경탄하게 되는 걸작입니다. 흔히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지요. 그만큼 러시아문학사에서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 작품입니다.   

한데, <외투>는 한편으로 자주 오해받는 작품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인도적 박애주의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시각에서는 이 작품의 주제가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작은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라는 아카키의 말을 인용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쪽에선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발견하고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간과하는 듯합니다.  

하급관리로서 아카키의 일이란 문서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쓰는 정서(淨書)입니다. 그런데 이 정서가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자 자족적인 즐거움의 세계였습니다. 그는 정서 외에는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아서,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글씨들만을 떠올리고, 근무가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음식에 파리가 붙었거나 말거나 요기만 하고는 다시 정서에 매달렸습니다. 정서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들이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겨울이 되어 페테르부르크에 사나운 북풍이 휘몰아치자 그의 낡은 옷은 더 이상 바람막이가 돼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없이 새 외투를 장만하게 됩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면서 아카키는 ‘욕망의 주체’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가령, 아카키는 외투 값을 마련하기 위해 그가 향유하던 모든 즐거움을 유보하고 포기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충만한 만족의 세계에서 영속적인 결여의 세계로 옮겨가게 됩니다. 욕망은 언제나 채울 수 없는 결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요.  

아카키가 새 외투를 마련하고 얼마 안 있어 강도들에게 강탈당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으로 보입니다. <외투>는 저에게 욕망이 몰고가는 파국을 보여주는 섬뜩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고골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우리의 파멸 또한 필연적이라구요. 무섭지요?  

09. 12. 19.  

P.S. 찾아보니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무성영화 <외투>(1926)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ki-zGGXIbH4&feature=PlayList&p=EC0B7D5C62078945&index=0). 나도 못 봤던 것인데, 감독은 그리고리 코진체프와 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이며, 시나리오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유리 트이냐노프가 맡았다(원작과는 좀 다르다). 오늘의 서프라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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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12-1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투>의 마지막 장면은 "마술적 사실주의"<빌러비드/토니모리슨/들녁>라 할 수 있겠는데요.사람마다 하급관리(아카키)의 정서(淨書)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관료적 권력앞에 왜곡되고 맙니다. 권력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는 감시하고 의심합니다. 개인 또한 입장이 바뀌면 굴림하기도 합니다. 종국에 개인은 조직(관료)에 대항 뿐입니다.고골의 사랑(정서)을 지켜주던 '외투'를 잃어버리고 자존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저마다 하나의 끈을 붙잡고 사는 것처럼요.

로쟈 2009-12-19 23:0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카키에게서 정서와 외투는 다른 성격의 대상으로 봤어요. 먼댓글로 링크해놓은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목동 2009-12-20 07:38   좋아요 0 | URL
재봉사 '페트로비치'에 의해 새 '외투'를 갖게된 '아카키'는 박봉을 절약하며 본연의 업무인 '정서(淨書)'에 충실히 근무합니다. 문제는 '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새 외투를 강탈당하면서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 등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못된 관리의 권위(권력)에 의해 묵살당하고 맙니다. 결국 그는 스트레스로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나 외투를 뺐습니다. 우리의 '전설의 고향'의 귀신처럼요.

과연, 외투를 찾으려고 했던 '아카키'가 '욕망의 화신' 일까요? 여리고 단순한 영혼의 당연한 권한이 아니였을까요? 저자 '고골'이 '인간 욕망의 허구성' 목적으로 이 단편을 썼다면 그런 왜곡된 의도성이 독자에게 외면당하여 그의 마지막 작품이 실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의 것을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사회구조권력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개인의 존재가 무참히 사라지는 형국에서 '아카키'의 행위는 욕망보다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약자의 최후 저항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아카키'의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은 과(소비)욕이 아니라 헤저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당연한 소비(구입)의식과 평범한 구매였으며 강탈당한 약자의 억울함이라 생각했습니다.

