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골의 웃음과 공포

이번주 주간한국의 '지식인의 서고'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고골의 대표작 <외투>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고교 독서평설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주간한국(09. 12. 17)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매학기 고정적으로 읽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명작’들입니다. 보통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슈킨부터 시작하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서 불가코프나 솔제니친까지 ‘투어’를 합니다. 이 거장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고골(1809-1852)입니다. 올해가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더더구나 그렇지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단편으로만 치자면 고골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외투>입니다. 페테르부르크의 한 하급관리가 어렵게 마련한 외투를 강탈당하고 죽은 후에 유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매년 다시 읽으면서 매번 경탄하게 되는 걸작입니다. 흔히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지요. 그만큼 러시아문학사에서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 작품입니다.   

한데, <외투>는 한편으로 자주 오해받는 작품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인도적 박애주의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시각에서는 이 작품의 주제가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작은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라는 아카키의 말을 인용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쪽에선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발견하고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간과하는 듯합니다.  

하급관리로서 아카키의 일이란 문서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쓰는 정서(淨書)입니다. 그런데 이 정서가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자 자족적인 즐거움의 세계였습니다. 그는 정서 외에는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아서,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글씨들만을 떠올리고, 근무가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음식에 파리가 붙었거나 말거나 요기만 하고는 다시 정서에 매달렸습니다. 정서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들이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겨울이 되어 페테르부르크에 사나운 북풍이 휘몰아치자 그의 낡은 옷은 더 이상 바람막이가 돼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없이 새 외투를 장만하게 됩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면서 아카키는 ‘욕망의 주체’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가령, 아카키는 외투 값을 마련하기 위해 그가 향유하던 모든 즐거움을 유보하고 포기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충만한 만족의 세계에서 영속적인 결여의 세계로 옮겨가게 됩니다. 욕망은 언제나 채울 수 없는 결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요.  

아카키가 새 외투를 마련하고 얼마 안 있어 강도들에게 강탈당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으로 보입니다. <외투>는 저에게 욕망이 몰고가는 파국을 보여주는 섬뜩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고골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우리의 파멸 또한 필연적이라구요. 무섭지요?  

09. 12. 19.  

P.S. 찾아보니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무성영화 <외투>(1926)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ki-zGGXIbH4&feature=PlayList&p=EC0B7D5C62078945&index=0). 나도 못 봤던 것인데, 감독은 그리고리 코진체프와 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이며, 시나리오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유리 트이냐노프가 맡았다(원작과는 좀 다르다). 오늘의 서프라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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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2009-12-1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투>의 마지막 장면은 "마술적 사실주의"<빌러비드/토니모리슨/들녁>라 할 수 있겠는데요.사람마다 하급관리(아카키)의 정서(淨書)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관료적 권력앞에 왜곡되고 맙니다. 권력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는 감시하고 의심합니다. 개인 또한 입장이 바뀌면 굴림하기도 합니다. 종국에 개인은 조직(관료)에 대항 뿐입니다.고골의 사랑(정서)을 지켜주던 '외투'를 잃어버리고 자존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저마다 하나의 끈을 붙잡고 사는 것처럼요.

로쟈 2009-12-19 23:0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카키에게서 정서와 외투는 다른 성격의 대상으로 봤어요. 먼댓글로 링크해놓은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외투 2009-12-20 07:38   좋아요 0 | URL
재봉사 '페트로비치'에 의해 새 '외투'를 갖게된 '아카키'는 박봉을 절약하며 본연의 업무인 '정서(淨書)'에 충실히 근무합니다. 문제는 '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새 외투를 강탈당하면서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 등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못된 관리의 권위(권력)에 의해 묵살당하고 맙니다. 결국 그는 스트레스로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나 외투를 뺐습니다. 우리의 '전설의 고향'의 귀신처럼요.

과연, 외투를 찾으려고 했던 '아카키'가 '욕망의 화신' 일까요? 여리고 단순한 영혼의 당연한 권한이 아니였을까요? 저자 '고골'이 '인간 욕망의 허구성' 목적으로 이 단편을 썼다면 그런 왜곡된 의도성이 독자에게 외면당하여 그의 마지막 작품이 실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의 것을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사회구조권력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개인의 존재가 무참히 사라지는 형국에서 '아카키'의 행위는 욕망보다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약자의 최후 저항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아카키'의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은 과(소비)욕이 아니라 헤저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당연한 소비(구입)의식과 평범한 구매였으며 강탈당한 약자의 억울함이라 생각했습니다.

