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니콜라이 고골을 다룬 '갑론을박' 꼭지다. 당초엔 이번 봄에 <외투>에 대한 논문도 쓰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을 실현되지 못해 아쉽다. 탄생 200주년을 맞은 작가를 위해서 뭔가 더 할일을 찾아봐야겠다...  

고교 독서평설(09년 6월호) 보이는 웃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다

러시아 근대 문학의 토대를 닦은 작가, 고골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
이 한 대목만 가지고 작가와 작품을 떠올리기는 어렵겠지만,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의 걸작 단편 「외투」(1842)를 읽고 난 다음이라면 이 대목을 잊기도 어렵다. 이번 달에는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가로 불리는 고골의 문학 세계를, 그의 대표작 「외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동기는 충분하다. 올해는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토대를 닦은 고골이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고골은 과연 러시아 문학사, 더 나아가 세계 문학사에 어떤 족적을 남겨 놓았을까? 그의 문학은 어째서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는 것일까?   



‘웃음’과 ‘공포’의 환상적인 조화
고골은 1809년 4월 1일에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던 우크라이나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그 당시엔 ‘소러시아’라고 불린 우크라이나가 그의 출신지이고 고향이다. 그가 처음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작품집이 그곳 민담들을 소재로 한 <지칸카 근촌 야화(夜話)>(1831)인 것은 그런 배경을 갖고 있다. 고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지역의 소지주 출신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고골을 낳기 전 두 차례나 사산(死産)을 경험한 어머니는 자신의 불행을 다독이기 위해 더욱 독실한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어렵게 얻은 맏아들의 이름을 교회 이름을 따서 ‘니콜라이’라고 지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늘 기도를 드리던 어머니의 신앙은 미신적인 성향이 강했다. 아들을 각별히 사랑하면서도 그녀가 어린 고골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준 이야기는 주로 최후의 심판과 지옥의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미신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을 물려준 어머니와 달리, 아마추어 극작가이자 연극 애호가였던 아버지 바실리 고골은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문학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심어 주었다.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고 배우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고골은 연극에 대한 관심과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 나갔다.  

이렇듯 다소 이질적인 부모의 영향은 이후 작가 고골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러시아 사회의 속물성과 관료주의적 폐해를 풍자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함으로써, 고골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능이 진지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받았다. 덕분에 우리가 얻게 된 것은 ‘너무도 경쾌하고 코믹한 고골’과 ‘너무도 진지하고 우울한 고골’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작가의 이미지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는 잘 맞지 않는 과제, 혹은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과함으로써 고통을 자초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령 고골 창작의 전환점이 된 희곡 <검찰관>(1836)을 들여다보자. 이 작품은 지방 여행 중에 돈이 떨어져 여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한 하급 관리 흘레스타코프가,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검찰관으로 오인되는 바람에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린 5막 희극이다. 흘레스타코프가 떠나고 난 뒤에야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장과 지역 유지들은 분통을 터뜨리는데, 바로 그때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듣는다. 무대 위의 모든 인물들이 경악과 함께 몸이 화석처럼 굳어져 버리고 관객은 폭소를 터뜨리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막을 내린다. 한데, 고골은 지문에서 이 마지막 장면을 모든 배역이 거의 1분 30초가량 굳어 버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정지 장면’으로 처리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실제 공연에서 이 요구가 잘 지켜지지 않자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효과를 거두기 위해 그토록 이 장면을 강조한 것일까? 

<검찰관>에는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제사로 쓰였다. 고골은 자신의 작품을 일종의 ‘거울’로 간주했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보면서 마음껏 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동시에, 마치 거울처럼 관객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정지 장면에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고골은 관객이 그런 깨달음을 얻기를 기대했고, 그 깨달음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1분 30초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처음엔 웃음을 유발하지만, 차츰 그 웃음은 자신도 무대의 속악한 인물들과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과 더불어 공포로 바뀐다. 고골의 의도는 그 공포와 함께 관객들을 도덕적인 정화(淨化)와 참회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었다. 얼핏 상반되어 보이지만, ‘웃음’과 ‘공포’는 그런 점에서 고골 문학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다. 곧 그의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우스운 이야기면서 동시에 무서운 이야기다