Sati 2009-12-20 20:20   좋아요 0 | URL
요즘같은 날씨에 겉옷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아카키의 외투가 욕망의 대상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요, <외투>에는? 자발적 88만원 세대의 한 인물이 있다고 할 때, 그가 어머니의 수술비 5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끼니를 굶어가며 돈을 마련했는데 그 돈을 어이없이 강도에게 빼앗겨서, 어머니는 치료도 못받고 돌아가시고 본인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서 귀신이 된다면 그건 펠렉스님 말대로 억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만약 내 가족 건사를 위해 88만원 자족생활을 버리고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가, 부도라도 나서 홧병으로 죽는다면 그건 욕망의 희생양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로쟈 2009-12-21 22:04   좋아요 0 | URL
그게 작품에선 아카키가 전혀 다른 인물로 변화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전처럼 정서에만 빠져 지내는 게 아니라 길거리를 거닐며 여자의 다리가 그려진 간판에 눈길을 주고, 지나가던 여자를 괜히 쫓아가보기도 하는 식으로요. 외투도 분에 넘치게 고급스러운 것으로 맞추게 되죠. '바람막이' 수준을 넘는 것으로요. 그러니까 저는 외투를 마련하기 이전과 이후의 아카키가 전혀 다른 존재 양식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죠. 욕망을 가진(갖게 된) 주인공의 파멸은 고골의 작품에서 자주 나옵니다. <광인일기>의 포프리쉰이나 <넵스키거리>의 피스카료프도 모두 자기 욕망(판타지)의 희생자가 됩니다...

Sati 2009-12-20 21:2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서재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인걸요^^

목동 2009-12-21 21: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인스 2009-12-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이히의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원제 The Namesake)의 주인공이 '고골리'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게 된 경위가 주인공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로 이 작가의 이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고골의 <외투> 속에서 잉태된 아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마침 궁금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이름 뒤에 숨은 사랑>도 구해놓았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안 보이네요.^^;

Sati 2009-12-1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따가 <뉴문> 보러갈까 했는데, <외투>라니, 정말 서프라이즈네요. 오늘은 기쁜 일이 연발로... /^0^/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너무도 가까이에 있더군요.^^;

sophie 2009-12-1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재밌어요. 로쟈님한테 듣는 러시아문학 이야기 또 기다려지네요. 그나저나 모자달린 외투를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에궁..

로쟈 2009-12-19 23:03   좋아요 0 | URL
너무 큰돈은 들이지 마시길.^^

페크pek0501 2009-12-2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속에서 나왔다"라고 <외투>를 격찬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작품이 그 영향을 받은 작품이지요. 전 <외투>라는 작품을 이렇게 읽었어요. 민중의 힘없는 비참한 현실의 이야기이며 그런 가엾은 사람을 도와 주지 못하는 무력한 권력 이야기라고. 멋지게 장만한 외투라기보다는 억울하게 빼앗긴 외투로 봅니다. 외투를 빼앗기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아무도 도와 주지 않습니다. 순경도, 경찰서장도, 유력한 인사도... 그러니까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학(또는 예술)의 매력은 해석의 다양성에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는 게 옳은가, 하며 따지는 것보다 그저 많은 해석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흥미로운 작품이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요. 우리의 사고영역을 확장시켜 주니까요. 다른 해석이 많이 나오길 기대하며...

로쟈 2009-12-23 23:48   좋아요 0 | URL
네, 작품의 뒷부분만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한데, 고골 자신이 아카키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표현도 서슴지 않아서 해석이 복잡해집니다...

페크pek0501 2009-12-2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아카키는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서류를 정서하는 것을 좋아하며 살 땐 행복했는데, 그가 외투를 마련하여 세상에 나오자 불행이 시작된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개인의 영역에서의 삶에선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지만 한 걸음만 내딛어 밖으로 나와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면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죠. 혼자 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세상과 부딪히며 살기 시작하면 힘든 삶이 시작된다는 것. 저도 현재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만약 누군가가 제게 소송을 걸어 법(세상)과 싸우게 되면 제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식이죠. 힘없는 사람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 - (지금 생각난 것을 적어 봤을 뿐이며, 이런 제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로쟈 2009-12-23 23:49   좋아요 0 | URL
'개인의 영역 VS 세상'은 좀 모호하구요, 저는 '충동 VS 욕망'의 구도라고 생각해봤습니다...
 
