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의 의지와 민주화의 역설

사회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문학사회학자라고 해야 하나?) 김홍중 교수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9)이 출간됐다. 엊그제 산 책인데, 어제 한 송년모임에서 우연히 저자와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서문만 읽은 상태라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진 못했는데, 그런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면 몇 개 장 정도는 미리 읽어볼 걸 그랬다. 오늘자 한겨레에 책에 대한 리뷰가 실렸기에 옮겨놓는다. 주로 첫 장인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의 내용을 따라가고 있는 듯싶다.  

한겨레(09. 12. 19) '진정성’ 대신 ‘무사유’가 판치게 된 까닭 

타인을 누르거나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수치이자 슬픔으로 여겼던 감수성,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 못한 시대적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괴로워했던 마음을 광범위하게 공유했던 이른바 ‘진정성의 시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래와 함께 그 시대는 급속히 종말을 고했다.

“이제 진정성의 에토스를 전경으로 하는 삶은 낡고, 효율적이지 않으며, 안쓰럽고, 심지어 역겨운 것으로 비춰진다. 남아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386세대적인 냉소와 멜랑콜리의 가면 뒤로 숨었다. 그리고 도래한 세계는 속물과 동물들의 세계, 몰렴(沒廉) 또는 무치(無恥)의 에토스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다. 무치는 단순한 무례나 실례가 아니라 부끄러움의 실질적인 마비에 기초한다. 그것은 포스트-87년체제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뻔뻔한 당당함이다.”

웰빙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는 삶의 피상성과 천박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몰염치와 과시적 파렴치가 판치는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 정글사회. 사회학자 김홍중 대구대 교수는 그의 첫 저서 <마음의 사회학>에서 이런 우리사회를 스노브(속물)들이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 사회, 스노보크라시(snobocracy)의 사회라 부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 세계로의 이런 급작스런 집합적 심리 전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진정성 에토스 자체와 그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김 교수는 라이어넬 트릴링의 ‘신실성과 진정성’ 개념을 끌어온다. 신실성은 전근대의 도덕적 가치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이 실제로 욕망하는 것 사이에 어떤 단절이나 간극도 느끼지 못하는 태도다. 이에 비해 진정성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역할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에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이다. 뉴레프트적 지식인들은 진정성과 반란을 동일시했다. ‘진정한 나’의 추구는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실정치가 결합해야 비로소 가능하며 한국 사회에서 그 접합은 민주화와 386세대에서 최고도로 구현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진정성은 두 가지로 나뉜다. 윤리적 진정성과 도덕적 진정성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기초한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적 진정성과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참여적이고 공적인 도덕적 진정성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내면의 참된 목소리’를 듣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 윤리적 진정성은 망설임이며 주저이며 때로는 실천적 무능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공동체가 외적으로 부과하는 삶의 형식들을 통해 구현되는 도덕적 진정성은 사회가 인정하고 규정한 행위패턴이나 감정의 방식을 추종하고 모방하면서 집합체의 지배적 가치와 이상을 절대시할 가능성이 있다. 1997년 이후 체제가 도래할 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 둘은 전반적 시대정신의 결속력 아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 정점에 분신으로 표출된 요절과 열사들의 탄생이 존재한다. 살아남은 것이 추악한 것으로 인지된 것은 그때다.

“진정성의 세계에는 비극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정성의 실천이 죄와 고독 혹은 파멸을 야기하는 항상적인 급진성을 동반하게 되며,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는 세속에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괴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진정성의 고원한 이상을 쉽게 따를 수 없을 때 주체는 비진정성의 극단적 추구를 통해 진정성의 불가능성을 보상받고자 한다.”