충동의 인간에서 욕망의 인간으로 - 「외투」
머리가 벗겨진 중년 9급 관리의 불행한 이야기를 다룬 「외투」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단 작품은 기본적으로 코믹하며 언어유희적이다.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그런데,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그의 이름과 부칭이고, ‘바슈마크(구두)’라는 말에서 유래한 ‘바슈마치킨’이 성(性)이다. ‘아카키예비치’가 부칭이라는 사실은 아버지의 이름도 ‘아카키’였다는 걸 뜻한다. 곧 아버지도 아카키고 아들도 아카키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 후보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자 그의 어머니는 그냥 남편의 이름을 아이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란 이름에서 반복되는 ‘카카(kaka)’란 말이 러시아 어에서는 ‘똥’이나 ‘응가’를 뜻하는 유아어이기도 해서, 주인공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러시아 독자들은 묘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 가련한 주인공은 동시에 가장 우스꽝스런 주인공이기도 한 셈이다. “세례를 받을 때 아기는 울어 버렸고, 마치 9급 관리가 될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러시아 관료제는 18세기 초반 표트르 대제(1672~1725) 시대에 관료제 개혁 이후 14등관제로 개편되었으며, 9등관(9급)은 가장 대표적인 하급 관리에 속했다. 서류를 정서하는 일이 주된 업무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역시 9급 관리였다. 그는 사무실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이며, 경비조차도 그가 지나갈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저 파리 한 마리가 지나가는 정도로 여겼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짓궂게 놀려 댔다. 아카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팔까지 건드리며 정서를 방해할 때는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라고 애처롭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떨결에 남들을 따라서 아카키를 조롱하던 젊은 직원은 이 말을 듣고서 뭔가에 찔린 듯이 움찔했다. 거기엔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란 소리도 반향으로 묻어났다. 그 뒤 이 젊은이는 평생 동안 인간의 잔인함에 몸서리를 쳤다고 이야기의 화자는 전해 준다.     

사실 고골의 「외투」는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단편이면서, 또 가장 많이 오해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박애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이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한 시각에서는 작가 고골이 이 소설에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작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근거로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발견하고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정서는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어떤 사랑의 대상이었고, 자족적인 즐거움의 세계였다.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처럼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단순히 열성적으로 일한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그는 애정을 갖고 근무했다. 이 정서하는 일에서 그는 다양하고 즐거운 자신만의 어떤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아카키는 이러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정서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서, 옷차림 따위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필체로 쓴 글씨들만을 떠올렸다. 근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수프와 양파를 곁들인 쇠고기 요리에 파리가 붙었거나 말거나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간단히 요기만 하고는 다시 정서를 시작했다. 서류를 정서하기도 하고 취미로 필사본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일에 대한 열정만을 가지고 본다면 아카키는 5급 직책을 하사받을 만도 한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아카키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었다. 혹은 두 명의 아카키가 있었다. 평소의 9급 관리 아카키와 5급 관리의 열정을 갖고 정서할 때의 아카키. 정서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들이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렇듯 “즐거운 자신만의 어떤 세계”를 갖고 있는 인물이 동정의 대상이 된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정신 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정서하는 일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얻는 아카키는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인물이다. 충동(drive)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욕망(desire)과는 달리 어떤 대상의 주위를 맴도는 데서 만족을 얻는다. 곧 충동의 목적은 주체와 대상 간의 순환적인 경로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카키가 정서하는 일에서 느끼는 만족은 바로 이러한 충동에서의 만족이다. 이런 성격의 만족에는 외부적 현실이 필요하지 않으며, 따로 방해자만 없다면 언제까지라도 지속될 수 있다. “400루블의 급료로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한 인간의 평화로운 삶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아마 또 그렇게 순조롭게 말년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카키의 사회적 고립과 소외는 결코 불운하거나 불행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시각은 단지 외부적 시점을 투사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란 아카키의 항의는 그에 대한 조롱뿐만 아니라 동정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싶다. 그리고 그 항의의 또 다른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있으니 바로 페테르부르크의 겨울에 사납게 휘몰아치는 북풍이며, 이것이 그의 가장 강력한 적이기도 하다. 고골 스스로가 처음 페테르부르크에 상경했을 때 추위 때문에 크게 고생한 경험이 있으므로 남의 일만도 아니라고 해야겠다. 불행하게도 아카키의 낡은 외투는 더 이상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없어서, 그는 재봉사 페트로비치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새 외투를 장만하는 데 몰두한다. 곧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추위는 아무런 결핍도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만족해 있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외투 없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한다.  