자기계발의 의지와 민주화의 역설

사회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문학사회학자라고 해야 하나?) 김홍중 교수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9)이 출간됐다. 엊그제 산 책인데, 어제 한 송년모임에서 우연히 저자와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서문만 읽은 상태라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진 못했는데, 그런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면 몇 개 장 정도는 미리 읽어볼 걸 그랬다. 오늘자 한겨레에 책에 대한 리뷰가 실렸기에 옮겨놓는다. 주로 첫 장인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의 내용을 따라가고 있는 듯싶다.  

한겨레(09. 12. 19) '진정성’ 대신 ‘무사유’가 판치게 된 까닭 

타인을 누르거나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수치이자 슬픔으로 여겼던 감수성,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 못한 시대적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괴로워했던 마음을 광범위하게 공유했던 이른바 ‘진정성의 시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래와 함께 그 시대는 급속히 종말을 고했다.

“이제 진정성의 에토스를 전경으로 하는 삶은 낡고, 효율적이지 않으며, 안쓰럽고, 심지어 역겨운 것으로 비춰진다. 남아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386세대적인 냉소와 멜랑콜리의 가면 뒤로 숨었다. 그리고 도래한 세계는 속물과 동물들의 세계, 몰렴(沒廉) 또는 무치(無恥)의 에토스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다. 무치는 단순한 무례나 실례가 아니라 부끄러움의 실질적인 마비에 기초한다. 그것은 포스트-87년체제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뻔뻔한 당당함이다.”

웰빙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는 삶의 피상성과 천박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몰염치와 과시적 파렴치가 판치는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 정글사회. 사회학자 김홍중 대구대 교수는 그의 첫 저서 <마음의 사회학>에서 이런 우리사회를 스노브(속물)들이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 사회, 스노보크라시(snobocracy)의 사회라 부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 세계로의 이런 급작스런 집합적 심리 전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진정성 에토스 자체와 그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김 교수는 라이어넬 트릴링의 ‘신실성과 진정성’ 개념을 끌어온다. 신실성은 전근대의 도덕적 가치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이 실제로 욕망하는 것 사이에 어떤 단절이나 간극도 느끼지 못하는 태도다. 이에 비해 진정성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역할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에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이다. 뉴레프트적 지식인들은 진정성과 반란을 동일시했다. ‘진정한 나’의 추구는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실정치가 결합해야 비로소 가능하며 한국 사회에서 그 접합은 민주화와 386세대에서 최고도로 구현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진정성은 두 가지로 나뉜다. 윤리적 진정성과 도덕적 진정성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기초한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적 진정성과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참여적이고 공적인 도덕적 진정성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내면의 참된 목소리’를 듣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 윤리적 진정성은 망설임이며 주저이며 때로는 실천적 무능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공동체가 외적으로 부과하는 삶의 형식들을 통해 구현되는 도덕적 진정성은 사회가 인정하고 규정한 행위패턴이나 감정의 방식을 추종하고 모방하면서 집합체의 지배적 가치와 이상을 절대시할 가능성이 있다. 1997년 이후 체제가 도래할 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 둘은 전반적 시대정신의 결속력 아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 정점에 분신으로 표출된 요절과 열사들의 탄생이 존재한다. 살아남은 것이 추악한 것으로 인지된 것은 그때다.

“진정성의 세계에는 비극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정성의 실천이 죄와 고독 혹은 파멸을 야기하는 항상적인 급진성을 동반하게 되며,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는 세속에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괴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진정성의 고원한 이상을 쉽게 따를 수 없을 때 주체는 비진정성의 극단적 추구를 통해 진정성의 불가능성을 보상받고자 한다.”