1997년 이후 무한경쟁시장에서 살아남는 경제적 생존투쟁은 치부와 강박적 노동으로 이어지고 성공지상주의, 입신출세주의, 노골적인 속물주의를 낳았으며, 상품화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육체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무차별적 건강주의로 귀결됐다. 격렬한 순수에의 열망은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무너지면서 급속하게 타락하거나 전도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스노브(속물)의 최대 특성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아렌트가 말한 ‘순전한 무사유’다. 김 교수는 스노비즘 최대의 스펙터클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상투적인 죽음’에서 찾는다. 아이히만은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고 회오, 회심은 끝내 없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을 통제한 성찰성을 지니고 있던 아이히만은 바보가 아니라 영악했다. 하지만 그 성찰은 특정 지점에서 정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명령의 원천, 그 의미를 문제삼지 않는 도구적 성찰에 머물렀다. 성찰 그 자체를 성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횡행하는 스노보크라시하의 자기계발 담론들이 명령하는 도구화된 성찰성, 그 영악함도 아이히만의 그것을 닮았다. 김 교수는 의심하고 회의하고 주저하는 윤리적 비판에서 희망을 찾는다. 다만 비판의 주체 스스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스노비즘 비판 자체가 또다른 스노비즘으로 전락하는 역스노비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한승동 선임기자) 

09. 12. 19.  

P.S. 저자가 정의하는 '진정성(眞正性, aunthenticity)'은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19쪽) 이번에 알게 된 건 "서구의 경우 진정성의 문화, 진정성의 정치, 진정성의 윤리가 시회적으로 확산되고 공유되어 인정받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청년 대학생들의 '신좌파' 운동을 계기로 해서"라는 사실. 생각보다는 상당히 '젊은' 개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진정성'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된 것이 그다지 오래 되지 않는다(처음엔 낯설고 좀 어색한 단어였다). 기억에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에 대한 황종연 교수의 논의에서 '진정성'이란 말을 처음 접한 듯하다. 버먼의 책 가운데 <진정성의 정치>란 것이 있어서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십수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이 말의 용례에 대한 개념사적 추적도 해볼 만하겠다).  

김홍중 교수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진정성의 에토스, 혹은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체제)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형성되었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퇴조하였다. 즉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진정성의 모델이 현실적으로 융성할 수 있는 환경과 사회적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자연적 정글로 변화한 사회에서 가장 절박한 관심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 즉 '생존'의 문제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문제의식도 상기시켜주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현재 한국사회는 소위 '포스트-진정성 체제(post-authenticity regime)'로 진입한 것 같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 진정성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건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과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과 '동물성'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의 짝이 될 만한 것은 얼마전에 나온 서동진 교수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일 듯싶다. '자기계발의 의지'야말로 포스트-진정성 체제의 키워드라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말에 마땅한 독서거리를 원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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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9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2-19 12:35   좋아요 0 | URL
<마음의 사회학/김홍중/문학동네> 프롤로그에서 '이병헌' 주연 영화<달콤한 인생>에서 인용했던 문구도 나오더군요. 저서에 대한 느낌이 '슬라보예지젝'을 생각케 했습니다. 어제 전 총리가 출두하기전 한 스님의 자해행위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자해 사실성은 다른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되더군요. 그 다른 마음도 저자가 말하는 <집단표상>에 속할지도 궁금했구요.

로쟈 2009-12-19 23:06   좋아요 0 | URL
'참된 자아'는 사실 지젝의 '주체'와는 거의 반대되는 개념이어서 대조해볼 수 있을 듯해요...

사량 2009-12-19 16:21   좋아요 0 | URL
유용한 포스팅 고맙습니다. 그런데 최근 '진정성'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던 인물이 전, 현 대통령이라는 점은 아이러닉하네요. 한 사람은 FTA로, 다른 한 사람은 4대강 살리기로 말이지요. 그들도 "격렬한 순수에의 열망"으로, 확신을 갖고 밀어붙였다고들 하잖아요.-_-; (핫, 현 대통령과 '진정성'을 쳐서 검색해 보니 정말 화려하네요;;)

로쟈 2009-12-19 23:08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진정성의 정치'란 것도 사실 의혹의 대상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내면의 참된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한데, 책을 마저 읽어봐야겠습니다...