새 외투를 욕망하게 되면서 아카키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변모한다. 그는 외투 값을 장만하기 위해서 지독한 내핍 생활을 감수하며 습관처럼 저녁을 굶는다. 요컨대,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그는 현재의 만족을 기꺼이 포기하고 유예한다. “그 대신에 미래의 외투에 대한 끝없는 이상을 머릿속에 그려 보며 정신적인 포만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결여된 상태에서만 작동하기 시작하는 욕망은 근원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충족될 수 없다. 새 외투를 장만하여 행복해한 것도 잠시, 아카키가 곧 불량배들에게 자신의 외투를 강탈당한 것은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파출소장과 고위층 인사를 찾아다니며 외투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관료제 사회의 몰인간적이고 사무적인 습성에 젖은 인물들에게 차별 대우만을 받고서 앓아누웠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료제 사회의 사무적인 무관심이 아카키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아카키가 충동의 인간에서 욕망의 인간으로 변신한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변신의 원인은 ‘페테르부르크의 추위’였다. 



피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공포
고골은 욕망을 가진 인물들, 곧 자신의 신분과 직분을 벗어나서 더 높은 사회적 지위와 숭고한 가치를 갈망했던 인물들이 파멸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이러한 욕망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그 주체를 떠나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도 욕망은 죽지 않는다고나 할까. 「외투」는 죽은 아카키의 유령이 자신의 외투를 찾기 위해 배회하다가 고위층 인사의 외투를 강탈해 간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그런 점에서 「외투」는 욕망의 섬뜩한 공포까지도 되새기게 해 주는 작품이다.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것이 욕망인 만큼 욕망의 세계에서 구원이란 없다. 때문에 고골의 세계에서는 욕망에 빠진 인간에게 구원의 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고골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 안에서는 그러한 계기를 찾을 수 없었다. 고골 또한 자신의 ‘외투’(창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불운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아니었을까. 

09. 06. 19.


댓글(8) 먼댓글(1)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고골의 '외투'가 말해주는 것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19 10:26 
    이번주 주간학구의 '지식인의 서고'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고골의 대표작 <외투>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고교 독서평설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주간한국(09. 12. 17)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매학기 고정적으로 읽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명작’들입니
 
 
반딧불이 2009-06-2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외투>를 하급관리를 통해 관료제를 비판하는 것으로만 이해했었는데, 욕망과 관련지으니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로쟈 2009-06-20 08:36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제 요점이에요.^^

펠릭스 2009-07-1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을 낭독해주는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읽었습니다. 낭독자의 생생한 목소리에 매료된 경우라지만, 하급관리로서 그의 소통방법은 정서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입니다. 같은 형제의 꿈이 공익성이 없다고 강탈당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고골의 <외투>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틀에 안주한 하급관리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자신을 잃게 되던데요.

로쟈 2009-06-21 10:31   좋아요 0 | URL
언제 낭독까지 나왔었나 보군요.^^

돈케빈 2009-06-21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와의 서신교환선>을 읽고.. 고골을 러시아 문학의 김구라로 임명하기로 했습니다. ^^;

로쟈 2009-06-21 10:30   좋아요 0 | URL
'김구'로 읽을 뻔했네요.^^;

지별 2009-06-2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골의 3부작 이런식으로 연극을 통해서 그를 만났는데...연출도 독특하고 때론 홀리거나 졸리거나~ 그래도 (뜬금없이) 체홉이 좋아요~

로쟈 2009-06-23 22:29   좋아요 0 | URL
변변찮은 인물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고골과 체홉이 상통하는 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