1997년 이후 무한경쟁시장에서 살아남는 경제적 생존투쟁은 치부와 강박적 노동으로 이어지고 성공지상주의, 입신출세주의, 노골적인 속물주의를 낳았으며, 상품화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육체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무차별적 건강주의로 귀결됐다. 격렬한 순수에의 열망은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무너지면서 급속하게 타락하거나 전도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스노브(속물)의 최대 특성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아렌트가 말한 ‘순전한 무사유’다. 김 교수는 스노비즘 최대의 스펙터클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상투적인 죽음’에서 찾는다. 아이히만은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고 회오, 회심은 끝내 없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을 통제한 성찰성을 지니고 있던 아이히만은 바보가 아니라 영악했다. 하지만 그 성찰은 특정 지점에서 정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명령의 원천, 그 의미를 문제삼지 않는 도구적 성찰에 머물렀다. 성찰 그 자체를 성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횡행하는 스노보크라시하의 자기계발 담론들이 명령하는 도구화된 성찰성, 그 영악함도 아이히만의 그것을 닮았다. 김 교수는 의심하고 회의하고 주저하는 윤리적 비판에서 희망을 찾는다. 다만 비판의 주체 스스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스노비즘 비판 자체가 또다른 스노비즘으로 전락하는 역스노비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한승동 선임기자) 

09. 12. 19.  

P.S. 저자가 정의하는 '진정성(眞正性, aunthenticity)'은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19쪽) 이번에 알게 된 건 "서구의 경우 진정성의 문화, 진정성의 정치, 진정성의 윤리가 시회적으로 확산되고 공유되어 인정받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청년 대학생들의 '신좌파' 운동을 계기로 해서"라는 사실. 생각보다는 상당히 '젊은' 개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진정성'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된 것이 그다지 오래 되지 않는다(처음엔 낯설고 좀 어색한 단어였다). 기억에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에 대한 황종연 교수의 논의에서 '진정성'이란 말을 처음 접한 듯하다. 버먼의 책 가운데 <진정성의 정치>란 것이 있어서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십수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이 말의 용례에 대한 개념사적 추적도 해볼 만하겠다).  

김홍중 교수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진정성의 에토스, 혹은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체제)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형성되었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퇴조하였다. 즉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진정성의 모델이 현실적으로 융성할 수 있는 환경과 사회적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자연적 정글로 변화한 사회에서 가장 절박한 관심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 즉 '생존'의 문제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문제의식도 상기시켜주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현재 한국사회는 소위 '포스트-진정성 체제(post-authenticity regime)'로 진입한 것 같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 진정성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건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과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과 '동물성'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의 짝이 될 만한 것은 얼마전에 나온 서동진 교수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일 듯싶다. '자기계발의 의지'야말로 포스트-진정성 체제의 키워드라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말에 마땅한 독서거리를 원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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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9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12-19 12:35   좋아요 0 | URL
<마음의 사회학/김홍중/문학동네> 프롤로그에서 '이병헌' 주연 영화<달콤한 인생>에서 인용했던 문구도 나오더군요. 저서에 대한 느낌이 '슬라보예지젝'을 생각케 했습니다. 어제 전 총리가 출두하기전 한 스님의 자해행위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자해 사실성은 다른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되더군요. 그 다른 마음도 저자가 말하는 <집단표상>에 속할지도 궁금했구요.

로쟈 2009-12-19 23:06   좋아요 0 | URL
'참된 자아'는 사실 지젝의 '주체'와는 거의 반대되는 개념이어서 대조해볼 수 있을 듯해요...