Sati 2009-12-20 20:20   좋아요 0 | URL
요즘같은 날씨에 겉옷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아카키의 외투가 욕망의 대상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요, <외투>에는? 자발적 88만원 세대의 한 인물이 있다고 할 때, 그가 어머니의 수술비 5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끼니를 굶어가며 돈을 마련했는데 그 돈을 어이없이 강도에게 빼앗겨서, 어머니는 치료도 못받고 돌아가시고 본인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서 귀신이 된다면 그건 펠렉스님 말대로 억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만약 내 가족 건사를 위해 88만원 자족생활을 버리고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가, 부도라도 나서 홧병으로 죽는다면 그건 욕망의 희생양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로쟈 2009-12-21 22:04   좋아요 0 | URL
그게 작품에선 아카키가 전혀 다른 인물로 변화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전처럼 정서에만 빠져 지내는 게 아니라 길거리를 거닐며 여자의 다리가 그려진 간판에 눈길을 주고, 지나가던 여자를 괜히 쫓아가보기도 하는 식으로요. 외투도 분에 넘치게 고급스러운 것으로 맞추게 되죠. '바람막이' 수준을 넘는 것으로요. 그러니까 저는 외투를 마련하기 이전과 이후의 아카키가 전혀 다른 존재 양식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죠. 욕망을 가진(갖게 된) 주인공의 파멸은 고골의 작품에서 자주 나옵니다. <광인일기>의 포프리쉰이나 <넵스키거리>의 피스카료프도 모두 자기 욕망(판타지)의 희생자가 됩니다...

Sati 2009-12-20 21:2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서재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인걸요^^

외투 2009-12-21 21: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인스 2009-12-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이히의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원제 The Namesake)의 주인공이 '고골리'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게 된 경위가 주인공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로 이 작가의 이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고골의 <외투> 속에서 잉태된 아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마침 궁금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이름 뒤에 숨은 사랑>도 구해놓았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안 보이네요.^^;

Sati 2009-12-1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따가 <뉴문> 보러갈까 했는데, <외투>라니, 정말 서프라이즈네요. 오늘은 기쁜 일이 연발로... /^0^/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너무도 가까이에 있더군요.^^;

sophie 2009-12-1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재밌어요. 로쟈님한테 듣는 러시아문학 이야기 또 기다려지네요. 그나저나 모자달린 외투를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에궁..

로쟈 2009-12-19 23:03   좋아요 0 | URL
너무 큰돈은 들이지 마시길.^^

페크pek0501 2009-12-2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속에서 나왔다"라고 <외투>를 격찬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작품이 그 영향을 받은 작품이지요. 전 <외투>라는 작품을 이렇게 읽었어요. 민중의 힘없는 비참한 현실의 이야기이며 그런 가엾은 사람을 도와 주지 못하는 무력한 권력 이야기라고. 멋지게 장만한 외투라기보다는 억울하게 빼앗긴 외투로 봅니다. 외투를 빼앗기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아무도 도와 주지 않습니다. 순경도, 경찰서장도, 유력한 인사도... 그러니까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학(또는 예술)의 매력은 해석의 다양성에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는 게 옳은가, 하며 따지는 것보다 그저 많은 해석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흥미로운 작품이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요. 우리의 사고영역을 확장시켜 주니까요. 다른 해석이 많이 나오길 기대하며...

로쟈 2009-12-23 23:48   좋아요 0 | URL
네, 작품의 뒷부분만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한데, 고골 자신이 아카키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표현도 서슴지 않아서 해석이 복잡해집니다...

페크pek0501 2009-12-2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아카키는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서류를 정서하는 것을 좋아하며 살 땐 행복했는데, 그가 외투를 마련하여 세상에 나오자 불행이 시작된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개인의 영역에서의 삶에선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지만 한 걸음만 내딛어 밖으로 나와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면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죠. 혼자 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세상과 부딪히며 살기 시작하면 힘든 삶이 시작된다는 것. 저도 현재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만약 누군가가 제게 소송을 걸어 법(세상)과 싸우게 되면 제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식이죠. 힘없는 사람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 - (지금 생각난 것을 적어 봤을 뿐이며, 이런 제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로쟈 2009-12-23 23:49   좋아요 0 | URL
'개인의 영역 VS 세상'은 좀 모호하구요, 저는 '충동 VS 욕망'의 구도라고 생각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