사량 2009-12-19 16:21   좋아요 0 | URL
유용한 포스팅 고맙습니다. 그런데 최근 '진정성'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던 인물이 전, 현 대통령이라는 점은 아이러닉하네요. 한 사람은 FTA로, 다른 한 사람은 4대강 살리기로 말이지요. 그들도 "격렬한 순수에의 열망"으로, 확신을 갖고 밀어붙였다고들 하잖아요.-_-; (핫, 현 대통령과 '진정성'을 쳐서 검색해 보니 정말 화려하네요;;)

로쟈 2009-12-19 23:08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진정성의 정치'란 것도 사실 의혹의 대상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내면의 참된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한데, 책을 마저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가 한국일보에서 주관하는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의 저술(교양) 부문 수장작으로 선정됐다. 수상 후보작으로 올랐다는 소식은 두 주 전에 접했고, 수상작 선정 소식은 며칠 전에 알았다. 저술상은 2003년부터 학술 부문과 교양 부문으로 나뉘어 시상되며, 2007년엔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 2008년엔 박태순의 <나의 국토 나의 산하>(한길사, 2008)가 수상작이었다. 뜻밖의 수상으로 아직 얼떨떨하긴 하지만 서재를 자주 찾는 분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수상자 인터뷰 기사와 심사평을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9. 12. 18) [한국출판문화상] 저술(교양) 부문, '로쟈의 인문학 서재'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의 저자 이현우(41ㆍ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라는 이름은 낯설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 책깨나 읽고 영화깨나 본다는 사람치고 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동유럽의 털북숭이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얼굴을 아바타 삼아,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공간에 글을 쓰는 자칭 "곁다리 인문학자"가 바로 그다. 이 책은 그의 왕성하고도 분방한 인문적 주유를 보여주는 문화 비평집이다. 



그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 이 대학 대학원에서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신문' 등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고,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개설해 서평을 쓰고 있다.

"좁게는 러시아 문학이 전공이죠. 그 분야의 대학 강의도 하고 있고. 그런데 문학이 문체분석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삶을 깊이 그리고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자연스레 다방면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철학이나 역사에도 굳이 칸막이가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세상이 '경계 없는 인문지성'으로 부르는 그의 외연을 금 그어 보려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다. 이씨에겐 영역의 경계뿐 아니라 문화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경계도 큰 의미가 없는 듯했다. 온라인 글쓰기 특유의 '제스처'(댓글 형태의 글 등)도 간간이 보이는 이 책을 통해, 이씨는 비평적 글쓰기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시나 소설도 직접 써 보면 더 잘 읽을 수 있게 되고, 강의도 직접 해봐야 자신의 앎을 정확히 할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의 빈 틈을 보게 되는 거죠. 일종의 앎의 변증법이랄까요. 어떤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은 그 텍스트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완성된다고 해도 될 겁니다."

비평서라는 책들이 쉬 두루뭉술한 칭찬으로 흐르기 쉬운데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때로 무람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신랄하다. 이씨는 "심성이 본래 그렇다"며 웃었다. 그리곤 "좋은 면만 보기엔(*보기에도) 인생이 짧지 않냐고도 하지만 비평은 분명한 가치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아이들도 좋은 면만 보면 다 천사 같지만, 야단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

'로쟈'라는 필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이름. 그런데 다소 험상한 지젝의 얼굴을 그 아바타로 사용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지젝은 코뮤니스트죠. 코뮤니스트는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는 개념(공산주의)으로 주로 쓰이는데,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거예요. 함께 즐길 수도 있고요. 내가 방점을 찍는 부분은 앎을 공유하는 거예요. 지식이라는 재화는 얼마든지 나눠 가질 수 있으니까요."(유상호기자)   

  

'대중지성'의 교양서 쓰기 새로운 지평 열어  

● 심사평

교양 부문 저술상 심사에서는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질문이 좌중을 선회했다. 시민의식과 상식의 최대공약수를 교양의 핵심으로 볼 것인가, 반짝이는 예지와 지적 정밀성에서 교양의 위안을 구할 것인가, 시선들이 엇갈렸다. 저자가 책의 단독 책임자인가, 편집자의 개입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가도 쉬운 결론을 허용치 않았다.

하지만 여러 갈래의 논의는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관심사를 반영하는 책들이 교양의 영역을 확장하는 길잡이로 떠올랐음을 말하는 것일 터. 그런데 길잡이라. 책에 대한 책이야말로 교양의 길잡이로는 제격이 아니겠는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우리 시대의 독서꾼 로쟈가 보여준 책 읽기의 황홀함 혹은 고통은 그가 일관성 있게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넘어서게 하는 힘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이 책을 수상작으로 선정한 것은 대중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그의 작업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

한정숙ㆍ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09.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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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14 23:02 
    오후에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박사학위 수여식이 있던 날을 제외하면 가족들의 꽃다발을 받아본 게 처음이지 싶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몇 사람 언급하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이 블로그를 아끼시는 분들과 <로쟈의 인문학 서재> 독자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국일보(10. 01. 15) "안팎 어려움 속 출판계 격려… 사회적 자랑"  "제 56년 출판 인생의 고비마다 한국출판
 
 
다락방 2009-12-18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립니다, 로쟈님!! :)

hnine 2009-12-1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읽고 넘어갈 수가 없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하루 아침에 터진 '대박'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보람있으시겠어요.
위의 기사중 하이라이트 해놓으신,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은 그 텍스트에 과한 글을 씀으로써 완성된다'는 말씀이 눈에 특히 들어옵니다.

순오기 2009-12-1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축하합니다.
12월 첫주문으로 샀는데~ 깐깐한 독서본능 끝내고 읽으려고요.^^

2009-12-18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스탕 2009-12-1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멋진 일이에요 ^^

토토랑 2009-12-1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지금 읽고 있는데 ^^*

무해한모리군 2009-12-1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긴세월 곰삭여 뽑아낸 작품인데 상받으셔야죠
축하드립니다 으흣^^*
참 영상, 사진 이런거 잘받으시는거 같아용~~~

eleos 2009-12-1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쟈님의 작업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많은 도움을 받고도 늘 눈팅만 해서 정말 죄송했답니다.;;
바쁠수록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목동 2009-12-1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제와 애정이 있는 저서였습니다. 우리는 상호 독자의 입장인데요. 선택의 독립성과 원활한 균형감 그리고 지적 호환성을 잘 유지한 저서라 생각했습니다.(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 감사합니다 **.

나비80 2009-12-18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하십니다. 로쟈님의 글을 늘 갈무리해가며 보고 있는 저로서도 영광이네요. 축하드려요!^^

비로그인 2009-12-1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인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를 읽을땐 소름돋는 공감을 느꼈습니다. 축하드려요^^*

쥬베이 2009-12-18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축하드려요!!

stella.K 2009-12-1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산체보고파 2009-12-1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늘 눈도장만 찍었는데, 한줄 안 적을 수 없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계속 좋은 등대지기가 되어주시길 바라며
새해에도 건승하십시오.

mcjhu 2009-12-18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2권도 기대합니다.^^

폭설 2009-12-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축드립니다.^^

종횡무진 막힘이 없으시던데... ^^
아마, 님의 신도수는 순복음교회를 능가하지 않을까 싶네요.^^

앞으로도 시베리아 원시림과도 같은
깊고, 넓고, 심오하고,
그리고 고독도 적당히 묻어나는 글 많이 쓰시기를~~~

게슴츠레 2009-12-18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로자의 저공비행"도 '무보수 중노동' 처지를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된 건가요?ㅎㅎ 앎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이래저래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수상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네파벨 2009-12-1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마노아 2009-12-1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을 멋지게 마무리해주는 의미있는 수상이네요. 로쟈님 축하해요.^^

수유 2009-12-1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Mephistopheles 2009-12-18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로쟈님..더불어 보내주신 책 잘 읽겠습니다..^^

L.SHIN 2009-12-1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 책을 보관함에 담고 말다니.

goghim 2009-12-1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받아 마땅합니다!!

딸기비누 2009-12-18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럴 것 알았어요~ 축하드려요!^^ 인문숲 강의도 기대할게요~~

침경 2009-12-18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생 댓글 한번 잘 안다는데,
정말 축하할 소식이네요.
축하 드립니다.

leopard 2009-12-1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노이에자이트 2009-12-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어떤 직함보다도 '우리시대의 독서꾼'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루체오페르 2009-12-1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그것도 다른 쟁쟁한 후보작들을 보니 수상이 더욱 빛나네요.^^

Joule 2009-12-1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명 저자 되시기 전에 로쟈 님 스튜디오나 사진 잘 찍는 친구 통해서 정말 로쟈 님 다운 사진 하나만 찍어두세요. 작가에게는 그 사람만의 사진이 한 장 있어야 해요. 수염이 안 난 에코와 프로이드, 지젝을 상상할 수 없잖아요. 그들은 아이 때도 젊었을 때도 항상 그런 모습이었을 것 같죠. 하루키의 최근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느끼한 중년 아저씨가 되어 버려서.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가 사진 찍은 스튜디오에서 자기도 프로필 사진 찍었다고 어느 수필집에서 자랑하던데 그 사진은 도대체 어디에 쓰이고 있는 건지.

카스피 2009-12-1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시페루스 2009-12-18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로쟈의 인문학서재"책을 다읽지는 않았지만 좋은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정된것을 축하드립니다.^^ 참고로 저는 처음 댓글을 달았습니다.

kimji 2009-12-1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저도 괜히 제 일처럼 기쁩니다^^

PhEAV 2009-12-19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얼떨떨하긴 하지만" 이라고 쓰신 것을 읽고 사진을 보니 사진도 왠지 그런 표정이신 것 같은 느낌이 ^^;;
정말 축하드립니다~

2009-12-19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9-12-1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우리들의 로쟈님인듯한 기분에 으쓱했는데...이젠 모두의 로쟈님이군여ㅎㅎ 넘넘 축하드립니다. 진짜 신나는 일이 많네요. 알라딘...여러가지 이슈도, 사건도 많고 올 한해 정말 근사한 소식도 많았슴다. 정점을 찍으신 것 거듭 축하요....제 수준에 안 맞는 거 같아 좀 미뤄두고 있는데...기어이 보긴 봐야겠군여 ㅎㅎㅎ

로쟈 2009-12-2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일이 답글을 달지 못하지만,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활약'까지는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2009-12-19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9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ti 2009-12-1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려요!!!!!

로쟈 2009-12-20 22:55   좋아요 0 | URL
감사.^^

stefanet 2009-12-19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축하드립니다.
기념(?)으로 사놓고 여지껏 시작하지 못한 로쟈님 책을 올해 안에 꼭 다 읽어야겠습니다.
다음달 한겨레 문화센터 강연때 뵙겠습니다. (제가 그 때 졸지 않기만을 바랄뿐...;;;;;;)

로쟈 2009-12-20 22:56   좋아요 0 | URL
흠, 졸지 않게 해드려야 할텐데요.^^;

jhokug 2009-12-21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로쟈 2009-12-21 20:0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09-12-2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축하드립니다(솔직히 놀랐음ㅋ). 같은 블로거로서 기분좋은 일입니다. "지식이라는 재화는 얼마든지 나눠 가질 수 있으니까요."- 이 말 맞습니다. 누군에겐가 차 한 잔을 사준다면 내겐 재화의 손실이 생기지만 지식은 누구에게 아무리 나눠주어도 전혀 손실이 없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 )( )이다." 바로 (지)(식)입니다. 만약 전쟁이 난다고 해도 재산을 빼앗기고 건강을 빼앗길 수 있어도, 지식은 그대로 가질 수 있는 재산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 사람의 고유한 가치라고 할 수 있지요. 앞으로도 지식을 나눠주는 일에 애써 주시길... 다시 한 번 축하 드립니다.

로쟈 2009-12-24 17: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지식의 공유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대학 등록금도 낮아지지 않을까라는 게 바람이기도 하구요...

homania 2009-12-2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사서 읽지는 않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었슴다..
어쨌든 독자는 독자. 축하날려요 ㅎㅎ

로쟈 2009-12-24 17:59   좋아요 0 | URL
어쨌든 감사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